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등산
이 재부
나는 출근 준비보다 등산 준비에 더 신경을 썼다. 평생처음 용기를 내어 시도하는
야간등산이니 긴장도 되었다. 설레는 마음을 속으로 감추고 준비에 분주했다.
잘 익은 술 한 병은 기본이고, 마른안주, 음료수, 주머니에 넣고 사랑 나누며 먹을 사탕
이며 과자, 껌까지 골고루 준비하였다.
퇴근과 동시에 등산복으로 갈아입고 차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조바심 내며 주차장을
달려가 만났다. 문경 가는 버스에 나란히 앉아 편한 마음으로 커텐을 내리어 서양 빛을
차단하고 주변 이야기부터 꺼내기 시작한다. 항시 웃는 인상에다 풋풋한 젊음이 뒷받침
된 사려 깊은 보살핌은 만날 때마다 나를 감동시킨다. 슬픈 이야기, 잘 되지 않아 고민
되는 일은 잊은 듯 표 내지 않고 항시 활달하게 내 이야기에 귀 기우려 응수해주고 감
탄하는 그 모습은 나를 더욱 힘나게 만든다.
나이를 까맣게 잊고, 내 직업상 찌들대로 찌든 관념의 벽을 넘어 장벽 같이 가리고 살
던 점잖은 체면도 풀어헤치고 사춘기 청소년으로 돌아가 기대고, 의지한다. 어른노릇과
사제지간이 뒤바뀐 듯 나는 주는 것 보다 몇 배의 새 정보와 위로를 받는다.
내가 경험하지 못하고, 생각 해 보지 못한 세계를 펼치며 안내하는 듯 시원한 필치로
그려내는 세상이야기가 너무 신선하여 인정하고 고개 끄덕이다 보면 이야기 속으로 깊
이 빠져들어 감탄사를 연발한다.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니 차는 어느덧 괴산을 지나 연풍에 도착하고 있었다. 지금은
세월이 좋아 이화령을 간단하게 터널로 통과하여 숨도 안 쉬고 넘지만 그때는 꼬불꼬불
한 이화령을 넘으려면 연풍 주차장에서 차를 점검하고 숨고르기를 하며 힘들게 넘는
때였다. 나는 여러 번 이화령을 넘어보고, 조령산 등산도 해 봤지만 그는 처음 보는 풍
경이 신기한 모양이다. 힘들게 비탈진 산길을 오르는 차창에 비치는 풍경을 말없이 바
라보며 산해(山海)에 펼쳐진 황홀한 저녁 빛과 떠가는 구름에 도취되어 무언의 시를 쓰
는 듯 보였다.
나도 같이 도취되어 응수하며 초점을 맞추지만 내 관심은 그의 표정을 읽으며 젊음이
활활 타는 내면의 세계를 부분, 부분 짐작으로 고민의 그림자를 읽어 낸다. 고개를 넘으
면 경상북도 땅이다. 내리막 경사가 급하고, 굽어진 길이 많아 손을 꼭 잡고 엄살을 떨
며 몸의 중심을 내게 기대었다. 나는 손을 풀어 허리를 잡고 어린 응석을 받으며 내 마
음의 문을 열고, 감탄의 열기와 따뜻한 체온을 불러드린다.
문경 가서 차를 가라 타고 1관문에 도착하니 하산하고, 귀가하는 차와, 사람이 분주
하다 해는 서산을 넘고 공기는 서늘해져 걷기는 아주 좋았다. 부지런히 걸어 석벽(石
壁)과 노송이 어우러진 계곡 반석을 찾아 흐르는 맑은 물가에서 여장을 풀고 발을 담근
다 세상 근심 다 떠내려 보낸 듯 물방울을 튀기며 사랑에 빠져들었다. 서쪽으로 지는
빛을 반사하는 조령산, 주흘산이 아름답다. 김밥을 안주로 저녁 식사를 겸하여 모과주
한 병을 간단히 비웠다.
전신으로 퍼지는 취기와 아름다운 경관, 물소리, 어둡기 시작하는 고요한 분위기는
사랑을 담아내기에는 최상의 조건이다. 속삭이는 듯 가벼운 발길로 어둠을 밟으며 2관
문을 향해 걸었다. 시선이 차단된 공간이 이렇게 마음 편하게 하는 것을 처음 느끼면서.
그는 어두움이 내리는 밤 분위기에 젖어 야간등산을 찬미하며 감탄한다. 나도 밤길은
많이 걸어 봤지만 조급함을 벗어버린 이번 산행이 신비스러웠다. 고개 들지 않아도 보
이는 하늘엔 별들의 잔치, 청량한 밤 공기, 풀벌레 소리, 조용조용 이야기를 늘어
놓으며 인생을 더듬는 기분은 경험 해 보지 않고는 모르리라 ......
물소리 요란한 용추폭포를 지나 200여m 남짓 걸었을 때 어두운 산 속에 불빛이 보였
다. 순간이지만 잊어버린 불빛! 호기심이 발동되고 반가웠다. 산 속에 나그네를 위한
배려인가? 말하지 않아도 발길은 그리로 가고 있었다. 무지개형 다리를 건너니 주막집
이다. 우리만 있는 줄 알았는데 동동주를 마시며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이 꽤 여러 쌍 있
었다. 우리도 파전과 동동주를 시켜놓고 아름다운 풍광, 정겨운 풍속도를 구경한다.
어두운 밤, 산 속에서 사랑에 취한 연인들의 속삭임이 그림 보다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
며 넋 나간 듯 바라보았다.
"선생님! 술이요." 권하는 술잔을 받으며 유정세월, 사랑의 불꽃 속에서 빠져 나왔
다. 우리는 서로 술을 권하며 금방 배운 대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며 때로는 소리내어
웃으며 주석을 압도했다. 주위가 조용해 고개를 드니 주객은 다 가고 우리만 남아 취기
에 불을 지르고 있었다. 주인은 조는지, 웃는지 석상같이 앉아 밤을 지키는데.
2관문을 지나니 인적은 끊어지고 천지가 조용하다. 노송이 취객을 바라보며 타일러
꾸짖을 듯 상순만 달빛을 받으며 서있다.
우리 두 사람은 오르막길을 거르며 마음도 옷깃도 다 풀어헤치고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로 세상을 애무한다. 곱게 펼칠 미래를 그려내며 소리는 없지만 힘찬 다짐을 한다.
술이 취한 듯, 슬픔을 토해내는 듯, 노래도 흥얼거렸다.
동화원 불빛을 뒤로 한 체 3관문을 오르니 달은 높이 뜨고 덩그런 누각이 한 서린 역
사를 말하는 듯 달빛에 젖어있었다.
땀을 식히고, 마음을 추스르며 영남 선비 이야기부터 신립장군, 이일장군의 패전의
모습도 그렸다 교만한 왜장의 비웃음 소리가 들리는 듯 수난의 역사를 더듬으며 장군
이 되라고 호국의 임무를 부여한다.
무엇을 털어 버렸는지는 몰라도 후련한 가슴이다. 가장 멋있는 젊은이에게 내 인생을
상담 받고, 사랑하는 제자의 영원한 길동무가 되기를 약속했다.
삶의 여로에는 태양 빛 밝은 대로만 있는 것은 아니리라. 지척을 분간하기 힘든 밤길
도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야간 등산에서 또 다른 인생길이 있음을 생각한다.
긴 인생길에서 만나 동행하는 사람들, 그 사랑 빛! 나 기대어 함께 살아가리라. 그리
고 나 또한 기대는 자에게 가슴을 비우리라 손 꼭 잡고 야간 산행을 하듯.
2004. 19집
첫댓글 무엇을 털어 버렸는지는 몰라도 후련한 가슴이다. 가장 멋있는 젊은이에게 내 인생을
상담 받고, 사랑하는 제자의 영원한 길동무가 되기를 약속했다.
삶의 여로에는 태양 빛 밝은 대로만 있는 것은 아니리라. 지척을 분간하기 힘든 밤길
도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야간 등산에서 또 다른 인생길이 있음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