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애틀랜타와 그 외곽 도시들이 건설된 곳은 원래 크릭 원주민과 체로키 원주민이 거주하던 곳이다. 1813년, 영국인들에게 1812년 전쟁 당시 설득되어 그들을 도와주었던 크릭 원주민들은 서남부 앨라배마의 포트 밈스를 공격하여 포트 밈스는 전소되었다. 이 분쟁은 격화되어 크릭 전쟁으로 발전되었다. 그에 대항하여 미국은 오크물기 강 및 채터후치 강 유역에 요새를 잇달아 건설하였다. 이 요새 중에는 호그 산 꼭대기의 포트 대니얼과 현재의 조지아 주 대큘라에 위치하는 포트 길머도 있었다. 포트 길머는 "피치트리 스탠딩 Peachtree Standing" 이라고 불리던 중요한 미국 원주민 동네 옆에 위치했다. "피치트리 스탠딩" 은 소나무라고 믿어지던 커다란 나무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이다. (나무에 흐르던 송진 - 피치 Pitch - 혹은 수액 때문에 그렇게 생각되었다고 한다.) 송진 (Pitch) 이라는 단어가 복숭아 (Peach) 로 오해되어 그렇게 명명되었다. 이 장소는 원래 크릭 원주민과 체로키 원주민의 영역 중간에 있던 원주민 회합 장소로, 피치트리 골짜기의 물이 채터후치로 흘러들어가는 곳이기도 했다. 요새는 곧이어 포트 피치트리로 개명되었다.
원래 크릭 원주민의 땅이었던, 디케이터를 포함하는 현 메트로의 동쪽 지방은 1823년부터 백인 이주민들에게 개방되었다. 1835년, 체로키 원주민의 몇몇 지도자들은 대다수 체로키 원주민들의 동의 없이 뉴 에초타 조약에 서명함으로써 미국에게 그들의 영역을 넘겨주고 말았다. 그리고 이는 결국 눈물의 행렬을 초래하였다.
1835년, 조지아 주의회는 서부 및 대서양 철도를 건설하여 중서부로의 무역 교두보를 제공할 것을 결의하였다. 본디 철로는 채터누가에서 출발하여 채터후치 강 동쪽에 위치하는, 단순히 종점이라고 불리던 곳까지로 계획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적으로 어거스타와 메이컨을 연결하는 조지아 철도 및 메이컨과 서배너를 연결하는 서부 철도와 이어지게 된다.
조지아 주 국무장관에 따르면, 숙련된 군 기술자였던 스티븐 해리먼 롱 대령이 선발되어 종점의 위치를 추천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그는 다양한 길을 살펴본 다음, 현재 애틀랜타의 파이브 포인트 근처로 그 위치를 잡았다. 시작점을 의미하는 0마일표는 계속해서 이동하게 되었지만, 현재 그것이 위치하고 있는 언더그라운드 애틀랜타는 롱이 원래 선택했던 곳과 매우 가깝다.
많은 부지들이 종점으로 계획되거나 실제로 지정되기도 하였지만, 그 역사는 분명하지 못하다. 1837년, 현재 노크로스가 위치하고 있는, 포트 대니얼이 자리하던 호그 산 근처에서 처음으로 공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곳은 골짜기와 가파른 비탈이 너무 많아서 곧 방치되고 말았다. 공사는 포트 피치트리 가까이의 몽고메리 페리로 옮겨져 다시 시작되었다. 이 이동은 1마일당 18,000달러의 절약을 불러왔다. 몇몇 역사학자들은 현재 애틀랜타 동쪽에 위치하며 1823년 설립된 도시인 디케이터가 원래 종점으로 계획되었지만 소음과 범죄에 대한 우려 때문에 거부되었다고 주장한다.
몇 달 후, 의회는 드디어 현재 조지아 세계 회의소가 위치하고 있는 곳 가까이에 0마일표를 설치하기로 합의한다. 왜냐하면 그 곳이 상대적으로 평평했으며 물건을 하역하고 재적재하기에 쉬웠기 때문이다. (0마일표는 나중에 살짝 동쪽으로 움직이게 된다.) 그 곳은 거기에 집과 가게를 지은 존 스래셔의 이름을 따서 스래셔빌이라고 불리게 된다.
나중에 애틀랜타의 일부로 편입되게 된 주변 지역들도 개발을 시작하게 된다. 잘 알려진 원주민 트레일인 피치트리 트레일은 현재의 스와니에서 스탠딩 피치트리까지 뻗은 길을 말한다. 남쪽으로는, 1828년에 현재 캠벨타운 로드 지역에 아울 락 감리교회가 세워지게 된다. 1838년, 헨리 어비가 지선도로에 선술집 및 식품점을 열게 되는데, 그 곳은 페이시스 페리 로드 및 라즈웰 로드로 발전되게 된다. 2년 후, 선술집 문 앞에는 수사슴의 머리 (Buck's head) 가 장식된다. 그리고 그 지역은 곧이어 벅스 헤드 (Buck's Head) 라고 불리다가 벅헤드 (Buckhead) 라고 개명되게 된다.
1842년, 종점에는 6개의 빌딩과 30명의 거주민이 있었다. 2층 빌딩이 지어졌을 때, 거주민들은 조지아 주지사였던 윌슨 럼킨의 이름을 따서 지역의 이름을 럼킨으로 하자고 건의한다. 그러나 럼킨은 그 대신 그 지역의 이름을 자신의 딸 이름을 따서 짓자고 했고, 결국 종점은 마서스빌로 이름이 바뀐다. 3년 후, 조지아 철도의 수석 엔지니어였던 J. 에드가 톰슨은 그 곳의 이름을 짧게는 '애틀랜타', 길게는 '애틀랜티카-퍼시피카' 로 개명하자고 건의한다. 거주민들은 아직까지 철도가 단 한 량도 방문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에 찬성하였다. 그리고 그 지역은 1847년, 애틀랜타라는 이름을 달게 된다.
1845년, 조지아 철도의 화물차가 처음으로 애틀랜타에 정차하게 된다. 1846년, 메이컨 & 웨스턴이라는 세 번째 철도가 종점까지의 철로를 완공하여 메이컨과 서배너와 애틀랜타가 연결되게 된다. 도시는 팽창하기 시작하였다. 1847년, 두 호텔이 지어지고 두 신문이 발행된다. 인구는 2,500명으로 불어났다. 1848년, 첫 시장이 선출되었고 첫 살인이 저질러졌으며 첫 감옥이 지어졌다. 새로운 시의회는 나무로 된 인도를 짓기로 결의했으며, 시 보안관을 선출하였고 일요일의 가게 영업을 금지시킨다.
1854-55년경, 애틀랜타와 채터누가를 연결하는 또 하나의 철도가 완공된다. 그리고 애틀랜타는 은행, 매일 발행되는 신문, 화물 열차 공장, 벽돌 공장, 가스등, 극장, 의과대학, 소년원 및 재산세까지 갖춘 6,000명의 어엿한 도시로 성장하게 된다.
1860년대에 들어서는 조지아 주에서 4번째로 큰 도시로 발전하였으며, 1861년 남북전쟁 발발후 남군의 중요한 보급기지 역할을 하다가, 1864년 북군에 의해 점령되고 나서 윌리엄 셔먼 장군의 명령에 의해 모든 주민들이 도시밖으로 강제이주되었고 일부 교회와 병원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초토화되었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 1867년부터 새로운 도시계획에 의해 본격적인 복구가 시작되었고, 1868년에는 조지아 주의 주도가 되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기간동안에 인근 마리에타 시 지역에 대규모 전투기 조립공장이 들어서면서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였고, 대전 직후 질병통제예방센터(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CDC)가 들어서게 되었다. 1996년 하계 올림픽이 이 곳에서 열리면서 다시 한번 급격하게 발전하였고, 2000년대에 들어서 미국 내 10대 도시가 되었다.
*특징
애틀랜타는 마거릿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의 배경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미국 남동부의 경제, 문화, 산업, 교통의 핵심도시로서, 뉴욕과 휴스턴에 이어 미국에서 3번째로 많은 수의 포츈(Fortune)지 선정 500대 기업의 본사를 유치하고 있는데, 애틀랜타 및 그 인근에 본사가 위치한 주요 기업으로는 코카콜라, AT&T 모빌리티(구 Cingular Wireless), CNN, 홈디포(Home Depot), UPS, 델타항공 등이 있다.
현재 미국내 흑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들 중 하나이며,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흑인 목사이자 인권 운동가인 마틴 루서 킹 주니어의 고향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델타항공의 허브인 애틀랜타 하츠필드-잭슨 국제공항은 현재 이용객 수와 비행기 이착륙 횟수에서 세계 제일이다. 인천국제공항에서 애틀랜타까지 바로 가는 비행 노선을 대한항공과 델타항공이 운항하고 있다.
[2] 애틀랜타 시내에는 조지아 공대와 조지아 주립대학교가 있으며, 시내에서 약 10마일정도 벗어난 디케이터(Decatur)시에 에모리 대학교가 위치해 있다.
*볼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