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는 조선의 왕세자이며 인조와 인열왕후의 장남이며 효종의 형이다. 위키백과
출생: 1612년 2월 5일, 서울특별시
사망 정보: 1645년 5월 21일, 향년33세
의문死.
서울특별시 창경궁
형제자매: 효종, 인평대군, 용성대군
배우자: 민회빈 강씨 (1627년–1645년)
자녀: 경안군, 경선군, Seokgyeon, 경완군, 경숙군주, 경녕군주, 경순군주, Seokrin,
부모: 인조, 인열왕후
손주: 임창군, 양원군, 임성군, 이의저
1645년(인조 23년) 소현세자는 드디어 귀국했다. 병자호란이 있던해, 스물여섯의 나이로 청에 볼모로 끌려갔던 소현세자가 9년 만의 인질생활을 끝내고 꿈에 그리던 조국에 돌아온 것이었다. 귀국 짐꾸러미에는 청에서 얻은 수많은 과학문물과 책이 들어 있었다. 그는 당시 세계 제일의 선진국이었던 중국에서 배운 과학문물을 조선에 전파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귀국 두 달 만에 갑작스레 죽었다. 심상찮는 죽음이었다. 그의 시신을 염습하는 데 참여했던 친척 한 사람이 증언하기를, 소현세자의 시신은 바로 독살당한 사람의 그것이었다. 온몸이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공식적인 사인은 학질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학질은 충분히 치료가능한 병이었다.
한 나라의 왕위를 계승할 세자의 죽음이었는데도 아버지 인조는 이런 의심스런 죽음에 대해 조사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담당의관인 이형익은 처벌을 받아 마땅했음에도 인조는 조사조차 받지 못하게 했다. 게다가 장례 역시 대군보다 더 초라하게 지냈다. 왕위 계승권도 세자의 장자가 아니라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에게 돌아갔다. 만약 소현세자의 죽음이 사주에 의한 독살이었다면 인조는 왜 자신의 친아들을 독살한 것일까?
인조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세자를 경계했다. 하나는 청의 황제가 자신을 퇴위시키고 소현세자를 즉위시키려 한다는 의심을 품어서였다.
소현세자는 청의 수도인 심양에 있었는데, 그가 거처하는 심양관소는 조선을 대표해 청과 포로나 공물에 대해 논의하는 일종의 대사관 같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심양관소에서 소현세자는 청과의 관계를 원만히 하기 위한 다각적인 활동을 펼쳤다. 청의 실력자와 교분을 맺고자 선물공세를 펼치기도 했다. 이를 위해 농장도 경영했고 무역거래도 텄다. 이러한 활동으로 청 황제의 섭정이었던 구왕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등 소현세자는 청에서 위상도 높았고 좋은 평도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청의 황실에서는 조선과 다르게 세자에게 일정한 정치적 역할을 부여하는 관례가 있었는데, 소현세자에게도 이를 적용시키고 있었다. 소현세자는 이에 부응해 조선정부를 대표하는 활동을 벌이는 한편, 조선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관찰사에게 소요물자를 요구하는 등 왕의 권한 일부를 미리 행사하기도 했다.
소현세자를 대신해 왕위에 오른 효종(봉림대군) 역시 심양에 볼모로 가 있었지만, 그는 북벌을 통한 복수를 꿈꿨다. 어영군을 증설해 병력을 강화하고 신식 총기를 제작하는 등 전쟁준비를 위한 실질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조정대신들의 생각은 달랐다. 무력수단을 준비하기 전에 수신을 통해 군왕의 덕을 높이고, 백성의 기강을 바로 잡아 국력을 배양해야 한다는 성리학적 수신이론을 내세웠다. 송시열을 비롯한 조정대신들의 이런 입장은 실질적인 북벌이 아닌, 자파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위한 명분축적에 불과했다. 당연히 북벌은 지지부진했다. 사대주의 입장에서 명의 복수를 꾀한다는 시대착오적인 문신들의 태도와 싸우던 효종은 군사 한번 일으켜보지 못한 채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이후 북벌론은 조선조정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첫댓글 인조는 무능했는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