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청교육대... 쉽게 말해서 일반 부대에다 교육대를 설치해놓고 훈련을 시키는 것을 말하는데 대상자들은 모두 민간인들입니다. 이 삼청교육대는 1980년 당시 집권세력으로 등장한 전두환대통령 밑에서 수석비서관으로 있던 허화평 허삼수씨가 제안하여 설치된 것으로 그옛날 국토건설단을 모델로 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을 드리면 1961년 5월16일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군사정부는 당시 깡패나 범법자 같은 사회악 같은 존재들을 일망타진한다는 그런 생각으로 이들을 모두 잡아다가 국토건설단원으로 임명시킵니다. 물론 임명이라는 의미보다는 강제로 집어넣었다고 하는 측면이 강합니다. 그래서 이들을 동원하여 각종 국토개발 사업을 진행하게 되었는데 쉽게 말해서 이때 끌려간 사람들은 현장 노가다로 일한 셈이지요. 그리고 이들이 건설한 시설물 중에 지금도 유명한 것이 제주도에 한라산을 가로지르는 5.16 도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국토건설단을 모방하여 1980년 집권한 신구부세력들이 새로운 사회질서 구현을 목적으로 깡패나 범법자들을 모두 잡아다가 군부대에 집어넣고는 훈련을 심하게 시켜서 인간개조를 하려고 했던 것이 바로 삼청 교육대입니다. 대개의 교육은 군인들도 힘들어하는 통나무 들고 일어서기나 무거운 물건 들고 연병장 뛰기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만일 훈련을 거부하게 되면 그자리에서 구타 및 가혹행위가 이어지는지라 인권유린이 극에 달하였으며 일부는 건강한 몸으로 들어갔다가 반병신은 물론이요 죽어서 시체로 돌아오는 사람들까지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회질서 확립을 목적으로 시작하였다고는 해도 나중에는 인원수를 채우고자 아무나 막 잡아가서 엄청난 물의를 일으키게 되었는데 예를 들면 밤에 술취해서 걸어가는 사람이나 길바닥에 주저앉아 버린 사람. 고성방가 하는 사람. 신군부에 반대하였던 운동권 세력이나 구집권층 일부 세력 들을 잡아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강창성 전 육군 보안사령관입니다. 이 사람은 육사 8기 출신으로 보안사령관에 재직중이던 1973년도에 그 유명한 윤필용 장군의 모반 음모 사건을 수사하게됩니다. 이 사건은 당시 수경사령관이던 윤필용 소장이 술자리에서 각하가 물러날 때가 되었다는 술김에 한 발언이 문제가 되어 모반음모로까지 확대되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수사하면서 당시 윤필용 장군과 교류가 깊었던 훗날의 신군부로 불리우게 되는 유학성.손영길.전두환.노태우.권익현 같은 지휘관들을 체포하여 수사하면서 이들과의 관계가 불편해졌었는데 그나마 박대통령이 중간에서 절절하게 제어하여 하나회로 불리우는 단체의 본류라고 할 수 있던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이 살아남게 됩니다. 그리고 강창성 장군은 좌천되어 대전의 5관구 사령관을 끝으로 중장에서 예편당하게 되죠.그리고 이후에 해운항만청장에서 물러난 직후인 1980년 2월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 장군의 초대로 보안사령관실에서 만나서 국정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중 전두환 장군이 집권욕을 드러내자 이를 강하게 비판하고 자리를 뜨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해 8월 결국 이들이 권력을 잡게 되면서 강창성씨를 삼청교육대에 보복성으로 끌어다 넣은 것이지요.
결국 강창성 장군은 삼청교육대에서 한 7개월 정도 교육받고 나오니 몸무게가 무려 17kg이 줄고 당뇨병이 생기는 등의 엄청난 고생을 해야 했지요.
당시 강창성씨의 회고를 들어보면은 "한국전쟁때부터 힘든 군생활을 해서인지 군시절 어떤 훈련도 힘들게 느낀적은 없었지만 삼청교육대는 훈련이 아니라 아예 사람을 잡는 그런 살인적인 고문에 가까웠다. 나자신도 어차피 당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이를 깨물면서 훈련을 받았고 이후 삼청교육대를 나와보니 몸은 완전히 엉망이었다."
그리고 어떤 남자의 경우에는 부인이 면회를 왔었는데 당시 면회는 허용되었지만 삼엄한 감시로 인하여 함부로 삼청교육대의 실상을 폴로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쉽게 말해서 면회장에 면회객을 가장하여 군인들이 엿듣고 있었다는 이야기인데요.
이 남자의 경우 부인이 당시 사이다 병에 소주를 넣어가지고 와서 주변사람몰래 남편에게 마실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게 감시하는 군인들에게 들켰나 봅니다. 그리하여 면회 끝나고 돌아가던 부인을 붙잡고 몰래 술을 반입했다는 것을 트집잡아서 집단으로 윤간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편은 삼청교육대 훈련도중 가혹행위가 동반되면서 사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삼청교육대의 운영은 1983년인가 결국 마무리 되었는데 엄청난 인권유린의 휴유증만 남긴채로 끝이났으니 문제가 많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당시 집권층 세력들은 아직까지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고 전혀 예상치못한 측면도 있었다고 항변을 합니다. 하지만 엄청난 인권유린과 휴유증을 남긴 삼청교육대는 지난날의 잘못된 역사로써 분명 새로운 재조명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김영삼 정부 이후로 많이 재조명이 되었으며 현 정부에서도 삼청교육대에 관하여 다시금 재조명을 하겠다고 하니 지금까지 밝혀진 부분 이상으로 밝혀질 것이라 생각되며 아울러 그 당시 삼청교육대를 설치 운영하는 데 앞장섰던 독재정권의 권력자들에게도 준엄한 역사의 심판이 내려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참고로 현재 특별법이 제정되어 당시 삼청교육으로 인한 피해자에게 일부 보상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난날의 아픈기억과 휴유증이 돈 몇푼으로 보상되고 치유되지는 않겠지요. 아무튼 지난날의 슬픈역사가 앞으로는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가득하며 이만 마칩니다.
내가 80년대 중반에 군 생활할 때 사용하던 막사가 삼청교육대 교육생들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랍니다. 2층 침상이었는데, 얼마나 굴렸는지 침상의 난간이 검정색으로 코팅이 되가지고, 치약같은 거로 아무리 닦아도 광만 날 뿐 안닦였죠. 사연을 알고난 후 밤에 붉은 취침등 아래서 야광처럼 반짝여서, 좀 으시시했죠. 똥싸개(인사계, 중대선임하사)한테 들은 바를 정리하면, 각 사단마다 배정을 받아가지고, 초기에는 정신개조를 위해 유격훈련 같은 걸 시겼다고 합니다. 오리지날 유격이라고 하더라고요. 자세안나오거나 퍼지면 굴리는게 아니라 머리건 어디건 바로 몽둥이가 날아가는... 그리고 80년대 말에 없어졌지만 목봉체조까지... 이게 사람잡는거죠. 고등학생도 있었고 노인도 있었고, 몸이 불편한 사람도 있었는데 예외없이 다뤘다고 합니다. 훈련외에는 당연히 작업이겠죠. 우리 사단에 대성산이라는 1000고지가 넘는 산이 있는데, 80년대 중반 당시에도 큰 나무는 없고 잡목만 있었는데 그 교육생들이 벌목했고, 여러명이 다쳤다고 합니다. 그리고 혹시 우리사단에서 교육생 신분으로 겨울을 지냈다면, 농반진반으로 표현하면 미치지 않았다면 거의 득도 직전까지 갔을 겁니다. 추억해보면, 우리동네에 껄렁대던 선배가 있었는데, 한 3개월 삼청 생활을 하고 나왔는데, 거의 반년정도 밖에 나오지를 못했죠. 삼청은 문명사회라면 나타나서는 안될 괴물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