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7일은 중요한 날이었다. 세계 제2차 대전 때 미 해병대가 최초로 육상공격을 한 과달카날 상륙 8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지금 다시 이 날짜에 주요 표시를 했다.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에 의한 첫 대규모 지상공격 개시일이 이날로 정해졌고, 한국에 투입된지 일주일도 채 안된 해병대가 함께 서측방에 있는 진주를 향해 선두에서 진격도록 되어있었다.
수 주 동안 월튼 워커 중장의 미 8군 병사들은 도쿄의 총사령부에서 자랑스럽게 부르는 '부산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는 황량한 산과 강과 논들로 된 일대를 용맹스럽게 장악하고 있었다. 남쪽의 마산으로부터 반도 중심부의 왜관을 거쳐 동해안의 외진 항구인 포항에 이르는 방어선이 부산을 보호했다. 많은 미군이 부산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전사했다.
워커 장군의 사령부가 '군'사령부라고 불리긴 했지만, 실제로는 일본에서 점령군의 편한 역할만 하다가 후퇴-정지, 후퇴-정지, 후퇴-후퇴-후퇴-정지, 부상, 실종, 전사의 악몽으로 갑작스레 내던져진 녀석들이 모인, 경험도 없고 훈련도 받지 않았으며 병력도 부족한 사단급에 지나지 않는 오합시졸부대였다.
공산군들은 항상 우세한 화력과 병력으로서 방어선을 깊숙이 짓밟았고, 워커의 병사들은 적의 강타를 당해 놀라고 당황하면서도 그들의 발로 비틀거리며 물러나 다시 위치를 정하고 방어선을 유지했다.
만약에 한국에서의 전쟁이 지상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다면, 초기 미 8군의 장병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을 구했던 그들의 공군들처럼 미국인들에 의해 미국역사가 알려진 만큼 오랫동안 자랑스럽게 기억되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전쟁은 조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후 사람들은 전쟁에 대해 비판하면서 그 미 8군 장병들은 단순히 이것이 그들의 직업이었고, 그들은 남자였기 때문에 머나먼 나라에서 비참하게 싸우다 죽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정도의 이야기를 들을 것이다.
그래서 해병 제1여단이 부츠에 물을 묻히지 않고 해안을 걸어서 한국의 부산에 상륙했을 때 그들은 부산 방어선의 북쪽을 지키는 용감한 군인들 이야기를 일컫게 되었다. 전투훈련을 받은 상륙전의 전문가들로서 여러 병영과 기술학교, 특수 임무 지역과 해외 주재 대사관 경계부대 등 전 세계로부터 소집된 이 제1해병여단 장병들은 '마른 부츠'의 가치를 알았다. 그리고 그 대가는 항구 넘어 전방 전선 어딘가에 있는 군인들에 의해 주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해병대가 부츠에 물을 묻히지 않고 상륙하다니....
밤 동안 우리가 있었던 참호가 있는 언덕 사면으로부터 비틀거리며 걸어 내려오면서 나는 미 연합 통신의 램버트와 함께 이미 그들의 전투식량 캔을 비틀어 따고 있는 해병대원들로부터 아침 식사 거리를 찾으려고 멈추었다. 그때 우리 후방의 계곡을 넘어 헬리콥터 한 대가 날개를 휘저으며 날아와 아래쪽의 거의 마른 강바닥에 착륙했다.
거의 같은 시간에 해병대의 신형 퍼싱 전차 10여 대가 굉음을 내고 나아가며 방향을 돌리더니 강둑 위에 부채꼴 대형으로 전개하였다. 우리는 조종사가 헬기를 즉각 이룩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는 것처럼 회전날개를 아직 힘차게 돌리며 착륙용 두 다리를 딱 벌리고 대기하고 있는 논을 가로질러 갔다.
우리는 둘 다 헬기로부터 걸어 내려 오고 있는 눈처럼 하얀 백발의 해병 준장 에드워드 크레이그를 알아보았다. 크레이그 장군은 그의 부하들과 함께 자신이 직접 공격을 지휘하면서 출발했다. 크레이그 장군이 자기의 해병대원들이 참호를 깊게 파고 있는 주변의 언덕들을 냉철한 푸른 눈으로 훑어보는 동안 나는 그의 야위고 짙게 탄 얼굴을 가로질러 나타나는 느린 미소를 바라보면서 저 '이오지마'와 '부정'의 용사가 한국이 부여 할 수 있는 그 어떤 난제도 풀어낼 수 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갑자기 아주 귀에 익숙한 버킷을 흔들며 내는 쌩하는 소리가 다른 모든 소리를 압도해 버렸고, 두 발의 박격포 포탄이 강바닥에 떨어졌다. 붉은색의 뜨거운 파편 조각들과 함께 진흙과 자갈로 된 간헐 온천들이 하늘로 솟구쳐 올라왔다. 그 헬리콥터도 그렇게 되었다. 다음 포탄이 떨어지기 전에 비행기는 계곡의 중간에 있었다.
크레이그 장군은 산허리에 있는 그의 지휘소로 향하는 지프를 타고 있었고, 램버트와 나는 엄폐하기 위해 옆에 가까이 있는 곡사포 쪽으로 뛰어들었다. 우리가 돌과 진흙으로 만든 오래된 담장과 대포 사이로 미끄러졌을 때 두 발의 포탄이 바로 우리 뒤에서 터졌다. 나는 우리 발뒤꿈치 바로 너머로 꺾여 쓰러지는 포대 사격 통제용 안테나들을 명확하고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마음에 드는 영상을 포착했다. 그 안테나들은 포탄을 직접 맞은 것이었다.
사격의 정확성과 헬리콥터와 전차가 도착하자마자 즉각 시작된 사격방식 등은 우리 위쪽 험한 바위 사이에 숨어서 관찰하고 있는 적 관측자의 효율성과 적 사수들의 대단한 사격역량을 실제로 충분히 입증했다. 오직 해병대원들이 능선의 어깨 부분 속으로 참호를 아주 깊게 판 사실만이 끔찍한 희생을 줄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산허리를 따라 소용돌이치는 먼지로부터 들려오는 해병대원들의 숨죽인 신음은 슬프게도 다시 한 번 우리 가운데 부상자와 사망자가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이것은 적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대반격"을 시작하는 아주 기가 막힌 방법이었다고. 대공세는 동틀녘부터 시작돼 거의 중간쯤에 갖추어졌다. 폭발 시마다 공기를 따라 흩날리는 쓰레기들을 제외하면 내가 본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은 나의 더러워진 오른손등 위에서 잠깐 균형을 잡고 있다가 강바닥으로 날아가 버린 귀여운 에메랄드빛의 잠자리뿐이었다.
공산군의 탄약 공급이 끝이 없고 그들의 사수가 지치지도 않는다고 생각되던 바로 그때 새로운 소리가 산 정상 쪽에서 메아리쳐왔다. 그런데 이번 소리는 좋은 징조였다. 해병대의 경함재기인 '코세어' 전투기들이 크레이그 장군의 지휘소로부터 하달된 긴급 무선명령에 응답하면서 산위를 높게 선회하고 있었다.
포병정찰기 한 대가 전선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이동해왔다. 정찰기가 표적을 찾는 데는 몇 분이 걸렸지만 곧이어 코세어가 공격을 위해 급강하고, 로켓탄들이 험한 바위들 사이에서 작렬하며 날개 달린 포탄들이 통쾌하게 뿌려져 터지고 또 터졌다. 그리고 적군은 해병대들이 곧 강요하기 시작한 지옥의 맛을 처음으로 겪기 시작했다.
모든 생지옥이 공산군들 위에 쏟아졌지만, 그러나 한국전쟁은 사실 아주 초기였고, 해병대원들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겪은 견디기 어려웠던 그 지옥보다 더 많은 몫을 앞으로 치러야 했다. 고지전-시가전-후퇴작전 등에 관한 이야기와 알려지지 않은 고통이 아직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