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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마 25:31-46
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 25:31-46 / [마지막 심판] 인자가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를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때에 32) 모든 민족이 불려 나와 인자 앞에 모일 것이다. 그때 내가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 놓듯이 사람들을 갈라서 33)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둘 것이다. 34) 그리고 왕인 나는 내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받을 사람들아, 와서 천지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에 들어가라. 35) 너희는 내가 배고플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너희 집으로 따뜻하게 맞아들였다. 36)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와 주었다.' 37) 그때 그 의로운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이 배고프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렸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또 언제 주님이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도와 드렸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이 병드셨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왕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내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곧 내게 해준 것이다!' 41) 그리고 나는 왼편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 마귀와 그 부하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속으로 들어가라. 42) 너희는 내가 배고플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찾아와 주지 않았다.' 44) 그러면 그들도 대답할 것이다. `주님, 주님이 언제 배고프고 목마르셨으며, 나그네 되고 헐벗으셨으며, 병들고 감옥에 갇히셨던 일이 있었기에 저희가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 하십니까?' 45) 그때 왕이 말할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여기 있는 내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46)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히 벌받을 곳으로 쫓겨날 것이고 바르게 산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
언제 올 줄 모르는 종말의 천국을 준비된 자세로 깨어서 맞이하라는 교훈을 양과 염소의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열 처녀 비유에 이어 마지막 때에 맡겨진 책임과 의무를 다하라는 달란트의 비유에 이어서 마지막으로 종말에 오실 인자와 그를 통하여 악한 자를 심판하시고 의로운 자에게 복을 주시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31-33) 종말의 천국이 올 때에 인자가 천사들과 함께 반드시 오셔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십니다. 그리고 모든 민족을 모으시고 그중에서 복을 받을 자와 저주를 받을 자를 나누십니다. 우리의 삶에 대해서 하나님의 분명한 심판이 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34-40) 임금이 오른편에 있는 자들을 칭찬합니다. 자신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말씀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그리스도의 피로 형제된 지체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를 잘 실천하는 사람들이 복 받을 자들이요 나라를 상속 받을 사람입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41-46) 임금이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반대의 심판을 내립니다. 그들의 행동이 오른편 양들의 삶과 정반대의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그리스도의 피로 형제된 지체들을 사랑하지 않고 섬기지 않는 것이 곧 주님을 섬기지 아니하는 것이요, 저주를 받을 자들이요, 마귀와 그 사자들에게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갈 자들인 것입니다. 주님의 이러한 말씀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중히 여기고 자신의 삶을 잘 가다듬어 가야 할 것입니다.
적용: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섬기는 것을 하찮게 여기지는 않으십니까?
실로 인간의 영과 육신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 외에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외의 것을 두려워한다고 신학자 벵겔은 말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받을 환난이나 죽음을 예견할 때 엄청난 두려움으로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 한분만을 의지하고 그 분만을 두려워할 때는 영원한 생명과 의를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두려움에도 겁내지 않고 감당할 수 있습니다.
< 설 교 >
오른편 양과 왼편 염소
마 25:31-36 / 박성복 목사(동인교회)
오늘 제가 설교를 앞두고 기도하기를“주님, 오늘 설교가 좀 길 것 같은데 시험 되는 분이 좀 없게 해주시옵소서”라고 했는데 원래 건강한 사람은 밥그릇이 큰 걸 보고 좋아하지마는 병든 자는 밥그릇이 크면 놀라 기절합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건강한 자가 되어서 오늘 설교가 길어도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는 것 같이 느끼게 해 달라는 기도를 했다니까요, 제가 목회하면서 설교가 너무 길어서 오후 예배를 중단한 적이 딱 한 번 있습니다.
오늘 잘 들어주십시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장에 세상 끝 날에 되어질 일과 제사들이 어떻게 해야 될 것을 자세하게 말씀을 하시고 25장에 와서 모든 비유의 종결을 짓습니다. 25장에 와서는 신랑 맞이할 처녀가 어떻게 해서 맞이하게 되는 지와 또한 준비를 못해서 못 맞이하는 두 종류를 말씀하십니다. 1절서부터 13절까지의 열 처녀의 비유를 보면 신랑을 기다리는 사람중에 두 부류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이후 14절부터는 주님 맞이할 자는 그냥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충성하고 봉사하여야 된다라고 하면서 30절까지 달란트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런데 달란트 비유를 말씀드릴 때에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받은 자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고 마지막 마무리를 하시면서 주님의 재림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면 모든 비유가 끝이 납니다.
이 비유가 계속 거슬러 올라가서 마태복음 3장까지 올라갈 겁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31절서부터 46절까지의 말씀을 통하여 ‘과연 내가 복 있는 자인가? 양의 쪽에 속한 자인가? 염소 쪽에 속한 자인가를 스스로 분별하고 판단하기를 바랍니다. 마가복음 4장 33절 과 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아니하신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제 밤늦게까지 비유에 대한 것을 다 찾아보니까요 굉장히 많아요. 원하시는 분은 신청하면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 모든 비유를 배제하고, 내가 주님 앞에 설수 있느냐? 못 서느냐? 내가 양의 쪽인가 염소 쪽인가? 하는 이것만 가지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주님은 비유가 아니면 말씀을 안 하신다고 하셨는데 복음서에 나오는 비유들을 보면 천국에 대한 비유뿐이지 다른 비유는 없습니다. 그럼 어째서 천국에 가는 것만을 비유로 말씀했을까요? 제가 지난주에 설교했지만 제자들에게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이 되었으나 저들에게는 허락이 안 됐다”고 했죠? 그러면 알 사람은 알고 모를 자에게는 감추기 위해서 비유로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있는 자는 빼앗아서 더 넉넉하게 되지마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길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마태복음 25장에 한 달란트 받은 자가 빼앗기는 그 비유가 오늘 이 말씀에 와서 맞아떨어집니다. 잘 들어주십시오. 4복음서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인데 이 네 복음이 특색도 있고, 서로 비슷 비슷합니다마는 다른 것도 있고 아주 서로 독특한데 그 내용은 천국에 가는 말씀을 주님이 일러준 겁니다. 그리고 그 천국에 관한 말씀의 결론이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러면 신약의 다섯 권입니다. 그러면 묘하게도 이스라엘 백성이 창세기에서부터 신명기까지 모세 오경을 가지고 가나안 땅 가는 거나 오늘 우리가 4복음과 계시록 말씀을 가지고 천국 가는 거나 똑같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여러분은 이 땅에서 정붙이고 살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야 할 준비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제가 비유에 대한 말씀을 이제 정리해서 우리 성도들에게 가르칠 때가 왔다고 느껴졌기 때문에 정리를 한 겁니다. 주님은 생활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진리의 귀한 보물, 밭에 감춘 보화에 대한 비유를 했는데 이런 것은 천국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깨어있어야 할 것을 말하셨고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비유를 말하는데 “내 영혼아, 잘 먹고 잘 살자”고 하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했습니다.
그리고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안 된다’는 비유를 말하고, 탕자의 비유, 열 므나의 비유를 말하면서 ‘번개가 동편에서 서편까지 번뜩댄 것과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밤중에 찾아온 친구의 간청문제와 포도원 품꾼의 비유등 이런 것들을 정리해 보니까요 얼마나 많은지 제가 교회 올 때까지 정리를 다 못하고 왔습니다. 빨리 정리해서 우리 교인들에게 드리려고 정리를 하다보니 얼마나 비유가 다양하고 많은지, 저는 그렇게 많은 줄을 몰랐어요. 그러니까 기독교의 부흥을 말할 대 “천국은 마치 가루 서 말 속에 든 누룩과 같으니”라고 했고, 또 기독교 복음의 성장하는 것을 말하면서 겨자씨의 비유로 말했는데 하여간 주님이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몽땅 우리가 다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면 “아는 것이 너희에게 허락되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 아는 자들이 되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 본문에 보면 양과 염소를 나누는데 모든 비유의 결론입니다. 32절에서 33절을 보면 양과 염소를 나누겠다고 했습니다. 언제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라고 했으니 재림 때입니다. 한번 보세요. 성경 본문에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고 했습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가 잘못 생각하면 32절에 보면 모든 백성을 다 모은다고 그랬으니까 이 땅 위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를 다 주님 앞에 끌어 모으는 것 같이 생각되지만 아닙니다.
여기 구절은 모든 민족이라고 했기 때문에 오대양 육대주에 사는 모든 백성인 줄로 아는데 그 뒤에 보니까 안 믿는 이방인이 들어오지 않았어요. “내 이름으로 어려운 자를 돌아보고, 내 이름으로 먹을 것을 주고, 내 이름으로 마실 것을 주고‘라고 그랬죠? 안 믿는 사람은 그런 것 안하죠? 그들은 해당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비유의 전체가 기독교인에 대한 비유입니다. 여기에 모든 백성이란 어떤 백성이냐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이름을 가진 모든 백성입니다. 절간에 들어간 사람은 여기 해당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이슬람교도들이나 천주교도들도 여기에 해당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왜 해당이 안 됩니까? 4절서부터 5절을 쭉 보니까 이 오른편 양이 한 일이 있어요. 오른편 양이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됐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주었다고 했는데 옷을 주었다는 말은 구원의 옷과 의의 겉옷을 말합니다.
그리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다면 요한복음 7장의 진리의 생수를 줬단 말이거든요. 배고플 때 빵을 줬다는 말은 요한복음 6장에 생명의 떡을 줬다는 말이거든요. 그리고 또 마태복음 24장에 나오는 때를 따른 양식을 종들에게 나눠 주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해당되지 여기에 안 믿는 불신자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모든 족속‘은 이 땅의 모든 백성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원어는 ’판타타 에드네‘라고 했는데, 여기 에드네라는 말은 모든 족속이에요. 모든 백성입니다. 그러나 이 내용만 가지고 보면 모든 족속이 아니라 뒷 구절을 보니까 이건 하나님의 백성 중에 모든 백성이라 이 말입니다. 자, 그러면, 35절에서 45절까지 이것이 이방인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났죠? 이방인이 아닙니다. 믿는 자들 중에 나눠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방송을 듣고 있는 여러분. 또 지방에 계시는 여러분, 외국에 계시는 여러분, 여러분도 둘 중의 하나라는 말이에요. 그 사이는 없습니다. 중간은 없어요. 내가 양의 쪽이 아니면 염소 쪽입니다.
오늘 여러분, 이 말씀이 내게 와 닿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비유를 마지막으로 해서 마치시는데 이 말씀의 비유는 불신자에게는 해당이 안 되고 기독교인 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자는 양이고, 맞이하지 못할 자는 염소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을 자들이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한 나라를 상속받으리라”고 해 놨습니다. 여러분, 창세로부터 이 오른편 양을 위해서 예비한 나라가 따로 있다는 말이죠. 사망을 가져온 아담의 세상이 아닌, 예비한 나라가 또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나라에 골똘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창세를 위하여 예비한 나라를 놓고 예수님께서 늘 비유로 가르칠 때에 “천국은 마치, 천국은 마치”라고 하면서 비유로 말씀하신 겁니다. 천국에 관하여 주님께서 비유로 계속 말씀했는데 여기 이 천국이 어떤 천국이냐면 “너희를 위해서 예비한 나라”라고 했습니다. 믿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 65장 66절에나 베드로후서 3장과 요한계시록 21장에 새하늘과 새땅이 나오는데 그것들이 전부다 천국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지금 예수 믿고 죽어서 천국 갔다는 건 안 맞는 말이에요. 정말로 그 천국이 이렇게 좋으면 죽을 병이 걸렸을 때 병원에 가서 왜 수술하고 다합니까? 죽어서 가는 것이 천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고 죽은 영혼이 가는 곳은 낙원입니다. 정말로 천국은 주님 오실 때에 창세로부터 예비한 나라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요, 이것이 우리의 바램이요, 이것이 우리가 이 땅위에 사는 목적입니다. 나는 우리 성가대들도 찬양을 잘하지만 이런 것이 확 마음에 닿아야 되요. 우리교회 특기가 이거에요. 우리 교회의 소망이 이겁니다.
제가 늘 그러지 않습니까, 눈과 입은 잘 때는 닫아도 귀는 열어 놓는데 이는 우리는 듣는데 전문가가 되라는 거예요. 늘 귀를 열어놓고 말씀을 들어놓으라 이 말이에요. 그래서 이 귀의 두 구멍을 열어 놓은 거예요. 다른 거는 밤에는 닫을 때가 있지만 이 귀는 밤낮으로 들으라구 열어놓은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주님이 천국이라는 말씀을 계속하시다가 끝마침에 와 가지고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해 예비한 나라”가 있다고 했는데 이것이 천국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천국을 우리 주겠다는 거죠. 그리고 오른편의 염소는 뭐냐? 오른편의 염소는 이 나라에 들지 못할 자를 놓고 말힌 것입니다. 오른편의 양은 이 천국에 들어갈 자고, 왼편의 염소는 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자라는 말입니다. 왜 이렇게 나누느냐면 이제는 주님의 천국에 관한 비유의 결론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는 오늘 이 방송을 듣는 여러분을 위하여 예비된 나라인 줄로 믿기를 바랍니다. 양과 염소는 겉모양은 비슷해도 서로 다른 특징들이 있습니다. 제가 지난번 금요일 날 말씀 드렸죠. 이 양과 염소라고 하는 것은 같은 과입니다. 서로가 비슷하지만 특징이 다릅니다. 성격이 큰 차이가 납니다.
저는 시골에 있어봤기 때문에 양도 좀 봤고, 염소도 좀 봤는데 양은 절대로 목자를 따르려고 하는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는게 양이에요. 그리고 양은 털을 꼭 깎아줘야 됩니다. 잘 먹고 잘 자면 털이 북실북실 합니다. 그런데 그 털을 싹 깎아줄 때 목자가 잘못 깎아서 살에 피가 나던지 해도 전혀 가만히 있습니다. 그러나 염소는 절대 그렇게 못합니다. 양은 성격이 온순해가지고 죽여도 그렇게 발버둥 치지 않고 순하게 죽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 29절에 세례요한이 주님을 향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했습니다. 여기 세상 죄라고 그러면 그 단어가 ‘코스모스’로 우주인데 이 말은 우리 지구에 있는 인간들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진 속죄의 양으로 오신 어린양 예수를 보라고 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그 소리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미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목수의 아들을 놓고 무슨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하냐며 말이 안 된다는 거죠.
그래서 염소라는 놈은 전혀 전혀 다릅니다. 염소는 어떻게 고집이 센지 모르며 또한 양을 잘 떠받습니다. 아주 성질이 고약합니다, 자기를 앞세워 놓으면 주인을 자기가 끌고 가려고 설칩니다. 그리고 아무데나 제 마음대로 튀려고 하는 것이 염소입니다. 그리고 절대 목자를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염소는 불순종하는 자를 의미하고 그런 상징적인 동물을 말할 때 염소를 말했습니다.
자, 이제 제가 천국에 관한 비유를 여기서부터 거슬러서 마태복음 3장까지 올라갑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오늘 이 시간은 설교 시간인 동시에 내 신앙을 점검하는 시간입니다. 제가 쭉 나가면 여러분은 속으로 구분하시기 바랍니다. 열 처녀 중에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하면 다섯 처녀는 양이고 미련한 자는 염소구나라고 속으로 나누기만 하면 됩니다. 속으로 딱 딱 결정을 지으십시오. 이해되지요? 이제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이 거슬러 올라가면서 비유를 잘 판별하시면 내가 어느 쪽에 속해있는지도 알고, 이게 무슨 비유인 줄도 알게 되어있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양과 염소의 비유 앞에 무슨 비유가 나오냐면 달란트 비유가 나오지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등 재능 따라 줬습니다. 주인이 올 때 계산합니다. 먼저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열심히 장사해가지고 열 달란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올 때에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많은 것을 차지하라 주인의 즐거운 잔치에 참여하리라”며 초대받습니다. 또, 두 달란트 받은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칭찬받습니다.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을 네게 주리라”고 합니다. 여기 23절 24절 쭉 나옵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자에게는 엄청나게 책망합니다. 자, 그러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와 한 달란트 중에 양과 염소가 나옵니다.
여러분 이제 마음의 결정 났지요? 아, 그것은 염소구나. 이건 양이로구나 하고 나누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29절에 보면 뭐라 그랬습니까? 잘 보세요.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고 합니다. 한 달란트 빼앗기지요? 이것이 어디에 나오냐면 마태복음 13장에 주님께서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긴다” 고 그랬는데 여기와 맞습니다. 그런데 30절에 보면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대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했는데 이것이 한 달란트 받은 자에 대한 말입니다. 자, 그러면 두 달란트 받은 자도 칭찬했는데 양의 칭찬과 똑같고, 염소는 한 달란트가 책망 받는 것과 똑같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양과 염소중에서 염소에 속한 것이 가려졌죠? 누가 양이며 누가 염소인지 제가 가르쳐주기 전에 그만큼 가릴 줄 알지요?
자, 그 다음에 이제 또 한 계단 올라가면 마태복음 25장 1절로 13절까지 열 처녀 나옵니다. 다섯은 슬기롭고, 다섯은 미련합니다. 슬기로운 다섯은 신랑이 더디 올 걸 생각하고 예비한 기름을 가지고 신랑이 오도록 기다렸습니다. 신랑이 더디 온다는 것은 지금 은혜시대에는 주님이 안 오신다는 것이지요? 신원의 날에 주님 오십니다. 그러면 신원의 날에 불을 켤 것을 가지고 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랑이야!” 할 때 꺼져가는 등불에 기름을 부어서 신랑을 맞이했습니다. 또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등불에 기름이 꺼져가니까 기름 나눠달라 했으나 꾸이지 못하여 꾸러 갔으나 못 구하고 왔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데 여기는 나누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는 내 신앙, 내 믿음, 내 말씀, 내 충성을 가지고 내가 가는 길이라는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름 구하러 갔다가 돌아와서 “열어주소서, 열어주소서”라고 하I지만 안 열어줍니다. 두 종류입니다. 어느 쪽이 양이며, 어느 쪽이 염소인 줄 이제 결정이 납니다. 마태복음 25장 32절에 양과 염소를 주님이 나눠 놓은 것은 이것이 마지막 결론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이제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준비를 합니다. 비유는 여기서 결론으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열 처녀 중에 슬기로운 다섯은 신랑을 맞이하고, 미련한 다섯은 신랑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어느 것이 염소요, 어느 것이 양이라는 걸 이제 여러분 찾았죠? 슬기로운 다섯 처녀는 신랑을 맞이하여 혼인 잔치에 들어갔지만 신랑을 맞이하지 못하는 미련한 다섯 처녀는 바깥의 어두움에 쫓겨났다는 말인데 이것이 염소 쪽입니다. 이해가 되지요? 자, 그 다음에 마태복음 24장에 종의 심판이 나옵니다. 24장 45절에 보면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자가 누구냐?”고 했기에 양식을 받아먹는 성도가 있지요? 분명이 있습니다. 양식을 나눠주는 자는 주인이 올 때에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라고 하면서 충성된 한 종류의 종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48절에 보면 악한 종이 나오는데 이 악하다고 하는 단어가 ‘칼로스’인데 ‘부패한 종, 썩은 종, 못된 종’인데 그 악한 종이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하여 동무를 때리고 술친구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아니하는 날, 자 알지 못하는 시간에 종의 주임이 와서 저를 외식하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또 슬피 울고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자는 몇 달란트 받은 자와 똑같습니까? 한 달란트 받은 자와 똑같지요? 자, 그러면 이게 양이냐? 염소냐? 그러니까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자가 양에 속하는지 염소에 속하는지 알 것이며, 또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생각하고 술친구로 더불어 먹고 마시며 친구를 때리고 먹고 마시다가 생각지 않은 날에 주인이 와가지고 엄히 벌을 내릴 때 이 사람은 밖의 어두운 데 쫓겨나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했으니 양과 염소중 어느쪽인지 갈려지지요? 왜 25장의 양과 염소로 나누느냐면 이 비유가 결론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 앞에 자꾸 거슬러 올라가보니까 그 말이 이해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기독교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에요. 그 외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이해됩니까? 자, 그러면 생각지 아니한 날에 주인이 온다는 말은 주의 재림이거든요. 그럼 또 조금 올라갑니다. 마태복음 24장 41절에 보면 “두 여인이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마태복음 25장의 말씀과 맞춰보면 데려감을 당하는 그 사람은 창세로부터 예비한 나라를 상속받을 자지요? 맞습니까?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이 공부가 되고, 양식이 되고, 무기가 되어야 됩니다. 그리고 버려둠을 당하는 자는 어느 쪽에 속하는지 구분할 수 있죠? 두 여자가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고 그러면 데려감을 당하는 자는 양입니까? 염소입니까? 버리는 자가 양입니까? 염소입니까? 구분하실 수 있을 줄로 압니다.
마태복음 25장 32절과 33절을 중심하여 자꾸 올라가서 마태복음 22장 1절로 4절에 보면 혼인 잔치의 비유가 나오는데 먼저 유대인들을 불렀더니 “나는 밭을 샀다. 소를 샀다. 장가들었다”며 안 오니까 사거리에 나가서 만나는 자마다 데리고 오라고 하죠. 사거리는 동서사방을 말하는 것으로 은혜시대 역사입니다. 은혜시대에 모든 믿는 사람을 다 불러 모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임금님이 손님을 보러 왔습니다. 뭐 때문에? 예복 안 입은 자가 나옵니다. 반드시 그 잔치에는 예복을 입어야 되는데 예복을 안 입은 자가 있어서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았느냐?”며 “결박하여 바깥의 어두운 데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니라”고 했죠. 그러면 이것이 왼쪽이에요? 오른쪽이에요? 이를 갈고 있는 자 왼쪽이라는 말이고 예복을 입은 자는 오른쪽입니다. 그럼 오른쪽은 양이죠. 이렇게 계속 올라가 보니까 결론이 나오지 않아요? 제가 이것을 이번 주일에 여러분에게 막 전하고 싶어 했는데 이 말씀이 내 말씀인 줄 마음에 새기는 자가 있을 것이고, 또 안 새기는 자도 있을 겁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로 마태복음의 총 결론을 짓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비유가 아니면 말씀을 안 하신다고 하셨는데 그 비유가 얼마나 많은가 찾아보니까 꽉 찼어요. 세상에 그렇게 많은 줄 몰랐어요. 이것이 전부 마태복음 25장에 모든 비유의 마지막으로 결론을 맺었습니다. 이해가 되시면 크게 아멘 하십시요. 또 마태복음 13장 45절로 50절에 보면 그물을 치고 고기를 잡는데 그물에 고기가 가득 잡힐 때 물가로 끌어내옵니다. 물가로 끌어내 와서 좋은 고기는 그릇에 담고 나쁜 고기는 내어 버리느니라고 하면서 거기서도 고기가 두 종류 나옵니다. 자, 좋은 고기는 오른편 양 쪽에 속하고 못된 고기는 왼편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와같이 세상끝에도 의인 중에 악인을 나누리라”고 했습니다. 그럼 의인 중에 악인은 양에 속합니까? 염소에 속합니까? 의인 중에 의인은 양에게 속하고, 의인 중에 악인은 염소에 속하는 것이죠. 전부다 똑같은 말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마치”라고 하면서“내 아버지께서 창세로부터 예비한 나라가 있다”고 했는데 그곳이 천국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조금 올라가서 마태복음 13장 1절에서 8절 보면 씨 뿌리는 비유가 있습니다. 길가, 돌밭, 가시덤불, 그 다음에 옥토 밭에 씨가 떨어지매 옥토 밭에서만 백배, 육십 배, 삼십 배 결실을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길가나 돌밭, 가시덩굴은 왼편의 염소에 속하고 옥토 밭만이 양에게 속합니다. 전부다 비유는 주님이 이렇게 갈라놓더라고요. 그러면서 “천국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아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라고 했는데 이 말씀이 과연 우리 동인교회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으로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하는 말씀을 내가 믿어야 된다 이 말이에요. 저는 좀 안 바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어떻게 바쁜지 세상에 하늘 땅 밑에 나만큼 바쁜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주님 비유도 좀 알아야 되지, 이걸 또 가르쳐야 되지, 나 혼자 알면 쉬울 텐데 또 가서 소리 질러서 가르쳐야 되고 또 바로 듣는지 안 듣는지 봐가면서 가르쳐야 되죠. 몸도 맘도 얼마나 바쁜지 모릅니다. 그래도 제가 어젯밤에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주님, 우리 성도들 모두 받게 하시옵소서. 이 방송 듣는 분들 몽땅 받게 해주시옵소서. 비유가 아니면 말씀 안 한다 하시는 주님, 이 비유가 여기가 있군요. 여기가 목적이군요.”라고 하면서 그 비유에 대하여 정리를 해 왔습니다. 주님께서 그 비유를 마치고 이제 죽을 준비를 하십니다. 이제 이 정도면 알만 한 것들은 다 알게 될것이기에 이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게 될 줄로 압니다.
여러분, 또 보세요. 마태복음 7장 24절에 보면 또 “내 말을 듣고 지키는 자는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자와 같으니 비가 오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도 넘어지지 아니함 같을 것이요. 또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않는 자는 그 주초를 모래 위에 집을 짓는지요 비가 나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넘어짐이 심하니라”고 하면서 그 두 가지가 나왔습니다. 그러면 반석 위에 지은 자는 어느 쪽에 속하며, 모래 위에 지은 자는 어느 쪽이며 어디에 속하는지 여기에 나오잖아요. 이해가 되시죠? 그러기 때문에 또 거슬러 올라가면 마태복음 7장 13절 이하에 보면 좁은 길과 넓은 길이 나옵니다.
자,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은 길이요, 좁은 문이요, 찾는 자가 적지만 넓은 길로 가는 자는 많은 사람이 가지만 멸망의 문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넓은 길로 가는 자가 양 쪽이냐? 염소 쪽이냐? 넓은 길로 가는 자가 오른쪽이냐? 왼쪽이냐? 좁은 길로 가는 자가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여러분이 판단이 나오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확실히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마태복음 3장 11절에 보면 주님께서 “알곡은 자기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곳간에 넣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넣으리라”고 그러면 알곡과 쭉정이는 한 나무에서 자라지만 왜 쭉정이가 되느냐? 병들면 쭉정이가 되고. 새가 와서 까먹으면 쭉정이가 됩니다. 그리고 바람에 넘어지면 쭉정이가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 나라 갈 때 이런 쭉정이가 돼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놓고 여러분, 이제 비유의 결론이 들어갑니다. 이해가 됩니까?
여러분, 이렇게 천국에 관하여 전부 비유로 말씀 하셨는데 이제 결혼에 와서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을 자들이여”라고 나오는데 그러면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을 자는 누구냐 이 말이에요. 오른쪽의 양들이죠? 여러분, 왼편의 염소들은 심판받을 대상이라 이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주님 오실 때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했는데 오른쪽 양은 산 자요. 왼편 염소는 살았으나 죽은 자라는 말이에요. 여러분, 제가 수요일 날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걸 딱 음미하고 있는데 제가 참 맛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육의 양식은 우리 집사람이 챙겨주지만 내가 먹는 양식은 이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내 아버지께서 주시는 양식은 이 양식이 좋은 양식이거든요. 딱 그러는데 스쳐가는 게 있어요. 은혜시대 역사와 신원의 날의 역사를 나눌 때에 두 시대가 나눠지면서 알곡과 쭉정이가 나오는데 이것은 재림 때 되어질 상황이죠? 재림 때입니다. 그런데 초림 때도 이런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초림의 주님을 맞이하는 자는 알곡이었고, 율법시대 그 종들은 알곡이 아니였습니다. 종을 때리고 괴롭히고 그랬죠, 그러니까 여러분 보십시오. 초림의 주님 오실 때, 율법과 은혜시대로 나눠질 때에 율법시대 사람들은 은혜시대 사람을 공격했습니다. 율법시대 사람들은 메시야를 기다렸지만 못 맞이했습니다.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 시대를 깨닫고 준비한 베드로, 요한, 야고보, 바울등 사도들은 주님을 맞이 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과 은혜로 나눠질 때에도 두 가지 종으로 나눠졌습니다. 그러면 이 역시 오른쪽의 양은 바울과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되겠지만은 왼쪽의 염소는 율법시대의 제사장과 서기관등 율법시대의 그 사람들이 왼쪽의 염소가 아니겠습니까? 맞지 않습니까? 그러니깐 초림 때도 양과 염소가 있고 재림 때도 양과 염소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에스겔서 34장 17절에 보면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양 때 너희여 내가 양과 양사이와 수양과 수염소 사이에 심판 하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비유 아닙니까? 왜 하나님께서 무슨 짐승을 심판하러 옵니까? 마지막 때에 성도나 지도자에 대하여 심판을 말하는데 모든 민족을 주님 재림때에 나누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 때에 주의 종 만남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만날 때 바로 만나야 되고, 먹을 때 생명의 떡을 바로 먹어야 되는 거에요.
이제 결론부분에서 창세로부터 예비한 나라를 상속받을 자들에게 뭐라고 나옵니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라고 합니다. 여러분 아모스 8장 11절에 보면 “때가 이르니리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양식이 없어 굶주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얻지 못한 기갈이 온다”고 그랬죠. 그럼 마태복음 24장에 45절의 “지혜롭고 충성된 종이 되어 때를 따른 양식을 나눠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는데 그 사람 아닙니까? 목 마를 때에 마시것을 주었다고 하였는데 마태복음에 “소자를 위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면 하늘에 있는 상이 크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다”고 했는데 우리는 유리하는 나그네입니다. 고향 찾아가는 나그네입니다. 그리고 “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다”고 했는데 이는 이사야61장 10절의 “구원의 옷과 의의 겉옷”을 입혀주었다는 것 아닙니까? 지금 은혜시대는 의의겉옷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다음에 보면“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았다”고 했는데 옥은 뭡니까? 죄악에 사로잡혀서 죽음의 골짜기에 갇혀있을 때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구속의 은총을 받게 한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의인들입니다. 오른편에 있는 양이 의인이라고 심판주가 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의롭다하신 이가 계시니 누가 나를 정제하겠냐”고 했습니다.
그러면 마태복음 13장49절에 고기 중에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갈라내듯이 의인 중에 악인을 갈라내겠다 그랬죠. 그러면 의인 중에 의인이 이 사람 아닙니까? 그때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라대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우리가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 하였나이까?”라고 하죠. “언제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으며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심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돌봤나이까?”라고 하니까 임금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진실로 너희 의인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주님의 십자가 피로 맺어진 내 형제들에게 한 것이 꼭 나에게 한 것이니라”고 합니다.
그 다음에 왼편에 있는 악한 자에게 심판을 내립니다. 여러분, 이분들에게 저주를 받을 자라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마귀가 그의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한 불못에 들어가리라“ 그랬습니다. 의인들과 정 반대입니다. 그래서 악인은 영벌에 의인은 영생에 들어가리라고 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말하겠습니다. 여기 보면 35절부터 40절까지가 의인들이에요. 그렇죠? 그러면 41절에서부터 45절까지는 악인입니다. 이 사람들은 두종류의 종이죠? 두 종류입니다. 만약에 이사람들이 지옥 불에 가서 구원이 없다면 우편강도는 할 말이 없습니다. 우편강도는 이 사람보다 훨씬 못합니다. 그렇죠? 우편강도를 생각해 보세요.
또 고린도전서 5장에 보면 자기 아비의 아내를 취한자도 육은 사단에게 내어주고 영은 마지막 날에 구원한다고 했죠? 자 그러면 이것이 뭐냐면, 비유입니다. 오른쪽 양도 왼편 염소도 비유란 말이에요. 그러면 이 비유에서 오른편 양들에게는 영원한 나라를 보내지만은 왼편의 염소에게는 심판하여 영원한 불못에 가게 하는데 그 심판위에 또 심판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죠? 이 삼판위에 무슨 심판이 남아 있습니까? 백보좌 심판입니다. 백보좌 심판대에서 악인과 죄인, 불신자와 이방인등 모두를 부활시켜서 심판 받는 것이 마지막 천년 안식 지나서 심판이 이뤄지는데 오늘 여기는 주님 재림 때에 일어난 심판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오른편의 의인인줄로 믿습니다. 창세로부터 예비한 나라를 상속받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놓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놓치면 로또를 놓친 것 보다 더합니다. 꽉 내 마음에 그림을 그려놓길 바랍니다. 꼭 마음에 새겨 놓으시고 창세로부터 예비한 나라를 상속 받는 양들이 다 되기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최종 분류
마 25:31-46 / 박덕기목사
기독교의 역사관은 직선사관이라고 했습니다. 직선사관이란, 역사는 영원히 계속되는 것도 아니고, 또한 돌고 도는 순환사관도 아닌, 시작이 있었는가 하면 반드시 끝이 있다는 역사관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바로 이러한 직선사관을 따르는데, 이것을 다른 말로 종말사관이라 한다고 했지요. 성경은 물론 불신 세상 사람들까지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고 ‘말세’라고 개탄하는 이 시대에, 우리는 그동안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종말의 징조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세가 되면 1)거짓 선지자와 거짓 그리스도가 많이 나타날 것이다. 2)민족이 민족을 대적하는 내전이 많이 일어날 것이다. 3)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을 것이다. 4)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질 것이다. 5)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설 것이다. 6)복음이 온 세계에 전파될 것이다. 7)많은 사람들이 빨리 왕래하고 지식이 더할 것이다 고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것을 알 수 있듯이,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주님의 재림이 문 앞에 이른 줄 알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전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그리고 오늘본문인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서 교훈해 주셨습니다.
31절에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는 하나님의 영광과 함께 천군천사의 호위를 받으며 오셔서, 세상 모든 사람들을 심판할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다는 것입니다. 이 광경은 상상만 해도 참으로 장엄하기 그지없을 것입니다. 그 날에 세상 모든 사람들은 그 앞에서 두려워 떨게 될 것이며, 하늘과 땅에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찬양하는 소리만이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천지를 진동할 영광과 함께 심판의 보좌에 앉으실 주님이, 지상에 계실 때에는 어떠한 모습이었습니까? 주님께서 이 땅에 탄생하실 때에는 열렬한 환영도 없었고, 그분의 33년의 생애는 그야말로 초라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빌라도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실 때에도, 그분을 변호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이미 각본에 짜여진 대로 거짓 증거가 난무하는 재판에 의해,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신 후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이렇듯 이 세상에서 초라하고 비참한 삶을 사셨던 그분이, 세상 마지막 날에는 천하만국을 심판할 재판장으로서, 영광 가운데 심판의 보좌에 앉으시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인간들은 매사를 너무 쉽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인생을 평가할 때도, 어느 누가 재물이나 명성, 권력 등을 조금만 얻으면 이내 성공한 인생으로,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쉽사리 실패한 인생으로 낙인을 찍곤 합니다. 그렇지만 보십시오. 이 땅에서 가장 실패한 삶을 살았던 것처럼 보였던 우리 주님은, 세상 마지막 날에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영광의 자리에 앉아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며, 반대로 이 땅에서 권세의 자리에 앉아 주님을 재판하던 자들은,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주님의 처분을 기다리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상의 사실에서, 한 사람의 삶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이 땅에서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 마지막 날 즉 주님의 재림 때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마지막 때 주님의 완전한 평결이 내려지는 날 결정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의 삶의 모습이 세상적인 기준에서 어떠하든지, 결코 낙심하지 말고 흔들림 없이 말씀을 따라 신앙의 정도를 걸어야 합니다. 정녕 이 세상 마지막 때, 모든 진실이 드러나는 날, 진리를 따르는 모든 성도들은 천사들까지 심판할 영광의 자리에 앉게 되는 반면, 진리를 거스르던 모든 자들은 영영한 불 못에 던져지는 대역전이 일어날 것입니다.
32절에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같이 하여”라고 했습니다. 모든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도 있을 것이며,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어온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 백인들도 있을 것이며, 황인종도 있을 것입니다. 피부가 검어서 열등감에 사로잡혀 사는 흑인들도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나라별로 본다면 강대국의 국민도, 약소국의 국민도 모든 민족 가운데 끼어서 주님의 보좌 앞에 모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있기 전에는, 나라별로 민족별로 혹은 우세하고 혹은 열등감에 빠져 지내왔지만, 주님의 보좌 앞에서 모든 민족은, 한결같이 평등한 입장에서 주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1. 양과 염소를 분별함같이 하실 것
주님의 공의로운 보좌 앞에 모여든 모든 민족을, 주님께서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 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 날에는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며,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는 분리가 있을 것이라 경고하셨습니다. 농부가 곡식가운데서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듯, 어부가 그물에서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골라내듯, 영원한 대분리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열 처녀 비유를 통해서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미련한 다섯 처녀의 분리,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충성된 종과 악하고 무익한 종의 분리,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양과 같은 성도와 염소와 같은 무리의 분리가 있을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심판은 철저하고도 공의롭게 진행될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승복할 수밖에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 앞에 굴복하고 말 것입니다.
2. 양과 같은 신자는 오른편에 세우신다.
1)양은 온유한 자의 상징입니다.
양은 순하고 다투지도 않습니다. 온유는 단지 성품이 온순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온유는 본래 야생마같이 거칠지만, 성화된 인격으로 다듬어진 성품을 의미합니다. 온유한 마음은 예수를 오래 믿었다고, 세례 교인이라고 해서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본받고 성령의 감화를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습니다.
2)양은 순종하는 자의 상징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잘 압니다. 양 우리에서 양들을 불러낸 후, 목자가 앞서서 가면 양들은 그 뒤를 따라갑니다. 절대로 제멋대로 가지 않습니다. 목자가 가는 대로 인도하는 대로 따라갑니다. 양들은 타인의 음성을 들으면 따르지 않고, 오히려 도망합니다. 양은 오직 목자만 따르고 순종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자들을 주님은 구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3)양은 자기의 연약함을 아는 자의 상징입니다.
양은 목자가 없으면 결국 들짐승의 밥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이리가 쫓아오면 싸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목자만 바라보고 따릅니다. 자신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리석게 보이지만 현명한 처사입니다. 인간도 재산이나 지식이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보다 좀 뛰어나다고 해서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슬기로운 처녀나 미련한 처녀나, 모두 깊은 잠에 빠졌던 것처럼, 인간은 모두 연약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심판장 되신 주님께서는 오른편에 있는 자들을 향하여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고 하실 것입니다. 밤하늘의 별들을 관측하는 천문학자들은, 이 지구를 가리켜 은하계의 푸른 진주라고 부르며 극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무리 새로운 생명체를 찾아 별들을 관측해 보아도, 지구만큼 완벽하게 모든 조건을 갖춘 곳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푸른 하늘과 바다, 산과 강, 온갖 동물과 식물들로 채워진 이 아름다운 지구도, 또한 밤하늘의 빛나는 저 별들도, 불과 6일 만에 창조되었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그런데 불과 6일 만에 창조된 이 지구와 우주도 이토록 아름답고 완벽하다면, 창세로부터 준비하고 예비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축복은,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한 것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서,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결코 낙심하거나 슬퍼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로 천상의 가장 깊은 곳까지 볼 수 있었던 사도 바울은,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을 향하여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증거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미래에는 이처럼 놀라운 준비를 하시고 기다리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어떤 고난과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용기와 소망을 잃지 않는 굳건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창세로부터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는 양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산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이웃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가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한결같이 불우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다 인생고의 늪 속에 빠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천국을 상속받을 사람들은, 바로 이 불행한 사람들에게 마음을 쏟고 살아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시간과 재물을 바쳐, 이웃의 아픔과 불행에 동참하는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들이 한 봉사에 대하여, 기억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그런 일을 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본받아야 할 봉사의 정신이 있습니다. 이웃의 불행에 동참하는 희생적인 봉사를 하고서도 기억하지 않는 것, 그것이 복음적인 봉사입니다. 주님께서는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주님께서는 자신의 생명까지 우리를 위해 내어 주시며 봉사하셨습니다. 봉사자의 눈은 낮은 데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야 하고, 봉사자의 마음은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는 데 두어야 합니다. 그런 눈과 마음속에 하나님은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선한 사람들을 향하여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획기적인 인간관을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을 주종관계, 지배자와 피지배자, 강자와 약자, 부한 자와 가난한 자, 고용주와 피고용자의 관계로 파악하지 아니하고, 형제 또는 자매로 파악한 것은, 기독교 2천년 역사가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 중의 하나입니다. 인간을 형제로 보는 것은 인간은 평등한 존재라는 것이며, 사랑의 관계라는 것이며, 피차간에 결코 타인이 아니라는 사상이 거기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한 자에게 아첨하고 가난한 자를 무시하는 그리스도인, 강한 자에게 비굴하고 약한 자를 멸시하는 사람, 그러한 사람은 이미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3. 염소와 같은 신자는 왼편에 세우신다.
왼편은 저주와 형벌을 의미합니다. 왼편으로 구분된 사람들은 주님을 떠난 사람들로서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는 판결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과연 염소는 어떠한 동물일까요?
1)염소는 사납고 싸우기를 잘하는 자의 상징입니다.
양은 뿔이 없으나 염소는 뿔을 가지고 들어 받는 버릇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어린양은 순진하고 어진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나 멸망 받을 염소는 사나운 것이 그 특징입니다. 염소는 아무에게나 겁 없이 들이받습니다. 때로는 주님께도 또는 주님께서 보내신 기름부음을 받은 종들도 들이받습니다. 그러나 시 105:15절에는 “나의 기름 부은 자를 손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해하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염소는 불순종하는 자의 상징입니다.
양은 성질이 순해서 수천마리 일지라도 목자가 인도하는 데로 따라 갑니다. 그러나 염소는 제멋대로 가기에, 목을 매어서 잡아 당겨야 강제로 끌려갑니다. 염소의 특징은 고집입니다. 앞에서 목에 걸린 줄을 끌면, 두 발로 버티고 서서 오지를 않습니다. 아무리 당겨도 순순히 따라오는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도망쳐서, 주인의 의도대로 따라 주지 않는 것이 염소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씀대로 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의견에 대해 안하무인격이고, 자기의 주장대로 좌우충돌합니다.
3)염소는 교만한 자의 상징입니다.
염소를 묶어 놓으면 말뚝을 뽑기 위해 달음질하다가 줄에 걸려 넘어지고, 또 달음질하다가 넘어지곤 합니다. 그러다가 혹시 줄이 풀리거나 말뚝이 뽑히면, 쏜살같이 달려 가장 높은 지대로 올라가 소리를 지르는 습성이 있습니다. 다른 동물들이 자기를 쳐다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별 볼품도 없는 모습을 자랑합니다. 어린양 같은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겸손한 것이 특징입니다. 그러나 염소와 같은 신자는, 그 언행이 항상 교만합니다.
본문에는 염소로 구별된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산 사람들이며, 그 삶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양과 같은 신자들과는 전혀 반대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그들은 이웃을 위해 봉사하거나, 이웃의 불행과 아픔에 동참할 수 없었습니까?
1)죄에서 해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의 본성은 철저하게 이기적입니다. 모든 것이 자기 중심적이며, 그들에게 있어서 이타주의는 위선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이타주의자일 수가 있는가? 그것은 거짓이다. 이기주의야말로 인생의 진실한 삶의 모습이다.” 이것이 그들의 공통된 인생관입니다. 이것이 죄에서 해방되기 이전의 인간의 모습입니다. 속죄의 은총을 입지 못한 사람은, 결코 남을 위하여 희생하고 봉사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의 모든 위대한 봉사자들은, 모두 다 속죄의 감격이 그들로 하여금 자기희생의 봉사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2)혈연에서 해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죄에서 해방되지 못한 사람은, 혈연에서도 해방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자기와 자기 가족들뿐입니다. 가족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도 따지고 보면, 자기 사랑의 연장에 불과합니다. 동물들이 새끼를 사랑하듯, 그들의 가족사랑은 동물적인 것이며 본능적인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혈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결코 동물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고, 타인에 대한 봉사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을 받을 때로부터, 비로소 다른 사람을 위한 진정한 봉사자가 될 수 있습니다. 독일사람 ‘슈바이처’가 아프리카 흑인들의 친구로서 평생을 봉사한 것도, 영국사람 ‘윌리암 캐리’가 인도의 첫 선교사가 된 것도, 벨기에 사람 ‘다미엔’이 하와이 모록카이 섬에서 나병 환자의 친구가 되어 일생을 헌신한 것도, 우주적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인 것입니다. 동양에는 위대한 정복자는 있어도, 위대한 봉사자는 별로 없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동양 사상이 자기와 가족에게만 집착하게 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성도는 타인을 생각하는 만큼, 주님을 닮아 간다고 하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물욕에서 해방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죄에서 해방되지 못한 사람은, 혈연에서 해방될 수가 없으며, 따라서 물욕에서도 해방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위한 봉사가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기 전에는, 결코 물욕의 노예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물질 혹은 재물은 땀의 결정이며 삶의 열매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남을 위해 사용할 수가 있겠습니까? 인간의 본성으로는 전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서는 가능합니다. 성령이 충만해지면 그것이 가능해집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물을 주신 것은, 봉사의 기회를 주심이요, 봉사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심인줄 알아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다시 오십니다. 재림하시는 주님은 심판주로서, 모든 민족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 분류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 양과 같은 성도는, 비로소 최고의 영광과 안식과 택함 받은 자의 특권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현세의 건강이나 물질의 축복만을 간구하는 소극적이고 근시안적인 기복적 신앙보다는, 장차 하늘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안식과 복락을 고대하는, 찬란한 소망을 갖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참 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그 같은 믿음의 증거로, 어떤 모양으로든지 이웃을 위한 아름다운 사랑의 봉사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지막 날 주님으로부터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하는 말씀을 다 듣고, 최종 양과 같은 성도로 분류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작은이들의 벗이 되는 교회
마 25:31-40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다시 오실 때 있을 중요한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당신의 영광 가운데 모든 천사와 함께 왕으로 오셔서 당신의 영광의 보좌에 앉으실 것이며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본문 31-32절). 이것은 분명 최후의 심판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천하 만민을 당신의 보좌 앞에 모으신 주님께서는 그 중에서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하셨습니다(본문 33절). 양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짐승이었습니다. 따라서 양은 주님의 보좌 오른편에 염소는 그 왼편에 두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들과 그렇지 않을 사람들을 구별하여 세우시겠다는 뜻임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모든 사람을 양쪽으로 나뉘어 세우신 후 주님께서 양쪽 사람들과 차례로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으실 것인지를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주님께서 당신의 보좌 오른편에 서게 될 사람들에게 하실 말씀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다.”(본문 34-36절) 그러면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주님께 여쭙기를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본문 37-39절) 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본문 40절)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왼편에 서게 될 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다.”(마25:41-43) 하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주님께 따져 묻기를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하리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주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마25:44-45)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최후의 심판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작은이들 즉 굶주리거나 목마르거나 나그네 되거나 헐벗거나 병들거나 옥에 갇혀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돌본 사람과 돌보지 않은 자들을 각각 영생과 영벌에 들어가게 하는 심판이 되리라고 주님께서는 예고하신 것입니다(마25:46).
그런데 이 주님의 말씀에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이 말씀이 결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와 상치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우리가 예수 믿지 않아도 작은이들의 벗이 되어주기만 하면 구원받고 천당 간다는 뜻으로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구원받고 천당 가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되는 일임은 불변하는 진리입니다. 다만 믿음의 참된 증거는 작은이들의 벗이 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영생으로 들어가느냐 영벌에 처해지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선행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달렸다는 것이 성령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구원의 도입니다. 다만 참으로 하나님에 의해 택하심을 받고 믿음을 갖게 된 사람은 스스로는 선을 행할 수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선을 행할 수 있게 되고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행위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믿음 때문에 거저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은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여 선한 행실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힘쓰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다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롬3:28, 갈2:16)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서(2:17, 26)의 말씀이 모순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도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영생과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을 것이라고 쓰기도 했습니다(롬2:6, 7, 10). 로마서의 말씀이나 야고보서의 말씀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것임을 우리는 재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율법의 행위나 인간적 선행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행위로써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했습니다(롬2: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을 행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행을 보시고 우리를 구원에로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구원에로 택하시고는 우리에게서 선행을 보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선행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사람은 선행을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선행을 조건부로 하는 구원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무조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을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작은이들의 벗이 됨으로써 구원 받는 것 아닙니다. 그러나 미천하기 짝이 없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 조건 없이 살리셨으므로 우리도 우리 주변의 작은이들에게 조건 없이 벗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금은보화보다 더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몸이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려 찢김으로 우리가 사죄와 구원과 영생의 선물을 받았다면 우리에게 있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물질이나 건강이나 재능이나 시간을 이웃을 위해 나누는 것을 아깝게 여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창세로부터 예비된 하나님나라에서 복된 삶을 영원히 누리게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뜻대로 행했는지 아닌지에 따라 우리가 최후의 심판 때 오른 쪽에 서게 될 사람인지 왼쪽에 서게 될 사람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뜻에서 우리 교회는 2013년의 교회표어를 <작은이들의 벗이 되는 교회>로 정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작은이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금년은 우리 교회의 새 성전 건축이 시작되는 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작은이들의 벗이 되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더욱 힘쓰는 한 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주변의 작은이들을 살피는 우리의 눈길이 가지 않으면 안 될 곳이 있습니다. 바로 북한입니다. 북녘 땅의 우리 동포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굶주리거나 목마르거나 나그네 되거나 헐벗거나 병들거나 옥에 갇혀 어려움에 처한 이들이 곧 작은이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땅에, 아니 이 지구상에 북한의 동포들보다 더 많이 헐벗고 굶주리며 병들고 먹고 살기 위해 탈북하여 중국 땅에서 유리방황하며 툭하면 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하거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허기와 중노동에 시달리다가 죽거나 잔인하게 맞아죽는 사람들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보다 더 작은이들이 또 어디 있단 말입니까? 그들이 누구입니까? 우리와 같은 땅에 살며 같은 말을 써온 지구상의 유일한 동족 바로 우리의 형제자매들입니다. 우리가 이들의 벗이 되어주지 않으면 누가 그들의 벗이 되겠습니까? 그들을 위한 기도를 그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들을 돕는 일에 인색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들의 벗이 되는 길을 피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복된 삶을 약속받은 우리에게 주어진 당연한 도리를 다하는 이 한 해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소 명
마 25:31-46 / 배영진 목사
오늘은 소명에 대하여 설교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가 이 땅에서 무엇을 하게 하시려는 것인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봅니다. 오늘은 우리 개인의 소명을 생각해보고, 다음주일은 우리 하늘문교회에 하나님이 명하신 소명이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소명이란 영어로 calling이라고 합니다. 부르심입니다. 아무 일없이 부르시는 일은 없습니다. 회사에 가면 내가 할 일이 있습니다. 아무 할 일없이 회사에 채용되지는 않습니다. 출장을 떠나면 그 출장팀이 반드시 해내고 돌아와야 할 미션이 있습니다. 소명이란 하나님께서 이땅에 살고있는 나를 부르셔서, 바로 나에게만 해당되고, 내 인생을 사용하여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 나에게 주시는 인생명령입니다. 노아의 소명은 홍수를 대비하여 방주를 짓는 일입니다. 모세의 소명은 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라는 것입니다. 요셉의 소명은 내 백성을 이집트로 데리고 와서 큰 민족으로 되게하라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소명은, 광야에 외치는 소리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여기 오셨다 가리키는 일입니다. 그래서 소명의식은 청지기 의식입니다. 출장간 팀은 회장님의 일을 대신 하라고 보냄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제럴드 싯처의 하나님의 뜻을 읽으시면 많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 인생 마지막날, 세상끝날 마지막 심판 얘기가 나옵니다. 주님 앞에서 의인들이 잘하였다고 크게 칭찬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가 하면 악인들이 주님앞에서 심하게 책망을 받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칭찬과 그 책망의 평가기준과 평가의 결과입니다. 바로 어떤 것을 했는가? 소홀히 했는가? 그걸 기준으로 영원한 형벌과 영원한 생명을 받는 것입니다. 46절을 한번 보시면 영원한 형벌과 영원한 생명으로 나뉩니다. 왜 의인들은 그렇게 크게 칭찬을 받고 영생으로 들어가는지, 왜 악인들은 그렇게 심한 책망을 받고 영벌로 들어가는지오늘 깨닫기 원합니다. 이것이 소명과 관계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마지막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으로, 우리 모두 그날을 다 맞이하게 될 것이므로, 오늘 이 장면을 주목해야 합니다. 31절, 인자가! 이것은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키시는 말입니다. 영광의 보좌에 앉아 양과 염소로 나눕니다. 33절, 양은 오른쪽에, 염소는 왼쪽에, 그런데 34절, 오른쪽에 앉은 이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창세전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너희가 차지하여라! 41절, 주님이 왼쪽에 앉은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 마귀와 그 졸개들을 위하여 준비한 영원한 불못으로 들어가라 하십니다.
우리가 오늘 큰 오해 하나를 풀고 가야 합니다. 예수믿으면 구원받는다! 아멘!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얻으리로다! 아멘! 맞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삶에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영생으로 들어가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난 예수믿습니다! 주님을 영접합니다! 이 믿음이 단지, 내 입술로 고백만 하면 천국간다 이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말씀은 이것을 강조합니다. 예수믿는 것은 내 인생에 예수영접 이후에 그냥 아무 것도 안해도 천국티켓 땄다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이 오늘 이 말씀을 우리의 선행으로 천국간다 하는 말로 뒤바뀌지 않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믿음과 행함을 두개로 분리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늘 주님이 너희는 오른쪽에 앉으라, 그리고 영생으로 들어가라, 너희들은 복 받은 자들이다 이 칭찬을 받은 이들이 무슨 행함이 있었는가 살펴봐야 합니다. 왼쪽에 앉은 이들, 주님이 너희는 영벌로 들어가라 하신 자들이 인생에 무엇을 소홀히 하고 외면했는지 알아야 합니다. 저는 오늘 이 비밀을 소명으로 풀어보려는 것입니다.
자 35절입니다. 35-36절을 읽겠습니다. 이것이 의인들이 집중해서 한 일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가 주릴 때 내게 먹을 것을 주었다.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었다,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었다, 내가 병들었을 때 돌봐주었다, 갇혀있을 때 찾아주었다! 이것입니다. 그때 의인들이 깜짝 놀랍니다. 주님 우리가 언제 그랬나요? 우리가 언제 주님 배고프실 때 먹을 것 드렸나요? 의인들은 자기 눈앞에 보인 배고픈 자를 보고, 먹여야될 것 같아 밥사먹였는데, 그 배고픈 자가 주님이신 것을 몰랐습니다. 여기에 주님의 대답이 40절입니다. 40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여기 내 형제자매, 지극히 작은 자에게 너희가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소명입니다. 내가 돈을 벌어야 할 이유가 내가 먹고사는 것, 거기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나도 먹고 살아야지요. 내 자식도 먹여야 됩니다. 하지만 내가 돈버는 이유가 돈자랑이거나 단지 나와 내 가족 잘 먹이자 여기서 끝나서는 안되는 이유가 지금 이것입니다. 주님이 지금 말씀하신 것, 내가 번 돈으로 뭐했다구요? 내 옆에 배고픈 사람을 어떻게 먹일 것인가? 이것이 여러분이 돈벌어야 할 이유라는 것입니다.
42절부터 보면 이 소명의식이 결핍된 이들이 나옵니다. 주님은 이들이 소홀했던 것이 뭔지, 알려주십니다.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 내가 목마를 때 물을 주지 않았다. 내가 나그네로 찾아갔을 때 환대를 해주지 않았다! 내가 헐벗고 있는데 모른 척 했다! 내가 병들어 아플 때 너희가 모른 척 했다! 내가 갇혀 있을 때 그냥 지나쳤다! 그들이 깜짝 놀랍니다. 주님께 물어봅니다. 아니 언제 그러셨을까요? 주님이 배고프신 걸 우리가 보고 지나쳤단 말입니까? 주님이 언제 목마르셨고 언제 헐벗었고 언제 병들어계셨고 언제 갇히셨습니까? 이들은 정말 놀랐습니다. 황급히 해명을 하고싶어 합니다. 주님 주님, 저희들의 입장은 이건데요, 정말 오해이십니다. 주님이 그런 상황에 계셨다면 응당 저희가 대접해드렸어야 하죠. 우리는 주님을 정말 잘 섬기려고 엄청 애쓰고 살았습니다. 주님이 그런 상황이시라면 우리가 왜 그냥 지나쳤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이 안타깝게 대답하십니다. 45절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너희가 지나치지 않았느냐? 그것이 바로 나를 지나친 것이니라. 여러분, 이 말씀 귀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 날 우리 다들 많이 놀랄 것입니다. 우리가 무심코 외면하고 지나친 상황, 그때 그때를 주님이 하나 하나 다 언급하실 것입니다. 내가 좀 바빠서 그냥 지나쳤는데, 바로 그 상황이예요. 그게 뭐였다구요? 바로 주님이 너 이리 좀 와봐라! 내가 배고프다, 내가 목마르다. 내가 옷이 없다, 내가 아프다! 내가 많이 외롭다! 앗 그 상황이? 그게 우리 주님의 손짓이었다구? 아 그럼 그렇게 말씀을 하시지! 주님이 확실히 나를 부르셨으면 내가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갔겠지, 안그랬겠어?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그게 주님의 부르심이 아니었다구.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예수믿고 주님이 주신 소명을 알고 실행에 옮기며 살았는가? 소명없이 그냥 나만 생각하고 살았는가? 우리는 주님의 책망을 받은 이들이 왜 배고프고 헐벗은 이들 보고 지나쳤을까 생각해봅니다. 이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이들에게 한가지 내면의 질병같은 것이 있었어요. 그것은 뭐냐? 어차피 남이야! 너는 너고 나는 나야! 배고픈 것, 헐벗은 거는 니 문제고, 내가 꼭 관여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해! 왜 꼭 내가 도와줘야 돼? 왜 내가 널 반드시 보살펴줘야 돼? 너는 너고 나는 나라구! 이 생각인 겁니다. 이것이 가장 문제가 된 생각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타락한 후 가장 크게 부서지고 깨져버린 생각이 공동체입니다. 둘이 하나됨, 셋이 하나됨, 하나님은 가정을 만드실 때, 둘이 하나되라는 소명을 주셨습니다. 너희 둘이 하나되라, 그럼 끝이다! 이게 아닙니다. 그게 시작입니다. 너희가 둘이 하나되면 행복하고, 그러면 힘이 나고 둘이서 시너지가 생길거야, 그럼 너희 행복으로 누군가를 초대해라. 그게 자녀입니다. 그래서 둘이 하나되어 셋을 만들고, 너희 식탁으로, 너희의 행복으로 또 다른 사람, 배고픈 이들 불러! 이것이 바로 한 가정이 하나님께 받은 소명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하고 에덴에서 쫒겨나면서 가장 크게 고장나버린 것이 뭐냐? 공동체, 하나됨입니다. 공동체의 상실입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받아주는 것, 담당해주고 책임지는 것, 공동체의 원리거든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간에게 너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너는 너, 나는 나! 이렇게 살아서는 안된다, 이걸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생명을 주시고 태어나게 하신 그 뜻, 이 명령이 소명입니다. 내가 무엇을 열심히 잘해서, 뭔가를 이루게 되면 그것을 갖지못한 이들에게 어떻게 도움을 주고 어떻게 이들을 행복하게 해줄 것인가? 내 인생을 통하여, 특히 내가 가진 무엇, 재능이나, 기술이나, 달란트나 은사나.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셨는데,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가지고, 그것을 갖지 못한 이들에게 어떻게, 어떤 형태로, 나누어주고 살 것인가? 이것이 바로 소명입니다.
바로 이 소명을 의인들은 깨달았고, 소명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마지막날 주님이 언급하신 것입니다. 너로 인하여, 네가 도와줘서, 배고픈 이들이 배부르게 먹었어! 목마른 이들이 벌컥벌컥 마셨어! 헐벗은 이들이 네가 사준 옷을 입었어! 그렇게 행복했어! 병들어 누워있는 이들이 네가 찾아가서 위로 받았어! 감옥에 갇힌 것처럼 답답한 이들이 너의 보살핌으로 그 마음이 시원해졌단다! 의인들은 무슨 생각을 한 것입니까? 이들은 그냥 배고픈 이들을 보고 지나치지 않았어요. 헐벗은 이들을 보고 지나치지 않아요. 왜요? 내 것으로 그들 먹이는 일이 그들의 일상입니다. 별 큰 생각도 없었어요. 늘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삶의 원칙입니다. 내 것으로 그들을 입히는 일이 생활이었단 말입니다. 이걸 부모들이 그리 하니까 그 집 자녀들도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교육받았어요. 그래서 한 거예요.
사실 이들은 아~ 이 상황, 저 사람 바로 주님이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이들도 역시 마지막날 놀랐거든요. 너희가 먹인 배고픈 이들, 너희가 입힌 헐벗은 이들, 너희가 찾아간 갇힌 이들, 이들이 곧 나였다 주님이 그 말씀 하셨을 때 의인들이 깜짝 놀랐잖아요? 그러면 이들이 왜 그런 건강한 생각을 하고 살았는가? 소명의식이었습니다. 성경에 많이 말하는 것이 뭐예요? 손을 펴라. 내가 뭘 가졌다면 갖지못한 이들과 나누자, 내가 무엇을 누리고 있다면, 그걸 누리지 못하는 이들과 나누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이 생각이 맞았다는 거예요. 그게 그 사람들 인생에 주님이 너무나도 기뻐하신 생각이었다는 거예요. 주님이 마지막날 큰 상급을 주실 삶이었다는 거예요. 그들이 바로 주님이셨다는 거예요.
제럴드 싯처는 소명에 대하여 명확하게 설명합니다. 소명이란 나의 시간과 에너지와 재능을 세상에서 주님을 섬기는데 사용하라는, 주님이 주신 삶의 목표다! 그러니까 내 재능 내 물질 내 시간 내 에너지, 주님섬기는 데 사용하는 겁니다.
소명은 그래서 마치 손가락 지문처럼 나만의 독특한 것입니다. 소명은 내 기질과 재능과 인생경험으로 점점 명확해집니다. 내가 잘하는 것, 내 재능, 그런데 내 인생경험, 잘한다고 인정받은 것 뿐 아니라, 동시에 안좋은 경험이나 상처까지도 소명이 될 수 있습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 내 과거 상처가 되는 일을 통하여 소명을 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럴드 싯처는 음주운전 차량의 돌진으로 자기 차에 타고 있던 아내 린다, 자기의 어머니, 넷째 딸을 현장에서 사고로 잃어요. 그 아픔을 이루 말할 수 없어요. 그런데 그 아픔을 딛고, 이 절망적인 시간에 성도는 어떤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나? 생각하면서 책을 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기도에 침묵하실 때, 하나님 앞에서 울다, 이 세권의 주옥같은 책을 펴냅니다.
미국의 교도소 재소자를 돕는 사역을 하는 찰스 콜슨이라고 있습니다. 닉슨대통령이 워터게이트 도청사건에 휘말려 대통령직을 사임했는데 그때 찰스 콜슨이 닉슨의 참모로 그 심부름을 하다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감옥에 갑니다. 그가 가장 어려운 시간, 감옥에 가기 직전에, 주님께 자기 삶을 헌신합니다. 그래서 수감중에 소명을 발견합니다. 감옥에 수감된 이들을 돌보고 싶은 긍휼의 마음이 생겨요. 찰스 콜슨이 감옥에서 나온 이후 교도소선교회라는 것을 만들어 재소자와 그 가족을 돌보고 섬기는 일을 합니다.
저는 어린시절 새엄마밑에서 자랐는데, 그때 여러가지 상처가 많고, 도대체 인간의 심리가 왜 이럴까 하다가, 상담사역으로 마음아픈 이들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저는 전에도 말씀드렸는데, 앞으로도 위로와 치유, 두 가지 사역을 메인으로 하려고 합니다. 제 소명은 제 어린 시절, 가정에서 상처받아서, 나처럼 가정에서 상처받은 사람, 그래서 마음이 아픈 사람을 위로해주고, 공감해주고 치료해주는데 상담과 목양으로 도와주는 것이 소명입니다. 그리고 이땅의 개척가정교회 하면서 힘들고 버거운 목회자, 사모님들을 위로하고 보살피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나는 내 가진 것으로 누구를 어떻게 도울까? 어떤 사람을 어떻게 유익하게, 어떻게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소명을 발견했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직업인가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서 힘이 나게 해줄 것인가?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배고픈 사람들, 무엇에 목마른 사람들, 어떻게 답답한 사람들에게 길을 찾아주고 출구를 열어주면 좋겠는가? 이것을 찾아서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소명으로 가졌으면 합니다.
특히 내 은사를 통해서, 내 상처를 통해서!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고, 내가 예전에 아파했던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서, 내가 갖고있는 것으로 누구를 도울 것인가? 나처럼 아파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살펴보면 될 것입니다. 별 특별한 재능이 없어도 얼마든지 소명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아픈 사람을 보면 찾아가 그냥 함께 있어주는 일도 너무나 도움이 됩니다. 어린 아이들, 젊은이들 보면 인생의 길을 찾아주고자 하면 그것이 소명이 됩니다. 내 컴퓨터 기술가지고 그 기술이 없는 노인들이나 어르신들에게 도움을 드리는 소명도 너무 좋습니다. 이제 한번 다녀온 돌싱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외로움과 아픔이 있습니다. 돌싱으로서, 난 이들을 돕는 일을 해야겠다, 이것도 귀한 소명이라고 봅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이 하신 말이 기억납니다. 나이 먹고 은퇴한 어떤 사람이 바닷가에 집 한 채 멋지게 짓고 죽을 때까지 아름다운 조개껍질수집에 열중했답니다. 바닷가에서 멋진 조개껍질을 보면 감탄하고 모아서 소장하면서 즐거워했습니다. 그가 죽고 주님앞에 갔을 때, 천국에 가서, 주님 이거 보세요. 이 아름다운 쉘, 멋지지 않나요? 은퇴하고 죽을 때까지, 오직 예쁜 쉘 수집만 열심히 한 겁니다. 이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어! 그냥 나 혼자 편하게 살겠어! 마지막날이 곧 옵니다. 주님은 그 배고픈 자가 바로 나였다고 하십니다. 저는 이번 창립주일 특새 한주간동안 우리 모두 이 소명을 발견했으면 합니다. 내게 주신 소명을 찾고 부르짖는 특새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땅에 사는 동안 나혼자만 편하게 살겠다며, 세월을 허송하지 않게 해달라고, 우리 성도 중 한 사람도 너는 너, 나는 나, 이 생각으로 살지 않게 해달라고!
말씀을 마칩니다. 주님 주신 소명을 찾으시고 기도제목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노아는 방주120년동안 짓고 주님앞에 섰습니다. 모세는 80에 부름받아 출애굽사역 마치고 주님앞에 섰습니다. 소명없이 나이만 먹고 시간만 흐르면 상급이 없습니다. 사업을 하시거나, 가게를 하는 분들은, 돈벌어서 누구를 먹이고 입히고 살 것인가? 가난한 젊은이들 어떻게 장학금을 주어 인생 열어줄 것인가 그런 소명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커피를 팔거나 생선을 팔거나 장사하는 분들은 내 물건으로 내 고객들에게 최고 행복을 맛보게 하자! 이 소명 가지셔야 합니다. 나는 이제 직업도 없고 나이도 들어 육체적 힘도 없다 하시는 분도 귀한 소명이 있습니다. 이제 남은 날동안 교회 안에서 중보기도자의 소명을 가지시면 됩니다. 그것이 복의 통로로 사는 것이며, 그것이 내 남은 삶을 보람있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햇빛되게 빛을 비추는 삶입니다.
어느 때에
마 25:31-46 / 박지온목사
오늘 성경말씀을 통해서 제목을 "어느 때에" 그랬습니다. 저는 이 성경말씀을 놓고 한 주간동안 상당히 고심을 했어요. 왜냐하면 여기에 기록된 성경 말씀은 일반적으로 풀어나가면 율법적으로 행위에다가 기준을 두게 되는 그런 성경해석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습니다. 또 우리 전통적인 성경해석이 '선행하면 천국 간다!'는 어떤 그런 배경들이 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에 '과연 성경에 진짜 원리를 따라서 어떻게 해석해야 될 것인가?' 좀 기도하면서 고심을 좀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여기 본문에 나온 것은, '생명의 원리로 본문 해석이 되어야 되겠다!' 그렇게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당신의 모든 것은 내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받았다!' 그것이 전제된다는 것을 말씀을 드렸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부담이 아니고,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있다는 그 말은 곧 우리에게 누림이라는 것과 직결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다스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비로소 내 뜻이 될 때에 누림이라고 그러는 것은 진정으로 은혜로운 그런 단어가 되고, 축복이 되는 것으로 우리가 이해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기도요, 또 기도는 우리에게 누림이다! 그래서 나에게 연약함이 왔을 때에, 문제가 왔을 때는 전부 기회로 바꾸어지고, 과거의 모든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었던 것조차도 우리에게는 축복의 발판으로 바꾸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다! 그렇게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일들은 하나님이 뜻이 이해되는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누림이다! 그렇다면 병도, 가난도, 고통도 그것은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누림으로 바꾸어지는 순간 모든 사람에게는 축복과 감격으로 인도를 받게 되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에는 상당히 다른 그런 차원의 비유를 들어서 우리 주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오른편에는 양을 모으고 왼편에는 염소를 모았습니다. 이것은 마지막 심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마지막 심판의 모습이 '어떤 양상으로 인도되는 것이냐?' 하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른편쪽에 있던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으로 축복했고, 그러니까 천국의 축복을 선언했고 허락을 했습니다. 왼편에 있는 염소 떼들에게는 영원한 멸망과 지옥을 선고했다는 것이 성경에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에는 어떤 말씀을 하고 있느냐 하면, 오른편쪽에 있은 사람들에게 '내가 주릴 때에, 배고플 때에 먹였고, 입혔고, 옥에 갇혔을 때 돌보아 주었다!' 그럴 때에 한결같이 한번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어느 때에 우리가 그랬습니까? 어느 때에 우리가 그랬습니까?' 그런 모든 사건들이 전혀 그렇게 했다는 기억조차 없다는 투로 그렇게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적은 사람 하나한테 한 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다!'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왼편쪽에 있는 염소 떼들에게도 말씀했는데,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돌보지 않았고, 먹여 주지도 않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똑같이 '우리가 언제 안 그랬습니까!' '했다!'이겁니다. 그랬는데, 쉽게 말해서 '내 기억에는 한번 두 번이 아니고, 여러 번 있는데 왜 하나님은 다 잊어버렸습니까?' 이런 어떤 식으로 대답을 하게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영원한 지옥과 멸망을 선고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른편쪽에 있는 양떼, 말하자면 양 무리에게 그 다음에 왼편쪽에 있는 염소의 무리에게 이런 어떤 해석, 그리고 오른편쪽에 있는 양 무리들에게는 선행을, 왼편쪽에 있는 염소 무리에게는 선행을 하지 않았다! 이런 어떤 것보다도 근본적으로 저는 오른쪽에는 양의 생명을, 왼편쪽에는 염소의 생명을, 그러니까 성경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양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이고, 왼편쪽에 있는 염소는 그건 사단의 영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첫 번부터 종류가 달라요. 그러니까 첫 번부터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자들은 첫 번부터 다르다! 그것은 여기 마지막 심판 때에 분명한 그런 구별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른편쪽에 있는 양 무리들에게 뭐라고 말씀했느냐 하면, 25장 34절에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 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무슨 말씀을 했느냐 하면,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그랬습니다. 복을 받았다가 아니고 복을 받을 자들이여... 여기에서 뭘 보여주시느냐 하면, 그냥 '복 받을 자를 선택했다!' 이게 아니고, '복 받을 자들!' 여기에는 어떤 면에서 선택이라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번 받아합시다. "나는 복 받을 자다!" 지금이 문제가 아닙니다. 혹시 여러분이 지금 나는 이렇게 어렵고, 이렇게 힘들고, 이렇게 괴로운데, 그러나 상관없습니다. 누구라 구요? 복 받을 자들입니다. 받아합시다. "이미 복은 받았고 계속해서 복을 받을 자들이다!" 믿습니까? 진짜입니까? 한번 얼굴을 펴세요. 진짜 복 받을 자들이 이상한 얼굴을 해 가지고, "복 받을 자들" 그러면 실감이 안 나죠. 여러분과 저는 성경에 복 받을 자들로 선택이 되어 있습니다. 그 증거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뭘 주었습니까? 영생의 생명, 바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현실적인 증거로 인도해 주시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특별히 전도사역에서는 전도 받고 생명 받을 자들이, 하나님께서 미리 벌써 작정된 자들이 아니면 그런 반열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을 이 축복과 은혜에 반열에 들어올 수 있도록 작정된 자들이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에 보면,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그랬습니다. 여러분들이 영생의 축복을 받는다. 궁극적인 것이지만 이 땅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축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복 받을 자들로 선택받은 자들입니다. 한번 선택된 자들은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불가항력적인 은혜라고 하나님의 은혜를 안 받고는 못살게 되어 있습니다. 기어코 은혜를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자리에 앉아서 '나는 전도가 안 된다!' 기어코 전도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로 하고 계획하셨다! 이것이 성경에 약속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선택받은 정도가 아니고, 복 받을 자들로 선택을 받았고, 복 받을 자들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선택은 오늘 본문에 말씀한 것처럼 뭐라고 그랬느냐하면,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그랬습니다. '창세로부터' 그러니까 이것이 그저 어제오늘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송현교회 와서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당당하게 복음에 귀한 메시지를 듣고 살아간다! 이것은 그냥 하나님이 기분 좋아서 어느 날 그랬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계 복음화의 놀라운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서 이 자리에 왔다! 이 자리에서 일하게 되었다! 하는 그 배경 속에는 벌써 뭐냐? '창세전부터 예비 된 자들이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뭐가 되었어요?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오늘 34절에 나온 말씀이 바로 그런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그랬습니다. 벌써 양으로 구별되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냥 그저 말세에 간단하게 있었던 그 어떤 단순간에 이익이 아니라 뭐라 구요? '창세 전에 예비 된 자들이다!' 그것이 벌써 선택된 자들이다! 여러분과 제게 이 자들에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뭘 주었어요? 생명을 주셨더라 그랬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여러분 선택받았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 사실 자체가 엄청난 은혜입니다. 모든 것을 다 받았 구요, 모든 것을 다 누릴 수 있는 그런 자리와 축복이 있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지지난 주에, '이 사실을 내가 인정하고 안다는 것! 이것이 참 귀중하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군요.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군요!' 인정부터 하라! 이겁니다. 그런데 도대체 많이 받아놓고도 인정은커녕, 못 받았다고 푸념만 하고 앉아 있습니다. 이것이 불신앙에 바로 연결되는 사단의 통로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대게 이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모든 것을 받아놓고는 모든 것을 안 받은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기도할 때에 어떻게 기도해야 되느냐?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아뢰라 그리하면' 뭡니까?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약속했습니다. '창세 전부터 이렇게 확실한 약속으로 우리를 불렀고 여러분과 저를 세워주셨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말세에 우리 예수님께서 임금으로 이 땅에 재림하실 때에, 초림은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오셨지만, 말세가 되면 예수님은 임금으로, 왕으로 이 땅에 재림하십니다. 이 땅에 재림하셔서 마지막 심판할 때에, 그때에 심판하는 배경이, 그 순간에 뭐 잘하고 못하고에 따라서 한 것이 아니고, 이미 누구를? 생명 받은 자들, 이미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양 무리들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된 그들을 언제부터? 벌써 창세전부터 하나님이 완벽하게 예비하시고 은혜주신 사람들이다! 그러면서 뭐라고 그랬느냐? '그 사람들로 하여금 너희를 위해서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아라!' 이 축복과 역사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뭘 받을 자들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자들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별로 그렇게 감동이 없는가 봐요. 이 땅에 잘산다, 못산다! 이게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 엄청난 축복과 은혜!' 그 약속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땅에서도 그 축복과 약속을 받은 자들은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로 누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걸 가지고 뭐라고 그럽니까? 권세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신 축복이 뭐 여러 가지 많은 말씀이 있습니다 만은, 그걸 가지고 간단하게 요약된 것이, 일곱 가지 복이라 안 그럽니까! 그 첫 번째가 뭡니까? 내가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다는 증거로 뭘 받았어요? 성령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 성령은, 구약에는 성령께서 기분 나쁘면 가셨어요. 그래서 다윗의 기도 중에 가장 간절한 기도가 뭐냐? '내게 임하신 성령이여 떠나지 마옵소서!' 그랬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가 많고, 이러면 떠나갔고, 범죄하면 떠나가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신 이후를 은혜의 시대라고 하는 이유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러분과 제게 오신 성령은 내주 하신다!' 그랬습니다. 그 말이 무슨 말이냐? '내 안에 영원토록 거하신다!' 한번 오시면 떠나지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요한복음 14장에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겠다!'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이 자리에 오신 성령, 또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 여러분들이 인정을 안 해서 성령의 인도를 못 받고 있는 것뿐이지, 여러분들이 '아, 내게 성령이 오셨구나!' 이 사실을 인정만 해도 엄청난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기틀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성령께서 내주 하시고 내 안에 계시는 겁니다. 내 안에 계셔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성령의 인도를 못 받고 살면 성령께서 로마서에 말씀한 것처럼, 한없이 탄식한다고 그랬습니다. '눈물 흘리며 탄식한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이건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속에 있는 성령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인도를 참으로 잘 받고 있다고 감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이 성령의 내주 하심과 함께 성령의 인도하심에 대해서 잘못 되어져서 자꾸 성령인도 못 받으니까! 성령께서 하다 못해 탄식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성령을 탄식하게 하지 마라!' 그랬습니다. '성령을 섭섭하게 하지 말라!' 성령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내주하고 있느냐? 그러면 그 성령은 여러분과 저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성령은 그냥 내 안에 와 계신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성령께서는 여러분과 저를 어떻게 합니까? 인도하여 주십니다. 인도해 주십니다!
저는 늘 그런 생각을 해 볼 때가 많습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왔다! 내가 변화가 안 된다고 하는 이것은 전혀 안 되는 말입니다. 이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거든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여러분이 그렇잖아요. 여러분 가정에 반가운 손님만 와도 변화가 됩니다. 생전 안 쓸던 방도 쓸고, 생전 안 닦던 방도 닦고, 막 그럴 겁니다. 반가운 손님이 올수록 그렇게 됩니다. 그리고 생전 안 했던 옷도 꺼내 입고, 반가운 손님만 와도 변화가 됩니다.
만약에 뭐 '정치를 잘하느니 못하느니...' 하고 뭐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 지금 현 실정이지만,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께서 내 집에 오신다!' 달라집니다. 변화 정도가 아니에요. 껌뻑 넘어가고요. 지금까지 욕을 암만 하던 사람도 이상해져 버릴 겁니다. 만왕의 왕이신 그분이 내 안에 오셨다. 바꾸어지지 않았다. 그건 거짓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믿고 안 바꾸어졌다 그러면 그것은 예수 안 믿는 것이죠. 그건 예수를 못 믿는 것이지! 예수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모시고 산다! 그러면 영육 간에 바꾸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나를 인도한다! 여러분 만왕의 왕이신 노무현 대통령이 아니고, 저 부시대통령 보다도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만왕의 왕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다! 나를 인도하신다! 성공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워낙 이걸 못 믿으니까! 그리고 못 믿고 기도를 안 하니까 그렇죠. 완벽하게 성공하도록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인도하시는 겁니다. 이 작정 속에 여러분과 저를 넣고 우리 주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복 받을 자들이여!' 그랬습니다. 왜? 축복 받는 것이 틀림없으니까! 너무나 확실하니까! '하나님 앞에 복 받을 자들이여!' 눈감고 있어도 복 받습니다. 이 자리에 앉았다. 복 받습니다. 받아합시다. "피곤해도 복 받고, 눈감고 있어도 복 받는다!" 진짜 입니까? 여러분 믿습니까? 이 자리에 왔다! 아무나 오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교회 오는 게 사단의 자녀들은 교회 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디에 있든지 교회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때부터 오는 것이 뭡니까? 흑암의 세력을 꺾을 수 있는 권세와 천군 천사가 동원되어서 우리의 가는 곳마다 보호와 인도하심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약속된 것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 그 안에 확실하게 포함이 되어 있거든요. 이 사실을 먼저 우리가 인정만 해도, '받았다!' 인정만 해도 여러분 삶이 달라진다!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분명히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말씀에 제목을 "어느 때에" 라고 잡았거든요. 이렇게 하나님의 영을 받게 될 때에, 자연적으로 성경에 약속한 것처럼, 몸 된 교회를 사랑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말씀했죠. 예수께서 뭐라고 그랬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주 중요하죠. 35, 36절 말씀,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 25: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여러분 이 말씀이 물론 지금까지 여러 가지 해석에 있어서 개인적인 어떤 선행을 가지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만은, 저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릴 때에, 어려울 때에, 목마를 때에, 힘들 때에, 그렇게 했던 그 배경이 뭐냐하면, 에베소서 4장 15절에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어디에 머리이시냐? 그것이 골로새서 1장 18절에 보면,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그랬습니다. 뭐라고 그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어디에 머리예요? 교회에 머리다! 교회는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 그랬습니다. 여러분들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붙은 지체라!
그래서 저는 오늘 여기에 말씀을 통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주리실 때가 언제냐? 예수님께서 목마르실 때가 언제냐? 그러면 자연적으로 여러분들이 나도 모르게, 우리도 모르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았다! 그러면 교회가 필요할 때에 내가 쓰여지기를 원합니다. 저절로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영을 통해서 은혜를 받은 사람이면, 교회가 필요할 때에 사용되는 것을 기뻐하라 그랬습니다.
나는 그 그저께 바자회에 가서, 물론 뭐 사는 것은 우리 집에서 샀지만, 바자회 나가서 물건들을 구경만 하는데도 우리 집사님들이 생전 나한테 그렇게 친절하게 안 대해주던데, 바자회 하니까 얼마나 친절하게 대해주던지! 교회의 일을 한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렇게 친절합니다. 그리고 그 필요에 그렇게 부흥하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그뿐 아닙니다. 무슨 생각을 했느냐 하면, 장사하는 사람들이 이런 정도로 이런 얼굴을 가지고 장사하면 안될 일이 없다 싶어요. 다른 교회 교인들이나 우리 목사님들이 뭐라고 하느냐? '참, 송현 교회 잘한다!'고 그러더라 구요. '왜, 그러냐?'고 그러니까! '친절하데요!' 그런데 나는 송현 교회 별로 친절한걸 못 느끼거든요. 전부 무뚝뚝하다 그러지... 그런데 바자회 하는 심정으로 교회 안에 들어오면 이건 뭐 당장 문제가 다 해결될 것 같아요.
여러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에 내가 섰다고 그럴 때에, 교회의 일에 내가 섰다고 그럴 때에, 교회의 필요에 내가 섰다고 그럴 때에, 나도 모르게 친절하고, 다정하고, 그 다음에 도와주려는 그런 마음들이 저절로 일어납니다. 그리고 난 후에 이게 사라졌다. 나중에 바자회 전 다 걷었다! 그리고 나면 바자회 때에 친절한걸 기억합니까? '내가 그때 참 친절했는데, 내가 그때 참 좋은 일 했는데...' 이런 기억합니까? 전혀 모릅니다. 그렇게 한 것 같지도 않아요. 여러분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할 때에, 자식을 사랑한 것조차도 모르고 사랑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에 진실한 교인들은, 참 교회에 지체가 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필요에, '내가 했구나!' 싶은 생각조차도 못하면서 전심을 다해서 일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절로 일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염소에 얼굴을 보십시오. 우리 예수님께서 굶었을 때에, 병들었을 때에 교회의 필요입니다. 그때에 사랑으로 하지 못하고, 정말 생명으로 하지 못했을 때에 뭐가 되느냐? 자연적으로 교회에 한 일들이 자랑스러워집니다. 그러니 여러분 교회 일하면서 당연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전혀 '내가 했다, 못했다!' 느끼지를 못하는데, '내가 많이 일을 했구나!' 어떤 일을 한 그 일이 기억이 계속 나가지고 '마음에 자만을 가져온다!' 그건 전부 사단의 역사입니다. 그것이 넘어지게 하거든요.
그래서 나는 더군다나 요즘 우리 교회를 보면서, 지난주에 우리 건축위원들이 현장에서 모임 갖는 것을 보고 같이 가서 메시지를 전하고 봤습니다. 한 1,300여 평정도 되는 터를 콘크리트 다 하고 한 1M가까이, 그리고 그 거대한 그 장소를 현장에서 보면서 뭘 느꼈느냐 하면, 이 교회를 짖고 나면, 또 이 교회를 짖는 과정에서 조금만 마음에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를 못 느끼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 엄청난 은혜의 역사를 못 느끼고, 이 일을 한다 그러면, '교만하겠다!'싶어요. '내가 했다! 우리가 했다!' 이렇게 나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교회에 필요를 채워달라!' 그런 이 음성을 바로 듣지 못한다! 그러면 여러분 헌금한 것이 자랑이 되고, 여러분 헌신하는 것이 자랑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주릴 때에 너희들이 내게 주었다!' 말하자면, '교회의 필요에 부족함을 너희들이 채워주었다!' 이럴 때에 대답이 뭐냐? '예수님, 우리들이 언제 그랬습니까?' 이래야 일이 되는 겁니다. 오른편에 있는 염소 때처럼, 우리 예수님께서 '부족할 때에 채워주지 않았고, 병들었을 때에 도와주지 않았고...' 그럴 때에, '우리가 언제 그랬습니까?' 예수님 말씀하자말자! '다 했습니다!' 여기에 불행이 있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나는 시간이 가면서 교회가 앞으로 구체적으로 건축되어져서 엄청난 현실로 나오게 될 때에, 정말 여러분 속에 겸손하게, '주여,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 이 땅과 세상을 살리시기 위한 하나님의 필요에 하나님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주의 종들은 쓰임 받았을 뿐입니다! 도구로 쓰임 받았을 뿐입니다!' 돈을 '냈다, 안 냈다!'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중심에 금식을 '했다, 안 했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도 보니까 금식 신청하라고 그랬는데, 여러분들이 정말 이 일에 우리 주님이 원하시니까! 우리 주님이 요구하시니까!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사랑으로 신청하게 되고, 여기에 동참하게 될 때에, 내가 동참한 이 사실조차도 잊어버릴 수밖에 없는, 그래서 어머니는 자식 사랑을, 사랑을 했는지 안 했는지도 모르면서도 쏟아 부어놓게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창세 전부터 엄청난 축복을 이미 주시고, 이미 약속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뭐라고 그러느냐? 이미 복 받은 자들입니다. 앞으로도 복을 받을 자들이라 약속했습니다. 이 축복의 역사는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영원한 내세와 연결이 되어 있음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2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막 10: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드릴 수 있는 자들은, 드리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더 풍성한 축복과 은혜를 금세에 받을 수 있지만, 여기다가 핍박까지 받으면 엄청난 은혜와 축복으로 약속된 내세를 분명히 약속했습니다.
순교자들에 대해서 우리 청년들이 연극을 통해서 어저께 저녁에 했다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러분 그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사가 지금까지도 우리 청년들을 통해서 기념되리만큼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하늘나라의 그 영광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 땅을 축복하고, 이 한국 교회를 축복한 것은, 그 순교의 피들이 증거가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도 여러분과 제가 정말 세계 복음화의 귀한 증거가 되는 것은, 바로 오늘 우리의 헌신들이 바탕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 내세뿐 아니고, 이 땅에 있는 모든 축복과 삶들이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 앞에 복 받은 자들이지만, 복 받을 자들이여!' 우리와 우리 후손들에게 이 엄청난 축복과 은혜를 약속한 것을 성경이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거짓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속임이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이 사실과 축복이 오늘 뿐 아니고, 이제 믿고 긍정하고 인정만 해도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생애와 삶이, 그리고 여러분의 직장과 모든 생업이 달라질 것입니다.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
마 25:31-46 / 이성우목사
오늘은 성탄주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겨 그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는 죄를 범함으로써 죽을 수밖에 없게 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심으로 본래의 자리, 곧 하나님 앞에서의 행복한 삶의 자리로 회복시키시고자 하나님께서 하늘의 영광스러운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직접 찾아오시는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사모함으로 기다리며, 그 주님을 모셔 들이기 위해 준비하는 주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은 이 세상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서 천국을 미리 맛보며 살아가는 것도 귀하고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만 최종적인 관심사는 우리가 마지막 최후의 심판 날, 곧 주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재림주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그 때에 내가 과연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믿음으로 준비하며 그 날을 기다리는데 있는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아무리 자기 나름대로는 신앙생활을 잘 했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신랑 되신 우리 주님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그 주님과 함께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면 그런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불쌍한 사람들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장 9-11절 말씀을 보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대속 제물로 십자가에 드려지셨던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다음 40일 동안 이 세상에 부활의 몸으로 계시다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됨으로 하나님 곁으로 승천하시게 되었는데, 바로 그 때 하나님은 천사들을 통해서 그 주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신 것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9)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 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10)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11)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 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성탄주일 아침에 다시 오실 주님에 대한 말씀을 듣는 것이 좀 이상스러워 보이지만, 오늘은 우리 교회 한 해 동안의 살림을 정리하고 새 해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새로운 살림을 살아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정기 당회가 있는 날이기에 우리교회와 우리들 각자가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되돌아보면서 하나님 앞에서의 결산을 하는 날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오늘 본문 말씀을 함께 묵상하면서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에 감람산에서 말씀하셨던 내용들을 하나의 묶음으로 소개하고 있는 소위 ‘감람산 강화’는 마태복음 24장 1절부터 시작해서 오늘 본문 말씀의 끝자락인 25장 46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감람산 강화 중에서 먼저 24장에서는 종말의 징조에 관한 말씀을 하심으로써 주님의 재림의 확실성과 함께 돌발성에 대해서 강조하시면서 그 재림을 예비하는 성도의 합당한 자세를 세 가지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이어지는 25장의 말씀은 역시 세 가지 비유로 되어 있는데, 24장의 세 가지 비유들을 보충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면서, 그 내용들을 더욱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맨 처음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는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마음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으며, 두 번째 비유인 달란트 비유는 재림을 준비하는 자의 구체적인 삶의 열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말씀인 세 번째 비유는 소위 ‘양과 염소의 비유’로써 재림으로 말미암은 심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들 세 가지 비유가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특징을 먼저 생각해 보면, 먼저 내용상의 강조점을 말할 수 있는데, 세 비유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주님의 재림 때에 칭찬과 축복을 받을 무리 및 저주와 멸망을 당할 무리로 뚜렷이 둘로 나누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들 세 비유는 칭찬이나 축복보다는 저주와 멸망을 경고하는 데에 더 큰 강조점을 두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들 세 가지 비유들은 주님의 재림에 관한 약속을 멸시하고 세상적인 타락의 풍조에 휘말려 들어감으로써 택한 자들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신령한 뜻을 도외시하는 사람들에 대한 심판을 부각시킴으로 말세지말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부여된 귀중한 사명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끝이 가까울수록 공의는 더욱 짓밟히고 사랑은 점점 식어만 갈 것인데, 그러므로 성도들은 많은 사람들이 가는 그 길을 따라 감으로 악을 행하지 말고 어두움이 더해 갈수록 진리의 등불을 발하는 거룩한 사명에 더욱 분발하는 삶을 통해서 주님의 심판을 준비해야 함을 깨우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 세 가지 비유가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특징 가운데 두 번째는 경고의 대상을 말할 수 있는데, 세 비유들에 징계의 대상으로 주목되는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악행을 일삼은 자들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적극적으로 이루어가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첫 번째 비유의 미련한 다섯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하는 일을 태만히 한 결과로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하고 말았으며, 두 번째 비유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그 돈을 땅에 묻어두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 말씀인 세 번째 비유의 염소의 무리로 분리된 자들이 영영한 불에 던져진 것도 형제들에게 적극적으로 사랑을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에게 소극적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려는 무사안일주의의 죄가 얼마나 엄중하게 다스려지는 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미지근해서 덥지도 않고 차지도 아니한 것은 토하여 내침을 당할 뿐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요한계시록 3장의 경고를 같은 맥락에서 깨우쳐 주고 있는 말씀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 25장 31절-46절까지의 말씀은 예수님의 감람산 강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양과 염소의 비유’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말씀으로, 마지막 날의 심판을 주제로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종말의 날에 임할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의 결론부분에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 수난을 네 번째로 예고하시기 직전에 이 예언을 말씀하신 것 또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 심판주로서 재림하실 것이라는 사실은 성도들로 하여금 어떠한 곤경과 핍박 가운데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면서 견디도록 하는 큰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에 관한 거듭된 예언이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듯이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 또한 엄연한 역사적 현실로서 다가올 것임을 오늘 본문 말씀은 깨우쳐 주고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34절-45절 가운데 특별히 임금과 의인들과 악인들이 나누는 대화의 내용이 선명하게 대조적인 내용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렇게 분명하게 구분되는 문학적인 구성을 통해서 본문 말씀은 영벌과 영생의 엄청난 대조적인 의미를 극명하게 노출시킴으로써 이 말씀을 듣고 읽는 성도들로 하여금 종말의 날에 있게 될 심판을 어떻게 대비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깨우쳐 주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말씀은 종말의 날에 있게 될 심판의 상황을 자세하게 진술하고 있는데, 이 말씀 속에는 심판의 주체와 대상, 방법 및 결과가 압축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심판의 주체는 말구유에서 탄생하셔서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끝내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인자’ 라고 3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희생당하셨지만 마지막 날에는 모든 무릎이 심판주가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 앞에 꿇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인데, 이 사실은 예수님을 전폭적으로 믿고 따르는 모든 성도들에게 더 없는 위로와 소망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둘째로, 심판의 대상은 ‘모든 민족’이라고 32절에서 밝혀 주고 있습니다. 그 날에는 동서고금이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인류가 백 보좌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요한 계시록 20장의 말씀도 이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게 된 모든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을 위해서 예비해 두신 천국을 부인한 채 세상적인 즐거움에만 골몰했던 모든 불신자들은 영원한 지옥 불에 던져지게 될 것이며, 동시에 예수님을 구원자로 고백하고 믿음으로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옴으로 구원을 약속받은 성도들은 상급에 대한 생명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데, 이 사실을 하나님은 이미 사도 바울을 통해서 고린도전서 3장에서 깨우쳐 주셨습니다.
셋째로, 심판의 방법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각 사람의 행한 자취를 증거로 삼아 진행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는 세상의 신분의 고하나 능력의 다소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오직 믿음을 가지고 섬겨온 사랑의 행실이 있고 없음과 많고 적음만이 심판의 근거가 될 것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심판의 결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심판의 결과는 영생과 영벌이라고 하는 너무도 엄청난 차이를 가져오게 됨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심판의 결과로 주어지게 되는 영생의 축복과 영벌의 불행에 대해서는 이 세상에 과연 누가 충분히 설명해 보일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아침에 들려주신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한 해 동안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하나님 앞에서 결산하시기를 바라며, 혹시 부족한 부분이 발견된다면 하나님의 심판대에 앞에 서게 되는 날이 오기 전에 부지런히 그 날을 대비하며 살아가심으로써 심판주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칭찬과 상급은 물론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영생을 누리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굶주린 자를 먹이라
마 25:31-46 / 김상복목사
추석 같은 명절이 되면 주위의 불우한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제가 대학생 때만 해도 사람을 만나면 “진지 잡수셨어요?”가 인사였습니다. 어려운 시절을 겪었기 때문에 밤새 잘 주무셨는지, 아침이나 드시고 하루를 시작했는지 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몇 kg이나 빼셨어요?” 하고 묻지요. “5kg정도 뺐어요.” 하면 다들 축하하고 좋아합니다. 요즘은 무엇을 먹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살이 찌지 않을까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오곡백과가 풍성하지만, 불과 몇 시간만 북쪽으로 가면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북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UN기구 가운데 하나인 WFP(World Food Program, 세계식량계획)는 북한에 대해 큰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식량이 부족한 북한에 홍수 피해로 더 많은 사람이 굶어죽을 것으로 예상되고 특히 가장 큰 피해자는 어린 아이들이라는 것입니다. 제대로 먹지 못한 엄마가 젖이 없어 갓난아이들을 먹이지 못하는 안타까운 실정입니다. 북한은 그 정치 제도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가져다줘도 끝이 없습니다. 전 세계가 도와도 먹여 살릴 수가 없습니다. 북한 사람들도 열심히 일합니다. 우리보다 더 열심히 하지만 아이들에게 먹일 우유도 제대로 없습니다. 남한의 우리에게 먹을 것이 풍성하도록 축복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가난에는 여러 이유가 있는데, 대물림 되는 가난이 있습니다. 미국 대도시의 도심에는 가난을 대물림해서 사는 흑인들이 있습니다. 할머니가 가난해서 정부의 사회보장 대상자였는데 딸도 마찬가지고 손녀마저 그렇습니다. 대물림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변화가 있어야 됩니다.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지 않으면 거기서 헤어나질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과 저는 절대로 가난을 대물림할 수 없습니다. 설령 우리 부모가 가난했든지, 우리 세대에 어떤 특별한 일로 가난이 찾아왔다 해도, 하나님을 안 다음부터는 달라집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소유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가난하다면 하나님 앞에 결사적으로 기도하고, 지혜와 건강과 능력과 은총을 구해서 내 대에서 가난의 대물림을 반드시 끊어야 합니다.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시므로 가난은 대물림할 수도, 해서도 안 됩니다. 가문에 이런 가난의 대물림이 절대 없도록 기도하십시다.
나쁜 습관 때문에 가난이 찾아 올 수도 있습니다. 술 때문에 재산을 탕진합니다. 도박, 마약, 범죄, 잘못된 사고방식, 낭비, 심지어 일하기 싫어하고 잠자기만 좋아하는 게으름 때문에 가난이 찾아옵니다. 우리의 뼈 중에는 게으른 뼈가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너희가 엿새 동안 힘써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그냥 일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을 다하고 기도하며 지혜와 능력과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면서 일합니다. 그리고 오늘처럼 7일째 되는 날에는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립니다. 이렇게 건전하게 살면 절대로 가난을 대물림 할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잘못된 생활 습관, 질병이나 기대하지 않았던 재난 때문에, 또는 다른 사람들이 해를 끼쳐서 가난해지기도 합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거지가 된 분이 있었습니다. 제가 대학생 때 만난 어느 노인은 젊음을 독립운동에 바쳤다가 해방이 되자 가족도 없이 길거리에 앉아 거지 신세가 되어버렸습니다. 정말 기가 막힌 일이지요. 이름 있는 사람들은 해방 후에 다 한 자리씩 했지만 평범한 독립 운동가였던 이 할아버지는 거지가 되었습니다.
가난을 스스로 선택한 경우도 있습니다. 세례 요한, 사도 바울, 예수님 같은 분들입니다. 더 큰 목적을 위해, 영적인 목적을 위해 가난을 자청했던 것입니다. 우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영광과 존귀를 다 버리시고 이 땅에 가난하게 태어나셨습니다. 자기 집도 없이 제자들, 특히 여자 7~8명의 도움을 받으며 3년 동안 지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가난한 자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영적인 목적을 위해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였습니다.
BC 3~4세기 경 희랍 스토아학파의 디오게네스라는 철학자는 스토아철학 때문에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가난을 별로 개의치 않고 덕스럽게 살았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의 소문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그가 산다는 시장에 가보니 거지같은 사람 하나가 통 속에 웅크리고 앉아있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당신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는데, 내가 당신을 위해서 무엇을 해 드릴까요? 이 나라의 절반이라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랬더니 디오게네스는 “제발 거기서 좀 비켜 주시오. 내가 지금 햇볕을 즐기고 있는데 왜 가로막고 있습니까? 나는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햇볕이나 가리지 말고 비켜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사는 스타일을 소박하게 만듦으로써 스스로 흡족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최소한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도록 자신을 훈련했습니다. 책에서 읽었는데, 어느 미국인이 자기 회사의 사장에게 “저는 월급의 1/3만 받고 싶습니다.” 했답니다. 사장이 “왜 그렇소?” 하고 묻자 “세금을 많이 내고 싶지 않아서요.”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극단적일 필요는 없지요.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가난에 처할 수는 있어도 그 가난이 절대 대물림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의 가문에는 가난의 대물림이 결코 없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북한은 가난이 대물림되고 있습니다. 특히 아이들이 영양실조를 겪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이웃 한신교회와 함께 개천절에 북한 어린이에게 분유를 보내기 위한 걷기대회를 엽니다. 이 선한 일을 이웃 교회와 함께 하는 것은 참 좋은 축복입니다. 이 밖에 YMCA, YWCA, 그리고 CTS TV 방송국에서 좋은 축제프로그램을 만들었습니다. 10월 3일 오후 2시, 탄천 운동장에 모여 축제에 참여하고 이어 1시간 정도 걷기를 할 것입니다. 사랑방, 지역, 교구별로 슬로건을 만들어서 주위사람들을 격려하면서 북한 어린이들을 생각하는 시간을 만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올해는 대회등록금 대신 여러분의 헌금으로 분유를 구입하려고 합니다. 만약 10만원을 헌금한다면 실제 분유는 14만원 어치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분유 회사가 분유 값의 30%를 할인해주고 또 모금액 전체의 10%의 분유를 더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지난 대회에서는 어느 사업가가 올리브유 7,500병을 주셔서 필요한 분들이 구입해서 가정에서 잘 사용하고 모금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장롱 속 금반지를 가져온 분도 있었고 여러 가지 각자의 방법으로 북한 어린이들을 위한 일에 동참했습니다.
장차 하나님께서 인류를 둘로 나누실 때가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자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쪽에 두리라”(31~33절)고 했습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고난 받는 종으로 오셨습니다. 부유하신 분이 아주 가난하게 오셨습니다. 우리의 삶의 방향을 단번에 바꿔 영원을, 하나님을, 천국을, 영생을 향하도록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러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오실 때는 양과 염소,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선을 행하며 산 선한 자와 선행을 도외시한 악한 자를 가르는 만민의 심판자로 오실 것입니다.
심판자 예수님은 무엇으로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실까요? 우리의 선한 생활과 선한 행위, 악한 생활과 악한 행위를 보고 가르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善)의 근본이십니다.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이 찬송처럼 선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과 저는 선을 향하여 방향을 정한 것입니다. 어느 청년이 예수님께 “선하신 선생님이시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 외에는 선한 자가 없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님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선을 향하여 방향을 잡은 것입니다. 선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거부하고, 죄 사함 받아 죄에서 돌이키기를 거부한다면, 그 끝은 영원한 형벌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별하시고 심판하십니다.
본문에서 선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오른편에 있는 선한 사람은 “아버지께 복을 받을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해 예비한 그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가 상속 받으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나라를 받을 자들입니다. 영원히 복 받을 선한 사람들은 선행이 생활화, 습관화된 사람들입니다. 늘 선한 생각을 하고 선한 행동과 선한 말, 선한 태도로 선한 습관이 몸에 배어서 자기가 선한 행동을 했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우리 가슴 속에 계시고, 성령님이 우리를 변화시킴으로써 선이 우리의 인격이 되어 스스로 선을 행하고 있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며 살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 굶주릴 때 먹여주었지. 목마를 때 마실 것 주었지. 나 헐벗었을 때 입을 옷을 주었지. 병들었을 때 심방해주었지. 내가 감옥에 갔을 때 날 돌봐주었지!” 예수님의 이 말씀에 선한 사람들은 “저희가 언제 그랬습니까? 저희는 주님에게 그렇게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합니다. 특별히 선을 행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생활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다 마음먹고 10년 만에 한 번 선을 행한 사람은 일기장에 기록하고 족보에 영구히 기록할 겁니다. 매일 자기 자신과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살던 사람이 어쩌다 선을 행하면 생색을 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을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선이 자기화 되어버렸습니다. 사람을 만나면 선한 말을 하고, 선한 얼굴을 보여주고, 선한 행동을 하고, 선을 위해 기도해주는 모든 것이 습관화, 생활화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은총 주셔서 선이 우리의 인격이 되기를 원합니다. 입을 열 때마다 선이 쏟아지는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여러분도 이런 경험이 있겠지요. 10년이나 20년 전, 어려움에 처한 분을 위해 기도와 격려와 도움을 주고 잊어버렸는데 오랜만에 그를 다시 만났더니 “오래 전에 당신의 도움 때문에 제가 힘을 얻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생각이 잘 안 나요. 왜? 그런 일이 특별한 것이 아니니까 일일이 기억할 수가 없지요. 늘 선을 베풀고 선을 말하며 선을 도모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면서 성령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복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와 같은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한편 예수님은 왼쪽 사람들을 보고 “너희는 나 굶었을 때 먹을 것 안 줬지. 나 헐벗고 있을 때 너는 브랜드 옷 입고 나한테 남대문 시장에서 산 것 하나도 안 줬지.” 하십니다.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기억이 안 나는데요.” 선을 행해봤어야 기억이 나지요. 자기만을 위해 살았지 가난한 사람과 어려운 사람, 병든 사람들, 감옥에 있는 사람들, 다른 누구를 위해서 살아본 적이 없거든요. “가장 비천한 사람들, 가장 작은 사람들, 그 한 명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고, 하지 않은 것이 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눈에 도와줘야 할 사람, 기도해줘야 할 사람, 사랑의 격려를 해줘야 할 사람이 보이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여러분 옆에 두신 것입니다. 또 한 번의 선을 베풀 기회, 선한 말을 해줄 기회, 선한 손으로 그를 안아줄 기회, 선한 격려를 해줄 기회를 여러분에게 주신 줄 알고 작은 선을 곳곳마다 퍼뜨리며 사는 축복의 근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습이요 사는 방법 입니다. 의인들이 무의식적으로 선을 행하듯이 악인들도 무의식적으로 악을 행합니다. 생활 습관입니다. 상대방은 가슴에 20년 동안 상처를 품고 살았지만, 정작 자신은 그렇게 모멸스러운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합니다. 악이 습관이 되어서 독을 쏘고도 몰라요. 독화살에 맞은 사람들은 마음의 불구자가 되어 힘들게 사는데, 그들은 자기 행동의 결과를 의식도 안하고 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선을 위해 창조되었고 선을 위해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예배하고 훈련받는 것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선한 빛을 비춰 그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어둠을 밝히는 선한 사람들로 살게 하시려고 우리로 예수 믿게 하시고 성령을 우리 가슴 속에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선이 습관화 될 수도 있고, 악이 생활화 될 수도 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공동묘지에서 일하는 장의사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죽기 전에 2억 원의 재산이 남았는데 그 돈을 몽땅 장례비용으로 쓰고 죽었답니다. 누구한테 한 푼도 선을 행할 의사가 없었던 것이지요. 평생을 그런 식으로 살았기 때문에 죽으면서도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죽어서 어디로 갔을지 짐작이 되십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를 믿고 선을 행하는 것이 생활화되면 이 땅의 은총과 하늘의 은총을 동시에 누릴 수 있습니다. 존 디 록펠러는 세계최초로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돈 버는 데는 귀재여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평생 쓰고도 남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53세 때 병이 들어 1년밖에 살 수 없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돈을 모으는 데만 애를 썼을 뿐 선을 위해 쓰는 데는 관심이 없었던 그는 자신을 돌이켜보았습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왔던가?’ 지난 53년의 인생을 되돌아보니 후회가 되었습니다. ‘내가 왜 나만을 위해서 살았던가!’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회개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 살았습니다. 제가 잘못 살아서 이 질병에 걸린 것 같습니다. 하나님, 저를 용서해주세요. 오늘부터 제가 돌아서서 하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세상을 위해, 인류를 위해 제 돈을 쓰면서 살겠습니다.” 록펠러는 그 후로 많은 선을 베풀고 98세까지 살았습니다. 그는 자기중심적 삶에서 방향을 바꿔 하나님을 위해 살았습니다. 이웃을 향해, 교회를 향해, 세상을 향해 삶의 방향을 바꿨습니다. 의학 연구를 위한 리서치센터도 만들고 많은 선을 행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은 분이 되었습니다. 1년 밖에 살지 못한다고 했던 사람이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꿈으로써 건강을 회복하고 100세 가까이 산 모습을 보면서, 선을 위해서 사는 것은 이 땅의 축복과 영원한 하늘의 축복을 누리는 길임을 봅니다.
“하나님, 저를 선하게 바꿔주셔서 습관적으로 좋은 것, 긍정적인 것, 아름다운 것, 참된 것을 생각하도록 해주시옵소서. 제 입술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선한 말, 축복의 말, 사랑의 말, 격려의 말이 되게 하옵소서. 제 태도와 모습마저도 바꿔주셔서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선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축복하며 살게 하옵소서.” 여러분의 인격이 변화되어 말할 때마다 움직일 때마다 선이 여러분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영원한 하늘의 복과 이 땅의 복을 함께 누리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
마 25:34-40 / 김명혁 목사
얼마 전에 5개 종단의 종교인들과 함께 모여서 아침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눈 일이 있었습니다. 불교 원불교 천도교 천주교 개신교 지도자들이 이따금씩 함께 모여서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는데 바로 지난 3월 18일 아침에도 함께 모여서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물론 식사 기도는 제가 했습니다. 제가 식사 기도를 할 때마다 모두 ‘아멘’으로 화답을 하곤 합니다. 마음과 뜻이 통하는 분들과의 만남입니다. 대화의 주제는 언제나 민족의 화해와 평화입니다. 사실 작년 8월 27일에는 5개 종단 지도자 9명이 밀가루 300톤을 가지고 개성에 가기도 했습니다. 지난 3월 18일 아침 모임에서는 남북 관계에 대한 미국 국무성의 최근의 입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우리 정부의 대북 정책과 북한의 극심한 식량 사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리고 우리 종교계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얼마나 정확한 정보와 분석력을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 날 법륜 스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불교도 기독교도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불교도 서로 싸우고 있고 개신교도 서로 싸우고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불교는 자비와 화해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개신교는 사랑과 화해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오늘의 개신교는 예수님의 가르침보다는 유대교의 가르침을 따르며 모두를 품기보다는 비판적이고 배타적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에서 주린 자들과 목 마른 자들과 나그네 된 자들과 벗은 자들과 병든 자들을 돌아보라고 가르쳤는데 오늘의 개신교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는 말도 했습니다. 저는 법륜 스님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을 표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마태복음 25장 말씀을 중심으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물론 오늘의 한국교회가 모두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잘 하고 있는 교회들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작년 2월 20일 “내가 본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모습 열 가지” 라는 제목의 글을 썼는데 그 중 여섯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❶ 20여 년 이상 영등포 지역의 세상을 등진 그리고 거칠기까지 한 노숙자들에게 인내와 사랑으로 먹을 것과 잠자리를 제공하며 저들의 친구로 살아가고 있는 광야교회의 임명희 목사와 정경화 사모의 환히 웃는 얼굴 모습이 너무너무 귀하고 아름답다.
❷ 20여 년 동안 성남과 구로 등지의 좌절과 분노에 쌓여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친구와 변호인과 의사의 역할을 하며 최근에는 저들의 자녀들을 위한 국제다문화학교를 세우려고 하는 김해성 목사와 이선희 목사의 끈질기고 진실한 삶의 모습이 너무너무 귀하고 아름답다.
❸ 20여 년 이상 재난 당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파키스탄으로 아프간으로 서울역 지하도로 어디든지 달려가서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제공하는 지극히 작은 자들의 친구로, 삶의 안내자로 살아가는 김범곤 목사의 소박한 삶의 모습이 너무너무 귀하고 아름답다.
❹ 20여 년 이상 가난하고 배고픈 자들에게 밥을 퍼주고 병든 자들에게 치료의 손길을 베풀면서 저들의 친구와 위로자로 살아가는 모습이 그리고 목회의 일터까지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남은 생애를 전적으로 밥퍼와 치료자로서의 섬김의 삶을 살아가기로 다짐한 최일도 목사의 모습이 너무너무 귀하고 아름답다.
❺ 20여 년 이상 충청도 보은 산골을 떠나지 않고 몸이 아픈 노인들의 몸을 안마해주고 새벽기도를 마친 후에는 마을의 할머니들을 차에 태우고 산 넘어 장터에 모시고 가서 전날 캔 나물들을 팔게 한 후 다시 집에까지 모셔드리는 창성교회 함대붕 목사와 김미자 사모의 섬김의 모습이 너무너무 귀하고 아름답다.
❻ 경기도 파주에서 목회하면서 그 지역의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사랑과 도움과 격려의 손길을 펴며 해마다 몇 번씩 저들의 고향을 방문하고 저들 부모의 가정들을 심방하며 자녀들의 편지와 소식을 전해주며 눈물의 감동을 나누는 사랑의 천사의 역할을 하고 있는 오산교회 박동재 목사의 섬김과 순례의 모습이 너무너무 귀하고 아름답다. (2월 20일 밝은 햇빛이 비치는 토요일 아침에)” 이렇게 잘 하는 교회들도 있지만 상당수의 교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따르지도 못하고 제대로 실천하지도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마태복음 25장 말씀을 중심으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 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약 성경 여러 곳에서 형식적인 제사보다 멋진 기도보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펴는 것이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 9:13).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마 6:14). 예수님께서는 또한 제사장이나 레위인의 종교 의식보다는 강도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 10:36,37).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마 5:44). 그리고 마지막 날 심판의 기준이 주린 자들과 목 마른 자들과 나그네 된 자들과 벗은 자들과 병든 자들과 옥에 갇힌 자들을 돌아보는 긍휼과 자비와 사랑이 될 것이라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4-36).
우리는 마지막 날 심판을 면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주님께서 원하시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며 살기를 소원하는 뜻에서 오늘의 말씀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삶의 동기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두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5:9). 사도 바울은 주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자기는 생명을 잃어도 좋다고 고백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저주를 받아도 좋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 사도 바울은 삶의 동기와 목적을 주님의 뜻을 이루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두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 중에 중요한 일이 바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손길을 펴는 일이고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구원하는 일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그러면 이제부터 마태복음 25장을 중심으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❶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 마를 때에 마시게 하는 일이 바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주님 자신에게 한 것과 꼭 같은 일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마25:35).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먹고 마시는 것은 인간의 생존을 유지하는 기본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종류의 재난으로 인간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는 불행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동안 아프리카와 아프가니스탄과 북한 등지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재난 때문에 수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는 불행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일본에서 일어난 대 지진과 쓰나미로 수 많은 일본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불행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불행에 빠진 사람들의 불행의 원인과 잘못을 지적하시는 대신 저들에게 그저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는 일이 너무너무 중요한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는 것이 바로 주님 자신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는 것과 꼭 같은 일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사58:6).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형식적인 제사보다 멋진 기도보다 자기를 괴롭히는 금식보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 마를 때에 마시게 하는 일이라고 말씀했습니다.
❷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히는 일이 바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주님 자신에게 한 것과 꼭 같은 일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마25:35,36).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고향과 집을 떠난 나그네는 먹을 것은 물론 잠 잘 곳도 없고 입을 옷도 없게 됩니다. 의식주 모두가 부족하게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나그네들에 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나타내 보였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나그네를 사랑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했고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나그네를 사랑하여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신10:17-19).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사58:7). 성경에 나타난 거의 모든 신앙의 선배들은 모두 나그네의 삶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모세도 모두 나그네의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늘 집을 떠나 세상에 오셔서 나그네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 예수님께서는 고향과 집을 떠난 나그네들에 대한 깊은 관심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사마리아의 수가성 여인도 막달라 마리아도 빌립보의 루디아도 모두 나그네들이었는데 주님께서는 이들에게 깊은 관심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성경은 나그네들을 대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나그네] 대접하기를 힘쓰라”(롬12:13). “손님[나그네]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히13:1,2). 사도 요한은 가이오에게 삼중적인 축복을 축원하면서 가이오가 나그네들을 영접하고 사랑하는 것을 칭찬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 신실한 일이니 저희가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거하였느니라”(요35,6). 욥바의 도르가는 그 지역에 살던 과부들에게 속옷과 겉옷을 만들어 입혀주었는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도르가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행9:42).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히는 일이라고 말씀했습니다.
❸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는 일이 바로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주님 자신에게 한 것과 꼭 같은 일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25:36).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 건강은 모든 사람을 평안하고 기쁘고 행복하게 만들지만 질병은 모든 사람을 괴롭고 슬프고 불행하게 만듭니다. 죄 값으로 이 세상에 죽음과 질병과 슬픔과 아픔이 왔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죽음도 질병도 슬픔도 아픔도 없다고 사도 요한이 지적했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그러나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기 전에는 이 세상에 죄 값으로 인한 죽음과 질병과 슬픔과 아픔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운명과 질병의 운명에 처한 인생들을 바라보시면서 고놈들 못된 놈들 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으니 참 잘 되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잘 죽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슬퍼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 11:35). 그 때 유대인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요 11:36). 예수님은 인정이 많으신 분이셨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셨고 눈물이 많으신 분이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주로 하신 일들은 각색 병든 자들을 만져주시면서 병을 고쳐주신 일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마 8:3).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마 8:14,15).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마 8:16). 예수님께서 들것에 실려 데려온 중풍병자를 고치신 다음에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마 9:12,13). 예수님께서는 각색 병든 자들을 무시하시지도 멸시하시지도 않으시고 모두에게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손으로 병든 몸을 만지시면서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성 프랜시스도 손양원 목사님도 주님을 본 받아 나환자들의 몸을 만지면서 병자들을 긍휼과 자비와 사랑으로 돌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감옥에 갇힌 자들에게도 긍휼과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 중의 하나가 포로 된 자들과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사 61:1).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전파하며”(눅 4:18). 예수님께서는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에게 자주 나타나서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행 23:11). 사도 바울은 나중에 오네시보로를 축복하면서 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 자주 찾아와서 자기를 유쾌하게 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딤후 1:16,17).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는 일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오늘 아침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설교를 잘 하고 전도를 잘 하고 목회를 잘 하고 선교를 잘 하는 것을 물론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3천 명을 회개시키는 것도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유명한 부흥사가 되는 것도 유명한 설교자가 되는 것도 유명한 신학자가 되는 것도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 주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금식 기도하면서 다투고 금식 기도하면서 주먹으로 치는 것을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면서 그런 기도와 금식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의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 목소리로 상달케 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사 58:4,5). 그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은 다음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7). 그와 같은 일을 하는 자들에게 놀라운 축복을 베푸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 58:8,9).
하나님은 참 이상한 분 같이 보여집니다. 너무 인간적이신 분같이 보여집니다. 모세처럼 엘리야처럼 대단한 일을 하고 능력을 나타내 보여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실 것 같은데, 너무 이상하게도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주린 자에게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을 그렇게도 귀하게 보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무너무 이상한 하나님 같이 보입니다. 너무너무 인간적이신 하나님같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도 이상한 말씀같이 보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2,13). 예수님도 이상한 분같이 보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건강한 자에게는 예수님이 쓸데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는 의인이 필요한데 예수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고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로마 백부장과 세리 마태와 일곱 귀신 들린 여자와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자와 핍박자 사울과 배신자 베드로와 같은 죄인들을 골라서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너무너무 이상하신 분 같이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도 나처럼 죄 값으로 여러 가지 재난을 당해서 주리고 목 마른 자, 나그네 되고 벗은 자, 그리고 병들고 옥에 갇힌 자들을 찾아가서 돌아볼 수는 없느냐?” 너무너무 인간적인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정통 보수주의 신학자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일들을 주님께서는 너무너무 귀중하게 여기셨습니다.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푸는 것이 곧 주님 자신에게 베푼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그리고 그와 같은 작은 긍휼과 자비와 사랑이 천국의 축복으로까지 이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 너무너무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 심판을 면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주님께서 원하시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며 살기를 소원하며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9) 라고 고백하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하겠습니다. 인간의 죄 값으로 그리고 여러 가지 재난으로 인해 주리고 목 마른 자, 나그네 되고 벗은 자, 그리고 병들고 옥에 갇힌 자들을 찾아가서 돌아보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작은 이들의 벗이 되는 교회
마 25:34-46 / 오세원 목사
우리 예수님은 훌륭한 나라, 대형나라에 오신 것이 아니라 가장 작은 나라 이스라엘로 오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훌륭한 도시로 오신 것이 아니라 시골 베들레헴으로 오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높은 자리로 오신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권력자로 오시지 않고 목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화려한 예루살렘에 사시지 않고 나사렛에 사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좋은 옷 입으시지 않으시고 몸만 가리면 되는 옷을 입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화려한 곳에서 사역하지 않으시고 가장 낮은 갈릴리와 벳세다와 두로와 시돈에서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취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주러 오셨습니다. 생명의 떡으로 말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죽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살리러 오셨습니다. 생명의 보혈로 말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의인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주님이 심판주로 오시면 심판을 어떻게 하시느냐를 가르쳐주신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이 담긴 25장입니다. 심판을 하실 때 오른편과 왼편으로 구분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오른편에는 어떤 사람들이 가는 곳인가? 오른편에 있는 자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 34절입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하나님으로부터 복받을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예비된 나라, 즉 천국을 상속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엄청난 복을 받을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인가요? 오늘 읽은 말씀안에 그들이 들어 있습니다.
35,3 6절을 봅시다.
주님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준 사람입니다.
주님이 목마를 때에 마실 물을 준 사람입니다.
주님이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던 사람입니다. 모시고 들어와 자기 집에 재워주고 입혀주고 먹을 것을 준 사람입니다.
주님이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혀주었던 사람이요, 주님이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던 사람입니다. 주님이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면회를 해 준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천국을 상속받는다고 하는 말을 듣고는 이들이 예수님에게 되물었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37-39절).
이때 다시 심판자가 대답합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40절).
다시 41절에 보면, 주님이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그러면 왼편에 있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42-43절 말씀, "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왼편에 있던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닫 듣고는 되묻습니다.
주여, 우리가 언제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왼편의 사람들이 한 질문에 대해서 다시 주님은 대답하십니다.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45절) 하시면서 다시 그들에게 영벌에 처하고 작은 이들의 벗된 삶을 산 사람들인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적어도 주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삶은 어떤 삶이어야 할까요? 오늘 말씀에서 분명히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작은 이들의 벗된 삶"이어야 함을 말입니다. 작은 이들의 벗이 되는 경우가 무엇입니까?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참된 이웃에 대한 정의를 하신 것을 보면 여리고성을 지나가다가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의 벗이 되려면 작은 이들의 벗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작은이들을 돌보는 삶을 의롭게 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예수님의 삶 33년이 어떤 삶이었습니까? 물론 공생애 3년 외에는 잘 나타난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3년동안 찾아다닌 사람들이나 만나서 행한 모습을 보면 예수님이 어떤 사역을 감당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삶을 좋아하시는가도 알 수 있습니다.
금년도에 우리교회가 지향해나갈 표어가 "성령의 능력받아 작은이들의 벗이 되는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작은이들의 벗이 누군가? 구체적으로 구분하면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겠지만 다 나열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교회는 여섯 유형의 사람들을 정했습니다. 작은이들을 지칭하는 말씀을 찾아볼까요? 우선 오늘 주신 말씀을 봅시다.
배고픈 사람, 나그네, 헐벗은 사람, 병드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 등입니다. 그리고 레위기 19장에 보면, 근로자, 장애인, 재판받는 자, 원수, 동포 등입니다. 이를 종합하여 우리는 크게 여섯 유형을 생각하면서 중점적으로 돌보고 그들의 벗이 되고자 합니다.
가난한 자, 장애인, 탈북자, 외국인근로자, 다음세대들, 그리고 미자립교회 등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제일 어려운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는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나눔이라고 말입니다.
남을 돕는다는 것이 쉬운 일 같아 보여도 실제적으로 해보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 속에서 위대한 인물, 세계 역사 속에서 위대한 인물, 아니 우리나라 역사에서 훌륭한 인물로 인정받는 사람들 중에 흔히들 말하는 재물의 부자가 있습니까? 별로 없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부자로서 하나님의 부름 받아 쓰임 받은 인물이 누굽니까? 욥의 경우를 보면 부자가 되었고 가난하게 되었으나 믿음을 지킨 사람입니다. 그가 부자로 있을 때 부름 받았다기 보다는 하나님을 잘 경외해서 부자가 된 사람입니다. 물론 이삭과 야곱이 거부가 된적은 있지만 이미 선택된 백성의 삶을 살면서 얻은 복이었습니다. 그러면 신약시대에는 누가 있을까요? 예수님의 무덤을 제공했던 아리마대의 사람 요셉을 "부자 요셉"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사실 삭개오가 부자일 때 부름을 받고서는 예수님을 영접한 후에는 가난한 사람으로 스스로 내려앉았습니다. 재산 절반을 잘라 주었습니다. 토색한 것 네배나 갚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유한한 재물을 가지고 영원한 것을 얻는 지혜로운 자였습니다.
그래서 잠언 23:4절에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말씀 9:23절 말씀,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해에는 우리교회 모든 성도들이 작은이들의 벗이 되도록 합시다. 그들의 친구가 됩시다. 그들의 삶에 들어가서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삶이 되도록 합시다. 예수님이 그런 삶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떡을 나누어주면서 "이것을 받아 먹으라 내가 너를 위한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자신이 누릴 영광을 다 나누어준 분들은 영원히 아직도 우리곁에 맴돌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던 1인분의 도시락, 전재산인 향유 한옥함을 께트렸던 마리아, 자신의 전 재산이라 할 수 있는 동전 한잎을 드렸던 여인, 자신이 묻힐 무덤을 주님을 위해 내어놓았던 아리마대 사람 부자 요셉 등입니다.
얼마나 가졌느냐 보다는 어떻게 얼마나 어디에 사용하였는가가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물질만은 아닙니다. 당신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때문에 작은 이들의 마음을 추스르며 아우러다가 속이 상해 다 썩어 문드러지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삶이 회복되고 생명이 살아난다면 그것을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작은 것이라도 나눌 때에 위대한 역사를 일으킵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것을 다 나누었을 때에 온 인류가 구원받게 되는 통로가 열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주님만 위하여 살았을 때 세계에 복음이 증거되어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 마산에 치과병원을 운영하는 박윤규 원장이 있습니다. 철도고등학교를 졸업하여 철도공무원으로 취직해서 근무하던 중 5개월이 지났을 때 사고를 당해 다리가 잘려나갔습니다. 그러나 비관하지 않고 4년동안 열심히 준비하여 치의대에 들어가 공부하여 치과의사가 되어 병원을 차린 것입니다. 그는 지난 2011년도 7월에 아름다운 납세자로 표창을 받았지만 그 보다 더 아름다운 일을 많이 하는데 그것은 곧 나눔의 삶입니다. 이윤의 극대화 대신 나눔과 배려의 길을 선택한 그는 충만한 도덕적 실천 의지를 살려 더불어 사는 세상을 구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치과 경영 외에도 마산대학 치기공과 외래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면서 16년째 지역사회에서 따뜻한 봉사활동을 펼쳐왔습니다. 또한 경제적인 문제로 치과 진료를 받지 못하는 저소득 계층 장애인들에게 진료비를 지원해주고, 15년간 매년 4명의 대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며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이 외에도 교도소 재소자들에게 무료 틀니 시술을 진행했으며, 지속적으로 국내외 의료봉사활동을 전개하며 질 높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왔습니다. 박 원장은 의료 환경이 열악한 베트남 오지에서 봉사활동을 펼쳐 지역민들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데 기여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박 원장은 "자원봉사와 나눔은 최고의 가치이고 시민사회의 중요한 기반"이라면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내가 가진 달란트를 최대한 활용해서 나눔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건강 사회를 이룩하는 데 일조하겠다"고 피력했습니다. 이런 자세는 기독교인이 가졍야 할 기본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작은 이들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고, 작은이들에게 하지 않는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오늘 성찬의 나눔을 통해 우리도 예수님처럼 나눔의 삶을 삽시다. 그래서 반드시 우리 모두는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오른편에 서는 자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지극히 작은 한 사람
마 25:41-46 / 임덕순목사
요즘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중심적이어서 오직 자기 평안과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기를 좋아하고 희생은 싫어합니다. 믿는 사람들도 주일 하루를 종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힘겨워 합니다. 이웃에게 조그만 사랑을 베푸는 것도 아까워합니다. 하나님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축복의 수단으로 삼고 살아가려 합니다. 이웃을 사랑과 섬김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성공과 행복의 수단으로 삼으려 합니다. 하나님이 첫째이고 이웃이 둘째이고 내가 셋째가 되어야 하는데, 내가 첫째이고 하나님이 둘째이고 이웃이 셋째도 못됩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신의 평안과 쾌락만을 추구하며 살고 있습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죄란 잘못된 짓을 하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마땅히 해야 할 옳은 일을 하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 요리문답에 의하면 죄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지 않거나 순종하는데 부족한 것을 말합니다.
본문은, 주리고 목마른 자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지 않는 것과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동정의 마음과 사랑의 손길을 펴지 않는 것을 죄라고 규정합니다. 보통 죄가 아니라 저주 받을 죄라고 규정합니다. “또 왼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41)라고 말씀했습니다.
물론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선행이나 사랑의 행위로 받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우리가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구원받은 사람에게 선행과 사랑을 강조하였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규정했습니다(약2:26). 사랑이 없는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는 헛된 것이라고 규정했습니다(고전13:2). 예수님은 선행을 강조했습니다. “이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선행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말씀했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는 표식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13:16).
본문의 내용은 최후의 날에 주님은 사람들을 양편으로 갈라놓으시고는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천국으로 가라고 하시면서 “너희는 내가 배고플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오른편 사람들이 저희는 주님께 그런 착한 일을 해드린 적이 없다고 말하자, 주님은 “네 주변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너희는 마귀를 위해 준비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내어 쫓으시면서 “너희는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실 물 한모금도 주지 않았고 내가 옥에 갖히고 병들었을 때에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그들이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는 주님을 단 한번도 뵌 적이 없습니다.”라고 항변합니다. 그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 주변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대답하신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사람은 내게 아무 의미가 없고 상관도 없는 사람 같지만 실은 그들이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알아보는 실험도구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동정과 사랑의 손길을 펴지 않는 것을 저주 받을 죄라고 규정했습니다. 눅16장도 선행이 구원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을 가르칩니다. 한 부자가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운 생활만 하고 선한 일을 일체 행하지 않다가 결국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왼편에 있는 자들이 범한 죄가 무엇이었는지, 그들의 세 가지 잘못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왼편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과 주인을 굳은 사람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마25장에는 세 가지 비유가 나오는데, 등을 가지고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친구들의 비유가 나오고, 주인이 타국에 가면서 달란트를 종들에게 맡긴 비유가 나오며,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셋은 서로 보완되는 비유입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친구들 비유는 어느 시간에 주님이 오실지 모르니 항상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성도의 자세를 가르치는 비유입니다.
그리고 달란트 비유는 주인이 맡기신 것을 주인이 돌아오기 전까지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 것인가를 알리면서, 주님이 재림하셔서 심판하시는 날이 오기 전에 주님이 맡기신 것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비유입니다. 그리고 양과 염소의 비유는 주인의 것을 잘 관리한 착하고 충성된 종들이 상을 받아야 마땅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고, 주인의 것을 방치하거나 자기 마음대로 사용한 사람이 벌 받을 이유가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과 왼편에 있는 염소같은 사람은 같은 종류의 사람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나 왼편에 있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을 ‘굳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마25:24). 누가복음 19:21은 ‘엄한’ 사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왼편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굳은’ 사람, ‘엄한’ 사람, ‘무서운’ 사람, ‘무정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염소 취급받은 사람들은 주인과의 관계가 옳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인에 대한 애정도 없었고 존경도 없었습니다. 그랬기에 순종도 없었습니다.
염소는 주인이 앞으로 가자고 하면 앞발을 땅에 굳게 버티고 가지 않습니다. 목에 맨 줄이 끊어져라 하고 고집을 부리며 버팁니다. 염소 같은 사람은 고집쟁이이고 굳은 사람이고 불순종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과 순종의 관계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굳은 분으로 생각하며 하나님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살면 그 사람은 염소 같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을 굳은 분으로 생각하며 사는 사람은 자기 마음이 굳어버린 불행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애정의 관계, 존경의 관계, 순종의 관계가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목회자를 굳은 사람으로, 무정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불행한 사람입니다. 목회자와 사랑과 존경의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 자신의 마음이 굳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나의 인생이 좌우됩니다. 내가 목회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나의 인생이 좌우될 수도 있습니다. 자기 혼자서 고민하는 문제를 가지고 나와서 “목사님 저 요즘 이런 문제로 고민하고 있어요. 기도해 주세요.” 하면, 기도도 해드리고 내가 아는 한 조언도 해드릴 텐데, 목사를 상대도 해보지 않고 그냥 굳은 사람일 것이라고 판단해 버리고는 ‘목사님은 나를 무시하고 상대도 해주지 않을 걸?’ 이라고 생각하고 찾아올 생각도 안합니다. 목사님한테 가려면 아마 봉투나 두둑히 가져가야 인정해 줄 텐데, 나는 돈이 없으니 상대도 안 해 줄꺼야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마음이 굳은 사람입니다.
저는 부자 성도가 사주는 최고급 레스토랑의 음식도 좋아합니다. 부자나 높은 사람들이 사는 형편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좋아하는 것은, 가난한 성도가 자기 집에서 먹던 대로 저녁을 함께 먹자고 초청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님 저 이렇게 살아요" 하고 마음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그보다 좋은 대접은 없습니다. 혹은 길가의 허름한 음식점에서 5,000원짜리 동태찌개를 사주면 너무 좋습니다. 아니 식사대접이 없어도 좋습니다. 사실 저는 요즘 소식을 하기 때문에 음식대접은 부담 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목사님 저 요즘 이런 고민이 있어요. 목사님이 제 사정을 아셔야 기도해주실테니까 말씀드려요 기도해주세요.”하고 신뢰하는 사람을 가장 좋아합니다. 그런 분을 만나서 사정을 듣고 기도하고 그들에 맞게 말씀을 준비하여 나누어 주는 것이 제가 할 일이고 보람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를 굳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굳은 사람, 매정한 사람, 고압적인 사람으로 알면 괜히 저만치 물러가게 되고 은혜를 받기 어렵습니다. 교회에 오기도 싫어질지 모르고, 교회에 와도 그런 고약한 목사의 설교가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그러니 주의 종을 굳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도 알고 보면 부드러운 남자입니다.
하나님을 굳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어느덧 자기 자신도 굳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을 부드러운 분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어느덧 자기도 부드러운 사람이 되고 맙니다. 왼편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과 주인을 굳은 사람, 무정한 사람, 엄한 사람으로 보는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이 좋고, 목사님이 좋아야 되는데, 하나님도 굳은 분으로 목사님도 굳은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인의 일을 싫어했고 게으름피고 저만치 머물러 있다가 주인이 오셨을 때 책망과 내어쫓김을 당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중에는 그런 분이 한 분도 없기를 바랍니다.
2. 왼편에 있는 자들은 고난당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굳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세상만사에 대해서도 굳은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귀하고 아름답게 보이지도 않고, 동물과 식물들이 귀하고 아름답게 보이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이 배고파서 죽어가도 불쌍한 생각을 가지지도 못하고, 동물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죽어가도 불쌍한 마음을 가지지도 못합니다. 마음이 굳어지고 무디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무정하게 보는 사람은 사람에게도 무정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느끼지 못한 사람은 사람에 대한 사랑도 나타내지 못합니다. 사랑을 받고 사랑을 느끼는 사람만이 사랑을 나타낼 수 있고 사랑을 베풀 수도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고난당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을 품지 못하고 굳은 마음과 무정한 마음을 품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 되어 있습니다.
눅10장에는 강도를 만나 매를 맞고 거의 죽게 된 사람을 보고도 그냥 지나간 무정한 제사장과 레위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눅16장에는 문전걸식하는 병든 거지 나사로에 대한 관심이나 동정심을 품지 않은 무정한 한 부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눅18장에는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못한 무정한 부자 관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와 같은 이야기들의 공통적인 가르침은, 고난당하는 사람들에게 동정심도 사랑의 손길도 펴지 않는 것은 큰 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자기에게 도움을 줄만한 사람이라고 판단되면 비위, 쓸개 다 떼어놓고 쫓아다니며 아부하지만,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사람한테는 한 조각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이웃이 평생을 살면서 예수에 대한 소식도 듣지 못하고 이 세상에 대하여 한을 품고 고생하면서 살고 있어도, 그를 향한 동정도 없고 그들에게 사랑을 주고 복음을 주라는 주님의 말씀에도 관심이 없어서 전도할 꿈도 꾸지 않습니다. 이게 죄입니다. 고난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런 동정의 느낌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은 그 영혼이 위태로운 상태에 처해 있는 사람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지극히 작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내가 찾아갈 필요가 없는 사람, 내가 모른 체해도 아무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거래처의 사장 따님이 결혼한다면 모른 체해서 되겠습니까? 당장 거래가 끊길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지독히 가난한 사람이 병원에 입원했다면 여러분이 문안가지 않는다고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무슨 손해가 오겠습니까? 아무런 상관이 없겠지요? 바로 그런 사람이 지극히 작은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따스한 마음을 갖고 대하며 살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고난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도 아무런 동정의 느낌을 가지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영혼이 위태로운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이며 주님이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있으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땅에 묻어둔 사람이고, 주님을 굳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편견으로 세상을 살면서 남에게 독한 태도를 보이는, 마음이 사망의 병에 든 사람입니다.
3. 왼편에 있는 자는 고난당하는 자들을 찾아가지도 돕지도 않았습니다.
왼 편에 있는 자들은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에 손과 발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행동이 있었는데 비해, 왼편에 있는
오네시보로는 옥중에 있는 사도 바울을 여러 번 찾아가서 돌아보았으나 부겔로와 허모게네는 찾아가지도 않았고 나중에는 바울을 버렸습니다(딤후1:15). 여러분들이 지난 1년 동안 고난당하는 자들에 대한 아무런 사랑의 손길과 발길을 펴지 않았다면, 여러분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고 여러분의 영혼은 위태로운 상태에 처해있다고 하겠습니다.
청교도들은 자신이 믿음에 서 있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자신이 주님과 올바른 관계에 서 있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일부러 고행도 했고 일부러 선행도 했습니다. 그들의 선행이나 고행은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감비아나 니제르나 페루나 터키 등 가난하고 복음을 제대로 듣지 못한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어서 선교사를 보내서 그들을 돕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은 선교사를 시켜서 저 먼데 사람들에게만 해서 다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서 우리가 손수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 하면 이 일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가 이 일을 외면하면 악한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값싼 은혜의 종교도 아니고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종교도 아닙니다.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를 강조하는 실천의 종교입니다(살전1:3).
기독교는 눈물과 사랑을 강조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구제와 봉사를 강조하는 종교입니다.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느니라.”(행10:4). 그런데, 왼 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구제의 손길과 발길이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난 1년 동안 고난당하는 자들에 대한 아무런 사랑의 손길과 발길을 펴지 않았다면, 전도 한 번도 하지 않았다면, 여러분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위태로운 상태에 처해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웃들의 병들고 가난하고 소외된 육체와 생활도 우리가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일이거니와, 그들의 소외된 영혼은 더더욱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대상입니다. 그들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여 외롭고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하여 혼자 절망하고 기도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 너무나 큰 실망을 당하여 이제 희망이 없다고 자살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죄짓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님을 전해주지 않아서 그들이 힘들 때 주님께 위로와 해결을 받게 해주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나에게 그렇게 귀한 힘이요 위로요 구원이시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려주지 않아서 그들이 지은 죄를 씻음 받지 못하고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정말로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그러한 태도를 믿는 사람의 태도라고 인정하실 리 없으니, 우리를 왼편에 세우실 것이고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히지 않았으며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않았으니 너희를 위해서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하실지 모릅니다.
우리가 아무리 제가 한가람교회 집사였고 장로였고 권사였다고 말씀드릴 지라도,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시며,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냉정하게 내치실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따스한 가슴을 갖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굳은 분이라고 생각하고 목사님을 굳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는 생각만 하고 남들은 티끌만큼도 생각하지 않는, 굳은 가슴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치명적인 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굳은 마음을 품고 이웃에 대해서 무정한 마음을 품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굳어있다는 증거이고, 이것은 치명적인 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게 원수 같은 사람에게도 사랑을 베풀라는 명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롬12:20)고 분부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부드러운 마음, 감사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을 품으시기를 바랍니다. 고난당하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는 마음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손과 발을 움직이고 물질을 동원하여 사랑을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복음을 주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은 조만간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 오른 편 아니면 왼 편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주님으로부터 두 말씀 중의 한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라는 말씀이든지, 아니면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이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감사와 사랑의 마음과 이웃을 향한 동정과 사랑의 마음을 품으시고, 사랑과 구제와 전도의 손과 발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이 모두 오른 편에 서는 복된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두 주일 전에 성찬식을 했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을 떠날 날을 앞두고 제자들을 모아 저녁식사를 하시다가, 떡을 떼어 주시면서 이것은 내 몸이니 이것을 먹을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고, 그 뒤에 붉은 포도즙을 잔에 부어주시면서 이것은 너희와 언약을 세우기 위해서 흘리는 나의 피니 이것을 마시면서 나를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교통사고 당해서 죽은 사람의 빈소에 차에 치어서 깨진 얼굴을 그대로 영정사진으로 걸어둔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절대로 그렇게는 안합니다. 건강하고 밝고 좋았을 때 찍은 사진을 걸어둡니다. 자기의 실패한 모습을 후세에 남기기를 원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당신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살점이 찢기고 피가 줄줄 흘러내린 그 모습을 대대로 기억하라는 유언을 남기신 것입니다.
주님은 왜 당신의 비참한 죽음을 그토록 오래 기억하라고 하셨을까요?
제자들은 다음날 주님이 채찍에 맞아 살점이 다 떨어지는 광경을 보다가 다 도망쳤고, 십자가에 산채로 못 박힐 때 피가 주룩주룩 쏟아져 흐르는 것을 보다가 현기증이 나서 도망쳤을 것입니다. 그 일을 경험했던 제자들이 나중에 성만찬을 할 때,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다’ 하신 말씀을 듣는 순간에, 주님의 살이 채찍에 맞아 찢겨 떨어지고 피가 주룩주룩 흘러내리던 광경이 떠오르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주님은 왜 그것을 잊어버리지 말고 자주 자주 기억하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이 당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고, 그것만이 우리의 죄를 사하는 길이었고, 그것만이 우리가 이웃에게 전해줄 가장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주님이 바다를 밟고 가신 기적이나, 나환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사람을 살린 기적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에 처참하게 죽으신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아무런 가치 없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이 가지신 최고의 생명을 쏟아주셨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우리가 기억하여야 하고 그대로 따라서 살며 이웃에게 따스한 사랑을 베푸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구제요 봉사요 사랑은 전도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이웃을 보고도 아무 관심이 없어서 복음을 전해주지 않는다면, 주님을 굳은 사람으로 여기고 자기가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고 있는, 왼편의 염소와 같은 사람입니다. 굳은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지 말고, 지극히 작은 이웃에게 정성으로 복음을 전하여 사랑을 실천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