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18. 8. 3. 금요일.
무척이나 덥다.
어제 에어컨을 고쳤다며 밤중에 제 집으로 돌아간 손녀, 손자는 오늘은 할머니집에 오지 않았다.
일년 중 가장 무더운 때라서 종일 집에 머물면서 카페에 있는 내 잡글을 복사해서 다른 곳에 저장했다.
카페는 내 소유가 아니라서 미움을 받으면 강제퇴출당하거나 활동정지당할 수도 있기에 늘 조심스럽다.
카페에 위해(危害)을 전혀 끼치지 않겠다고 조심을 하나 혹시라도 잘못하여서, 미움을 받으면 강퇴당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으로 내 글을 이따금 복사해서 다른 곳에 저장해 둔다.
날씨가 하도 무더워서, 지치고 짜증이 나면 '아름다운 5060' 카페에서 '삶방' 글을 읽었다.
처음 보는 용어를 보았다.
'므두셀라 증후군(Methuselah syndrome).
'과거를 아름답게 미화시키려는 증상.
'므두셀라 신드름'.
발음하기가 무척이나 어렵기에 나는 그냥 우리 말뜻으로 이해해야겠다.
지나간 과거가 더러는 아름다운 것으로 기억되고, 추억되더라도 모두는 아름답지는 않는데도 나는
'지나간 것은 모두 아름답다'고.
하나의 예다.
어린시절 얼굴에 심한 화상을 입은 누나는 시골에서 중학교를 다녔다.
농사채가 많은 집이라서 일꾼들이 많았고, 어머니를 도와서 부엌에서 밥 짓는 게 일이었다고 한다.
공부를 등한시할 수밖에 없고, 학교 다니는 둥 마는 둥하면서 시골 중학교를 졸업했는데고 대전의 명문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뤘으니 불합격될 것은 뻔한 일.
중학교만 졸업하고는 내내 부엌데기로 살았다고 한다.
누나는 어린시절을 아름답게 기억하지 않았다. 과거를 미화하지도 않았다.
누나와 달리 나는 어린시절 어머니와 누이들고 헤어져서 대전으로 전학갔고, 대전을 거쳐 서울에서 공부를 했기에 누나가 시골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를 막연히 기억할 뿐이며, 누나의 처녀 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2015년 2월 말에 아흔일곱 살이 나던 며칠 뒤에 돌아가셨다.
누나가 죽은 어머니한테 원망을 쏟을 때마다 나는 누나를 달래야 했다.
'지난간 것을 다 좋게만 기억해. 그 시대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여.'
부엌에서 아궁이에 불 때서 밥 지어서 일꾼한테 퍼 줄 때, 대학생인 두 여동생은 방학을 맞아서 원산도 섬 등으로 여행 다녔다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나 나한테 들려주었다.
훗날 나는 누나,아내와 함께 셋이서 충남 보령시 원산도에 다녀왔다.
누나가 무척이나 고마워 했다.
나한테도 과거를 아름답게 미화시키는 게 있을까?
더러는 있을 게다. 고집을 피우면...
'므두셀라 증후군'의 반대 용어는 무엇일까?
지나간 기억들이 나쁜 것으로 자리매김을 하는 경우에는 어떤 용어가 있을까?
서해안 산골마을에서 1949년 1월에 태어난 나는 1950년대, 60년대의 마을사람들을 기억한다.
그 가난했던 사람들은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에 도시로 도시로 떠나갔다. 가난했던 그들은 결코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에 비하여 그다지 가난하지 않았던 나는 퇴직한 뒤에 그때까지 혼자서 고향을 지키던 어머니, 아흔 살 꼬부랑할머니가 된 어머니한테로 되돌아갔다.
나는 지나간 과거를 아름답게 미화하지는 않는다. 아픔도 제법 남아 있기에...
마치 내 누나가 지나간 과거를 아프게 기억하는 것처럼... 과장한 듯한 기억처럼...
1.
이 카페에 가입한 지는 2009. 6. 2.이니 만9년이 넘었다.
어머니 흙속에 묻고는 서울 올라왔기에 카페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다.
흘러가는 강물처럼 나타났다가 소리없이 사라지는 분들이 있었지만 요즘 7월에는 그 변화가 너무나 현격했다.
활동이 많았는데도 어느 순간에 사라지고, 더러는 탈퇴하고, 또 누구인가는 기세를 몰아서 좌지우지하려고 했다. 마치 가르치려고 하는 듯한 느낌도 든다.
살벌한 분위기는 언제부터일까?
금년 6월부터일까 싶어서 오늘은 6 ~7월에 오른 글과 댓글을 골라서 읽으면서 왜? 무엇때문에 하는 의문을 가졌다.
있다. 분명히...
아쉽다. 떠나간 그들이 아닌 남아있는 자들의 행태가 더 ...
가고 없는 사람들을 좋게 기억해 주었으면 싶은데도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공과를 비교하면 흠을 덮을 수도 있는데도 오로지 흠만 있는 것처럼 과도하게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꼭 그래야 했니? 하고 묻고 싶다.
모르는 체, 잊어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오래 전 시골 논 둠벙, 진흙탕속에는 무엇인가 있었다.
더듬더듬하면서 두 손으로 재빨리 움켜쥐면 미꾸라지, 장어들이 잡히듯이 분명히 있듯이...
그런데도 그냥 지나치고 있었다.
나한테는 지나간 것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은 아닌데도 때로는 좋게 해석하고 싶다.
하나의 예다.
생일이 섣달그믐인 어머니는 열여섯 살에 동네총각과 결혼했고, 스물여섯 살에 서방을 빼앗겼다.
그 미움이 오죽이나 심했으랴. 그런데도 어머니는 견뎠다.
나는 아버지의... 작은어머니한테서 11년간 밥을 얻어먹고는 학교에 다녔다.
내 어머니한테 정말로 못쓸 짓을 했어도, 나는 좋게만 해석하려고 했다.
과거의 구구절절한 것들을 오래 기억하고 싶지도 않고, 지금 꺼내고 싶지 않다.
'지나간 것은 모두 아름답다'라고 나를 달랜다. 오래 전에, 이미 죽은 그들이기에.
카페에서도 그랬으면 싶다.
떠난 그들을 보다 긍정적으로 기억해 주었으면 싶다.
그들도 카페 활성화를 위해서 한때에는 나름대로 노력했다는 것을 인정해 주었으면 싶다.
오히려 구경꾼들이 문제가 아닐까?
무엇을 제대로 알고 와글와글거리는 것일까?
구경꾼의 한 사람인 나는 달리 샛길로 나간다.
분명히 아닌데 하는 의혹의 눈초리로, 근거를 찿고 싶다.
'네 주장이 맞다면 증거를 제시하고, 또 그 증거가 맞다는 또다른 자료를 제시하지. 그것도 많이'
잡글이라도 사실과 증거에 바탕을 두고서 써야겠다.
1.
오늘 어떤 글에서 '밀양'이라는 단어를 보았다.
무엇인가 연상될 듯도 싶다.
소설가 오영수는 1979년 1월 '문학사상'에 '특질고'를 썼다.
각도 지방의 풍물과 산세 등을 보면서 향토적인 것을 썼는데 전라도 사람한테 엄청난 비난을 받고는 절필을 선언했다.
문학지는 3개월간 정지했고, 오영수는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는 그해 5월에 죽었다.
또 하나의 예다.
조선조 이중환은 정계에서 밀려나서 전국을 돌아다닌 방문지를 썼다. 1740년대의 '택리지'이다.
각도의 지세와 풍속 등을 분석하면서 아울러 8도인의 기질도 분석했다.
이런 책들을 본 나는 지방에 대한 선입감이 자리매김한다.
'밀양' 이외에 아랫녘의 어떤 지명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1.
초안 쓰고는 글 다듬었더니 다음날인 8. 4. 01 : 25.
조금 잔 뒤에 깨어나니 03 : 10.
글 다듬으면서 제목에 붙였던 '.../작성 중'이란 글자를 삭제했다.
몇 차례 지적을 받아서 주눅이 드는 용어가 되었다.
내가 컴퓨터를 잘못 다뤄서 그럴까? 이따금 글이 순식간에 사라졌던 경험이 많기에 이제는 글 쓰다가는 저장키를 누른다. 아직은 미완의 글이기에 '.../작성 중'이고 꼬리를 남기고.
요즘 분위기가 무척이나 그렇다.
잘난 이들이 많아졌다. 하루라도 늦게 온 그들이라서 그럴까, 힘도 세고 말발도 쎄졌다.
뜨거운 태양의 계절답게 무더위 탓일 것 같고.
더 자자.
자고 일어나면 무엇인가 또 달라지겠지.
아침이기에...
''''''''''''''''''''''''''''''''''''''''''''''''
성경에서 나오는 인명이다.
Methuselah 의 스펠에 유의...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의 말을 어떻게 해석하냐?
성서 지식이 전무한 나는 위 '므두셀라 증후군'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더 파고들어야겠다.
촌늙은이한테는 전혀 낯선 용어이기에...
첫댓글 누님입장을 생각해보믄 이해할만하네요. 지나간 세월을 원망하시는. 근디 엄니 장수하셨네요..ㅎ
글구 강퇴에대한 않좋은 추억이 기신가유. 넘 거시기 생각하지마세요 ㅎㅎ
제 엄니 혼자서 그 많은 세월을 살았지요.
일제시대인 1920년에 태어나서...가난. 많은 식구들, 시향/시제/제사, 한국전쟁,... 등의 세월을 겪었지요.
저도 글쓰기에 대하여 콤플렉스 있습니다. 전혀 엉뚱하게, 진의가 왜곡되어, 강제퇴출당하고... 특이한 체질의 사람한테 걸리면...
카페에서 일반회원은 그냥 파리목숨이지요. 뭐. 항거도 못하고..
저는 농사꾼.. 농사꾼이 농업카페에서 퇴출당하면 그게 큰 손실이지요.
카페에서는 몇몇 네티즌이 무섭지요. 사이버공간이기에...
곰내님 같운분 강퇴될이유 없으시지요.
그래도 자기만의 공간에 기록으로
보관해둘 필요는 있을거 같아요.
사실머 ..우리들 클적엔 아들 우선순위 여서
누나들은 좀 차별을 받았던거 ..있읍니다.
누나는 시골에서 학교 다녔기에 그런 피해를 더 받았지요.
저, 여동생들은 대학교에 다녔는데...
예전에는 큰형만 학교 다니고, 밑의 동생들은 소학교로 끝나고, 여자들은 더욱 그랬지요.
예전에는 학비가 큰 부담이었기에...
농사채 많다는 거... 식구를 잡는 일이지요.
부엌데기로 변한 누나였으니.. 늘 미안하고요.
좋은 글,완성되어 보고갑니다^^
글을 정성껏 올리시는군요~~◇
요즘 글 다다닥해고 그렇게 많이는 다듬지 않습니다.
그냥... 일기수준이기에...
댓글 고맙습니다.
제 마음도 그렇습니다ㅠ
걍 조용히 지나가길~~~
그러면서 카페는 자정작용을 할것인데
9년을 한결같이 그 자리 지키신 님이
다시 보이는군여ㅎ
댓글 고맙습니다.
이따금 분란이 일어나기도 하대요. 몇몇이서 마구 휘저으면...
우리같는 촌것들은 그냥 죽음이지요.
날씨 무척이나 덥습니다. 농사 포기했으니... 마음만 답답합니다.
시골 다녀온지도 벌써 두 달 가까이... 작은딸 해산 때문에 아내는 여기에 매달리다가 보니 함께 내려가야 할 아내는요?
저도 그냥 서울에서만 땀 흘립니다.
님의 댓글이 예쁘군요.
깊이 공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