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전 5: 9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 고전 5: 12 교회 안에 있는 사람
2. 부도덕한 신자들로부터의 분리 ( 9 – 13 )
9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10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1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12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13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고전 5: 9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
우리가 악한 자들과 교제하지 말라고 할 때, 그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결코 이 세상과 격리되라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떠나 산 속으로 들어가라든지 혹은 따로 공동 집단을 만들어 그 속에서만 살라는 뜻이 아니다. 이 세상은 죄인들이 사는 세상이므로 그들과 전혀 교제하지 말아야 한다면 우리는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도는 이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의 전도 구역은 바로 죄악 된 세상이다. 우리의 사랑의 대상, 전도와 구원의 대상은 바로 이 세상의 죄인들이다.
1]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여기 "너희에게 쓴 편지"란 말은, 본서(고린도 전서)보다 일찍이 기록된 서신이었다. (Grosheide).
헬라어 '에그랖사'(*, '내가 쓰다')는 부정 과거 능동태로서
(1) 이미 그가 썼던
과거의 한 편지를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Calvin,Meyer, Godet).
(2) 서신서에 등장하는 부정 과거의 특징적인 성격을 생각할 때
'내가 지금 쓰고 있는 한 편지'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는 이와 같은 견해에 반대한다. (Lenski, Barrett, Morris).
만약 이 편지가 지금 쓰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면 아직 받지 않은 편지를 두고 그들이 어떻게 오해할 수가 있겠는가?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편지는 앞서 고린도 교회에 보내진 편지로서 지금 우리에게는 발견되지 않은 것 중 하나라고 보는 것이 학자 간에 널리 알려진 정설이다. (Calvin, Meyer, Godet, Harris).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쓴 서신중에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은 것이 있으므로 우리가 가진 성경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말인가? 전혀 그렇지는 않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했던 영감서인 신. 구약 66권으로 된 완전한 성경을 갖고 있다. 그 외 성경 기자들의 다른 저작은 하나님의 섭리 때문에 자연스레 소실(消失)되거나 성경에 수룩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1)의 견해를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Robertson).
"음행하는 자들"이란 말은, 고린도 교인들이 잘 아는, 그때의 음행자들을 염두에 둔 것이다. 현저히 드러난 범과자(犯過者)들을 고립(孤立)시키는 것은, 그들이 회개하기까지 부끄럽게 하는데 필요하다.
"사귀지 말라"는 절교(絶交) 권면은, 주로 신령한 교제를 끊음에 대한 것이다.
일반 사회 생활면(社會生活面)에 관한 절교는 불가능한 일이며 성경이 그런 절교를 장려하지도 않는다.
고전 5: 10 세상 밖으로 -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
여기 "이 세상"이란 말은, 교회 밖의 세계를 이름이다. "토색하는 자"는 자기에게 정당히 속하지 않는 재물을 취하는 자이다.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교회 밖에 세상 죄인들과의 교제를 신자로서 아주 끊을 수는 없다. 그들에게 대한 신자의 교제는 영적(靈的)인 것이 아니고, 사회생활 또는 국민 생활 관계의 것이니 이를 피할 수는 없다.
이 세상은 죄인들이 사는 세상이므로 우리가 죄인들과 도무지 교제하지 말아야 한다면 우리는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도는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의 전도 구역은 바로 이 죄악 된 세상이며, 우리의 사랑의 대상, 전도와 구원의 대상은 바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죄인들이다.
1]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많은 사람은 본 절이 세상과의 분리나 은둔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이해한다. (Barrett, Lenski, L. Morris)
그러나 본 절이 세상과의 타협과 동화를 뜻하는 말이 아님도 기억해야만 한다.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서신들의 전체적인 주제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세상의 음행한 것들과 타협함으로 말미암아 발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 서신은 타락한 도시 고린도로부터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구별되어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
하지만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 바울의 전체적인 의도를 망각하고 그들 나름대로의 판단에 따라 행동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바울의 훈계가 너무 지나친 것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에
(1) 어떤 자들은
오히려 세상과 하나 되어 그리스도를 포기하고자 하는 극단적인 행동을 취했다.
(2) 또 다른 자들은
아예 세상으로부터 떠나 은둔과 도피적(逃避的)인 삶을 선택하게 되었다.
(3) 또한 그들 중에 일부는
이 세상과의 구별을 단순히 고린도라는 한 도시를 떠나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였으며
(4) 또 어떤 자들은 세상과의 분리를
은둔이나 수도라는 의미보다 더 가혹한 죽음이라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오해들이 세상과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며 또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 자체와 그 세상 가운데 있는 추악한 것들을 바로 구별하지 못한 데서 발생한 것임을 발견한다. (J.Calvin).
이것은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에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 15)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의 분리는 음행하는 고린도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로 가는 것도 아니며 또한 타락한 도시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악한 본을 보이는 자들과의 관계를 포기하는 것이며, 그 관계의 포기로 말미암아 초래되는 온갖 사회적, 경제적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오히려 그들의 악을 미워하고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고난의 삶을 선택하는 일이다. (Chrysostom).
본 절에 나열된 세상의 추악한 모습은 음행이나 탐심이나 토색이나 우상숭배라는 서로 다른 형태로 나타났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있어서 이러한 행악(行惡)은 온 세상을 주관하고 있는 악한 자, 곧 공중에 권세 잡은 자에 의하여 발생하게 되는 문제임을 기억해야 한다.
* 엡 2: 2-3 –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2]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마치 교도소와 같다.
교도소는 세상에서 죄를 범한 죄인들이 죗값에 따라 일정한 기간동안 격리된 삶을 사는 곳이다. 그러므로 격리된 곳을 떠날 수 없다.
권징과 교제 단절에 대한 교훈은 바로 교회 안에 있는 형제들에 대한 문제이다.
어떤 형제라 하는 자가 음행이나 탐욕이나 우상 숭배나 후욕이나 술 취함이나 토색(討索) 등의 죄를 범했다면 그런 자와 교제하지 말라는 교훈이다.
이런 일들은 명백히 죄악들이며 하나님의 교회 안에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죄에서 구원받은 자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만일 교회 안에 그런 악한 자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런 자들과 분리하여야 한다. 여기에 성도의 교제의 한계가 있다.
회개하지 않은 악인들이 천국에서 제외되듯이, 그들은 교회의 교제에서도 제외되어야 한다. 바른 믿음을 저버린 이단자들이나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과 불순종자들은 교회의 교제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고전 5: 11 사귀지 말라 -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
우리가 악한 자들과 교제하지 말라는 교훈은 세상 사람들에 대한 것이 아니고 교회 안에 있는 자들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형제라 일컫는 자'에 대한 문제이다. 여기에 '형제'라는 호칭은 예수 믿는 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 곧 구원받은 자를 가리킨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마 12: 50).
엄격한 의미에서, 우리는 아무나 형제라 부르지 않는다. 형제라는 명칭은 세상과 교회를 구분하는 선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만 형제라고 불리울 수 있다.
1]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형제"는 기독신자를 의미한다. 신자가 범죄 할 때는 교회는 그를 고립(孤立)시킨다. 그렇게 하여야,
(1) 그 범죄자가
고독을 느끼며 자기 자신을 낙관(樂觀)하지 못하며 깊이 반성하게 된다.
(2) 교회의 도덕적 순결성을 보존할 수 있다.
이처럼 절교는 그 범과자로 하여금 회개케 하려는 것이다. 이같은 절교는 교회의 위신과 순결을 보존하기 위하여 필요하다.
예를 들면 페루(Peru)의 하수(河水)들은 흘러서 바다로 들어가되 염수(鹽水)와 섞이지 않고 그대로 흐른다고 한다. 그리고 헝가리 도시 벧그라드(Belgrade)에서 다뉴브 강과 사바(Sava) 강이 만난다. 그러나 그 두 강의 물은 서로 혼합되지 않기를 기름과 물이 섞이지 않음과 같다고 한다. (Trapp).
2]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바울은 앞 절에서 나열한 악의 종류에 두 가지를 덧붙이고 있는데 하나는 '로이도로스'(*, '탐욕하는 자')로서 다른 사람에 대한 욕설이나 비방을 서슴지 않고 행하는 것이며
* 마 5: 22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또 하나는 '술 취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일을 행하는 자들이 형제라는 그리스도인의 명분을 가지고는 있으나 더 이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 아니라 악한 자의 손에 있는 자들임을 강조한다. ‘
사귀지 말라'(*, 토토이우토)는 9절에서 사용된 것과 같이 그들 가운데 어울리지 말라는 뜻을 다시 반복한 것이다.
* 엡 5: 11 -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메데 쉬네스디에인'(*, '함께 먹지도 말라')과 함께 '철저하게 관계를 단절할 것'을 요구하는 표현이다.
한편 본 절에서 '쉬네스디에인'은 성만찬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만은 없다.
물론 그들은 당연히 성만찬에서 제외될 것이다. 그러나 본 절에서 '쉬네스디에인'은 보다 일상적인 생활속의 자유스런 식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즉 고린도 교인들은 형제라고 일컫는 자 중에 공공연히 범죄를 하고도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때 그들과의 교제를 단절할 뿐 아니라 그들을 탈퇴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범죄자에게 유익이 될 뿐만 아니라(5절) 교인들을 보호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권징과 교제 단절에 대한 교훈은 바로 교회 안에 있는 형제들에 대한 문제이다. 즉 어떤 형제가 음행이나 탐욕이나 우상숭배나 욕하는 것이나 술취함이나 강탈함 등의 죄를 범한다면 그런 자와 교제하지 말라는 교훈이다.
이런 일들은 교회에서 용납되어서는 안 될 죄이다. 교회는 죄에서 구원 얻은 자들의 모임이다. 그러므로 만일 교회 안에 그런 악한 자가 있다면, 우리는 그런 자와 사귀지 말고 함께 먹지도 말아야 한다. 바른 믿음을 저버린 이단자들이나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과 불순종자들은 교회의 교제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고전 5: 12 교회 안에 있는 사람 -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 )
권징의 문제는 교회 밖의 사람들에 대한 문제가 아니고, '교중 사람들' 곧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문제이며, 그것은 모든 교인이 판단해야 할 문제이다.
외인들이란 교회 밖의 사람들 곧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에게 복종치 않는 자들을 가리킨다. 물론 우리가 바르게 판단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하며, 또 그러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며 배워야 할 것이다.
1]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마는
여기 "밖에 있는 사람"이란 말은 불신자들을 이름이다.
교회는 불신자의 범죄를 징계할 처지에 있지 않다. 그러나 교인의 범행에 대하여 교회가 처리해야 한다.
그는 교회밖에 있는 자들을 판단하는 것은 자신의 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고린도 교인들도 교회 밖에 있는 자들을 판단하는 것을 금지 시킨다.
이는 심판의 특권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며(13절) 또한 저들이 이웃을 심판하는 일 때문에 그들 역시 범죄하기 쉽기 때문이다.
* 롬 2: 1 -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 롬 14: 4, 10 – 4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2]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바울은 앞 절에서 제시한 자신의 권리가 최선의 방법임을 다시 한번 호소하면서 자신의 판단 범위의 한계와 고린도 교인들의 의무를 보다 명백하게 기록한다.
그는 성도들의 신앙 규범과 행동 원리를 교회 공동체 내에 한정(限定)시키면서 그들의 동료들 가운데서 발생한 문제들을 스스로 판단함으로써 책임을 다할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교회 공동체가 범죄자를 판단하는 행위를 그리스도인 개인이 성도의 행위를 판단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Lenski).
왜냐하면 교회는 교회의 순결성을 유지하기 위해 공동체를 훈계하고 권징하는 일을 교회적 차원에서 행하는 것이지 어느 개인에게 맡겨놓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의 판단의 권위와 진실성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말씀과 권위에 순종할 때 더욱 명백해질 것이다. (Barret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