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관장군 묘는 묘지 답사 초기에 다녀 오고는 제6차 능원묘 답사시 다시 가 보았습니다. 당시는 윤관장군 묘역 뒤편에 심지원 선생의 묘역이 있는 줄 몰랐었습니다.
이 곳은 윤관장군 묘와 심지원선생 묘가 앞 뒤로 있는 관계로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 사이에 400년 전부터 묘지 송사가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묘지 타툼을 끝냈다는 기사가 하단에 있으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 홍살문에서 바라 본 묘역 전경
▲ 교차총과 전마총
윤관장군 묘역은 초입서부터 성역화 사업으로 가꾼 묘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홍살문 우측에는 교자총과 마총이 있으며, 좌측 교자총에는 윤시중교자총(尹侍中轎子塚)이라 새긴 비석이, 우측 마총에는 윤시중전마총(尹侍中戰馬塚)이라 새긴 비석이 위에 얹혀져 있습니다. 좌측은 옛 비석이고, 우측은 최근에 새운 비석입니다. 교자는 당시에 국왕이 하사한 수레라고 합니다.
홍살문 바로 좌우측에는 근래에 세운 신도비가 서 있으며, 홍살문을 들어서면 넓은 사초지의 맨 위에 묘역이 있습니다. 왠만한 왕릉의 사초지 보다도 더 넓고 더 큰 것 같습니다.
묘역에는 왕릉처럼 좌우로 문·무인석과 뒤편에 석마까지 조성되어 있으며, 그 앞에는 옛 석물인 문인석 한 쌍이 좌우로, 중앙에는 장명등이, 그리고 봉분 앞쪽으로는 동자석, 망주석이 좌우로 서 있습니다. 봉분 앞에는 상석이 있으며, 봉분 좌측에는 묘를 다시 찾은 시기에 세웠음직한 묘비가 서 있습니다.
▲ 윤관장군 묘역 전경
이곳은 고려중기의 명신이며 한때 구성(九城)을 축조한 윤관 장군(尹瓘 將軍)의 묘역이다. 윤관 장군( ?∼예종 6, 1111년)의 자는 동현(同玄)이며, 본관은 파평(坡平)으로 시조 신달(고려개국공신)의 4대 손이다. 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어사대부, 지추밀원사겸한림학사승지 등에 이르렀고 요와 송나라에 사행하기도 하였다. 숙종 9년(1104) 2월에 이르러 동북면행영도통으로 임명되어 여진을 정벌하였는데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지 못하고 돌아와 별무반(신기 신보 경궁 발화 등 11개의 특수부대)을 조직하여 후일의 여진정벌에 대비하였다.
일찍이 문종대부터 동여진(완안부족)이 세력을 증대, 내침하였으므로, 거듭 정벌하였지만 이 무렵에도 동북방에 자주 내침하므로 예종 2년(1107) 10월에는 윤관을 원수, 오근총을 부원수로 임명하여 크게 여진정벌을 행하였다. 장군은 17만의 대군을 이끌고 4군으로 편성, 수륙양면에서 일대공격을 감행하여 함흥평야 이북의 여진의 근거지 135개 촌락을 점령하고 선춘령에 이르러 경계를 삼았다. 각지에 장수를 두어 성을 쌓아 방비를 엄히 하는 한편, 남방으로부터 백성을 대거 이주시켜 다음해 봄에 이르는 동안 함주, 영주, 웅주, 복주, 길주, 공험진의 6성과 통태 숭녕 진양의 3성을 구축하고, 4월에 개선하여 추충좌리평융탁지진국공신문하시중판상서리부사지군국중사(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知軍國重事)에 봉해졌다.
▲ 윤관장군 묘역내 석물 전경
그러나 여진은 물러서지 않고 곧 9성에 대한 반격을 강화하였으므로 윤관은 그 해 예종 3(1108) 7월에 다시 출정하였지만 익년에 걸친 공방의 결과는 여의치 않았다. 이 같은 정세 여건하에서 여진은 다시 북반하지 않겠다는 조건아래 9성의 환부를 강력히 요구하였으므로 고려에서는 예종 4년(1109) 7월에 이를 받아들여 9성은 2년만에 되돌아갔다. 회군하게된 윤관장군은 모함하는 자도 있고 하여 패전의 책임을 지고 공신호와 관작을 삭탈당하였으나 곧 예종의 배려로 수태보문하시중판병부사상주국감수국사(守太保門下侍中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의 벼슬이 내려졌다. 예종 6년(1111년) 5월에 졸하니 이 곳에 안장하였고, 처음 시호는 문경(文敬)이나 후일 문숙(文肅)으로 고쳤으며, 인종 8년(1130)에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조선시대에는 고려 태조를 모시는 숭의전에 배향되었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평생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며 장상이 되어 비록 진중에 있으면서도 경서를 갖고 다녔으니 '호현요선'함이 당대에서 제일이라 일컬어졌다 한다. 이곳 윤관 묘는 장후 약 500년인 임진왜란(선조 25, 1592∼동왕 31, 1598) 전후에는 후손들에게도 그 소재가 확인되지 않고 봉분과 묘역이 제대로 유지되지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인조조에 영상을 지낸 심지원가(沈之源家)의 묘소가 광해군대부터 지금의 장군 산소 후강에 들어서게 되고, 현종 13년(임자, 1672)에는 심지원의 묘가 현 묘역 곡장(曲墻)의 바로 뒤에 자리잡게 되었다.
약 백년을 지난 영조 23년(정묘, 1747)부터 윤장군의 후손들이 현위치가 장군의 묘소임을 주장하게되고 동왕( 39년(계미, 1763)에는 윤씨와 심씨 사이에 분쟁이 크게 벌어졌다. 익년(40년 갑신, 1764) 5월에 이르러 영조는 부근에서 윤장군 구비(尹將軍 舊碑)의 잔편이 발견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봉분을 새로히 조성케하고 예관을 보내어 치제함으로써 이후 윤관 묘소임이 공인되게 되었다. 2년 후(영조 42, 1766)에는 묘전 좌측에 현존하는 묘비를 세워 산소를 찾게된 경위를 새겨 넣었다. 8·15 광복 이후 1966년에 신도비(이은상 찬)를 세우고 1969년에는 심씨와 합의하에 묘소 뒤편에 곡장을 설치하고 (현재의 곡장은 1978년에 개축한 것임) 문관석 망두석 양마석 동자석 장명등을 새로이 설치하여 (상석은 교체) 묘역의 풍모를 일신케 하였다.
1973년 7월에 경기도 지방문화재 12호로 지정되고 1979년에는 사우 여충사(장군의 영당)를 묘역 좌측에 신축하는 한편, 신도비를 현 위치로 옮기고 주위 민가를 철거, 묘역을 확장하여 금일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1988년 2월에 사적 323호로 지정되었다. 이상과 같으므로 현재 윤관묘에 설치된 대부분의 시설은 8·15광복이후의 것이며 봉분(高 1.5m, 직경 5.5m)도 영조 40년(1764) 이후에 조성한 것이다. 다만 묘전 좌측의 묘비가 영조 42년(1766) 건립이고, 묘역 우측 하단에 있는 교자총비(轎子塚碑)가 철종 12년(1861) 건립인 바 교자총은 출정시에 윤관장군이 하사받은 교자를 사후 이곳에 부장한 것이라 한다.
조선시대 대표적 명문가인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 간에 392년을 끌어온 조상 묘를 둘러싼 다툼(산송.山訟)이 두 문중 후손들의 극적인 타협으로 마무리됐다. 10일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 대종회에 따르면 두 문중은 지난해 8월 청송 심씨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소재 윤관 장군 묘역(사적 제323호) 4만 평 내에 조성된 청송 심씨 조상 묘 19기를 이장하는 데 합의했다.
두 문중은 2월 다시 만나 파평 윤씨측이 이장에 필요한 부지 2500여 평을 500m 정도 떨어진 청송 심씨 문중 땅 옆에 제공하기로 했다. 청송 심씨 측은 다음달 묘지를 이장할 예정이다. 두 문중 간 묘지 다툼은 조선시대 중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발단은 1614년 청송 심씨의 수장으로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1593~1662)이 윤관(?~1111) 장군 묘를 파헤치고 부친 등 일가의 묘를 잇따라 조성하며 비롯됐다.
파평 윤씨 일가는 이에 반발해 100여 년이 지난 1763년(영조 39년) 윤관 장군 묘를 되찾겠다며 심지원 묘를 일부 파헤쳤고 청송 심씨 일가가 이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며 오랜 다툼으로 이어져 왔다. 당시 임금이던 영조(1694~1776)는 고민 끝에 윤관 장군 묘와 영의정 심지원 묘를 그대로 받들도록 해 두 문중의 화해를 구했다.
그러나 파평 윤씨 일가가 이에 불복, "용미(龍尾:산소 뒷부분)를 누르는 심지원 묘를 이장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장살(매를 맞아 죽는)을 당하는 사태까지 빚어졌으며 이로 인해 두 문중 간 원한은 깊어져만 갔다. 현대에 이르러 두 문중 후손들은 원한을 풀기 위해 1969년 9월 화해각서를 교환하는 등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려 노력했으나 번번이 최종 단계에서 실패했다가 최근 대타협을 이루게 됐다.
파평 윤씨 소정공파 윤도현(71)씨는 "조선조 명문가인 두 집안이 400년 가까이 조상의 묘소를 놓고 대립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일이라고 판단해 화해했다"고 말했다.
청송 심씨 안효공파 심종복(67)씨는 "400년 가까이 끌어온 분쟁을 원만하게 해결하게 돼 기쁘다"며 "두 문중 모두 조상을 올바로 섬기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더 이상 원한은 없다"고 말했다. 파평 윤씨는 성종비.중종비 등 조선시대 왕비 네 명을, 청송 심씨는 세종대왕비 등 조선시대 왕비 세 명을 각각 배출한 대표적인 외척 가문이다. 파주=전익진 기자
◆ 산송(山訟)=산소, 곧 묘지(분묘)에 관한 송사를 일컫는다. 조선 중기 이후 명당을 찾는 음택(陰宅) 풍수가 유행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에는 땅의 형세나 특성을 인간의 행복.불행과 연관시키는 풍수지리설이 특히 유행했으며, 산송은 이러한 명당과 깊은 관련이 있다.
파평 윤씨-청송 심씨 ‘400년만의 화해’ 새국면 2006년 8월 16일 (수) 20:55 경향신문
파평 윤(尹)씨와 청송 심(沈)씨 양 문중의 묘지 다툼(산송·山訟) 핵심이 됐던 경기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의 윤관 장군(?~1111)의 묘(사적 323호)가 지금의 자리가 아닌 임진강 북쪽 지역일 수 있다는 주장이 나와 파문이 예상된다. 조선시대 묘제 전공자인 김우림 서울 역사박물관장은 16일 “최근 윤관의 아들인 윤언이(1091~1150)의 묘지명을 확인하던 중 이 같은 사실을 알게 됐다”고 밝혔다.
김관장은 “윤언이 묘지명의 뒷면 끝 부분에는 ‘경오년 4월14일 임강현 용봉산 숭복사 동쪽 기슭에 유골을 장례지내니, 아버지 시중 문숙공의 능침과 같은 경내이다’(庚午四月十四日葬骨于臨江縣龍鳳山崇福寺東麓乃王父侍中文肅公陵寢一境內)라고 적혀 있다”고 밝혔다. 김관장은 “묘지명에서 말하는 ‘임강현’(윤관과 아들 윤언이의 묘가 있는)의 위치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자료에 따르면 고려때는 개성의 속현이었다가 조선 태종 14년에 장임현, 이후에는 장단(長湍)으로 됐다”며 “결국 (윤관의 묘는) 임진강 아래의 지금 파주지역이 아니라 임진강 북쪽, 지금의 민통선과 북한 지역 일대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묘역이 있던 ‘용봉산’ ‘숭복사’ 등의 위치에 대해선 현재로서 명확하게 파악하기 힘들어 아쉽다”고 덧붙였다. 윤언이 묘지명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고려 묘지명’전에 전시 중이다.
김관장의 주장이 최종 확인될 경우 ‘400년 만의 화해’로 화제가 됐던 양 문중의 최근 합의는 새 국면을 맞게 된다. 또 사적 지정 과정에서 이미 학계에 알려진 윤언이 묘지명 등 정확한 근거나 자료를 확인하지 않았다는 문제도 지적될 수 있다. 양 문중은 1614년 영의정 심지원(1593~1662)이 부친의 묘를 윤관 묘역 바로 위에 조성하면서 산송을 벌여 영조가 중재하기도 했다. 현재는 윤관 묘역과 인접해 심지원 묘(경기도 기념물 137호) 등 심씨 문중의 묘 19기가 있다.
양 문중은 지난 4월 문화재청의 중재로 윤씨 문중에서 2,500여평의 부지를 제공하고, 청송 심씨 문중은 심지원묘 등 19기를 이장하는 것으로 화해를 했다. 이에 따라 청송 심씨 문중은 묘지 이장을 위한 현상변경안을 제출했으나 경기도 문화재위원회는 “문화재의 원형 훼손이 우려된다”며 부결됐고 문중은 이어 7월24일 경기도에 행정심판을 청구, 문화재청으로 이관됐다. 문화재청에서는 의견서를 행정심판위원회에 전달하면 9월 이전에 이장 허가 여부가 최종 결정된다.
경기도문화재위원회 한 위원은 “심씨 묘역이 이장될 경우 문화재 훼손은 뻔한 일”이라면서 “개발 압력이 높은 경기지역에서 문화재 이전이라는 좋지 않은 선례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도재기 기자〉
윤관장군 묘역 위치도
소재지 : 경기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산4-1
※ 대중교통 ▷ 703번 : 광탄↔서울역 → 윤관장군 묘 앞 하차
※ 승용차 ▷ 구파발 → 고양동 → 혜음령 고개 → 광탄면 시내방향 진행 → 용미리 석불입상 → 광탄 시내 진입 전 우측편에 위치
고려의 문신이자 무신으로 파평면 금파리에서 출생하였으며 광탄면 분수리에 묘가 있다. 자는 동현, 호는 묵재, 본관은 파평, 고려 태조를 도운 삼한공신 신달의 고손이며 검교소부소감을 지낸 집형의 아들이다.
고려 문종(文宗)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숙종 9년(1104)에 동북면행 영병마도통(東北面行營兵馬都統)이 되어 국경을 침범하는 여진정벌에 나섰으나 여진의 강한 기병에 패하고 임기응변으로 강화를 맺고 철수하였다. 그 후 특수부대인 별무반(別武班)을 창설 대원수(大元帥)가 되어 예종2년(1107) 부원수 오연총(吳延寵)과 함께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하고 9성을 쌓아 국방을 수비케하였다.
고려 예종(睿宗)때 여진정벌의 공을 세운 명장 윤관(尹瓘)의 묘로 묘역전체 규모가 상당히 크고 웅장하며 봉분과 석물이 단을 이루며 자리잡고 있다. 봉분아래는 장대석 모양의 호석(護石)을 두르고 봉분뒤로 담장을 둘러 아늑한 느낌을 주고 있다. 봉분정면에 상석(床石)이 놓여있으며 왼쪽에 묘비가 서있다. 한계단 아래에 양쪽으로 망주석과 상석 전면에 사각의 장명등이 세워져 있다. 장명등을 중심으로 각각 양편에 동자석, 문인석, 무인석, 석양, 석마등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다. 묘역 아래에는 윤관장군의 영정이 봉안돼있는 여충사(麗忠祠)가 자리하고 있다.
저에게 수 일전에 족지 주시고 저와 통화 하셨죠? 특히 남들이 작성한 댓글을 스크랩하셔서 쪽지로 보내고 아니면 이상하게 글 올리시고... 각설 하고 님은 지금까지 수 많은 글을 올리셨는데 님의 의견보다는 각종 싸이트의글 스크랩 혹은 시비쪼의글로 가득합니다,그래서 한마디만 말씀드리지요 님이 파평윤씨 시제에 참석하는날은 정말 박사모 카페가 조용하더이다,주관없는글 자제 바랍니다,아니면 통화시 발음이라도 똑바로 하시던지요.2% 부족한 목소리의 대응도 불쾌하더이다.
첫댓글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을 등록해 주세요. 어느 분이친회 홍보하느냐 하는데 홍보를 할려면 박사모 카페를 홍보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2012 그날의 승리를 위하여 위하여 박사모 아자 아자 아자 우리 것이 소중한거여 신토불이===>
저에게 수 일전에 족지 주시고 저와 통화 하셨죠? 특히 남들이 작성한 댓글을 스크랩하셔서 쪽지로 보내고 아니면 이상하게 글 올리시고... 각설 하고 님은 지금까지 수 많은 글을 올리셨는데 님의 의견보다는 각종 싸이트의글 스크랩 혹은 시비쪼의글로 가득합니다,그래서 한마디만 말씀드리지요 님이 파평윤씨 시제에 참석하는날은 정말 박사모 카페가 조용하더이다,주관없는글 자제 바랍니다,아니면 통화시 발음이라도 똑바로 하시던지요.2% 부족한 목소리의 대응도 불쾌하더이다.
본부장님요 나 열 받고 수면제로 잠 들랍니다~~ㅋ
조상이야기가 재탕으로 또올라왔네요? 태사공 또라이의 글~~ 흐지부지한글들 ~~ 운영진께서는 글쫌, 단속하세요? 박사모수준이 이런글로 도배하는뎁니까? 박사모와는 전부 연관도없는 재탕, 삼탕,의글?? 태사공은 창피한것도 모르는사람입니다.
ㅎㅎㅎㅎㅎ 어느 게시판 어느 카페를 가나 다 있군요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태사공 후에님이 어떻게 생기신분인지 누가 사진좀 올려주세요. 상당히 궁금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누구 아시는분 사진좀 지발올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