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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의 정의
2024년 나해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복음: 요한 21,15-19
클레오파트라는 당대 근친혼으로 이복동생과 혼인했지만 로마 제국을 점령한 카이사르와 연을 맺었습니다. 이는 경쟁 관계에 있던 이를 물리치고 이집트에서의 정권과 안녕을 위해서였습니다. 둘 사이에 아들까지 낳았지만, 카이사르가 암살되자 자신이 그저 노리갯감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었습니다.
이제 로마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정권 다툼이 있었습니다. 이기는 편이 이집트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다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선택했지만, 전쟁에서는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합니다. 클레오파트라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장군직을 내려놓고 평민으로 클레오파트라와 내 가족을 살아가게 해 달라.”라고 청했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
처형될 것이란 옥타비아누스의 회신에 깊은 고민에 빠져있던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죽었다는 소식에 그 자리에서 칼로 자결합니다. 죽어가던 중 클레오파트라가 살아있단 소식에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기 위해 들것에 실려 만났지만 결국 그녀 품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를 두고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로부터 버림받았던 기억에 안토니우스의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죽었다는 헛소문을 퍼트렸다는 설이 있습니다. 결국 클레오파트라도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그의 죽음은 여전히 미스터리지만 독사에 물려 죽었을 것이란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클레오파트라는 살기 위해 로마의 두 황제의 사랑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만들려면 나도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목숨을 목숨으로 돌려줄 수 없는 이에게 투자한다면 그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인간이 그런 선택을 한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당신 양들을 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일은 당신이 하신 것처럼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입니다. 목숨을 건다는 말은 그 대상을 영광스럽게 한다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하느님은 본래 베드로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시기에 베드로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면 그분은 다시 베드로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아이들이 자기들에게 생명을 준 부모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공부를 목숨 걸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유혹이 끼어듭니다. 나의 목숨을 나에게 생명으로 되돌려줄 수 없는 이에게 내어놓는 일입니다. 하와는 뱀에게 영광을 돌리려 하였고 아담은 하와에게 목숨을 바쳤습니다. 이것이 유혹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연합고사를 마치고 중학교에서 마지막 시험을 치를 때였습니다. 이미 고등학교가 확정되었기 때문에 그 시험은 그저 형식적인 시험이었습니다. 이때 한 친구가 마지막 시험인데 자신도 점수를 잘 맞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별생각 없이 그러면 지우개에 해답을 적어서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걸려버린 것입니다. 손짓이나 뭐 그런 것으로 했다면 증거가 없었겠지만, 지우게에 답을 다 써 놓았으니 변명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때 딴청만 피우고 있던 선생님은 시험지를 찢고는 저의 따귀를 수십 차례 때렸습니다. 저는 좀 지나치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철저한 개신교 신자였고 그런 부정한 행위는 눈감아 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그 친구는 저에게 매우 미안해하였습니다. 그게 다였습니다. 저는 운이 좋아서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부모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도 등록금을 대주고 고생해서 공부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우게에 정답을 적어준 친구는 나에게 미안하다는 말밖에 돌려줄 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유혹입니다. 나의 목숨은 해답이 적힌 지우개였습니다.
사람은 어차피 살면서 자기 목숨을 어디엔가는 투자합니다. 그것이 삶의 의미가 됩니다. 돈이나 권력, 혹은 결혼에 투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것은 우리에게 생명을 생명으로 되돌려 줄 수 없습니다. 나중에 지옥에 가더라도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이처럼 되라고 합니다. 어린이는 무언가를 위해 사는 것은 생명을 내어놓는 일이고 그 생명을 내어놓는 일이라면 자기에게 생명을 준 부모를 위해 내어놓는 삶이 가장 합당한 투자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부모님을 위해 삽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우리는 이 지혜를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유혹에 빠져 의미 없는 것을 영광스럽게 하며 살아갑니다.
- 전삼용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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