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백로
리태근
순희는 가명이고 김영숙이 진짜 이름이다. 내가 한국을 자주 드나드는 눈치를 알고서 어느날 한 친구가 나에게 결혼서류라고 기어코 잘 전달해 달라고 수고비까지 챙겨주는 것이였다. 도대체 얼마나 중요한 서류이기에 수고비까지 줄까, 모 결혼정보알선업체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와 풋 면목은 있지만 깊게 친하는 사이는 아닌터라 구체적인 사연을 꼬치고치 캐어물을 수도 없다. 하여튼 만약 전해주면 밥 한끼는 따뜻하게 대접할 것이 라고 하면서 잘 전해달라고 골백번 당부한다.
서울에서 볼일을 다보고 친구의 부탁대로 청량리로 향했다. 서류의 주인은 연변왕청에서 온 동포였다. 네평방도 되니마나한 전세집에 부부가 살고 있었다. 남편은 훤칠한 인물체격에 노가다를 하고 있었고, 마누라는 식당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갖고온 서류를 벌써 3년이나 기다렸었다고 하면서 마치도 나를 구세주마냥 정성껏 대접해주었다. 알고보니 내가 갖고 온 보물은 가짜 결혼서류였다. 벌써 3년째 목마르게 기다리던 마지막 서류란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중국 흑룡강성의 한 여성과 <얼굴바꿔치기>하고 한국으로 온지도 오래되었는데 한국호적에 올리지 못해서 애를 먹고 있단다. 이번에 만든 서류가 마지막희망이었단다. 인젠 그 녀도 떳떳한 한국국민으로 활개치며 살아갈 수가 있단다. 한국호적에 올리는게 하늘에 별따기라 하더니만 과연 저렇게도 기쁠가 나는 이쁘게도 생기지도 않고 못나지도 않는 그녀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 이튿날 영숙의 가짜 한국남편이 찾아왔다. 남남북녀라고 하더니만 남자는 생각 밖에 잘 생겼다. 청량리에서 소문난 떡방아간을 경영하고 있다는데 돈도 많고 사는 것도 괜찮단다. 영숙이를 위해서 마누라와 가짜 이혼하고 진짜 결혼서류까지 만들었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가짜일지 몰라도 한국에서는 진짜로 결혼한 셈이 되었다. 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은 가짜 결혼한 그들이 진짜 부부처럼 그렇게도 알콩달콩 보낼 줄이야. 순희의 남편은 한국 가짜 남편을 보고 형님이라고 부르며 죽기내기로 따른다. 하기야 이 낯 설은 한국에서 그들 부부는 한국남편에게 엄청 많은 신세를 지고 있었으니까. 영숙이가 진짜 한국호적에 오르게 되였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 이미 한국호적을 넘겼거나 넘기려고 준비하는 가짜 부부 여섯 커플이 찾아왔다.
오랜만에 여기저기서 어렵게 만난 동포들이라 마셔라 부어라 노다지 흥타령이 절로 난단다. 갈비집, 호프집, 노래방 1차, 5차 밤 가는 줄도 모르고, 날 새는 줄도 모르고 즐긴다. 평소에는 개나 돼지처럼 죽게 고생하다가도 동포끼리 만나서 쏜다 하면 이렇게 하늘 땅이 맞붙는 줄 모르도록 거하게 즐기는 것이 <연변식 파티>란다. 서울인지 연변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자정이 훨씬 넘어서야 잠자리를 들게 되였는데 불청객 때문에 잠자리가 혼란이 생겼는가 영숙이는 나와 중국남편을 위해서 다른 곳으로 간단다. 영숙이 남편은 아까부터 술고래처럼 술을 마시고도 나 보고 또 한잔 하잔다. 뭐가 아쉬 워서 늦은 밤 또다시 도깨비 술판을 벌릴자는걸까. 아까부터 그는 한숨만 풀풀 내쉬더니 자꾸만 핸드폰을 만지막 거린다. 혹시나 일본 갔다는 딸 한테서 올 전화를 기다리냐고 물었지만 들었는지 말았는지 멍하니 나만 쳐다본다.그만하고 자자고 말리는 데도 그냥 혼자서 밤을 하얗게 샐 잡도리다.
안주도 없이 빈속에 잔뜩 마신 술이라서 그런지, 만두 속처럼 부글부글 궤여오르 듯 괴로워하던 속을 시원하게 쏟아내더니, 오래도록 가슴에 묻고만 있던 취중 진담을 털어놓는다. 사연인즉 가짜가 진짜가 된지 오래단다. 눈을 펀히 뜨고도 네편네를 빼앗기고 말았단다. 나보고 중국영화 <백모녀>를 보았냐고 물어본다. 자기가 꼭마치 그 백모녀에서 나오는 양백로꼴이란다. 살겠다고 녀편네마저 남주고 매일밤 차디찬 구들장을 안고서 잤단다. 자기 같은 <양백로>가 한국에 얼마인지 모른단다. 한국에 와서 돈 좀 벌었다는 연변여자들은 대부분 몸을 팔고 있단다. 처음에는 일하기는 싫고 하니누님 좋고 매부 좋은 돈벌이 한답시고 한국 남자를 만났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한국남자들의 <애인>으로 전락되어 갔단다. 그는 애당초 한국에 나온걸 죽어라고 원망했다. 차라리 영숙이와 함께 석탄불 때던그 때가 훨씬 나은 걸… 왕청 남산밑에 오붓하게 자리잡은 단층집이 한없이 그립단다 …
눈확이 움푹하게 꺼져들어간 영숙이 남편은 이시각 어느 여관에서 새하얀 뱃살을 드러내고 굴뱀처럼 마주붙어서 뒹굴고 있는 마누라를 보고있는 듯 핸드폰을 불끈 거머쥐였다. 죄없는 핸드폰이 비명도 못지르고 부서졌다. 매일 저녁 이맘 때, 그 일이 끝나면 눈먼 전화라도 왔었는데 오늘은 이 불청객 때문인가, 전화마저 안온단다. 아! 세상에 이런 전화를 기다리는 남편도 있는가? ... ...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전화를 기다리는 그가 안타깝다고 해야 할까 불쌍하다고 해야 할까 석탄백탄 타는데 연기도 안나구려. 눈물인지 콧물인지 흘리며, 애절하게 노래가락을 뽑던 그가, 맥주 병을 쥔 손을 부르르 떤다. 당장 무슨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나는 그만 그 술병을 빼앗아서 그대로 내 입에 부었다.이대로는 도무지 잠들 수가 없다.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그속에서 살던때가 그립습니다.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이 노래를 부르면서 소박한 고향정을 그리던 , 정처없이 떠도는 부평초가 부르던 노래. 처량하고 애절한 노랫소리는 늦은밤 청량리 하늘가에 멀리멀리 울려퍼진다… …
골바꿈 ㅡ신분증을 위조해서 비슷한 사람을 바궈놓는것을 말함
백모녀 ㅡ중국해방초기에 빚때문에 딸을 뺏앗긴 영화를 말함
양백로 ㅡ영화속의 딸의 아버지를 말함
첫댓글 어느 생역정의 드라마속 이야기를 흥미롭게 적어주신 글에 머물다 갑니다. 님께서 이런 좋은글은 감동시,사랑시방이나 눈물의 추억시 방으로 게시해 주시면 어떨지요. 행복하세요.
고맙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옮기려해도 잘 안됩다. 옮겨주실래요 내내건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