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의 소산마을과 하회일대를 돌아다니고 돌아와
몇 십 년 간 그렇게 돌아다녔어도 기와 집 한 채나
정자 하나 보고, 그냥 지나쳤던 마을이 있고,
고샅길을 구석구석 헤집고 다닌 마을이 있는데, 이번 국립 민속박물관 답사팁과
같이 간 안동의 소산마을이 그렇다.
삼구정 정자가 멀리서 보아도 아름다워서 잠깐 들렀다 갔는데,
그 마을이 병자호란 때 척화론을 주장하다가 청에 끌려간 김상헌의 세거지였다.
그래서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있어서 답사했는데,
그 마을이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에 있는 소산 마을이다.
이 마을은 안동김씨 집성촌으로, 북쪽 멀리 우뚝 솟은 학가산 지맥이
남쪽으로 뻗어내려 형성한 정산(井山) 바로 아래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소산 마을은 넓은 풍산들을 마주보고 있어 실제 느끼는
산의 높이와 크기는 산이 많은 지역에서 받는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경북마을지』에 실린 글을 보자
“마을 뒤의 정산(鼎山)과 서쪽의 관산(冠山)이 모두
표고 100m 정도의 구릉이며 앞과 동쪽은 확 트인 들판이다.
마을의 전체적 형상이 ‘소가 누운 형국’이라 하여
쇠미 또는 금산(金山)으로 불리었다.”라는 명칭 유래가 기록되어 있다.
원래 금산이라고 불렸던 이 마을이 소산리가 된 까닭은
병자호란 때 낙향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에 의해서라고 한다.
“김가(金哥)가 사는 곳을 금산이라 하면 이는 너무 화려하고 사치스럽다.
모름지기 검소하다는 소산으로 바꿔야 한다.”
그 뒤 소산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김상헌은 누구인가?
남양주시 지금동 수석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 서원 세원이라고 부르는 석실마을이고
이곳에 석실서원이 있었다. 석실서원石室書院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도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서원이다.
그 뒤 김상용(金尙容), 김수항(金壽恒), 민정중(閔鼎重), 이단상(李端相), 김창집(金昌集), 김창협(金昌協), 김창흡(金昌翕), 김원행(金元行), 김이안(金履安), 김조순(金祖淳)이 배향되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이 시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김상헌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숙도(叔度)이고 호는 청음(淸陰)· 석실산인(石室山人)이다. 어려서 윤근수(尹根壽) 등에게 수학하면서 《소학(小學)》 공부에 힘썼다. 1590년(선조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6년 문과에 급제한 그는 이조좌랑·홍문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북인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던 김상헌은 광해군 대에는 그다지 뚜렷한 관직을 역임하지 못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다시 조정에 나가 대사간·이조참의·도승지로 임명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난 직후 인조에게 상소를 올려 붕당을 타파하고 언로를 넓힐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인조반정 이후에도 강직한 성격으로 누차 시사를 비판하다가, 반정 주체들의 뜻에 거슬려 향리로 귀향하기도 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구원병을 청하였고, 돌아와서는 후금(後金)과의 화의를 끊을 것과 강홍립(姜弘立)의 관직을 복구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예조판서로 있던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여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대세가 기울어 항복하는 쪽으로 굳어지자 최명길(崔鳴吉)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하였다.1641년 심양(瀋陽)에 끌려가 이후 4년여 동안을 청에 묶여 있었다. 당시에도 강직한 성격과 기개로써 청인들의 굴복 요구에 불복하여 끝까지 저항하였다.
1645년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했지만, 여전히 척화신(斥和臣)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인조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벼슬을 단념하고 석실(石室)로 나아가 은거하였다.
그의 동생이 청나라에 의해 강화도가 함락되자 그 당시 강화 남문에서 화약에 불을 지르고 자폭한 김상용이다. 그 두 명의 형제가 안동 김씨 가문을 조선 후기 대표적 가문으로 도약시킨 사람들이었고 조선 후기에 세도정치의 중심으로 자리 잡게 한 사람들이었다. 김상헌 의 손자가 3수로 알려진 김수증金壽增. 김수흥. 김수항이며, 김수항의 아들이 당대에 뛰어난 학자로 6창이라고 알려진 김창집. 김창협. 김창흡. 김창업金昌業. 金昌즙. 김창립이다.
그리고 한말 안동김씨의 세도가들인 김수근. 김병학. 김병국 등이 모두 그의 후손들이었다.
척화파의 대명사였던 김상헌과 주화파의 다명사였던 최명길
누가 더 옳고 그른가를 논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기 때문이고, 이미 지나간 역사이기 때문이다.
저마다가 옳았고, 저마다 자기가 선택한 삶을 살았다.
김상헌이 내려와 살 당시 중수한 청원루는 청나라를 멀리 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건물인데, 멀리 한다고 멀어지는 것도 아니고,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가 가까이 하고 싶다고 가까워지는 것인가,
그 때로부터 몇 백 년이 흐른 지금 우리나라가 처한 호나경은 크게 달라지지 않앗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대한민국이 나의 나라, 나의 조국이다.
안동 답사에서 돌아와 지난 어제의 일을 돌아보는 마음은 쓸쓸한데,
나는 또 다시
내일 중국으로 답사를 떠나니, 그것만으로도 김상헌이 살았던 당시
‘천자의 나라’라고 우리나라는 ‘약소민족’이라고 명나라와 청나라에
굽신거리며 살았던 상황보다는 훨씬 나아진 환경이 아닌가?
2018년 9월 21일 금요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