남내소
위치 : 효돈동 하효마을 효례교 북쪽 150m 지점 효돈천 절벽 하단
한라산 남사면을 대표하는 하천이자, 그 길이가 발원지인 한라산 정상에서부터 쇠소깍까지 무려 13km에 이르는 효돈천. 거대하고 신비한 기암절벽이 이어져 트레킹 명소로도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그 중에서도 남원읍 하례리에 이르러 모습을 나타내는 남내소는 규모와 깊이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효돈천에서 가장 크고 넓은 소(沼)로 알려져 있는 남내소에는 이루지 못한 슬픈 사랑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 하효동의 부잣집 외동딸과 머슴의 아들은 어려서부터 정을 쌓다가 사랑에 빠졌지만 신분의 벽에 부딪혔고, 결국 남자는 남내소에 몸을 던졌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여자는 그를 찾기 위해, 비를 내려달라 100일 간 기도를 올렸다. 거짓말처럼 큰 비가 내리며 남자가 떠올랐고, 여자는 죽은 남자를 꼭 부둥켜안은 채 남내소에 몸을 던졌다. 그 후 마을에서는 이 두 사람을 기리기 위해 할망당을 지어, 제를 지냈다고 한다.
남내소
남북 길이 70m, 동서 길이 40m의 소(沼)로서, 마을 옆 냇가 남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효돈천에서 가장 깊고 크고 넓은 소(沼)이다.
남내소에 대한 슬픈 전설이 전해오는데 지금으로부터 350여년 전 하효마을 사람들이 정착하여 농경사회를 이루고 살았던 시절 이야기다. 양반 주인집의 귀여운 외동딸과 그 집 머슴의 동갑내기 아들이 한 울타리에서 철부지 어린 시절부터 흙장난하고 신랑각시하며 살다가 성장하여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주인집 외동딸이 먼 동네로 시집가게 되었다. 이들은 양가 부모님께 둘이 장래를 약속한 사이임을 말씀 드렸으나 이를 허락치 않고 주인내외는 머슴 가족을 멀리 내쫓고 말았다. 머슴의 아들은 너무나 억울하여 효례천에 있는 ‘남내소’에 몸을 던져 죽고 말았다. ‘남내소’는 너무 깊어 여기에 빠지면 사람의 힘으로는 건져낼 수 없기 때문에 주인집 딸은 부모 몰래 매일 밤 자시(子時, 밤 열두시 전후)에 이곳 바위에서 비를 내려 주십사고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100일째 되는 날 밤에는 갑자기 큰비가 내려 ‘남내소’의 물이 넘쳤다. 물이 넘치자 총각의 시체가 떠올라 냇물을 따라 ‘쉐소’로 떠내려가 모래 위로 올라왔다. 처녀는 총각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슬피 울다가 바위 위로 올라가서 역시 깊은 소에 몸을 던져 죽어 버렸다. 마을에서는 처녀의 넋을 위로하고자 하효마을 동쪽 ‘용지동산’(하효마을 버스 종점에 있는 충혼비 서남쪽 동산으로 278번지)에 당을 마련하여 ‘할망당’(여드렛당)으로 모시고 있으며, 그 후로는 마을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밤에 제관이 할망당에서 ‘용지부인석’(龍旨婦人石)을 모셔다가 제단에 올려놓고 제를 시작한다고 한다.
하례2리 예기소(藝妓沼)
위치 : 서귀포시 상효동과 남원읍 하례2리의 경계인 효돈천(효례천)에 있다. 서귀포농업기술센터에서 서쪽 직선 450m 지점이다. 과수원을 지난 절벽 위 경사면 숲속을 지나면 예기소 위에 갈 수 있다.
유형 ; 자연경관, 전설유적
시대 ; 조선
영천악 동쪽 효돈천에 좁은 냇목이 있다. 건천이라 평소에는 물이 마르지만 깊은 웅덩이가 된 이곳은 항상 물이 고여 있다. 주변 절벽 높이도 10m 정도로 보여 가까이 가려면 발바닥이 근질거린다. 게다가 절벽 위에는 구실잣밤나무를 비롯한 상록수들이 햇빛을 가려 대낮에도 어둑하고 물은 검게 보인다. 이곳이 예기소이다. 일명 기연(妓淵)이라고도 하고 고냉이소라고도 부른다.
1918년 金錫翼이 쓴 탐라기년에는 영천관에 대하여 「조선 세조 12년(1466) 節制使 李由義가 旌義靈泉에 영천관을 創建하여 春秋에 馬匹을 점검하는 장소로 하였다. 그때는 대로가 없고 旅館이 없는 터라 제주의 月溪寺, 水情寺, 朝天館, 金寧所, 大靜의 法華寺 및 此館(영천관)에 머물렀다.」라고 記述하였다. 영천관과 예기소는 약 200m 거리이다.
한편, 하례2리에는 직사점마소가 있었다. 중앙정부에서 點馬司들이 오면 국마로서 많은 마필을 바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妓生(藝妓)들을 경치 좋은 이곳에 불러다 歡待를 하였다 한다. 여기에 외나무 다리를 놓고 그 다리 위에서 춤을 추며 興을 돋구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명종 때 서울에서 내려온 點馬司를 대접하기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소(沼)의 양쪽 바위절벽 위에 줄을 매고 그 줄 위에서 춤을 추던 기생이 실수로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떠오른 그 屍體는 靈泉岳 南쪽 기슭에 묻었다. 그 후로 관리들의 향연은 금지됐고, 사람들은 여길 ‘예기소’라 불렀다. 마을 주민의 말로는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곳 바로 옆에 ‘예기무덤’이 있었는데 밭 주인이 과수원을 만든다고 이장해 버렸다고 한다.
예기소
서귀포는 곳곳마다 아름답다.
서귀포농업기술센터 북측 삼거리에서 밭으로 이어지는 소로를 따라 500m 진행하면 왼편에 있다. 감귤밭 바로 너머로 거칠게 내려앉은 나무들과 무성한 풀들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됐음을 보였다. 날 것 그대로인 효돈천의 일부다.
이곳은 서귀포의 ‘한때의 영광’을 상징한다. 조선시대, 서귀포는 대정현과 정의현 관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일찌감치 소외된 지역이었다. 하지만 1467년(세조 12년), 대정현과 정의현의 중심인 이곳에 관리들의 숙박 장소인 ‘영천관’이 생겼다. 그곳에 묵던 관리들을 접대하던 장소가 바로 이곳, 예기소다.
“한때 절제사가 국마로 쓸 말들을 점검하러 올 때 ‘잘 봐주십사’하고 시중하던 곳이죠. 경관이 빼어난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기 위해 절벽을 잇는 밧줄을 매달고, 기녀(예기)로 하여금 그 위에서 춤을 추게 했어요. 그러다 기생이 발을 헛디뎌 떨어져 죽은 후로 관리들의 향연은 금지됐고, 사람들은 여길 ‘예기소’라 불렀답니다.”
한 기생의 슬픈 이야기가 아름다움 너머에 서린다. 깎아지른 절벽은 권력에의 야망을, 깊게 고인 물은 주민들의 애환을, 굽이굽이 펼쳐진 하천은 세월의 무상함을 넌지시 담는다. 비록 영광은 가버렸지만 빼어난 자태는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벼랑의 높이는 30미터는 족히 돼 보인다. 그 위로 상록활엽수림들이 하천을 사이에 두고 몸을 부대낀다. 이 일대는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이지만, 예기소만큼은 물이 잔잔히 고여있다. 그 위로 한 줄기 햇빛이 나무 잎사귀 그림자를 만든다.
영천관은 예기소에서 불과 200m 떨어진 곳에서 터만 남아 있다. 이곳에 머물던 제주목사 이약동(1470년, 성종 1년)은 주위의 운치를 탐복하며 노래했다.
남내소 상류 계곡으로 진입하는 지점인
서귀포시 남원읍 하례로 249 번지
위치도
효돈천 [예기소&남내소] 위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