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이 땅에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화성엔 가지 않을 거야
거기엔 내 좋아하는 참깨와 녹두콩을 심지 못하므로
오늘 핀 도라지꽃 그릴 한 다스 색연필이 없으므로
일기책 태운 온기에 손 쬐며 쓴 시를
최초의 목소리로 읽어 줄 사람 없으므로
지구 아니면 어느 책상에 앉아 아름다운 글을 쓰겠니?
노래가 깨끗이 청소해 놓은 길
어느 방향으로 책상에 놓아
내일 아침의 왼쪽 가슴에 달아 줄 이름표를 만들겠니?
생각하는 마음 때문에 세상 한쪽이 더워진다고 쓴 말을
어디에 보관해야 정오까지 빛나겠니?
샘물이 솟는 곳에서 살고 싶다던 사람을 서서 기다리면
나무에 남은 온기가 절반은 식어도
모르는 사람의 손이 따뜻하리라
-『서울경제/시로 여는 수요일』2023.07.12. -
토끼가 떡방아 찧는 달나라도 가보고 싶고, 은하수 강변에 가서 멱도 감고 싶었지요. 엄마 따라 참깨밭 녹두밭 김매느라 더위도 먹어 봤지요. 도라지꽃 봉오리 터트리며 낯선 도시로 가고도 싶었지요. 그림일기 몰아 쓰며 날씨 기억하느라 애도 먹어봤지요. 어쩌다 대문 앞 비질하는 것도 성가셨지요.
기를 쓰고 달아나온 이 별의 길목이 그렇게 아름다웠군요. 아침의 왼쪽 가슴에 이름표 다는 법을 이제야 배우네요. 내 손이 무연히 따뜻해진 이유를 알겠네요.
모르는 사람의 손이 더 따뜻하리라 / 이기철 『서울경제/시로 여는 수요일』 ▷원본 바로가기
사진 〈Bing Image〉
시 집
이 기 철
내 밥상 곁에는, 내 책상 곁에는, 내 잠자는 이불 곁에는 항상 갓 핀 채송화 같은 몇 권의 시집이 놓여 있다.
시집은 울타리의 굴뚝새처럼 조그맣게, 산 메아리처럼 또랑또랑하게, 돌 지난 아이처럼 눈을 그렁그렁하게 내 손끝에서 내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시집은 가끔 까닭 없이 마구간을 걷어차는 송아지 같이, 아무리 쫓아도 기를 쓰고 날아오는 볏논의 참새 떼같이, 때로는 달래도 달래도 그치지 않는 두 살 재기 손주의 트집같이 칭얼대며 내 곁으로 다가온다. 어제는 책상 위에 있었고 오늘은 방바닥에 있고 내일은 또 밥상 위에 있을 조그만 시집. 시집은 영문도 모르고 날아가는 어린 새처럼, 뺨에 대고 싶은 단풍잎처럼 혹은 바닥에서도 뛰어오르는 물방물처럼 내 온몸을 적시기도 하고 들끓게도 한다. 저 백 가지 생각과 백 가지 마음을 지닌 색동의 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