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 칼럼] 귀신은 바다를 못 건넌다
딱 오 년만 살다 가겠다고 온 미국에서 산 지 서른다섯 해가 지났다. 몇 년 후면, 한국에서 태어나 살았던 기간보다 거의 배가 되는 세월을 미국에서 보내는 셈이다. 그동안 경험했던 삶의 희로애락을 열거하라면 아마 장편 소설을 써도 모자라겠지만, 그 중에서 가장 애통했던 일울 꼽으라면 단연코 시어머님이 작고하신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민자들이 겪는 안타까운 일 중 하나가 한국에 계신 부모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다. 나 역시 친정엄마를 빼고는 양쪽 부모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그런데도 유독 시어머니의 일을 마음에 품고 사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기독교 집안의 서울 여자와 불교를 믿는 경상도 집안 청년의 만남, 기밀이어야 했다. 어른들 몰래 냉가슴으로 시작한 아들의 첫사랑 연애질을 5년 동안 지켜주신 어머니다. 방학 때면 나를 집으로 불러 맛난 밥상을 차려 주다가 불시에 귀가하신 아버님께서 누구냐고 묻자 셋째 따님의 친구라고 하신 적도 있다.
세 딸을 줄줄이 낳고서 뒤늦게 얻은 귀한 아들을 예수쟁이 집안에서 요구한 결혼 조건 ‘신랑감 성경 공부시키기’에도 아무 내색 하지 않으시고 약속을 지켜주셨다. 서울 여자를 집안에 들이는 일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문중 어른들에게 나를 꼭 며느리로 삼겠다며 설득시켜서 끝내 허락을 받아내셨다.
철딱서니 없는 며느리가 어찌해야 어머님가 베푸신 사랑을 다 갚을 수 있을까. 십 년이 넘게 아버님의 병구완을 홀로 하면서도 며느리에게 당신의 고단함을 한 번도 드러내지 않으셨다. 돌이켜 보면, 첫 손자를 안겨 드린 일 외에는 며느리 노릇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듯하다. 우리만 잘살면 바랄 게 없다시던 말씀이 어머니 마음의 전부이겠거니, 당신의 귀한 아들을 꼬드겨 날라온 미국에서 나는 그저 우리만 잘살면 된다고 믿었다. 몇 년에 한 번씩 찾아뵙는 일 외에는 모두 다 돈으로 해결했던 게 참 부끄럽다.
한국에서 차려드린 칠순 잔치 때 모인 어머니 친구분들 앞에서 며느리 자랑하시면서 함박웃음을 지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봐라, 느그들. 서울여잔 냄편 밖에 모른다고 결혼시킬 때 숭 봤재? 울 며늘아처럼 잘하는 며늘아 느그들 봤나?” 며느리의 돈 자랑질을 효도라 칭찬하시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너무 죄스럽다.
미국 오기 전날, 외아들이 미국에 가면 제사는 누가 모시냐는 시누님의 뿔 난 질문의 대답을 단번에 정리해주신 어머니다.
“귀신은 바다 못 건넌다. 제사 걱정하지 마레이.”
결혼하기 전, 조상의 제사를 절대 모시게 하지 않겠노라는 밀약을 사돈지간에 맺었다는 걸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알았다. 며느리를 위한 일이라면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일도 마다치 않으셨을 어머니, 멀리 떨어져 있었어도 어머님의 그늘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왜진즉 깨닫지 못했을까.
미국에 사는 것을 핑계 삼아 한국 명절은커녕 때로는 어머님의 생신날까지 놓치고, 때늦은 전화로 죄송하다고 얼버무리는 것도 성가셔했던 배은망덕한 며느리였다. 그런 며느리에게 당신의 기일을 기억해 달라는 부탁을 하신 걸까. 일 년에 단 하루만이라도 며느리에게 눈부처가 되고 싶으셨던 걸까. 내 생일에 맞추어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 사진 속 어머니의 웃는 모습을 보니 밀려오는 죄책감에 마음이 쓸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