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마 26:1-5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2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3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4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5 말하기를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마 26:1-5 / [예수를 죽일 음모;막 14:1-2,눅 22:1-2,요 11:45-53] 예수께서는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2) `너희도 알다시피 이제 이틀만 있으면 유월절이 된다. 그날 잔치에서 인자는 배반을 당하여 십자가에 달리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3) 바로 그 무렵에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저에 모여 4) 예수를 아무 탈 없이 잡아서 죽일 흉계를 꾸미고 있었다. 5) 그러나 그들은 `백성들이 소동을 일으킬지도 모르니 유월절 잔치 기간에는 피하도록 합시다' 하고 의견을 모았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합니다. 한편 유대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대제사장 관정에서 의논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1) 마태복음의 특징은 예수님의 설교가 많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5번의 설교가 있습니다. 산상설교(5-7)와 열두 제자에 대한 선교명령(10), 천국 비유(13), 기독공동체의 생활(18), 종말에 관한(24-25) 내용입니다. 그 모든 설교는 “예수님께서 설교를 마치셨다.”로 마무리됩니다(7:28; 11:1; 13:53; 19:1; 26:1). 그런데 본문에서는 “다 마치시고”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설교를 포함한 지상 사역의 완수를 더불어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 사역인 온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향하여 걷기 시작합니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2)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공생애의 사역 내내 많은 위험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하나님의 때가 아니었기에 모든 위험에서 피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때가 다 되었습니다. 그때가 바로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은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기 위하여 어린 양이 죽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유월절이 다가왔습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은 이제 위험을 피하지 않고 직면하려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제 이틀 후면 유월절이다. 그때 인자가 배반당하고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유월절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의 유월절 어린 양은 필요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3-5) 가야바는 대제사장으로 매우 긴 재임기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전임자인 안나스 대제사장의 사위였고, 정치적으로는 로마 황제와 유대지역 왕이었던 헤롯일가와 가까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인 대제사장으로 인하여 성전은 더럽혀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을 향하여서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21:13). 그러하기에 백성을 옳은 길로 인도해야 할 지도자들이 온 인류의 왕을 죽이려고 의논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용: 사순절 기간입니다. 주님 가셨던 십자가의 길(비아 돌로로사)을 묵상하는 기간이 되기 바랍니다.
가장 적은 것으로도 만족하는 사람이 가장 부유한 사람이다.-소크라테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욕심에 눈이 멀어 해서는 안 될 일까지 저지른다면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없습니다. 달리기를 할 때 앞서 가는 사람을 제치기 위해 고의적으로 발을 걸었다고 생각해보세요. 이긴 당신의 행복이 얼마나 갈까요? 당신의 마음은 불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의 폭동은 두려워 하지만 하나님의 눈은 무서워하지 않는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어리석음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 설 교 >
예수님을 향한 다양한 입장들
마 26:1-16 / 스데반황목사(그리스도의 보혈교회)
2절에 보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이는 자신이 유월절 양으로서 십자가의 고난을 감당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12장을 보면, 유월절 양은 정확하게 대속을 보여 줍니다. 심판의 천사가 대문의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 양의 피를 보게 되면 Passover, 즉 유월함으로 말미암아 그 집안에 있는 사람들은 죽음의 심판을 피하게 됩니다. 이는 죽어야 할 그 장자 대신 어린 양이 죽은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유월절 날에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양으로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죽음과 관련하여 성경에는 네 종류의 반응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죽음을 계획한 사람들입니다.
1-5절을 보면,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자신들의 권력의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합니다. 자신들의 위선을 지적하는 예수가 너무 미워서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머리를 짜내어 계획을 세우지만 결국은 이미 정해진 구속의 드라마에서 악역을 맡고 만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진정한 관심이 없었으며, 그들의 종교는 자신들을 위한 악세서리였습니다.
즉, 그릇된 종교 지도자들은 반드시 다른 사람을 모함하거나 해치는 일을 계획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뒤에서 몰래 작당을 하여 자신들에게 도전하는 자들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신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악한 일인지 의식하지 못합니다. 이들이 바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었습니다.
둘째 부류는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여인들입니다(참조, 6-7절, 12-13절).
그 중에 한 여인은 예수님의 머리 위에 부을 향유를 준비하였습니다. 그 여인은 그리스도를 찾아와서 옥합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그 향기는 온 방과 동네에 퍼집니다. 요한 복음과 함께 보면 이 여인은 마르다와 나사로와 함께 살던 마리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항상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즐거워 하였던 여인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분의 죽음을 통한 대속을 깨달았기 때문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때에 가장 비싼 향유를 가져와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던 것입니다. 즉, 마리아는 예수님의 장사를 미리 예비한 것입니다.
따라서 마리아의 이 행위는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한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습니다. 주님께 감사하며 사랑하는 마음 가운데 주의 뜻을 바로 알려는 끝없는 노력!
이 여인이 가졌던 주님을 향한 사랑은 마침내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어 실행함으로써 영원히 하나님의 나라에 기록되는 영광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관계하는 셋째 부류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14, 16, 20, 25).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보다는 가난한 자를 돌봐야 한다는 도덕주의적 발상으로 마리아를 꾸짖었습니다. 이들은 보혈의 피를 흘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기껏 자신들의 도덕적인 양심을 만족시키려 마리아의 향유에 대하여 시비를 걸었습니다.
사실 요한복음 12장에 의하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도왔어야 한다는 발상은 가롯유다가 돈을 챙기려고 말한 것인데, 제자들은 가롯유다의 의도는 모르고 가롯유다의 주장에 합세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와는 상반되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이 무엇인지 아직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게 됩니다. 복음을 깨닫지 못한 그들은 단지 도덕주의자요 율법주의자이며, 신비주의자들이며 예수 곁에 있는 종교인들에 불과합니다.
언제나 자신들의 작은 의분을 앞세워 복음을 막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철학과 개인의 도덕 기준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복음을 평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도덕주의자들 및 율법주의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마리아와 같은 귀한 주의 백성들에게 핍박을 가합니다. 이처럼 성령을 받기 전의 제자들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귀한 마리아와 대조가 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롯 유다입니다.
그는 자기 나름대로 목적이 있어서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 목적은 개인의 영달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목적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되자, 이제 배신의 길로 치닫더니 자기의 선생을 팔아넘기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고작 은전 30냥의 가치 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가롯유다는 매우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날마다 3년을 지나면서도 그는 구원을 받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욱 좋았을 뻔한 가장 비참한 인생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사람을 대할 때 자신의 이득으로만 계산하여 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나의 입장에서 얻을 것이 무엇인가를 바라며 주의 존전 앞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사실 너무 가련하고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평생 교회를 다니는데 구원을 받지 못한 가룟 유다들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복음을 알지 못하고 마침내 버림을 받아 지옥 불에 들어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이들은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 한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마리아의 이름이 함께 전파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이들 무리 중에 오직 마리아만이 정확히 복음을 깨닫고, 복음에 입각한 바른 신앙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바르게 깨달은 신앙은 언제나 예수님을 향해 가장 값비싼 향유를 부음같이 자신의 모든 삶을 허비하는 삶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분의 십자가에 죽으심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우리의 삶은 마리아처럼 오직 주를 향한 헌신의 삶이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헌신의 삶은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낭비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허비하는 신앙이야 말로 영원한 나라를 알고 주님의 세계를 보는 참된 신자의 특징입니다.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을 알기에 가슴이 저미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낭비인 행위를 주님께 바쳐드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은 낭비로 표현됩니다. 계산으로 따진다면 아직 사랑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아침에 교회에 나와 우리의 시간을 바치는 것!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낭비와 허비로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 주께 헌금을 드리는 행위! 불신자들이 볼 때는 머리가 텅빈 어리석은 행동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낭비입니다. 허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하신 아들까지 허비하셔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입증하셨습니다. 주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쓰레기 같은 우리 죄인들을 위해 허비하셨습니다. 이는 그분의 사랑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남녀 간의 사랑을 보아도 사랑에 빠지면 상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낭비할 줄 알게 됩니다.
제가 아는 청년은 맘에 드는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 여자의 생일날 장미 100 송이를 사서 선물로 했습니다. 사실, 낭비입니다. 어떻게 보면, 정신 나간 행동입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보면 그러한 허비하는 행동은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우리의 가슴이 아플 정도로 감사를 느낄 때, 나를 사랑하사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버리시기까지 허비하신 그리스도의 그 사랑을 알 때, 어찌 우리가 값비싼 향유라 하여 드리지 못하겠습니까? 자신의 생명을 주셔서 우리를 영원한 진노에서 벗어나게 하신 그 사랑 앞에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드려도 주님의 그 사랑을 어찌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주의 사랑을 아는 자들은 마리아와 같이 주를 향한 허비하는 사랑을 나타낼 것이요, 사실 그러한 허비도 만분지일의 은혜도 못 갚았다고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신앙이요 참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여러 반응을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속합니까? 정신없는 제자들입니까? 가롯유다입니까? 마리아 입니까?
오늘 이 거룩한 아침에 참으로 좋으신 참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을 알아 다 같이 마리아와 같은 부류의 참신도들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음모자, 헌신자, 배신자
마 26:1-16 / 박덕기 목사
교회력에 의하면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사순절이란 부활절까지 주일을 제외한 40일의 기간(부활절로 부터 46일 전-2013년은 2월 13일)을 말합니다. 사순절은 부활절을 기다리면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신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는 기간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수난 주간 화요일과 수요일쯤에 있었던 일에 대한 기록으로, 세 부류의 인간 곧 음모자, 헌신자, 배신자가 등장하는데,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서 함께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음흉한 음모자 종교지도자들
1-2절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네 번째 수난 예고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자신의 십자가 수난을 네 번씩이나 거듭 예고하시고, 또 그 수난의 때와 방법까지도 구체적으로 언급하신 것은, 주님의 십자가 수난이 결코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온 인류의 속죄와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미리 계획하신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 사건을 대할 때마다, 예수님이 무력해서나 무지해서 당하신 것이 아니라, 미리 아시고 인류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당하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것은, 주님께서 자신의 십자가 수난 시점을 특별히 유월절과 결부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큰 축제일입니다. ‘유월’이라는 말은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유월절은 애굽의 장자 재앙시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엘의 집을 그냥 넘어간 사건을 기념하는 축제일입니다. 그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기 전날 밤에 일어났습니다. 그날 밤 애굽 사람들은 짐승이고 사람이고 처음 난 것들, 즉 장자들은 모주 죽임을 당하는 무서운 재앙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문 인방에 바른 이스라엘의 집은 모두 안전했습니다. 그 결과 강퍅했던 애굽의 바로도 항복했고, 모든 애굽인들이 귀한 보물까지 내주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떠나 주기를 간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 민족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유월절을 국가 최대의 명절로 지켜 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이러한 유월절과, 자신의 십자가 수난을 결부시키는 것입니까? 그것은 애굽의 장자를 죽이는 재앙 시, 어린 양의 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받았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유월절 양이 되어 대속의 피를 흘리심으로, 죄인들이 구원받게 될 것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도, 사도 바울도 예수님을 ‘유월절 양’이라고 증언했습니다. 유월절의 어린 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던 것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그의 대속의 공로를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3-4절을 보면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라고 했습니다. 이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흉계로 잡아 죽이고자 음모를 꾸미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5절에 보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말하기를 민란이 일어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까 하노라.”고 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 로마에 대한 민란이 자주 일어났으며, 특히 예수님의 고향이자 공생애 기간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갈릴리 사람들이 주동이 된 반란이 성행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빌라도 때에는 그와 같은 반란이 일어나자, 빌라도 총독이 갈릴리인들을 살육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월절 시기에는 먼 타국에 살던 유대인들은 물론, 갈릴리 지방 사람들도 함께 예루살렘에 모여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보통 유월절 때에는 예루살렘에 약 200만 명의 인파로 들끓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유월절 기간을 피하기로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그들의 계획대로 되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갑작스런 가룟 유다의 배신은, 그들의 계획과는 반대로, 유월절에 맞추어 예수님을 죽이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미 유월절 에, 그리스도를 인류 구원을 위한 희생 양으로 삼으시기로 작정하셨고, 결국 예수께서는 그 하나님의 섭리대로 인류의 구속을 위한 유월절 양으로 희생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죄 없는 예수님을 잡아 죽이고자 흉계를 꾸미되, 명절에는 말자 하면서 권모술수를 좋아하던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결국 어떻게 된 줄 아십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승천 후에 일어난 로마에 대한 유대 민족의 반란 때에, 거의가 자기 동족들에게 살해당하고, 살아남은 자들도 로마 군대에 의해 무참히 살육 당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권모술수와 악한 음모를 일삼는 자들의 삶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항상 뒤따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악한 음모에 가담하거나, 동참하는 일을 절대로 피해야 합니다.
2. 아름다운 헌신자 마리아
6-7절에 보면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은 나사로의 누이이자 마르다의 동생이었던 베다니의 마리아로 보입니다. 이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은 향유는, 요한복음에 보면 당시 가격으로 300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것이었습니다. 300데나리온이란 노동자의 10개월 월급과 맞먹는 큰돈이었습니다. 이처럼 귀한 향유를 마리아는 아낌없이 주님께 부어드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이처럼 값비싼 향유를 주님께 부어드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리아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연인들은 상대방에 대해 무엇이든지 주고 싶어 합니다. 못주어서 안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녀에 대한 부모의 마음도 동일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에게 주는 것이 아깝지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이 무엇이든 주님께 드리기를 기뻐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을 위해 자기의 재산도 포기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자기 생명을 바치는 것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모든 것을 드려서라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자 소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무엇을 주님께 드려도 아까워하지 않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주님께 드리는데 인색한 마음, 아까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억지로, 다른 사람의 눈 때문에, 형식적으로 드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와 같이 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진정 마리아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가룟 유다와 같이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뇨?”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진정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8-9절에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마리아가 주님께 향유를 부은 일에 대한 제자들의 비판입니다. 그들은 비싼 향유를 주님께 부은 일을 쓸데없는 허비라고 하였습니다. 허비 또는 낭비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에, 물질과 힘과 시간 등을 투자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주님께 물질을 드리는 일이 허비일까요?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아직도 주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없는 것도 있게 하시는 전능하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래서 조그마한 것을 드려도, 풍성하게 갚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생각해 보십시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겨우 그 어린아이의 배만 채울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주님께 드렸더니, 오천 명이 실컷 먹고도 열두 바구니나 남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것은 절대로 낭비되는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엄청난 것으로 갚아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자들처럼 단순한 경제 이론으로만, 우리의 봉헌 행위를 계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닌 것을 확신하고, 기쁨으로 즐겁게 드릴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여인의 행위를 비판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왜 그렇게 주님께 향유 부은 여인을 비난했을까요? 요한복음을 보면 돈 궤를 맡은 가룟 유다가 몹시 흥분하여, 그 여인의 행위를 먼저 비판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회계를 맡아 주님께 드려진 봉헌 금을 횡령하는 재미로, 주님을 따라다닌 자였음을 요한 사도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큰돈이 돈 궤로 들어오지 않고 직접 주님께 드려졌으니, 얼마나 분통이 터졌겠습니까? 그 삼백 데나리온이나 하는 향유를 팔아 가룟 유다에게 주었다면, 아마 그는 그 돈을 가지고 도망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제자들이 그 불순한 가룟 유다의 선동에 휘말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제자들이 그 여인의 행위에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은, 그때가 바로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직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이번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 큰 권능으로 로마 총독과 군병들을 무찌르고, 주님의 왕국을 선포할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도중에 감투싸움을 할 정도로, 동료 제자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주님께 큰 선물을 하는 여인이 등장했으니, 질투와 시기가 그들을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들이 할 수 없는 큰 물질을 드림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한 그 여인을 경쟁자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의 행위를 쓸데없는 낭비로 몰아붙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제자들의 행위가, 과연 그들만의 행위로 그치는 것일까요? 그들의 모습이 곧 우리들의 모습은 아닐까요? 여러분은 주님께 헌신하고 충성하는 성도를 시기한 적은 없습니까? 그래서 그의 행위를 왜곡시키고, 뒤에서 깎아내린 일은 없습니까? 충성하는 성도를 격려하거나 본받을 생각은 하지 않고, 그의 흠을 잡고자 애를 쓴 적은 없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시기와 질투로 충성하는 성도를 괴롭히는 일은, 바로 사단의 행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성도들을 시기하여 괴롭게 만들고, 참소하는 것이 바로 사탄의 전매특허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탄의 이러한 유혹에 빠져, 다른 성도의 선한 행위를 시기할 것이 아니라, 먼저 자기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행위를 본받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
13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자신께 향유를 부은 이 여인의 아름다운 행위도 같이 전파되고 기념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마리아의 향유 부은 사건은 복음서에 기록되어, 오늘까지 그 아름다운 향기를 진하게 발하고 있음을 우리가 잘 압니다. 우리 모두가 마리아와 같은 아름다운 사랑의 헌신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추악한 배신자 가룟 유다
14-16절을 보면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고 했습니다. 이는 가룟 유다가 주님을 배신하는 장면입니다. 가룟 유다를 가리켜 ‘열둘 중에 하나’라고 했습니다. 열두 제자는 주님이 친히 선택하신 핵심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께로부터 권능을 받아, 복음 사역을 행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3년 동안 주님과 동고동락하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열두 제자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주님을 배신하는 근본적 동기는 사탄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사탄이 그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심은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유혹에 대하여 반응하는 것은 인간의 책임입니다.
첫 사람 아담으로부터 지금까지, 사탄과 죄의 유혹을 받지 않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탄은 불의한 불신자들만 죄로 유혹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은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까지 유혹했습니다. 그러므로 열두 명의 핵심 제자 중에서, 추악한 배신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닙니다. 사탄은 남녀노소 신앙의 연륜 및 직분과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역사하여 유혹합니다. 따라서 아무리 독실하고 경건한 성도라고 해도, 조금만 방심하고 깨어 있지 못하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실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신앙 연륜이 오래되었을 때 ‘거짓말’이라는 죄로 실족했습니다. 모세도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때 ‘혈기’ 때문에 실족했습니다. 다윗도 통일 왕국의 왕이 되었을 때, 우리야의 아내로 실족을 했었고, 솔로몬도 말년에 이방 여인들로 인하여 우상 숭배자로 타락하는 실족을 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교훈하는 것입니다. 죄로 인한 실족은 직분의 경중은 물론이요, 신앙의 연륜과도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죄의 유혹이 항상 우리 가운데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늘 깨어 죄를 대적하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고 흥정을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파렴치하고 추악한 행동입니까? 그는 예수 그리스도 즉 자기의 스승이요 구원자를, 흥정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자신의 이기적 물질적 유익을 위한 상품이나 흥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를 내어 주겠으니 또는 포기하겠으니 얼마나 주겠느냐?”는 행동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내어 주게 되면, 비록 온 천하를 얻을지라도, 그는 결국 어리석고 불행한 자가 되고 맙니다. 오히려 내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고서라도, 예수님을 얻어야 지혜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 안에 모든 보화와 지식과 생명과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라는 찬송이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16절은 대제사장들에게 돈을 받은 가룟 유다에 대한 말씀입니다. 즉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가룟 유다는 이제 그리스도의 제자에서, 대제사장들을 위한 충복으로 변신한 것입니다. 돈을 받았으니 그 돈 값어치를 하려고 애쓴 것입니다. 빚을 졌으니 그것을 갚으려고 예수님을 팔 기회를 열심히 찾은 것입니다. 추악하고 불의한 돈을 빚진 가룟 유다도, 이렇게 그 빚을 갚고자 애씀으로 결국 그 약속을 이행하게 되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구속의 은혜를 받은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에게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구원해주시고 사도로 삼아주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전 생애를 다 바쳤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자처럼 행동합니까? 어찌하든 그 은혜의 빚을 갚고자 애를 씁니까? 많은 성도들이 그러할 줄로 압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하나님을 자신에게 빚진 자처럼 여기는 성도들도 없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의 크신 은혜의 빚을 갚으며 살 수 있겠습니까? 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모든 기도가 자기의 소원을 들어달라는 것으로 그치는 성도들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가룟 유다는 불의한 돈 은 삼십만 받고도, 그 빚을 갚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넘겨주려고 애썼는데, 우리는 주님께 그 큰 은혜를 받고도, 아직도 더 받을 것만을 생각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본래 마귀와 죄와 사망의 종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피 값을 치르고, 자신의 소유로 산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한 시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처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고백이 우리의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흉계를 꾸몄던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처럼, 악한 음모에 절대로 동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불과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먹었던 가룟 유다 같은 배신자도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마리아 처럼 아름답고 향기로운 헌신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의지할 분, 본 받을 자, 본받지 말 사람
마 26:1-16 / 최영기 목사
오늘 본문에는 세 인물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과 어떤 여인과 예수님을 배신한 가롯 유다입니다. 의지할 분, 본받을 분, 본받지 말아야할 사람입니다.
우선 예수님을 상고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종말에 관한 많은 말씀을 하셨는데 이 말씀을 마치시고 닥쳐올 당신의 죽음에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1. 주님은 상황을 주도하신다
예수님에 관한 기록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예수님은 모든 상황을 주관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앞으로 어떤 식으로 전개될 것이라는 것도 알고 계신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재판을 받고 로마 총독에게 넘겨져서 십자가 형을 받으리라는 것을 '넘겨져서 십자가에 달릴 것이다'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사형권이 없었기 때문에 사형을 시키려면 유대 총독을 설득시켜서 사형을 내리도록 해야하는 상황을 잘 읽고 계셨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유월절 경에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예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모여서 예수님을 잡아죽일 것을 모의하였습니다. 그러나 날자는 유월절 후로 미루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탈출한 것을 기념하는 우리 나라도 치면 광복절과 비슷한 명절입니다. 그러나 축하하는 것은 우리와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이 명절을 지키기 위하여 세계 각처에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들고 누룩이 들어가지 않는 떡을 먹는 1주일간의 무교절에 연하여서 1주일간을 잔치 분위기에서 지냈습니다. 이때에 타지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인하여 예루살렘 인구가 수십 배로 늘어나고 그 중에는 예수님이 자라나시고 활동하시던 갈릴리에서 온 사람들도 많을 텐데 예수님을 체포하려다가 이들의 분노를 사서 생각지도 않는 폭력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명절이 지나고 사람들이 다 제 갈곳으로 돌아간 후에 예수를 체포하자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월절에 십자가에 달릴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측근이었던 가롯 유다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유대인 지도자들이 계획을 변경했고 예고하셨던 대로 유월절에 돌아가셨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주시하면서 우리는 주님이 상황에 끌려 다니는 분이 아니라 상황을 주도하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의 운명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섭리를 이루어가고 계셨습니다.
1. 주님에게는 우연이 없다
우리는 생각지도 않는 일이 생기면 사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사고가 아닙니다. 예상하셨던 일이기 때문에 놀라거나 당황할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의 시간 개념과 우리의 시간 개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연속적으로 이어있는 실과 같습니다. 현재가 과거가 되고 미래가 현재가 되고, 이것이 반복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 점입니다. 그에게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가 구별이 없습니다. 인간의 삶은 비디오 테이프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순서대로 보아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우리의 인생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어울려진 한 폭 그림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 없고 우발적인 사고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고와 같은 것도 사실은 그분의 허락 하에 또한 섭리 하에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사고가 아니고 하나님은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을 아셨고 그의 허락과 섭리 하에 일어났다면 하나님이 이러한 사고나 역경을 허락하시는 것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라는 것을 우리는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죄 많은 인간들도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고 쓸데없는 고난을 받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가 쓸데없는 고난받는 것을 원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서라고 믿어야합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역경이나 사고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는 인생을 어머니 뱃속으로부터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만으로 잡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1생이 아니고 3생입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9개월, 이 세상에서 90년, 그리고 영생입니다. 하나님은 3생을 인생으로 보시고 우리의 최선의 유익을 위하여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역경이나 사고를 당했을 때에 분명한 유익을 보지 못하더라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유익이 있으리라는 것을 믿고 감사하고 기뻐하면 이겨내야 하겠습니다.
2. 주님은 악을 통하여서도 선을 이루신다
주님께서는 사고나 재난을 통하여 주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십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여러분과 제가 죄를 용서받을 길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유대인 지도자들의 음모와 가롯 유다의 배신을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 지도자들로 하여금 악한 마음을 먹고 예수님을 잡아죽이려는 계획을 하도록 만들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지도자들은 자신 스스로 예수님을 잡아죽이려고 마음먹었고 가롯 유다는 스스로 예수님을 배반하기로 결정하였지만 이러한 자발적인 결정과 행동을 통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막힌 예술가와 같습니다. 대리석을 주면 위대한 예술가는 대리석을 갖고 아름다운 조각을 만들어낼 것입니다. 그러나 진흙을 주면 진흙을 갖고 아름다운 도자기를 구워낼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은 조상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사단과 죄가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악인이 판을 치고 핍박과 고난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악한 대제사장과 그들의 악한 마음과 음모를 사용하여서 당신의 뜻을 이루듯이 질병과 재난과 사고와 핍박을 통하여서 당신의 아름다운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 하여서 선을 이룬다고 말씀하셨습니다(롬 8:28). 여기에서 모든 것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의미가 아니라 역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앞서서 바울은 "나는 현재 우리가 겪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견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롬 8:18)."라고 말하는 것을 보아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어떠한 사고가 역경을 당하더라고 당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사고이지 하나님에게는 사고가 아니고 섭리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나 역경을 통하여 반드시 아름다운 결과가 생기리라는 것을 믿고 하나님에게 감사함으로 소망을 가지고 역경을 견디어내시기 바랍니다.
Ⅱ. 주님께 인정받고 기억되려면
다음에 등장하는 인물이 한 여인입니다. 한 여인이 비싼 향유를 갖고 예수님에게 부은 사건은 마가복음과 요한 복음에도 기록되어있습니다. 누가 복음에도 한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닦아드리는 사건이 기록되어있는데 이것은 다른 사건인 것으로 보입니다. 마가 복음과 요한 복음을 종합해볼 때에 이 여인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리신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였습니다. 이 여인이 행동을 제자들은 몹시 불편해했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을 칭찬하고 복음이 전해진 곳에는 이 여인이 한 것도 전해져서 기억될 것이라고 높은 찬사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이 여인의 행위는 잘 알려졌습니다. 요한은 주님께서 나사로는 살리셨던 사건을 기록할 때에 나사로를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었던 마리아의 오빠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요 11:2). 요한이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60년 후쯤 요한 복음을 기록할 때에 마리아의 이러한 행위가 널리 잘 알려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주님에게 인정받고 기억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는지 마리아를 통하여 배울 수 있습니다.
1. 힘에 벅차게 드린다
마리아가 깬 옥합에 들은 향유의 값은 약 300데나리온이라고 했습니다(요 12:5). 노동자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이니까 300 데나리온이면 노동자 1년 봉급에 해당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2-3만 불에 해당합니다. 만만한 액수가 아닙니다. 이러한 비싼 향유가 담긴 옥합을 깨었다는 것은 전체를 다 예수님의 머리에 발랐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귀한 손님에게는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었던 것으로 보입니다(눅 7:46). 그러나 마리아는 보통 쓰는 기름으로는 안 된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또 조금 찍어 바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옥합에 든 비싼 향유 전체를 아낌없이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께 인정받고 기억되려면 아낌없이 바칠 수 있어야합니다. 마리아처럼 아낌없이 바치지는 못한다하더라고 적어도 약간 벅찰 정도로 바쳐야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봉사할 때에도 시간 있을 때에 하는 것이 아니라 없을 때에 잠을 줄이든지 한 일을 못하든지 하면서 시간을 아껴서 해야합니다. 사역을 할 때에도 인정받고 칭찬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왜 알아주지 않는 이 사역을 해야지? 내가 왜 남에게 싫은 소리를 들어가면서 사역을 해야지?" 이러한 생각을 들 정도로 하여야합니다. 헌금을 할 때에도 여유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쓸 데 안 쓰고 살 것을 안 사고 하여야합니다. 세상에서도 인정받고 기억되는 사람은 항상 최선을 다하여 최대의 노력을 경주하는 사람입니다. 평범한 성도로 신앙 생활을 영위하려는 사람은 할 수 없지만 이왕 신앙 생활하고 주를 섬기는데 인정받고 기억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항상 약간 벅차게 물질도 시간도 노력도 바치시기 바랍니다.
2. 단 한번의 기회에 투자한다
가롯 유다를 필두로 한 제자들은 여인의 행동을 낭비라고 보았습니다. 사실 300데나리온이면 적은 액수가 아닙니다. 요한 복음 6장에 보면 떡 5덩어리로 장정 5000명을 먹인 사건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때에 빌립이 예수님에게 200데나리온이 있어도 부족할 것이라고 말합니다(요 6:7). 그러므로 향유를 300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면 얼마나 많이 구제할 수 있겠느냐고 말하는 제자들이 전연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의 말을 반박하지 않으셨습니다. 배고픈 사람을 먹이는 것보다 자신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요지는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일은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는 일은 단 한 번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에 이 여인이 한 일은 칭찬할만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직감적으로 예수님을 뵙는 것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았는지를 모릅니다. 다른 사람은 아직도 예수님이 왕이 되시고 자신들이 그 밑에서 고관이 되는 허망한 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지만 마리아만은 예수님의 돌아가심을 확실히 예견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장례식을 치르는 마음으로 향유를 아낌없이 부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리아의 이러한 행위를 예수님은 칭찬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에게 인정받고 기억되는 사람이 되려면 마리아처럼 중요한 기회에, 단 한번밖에 없는 기회에 아낌없이 투자를 하여야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단 한번밖에 없는 투자의 기회가 왔다고 하면 있는 것은 다 쏟아 투자를 합니다. 그런데 크리스천들이 오히려 이러한 면에서 약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단 한번의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요즈음 가정 교회 사역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비워도 참아주시는 성도님들에게 이 기회를 빌어서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약간 벅찰 정도로 가정 교회 사역에 몰두하는 이유는 이러한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2-3년 있으면 뿌리를 내리는 가정 교회가 여기 저기에 많이 생기고 지도자도 많이 나와서 제가 간여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지금이 가정 교회 전파에 다시 오지 않을 중대한 순간이기 때문에 제가 집중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 한번의 기회에 집중적으로 투자를 하여야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휴스턴에 연수를 오던지 주재원으로 머물다가 예배까지 참석하면서 생명의 삶을 수강하지 않던지 생명의 삶을 수강하고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고 가는 분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휴스턴에 와서처럼 신앙 생활을 시작하기 좋은 곳이 흔치 않기 때문입니다. 이 기회에 투자하지 아니하고 다른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이 기회를 놓치고 바쁨과 세상적 유혹이 난무하는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자녀를 키울 때에도 그렇습니다. 자녀들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고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기간은 정해져있습니다. 인간의 가치관은 13세까지로 결정이 난다고 합니다. 13세까지에 결정된 가치관을 갖고서 나머지 인생을 산다고 합니다. 이러한 귀중한 기회에 투자하지 아니하고 자녀들이 나중에 커서 이기적인 사람이 되든지 잘못된 인생을 살 때에 뒤늦게 후회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이러한 귀중한 시기에 투자하기 위하여 엄마들이 사회 생활을 포기하고 자녀 양육에 집중하는 것을 보면 현명한 투자를 하였다는 흐뭇함을 느낍니다. 기회는 항상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귀중한 기회, 다시 올 수 없는 기회를 인식하는 지혜와 이러한 기회를 보았을 때에 마리아처럼 아낌없이 투자하는 우리가 되어야하겠습니다.
Ⅲ. 돈의 종 되면 예수님도 팔아먹는다
마리아와 대비되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이 가롯 유다입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돈 받고 배신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가롯 유다를 괜찮은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을 팔려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죽는다는 약한 소리를 하니까 예수님을 코너에 몰아넣어서 그의 능력을 나타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라는 등의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서 가롯 유다와 같은 요소를 발견하기 때문에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이러한 근거 없는 이론을 제시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가롯 유다는 돈 욕심 때문에 선생님을 팔았습니다. 사실은 가롯 유다는 재정을 맡은 모양인데 평소에도 돈을 빼내어서 부동산에 투자를 했던 것 같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었을 때에 가장 분개한 것이 가롯 유다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가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 돈이 헌금으로 들어올 때에 빼낼 돈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요 12:6). 은 30이면 노예가 소에 받혀서 죽었을 때에 치르는 작은 액수입니다(출 21:32). 크지도 않은 액수를 위하여 예수님을 팔아먹은 것입니다. 가롯 유다가 얼마나 돈을 사랑했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돈의 능력입니다. 돈은 하나님과 버금갑니다. 하나님의 라이벌입니다. 신앙 생활할 때에 믿음 성장을 가장 방해하는 것이 돈에 대한 욕심입니다(마 6:24). 예수 믿으라고 하면 바빠서 못한다고 합니다. 왜 바쁩니까? 돈 버느라고 바쁜 것입니다. 믿음이 성장하지 못하는 분들도 돈 버느라고 바빠서 그렇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변변히 봉사 한 번 못하는 것도 돈 버느라고 바빠서입니다. 이처럼 돈의 지배를 받을 때에 우리는 가롯 유다처럼 예수님을 팔아먹을 수가 있습니다.
일생 동안 명예롭게 목회를 하다가 막판에 목회를 망치는 목회자들을 종종 봅니다. 돈 때문에 주님 주신 사명을 포기하는 분들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돈 문제에 깨끗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내 속에 가롯 유다가 들어않아 있다는 것을 의식하기에 가능하면 가진 것을 흩어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청렴하고 깨끗해서가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돈 욕심에 빠지지 않으려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는 주님의 사역자가 되려면 돈의 능력을 경계하여야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돈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다음 3가지만 철저히 지키면 적어도 돈 때문에 실족하는 일은 없습니다.
확실한 십일조를 반드시 하십시오. 아무리 사업이나 직장 일이 바쁘더라고 주일을 반드시 지키십시오. 아무리 큰돈을 벌 수 있다해도 부정한 방법을 절대 사용하지 마십시오. 이것만하면 적어도 돈의 노예가 되어서 가롯 유다처럼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 것을 더 나가서 이것만 철저히 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사업에도 반드시 성공하게 해주시리라는 기대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그를 진정으로 섬기는 사람을 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악한 남자 착한 여자
마 26:1-19 / 임현수목사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실버스타인이라는 작가가 쓴 소설입니다. 옛날 한 그루나무와 이 나무가 사랑하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소년은 매일 나무 주위에 떨어진 나뭇잎을 주워왕관을 만들어 숲 속의 왕자 노릇을 하면서 나뭇가지에 매달려 놀기도 하고 열매를 따먹으며 즐거워했습니다.
소년이 나이가 들자 나무는 혼자 있는 때가 많았습니다. 어느날 소년이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물건도 사고 신나게 놀고 싶은 데 돈이 없어." 나무는 자신에게는 돈이 없고 열매를 따다가 팔아서 그 돈을 가지고 사고 싶은 것을 사라고 했습니다. 소년은 나무에 올라가 열매를 따 가지고 자기의 갈 길로 가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습니다. 나무는 매우 슬펐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소년은 청년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그 나무는 너무나 반가워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 가지에 매달려 즐겁게 놀아 보렴" 그러자 소년이 말했습니다. "나는 한가하게 놀 수 있는 시간이 없어. 결혼도 하고 집도 지어야 해." 그러자 나무가 "그러면 나무가지를 베어 가서 집을 지어 행복하게 살아라." 소년이 나무가 지를 베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나무는 오히려 행복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소년은 중년이 되어 나타나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바다 건너 먼 곳으로 갈 배가 필요해" 그러자 나무가 "내 나무 둥지를 베어다가 배를 만들어."라고 말했습니다. 소년은 톱으로 나무를 잘라서 어디론가 자져갔습니다.
중년이 된 소년의 뒷모습을 보며 나무는 흐뭇해했습니다. 오랫동안 그 소년은 나타나지 않았고 나무는 몹시 외로웠습니다.
오랜 후에 소년은 초라한 할아버지가 되어 나타났습니다. 나무는 매우 반가워하며 "이제는 더 줄 것이 없네. 그러나 잘려 나간 나무 밑동에 앉아서 쉬어라" 소년은 둥지 위에 앉아서 쉬었습니다. 그런 소년을 보며 나무는 아직도 줄 것이 있어 한없이 행복했다고 합니다.
최후까지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 주었던 이 나무는 아낌없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주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기까지 생의 둥지를 잘라 내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아낌없이 주는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은 한 사람은 무언가 예수님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하고 싶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성경에 보면 아담과 이브로 부터 시작해서 남녀가 비교 되는 경우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요한복음에 나타난 니고데모라는 유대남자와 사마리아의 이방여인도 대조 되는 경우 입니다. 신분과 지위를 비롯해 많은 것들이 대조적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마리아와 가룟 유다도 아주 대조적인 인물입니다. 마리아는 바치는 자요,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자, 축복 받을 자로 표현되고 있는 반면, 가룟 유다는 훔치는 자요, 주님을 향해 고통을 드리는 자요, 저주받을 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리아는 선한 자의 대표로, 가룟 유다는 악인의 대표로 등장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그러면 마리아는 태어날 때부터 성품이 선하고 가룟 유다는 성품이 간악하게 태어났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가룟 유다도 처음에는 그 성품이나 사명감이 뛰어나기에 주님이 제자로 부르셨던 것이요, 더 나가서는 그 책임감이나 정직성이 우수하기에 제자들의 살림을 맡는 회계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칭찬 받은 것은 무엇 때문이며, 그렇게 주님의 마음에 들었던 가룟 유다가 3년 사이에 이처럼 변질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기 전에 베다니에 들리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다니는 감람산 동편으로 약 5리쯤 되는 곳에 위치한 작은 촌락입니다. 오늘 주님은 이 마을에 오셔서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대접을 받게되셨습니다. 아마, 시몬은 과거 문둥이였다가 주님을 통해서 깨끗함을 받은 인물로 그 은혜를 보답하는 마음에서 잔치를 벌리고 주님의 일행을 초청한 것 같습니다.
그 때에 같은 동네 살고 있는 나사로의 누이요, 마르다의 동생인 마리아가 귀한 향유을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깨뜨리고 예수님의 머리와 그 발에 기름을 부어 드렸습니다. 그러자 이 장면을 보고 있던 가룟 유다는 혹독하게 비판하기를 "이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느뇨 이것을 팔면 300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지 않은가?"라고 했습니다. 또한 제자들도 가룟 유다의 선동에 휘말리어 이에 동조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가룟 유다를 책망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는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 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며 저를 기념하리라"고 했습니다.
자, 그러면 마리아는 왜 칭찬을 받았고 가룟 유다는 왜 책망을 받았습니까?
1. 마리아는 주님 중심적이었고 가룟 유다는 자기 중심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주님 앞에 받은 바 은혜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 중에 가장 감사한 것은 오빠 나사로가 중한 병으로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지 나흘이 되어 전혀 살 소망이 없는 때에 예수님의 권능으로 다시 살게된 것입니다. 나사로는 집안의 기둥이었는데 그가 죽는다면 마르다와 마리아는 고아나 다름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오빠를 살려주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그 무엇을 드린다 할지라도 아깝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하고 고마워서 자기가 가장 아끼던 향유 한 옥합을 주님께 가지고 와서 아낌없이 바쳤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믿음이 좋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헌물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 너무 감사하여 바친 것입니다. 바로 이점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헌신이나 봉헌할 때에 반드시 명심할 것은 주님의 은혜 만 분지 일이라도 갚는다는 마음으로 해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마음의 자세로 충성할 때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에 대한 감사, 주님에 대한 사랑, 즉 주님 중심으로 행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향유 옥합을 깨어서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부었습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최고의 것을 주고 싶어합니다. 사랑은 값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하는 헌신이기 때문에 마리아는 주님께 최고의 것을 드렸습니다. 사랑이란 원래 값을 묻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인 것입니다.
결혼을 앞둔 남녀가 어느 날 백화점에 가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사랑하니까 좋은 것을 사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비 신부는 잔뜩 기대에 부풀어서 따라 다니는데 이 남자는 물건마다 가격을 보더니 "야, 너무 비싸다. 좀더 싼 데 가보자."라고 하면서 이리저리 끌고 다니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일이 화근이 되어 가지고 두 사람이 헤어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사랑이란 원래 값을 묻지 않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심정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하늘 보좌의 영광도 내놓으신 분입니다. 자기의 생명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다 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그를 사랑한다면 최고의 것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값을 따지지 않고 아낌없이 주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해서 가룟 유다는 마리아를 보고 왜 그 값비싼 향유를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데 쓰지 않고 예수님의 발에다가 쏟아 낭비하느냐고 화를 냈습니다. 마리아가 순간적으로 부어버린 그 향유값은 가룟 유다의 계산대로라면 300데나리온, 카나다 식으로 말하면 17,000불 정도입니다. 대단한 액수입니다.
가룟 유다는 그 엄청난 돈을 쓰는 용도가 틀렸다는 비판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 돈을 가난한 자들에게 쌀 한 가마니씩 사주어도 150명에게 줄 만한 금액이요, 불우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준다고 해도 수십 명에게 혜택이 돌아갈 것입니다. 너무나 아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판하고 있는 가룟 유다를 야단을 쳤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구제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 22:37 이하에 나오는 대계명을 보아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의 우선 순위는 첫째가 하나님이요, 그 다음이 이웃이요, 세 번째가 자기인 것입니다. 이것이 joy입니다. Jesus first Other second You third 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자기 사랑을 제일 우선으로 둔 것이 잘못입니다. 말로는 가난한 자들을 위하는 것 같으나 사실은 자기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요 12:6절에 보면 가룟 유다의 말을 평가하기를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고 했습니다.
아마 마리아가 그 향유를 예수님의 일행을 위해 바쳤다면 가룟 유다는 시장에 내다가 300데나리온에 팔고 장부에는 250데나리온이라고 쓴 후 50데나리온은 착복하였을 것인데, 마리아가 별난 믿음을 가진 탓에 자기가 손해를 보았다는 생각이 화가 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아니, 가룟 유다가 왜 그런 한심한 인간이 되었습니까? 아마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이 예수님을 통해서 출세하려는 욕심을 가진 탓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3년 동안 열심히 따라 다녔으나 그 결과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말을 듣고 자기 스승이 자기들을 속였다는 배신감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 손해본 만큼 보상받겠다는 계산으로 돈궤에서 착복하기 시작했을 줄 압니다.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마리아는 받은바 은혜 감사하는 마음에서 헌신함으로 감격이 넘쳤으나 가룟유다는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헌신함으로 점점 불만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도 무슨 충성, 무슨 봉헌, 무슨 선행을 할 때에 나를 과시하거나 자랑하려는 자기 욕심에서 아니고 오직 주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할 때 주님이 기뻐하시고 그런 사람들에게 더 큰 은혜, 더 감격을 주실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마리아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가룟 유다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주님의 일은 기회가 주어질 해야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막 16장에 보니까, 며칠 후인 안식 후 첫날 여인들이 예수님께 향유를 부으러 무덤에 달려갔지만 붓지 못하고 돌아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 헌신할 기회는 아무 때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기회가 온다고 해도 그 때는 이미 가치가 삭감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실 때, 성령의 감동이 올 때 순종하고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성도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리아는 충성할 기회를 알았는데 가룟 유다는 왜 기회를 모르고 오히려 예수님의 마음만 아프게 하는 자가 되었을까?' 라는 점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오실 때마다 만사 젖혀놓고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일에 힘썼기 때문에 예수님의 안타까운 심정, 예수님이 곧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신다는 것을 깊이 깨달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반대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열심히 말씀하시는 동안, 시장에 나가서 저녁거리나 필요한 물품을 구입했을 것이요, 혹 예수님이 말씀하는 현장에 있다고 할지라도 맨 뒷자리에 앉아서 장부정리나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의 안타까운 심정, 십자가를 지셔야 할 이유를 알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의 그의 욕심이 영적인 면에서 어둡게 했고, 오히려 가룟 유다는 주님의 돈을 훔치는 기회만 노리는 자가 되고 말았다는 것은 너무나 큰 저주가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늘 기도생활, 성경을 연구하는 생활에 힘쓸 때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알게 됩니다. 그 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충성과 헌신의 기회를 주실 때 그것이 축복인 줄 아시고 순종하십시오. 또한 하나님이 은혜의 기회를 주실 때도 있고 회개할 기회를 주실 때도 있습니다.
어느 신령한 분이 말하기를 순교를 당하는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인데 그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3. 마리아는 힘을 다하여 희생했고 가룟 유다는 아무 희생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해 300데나리온 어치의 향유를 부었다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어느 성경학자는 이 향유는 그 여자가 시집갈 밑천으로 조금씩 조금씩 모아 두었던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것을 주님을 위해서 아낌없이 희생적으로 바치었던 것은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요12:3에 보면 그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자들은 머리털을 얼마나 귀하게 여깁니까? 그 귀한 머리털로 발을 씻겼다는 것은 전적인 헌신, 전적인 희생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 엄청난 금액의 헌물과 헌신이 우리 주님을 기쁘게 했습니다. 그 때 당시 예수님은 완전히 궁지에 몰리시고 계셨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노골적이고 조직적으로 압박을 가할 것이요, 어제까지 자기를 환호하던 군중들이 돈 몇 푼에 팔리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칠 것이요, 그렇게 3년 동안 훈련시켰던 제자들은 다 도망치고 그 중의 하나가 자기를 팔 것입니다.
하나님마저도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시기까지 고개를 돌리시고 외면하실 것입니다.
정말 인간적으로 어디 하나 위로 받을 곳이 없습니다. 천지에 혼자 계신 최고조의 고독감이 예수님을 향해 조여오고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마리아의 전적인 헌신과 희생이 예수님에게 큰 위로가 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마리아를 통해서 유일하게 위로 받으시고 계신 예수님을 향해 가룟 유다는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엄청난 십자가 사건을 앞두시고 유일하게 위로 받으시는 것을 오히려 구제를 핑계하고 공개적으로 비판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만약에 부모님에 칠순 잔치를 벌리고 있는데 아들이라는 자가 와서 "아니, 왜 이렇게 돈을 낭비하는가? 이 돈을 아껴서 불우한 사람을 도우면 얼마나 좋은가?"라고 한다면 천하불효자일 것입니다. 사실, 평소에 구제를 많이 하는 사람은 그런 소리를 잘 안 합니다.
오히려 그런 생활을 못 하는 자들이 그런 타령을 더 많이 할 때가 많습니다.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그는 구제를 많이 하는 사람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평소에 구제는커녕, 오히려 예수님의 일행의 생활비에서 몰래 몰래 도적질하던 자가 가룟 유다가 아닙니까? 그리고 마26:14을 보십시오. 그 사건이 있은 후에 곧 이어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은30냥에 팔았던 자가 바로 가룟 유다였던 것입니다.
그런 자가 가난한 자들을 가장 위하는 것처럼 입에 발린 소리를 하고 있으니 너무나 기가 막힙니다. 너무나 가증합니다. 자기 것은 하나도 내놓지 않은 채, 말로만 하는 충성, 구제 누가 못합니까? 안 됩니다. 우리는 말로만 번지르게 하는 믿음, 말로만 하는 충성, 말로만 하는 구제를 외치는 가증한 태도에서 과감히 벗어나 이제부터는 희생이 담긴 믿음, 희생이 담긴 충성, 희생이 담긴 구제를 생활화해야 할 것 입니다. 우리 주님은 믿음과 희생의 그릇만큼 역사 하시는 분이십니다.
적은 믿음과 희생의 그릇에는 적은 은혜를 담아주시고 큰 믿음과 큰 희생의 그릇에는 큰 은혜를 담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니, 더 나가서는 마리아처럼 깜짝 놀랄만한 믿음과 희생에는 깜짝 놀랄만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피투성이가 되어 감옥에 던져진 후에도 거기에서 찬송을 부르는, 깜짝 놀랄만한 믿음의 헌신을 보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도 깜짝 놀랄만한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옥터가 움직이고 감옥 문이 열렸습니다. 모든 매인 것이 풀리면서 전도의 문이 열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장 1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아름다운 헌신을 본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진정 주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사랑한다면 그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표현은 과연 얼마나 헌신적인 것입니까? 해링톤이라고 하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귀가 가장 요긴하게 사용하는 사람은 활동적인 죄인이 아니라 비활동적인, 다시 말해 헌신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오늘날 사탄은 제 세상을 만난 것처럼 날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 헌신기피증이 전염병처럼 퍼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조금 살만 하니까 헌신하기를 기피합니다. 쉽게 예수 믿고,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보면 헌신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오늘날 왜 교회가 이토록 힘을 잃고 있습니까? 헌신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자꾸 줄어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득실을 계산하면서 철저히 자기 본위로만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이 수만 명이 모인다 한들 그런 교회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인도의 간디를 잘 아실 것입니다. 1948년 1월, 그가 어떤 미치광이에 의해 피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인도 전역에서 그를 따라서 자살한 사람이 몇 명인지 아십니까? 학자들의 계산에 의하면 많이 잡으면 100만 내지 200만이고, 적게 잡으면 20만 내지 60만이라고 합니다. 간디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생명을 바친 것입니다. 진정 내 마음을 드리는 대상이면, 정말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심지어 자기 생명까지라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간디 같은 사람을 위해서도 생명을 바치는 사람이 수십만 명이었다고 한다면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대신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사랑을 한 몸으로 받고 있다고 고백하는 우리야 어떠해야겠습니까?
주님은 헌신자를 부르고 있습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것은 마리아처럼 사랑으로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한번뿐인 인생을 우리가 주님을 위해 깨트리는 옥합으로 드려야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표현하기 원한다면 우리가 가진 능력이 나 재산, 시간, 그 무엇이든 전부 주님께 드립시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요구하십니다.
주님이 먼저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 주간 동안 우리들도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를 위하여 몸으로 봉사함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며, 값비싼 옥합 같은 물질로 봉사함으로 사랑을 표현하며, 모든 모임에도 열심히 참석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이는 더욱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여러분처럼 적극적으로 몸과 물질과 시간을 다 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하지 마십시오. 사람마다 각기 믿음의 분량이 다르고 영적 성숙도가 다릅니다.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한 사람으로 영원히 기억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하신대로 다시 살아나셨느니라
마 26:1-2, 31-32, 28:1-6 / 지용수 목사
역사적으로 보면, 점을 보는 사람, 사주팔자를 봐주는 사람의 자녀가 잘 된 일이 없습니다. 신문이나 잡지에 사주팔자나 꿈 해몽이 자주 나오는데, 그런 글을 쓴 사람의 자녀가 잘 된 일이 없습니다. 그런 것에 미혹 당하면 안 됩니다.
인도에 유명한 예언자로 소문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니 사람들을 속인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왕이 그를 그날 당장 죽이려고 불러들였습니다. 왕은 거짓 예언자가 그날 자기가 죽는 것을 아는지 시험하기 위해 그에게 물었습니다.
“자네는 몇 년까지 사는지 아는가?”
거짓 예언자가 왕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폐하, 저는 폐하께서 돌아가시기 3일 전에 죽습니다.”
“뭐라고? 그러면 나는 몇 년까지 사는가?”
“폐하께서는 제가 죽은 3일 후에 돌아가십니다.”
그 말을 듣자 왕은 아찔했습니다. 그 예언자를 그날 죽이려 했는데, 혹 그 예언자의 말이 맞으면 자기도 3일 후에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여봐라! 이 자를 데리고 가서 잘 먹이고 오래 살도록 잘 돌보아 주어라.”
왕이라도 미래를 모릅니다. 대통령이라도 코앞의 일을 모릅니다. 삼손이 예쁜 여자와 놀아나다 눈이 뽑혀 죽을 줄 알았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롯의 처가 뒤를 돌아보았다가 소금기둥이 될 줄 알았으면 뒤를 돌아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간이 금과 은, 외투를 훔쳤다가 자기와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이 다 돌에 맞아 죽을 줄 알았다면 훔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두 몰라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사람은 미래를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전지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본문 26장 2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예수님께서 배신을 당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31절, 32절에 보면, “내가 죽지만 다시 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도 아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실 것도 아셨습니다. 때문에 마태복음 16장 21절에서도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고 삼일 만에 부활한다.”라고 제자들에게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2절, 23절에도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기워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마태복음 20장 18절, 19절에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여 이방인들이 나를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으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오늘은 부활절인데, 주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지난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십자가에 달려 계셨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운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십자가에 달려 계신데, 당대의 유명한 공회의원이요 재벌인 아리마대 요셉이 용기 있게 빌라도 총독에게 가서 허락을 받아 예수님의 시신을 장례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하는 일을 보고 힘을 얻은 니고데모도 힘을 다해 침향과 몰약 백 근을 준비해 왔습니다. 침향과 몰약은 왕의 장례식에만 쓰는 귀한 것인데, 그것을 백 근이나 아낌없이 주님께 바쳤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자기를 위해 준비해 놓은 새 무덤에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걱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주 “내가 죽지만 삼일 만에 부활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그들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빌라도 총독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각하, 죽은 자는 자신이 죽은 후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난다고 자주 말했습니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그의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가서 감추어 놓고 ‘예수가 부활했다.’라고 하면 민심이 소란하게 될 것이니 군사들에게 무덤을 지키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래서 허락을 받고 파수꾼을 시켜 무덤을 지키게 하고 또 돌로 막은 무덤 문에 다시 회칠을 해서 도장을 찍었습니다.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하고 군사들이 3일간 지켰습니다. 안식일인 그 다음 날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도 영혼이 금방 떠나가지 않고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삼일간은 주변을 맴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이 삼일간은 매일 무덤에 가서 돌봅니다. 그런데 예수님 장례식 다음 날은 토요일로 그들이 목숨을 걸고 거룩하게 지키는 안식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무덤에 가지 않은 것입니다.
구약은 미완성 성경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구약의 부족한 것을 다 완성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소를 잡고 양을 잡아 그 피를 제단에 뿌려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피비린내가 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피로 모든 것을 대신하셔서 이제는 소나 양을 잡아서 예배드리지 않습니다. 예수님 피의 공로를 의지하여 예배를 드립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구약에서는 모두 할례를 받았으나 이제는 할례를 받지 않고 세례를 받도록 예수님께서 바꾸셨습니다.
또 구약에서는 안식일을 지켰지만, 이제는 주일에 예배를 드립니다. 만일 지금도 안식일을 지킨다면 유대교인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이 유대교인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안식일을 지킨다면 세상 사람들이 기독교와 유대교를 구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부활하지 않으시고 안식 후 첫날, sunday, 주일날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안식일이 중하지만 안식일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더 큰 날로 여겨서 기독교는 유대교와 달리 주일날 예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도 ‘주의 날’이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일주일이 다 귀한 날이지만, 가장 큰 날은 주일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일 이른 새벽,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예수님을 사랑한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보러 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저 무덤이나 돌보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와보니 지진이 일어납니다. 무덤 문을 지키고 있던 군사들이 지진에 놀라 기절합니다. 빛나는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무덤 문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얼굴이 번개처럼 빛나고 옷은 눈보다 흽니다.
그 광경을 보고 여인들이 무서워 떱니다. 그 여인들에게 천사가 말합니다.
“무서워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찾으러 온 것을 아노라. 그가 여기에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따라 합시다.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새벽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새벽에 일어나서 부활하신 주님을 경배해야 됩니다. 이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군에 가면 이유가 없습니다. 정한 시간에 일어나야 됩니다. 교인들은 다 새벽에 일어나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십자가를 지시고 말씀하신 대로 삼일 만에 정확하게 부활하셨습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으실 때도 말씀으로 지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으로 오셨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14)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이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말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의 무덤은 빈 무덤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 창시자들은 무덤이 있습니다. 석가나 마호메트나 공자나 다 무덤에서 썩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의 무덤은 빈 무덤입니다.
Christian Century지 편집장 말티 목사님이 교회학교 교사 때의 일입니다. 부활주일 전 주일날 아이들에게 숙제를 냈습니다.
“얘들아, 다음 주일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부활주일이니 생명을 상징하는 것을 상자에 담아 오너라.”
부활주일에 아이들이 모두 예쁜 상자를 갖고 왔습니다. 아이들이 가져 온 상자 안에는 병아리, 달걀, 나비, 푸른 잎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티브라는 아이가 가져온 상자를 여니 빈 상자였습니다. 상자 안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얘야, 너는 왜 빈 상자를 갖고 왔니?”
“선생님, 이건 예수님의 무덤이에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빈 무덤이 된 거예요.”
그래서 스티브를 칭찬해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 예수님의 무덤은 빈 무덤입니다.
인도의 성자 산다싱이 영국에 갔을 때 많은 사람이 몰려왔답니다. 그때 한 대학교수가 이런 질문을 했답니다.
“선생님은 왜 조상 대대로 믿어온 힌두교를 믿지 않고 기독교로 개종하셨습니까?”
질문을 받은 산다싱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분명히 대답했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습니다.”
예수님만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가 죽은 사람의 어떤 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살아 계신 하나님을, 생명의 종교를 믿는 것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다 이루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16) 할렐루야!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Whoever, 누구든지 예수님만 믿으면 영생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듭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도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히말라야 산맥의 주변 사람들은 오래 산다고 합니다. 맑은 공기와 맑은 물을 마시며 사니 오래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히말라야 산맥 가까이에서 살면 아마 120, 130세까지는 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은 몇 십 년 더 사는 동네로 옮긴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동네로 옮긴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교회는 영원히 사는 동네다.”
우리가 교회에서 살게 됨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 26절에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 합시다.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캘리포니아에 제임스 베드포라는 박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간암으로 죽게 되었을 때인 1967년 1월 12일에 자신을 냉동시키게 했습니다. 그리고 의학이 발달되어 간암을 완전히 치료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냉동 상태에서 해동시켜 달라며 4,200만 불(500억 원)을 냈습니다. 그때 간암을 고쳐서 다시 살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냉동된 시체가 열두 구가 있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혹 간암이 완전히 해결되는 때가 되어서 해동되어 다시 산다고 해도 몇 십 년 더 살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몇 십 년 더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돈을 번 자들입니다. 500억 원 정도가 아닙니다. 말할 수 없는 가치의 생명, 영원히 사는 생명을 샀습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리고 우리 영혼만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몸도 부활합니다. 우리가 무덤에 들어가지만 나중에 우리의 무덤도 빈 무덤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세계적인 화장품 회사인 레브론에서는 클로레리 세프라는 미인 모델을 바닷가에서 뛰게 해서 한 장면을 찍고는 천억을 주었답니다. 그 아가씨의 얼굴이 아주 순박하고 청순하며 몸이 아름답고 생동감이 넘치니, 흠과 티가 없이 아름다우니 뛰는 모습을 한 번 찍는데 천억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가씨도 세월이 가면 늙고 병듭니다. 그 아름다운 몸도 썩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광의 몸으로 부활합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만일 예수님께서 지금 오시면 우리는 무덤에 들어가지 않고 홀연히 변하여 영광의 몸을 입고 하늘로 들림 받게 됩니다. 제가 99세까지 살기를 원하지만 우리 주님께서 내일이라도 오시면 참 좋겠습니다. 제가 지난 주일에도, 우리 일생에서 최고로 기쁜 날은 죽는 날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천국으로 가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한 에스키모인이 에스키모에 탐험을 온 미국 탐사대를 도와주었습니다. 미국 탐험대원들이 고마워서 그를 미국에 초청했습니다. 에스키모인은 뉴욕과 시카고를 구경하며 깜짝 놀랐습니다. 그가 자기 나라에 돌아가서 “미국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은 빌딩이 있고, 거리를 쌩쌩 달리는 자동차가 있고, 하늘을 나는 비행기 있고…….”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를 거짓말쟁이라고 해서 그가 고통당하다가 죽었답니다. 미국에 빌딩이 있고 자동차가 있고 비행기가 있는 것을 미국에 갔다온 사람은 사실이라는 것을 아는데, 그렇지 않은 에스키모인들은 그 사실을 말한 사람을 거짓말쟁이라고 한 것입니다.
에스키모에서 살다가 미국에 가도 충격을 받는데 이 세상에서 살다가 천국에 가면 얼마나 더 큰 충격을 받겠습니까? 천국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예수님께서 지금이라도 재림하시면 우리는 홀연히 변하여 천국으로 들림 받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이 몸, 병든 몸, 때가 낀 몸으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활합니다. 그런데 부활할 때 문제가 발생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수년 전에 성형 수술을 한 사람들은 부활할 때 어떤 모습일까 한동안 생각해 보았습니다. 코를 높이고 결혼을 했는데 납작코의 모습으로 부활하면 남편이 ‘이상하다. 음성은 내 아내의 음성인데 코가 왜 저렇게 생겼을까?’라고 생각하며 “당신, 내 아내가 맞소?”하고 물어보지 않겠습니까? 또 쌍꺼풀 수술을 하고 결혼을 했는데, 부활할 때 쌍꺼풀이 없는 모습으로 부활하면 남편 보기에 미안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나는 네 친정아버지보다 너를 더 사랑한다. 성형 수술하고 나서 더 못나 보여 후회하면 이전의 모습으로 부활시켜 주고, 더 예뻐졌으면 수술 후의 모습으로 부활시켜 준다.”
따라 합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친정아버지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감사합니까?
어쨌든 우리는 영원히 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만 부활하시고 우리는 죽어서 부활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축하만 하고 말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예수님과 똑같이 부활하니 축하하고 말 일이 아니라 기뻐서 춤을 출 일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모욕을 당하시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의 터널을 지나셨지만 부활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승리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2장 26절에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눈이 오는 날 사람들이 앞사람의 발자국을 밟고 가듯이, 여러분과 저는 주님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에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십자가를 지는 것 같은 고통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합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승천합니다. 주님께서 이기셨기 때문에 우리도 이기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까지 '주의 이름으로 승리하기를 축원한다'는 말을 많이 했는데, 사실은 그것이 맞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했습니다. 할렐루야!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 대장 예수님께서 이미 승리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승리한 것입니다. 함포 사격으로 고지를 초토화시킨 후 보병들이 "와!"하고 올라가서 승리의 깃발을 꽂는 것처럼,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로 마귀의 목을 다 부러뜨려 놓으셨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승리의 깃발을 꽂으러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는 승리하리 우리는 승리하리 우리는 승리하리 그 날에」하고 찬송하는데, 사실은 「우리는 승리했네 우리는 승리했네 우리는 승리했네 오늘에」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한 것입니다. 이긴 것을 확인하면서 가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상황이 아무리 캄캄하고 어려워도 결국에는 이기는 것입니다. 회사에서 해고를 당하고 아내가 가출하고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나는 이기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께서 내게 계십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휘청거릴 때가 있습니다. 대통령도 휘청거릴 때가 있고, 회사 사장도 휘청거릴 때가 있고, 목회자도 휘청거릴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베토벤도 휘청거릴 때가 있었습니다. 베토벤이 한 여인을 너무나 사랑했는데, 그 여인이 가난한 베토벤을 버리고 갔습니다. 결혼한 후에 배우자에게 버림받는 것은 결혼 전의 애인에게 버림받는 것보다 덜 심각합니다. 함께 살아 보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혼 전에는 사랑하는 애인이 전부인 줄로 알고 있기 때문에 버림을 당하면 심각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결혼 전에는 제 아내가 제 삶의 전부로 보였습니다. 제 아내가 정말 굉장한 여자인 줄 알았습니다. 자나깨나 아내 생각뿐이었습니다. 공부도 주님을 위해서보다 제 아내를 위해서 할 때가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 한 분이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한 TV 방송국에서 70이 넘은 할머니들을 모셔다가 위로 잔치를 해드렸답니다. 그때 사회자가 할머니들에게 “할머니들,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할아버지와 결혼하시겠습니까?”하고 물었답니다. 그러니 할머니들이 “미쳤어?”라고 하는데, 한 할머니만 자기 할아버지와 결혼하겠다고 대답했답니다. 사회자가 놀라서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어디가 좋아서 다시 결혼하실 겁니까?”하고 물으니, 할머니가 “좋긴 뭐가 좋아. 그놈이 그놈이여.”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여러분, 사람이 내게 귀하지만 내가 휘청거릴 정도의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 때문에 흔들리지 맙시다.
그런데 베토벤은 첫사랑을 잃고 휘청거렸습니다. 그리고 친구들과 다투고 상처를 받았습니다. 또 충격으로 귀가 어두워졌습니다. 음악가가 귀가 어두워졌으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는 인생을 접으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영적으로 높은 경지에 있는 고매한 영적 지도자를 찾아가서 자기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지도자가 상자 하나를 가지고 와서 “여보게, 여기에서 구슬을 하나 꺼내 보게.”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구슬 하나를 꺼냈더니 검은 구슬이었습니다. 지도자가 또 말했습니다.
“또 하나 꺼내 보게.”
또 검은 구슬이 나왔습니다.
“여보게, 이 상자 안에는 하얀 구슬이 두 개, 검은 구슬이 여덟 개 들어 있네. 어떤 사람은 하얀 구슬을 먼저 집어내고, 어떤 사람은 자네처럼 검은 구슬을 먼저 집어낸다네. 검은 구슬은 불행, 실패를 뜻하고 하얀 구슬은 성공, 행운을 뜻하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검은 구슬도 주시고 흰 구슬도 주셨다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조금 먼저 흰 구슬을 집어내고 어떤 사람은 조금 늦게 흰 구슬을 집어내는 것뿐이라네. 자네가 계속 구슬을 집어내면 언젠가는 흰 구슬이 나오게 되어 있네. 흰 구슬이 자네 앞에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다네.”
그의 말에 베토벤이 위로와 힘을 얻고 다시 시작해서 음악계의 별이 된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내 앞에도 흰 구슬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앞길을 예정하고 계십니다.
잠언 16장 9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7절에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시고 나아가도 우리에게는 힘든 일들이 많습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인간관계에서, 교회 생활에서 힘든 일이 많지만, 그래도 우리 주님께서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7절에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저는 오늘 참 기쁩니다. 1부 예배 때 헌금을 드리고 부활절 달걀 하나를 집어서 그 달걀에 붙어 있는 말씀을 찾아보니 사무엘하 8장 6절이었습니다.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이 말씀은 “지용수가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라는 의미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제가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저는 22년 전의 우리 양곡교회 사진을 책상 앞에 두고 날마다 보고 있습니다. 혹시 제가 옛날을 잊을까 봐서입니다. 그 당시 우리 교회의 예배당은 거의 다 상한 슬레이트 몇 개를 걸쳐놓은 무허가 건물이었는데 마치 판잣집 같았습니다. 또 거름터 옆에 있어서 교회 가까이에 오면 거름 냄새가 났습니다. 그때 많은 분들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지 목사님, 양곡교회는 안 됩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철거당하고 그 땅에 공장이 들어설 겁니다. 지금 있는 그 건물은 무허가 건물입니다. 지 목사님, 잘못 왔습니다.”
그러나 제가 무릎을 꿇으니 하나님께서 이런 사인을 주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고 했지만 나사렛에서 나온 예수가 세상을 구원했다. 양곡교회가 세계를 구원하리라. 영락교회보다 더 큰 교회를 이루라.”
그 말씀을 붙잡고 나아오니 오늘의 우리 양곡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8년 전인가 9년 전에도 제가 신비로운 일을 경험했는데, 참고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비몽사몽간에 “일어나 빛을 발하라. 일어나 더 크게 나팔을 불어라.” 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안개 속에서 흰옷 입은 천사가 나타나더니 금 나팔을 빠바방 하고 불었습니다. 그때 제가 ‘내가 세계를 다니며 저 금나팔처럼 저렇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계의 귀한 교회들이 저를 불러서 제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들이 충격을 받습니다.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큰 은혜를 받기도 처음이고, 그렇게 많이 모이기도 처음이라고들 합니다. 말씀대로 되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못해도 주님께서 함께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오늘 받은 말씀에 여러분의 이름을 넣어 보세요.
“○○○가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셔서 이제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28장 20절에 말씀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우리 주님께서는 지금 성령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엄마는 바람이 나서 아기를 버리고 갈 수 있어도 우리 주님께서는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승리의 길, 성공의 길을 갈 때뿐 아니라 실패했을 때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오해를 받을 때도 주님께서는 거기에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해 있을 때도, 십자가를 지는 것 같은 일을 당할 때도 주님께서는 거기에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엔 우리를 이기게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잘 나갈 때만 승리의 깃발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 잘 안될 때도 승리의 깃발을 흔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계 골프계에서 존경과 사랑을 많이 받았던 사람들 중에서 대표적인 사람이 아놀드 파머와 잭 니콜라스입니다. 특히 아놀드 파머는 경기에 이겼을 때뿐 아니라 졌을 때도 그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오히려 졌을 때 더 많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잭 니콜라스는 이겨야 인기가 올라가고 지면 인기가 떨어졌는데, 아놀드 파머는 져도 사랑을 받고 인기가 올라갔습니다. 오랜 친구이자 라이벌 관계이던 잭 니콜라스가 하루는 아놀드 파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자네는 경기에 져도 어찌 그렇게 사랑을 받지? 그 비결을 말해 보게.”
“비결이라니, 그런 건 없어.”
“그러지 말고 좀 가르쳐 주게나.”
“그러면 우리 집에 한 번 와 보게.”
아놀드 파머의 응접실에 들어간 잭 니콜라스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잭 니콜라스의 집에는 수없이 많은 우승컵이 찬란하게 진열되어 있는데, 아놀드 파머의 집에는 낡은 우승컵 하나뿐이었습니다.“
“아니, 그 많은 우승컵은 어떻게 했지?”
“나에게 그런 것은 의미가 없어. 내게는 이것 하나만 의미가 있지. 내가 경기에 져도 이렇게 사랑을 받으며 버티고 있는 것은 이 우승컵에 있는 글귀 때문이야.”
잭 니콜라스는 그 글귀를 읽어보았습니다.
‘당신이 패배했다고 패배한 것이 아니다. 당신이 그 패배를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패배가 된다. 치열한 전투 현장 같은 이 세상에서 아무리 강자라도 매번 이길 수는 없다. 그러므로 설혹 져도 마음만 지지 않으면 다음에 이기게 된다. 마음이 긍정적인 사람이 영원한 승리자다.’
얼마나 좋은 글귀입니까?
아놀드 파머는 경기에 이겨도 이겼지만, 경기에 져도 ‘오늘은 졌지만 내일은 이긴다.’ 하며 마음으로는 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경기에 져도 얼굴에 빛이 있었습니다. 항상 이긴 자의 얼굴이었습니다. 그 얼굴을 보며 사람들이 “경기에 진 선수가 어떻게 저렇게 매너가 있고 힘이 있느냐?” 하며 그를 사랑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이기면 기뻐하고 지면 실망하여 고개를 숙입니다. 그러니 지면 인기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놀드 파머는 경기에 져도 오히려 얼굴을 들고 기뻐한 것입니다. 참 멋있는 골퍼입니다.
우리는 회사가, 가정이 잘 될 때도 승리자입니다. 안 될 때도 승리자입니다. 결국에는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승리하셨고, 그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승리합니다. 부활의 주님과 함께 날마다 승리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