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마 26:6-16
6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8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9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10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11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14 그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본문에서 한 여인의 헌신과 그와 반대되는 한 제자의 배반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6-13) 율법에 의하면 나병이 걸린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함께 거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여기의 나병환자 시몬은 나병에 걸렸었으나 예수님께 치료를 받은 사람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끔찍한 나병에서 치료를 받았기에 잔치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의 집에서 일어난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승에 의하면 시몬은 세 남매의 아버지이거나 혹은 마르다의 남편으로 알려지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시몬의 집에 계시었고 그곳에서 잔치가 열렸습니다. 그때에 한 여인이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마가에서는 이 향유의 값어치가 노동자의 연봉에 맞먹는 삼백 데나리온 이상이라 말합니다. 한편 이 향유는 나드향으로 이는 인도산 식물인 나드의 뿌리 부위에서 얻어지는 것으로 매우 귀하고 값 비싸서 주로 왕과 같은 고귀한 사람들에게 바쳐지는 것으로 알려진 것입니다. 이 귀한 향유를 한 여인이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머리에 붓습니다. 유대의 전통적인 관습에는 식사 도중에 그 잔치에서 가장 귀한 손님에게 향유를 부어 그를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라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를 비롯한 일부 제자들은 이 여인의 행동을 비난합니다.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허비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 여인은 자신의 장례를 위함이라며 칭찬합니다. 유대의 장례식에서는 기름을 붓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소천하신 후 안식일이 지난 아침에 세 여인이 무덤에 계신 예수님께 기름을 바르기 위하여 찾아갔으나 예수님의 무덤은 이미 비어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부은 향유는 예수님의 죽음 전후에 유일한 기름 부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복음에서 이 여인을 기록하였고, 이 여인의 헌신을 기억하게 된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배반(14-16) 유대의 지도자들은 유월절 명절이 끝난 이후에 예수님을 죽이기로 계획을 하였지만,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하나님의 계획된 시간인 유월절에 예수님을 죽이게 됩니다. 예수님의 목숨 값으로 받은 은 삼십은 노예 한 명의 가격입니다(출 21:32).
적용: 한 여인의 헌신을 바라보면서 당신이 주님께 드릴 것이 무엇인지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일단 손에 넣은 것은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자신이 소유한 것에 강하게 집착합니다. 그리고 그 집착으로 인해 손에 넣은 것과 자기 자신은 별개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그것들과 자신을 일체화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잃어버렸을 때 자신의 일부가 떨어져나간 듯한 상실감을 맛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우선순위를 바로 해야 합니다. 나의 욕심과 이루고 싶은 꿈, 물질과 권세를 위해 예수님을 이용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과 연합하고 동행하는 삶을 위해 노력하며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승리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설 교 >
이 시대의 가룟 유다
마 26:6-16 / 김정호 목사
이렇게 억울할 수가! 맹구는 군대를 갈 날이 머지 않자 고민에 빠졌습니다. 신체검사를 받으러 갈 날이 다가오는데 가기는 싫고 맹구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손가락 하나를 자르기로, 그러나 주위 사람들이 말하기를 하나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 개를 더 잘랐습니다. 그리고 신체 검사장에 갔습니다. 보나마나 면제였습니다. 검사원이 그의 신체를 다 검사하고 나더니 “맹구 군대 면제!” 그리고 덧붙이는 말, “평발” “아이고 억울혀, 아이고 억울혀”
가룟 유다가 왜 예수님께 변절했는지 성경은 별다른 설명을 하고 있지 않으나 두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가룟 유다 스스로 생각한 메시야 상이 어긋남에 따라 그 극도의 실망감을 배신으로 나타내었을 것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을 목도하고서 이 사람이야말로 로마 압제로부터 유다 민족을 해방시킬 자라고 믿고서 따랐을 것인데 거듭되는 십자가 죽음에 관한 예고를 듣고서는 큰 낭패감에 빠졌을 것입니다. 둘째는, 가룟 유다는 단지 탐욕에 눈이 어두워 예수님을 팔아넘겼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를 팔아넘기는 대가로 대단한 포상을 기대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종 한 사람의 몸값에 만족하였습니다. 은 삼십에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의 행위는 구약 예언의 성취(슥11:12)였으며 예수를 잡아 죽일 궤계로 노심초사하던 대적들에게 마침내 결단을 내리도록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로서 가룟 유다는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자 보다 못한 자’라는 영원히 씻지 못할 오욕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실수를 할 수 있으나 주님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한 가룟 유다의 행동은 인류 최대의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입니다. 군대 안 가기 위해 손가락 두 개 자를 정도의 어리석음이 아니었습니다. 가룟 유다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우리 속에 내재해 있는 가룟 유다의 쓴 뿌리를 뽑아내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 드립니다.
1. 가룟 유다는 비난의 사람입니다
본문 8절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300데나리온에 해당되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마리아를 향하여 ‘분개하고 허비하느냐’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가룟 유다가 이러한 불만의 주동자라고 하였습니다. 분개하는 것은 자기들의 생각이 나타난 현상들과 배치될 때 일어나는 성급하고 악한 감정입니다. 타락한 인간 본성은 하나님의 거룩한 계획과 경륜을 받아들이기에는 장애와 반발 요인이 너무 많습니다. 진정 누구보다도 사태의 진전을 잘 알아서 대처해야 할 제자들이었건만 그들은 이 기름부음 사건이 갖는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진정한 인격과 십자가를 향한 일련의 사건들이 갖는 의미에도 파악하지 못하였습니다. 답답하고 슬픈 상황입니다. 전혀 모르면서도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를 향유를 허비했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완전한 낭비, 즉 값진 것을 무용하게 모두 소모해버린 것을 뜻합니다. 신앙적 무지는 자기 만용과 이웃과의 관계 파괴자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게 됩니다. 예수님이 기뻐하셨던 향유 사건을 분개하고 허비한다고 하는 가룟 유다의 모습은 너무 가슴 아프고 슬픕니다. 남을 비난하는 것이 일상화되었습니다.
70대 초반 급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변호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평생 남들에게 조언했던 것을 정작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은 채로 떠났습니다. 그의 생전에 마을 사람들은 재산 이전, 이웃분쟁, 가족갈등, 유언장, 부동산 같은 법률문제로 그를 찾아왔습니다. 의뢰인들은 그의 법률 지식뿐 아니라 그의 지혜와 상식을 철저히 신뢰했습니다. 그가 일선에서 물러나고 젊은 변호사가 새로 왔는데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를 찾아갔습니다. 그의 장례식에는 수백 명이 찾아왔고 그가 도왔던 사람들에게서 카드와 편지가 수없이 날아들었습니다. 지역 신문에서는 그의 공로를 칭찬하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런데 장례식 직후 유족들은 뜻밖의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고인이 생전에 부동산 문제를 정리하지 않은 것입니다. 또한 그는 가족 중 아무에게도 자신의 재정적 상황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은 그에게 어떤 재산이나 주식 혹은 은행 안전 금고가 있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이따금씩 교회와 지역 자선 단체, 그리고 과부 여동생에게 재산의 일부를 남기겠다는 뜻을 내비치긴 했지만 말로만 표현했기 때문에 그 모든 바람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의 재정적 상황을 정리하는 데는 수개월의 시간(그리고 적잖은 비용)이 소요되었습니다. 그가 생전에 고객들에게 조언했던 대로 자신의 재정적 상황을 미리 깔끔히 정리했더라면 그런 쓸데없는 수고가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왜 그러지 않았을까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어쩌면 자신이 늙어 가고 있으며 언제가 죽게 된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마리아의 아름다운 행위를 보면서도 아름답게 보지 못하고 ‘분개하고 무슨 의도로 허비하느냐’라고 비난했던 가룟 유다의 모습을 보면서 유다의 모습이 오늘 나의 모습은 아닌지 점검하고 회개하는 은혜가 넘치기를 축원 드립니다.
2. 가룟 유다는 사람을 이용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9절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그 향유의 가치를 ‘삼백 데나리온’이라고 구체적인 액수를 밝히고 있습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찾는 순례자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은 하나의 관행이었습니다. 사실 예수께서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할 것을 누누이 전하셨습니다. 실제로 이 도유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부터 수십 리 안팎에 수천 명의 가난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실로 위선적이고 가증한 유다가 가지고 있었던 동기가 무엇이었든 간에 다른 사람들은 적어도 의로운 분노 때문에 그 여인을 비난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보기에 저들의 태도는 지나치게 현실적이요 물질 중심적인 것이었으며 이제 곧 일어나게 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사건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었습니다. 정녕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 곁에 있지만 하나님의 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말뿐이고 마리아와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한 위선과 거짓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서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하면서 가진 자만을 위한 정치를 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말만 하고 이용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신뢰와 존경을 받을 때 행복합니다. 그러나 누군가로부터 이용당한 것을 알면 불쾌감이라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다윗 왕은 통치 말년에 아들 압살롬의 반역 때문에 예루살렘을 벗어나 도망을 다녀야 했습니다. 필사적인 피난길은 동쪽 요단강을 넘어 메마른 광야까지 이어졌습니다. 몸은 지치고 식량은 바닥이 난 상황에서 다윗과 충성스러운 부하들은 마하나임이라는 촌구석까지 이르렀습니다. 다행이 그곳에서 바르실래에게 음식과 거처를 제공받았습니다. 바르실래의 입장에서 이것은 목숨을 건 희생이요 섬김이었습니다. 그가 아니었다면 다윗 일행은 그곳에서 뼈를 묻었을지도 모릅니다. 피난을 다니는 다윗 일행이 찾아왔을 때 여느 노인 같았으면 외면했을 것입니다. “내가 나서기에는 너무 늙었어. 이런 일이라면 응당 힘과 패기가 넘치는 젊은이가 해야지. 노년에 쓰려고 아껴 둔 것을 남들에게 다 써 버릴 수는 없어. 게다가 다윗을 도왔다가 압살롬이 알고 쫓아오면 목숨이 열 개라도 남아나지 않을 거야. 왜 사서 고생을 해? 내 한 몸 추스르기에도 벅찬 나이에 모험은 무슨!” 하지만 바르실래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곤경에 처한 다윗을 도왔습니다. 성경은 바르실래와 친구들이 “침상과 대야와 질그릇과 밀과 보리와 밀가루와 볶은 곡식과 콩과 팥과 볶은 녹두와 꿀과 버터와 양과 치즈를 가져다가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에게 먹게 하였으니”(삼하 17:28-29)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많은 물품과 음식을 준비하려면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바르실래는 늙고 병든 몸에도 불구하고 섬김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만약 그가 돕기를 거부했더라면 다윗과 그 부하들은 사해 너머의 황량한 광야에서 돌아오지 못할 운명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다행히 바르실래가 모험을 한 덕분에 다윗은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요컨대, 늙은 바르실래는 몸이 예전만 같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자 하나님이 그의 노력을 받아 결실을 맺어 주셨습니다. 압살롬이 죽고 반란이 진압되자 다윗은 생명의 은인인 바르실래에게 평생을 책임질 테니 자신의 군대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자고 권했습니다. 남은 평생을 산해진미와 풍악이 가득한 왕궁에서 보낸다니! 그것도 왕의 친구로! 하지만 바르실래는 다윗의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왜일까요? 바르실래는 어떤 대가를 바라고 섬긴 것이 아니라 다윗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섬김 자체로 만족하였습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처럼 사람을 이용하는 삶이 아니라 바르실래처럼 사람을 섬기고 존중하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가룟 유다는 돈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본문 15절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를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넘겨주기로 하고 받은 돈은 은 30세겔입니다. 출21:32에 의하면 황소가 남의 노예를 죽였을 때 은 30세겔을 배상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노예의 값어치에 불과한 적은 액수로 불의한 자들의 손에 거래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으며 가장 고통 받고 멸시받는 존재로 이 땅의 마지막 생을 마감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철저한 자기비하를 통해 예수님은 이 땅에 멸시받고 고난 받는 자들과 죄로 인해 절망 가운데 있던 영혼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택하신 예수님의 선택에 실망한 가룟 유다는 헌신이 미움으로 바뀌었고 절망과 배신 속에서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인류 최대의 실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탐욕과 절망이 뒤섞인 복합적인 감정 속에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양심과 신앙의 눈을 감아 목매달아 죽었고 창자가 터지는 가장 저주스러운 생애를 마감하게 되었고 역사적인 더러운 이름이 되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이용해야지 돈을 사랑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되고 영혼과 영원한 천국을 잃고 뜨거운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됩니다.
로버트 클린턴 박사는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사람들을 4가지 종류로 구분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일찍 제외된 사람들인데 그들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지도자의 위치에서 일찍 축출된 사람들입니다. 아비멜렉이나 삼손, 압살롬 같은 성경의 인물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두 번째로 비참하게 삶을 끝낸 사람들은 인생의 말미에 타락한 사람들로 엘리제사장이나 사울, 솔로몬과 같은 지도자들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그저 그렇게 끝낸 사람들은 죄 때문에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사람들로 다윗을 그 대표적 인물로 꼽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삶의 마지막까지 하나님께 쓰임 받으면서 승리한 사람들로는 아브라함과 욥, 요셉과 엘리아, 다니엘과 요한, 바울, 베드로 같은 지도자들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마다 삶의 내용이 다르게 평가되는 이유는 삶의 과정에서 누구에게나 닥쳐오는 사탄의 유혹에 대처했던 방법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유혹에 대적해서 승리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 공격 앞에 무릎을 꿇고 비참하게 삶을 마감한 사람도 수도 없이 많습니다. 돈이 목적인 사람은 반드시 돈으로 인해 넘어지고 무너지게 됩니다. 황금만능주의, 돈을 우상으로 하는 모든 태도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새롭게 거듭나고 우선순위와 목적을 정비해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돈이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이 목적인 삶이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가룟 유다는 비난과 사람을 이용하고 돈을 목적으로 삼다가 최후의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가룟 유다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칭찬과 사람 사랑과 하나님이 목적인 삶을 살아 승리자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매우 귀한 향유
마 26:6-16 / 류철량 목사
“한 옥합”에 매우 귀한 향유를 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질그릇에 이 보배를 가졌다고 했습니다. 사람 속에 담긴 사랑, 생각, 비전이 중요합니다.
그릇 자체보다 그릇에 담긴 것이 중요합니다. 밥 담으면 밥그릇이 되고 금을 담으면 금 그릇이 됩니다. 매우 귀한 향을 담아서 향유 그릇이 됩니다.
마리아가 매우 귀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머리는 신체의 꼭대기입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머리는 인간의 근원, 주체성의 상징으로 생각했습니다. 머리는 우두머리입니다. 매우 귀한 향유를 하나님의 독생자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마리아의 행동
마리아의 행동은 미움의 바다 한 가운데 있는 사랑의 외딴 섬과 같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님에게 막 불어닥치려는 폭풍의 구름을 뚫고 비치는 한 줄기 빛과 같습니다. 그녀의 행동은 예수님의 생애 중 예수님을 가장 기쁘게 하여 드린 아름다운 행위입니다. 누구도 그런 생각 그런 행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가장 먼저 깨달은 여인입니다. 여성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영성과 직감이 그것을 감지한 것입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마26:2)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들었지만 깨닫지 못했고 거기에 대비하지 못했습니다.
마리아는 그분과 헤어질 날이 임박함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무엇을 해드릴까를 생각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국가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줄까를 생각하지 말고 국민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존재하지 않는 것을 꿈꿀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께 드릴 것을 찾아봅니다. 자기가 가진 것 중에서 최상의 것이 향유였고 그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부어드렸습니다. 그가 드린 향유는 그의 순수한 마음이었습니다. 마음을 바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요구하십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네게 주며 네 눈으로 네 길을 즐거워할지어다”(잠23:26) 마음에 없는 말이 있고 마음에 없으면서 마지못해 하는 인사도 있습니다. 사랑과 진실이 담긴 예물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마리아의 마음속에 향유의 보물이 있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말했습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5:3,4)
어떤 시대라도 마리아 같은 사람은 있습니다. 아나니아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속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거짓입니까? 진실입니까? 사랑입니까? 미움입니까? 나는 주님의 기쁨입니까? 주님의 근심입니까?
제자들의 반응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8-9절)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매우 귀한 향유를 부어드린 것을 “허비”했다고 말합니다.
허비란 완전한 손실, 쓸데없는 낭비를 말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쓴 것은 허비입니다.
제자들은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리는 것을 보고 왜 값비싼 향유를 허비하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알만한 수준이 못되었습니다. 주님께 드린 예물이 어찌 허비입니까?
사도들은 마리아의 깊은 의도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리아를 어리석은 여자로 취급했습니다. 사랑의 진실을 몰랐습니다. 진실은 언제나 뒤에 있고 숨겨져 있습니다.
오늘 예배는 성찬예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부끄럼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자신을 내 주시는 살을 받고 나의 몸을 드리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의 몸과 주님의 살이 만나고 나의 혈관에 주님의 피를 받는 성찬식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훑어보십시다. 남 탓말고 우리 각각 나나 잘합시다.
예수님의 감동
예수님은 마리아가 하는 일을 보고 감동하셨습니다. 마리아가 부어주는 향유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리아의 행동에 대해 당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 어디에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13절)
사람이 행한 일이 복음과 함께 전하라고 하신 일은 마리아가 행한 일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위대하게 하는 것은 그의 판단과 결단하는 행동입니다. 높은 뜻에 자기를 복종시켜야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10, 12절)
“교회는 그의 몸”(엡 1:23)입니다. 교회가 괴로울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고통을 주고 불잰을 일으키면 안됩니다. 교회가 상처를 받게 하지 맙시다. 교회를 보호하십시다. 교회를 사랑하십시다. 교회는 주님이 피 흘려 세우셨습니다. 교회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주님의 몸에 좋은 것은 사랑이요 헌신입니다. 용서하고 하나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머리에 매우 귀한 향유를 부어 주는 마리아에 감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십시다. 서양에서는 딸의 이름을 “마리아”라고 짖기를 좋아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았습니다. 나사로의 동생도 마리아가 예수께 좋은 일을 하였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그 자체가 살아있는 설교였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133:1-3))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지체들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매우 귀한 향유를 부어 드렸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주님의 머리로부터 흘러내려 온 몸이 젖어지기를 기도합니다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7절)
“한 옥합”에 매우 귀한 향유를 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질그릇에 이 보배를 가졌다고 했습니다. 사람 속에 담긴 사랑, 생각, 비전이 중요합니다.
그릇 자체보다 그릇에 담긴 것이 중요합니다. 밥 담으면 밥그릇이 되고 금을 담으면 금 그릇이 됩니다. 매우 귀한 향을 담아서 향유 그릇이 됩니다.
마리아가 매우 귀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머리는 신체의 꼭대기입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머리는 인간의 근원, 주체성의 상징으로 생각했습니다. 머리는 우두머리입니다. 매우 귀한 향유를 하나님의 독생자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마리아의 행동
마리아의 행동은 미움의 바다 한 가운데 있는 사랑의 외딴 섬과 같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님에게 막 불어닥치려는 폭풍의 구름을 뚫고 비치는 한 줄기 빛과 같습니다. 그녀의 행동은 예수님의 생애 중 예수님을 가장 기쁘게 하여 드린 아름다운 행위입니다. 누구도 그런 생각 그런 행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가장 먼저 깨달은 여인입니다. 여성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영성과 직감이 그것을 감지한 것입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마26:2)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들었지만 깨닫지 못했고 거기에 대비하지 못했습니다.
마리아는 그분과 헤어질 날이 임박함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무엇을 해드릴까를 생각했습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국가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줄까를 생각하지 말고 국민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존재하지 않는 것을 꿈꿀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주님께 드릴 것을 찾아봅니다. 자기가 가진 것 중에서 최상의 것이 향유였고 그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부어드렸습니다. 그가 드린 향유는 그의 순수한 마음이었습니다. 마음을 바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요구하십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네게 주며 네 눈으로 네 길을 즐거워할지어다”(잠23:26) 마음에 없는 말이 있고 마음에 없으면서 마지못해 하는 인사도 있습니다. 사랑과 진실이 담긴 예물입니다.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마리아의 마음속에 향유의 보물이 있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말했습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5:3,4)
어떤 시대라도 마리아 같은 사람은 있습니다. 아나니아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속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거짓입니까? 진실입니까? 사랑입니까? 미움입니까? 나는 주님의 기쁨입니까? 주님의 근심입니까?
제자들의 반응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8-9절)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매우 귀한 향유를 부어드린 것을 “허비”했다고 말합니다.
허비란 완전한 손실, 쓸데없는 낭비를 말합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쓴 것은 허비입니다.
제자들은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어드리는 것을 보고 왜 값비싼 향유를 허비하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알만한 수준이 못되었습니다. 주님께 드린 예물이 어찌 허비입니까?
사도들은 마리아의 깊은 의도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리아를 어리석은 여자로 취급했습니다. 사랑의 진실을 몰랐습니다. 진실은 언제나 뒤에 있고 숨겨져 있습니다.
오늘 예배는 성찬예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부끄럼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자신을 내 주시는 살을 받고 나의 몸을 드리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의 몸과 주님의 살이 만나고 나의 혈관에 주님의 피를 받는 성찬식이 되었으면 합니다. 우리 모두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훑어보십시다. 남 탓말고 우리 각각 나나 잘합시다.
예수님의 감동
예수님은 마리아가 하는 일을 보고 감동하셨습니다. 마리아가 부어주는 향유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리아의 행동에 대해 당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 어디에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13절)
사람이 행한 일이 복음과 함께 전하라고 하신 일은 마리아가 행한 일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위대하게 하는 것은 그의 판단과 결단하는 행동입니다. 높은 뜻에 자기를 복종시켜야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10,12절)
“교회는 그의 몸”(엡1:23)입니다. 교회가 괴로울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고통을 주고 불잰을 일으키면 안됩니다. 교회가 상처를 받게 하지 맙시다. 교회를 보호하십시다. 교회를 사랑하십시다. 교회는 주님이 피 흘려 세우셨습니다. 교회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주님의 몸에 좋은 것은 사랑이요 헌신입니다. 용서하고 하나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머리에 매우 귀한 향유를 부어 주는 마리아에 감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십시다. 서양에서는 딸의 이름을 “마리아”라고 짖기를 좋아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았습니다. 나사로의 동생도 마리아가 예수께 좋은 일을 하였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그 자체가 살아있는 설교였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133:1-3))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지체들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매우 귀한 향유를 부어 드렸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주님의 머리로부터 흘러내려 온 몸이 젖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옥합을 깨뜨릴 때
마 26: / 이영훈 목사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마 26:6-~13)”
할렐루야. 오늘 말씀의 제목은 “옥합을 깨뜨릴 때”입니다. 마태복음 26장 6절로 13절의 말씀을 가지고 “옥합을 깨뜨릴 때” 이와 같은 제목으로 함께 은혜 나누기 원합니다. 따라해 주시겠습니까. “옥합을 깨뜨릴 때” “옥합을 깨뜨릴 때”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의미 있게,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사랑이 없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삶을 살아가기만 하면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남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고 이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인간의 사랑은 완전하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 완전한 것입니다. 우리가 뜨겁게 우리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 주신 은혜로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에게 참 기쁨과 행복과 만족감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참사랑이 나타난 자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독생 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사 우리 모든 죄 짐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누구든지 이제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하나님의 자녀로 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주님의 사랑에 너무 감사하여 자기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드린 한 여인의 이야기에 대해서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 옥합을 깨뜨린 여인
먼저 옥합을 깨뜨는 여인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6장 7절에 성경은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오늘 말씀에 보니까 한 여인이 예수님께 나와 옥합을 깨뜨리고 부은 것입니다. 이 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던 그 고난주일부터 약 일주일을 거슬러 올라와서 일어난 일입니다. 예루살렘 입성하기 하루 전날,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 있는 동네 한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에, 한 여인이 와서 옥합을 깨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요한복음 보니까 그 여인의 이름이 마리아입니다. 요한복음 12장 3절에,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처녀들은 시집 갈 때 결혼 지참금과 같은 것으로, 돈이 생기는 데로 향유를 모아서 이 옥합에 한 방울, 두 방울 사서 담아서 꽉 차면 끝을 밀봉을 해서 그것을 가지고 갑니다. 그래서 살아가다가 집안에 큰 어려움이 있으면 그것을 내다 팔아서 그 문제를 해결하고, 또 가정에 필요한 일에 썼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옥합을 예수님께 와서 깼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갖고 있는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드렸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가정은 그렇게 풍요롭고 넉넉한 가정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일찍이 부모님을 여의고 오라버니 나사로와 언니 마르다와 이 세 식구가 함께 살고 있었는데요. 참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가정입니다. 예루살렘 옆에 있는 조그마한 마을인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실 때는 이 집에 들러서 말씀도 전하시고, 식사도 나누시고 하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가정이고, 또 그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이 오셔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주신 그러한 은혜를 입은 집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리아는 너무나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문만 듣고, 며칠날 오신다고 하면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아, 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예수님이 오시는구나. 이번에도 또 귀한 말씀을 듣겠구나.’
그런데 이 마리아는 영적인 여인이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이 예수님이 이번에 오시는 것이 마지막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마지막으로 주님을 뵈옵는데, 무슨 선물을 드릴 수 있을까. 그리하여 본인이 갖고 있던 가장 귀한 것, 향유가 가득 든 옥합을 가지고 나와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부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너무나 많은 은혜를 주님께 받았는데, 받기만 하고 감사하지 않는다면,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초보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여, 내가 이 놀라운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부터는 주님을 위해 살기 원합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베풀며 살기 원합니다. 주님 함께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해서 우리의 소중한 것을 드리면 주님이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더 큰 복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 드리는 것이 아깝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내가 가진 것 다 주어도 늘 더 주고 싶고, 내가 희생하고, 내 가진 것을 다 그에게 준다고 하더라도 아까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값을 묻지 않습니다. 계산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을 우리가 예수님께로부터 먼저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자신은 우리의 죄 짐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에 대해서 요한복음 3장 16절 성경은 우리에게 이와 같이 말씀합니다. 다 같이 말씀 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이처럼 사랑하사’ 그 말씀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기까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를 입은 우리들이 오늘 다 마리아 같은 마음으로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주 앞에 드릴 수 있는 그러한 주님의 자녀로 변화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께 거저 받았으니 이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여 주님을 더욱 뜨겁게 섬기고 교회를 더욱 사랑하고 우리 주위에 문제 당하고 어려움 당한 사람들을 찾아가 주의 사랑을 나누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할렐루야.
저희 교회에 대학청년국에 출석하고 있는 우리 윤석주 집사님, 처음 예수님을 알게 되신 것이 열 살 때입니다. 불교 집안에서 자라났는데요, 희귀병에 걸렸어요. 대퇴부무균질괴사라는 병인데 균 없이 뼈가 부서지는 병입니다. 그 당시 전국에 두 명밖에 이 병을 앓은 사람이 없었는데 발바닥부터 가슴까지 깁스를 하고 일 년 넘게 누워서만 지냅니다. 아 뼈가 부서지는 병이니까 움직일 수가 없어요.
반 지하에 살던 어느 날, 집 문에 끼어있는 순복음가족신문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 속에 문오장 목사님의 위암을 치료받은 간증이 실려 있었어요. 어머니가 그것을 보고 이 아이를 데리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아들을 살리기 위해 오산리 기도원에 들어가서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들것에 실려 기도원 올라갈 때 나이가 열한 살입니다. 그런데 금식 여섯째 되는 날 놀라운 기적을 체험합니다. 뼈가 부서져서 전혀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이 뼈마디가 힘을 얻게 되고 몸을 움직이고 벽을 집고 일어서게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걷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로부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가정을 돌보기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 나가 일하다보니 점점 주일성수와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편의점, 우유대리점, 정치인 보좌관, 택시기사까지 안 해본 일이 없어요. 그런데 주님과 멀어지고 나서 남은 것은 빚 3억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절대 주님을 멀리하면 안 돼요. 예배드리는 것을 소홀이 하면 안 돼요. 은혜 받을 때 더 열심히 주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다시 그때부터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왔어요. 돌아오니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심으로 말미암아 지금 방송무대 연출의 그 일을 하게 되었고 우리나라 공영방송뿐 아니라 케이블 TV와 함께 그 일을 하게 되었고 사업이 하나님의 은혜로 확장이 되어서 하나님의 큰 복을 받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복을 받게 된 비결은 주님을 잘 섬긴데 있습니다. 606 청년 집회를 또 열심히 섬겼고 또 월드미션에 참석해서 아프리카 교회 짓는데도 참여하고 그래서 대형 LED 스크린을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해외로만 수출했던 그 제품이 국내 시장에서 인정을 받고 큰 회사에 납품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대성전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이 오른쪽 편에 플랜카드, 현수막이 걸려있고 스크린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아, 저것을 LED 스크린으로 바꾸면 좋겠다.’하는 마음이 들어서 기도하는 가운데 회사 제품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주님께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화면이 우리 특별히 외국인 성도들을 위해서 완전히 LED 판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잘 모르셨죠. 하나님 은혜 가운데 저렇게 아름다운 화면을 통해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렇게 주님 앞에 고백했습니다. “235인치 LED 전광판이 대성전에 설치되는 날, 저는 여기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렸습니다. 가난했던 제가, 빚만 떠안았던 제가 방송무대 연출 및 장비 대여, LED 전광판 제작 사업까지 현재 5개의 회사를 운영할 수 있었던 비결은 주님을 위해 믿고 노력했던 결과였습니다. 저는 어렵던 시절 우연히 월드미션에 참여하게 됐고, 제가 가진 돈을 아프리카 현지 교회 건축을 위해 아낌없이 드렸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마음으로 믿음의 씨앗을 심었을 때 하나님은 하늘 문을 여시고 놀랍도록 복을 부어주셔서 지금 연매출 200억 규모의 기업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돈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큰 복을 주셨기에 하나님을 위해 살 수 밖에 없는 것, 이것이 제가 사는 이유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주님께 은혜 받을 때 기쁨으로 주님을 위해 드리면 더 많은 것으로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우리를 얼마나 주님이 사랑하시는지 아낌없이 우리에게 또 주고 또 주시는데 문제는 우리가 축복을 받을 때 그것을 움켜쥐고 내 것인 줄 알고 착각하니까 축복이 거기서 멈춰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움켜쥐고 그것만 바라보고 주님이 멀어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있는 것을 후 불어버리십니다.
그때가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 나올 때입니다. 내가 예배에 대한 열심이 사라지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내가 가진 것에만 관심을 갖게 되면 문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주님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주님을 섬기고 나의 사랑을 드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 교회에 파이프 오르간을 설치한지 약 20년 30년 가까이 지나다 보니까 매년 수리하는 비용이 삼사천 만원씩 들어요. 그래서 우리 찬양부에서 “이 파이프 오르간을 교체해야 되겠습니다.” 건의가 올라왔는데 올해 우리가 오르간 구입할 예산을 세우질 않았어요.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실업인선교연합회의 한 장로님이 기쁨으로 이 파이프 오르간을 주님 앞에 드렸습니다. 할렐루야.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래서 옛날에는 예배드리다가 ‘삐’ 하고 이상한 소리가 나면 저쪽에서 나는 거였어요. 그런데 지금은 새 오르간이 들어와서 이제 앞으로 한 이삼십 년 동안에는 별 고장 없이 잘 오르간을 통해서 연주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감사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할렐루야.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심으면 아주 더 크고 좋은 것으로 넘치게 채워주십니다. 고린도후서 9장 10절에,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성경은 말씀합니다.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붇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겸손과 섬김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사랑을 드린 것입니다. 우리 일생 살아갈 동안에 우리가 낮아져야 합니다. 섬김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본 제자들이 그녀의 행위를 비난했습니다.
2. 제자들의 비난
둘째로 제자들의 비난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마태복음 26장 8절로 9절에, 성경은 말씀합니다.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자, 마리아는 예수님의 그 고난을 죽음을 준비해서 이 옥합을 깨뜨려 드렸는데, 제자들은 이를 보고 비판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가롯 유다가 그 향유의 가치를 계산해서 이렇게 비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5절에,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한 데나리온이라 하면 하루 나가서 일하는 품삯입니다. 그러니까 3백 데나리온이면 한 일 년 정도 수입이 됩니다. 아무것도 쓰지 않고 일 년 정도 수입을 모으면 한 3백 데나리온 되는데, 한 데나리온이 하루에 나가서 십만 원 번다고 하면 한 3천만 원 정도 된다고 할 수 있죠, 쉽게 우리가 생각을 하면. 그런데 그것을 쏟아 부었으니 그 아깝게 그 돈을 왜 낭비했느냐,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것을 갖다가 필요한 것을 사주면 되지 왜 낭비하느냐 비난한 것입니다.
때때로 주님의 일을 할 때, 비난을 받을 수가 있어요. 믿지 않는 사람들한테 비난받는 것은 우리가 견디겠는데, 먼저 믿은 사람들 나보다 더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들이 내가 주님을 섬길 때 비난을 하면 마음에 상처가 됩니다. 당신이 뭘 한다고 나서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와서 설치고 다니냐고. 아니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 그 봉사하는 것을 칭찬은 못해줄망정 비난을 합니다. 그러니까 시험에 들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예수님 앞에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도 제자들에게 비난을 받았는데 여러분 주님을 섬기다가 비난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여러분에게 뭐라고 말을 할지라도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자기 기준에서 남을 판단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늘 예수님의 기준을 갖고 남을 봐야 돼요. 예수님은 과연 어떻게 보실까. 예수님이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면 사람들이 뭐라 해도 우리는 신경 쓸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 앞에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는 사람들의 얘기를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저 묵묵히 예수님의 발을 닦았던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 행위를 귀하게 보시고 그의 삶속에 은혜를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 워싱턴 순복음 제일교회를 섬길 때 교회 건축하느라고 참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계시는 한진관 목사님이 오셔서 부흥회를 하시면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장면을 가지고 말씀 가지고 설교를 하신 적이 있어요. 한 집사님이 감동을 받았어요. 그래서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을 교회 건축 헌금으로 내놨습니다. 내놓고 나서 칭찬받은 것이 아니라, 가족들에게 야단을 맞았어요. 어머니와 형제들에게 ‘넌 왜 예수를 믿어도 그렇게 믿냐.’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았어요. 여러분, 얼마나 그 모습이 귀합니까. 자기가 살고 있던 집을 주님께 드렸는데, 그러나 돌아온 것은 비난이었습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때때로 친척들로부터 가까운 이웃들로부터도 비난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서 상처받고 주님의 일을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내가 주님만 바라봅니다. 주님만 의지합니다. 주님 나의 인생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을 섬기다가 마음에 상처를 받고 뒤로 물러가면 우린 영적으로 큰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환란이 다가와도, 문제가 다가와도, 핍박이 다가와도 비난이 다가와도 오직 주님만 바라봅니다.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주님 나와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여러분 부정적인 얘기는 듣지도 말고 하지도 말고 옮기지도 말고 절대긍정, 절대감사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요 원래 남 얘기하기 좋아해요. 좋은 얘기보다 안 좋은 얘기 더 하기 좋아합니다. 저쪽 가면 몇 사람 있어요. 여러분들 긍정적인 고백만 하시기 바랍니다.
제일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 나와의 바른 관계입니다. 믿음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섬길 때 예수님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앞으로 전진할 때 하늘의 문을 열시고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를 축복으로 이끄는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장 5절에,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위로함이 넘쳐날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신앙생활을 할 때 마음을 딱 정하고 난 후에는 흔들리면 안돼요.
제가 주일날 예배를 드리다 보면 9시 예배, 11시 예배, 1시 예배 고정 좌석이 있습니다. 이렇게 둘러보면 거기 그분이 계세요. 그런데 어떤 때 안 뵐 경우가 있어요, 그럼 걱정합니다. ‘어, 저분 자기 자리 안 지키고 어디 갔나?’ 여러분 자리를 지키세요.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왜, 예배드리는 모습을 주님이 기뻐하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께 감사하고 찬양하고 예배드리면 하나님께서 하늘 문을 활짝 여시고 우리에게 신령한 복과 이 땅의 기름진 복으로 넘치게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1990년 필리핀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하셔가지고, 2002년부터 우크라이나에서 사역을 하고 계신 장종일 선교사님 계세요. 우크라이나 여러분 잘 아시는 데로, 그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가 폭발해서 방사능이 누출되어 아주 큰 피해를 입었던 곳이 우크라이나인데, 이곳에서 지금 13년째 선교하시는 우리 선교사님은 특별히 마약 알코올 중독자들 재활센터를 운영하고요, 시작 장애인 재활 훈련과 개안 수술을 또 하고 있고요, 청년 사역을 얼마나 잘하시는지 오천 명이 매주 모여서 청년들이 큰 은혜를 체험하고 있고요. 2013년에 또 다른 그룹을 만들었는데, 거긴 또 천오백명이 모인데요. 교회를 우크라이나에서 11개를 세웠습니다. 작년에 그 11개 교회의 선교사님들을 모아서 선교대회를 열었습니다. 또 청소년 수양관도 지었어요. 이 선교사님을 통해서 전도 받은 한 우크라이나 가족은 이로 인해서 부모님들이 감옥에 갔어요. 아버지는 13년 반, 어머니는 8년 반이나 감옥에 있고요. 그런데 그 자녀들, 여덟 명이 모두가 다 주의 종이 되었어요. 할렐루야. 여러분, 핍박이 다가와도 믿음 지키면 영적인 큰 복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삶 가운데 넘쳐나게 됩니다.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마약에 취하고 술에 중독된 이들이 복음과 사랑으로 변화되는 모습은 십자가의 은혜였습니다. 이젠 그들이 주님의 향기에 중독되었습니다. 단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핍박 받고 비난 받던 부모들의 모습도, 그 길을 왜 가냐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도 이제는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감당해야 할 고난이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믿음의 불모지가 조금씩 믿음의 비옥한 땅으로 변화되어지고, 복음의 열매를 맺어가며, 저들 안에 뜨거운 부흥의 열망이 피어오르고 있으니 감사할 뿐입니다”
아멘.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 비난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예수님께서 그 모습 보시고 칭찬하셨습니다.
3. 예수님의 창찬
셋째로 예수님의 칭찬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마태복음 26장 10절에,
예수께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따라하세요.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할렐루야.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6장 11절, 12절에,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나는 곧 너희를 떠나게 될 것임으로 너희들이 돌봐야 될 가난한 사람들은 늘 너희들 옆에 있지만 나는 이제 너희들과 헤어져 죽음의 길을 가야한다고 주님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여인이 나에게 옥합을 깨뜨려 부은 것은 마리아가 자기가 가진 가장 귀한 것을 쏟아 부은 것은 내가 십자가 고난당할 것을 영적으로 어렴풋이 깨달아서 가장 귀한 사랑의 모습을 드린 것이라고 하는 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내 장래를 준비하였다. 할렐루야.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서 사랑의 금자탑을 쌓았습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이 마리아를 칭찬하셨는지. 마태복음 26장 13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우리 주님이 인정하시는데요.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증거 되는 곳에 이 여인의 한 일이 기억된다고요. 지금 2000년이 지난 오늘도 강대상에서 이 마리아의 귀한 행위를 칭찬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일대학에서 교회사 교수로서 선교와 동양역사를 가르치시는 라토렛(K. S. Latourette) 교수님. 연세대학교 총장님이시던 백낙준 박사님의 은사이기도 하신데요, 그의 책 교회사에서 『기독교 역사』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교회를 지켜온 사람들, 그들은 신학자가 아니다. 정치가도 아니다. 부유한 사업가도 아니다. 이름 없이 주의 제단에 사랑을 바친 수없이 많은 성도들 바로 그들이 교회의 주인들이었다.”
바로 여러분이 교회의 주인인 것입니다. 주님 앞에 사랑을 드리십시오. 감사를 드리십시오. 옥합을 깨뜨려 주님 앞에 드릴 때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늘 문을 여시사 쌓을 곳이 없이 여러분에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4. 우리가 깨뜨릴 옥합
마지막 네 번째로 우리가 주님 앞에 깨뜨려야 될 옥합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깨뜨릴 옥합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갖고 있는 옥합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여러분의 옥합입니다. 여러분의 가족입니까? 남편입니까? 아내입니까? 자녀들입니까?
정치하는 분들은 그 정치하는 것이 옥합입니다. 그래서 국회의원 선거에 세 번, 네 번 떨어져도 또 도전하고 또 도전해요. 왜, 그것이 본인에게 가장 귀한 것이니까.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은 자기가 하는 전공. 그 일이 옥합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사업이 자기의 옥합입니다. 의사 선생님은 그 의술이 옥합입니다.
그런데 옥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그 옥합은 바로 내 자신입니다. 왜?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니까,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이니까. 그것이 나의 전공분야든지, 내가 가진 물질이든지, 내 가족이든지, 근본적인 내용은 내 자신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내 자신을 때때로 주님보다 더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나의 귀한 것은 주님 앞에 드리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주님과 멀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업의 복을 주셨더니 물질의 복을 받아서 세상으로 나간 사람들이 있어요.
그에게 달란트를 줘서 음악적인 재능을 주었더니 그 재능을 가지고 세상 무대로 나가버린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로부터 멀어지고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에 결국 옥합을 깨뜨리지 못하고 그는 절망의 길로 걸어가고 실패를 맛보게 되고 좌절할 수밖에 없게 되는 그러한 결과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옥합은 깨어져야 합니다. “주여, 내가 내 자신을 깨뜨려서 향유가 깨어져 온 집안에 향기가 가득하게 하듯이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의 향기가 온 천하에 넘쳐나게 하여 주옵소서.”
이 향유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우리가 깨지기 전까지는 예수님이 나타나시지 않아요. 우리의 겉모습에 취해서 내 자랑만 하며 살아가면 주님이 절대 여러분 속에서 나타날 수가 없습니다.
토저(A. W. Tozer) 목사님이 『네 자아를 버리라』는 책에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았다고 말하지만, 정작 자신이 더 중요하고, 자아가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예수를 진정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에 얽매여 있는 자아 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야 십자가와 부활을 통과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수 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그렇게 자아가 깨어질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깃발 아래서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는 권리와 능력을 얻게 된다. 그렇다. 우리는 자꾸 작아져야 하고, 그리스도는 자꾸 커져야 한다.
옥합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할지라도 그 옥합 안에 있는 향유와 가치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즘도 보면 향수가 얼마나 비싼지. 요만큼 들었는데 포장은 이만큼 해가지고 비싸게 팔아요. 다 껍질 벗겨보세요. 나중에 요만한 병속에 들어있는 액체는 몇 g 안 돼요. 그런데도 아주 비싸게 팔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 포장이 귀하다고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그 향유는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향기는 나타날 수 없는 겁니다. 과감하게 풀어서 뿌릴 때에 향수가 냄새를 풍기는 것처럼 이렇게 밀봉된 옥합은 깨뜨려서 부을 때만 그 향유가 쏟아져 나와서 그 향기가 온 집안에 진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사람이 많으니까 땀 냄새, 퀴퀴한 냄새, 또 나병환자 몸에서 나는 고약한 냄새가 온 집안에 가득했었는데 옥합을 깨뜨리는 순간 그 나드 향유가 온 집안에 향기를 진동해서 모든 퀴퀴한 냄새는 다 사라지고 향기로운 냄새가 온 집안을 가득하게 되었어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고집이 깨어지고, 교만이 깨어지고, 불순종이 깨어지고, 내가 주님 앞에서 낮아지고 겸손한 모습으로 바꿔질 때 예수님의 향기가 나타나서 우리를 덮고 있는 모든 흑암의 세력들을 다 제하여 버릴 것입니다. 모든 인간적인 냄새들이 다 사라지게 만들 것입니다. 탐욕과 교만과 미움과 분노의 냄새들이 다 사라지고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와 치료의 냄새가 내 삶에, 내 주위에 진동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나 이기적으로 살았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인줄 알고 살았습니다. 남이 내 자존심 건드리기만 하면 분노하며 다투고 싸우며 살아왔습니다. 우리가 깨어지지 않아서 그래요. 깨어지면 예수님이 향기를 나타내주시는 것입니다. 깨어지면 상처받을 것이 없습니다. 깨어졌는데 무슨 상처를 받습니까? 주님만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주님만이 은혜를 나타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믿고 변화 받으면 예수님이 여러분의 삶의 주인이 되어주셔서 여러분,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며 강건해지는 은혜와 축복을 넘치게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깨어지고 낮아져서 우리 주위에 가난하고 소외되고 병들고 문제 있고 어려움 당한 사람들에게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그래서 예수님의 향기를 온 지역에 진동하게 만드는 주님의 귀한 일군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성경에서 기억되는 여인들
마 26:6-13 / 김장환 목사
여신도 주일을 맞아 여신도회는 물론 모두 성도가 신앙으로 본 받아야 할 성경 속의 여인들을 통해서 성도로서의 믿음의 삶을 배우는 시간을 가지자.
1. 요게벳 - 모세의 어머니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어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동안 그를 숨겼으나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그의 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려고 멀리섰더니”(출 2:1-4).
“아므람은 그들의 아버지의 누이 요게벳을 아내로 맞이하였고 그는 아론과 모세를 낳았으며”(출 6:20).
레위의 딸이요 모세의 어머니다. 애굽 왕녀에게 양자로 간 모세의 유모로 들어가 모세를 신앙으로 길러내며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일깨워 위대한 지도자의 밑거름이 되었다(출 2:1-10).
1) 요게벳은 믿음으로 아이를 석 달 동안 숨겼다(출 2:2).
2) 요게벳은 아이를 갈대 상자에 담아 하나님께 맡겼다(출 2:3).
3) 요게벳은 아들에게 철저하게 히브리 교육을 시켰다(출 2:9).
(1) 부모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끝까지 자녀를 사랑해야 한다.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출 1:22). 모세가 세상에 태어날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가장 힘든 시대 중의 하나였다. 그것은 애굽의 무서운 박해가 있었는데새로 출생하는 남자 아이는 모두 죽이도록 한 것이었다.
(2) 부모는 자녀를 위해 끝까지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해야 한다.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출 2:2-3). 부모는 안타까움 속에서 3개월 동안 몰래 키우다가 할 수 없이 나일강 가에 두고 하나님 앞에 아이의 미래를 위해 기도하였다.
(3) 하나님은 부모의 간절함을 보시고 좋은 길로 인도하신다.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나일 강으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나일 강 가를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기를 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기로다”(출 2:5-6). 때마침 애굽 왕의 딸이 모세를 발견하여 양자로 삼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4) 부모는 자녀를 훌륭한 믿음의 자녀로 키울 의무가 있다. “그의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당신을 위하여 히브리 여인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이 아기에게 젖을 먹이게 하리이까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출 2:7-9). 모세의 친 어머니가 유모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모세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다시 어머니 품으로 돌아와 신앙심 두터운 양친에 의해 장래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필요한 신앙교육을 받았다.
(5) 하나님은 모세를 이스라엘의 최고의 지도자로 만드셨다.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출 2:10).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공주의 아들로서 애굽 궁중에서 천문, 지리, 수학, 군사, 법, 정치 등, 당시의 최고 학문을 배우게 하여 미래의 이스라엘 지도자로 예비하셨다.
2. 에스더 - 바사의 왕후
"그가 에스더의 말을 모르드개에게 전하매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목숨을 건지리라 생각하지 말라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여 이르되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에 4:12-16).
바벨론의 포로 생활이 끝났으나 예루살렘에 돌아오지 않고 바사(페르시아)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이 큰 환난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애국 여성으로 등장한 인물이 에스더이다.
1) 에스더가 왕후로 선택되면서 양부인 모르드개도 따라서 바사 궁정의 고관으로 발탁이 되었다(에 2:19). 그 후에 하만이 재상이 되었을 때 왕은 모든 사람으로 꿇어 절하게 하였는데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을 하지 않자 그가 유대인임을 알고 온 나라에 있는 유대인을 다 멸할 계획을 꾸미게 되었다.
2) 에스더가 왕후로 선택될 때에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조상이 유대인임을 숨기도록 당부하였으나 유대인들에게 위급한 상황이 닥치자 그는 에스더에게 그녀도 하만이 계획하고 있는 유대인 대학살을 피하지 못하리라고 경고하였다.
3) 당시 왕앞에 나가는 습관은 왕이 부르지 않을 때 나가면 죽었다. 에스더는 위급한 상황에서 자기 민족을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심을 하고 왕에게 나가 자기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겠다고 했다.
4) 이를 위하여 먼저 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 온 유대인들이 합심하여 금식 기도를 하는 것이었다(에 4:16).
5) 그 후에 왕앞에 나간 에스더는 은혜를 입고 죽음을 모면했으며 하만의 음모를 폭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모르드개를 장대에 달아매려다 하만은 자신이 그 장대에 달리게 되었다. 그것은 모르드개가 왕에게 충성을 한 것이 기억되었기 때문이다(에 6:1-3).
3. 옥합을 깨트린 여인 - 무명씨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마 26:6-7).
1) 옥합-300데라리온(1데라리온은 1일 봉급) - 여인의 결혼지참금 옥합- 여인에게 있어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 깨뜨렸다(헌신) 은혜를 깨닫는 자는 가장 소중한 것을 받쳐도 아깝지 않다. 은혜를 깨닫고 받칠 때 은혜가 넘친다. 구원받는 우리는 무엇으로 보답해야 할까? 주님을 따르는 자는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2) 옥합을 깨뜨렸을 때 주님은 그녀의 행동에 칭찬하셨다. 복음이 전파 되는 곳마다 그녀의 아름다운 행실이 기념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서 70-80이라는 짧은 세월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난다. (예화) 평준화 – 50/얼굴, 60/지식, 70/건강, 80/인생.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남겨야 하겠습니까?
4.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 한 몸으로 교회를 섬긴 부부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행 18:2-3).
1) 초대 교회의 훌륭한 부부 사역 팀.
2) 바울의 친근한 동료.
3) 그리스도를 섬김과 동시에 자신들의 직업에 충실함(행 18:3).
4) 아볼로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를 전해 줌.
(1) 성경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따로따로 언급된 적이 없다. 당시 이들 부부의 효과적인 공동 사역이 주변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음에 틀림이 없다. 이들은 서로를 보충해 주고 상대편의 장점을 활용하면서 부부로서 또한 동역 자로서 언제나 하나가 됨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다(빌 2:2).
(2) 이들 부부는 예수님의 관한 아볼로의 설교가 충분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아볼로는 주님에 관한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는 것밖에 아는 것이 없었다. 이들이 그 자리에서 아볼로를 공박하는 대신에, 그를 자신들의 집으로 초청하여 예수에 관한 메시지를 함께 나누었음에 유의하자(행 18:24-26).
(3)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어 무엇보다도 중요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지금 우리 이웃들은 우리 자신들의 가정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있는가?
결론 : 참다운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자.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마 26:12-13).
진리와 사랑과 교제의 소동
마 26:6-13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이 전하는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려진 것입니다. 오늘은 그 이야기의 내용과 그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한 여인의 행동에 대한 예수님의 제자들의 평가와 예수님 자신의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여인의 행동을 보고 분개하여 말하기를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본문 8-9절) 한 데 반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본문 10절)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하신 것을 보면 제자들이 그저 단순히 “그 향유를 많은 돈을 받고 팔았으면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줄 수 있었을 걸” 하며 아쉬워한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 여인을 향해 바보다, 멍청이다, 미련하다, 정신 나갔다, 그런 미친 짓을 하는 저의가 뭐냐? 하며 여럿이 큰 소리로 화를 내고 야단치며 욕지거리까지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 여인이 그렇게 행동한 뜻을 잘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본문 12절) 하셨으며 더 나아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본문 13절)고 극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는 달리 이 여인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로 알고 있었고 그의 죽음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있었기에 그 여인에게 있어서 주님께는 아무리 귀한 향유 한 옥합이라 할지라도 아까울 것이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 값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다 부은 것은 이 세상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감히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주님은 존귀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은 곧 예수님을 가장 수치스러운 형틀인 십자가에 매달고 그 몸을 갈기갈기 찢어 내던질 것이지만 이 여인은 그 몸이 이 세상의 제 아무리 비싼 향유로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존귀하신 주님의 몸임을 세상에 알린 것입니다. 주님을 바로 알고 그 주님을 온 세상에 알리는 것, 그것은 가난한 사람 도와주는 일보다 우선하며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임을 밝히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셨지만 그 여인의 행동은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온 인류를 살리시기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바로 안다면 그의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고, 따라서 그 귀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행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았고 그의 죽음이 어떤 죽음인지를 이해했기에 언제나 할 수 있는 가난한 사람 도와주는 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인간구원의 사역을 준비하기 위해 향유를 부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류역사에 단 한 번뿐인 죽음, 그러나 단번에 세상을 구할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의 의미를 그런 뜻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여인이 값비싼 향유를 아끼지 않은 행위는 이 세상에서, 아니 온 역사 속에서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보다 우리에게 더 귀하고 중요하고 복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선언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셨는데 여기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 여인의 행동이야말로 복음의 선포였다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 눈에는 이해가 되지 않을 여인의 그 행동이 바로 말없는 복음의 선포라는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구원의 문이 열렸다는 것 아닙니까?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을 위하여 장례를 미리 준비한 그 여인의 행동은 곧 복음을 선포한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막상 예수님을 3년간 따라다니던 제자들에게서는 예수님의 생각과의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는데 한 여인과 예수님 사이에서는 완벽한 소통을 보는 이 사실에 우리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여인과 예수님 사이의 소통의 비결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그 여인과 예수님 사이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조금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 여인의 이름을 밝히고 있지 않지만 요한복음에서는 그 이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요12:1-3을 봅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여기서 우리는 그 여인이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 삼남매 중의 마리아였음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다니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과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실 때마다 그들의 집에서 머무실 정도로 한 가족처럼 친근한 사이였습니다. 요11:3에 보면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전하기를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요한은 요11:5에서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셨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들의 집에 도착하셨을 때는 이미 나사로가 죽었고 그래서 온 동네가 슬피 울고 있는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눈물을 흘리셨고 사람들은 말하기를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했다고 요11:33-36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이 전하는 기사 하나는 우리가 잘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집에 들르신 어느 날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분주하게 일하고 있는데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준비하는 일이 많아 혼자서 마음이 분주하던 마르다가 예수님께 와서 말하기를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신 일입니다(눅10:38-42). 이 이야기는 이 삼남매와 예수님이 얼마나 친근한 사이였는지를 잘 말해주며, 특히 마리아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했고 그의 말씀 듣기를 그 무엇보다 좋아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의 죽음이 어떤 죽음일지를 열두 제자보다도 더 바로 알고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러한 관계로부터 이루어졌으리라 생각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과 특별한 신뢰와 사랑과 교제의 관계 속에 있었으며 그것이 남들이 갖지 못한 예수님과의 완벽한 소통의 비결이었으리라 봅니다.
창11:1에 보면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합니다. 노아 시대의 대홍수가 끝나고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 명령대로 온 땅에 퍼져 번성하기 위해 동방으로 이동하던 그들이 기름진 시날 평야를 만나자 생각을 돌이켜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려고 했습니다(창11:2-4). 그래서 거기에 성읍과 탑을 건설하고 그 탑이 하늘에 닿게 하려 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그 일을 막기 위하여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시고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셨습니다(창11:6-9). 이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불통하게 된 역사의 시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인간에게 닥친 불통의 문제는 하나님께서만 푸실 수 있으며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궁극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 사이에서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2:14) 화평과 하나 됨을 이루시려고 보내신 이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 사이의 소통의 주로 오신 것입니다. 오직 그 안에서만 소통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불화와 반목과 갈등이 그칠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과 그를 통한 변화만 있으면 소통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의 교만과 불순종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불통을 가져왔고, 탐욕과 미움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불통을 일으켰습니다. 그 이후 인간사회는 불통의 사회가 되었습니다. 남녀 간의 불통, 인종간의 불통, 계층 간의 불통, 세대 간의 불통, 이념간의 불통, 종교 간의 불통이 자리 잡은 세상입니다. 이 불통은 곧 개인과 사회집단과 민족과 국가 사이에서 오해와 갈등과 혐오와 전쟁의 역사를 반복해서 만들어왔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처럼 불통의 답답함을 느끼는 때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과 불통하는 상황을 타개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이제 이 불행한 각종 불통의 역사를 청산하고 소통하는 세상, 소통하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합니다. 소통의 열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소통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를 신뢰하며 사랑하고 그와 교제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해와 소통의 길이 되셨습니다. 또한 그는 할례 받은 이스라엘과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 즉 약속의 언약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들을 가까워지게 하시고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둘로 하나를 만드시며 화평하게 하시는 이로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엡2:11-16).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과 소통하는 지혜를 얻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같은 시대에 같은 지역에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같은 사건, 같은 현상을 두고도 생각이 다르고 보는 눈이 너무나 달라 소통이 안 되는 일이 허다한 오늘날의 세상입니다. 우리 사회가 지금 특히 그렇습니다.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교제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불신 사회, 사랑이 없는 사회, 사귐이 없는 사회는 그야말로 불통의 사회일 뿐입니다. 서로 소통하는 사회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신뢰와 사랑과 교제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서로 신뢰하는 사람 사이에서는 누가 와서 온갖 그럴싸한 거짓말로 이간질하려 해도 통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뭐라 해도 나는 그를 믿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의 소통의 관계를 끊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불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아무리 진실을 말해도 잘 믿으려 하지 않게 됩니다. 도무지 소통이 되질 않는 것입니다. 신뢰보다도 더 강한 소통의 힘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다 이해하게 만듭니다. 온갖 잘못까지도 다 덮어주려 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서는 무슨 소리도 다 통합니다. 안 될 일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루어집니다. 오랜 교제 또한 상호이해를 수월하게 해주어 소통을 원활하게 합니다. 오래 사귄 사람들에게서는 말이 별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부부 사이에서는 “여보, 그거 ...”까지만 해도 벌써 뭘 말하려 하는지 다 압니다. 숨소리만 듣고도 상대방의 의사나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금방 알아차립니다. 그러나 오래 사귀어보지 않아서 잘 알지 못하는 사람 사이에서는 편견이 개입하기 쉽고 경계하느라고 소통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소통을 원하는 사람들은 먼저 신뢰를 쌓고 사랑을 키우며 교제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신뢰와 사랑과 교제의 관계를 갖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소통하는 사회의 회복을 위해 앞장서야 합니다. 옛날 예루살렘 교회에서 놀라운 소통의 역사를 일으키신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그 위대한 소통의 역사를 다시 한 번 일으켜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시다.
옥합을 깨뜨리는 용기
마 26:6-13 / 김태환목사
오늘 읽은 말씀은 복음서에 기록된 가장 아름다운 말씀 중 하나입니다. 보스턴 신학교에서 오랫동안 가르쳤던 버나드 앤더슨(Bernhard W. Anderson)이라는 구약학자는 “The Unfolding Drama of the Bible”이라는 유명한 책을 썼습니다. 아주 작은 책입니다. 작지만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목적을 8개의 주제로 알기 쉽게 다루었습니다.연극으로 말하면 8개의 무대에 성경 이야기를 올려 놓은 것입니다.
성경은 연극의 시나리오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구성이 치밀하고, 전개가 흥미진진한 이야기입니다. 그 속에 음모가 있고, 극적인 반전이 있는, 그러면서도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한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음모와 살인, 시기와 질투로 얼룩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 오아시스와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한 여자의 이야기도 그 중 하나입니다.
한 여자가 예수님께 와서 값비싼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부어드린 이 이야기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사복음서 안에 모두 기록된 이야기입니다. 다만, 그 내용이 부분적으로 약간씩 다를 뿐입니다. 마가복음에 기록된 이야기와 마태복음에 기록된 이야기가 거의 같은 것으로 보아 두 복음서에 기록된 이야기가 원래 맞는 이야기가 아닌가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학자들은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기록된 복음서로서 다른 복음서가 씌어질 때 영향을 준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베다니까지는 불과 얼마 되지 않습니다.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약 4km 떨어진 곳에 베다니가 있습니다. 이곳에는 우리가 잘 아는 마르다와 마리아, 나사로 남매가 사는 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요한복음에는 이 이야기가 마르다와 마리아 집에서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하겠습니다만, 마가복음이나 오늘 읽은 마태복음에서는 “문둥병에 걸렸던 시몬의 집에 계셨을 때(at the home of Simon, a man who had previously had leprosy)” 일어난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들을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했던 이 시몬이라는 사람은 예수님에게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시대에 문둥병에 걸린 사람이 낫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문둥병은, 지금은 Hansen’s disease라고 하지요? 문둥병은 그 치료약이 나올 때까지, 낫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한번 그 병에 걸리면 전염성이 강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격리 시켰습니다. 대개는 문둥병에 걸린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살았습니다. 시몬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문둥병을 낫게 해 주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계셨을 때, 뜻하지 않은 돌발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한 여자가 비싼 향유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제자들은 화를 냈다고 합니다. 화를 낸 이유는 왜 그 값비싼 향유를 그렇게 버리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었을텐데 하면서 아까워 했습니다. 우리는 그 향유가 얼마나 비싼 것이었는지 잘 모릅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그 향유 값이 무려 300데나리온이나 된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5,000명을 한 끼 먹이는데 200데나리온이 든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300데나리온이면 5,000명도 훨씬 넘게 먹일 수 있는 큰 돈입니다. 이 값비싼 향유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드린 것입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돌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그냥 제자들이 이 광경을 보고 화를 냈다고 나와 있습니다만, 요한복음에는 가룟 유다가 제일 화를 많이 냈다고 합니다. 가룟 유다는 나중에 예수님을 은돈 30량을 받고 팔아 넘긴 제자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 가룟 유다가 제일 화를 많이 냈다는 성경 말씀이 재미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준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말입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이 여자가 한 일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What a wast!” 라고 말하면서 모두 아까워했는데, 예수님은 “Why criticize this woman for doing such a good thing to me?” 라고 하셨습니다. 왜 이 여자를 비난하느냐구요. 이 여자는 아주 귀한 일을 했는데 왜 이 여자를 비난하느냐고 이 여자의 편을 드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 이 여자는 나에게 아주 귀한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값비싼 향유 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 드린 이 일이, 예수님께는 아주 귀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너희와 항상 같이 있지 않을 것이다. 이 여자는 내 장례를 준비한 것이다. 앞으로 온 세상에 나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오늘 이 여자가 나에게 한 일이 전해질 것이다.”
우리는 사실 이 여자가 누구인지, 또 이 여자와 예수님과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왜 이 여자는 그날 그렇게 갑자기 그런 돌발적인 행동을 했는지도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 네 마음도 그곳에 있느니라(Where your treasure is, there your heart will be also., 마태복음 6:21)”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이 향유는 이 여자에게 아주 소중한 보물(treasure)이었습니다. 아닌 것 같습니까? 저는 간혹 뜻 밖에 많은 헌금을 한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이 많은 사람인가봐요, 목사님” 그럽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돈은 그 사람에게 보물입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헌금을 한 것은 그 보물과 함께 그 마음이 하나님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렇게 자신의 소중한 보물을 드리게 한 것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누가복음 7:47)”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의 분량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은 분량과 정비례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말씀에 나오는 이 여자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됩니까? 예. 이 여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용서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 여자가 그만큼 죄가 많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여자가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가룟 유다가 말한 것처럼, 이 여자가 쓸 데 없는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까? 저는 간혹 이상한 말을 하는 사람들을 봤습니다. “교회에 헌금할 필요가 없다. 헌금할 돈이 있으면 구제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더 낫다!” 저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두 가지 생각을 합니다. 첫째는, 교회가 교인들이 낸 헌금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교인들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정말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혹시 헌금하는 것이 아까운데, 아깝다는 말은 차마 못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들먹이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돈이 없어서 못한다고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1992년에 우리가 이 교회를 구입했을 때 저에게 별별 말이 다 들려왔습니다. “저 교회가 뭘 몰라서 그렇지 모게지 페이먼트도 못할 것이다.” “저런 낡은 교회를 유지하려면 많은 돈이 들어가는데, 그 돈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저런 말들이 들려 왔습니다. 저는 한번도 “교회 재정이 어려우니까 헌금을 좀 많이 해 주십시오”라고 교인들에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채워주셨습니다. 한번도 페이먼트를 못한 적도 없었고, 제 날짜를 어긴 일도 없었습니다. 교회가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교회 재정이 모자라서 못한 일이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필요한대로 다 채워 주셨습니다.
오늘은 청지기 주일을 맞이해서 헌금에 대하여 설교를 하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헌금을 많이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요즘 헌금이 좀 준 것 같습니다만, 저는 그것을 염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관심하고 있는 것은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비지네스 하시는 분들은 경기가 좋지 않다고들 합니다. 경기가 좋지 않다는 말은 벌써 몇 해 전부터 있었던 말입니다. 작년과 올해 들어서 더 경기가 나빠진 것은 사실입니다. 다들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유학생들도 걱정입니다. 사실은 유학생을 둔 부모들이 걱정이지요. 한국 경제는 미국보다 더 나쁜데……환율까지 올라서 학비를 보내기가 전보다 얼마나 버겁겠습니까?
경제적으로 쪼들리고 힘들어지면, 자연히 지출을 줄이게 됩니다. 외출도 줄이고, 사고 싶은 것도 참고, 외식도 줄이고……예,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헌금도 줄이고요. 제가 관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힘들어지면 지출을 줄이고, 헌금도 줄이고 전보다 적게 합니다. 뭐 깊은 생각 없이 본능적으로 그렇게 합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헌금이 줄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저는 목사로서 지금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보는 관점이 좀 다릅니다. 경제학자들이나 비지네스 하는 사람들과 좀 다른 관점에서 지금의 경제적인 어려움을 봅니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지금이 위기라고 말하지만, 저는 지금의 위기를 기회라고 봅니다. 역사적으로 늘 그래왔습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울 때 사람들은 하나님과 멀어졌습니다. 경제적으로 힘들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한국에서도 지난 IMF 때에 교회는 더 부흥했습니다. 어려울 때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어쩌면 지금 전 세계적으로, 아시아, 미국, 남미, 아프리카, 그리고 유럽에 있는 모든 나라들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과거에 이런 때가 없었습니다. 중국의 경제는 항상 예외라고 생각해 왔는데, 지금 중국도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전 지구촌이 함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돈을 풀어도 별로 효과가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대대적인 강 정비공사를 계획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정비 공사가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를 활성화 시키는 역할을 할 것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효과는 미지수입니다.
어떻게 지구촌이 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지 지금으로서는 아무도 모릅니다. 과연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일까요? 어쩌면 지금의 위기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하는 하나님의 기회가 아닐까요? 교회마다 텅텅 비어 유령 교회가 되어 버린 유럽의 교회들을 다시 하나님의 백성들로 채우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아닐까요? 저는 여러분이 지금 겪고 있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단순한 어려움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자는 것입니다. 지금의 위기는, 신앙적으로 위기를 맞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다시 부르시는 하나님의 기회라고 말입니다.
정말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워서 학업도 계속할 수 없고, 생활을 할 수 없는 경우라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으면 헌금을 줄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재미 있는 사이트 하나 소개할까요? 지금 전 세계 인구가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2008년 통계를 보면 67억입니다. 정확하게는 2008년 11월 29일 토요일 오전12:00를 기준으로,6,739,903,820명이라고 합니다. 글로벌 리치 리스트(www.globalrichlist.com)라는 인터넷 사이트가 있습니다. 자기 1년 수입이 얼마인지 달러로 환산해서 집어 넣으면 즉시 자기가 전 세계 사람 중에서 몇 번째 부자인지를 등수를 알려 줍니다. 어렵다 어렵다 해도 우리들 대부분은 상위 10-20% 안에 듭니다. 우리가 얼마나 축복 받은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재미로 한번 해 보세요. 자기가 굉장한 부자인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금방 등수까지 알 수 있다니까요.
“온 세상에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 그를 기억할 것이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주님을 사랑해서 자신의 옥합을 깨뜨린 이 용기 있는 한 여자의 이야기는 여러분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찬송가 204장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이 찬송가 후렴에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라는 가사가 나옵니다. 영어 찬송가에는 “This is my story, this is my song”이라고 나옵니다. 주님을 사랑해서 자신의 옥합을 깨뜨린 이 용기 있는 이야기가, 이제는 여러분의 이야기가 되어서 사람들에게 들려졌으면 좋겠습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 마음이 거기에 있습니다. 어렵다고 움츠려 들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 보십시오. 여러분의 보물이 하나님, 그분께 있도록 하십시오.
베다니 마리아의 사랑 이야기
마 26:6-13 / 김명혁목사
이번 주간은 고난 주간입니다. 고난 주간 전후에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 중에서 아름답고 감동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불신과 멸시와 배신을 당하시며 슬픔과 고통 가운데 계시던 우리 주님께 위로와 기쁨과 사랑을 안겨 드린 아름답고 감동적인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사건은 베다니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부어드리고 자기의 머리 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린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장사를 준비하는 사랑의 제사 의식이었습니다. 슬픔과 고통에 쌓여있던 예수님께서 베다니 마리아의 사랑의 제사를 받으시고 너무 기뻐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온 천하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베다니 마리아의 행한 일을 ‘기념’하여야 한다는 엄청난 말씀까지 하시면서 베다니 마리아가 행한 일을 극구 칭찬하셨습니다.
베다니 마리아는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던 세 여인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첫째는 성모 마리아였고, 둘째는 베다니 마리아였고, 셋째는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세 사람은 모두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리아라는 이름은 beloved 즉 ‘사랑 받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졌던 세 여인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여인들이었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한 여인들이었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린 여인들이었습니다.
사랑이 곧 기쁨이고 기쁨이 곧 사랑입니다. 오늘 아침 “베다니 마리아의 사랑 이야기”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아침 “베다니 마리아의 사랑 이야기”를 들으시면서 우리들은 과연 주님을 얼마나 뜨겁게 사랑하고 있는지, 우리들은 과연 주님을 얼마나 기쁘시게 해 드리고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라고 찬송만 부르십니까? 아니 찬송도 부르지 않으십니까? 베다니 마리아는 세 가지 일을 해 드림으로 슬픔과 고통에 쌓여있던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습니다. 첫째는 '들어 드림'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고, 둘째는 '믿어 드림'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고, 셋째는 '부어 드림'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습니다.
첫째, 베다니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 드림'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렸습니다.
사랑은 들어주는 것입니다. 아내의 말, 남편의 말, 부모의 말, 자녀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저의 손자 동혁이는 저에게 이런 말을 하곤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왜 내게 잘 해 주어? 할아버지는 왜 내 말을 잘 들어주어? 할아버지는 왜 내가 좋아하는 딸기를 맨날 사다 주어?”
사랑은 들어주는 것인데, 베다니 마리아는 '들어 드림'으로 주님을 사랑했고, '들어 드림'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렸습니다. 베다니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 드린' 사람의 모델이었습니다. 그 당시 수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주님의 말씀을 들어 드리지는 못했습니다. 길가와 같은 마음, 돌밭과 같은 마음, 가시 떨기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다니 마리아는 옥토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을 헐떡거리며 들어 드렸고 온 몸으로 받아먹었습니다.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눅10:39). 예수님은 베다니 마리아를 보시고 너무 좋아하시고 기뻐하시면서 준비하는 일이 많아서 마음이 분주한 그래서 말씀을 잘 듣지 못한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마리아는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눅10:41,42).
성경에는 '들으라'는 말이 참으로 많이 나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신6:4).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사1:2).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삼상15: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계2:7,11,17,29,3:6,13,22). 우리 교회에도 하나님의 말씀과 설교 말씀 듣기를 좋아하고 사모하는 베다니 마리아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랑은 '들어 드리는' 것인데 베다니 마리아는 '들어 드림'으로 주님을 사랑했고 기쁘시게 했습니다.
둘째, 베다니 마리아는 주님을 '믿어 드림'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렸습니다.
사랑은 믿어주는 것입니다. 아내의 말, 남편의 말, 부모의 말, 자녀들의 말을 믿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저는 어머니의 말은 무엇이나 믿었고 어머니는 저의 말을 무엇이나 믿었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그대로 믿었고 어머니는 저를 그대로 믿었습니다. 서로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박윤선 목사님을 그대로 믿었고 박윤선 목사님도 저를 믿어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은 믿어주는 것인데, 베다니 마리아는 '믿어 드림'으로 주님을 사랑했고 '믿어 드림'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렸습니다. 베다니 마리아는 주님을 '믿어 드린' 사람의 모델이었습니다. 베다니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고 주님 자신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을 그대로 믿지 않았습니다. 의심하고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마7:10).
베다니 마리아는 어린 아이와 같은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그대로 믿어 드렸습니다. 오라비 나사로가 죽었을 때 마리아는 자기 집을 찾아오신 예수님 앞으로 달려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11:32). 그리고 마리아는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베다니 마리아의 엎드림과 호소와 울음에는 주님을 전적으로 믿어 드리고 사랑하는 믿음이 그대로 나타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고 살리시는 치유자 이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구원자이심을 믿어 드리는 믿음과 사랑이 그대로 나타나있었습니다. “주님이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마리아의 호소와 고백에는 주님을 전적으로 믿어드리는 믿음과 사랑과 신뢰가 그대로 나타나 있었습니다. 사랑은 믿어드리는 것인데 베다니 마리아는 믿어드림으로 주님을 사랑했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렸습니다.
셋째, 베다니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부어 드림'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렸습니다.
사랑은 '부어 드리는' 것입니다. 김영희씨는 아들 하인스 워드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부었습니다. 눈물도 슬픔도 아픔도 사랑도 시간도 물질도 자기의 삶도 모두 아들에게 쏟아 부었습니다. 쏟아 부음을 받은 아들은 이제는 어머니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하인스 워드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엄청난 관심에 부담을 느껴 제주도 방문 등 일부 일정을 취소했다고 했습니다. 워드의 국내 일정을 맡은 관계자는 "워드는 어머니와 둘만의 시간을 가지며 효자 노릇을 하고 싶어 했으나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이 너무 뜨거워 당황하고 있는 것 같다" 며 "자신의 일정 때문에 어머니가 힘들어하는 모습이 가슴 아파 제주도 일정을 취소한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습니다.
사랑은 '쏟아 붓는' 것입니다. 베다니 마리아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한 나머지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쏟아 부었습니다. 값비싼 향유의 값이 얼마나 나가는가에 대한 관심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돈에 눈이 어두웠던 가룟 유다는 베다니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쏟아 붓는 것을 보고 너무 아까워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12:5). 그러나 예수님은 유다의 탐욕을 책망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마26:10). 조금 후에는 가룟 유다를 가리키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마26:23). 돈에 눈이 어두운 사람, 탐욕이 가득한 사람은 결국 주님을 배신하고 주님을 팔게 됩니다. 향유의 값을 따지지 않고 주님께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사람은 주님을 끝까지 따르게 되고 주님을 끝까지 사랑하게 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립니다. 사랑은 '부어 드리는' 것인데 베다니 마리아는 '부어 드림'으로 주님을 사랑했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렸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시는 주님을, 슬픔과 고통에 쌓여 계시던 주님을, 위로해드리고 기쁘시게 해드린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해드렸습니다. 베다니란 동내에 살던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는 주님 발 아래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온 몸으로 듣던 ‘들어 드린’ 여인이었고, 주님 발 앞에 엎드려 주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며 주님을 ‘믿어 드린’ 여인이었고 그리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가장 값비싼 보물인 향유를 모두 주님의 머리와 발에 쏟아 부은 ‘부어 드린’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인정에도 끌렸지만 무엇보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바라보며 그것에 끌려서 아름다운 행위를 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린 아름다운 행위였습니다. 우리의 행위가 주님의 인정과 칭찬을 받을 수 있다면, 우리의 행위가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기쁘고 영광스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베다니 마리아는 그런 기쁨과 행복을 누린 행복한 여인이었습니다. 새벽마다 주님 앞에 나와서 주님을 사모하며 간절히 기도 드리는 베다니 마리아와 같은 여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강변 초장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아먹는 강변의 여인들이 모두 베다니 마리아들이 되시기를 기도 드립니다. 베다니 마리아처럼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아름다운 여인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복음찬송 53, 54, 75, 82를 계속해서 부르겠습니다.
예수님의 향유
마 26:6-13 / 이중표 목사
예수님 뒤에는 많은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따랐고, 수많은 무리들도 따랐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거나 칭찬받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킨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오직 마리아만이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킬 뿐만 아니라 이천년 교회 역사에서 수많은 성도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있습니다.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문둥병으로 고생하던 시몬이 예수님의 능력에 의해서 고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너무 감사해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집으로 초청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식사할 때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 머리에 부었습니다. 향유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했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면서 분을 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생각을 아시고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준비한 것이다.”라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린 사건을 기념비적 사건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되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다. 사업을 크게 해서 성공하는 기업인이 되고 싶고 싶어 하고, 인기를 얻어 유명한 스타가 되고 싶어 하고, 많은 학문을 쌓아 인정받는 지식인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기념비적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자기 존재를 기념비적 존재로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은 놀라운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기념비적 존재가 되고자 하는 소원을 가져야 됩니다. 이것 자체가 자기 자신을 높은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가는 비밀이 됩니다.
마리아의 향유
마리아는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어드리기 위하여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역사에 기념할만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깨뜨려야 됩니다. 마태복음에는 향유를 부었다고 했지만 마가복음에는 옥합을 깨뜨렸다고 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 머리에 부은 향유는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값비싼 향유였습니다. 이것은 당시에 노동자가 1년동안 일해야 모을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마리아는 그 귀한 향유가 담긴 옥합을 깨뜨려 아낌없이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옥합이 깨지는 것을 기념비적 사건으로 봤습니다. 자기 전 존재를 깨뜨려 내놓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이 옥합을 어떻게 준비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때 당시에 이 향유는 엄청난 재산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속에 있는 향유를 찾아내야 됩니다. 물론 머릿속에는 사상이 있습니다. 가슴 속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 육체 속에는 땀이 들어 있습니다. 모든 값비싸고 귀중한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땅속에 지하자원이 있고 광맥이 있습니다. 우주 안에는 보이지 않는 신비한 하나님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무한한 자원들이 다 들어있습니다. 이것이 밖으로 분출되어 나와야만 주님께서 여러분을 인정하십니다.
예수님은 깨뜨려진 향유 속에서 마리아가 깨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를 역사에 기념할만한 존재로 만드는 비밀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다 자기를 깨뜨리면 하나님의 신비를 나타내게 됩니다. 하나님의 신비한 사건은 어떤 학문이나, 지식이나, 인간적인 감정에서 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깨뜨려 내놓을 때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옥합이 깨지는 향유 속에서 장차 자기 자신을 깨뜨려 내놓을 향유를 보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다는 얘기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을 자기의 사건으로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음의 사건을 제자들을 통해서 들었는지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을 자기 신앙으로 고백했습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을 때 제자들은 그 향유를 돈으로 보았습니다. ‘이것을 팔면 얼마인데...’ 하면서 물질로 보았습니다. 고귀한 주님을 물질로 계산했습니다. 여기에서 저들은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은혜를 상실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예수님을 물질로 타산하지 않았고, 인간적인 감정으로 보지 않았으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실 주님으로 보았습니다.
마리아의 옥합 속에서 향유가 흘러나올 때 제자들은 “왜 낭비하느냐”고 분을 냈습니다. 그것은 그 향유를 철저하게 물질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향유를 돈으로 환산했고 향유를 보면서 가난한 자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제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남의 돈 가지고 인심 쓰려고 한 것입니다. 진짜로 가난한 자들을 생각했다면 자기들 것으로 가난한 자를 구제하지 왜 마리아의 것을 가지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려고 합니까 이것은 하나의 탐욕의 모습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신앙을 보았습니다. 마리아가 자기 자신을 부정하고, 깨뜨리고, 자기 전 존재를 내놓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만 두어라. 저가 내 장사를 준비했다.” 장사를 준비했다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했느니라”고 칭찬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칭찬은 인간적인 칭찬과 다릅니다. 인간적인 칭찬은 자기 마음에 맞으면 칭찬하고, 기분에 맞으면 칭찬하고, 자기 유익에 맞으면 칭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사건에 일치할 때만 칭찬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나에게 일치될 때만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드린다고 만나는 것 아닙니다. 기도한다고 만나는 것 아닙니다. 일생동안 교회 다니고도 주님을 만나지 못한 채 끝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건 속에 자기를 일치시키지 않으면 주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오늘도 여기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한다고 만나는게 아니에요.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일생동안 다니고도 주님을 만나지 못한 채 끝내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왜? 주님의 십자가의 사건 속에 자기를 일치시키지 아니하면 주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옥합을 깨뜨리는 사건을 통해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얼굴은 보고 있고 음성은 듣고 있지만 예수님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건 속에서 자기 자신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향유
마리아의 향유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릴 보혈의 피의 사건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완전히 깨뜨려 내놓는 주님의 희생을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기념하라’는 말을 자기의 희생적 사건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예수님께서 기념하라는 것은 그의 기적이나, 권능이나, 땅 위에서 행한 사역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고쳤습니다. 그러나 나사로의 무덤 옆에다 ‘나사로를 예수님이 살렸다’라는 기념비를 세우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신 벳새다 언덕에 ‘이 자리는 예수님이 기적을 행한 자리다’라고 기념비를 세우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깨뜨려 내놓는 이 사건을 역사에 두고 두고 기념하라고 했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의 행한 일을 말하여 기념하리라”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마리아의 옥합이 깨졌습니다. 그런데 그 옥합 속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육체를 깨뜨려 희생될 사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타산적이고, 가난한 자를 생각하는 척 하는 제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마리아의 사건이 수많은 사람을 살려낼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는 복음을 위해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제자들은 복음을 들고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 제자들에게 마리아를 세워 ‘이 마리아의 사건은 수많은 인류를 살려낼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소명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제자들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따르느냐 그리고 나를 배우고 따르는 제자가 되기를 원하느냐 너희들이 내 인격을 배우고 사상을 배우고 교훈을 배우면서 따르는 제자라고 한다면 너희는 이 마리아의 행한 일을 배워라. 이것이 바로 나를 배우는 것이다”라고 교훈적 사건으로 저들에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옥합은 물질입니다. 그 물질이 깨어지므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예수님의 옥합은 육체입니다. 그의 마음입니다. 그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육체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향유를 쏟아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 향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육체 속에서 흘러내야 할 땀입니다. 우리 육체 속에서 흘러내야 할 눈물입니다. 우리 육체 속에서 흘러내야 할 피입니다. 땀이 없이 위대한 업적이 나온 일이 없습니다. 눈물 없이 고귀한 사상이 나온 일이 없습니다. 피가 없이 역사를 살리는 위대한 순교자가 나온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땀과, 눈물과, 피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담아준 고귀한 액체입니다. 이 액체를 통해서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의 사건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장차 그의 육체가 흘러내야 할 피의 향유를 보여준 것입니다.
여러분은 땀을 어디에서 흘리고 있습니까? 위대한 일을 위해서 땀을 흘려야 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일하면서 땀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찜질방에서 흘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 하나님께서 지옥의 공사를 다시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한국 사람들이 찜질방에 가서 몸에 열을 많이 받기 때문에 지옥의 불이 뜨거워도 여간해서는 끄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의 열을 올리기 위해서 공사를 다시 한다고 그럽니다.
자식을 위해서 흘리는 어머니의 땀방울이 자식을 위대하게 만들어갑니다. 공장에서 일하는 일꾼의 땀방울이 이 역사를 살려놓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사회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땀 흘리는 일을 기피하는 현상 때문에 실업자들이 증가하는 것입니다. 땀이 없는 사회는 미래에 희망이 없습니다. 사람들 눈에 눈물이 말랐습니다. 기도의 눈물이 말랐습니다. 사랑의 눈물이 말랐습니다. 긍휼의 눈물이 말랐습니다. 희생의 눈물이 말랐습니다.
며칠 전에 어렵게 살아가는 한 여종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이 여종이 태국선교사 파송예배를 드리는 날 밤에 마음속에 ‘내가 태국 선교헌금으로 10만원을 해야지’라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선교헌금으로 10만원을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성령께서 “그것으로는 안된다. 1500만원을 바쳐라.”라는 감동을 하더랍니다. 1500만원이 수중에 있는 것도 아니고 월급의 절반을 모아도 1500만원이 되려면 몇 년을 모아야 되는데 1500만원을 바치라는 감동이 온 것입니다. ‘이상한 일이다.’ 하고는 다음날 아침에 식사하면서 남편에게 “참 이상한 일이지 돈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나보고 1500만원을 바치라고 그러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남편이 웃으면서 “하나님은 참 용케도 아신다.”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가 당신 모르게 통장 하나를 만들었는데 거기에 들어있는 돈이 1500만원이야 이번에 그 돈 탔는데 하나님이 용케도 아셨네.” “그러면 당신 이름으로 바치지” “아니야 당신이 감동을 받았으니까 당신 이름으로 바쳐” 그래서 그 돈을 저에게 가지고 왔습니다. 저는 고귀한 향유가 쏟아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깨져야 할 옥합을 찾아야 됩니다.
제자들의 향유
마리아의 옥합이 깨져 향유가 쏟아지면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의 행한 일을 말하여 기념하리라”는 말씀을 들었던 베드로가 드디어 자기 전 옥합을 깨뜨립니다. 로마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다가 네로 황제의 핍박을 받게 됩니다. 네로 황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처형하려고 로마 시에 불을 지르고 기독교인들이 방화했다고 뒤집어씌웠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베드로에게 피신하라고 권면합니다. 베드로는 그 말을 듣고 이른 아침에 일곱 언덕을 넘어 로마 성을 빠져 나갔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앞에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님 어디로 가시나이까” “나는 네가 피하여 도망치는 로마 성에 간다.” 베드로는 발걸음을 돌려 로마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수하고 붙잡혔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베드로가 처형될 때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과 똑같이 십자가에 달려 죽을 수 없습니다. 나를 거꾸로 매십시오.” 발이 위로 그의 머리가 밑으로 매달렸습니다. 그는 거꾸로 매달린 자루처럼 매달려서 땀과, 눈물과, 피를 쏟았습니다. 그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은 로마로 흘러들어갔습니다. 그는 죽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시는 바티칸 왕국으로 변화되었고 기독교인들을 처형하던 로마 성은 무너지고 하나님의 왕국이 세워졌습니다.
이 사건의 계기가 된 것이 무엇입니까?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린 것입니다. ‘이 옥합을 깨뜨리는 사건이 있어야 죽음에서 생명을 얻을 것이며, 어둠의 세력이 물러갈 것이며,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결박이 풀릴 것이며, 역사를 살려놓는 아름다운 복음의 전진이 일어날 것이다.’ 그 말씀대로 열두 사도가 다 흩어져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옥합을 깨뜨린 살과 피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살을 먹고 이 피를 마신 자는 자기도 옥합을 깨뜨려 내놓으므로 가정을 살리고 역사를 살려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돌같이 굳어진 마음, 옥합처럼 단단히 막혀있는 우리의 심령이 깨져 땀도, 눈물도, 피도 흘러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기념할 일
마 26:6-13 / 박지온 목사
본문 말씀을 통해서 “기념할 일”이라 그렇게 제목을 삼았습니다. 본문은 상당히 제자들과 그 옆에 함께 있는 사람들의 정당한 비판을 볼 수가 있고, 또 우리 예수님이 너무 일반적인 상식과는 상관없이 한 여자가 행하는 일에 대해서 엄청난 선언을 해 오신 것이 바로 본문에 내용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마 26:7)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그랬습니다. 이 향류는 엄청나게 값이 비싼 그런 향유죠.
그러니까 이제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이 보고, ‘이 향유를 팔아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으면 훨씬 좋겠는데, 왜 이걸 허비하느냐?’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허비하는 것이 아니고 내 장사를 기념하기 위해서 미리 이 여자가 준비를 했다! 이 여자가 하는 일이 이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전파된다! 기념되리라!’ 그렇게 선언을 했습니다. 참으로 이 복음에 깊은 비밀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요즘 조용히 옥상에 올라가서 기도하면서 주로 무슨 기도를 하느냐 하면, ‘하나님, 건강을 회복하게 해 주옵소서! 병이 낫게 해 주옵소서!’ 이런 식으로 좀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다가 어떤 마음을 갖게 되느냐 하면, ‘병이 낫는다! 건강을 회복한다!’ 그게 복음이냐? 복음입니다. 복음일수도 있고 복음입니다. 그런데 아닐 수도 있다! 왜? 진짜 복음은 그런 수준으로만이 아니거든요.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뭐 감기 치료하고, 아니면 어떤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지셨다! 그건 아니다! 옛날에 쭉 그런 메시지를 많이 들었거든요. 그러니까 뭔가 복음에 대해서 근본적인 것에 좀 눈이 열려야 되겠다! 그런 마음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처음 초기에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만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비유입니다. 눈이 먼 사람들이 몇이 와서,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느냐? 배를 만져보고는 ‘큰 배같이 생겼다!’ 그 다음에 코를 만져본 사람은 ‘뭔가 이 호스같이 생겼다!’ 다리를 만져본 소경은 ‘뭔가 기둥같이 생겼다!’ 그렇게 각각 다르게 말을 했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그 말이 다 맞는 말인데도 또 틀리는 말입니다. 코끼리를 전체로 보면 뭐 기둥같이 생기고, 호스같이 생기고, 그런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다 맞는 말이지만 눈을 감고 있으니까, 구체 적으로 그 모양을 볼 수 없어서 다른 진단을 하게 되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많은 사람들도 ‘이게 복음이다! 저게 복음이다! 내가 은혜 받았다! 네가 은혜 받았다!’ 이렇게 시비하는 그런 경우가 참 많습니다. 어떤 면에서 오늘 여기 보면 예수님께 하신 이 여자의 일을, ‘잘 한다, 못 한다!’ 평가도 하고, 비평도 하고, 나무라기도 하고, 또 어떤 면에서 교회와가지고 지내다보면 삐치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싸우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좀 마음이 이상해져가지고 이리저리... 그게 전부 사실은 복음과 상관이 없는 겁니다. 어떤 면에서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오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내 주장이나, 내 의견이나, 내 생각이 그 하나의 사건을 통해서 맞다!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 틀립니다. 왜? 복음은 그런 사소한 것에 메여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느끼고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그런 것에 복음은 국한 되어있지 않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왜? 주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 대속해 죽으신 것은 그런 작은 것을 해결하시기 위해서 오신분이 아니다! 성경은 그 이야기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가 이 근본적인 문제를 이해하고, 깨닫지 못했을 때 오는 것이 뭐냐 하면, 교회를 오해하고, 혹은 사람들을 오해하고, 또 믿음을 오해하고, 또 그래서 자기감정이나, 자기 느낌이나, 자기 생각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아침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어떻게 기도했느냐 하면, ‘하나님, 정말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도록 이제 내가 어떤 모양이다! 어떤 상황이다! 어떤 여건이다! 상관없이 정말 하나님 앞에 경배할 수 있도록,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도록 믿음 회복시켜 달라고...’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여러분들이 ‘박 목사가 믿음 회복시켜 달라 기도했다!’ 그러면 ‘목사님이 믿음이 없는가!’ 그럴지 모르지만, 진짜 뭐가 하나님 앞에, 지금까지 새삼스럽게 이런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릴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가지 교회생활해오면서 물론 ‘잘 한다, 못 한다!’ 평가받을 수 있고, 비평받을 수 있고 다 맞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 대해서 확실히 보고 깨닫는 이 역사와 축복이 얼마나 위대하다! 이 사실이 교회 안에서 우선이라기보다도 전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그건 복음의 기초다! 그러기보다도 이건 복음에 전부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에 기초가 아니고 복음에 완성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다! 그것은 복음에 기초다! 전부다! 복음에 완성입니다. 이 사실이 이해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바울에 경우를 보세요. 그렇게 다니면서 병중에 넘어지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고, 그 다음에 비난 받기도 하고, 핍박받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복음을 깨닫고, 복음을 이해한 바울의 고백이 뭐냐하면, ‘내가 참 복음을 바로 알아야 되겠다!’ 그러면서 복음을 바로 알고, 깨닫고 있는 것 같지만 뭐라 그랬습니까? ‘높이와 또 길이와 넓이, 그 무한한 것을 깨닫고 싶다!’ 그렇게 고백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혹시 교회 와서 이것이 복음이다! ‘아, 내가 병이 낫고 내가 이랬으니까! 그건 복음이다! 내가 구원받았다!’ 그 문제가 아니라 이겁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 성경에서 예수님이 뭐라고 그러셨냐 하면, 이렇게 나름대로 뭔가 제자들이, 이 한 여자가 행한 일에 대해서 평가하고 비평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게 아니다!’ 그러면서 한마디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향유를 머리에 기름 부은 여자를 향해서 ‘얼마나 엄청난 비밀을 속였는데,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여자의 행한 일도 같이 전파되리라!’
그래서 제가 이 주석에 머리에 기름을 붓고 하는 이 여자의 행위가 도대체 어떤 행위이기에 이렇게 칭찬을 받느냐? 그렇게 좀 생각을 하고 찾아보았더니만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 ‘이 여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깨달았다!’ 그랬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메시아로 깨달았다! 그래서 머리에 기름을 붓고 눈물로 씻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일이지만, 이게 지금현재 우리에게 사실이 안 되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다! 말은 잘 하지만 이게 실제적으로 모든 문제 해결자라는 이 선언이 사실로 와 닿지 않고, 이것이 구체적으로 우리의 개인의 생각과 심령에 와 닿지 않는 이 부분이 바로 문제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왕으로 오셨습니다. 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선지자로 오셨습니다. 여러 왕으로 오셨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피 흘려서 여러분과 저의 죄를 씻고, 그 다음에 사단의 권세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고,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을 바로 알고 만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길을 내셨습니다. 메시아! 이 축복과 역사를 우리가 간단하게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알면 모든 것이 열려지게 되어있다! 복음을 알면 모든 사업과 모든 일들이 열려지게 되어있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보이도록 되어 있다! 문제는 소경이 잘못 진단한 것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만물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린다! 그래서 우리에게 말씀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과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이 사실이 실제와 사실로 부닥쳐 와야 됩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이루어 져야 되는 거죠. 그래서 어쩔 때는 뭔가 이 지엽적인 문제로 나한테 문제가 있고, 나한테 사건이 생겼다! 이래서 여기에 메여가지고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왜?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면, 모든 문제 해결자라면, 왜, 이게 해결이 안 됩니까?’ 이런 것에 빠져가지고 근본적인 것을 놓쳐 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시다! 그 속에 삼직으로 이 땅에 오셨다! 여기서 죽음과 멸망에 있는 자들을 완전히 해방시켜 주셨다! 그럴 때에 왕으로 오셨다! 창세기 3장의 문제가 해결되었다! 이건 곧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었다! 사단에 메여서 영원히 종노릇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므로 사단의 일을 멸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믿어진다! 믿는다!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사실로 자리 잡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믿는 순간에, 내 안에 영접하는 순간에, 사단의 권세가 완전히 박살났습니다. 깨졌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사단의 종노릇할 필요가 없습니다. 종노릇 할 이유도 없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창세기 3장에 메여서 여전히 허덕거리고 있고, 벗어났다고 하면서도 역시 그 속에서 자기중심이 되어서, 자기 생각 속에서 못 빠져나오고, 자기 판단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부분들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면만 해결 된다 그러면, 교회에 인간관계에서, 혹은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왜? 구원보다 앞설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보다 내 감정이 앞설 수 없거든요. 그래서 교회 안에서 원수 맺고, 삐치고, 서로 뭔가 이상하게 되는 것! 이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구원이 안 된 사람이 하는 일이지,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나올 수 없다! 그게 바로 성경에 이야기거든요.
우리도 모르게 구원을 받았다고 해도 소홀히 하게 되면 이런 문제가 나옵니다. 그 문제뿐만이 아니죠.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으셔서 여러분과 저에게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재앙과 저주를 완벽하게 해결하셨습니다. 여러분 ‘재앙에서부터 해결하셨다!’ 이게 간단한말 같지만, 엄청난 일 아닙니까! 여러분 지금 조금만 살펴보면 우리 개인이나 우리 가문을 통해서 윗대로부터 오는 흑암과 재앙의 사실들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입니까? 적은 것 큰 것 말할 수 없이 공포스럽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거기에 지금도 현실적으로 메여서, 노예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벗어났다!’고 그러면서도 벗어난 것이 아니라, 더 거기에 메이고 있습니다. 흔히 많이들은 이야기입니다 만은,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죠. 아들이 아버지를 비판하면서 ‘절대로 나는 아버지를 안 담는다고, 나는 아버지와 같이 안 된다고...’ 그러면서도 그 아들이 얼마 안 되어서 커가는 모습을 보면, 지아비하고 똑같습니다. 그게 영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이 말이 조금 더 나아가서 어떤 문제가 있느냐 하면, 벗어났다고 하지만 재앙에 근본 사단의 모습을 닮아 가고 있는 것이 많은 경우 있습니다. 그래서 한번 받아합시다. “지 애비 모습과 똑같았다!”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모습이에요. 우리가 놀라야 됩니다. 교회 생활하면서, 가정 생활하면서, 어떤 문제와 사건이 생길 때에 우리도 모르게, 우리 자신도 모르게 지아비를 닮아가 버립니다. 우리 참 아버지는 하나님이신데, 옛날 ‘아빠, 아버지!’ 그러고 따라다니던 그것이 체질이 되어가지고, 문제만 생겼다 그러면 뭡니까? 사단의 종노릇 하던 때로 돌아가 버립니다.
문제 안 생길 때는 그래도 좀 점잖고 괜찮아요. 뭐 그래도 체면도 차리고 그러는데, ‘문제만 생겼다!’ 그러면 본성이 어디로 가느냐? 옛날로 돌아가 버립니다. 창세기 3장에서 벗어났다! 저주와 재앙에서 벗어났다! 말로 하지만 이것이 사실로 뿌리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현실적으로 사단에게 속고 마는 모든 부분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는 근본 문제라고 말하지만 이건 근원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이게 되었다! 저게 되었다! 이 문제 해결되었다! 저 문제 해결되었다! 모든 문제 해결되었다!’ 그런 부분이 아닙니다. 엄청난 비밀과 넓이와 높이와 무한한 하나님의 지혜와 그 역사가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이 사실이 누려지고 깨달아 진다! 그것은 시간 갈수록 ‘나날이 눈이 열린다!’ 그럴 때에 뭡니까? ‘모든 것이 열리도록 되어 있다!’ 그 이야기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시간이 가면서 무슨 확신보다도 마음에 들어오는 것이 뭐냐하면 모든 사업하는 사람들, 돈벌이 하는 사람들, 정치하는 사람들, 다른 게 아닙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말한 것이지만, ‘산업선교, 산업선교!’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산업을 하는 분들이 제일 눈이 어두워진 것 같아요. 정말 복음 딱 붙들고 복음이 이해되는 만큼 뭐냐? 눈이 열려집니다. 그러니 열리게 되어있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그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이 뭐 ‘전도가 되면 모든 것이 된다!’ 그런 것이 그냥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전도가 된다!’ 그럴 때에 복음이 자리 잡게 되는 그 순간에 모든 일상생활과 삶이 열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응답받았다, 응답 못 받았다!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 깨닫고 이해되는 순간에 응답받았다, 안 받았다! 상관없이 열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뭡니까? 열매라는 것은 저절로 따라 나오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사실은 지금 저주와 재앙이 완전히 해결되었다! 말이 그렇죠. 엄청난 문제 아닙니까? 궁극적으로 여러분과 저는 죽으면 어디로 가요? 천국으로 갑니다. 여러분 ‘죽으면 지옥자식들이 천국 간다!’ 엄청난 이야기 아닙니까! 이런 축복과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도 이 사실을 우리는 인식이 안 되어요. 우리는 이게 누려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와서도, 교회 와서 앉아 있는, 이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자리에 가치가 얼마나 크고 위대하다는 사실이 기쁨으로 나오는 겁니다. 이게 감사로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뭐 헌금을 많이 했다, 적게 했다! 우리가 이제 건축헌금을 할 때에 건축헌금을 뭐 많이 냈다, 못 냈다! 혹시 그런 어떤 감정이 마음에 있을지 모르지만, 여러분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만약에 이것이 ‘이해되고 깨닫게 된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안에 모든 것이 있구나!’ 이렇게 될 때는 하나도... ‘내가 얼마 했다, 못했다! 어느 정도 어느 수준에 왔다, 못 왔다!’ 그런 부분이 아닙니다.
여러분 신분은 엄청난 신분입니다. 여러분 신분은 엄청난 신분정도가 아니고, 이건 도저히... 어쩌다가 내가 이런 축복과 이런 은혜 속에 세워졌는가 하는 이런 감격과 감탄이 나와야 되는 겁니다. 느낌으로 ‘아!’ 감상에 젖어서 한다!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들 정말 내가 어쩌다가 이 자리에 왔지만, 이 자리에 나와 있는 감격과 감탄이 진짜 나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자구나! 사단의 왕권에서부터 완전히 해방하였습니다. 저주와 재앙 속에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는데, 완벽하게 해결되었습니다.
여러분 안 믿는 사람들이 점치고, 안 믿는 사람들이 굿하고 하는 것! 그걸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이상한 신을 받아가지고 무당이 되는 것! 그걸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알잖아요. 예수 믿지 않는, 특별히 우리가 전도하면서 무당집을 찾았을 때에 하는 말이, ‘이 무당의 직업을 자식들에게도 넘겨주고 싶으냐?’ ‘아무도 넘겨주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교회까지 왔고, 어떤 사람은 신학교까지 갔지만 안 되더라!’ 이겁니다. 할 수 없어서 그런 속에 빠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 바로 붙잡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엄청난 파워와 능력으로 그 속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해방되는 부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바꾸어져서 하나님의 그 영광스러운 역사에 서게 된 자녀의 감격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저는 어쩌다가 부모가 예수를 믿었고, 장로로서 자랐고, 그래서 교회 다녔고, 그러다가 또 한때는 좀 객기가 생겨가지고 뭐 ‘믿음이 뭐냐?’ 고민하면서 또 다른 데로 갔다가, 그래서 돌아와 가지고 또 목사가 되었습니다. 우연히 된 것처럼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어떤 때는 ‘주여, 어쩌다가 나 같은 사람이 목사가 되었습니까! 어쩌다가 나 같은 사람이 집사가 되었습니까! 어쩌다가 나 같은 사람이 송현 교회 성도가 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나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사실이 보여 지게 되었습니까!’ 이걸 가지고 성경은 뭡니까? 은혜라 그랬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앉아서 한번 다시 확인해야 됩니다. ‘예수 믿고 이게 되었으니, 참 감사하구나! 예수 믿고 이렇게 되었으니, 참 좋구나! 예수 믿고 이 병이 치유되었으니, 참 좋구나! 예수 믿고 이 일이 해결되었으니, 좋구나!’ 예수 그리스도 그 적은 문제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시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더 큰 근본적인 인생의 문제, 인간의 모든 고민하는 문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흑암에 권세로부터 완벽하게 해방시켰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저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았습니다. 누리는 만큼 눈이 열립니다. 사업에 눈이 열립니다. 직장에 눈이 열립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갈 때에 모든 생애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싶습니다. 바울처럼 ‘병이 나았다, 안 나았다!’가 문제가 아니더라 구요. 나는 여기에 상당히 많은 비중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병이 나았다, 안 나았다!’ 문제가 아니더라 구요. 아침에 부은 발을 주무르며, ‘하나님 왜 또 부었습니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 이 마음이 들면서, ‘맞다! 구원 받았다! 문제가 아니다!’ 바울이 넘어지며 쓰러지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다른 것은 생각도 안하려고 그랬습니다. 왜? 그 안에는 모든 것이 있기 때문에, 바울의 고백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예수를 조금 바로 이해를 못하게 될 때에, 제자들처럼 이 축복된, 기념할 수밖에 없는 한 여인의 신앙을 오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사실자체를 오해할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항상 너희들과 함께 있으니까 언제든지 도와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않다!’ 비밀이죠.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또 천국 올라가시고,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성령으로 우리에 오실 사실을 미리 예언하신 겁니다. ‘이 축복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이 여자도 기념되리라! 이 여자의 모든 일이 기념되리라!’ 말씀했습니다.
오늘 강조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작은 것 해결한 신앙으로 끝나지 마시고, 이 여인처럼 참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나와 여러분에게 길이 되시고, 생명 되시고, 진리 되는 예수 그리스도! 어떤 문제 때문에 넘어지고 쓰러지는, 감정에 메여서 허덕거리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비교될 수 없는 엄청난 축복된 문제, 근본적인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모든 해결자라는 것이 말로만 아니라, 사실로 오늘 여러분과 제게 누려지는 실제와 사실이 되고, 이 일이 어떤 감정에 메이는 적은 것이 아니라, 너무 엄청난 비밀로 와 있다는 사실을 보는 눈이 열려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리아와 가룟 유다
마 26:3-13 / 김태복 목사
사순절 다섯째 주간을 맞으면서 마리아와 가룟 유다를 통해서 귀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마리아와 가룟 유다는 아주 대조적인 인물입니다. 마리아는 바치는 자요,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자, 축복 받을 자로 표현되고 있는 반면, 가룟 유다는 훔치는 자요, 주님을 향해 고통을 드리는 자요, 저주받을 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리아는 선한 자의 대표로, 가룟 유다는 악인의 대표로 나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면 마리아는 태어날 때부터 성품이 선하고 가룟 유다는 성품이 간악하게 태어났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가룟 유다도 처음에는 그 성품이나 사명감이 뛰어나기에 주님이 제자로 부르셨던 것이요, 더 나가서는 그 책임감이나 정직성이 우수하기에 제자들의 살림을 맡는 회계로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가 칭찬 받은 것은 무엇 때문이며, 그렇게 주님의 마음에 들었던 가룟 유다가 3년 사이에 이처럼 변질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시기 전에 베다니에 들리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다니는 감람산 동편으로 약 5리쯤 되는 곳에 위치한 적은 촌락입니다. 오늘 주님은 이 마을에 오셔서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대접을 받게되셨습니다. 아마, 시몬은 과거 문둥이였다가 주님을 통해서 깨끗함을 받은 인물로 그 은혜를 보답하는 마음에서 잔치를 벌리고 주님의 일행을 초청한 것 같습니다.
그 때에 같은 동네 살고 있는 나사로의 누이요, 마르다의 동생인 마리아가 귀한 향유을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깨뜨리고 예수님의 머리와 그 발에 기름을 부어 드렸습니다. 그러자 이 장면을 보고 있던 가룟 유다는 혹독하게 비판하기를 "이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느뇨 이것을 팔면 300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지 않은가"라고 했습니다. 또한 제자들도 가룟 유다의 선동에 휘말리어 이에 동조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러한 가룟 유다를 책망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는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 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며 저를 기념하리라"고 했습니다.
자, 그러면 마리아는 왜 칭찬을 받았고 가룟 유다는 왜 책망을 받았습니까?
1. 마리아는 주님 중심으로 행함으로 칭찬 받았지만, 가룟 유다는 자기 중심으로 행함으로 책망 받았습니다.
마리아는 주님 앞에 받은 바 은혜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 중에 가장 감사한 것은 오빠 나사로가 중한 병으로 죽어서 무덤에 들어간지 나흘이 되어 전혀 살 소망이 없는 때에 예수님의 권능으로 다시 살게된 것입니다. 나사로는 집안의 기둥이었는데 그가 죽는다면 마르다와 마리아는 고아나 다름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오빠를 살려주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그 무엇을 드린다 할지라도 아깝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하고 고마워서 자기가 가장 아끼던 향유 한 옥합을 주님께 가지고 와서 아낌없이 바쳤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믿음이 좋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헌물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 너무 감사하여 바친 것입니다. 바로 이점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헌신이나 봉헌할 때에 반드시 명심할 것은 주님의 은혜 만 분지 일이라도 갚는다는 마음으로 해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마음의 자세로 충성할 때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에 대한 감사, 주님에 대한 사랑, 즉 주님 중심으로 행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이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향유 옥합을 깨어서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부었습니다.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최고의 것을 주고 싶어합니다. 옥한음 목사님의 설교에는 이런 재미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두 남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두 사람은 결혼할 날짜까지 정해 놓고 있었는데 한번은 둘이서 백화점에 가게 되었습니다.
서로가 사랑하니까 좋은 것을 사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예비 신부는 잔뜩 기대에 부풀어서 따라 다니는데 이 남자는 물건마다 가격을 보더니 "야, 너무 비싸다. 좀더 싼 데 가보자."라고 하면서 이리저리 끌고 다니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일이 화근이 되어 가지고 두 사람이 헤어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물론 돈을 아끼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럴 때는 차라리 값을 묻지 말든지, 돈이 모자라 비싼 것을 사줄 수 없으면 아예 값비싼 물건이 없는 곳으로 가든지 해야지, 괜히 값을 따지면서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면 순수한 사랑의 꿈을 꾸고 있는 예비 신부가 얼마나 마음이 상하겠습니까?
사랑이란 원래 값을 묻지 않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심정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우리 예수님께 너무 비싸서 드리지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 마리아의 심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하늘 보좌의 영광도 내놓으신 분입니다. 자기의 생명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다 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그를 사랑한다면 최고의 것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값을 따지지 않고 아낌없이 주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비해서 가룟 유다는 자기 중심으로 충성했기 때문에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마리아를 보고 왜 그 값비싼 향유를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데 쓰지 않고 예수님 의 발에다가 쏟아 낭비하느냐고 화를 냈습니다. 마리아가 순간적으로 부어버린 그 향유값은 가룟 유다의 계산대로라면 300데나리온, 곧 노동자가 일년 동안 수고해서 벌 수 있는 금액에 해당하는 엄청난 것입니다. 요즘 시세로 따지자면 1,200만원 내지 1,500만원 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대단한 액수입니다.
가룟 유다는 그 엄청난 돈을 쓰는 용도가 틀렸다는 비판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 돈을 가난한 자들에게 쌀 한 가마니씩 사주어도 150명에게 줄 만한 금액이요, 불우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준다고 해도 수십 명에게 혜택이 돌아갈 것입니다. 너무나 아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비판하고 있는 가룟 유다를 야단을 쳤습니다. 도리어 그의 사랑의 우선 순위가 잘못된 것임을 밝히 말씀하셨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은 구제보다 앞서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22:37 이하에 나오는 대계명을 보아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의 우선 순위는 첫째가 하나님이요, 그 다음이 이웃이요, 세 번째가 자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가장 나중인 자기 사랑을 제일 우선으로 둔 것이 잘못입니다. 말로는 가난한 자들을 위하는 것 같으나 사실은 자기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요12:6절에 보면 가룟 유다의 말을 평가하기를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고 했습니다.
아마 마리아가 그 향유를 예수님의 일행을 위해 바쳤다면 가룟 유다는 시장에 내다가 300데나리온에 팔고 장부에는 250데나리온이라고 쓴 후 50데나리온은 착복하였을 것인데, 마리아가 별난 믿음을 가진 탓에 자기가 손해를 보았다는 생각이 화가 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아니, 가룟 유다가 왜 그런 한심한 인간이 되었습니까? 아마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이 예수님을 통해서 출세하려는 욕심을 가진 탓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3년 동안 열심히 따라 다녔으나 그 결과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말을 듣고 자기 스승이 자기들을 속였다는 배신감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 손해본 만큼 보상받겠다는 계산으로 돈궤에서 착복하기 시작했을 줄 압니다. 바로 그것이 문제입니다. 마리아는 받은바 은혜 감사하는 마음에서 헌신함으로 감격이 넘쳤으나 가룟 유다는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헌신함으로 점점 불만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도 무슨 충성, 무슨 봉헌, 무슨 선행을 할 때에 나를 과시하거나 자랑하려는 자기 욕심에서 아니고 오직 주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할 때 주님이 기뻐하시고 그런 사람들에게 더 큰 은혜, 더 감격을 주실 줄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마리아는 기회를 놓치지 않음으로 칭찬 받았지만, 가룟 유다는 기회를 놓쳤기 때문에 책망 받았습니다.
주님의 일은 기회가 주어질 해야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리아는 미리 향유를 부었으니까, 성경에 길이 남는 충성이 되었으나 기회를 놓쳤더라면 후에는 부을 기회를 놓칠 뻔했습니다. 막16장에 보니까, 며칠 후인 안식 후 첫날 여인들이 예수님께 향유를 부으러 무덤에 달려갔지만 붓지 못하고 돌아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 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 헌신할 기회는 아무 때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기회가 온다고 해도 그 때는 이미 가치가 삭감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주실 때, 성령의 감동이 올 때 순종하고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성도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리아는 충성할 기회를 알았는데 가룟 유다는 왜 기회를 모르고 오히려 예수님의 마음만 아프게 하는 자가 되었을까?' 라는 점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오실 때마다 만사 젖혀놓고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서 말씀을 듣는 일에 힘썼기 때문에 예수님의 안타까운 심정, 예수님이 곧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신다는 것을 깊이 깨달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향유 한 옥합을 드린다 할지라도 십자가에 달리실 주님에게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잠깐의 위로나마 드리기 위해서 그것을 부어 드렸던 것입니다.
반대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이 열심히 말씀하시는 동안, 시장에 나가서 저녁거리나 필요한 물품을 구입했을 것이요, 혹 예수님이 말씀하는 현장에 있다고 할지라도 맨 뒷자리에 앉아서 장부정리나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의 안타까운 심정, 십자가를 지셔야 할 이유를 알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의 그의 욕심이 영적인 면에서 어둡게 했고, 오히려 가룟 유다는 주님의 돈을 훔치는 기회만 노리는 자가 되고 말았다는 것은 너무나 큰 저주가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우리가 늘 기도생활, 성경을 연구하는 생활에 힘쓸 때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알게 됩니다. 그 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충성과 헌신의 기회를 주실 때 그것이 축복인 줄 아시고 순종하십시오. 또한 하나님이 은혜의 기회를 주실 때도 있고 회개할 기회를 주실 때도 있습니다. 어느 신령한 분이 말하기를 순교를 당하는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인데 그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지난 주일은 우리 한국교인들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있었습니다. 영락교회가 50주년 기념으로 1998년 신축한 베다니실에서 700명 고등부 학생들이 분반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그 천정이 가로 3미터, 세로 20미터 크기의 석고패널 1개가 2층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교사 1명이 죽고 장로님 한 분이 사고를 만나 중태에 빠지는 등, 17명이 중경상을 입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나마 영락교회 교인들이 그런 큰 충격 속에서 큰 은혜를 받게된 것은 고등부 교사였던 이원형 안수집사님의 순교적인 희생 때문입니다.
이원형 집사님은 서라벌고 지리교사로 59세였습니다. 2층 난간 앞에서 분반공부 중에 갑자기 '끼기긱'하는 소리가 들리며 천장이 내려앉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2층에 있던 집사님은 자리에 선 채로 "모두 엎드려라"며 학생들을 의자 사이에 피신하도록 했고 자신은 무너져 내리는 천장을 팔과 어깨로 막고 버텼습니다. 결국 그 분은 천장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1층으로 떨어져 머리와 갈비뼈 등에 중상을 입고 인근 서울 백병원으로 옮겨졌으나 6시간만에 숨졌습니다.
더 가슴 아픈 것은, 다음달 그 집사님의 노부모의 은혼식(銀婚式)과 5월 장남의 결혼식을 앞두고 변을 당해 주위를 더욱 가슴 아프게 했습니다. 35년 간 교직에 몸담은 이원형 집사님은 6일간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주일은 고등부 교사로 일하는 등 너무나 충성해 왔다고 너나 없이 칭찬하면서 어느 분은 말하기를 "왜 그 많은 악한 자들을 두고 하나님은 그런 천사 같은 사람을 순교의 제물로 삼으시는지 모른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했습니다.
왜 주일날 그런 붕괴사건이 벌어졌는지 해석이 구구합니다. 그런데 영락교회 홈페이지에 써 있는 어느 분의 말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 분은 주장하기를 '최근에 영락교회는 이철신 목사님이 너무 설교를 못 한다고 하여 나가라는 소리가 점점 강해지자, 이철신 목사님이 3주간 금식기도를 하셨는데 곧 이어 이런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은 영락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라'고 했습니다.
사실 여부는 알 수가 없지만 이번 사건이 아주 귀한 분을 순교의 제물로 삼으시면서 영락교회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경고하심이라면 영락교회는 기회를 놓치지 말고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한경직 목사님이 은퇴하신 후 73년부터 담임목사님이 무려 네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이 분은 이래서 싫다 내 보내고 저 분은 저래서 싫다 내 보내고 이번에는 또 설교 못한다고 내보려는 교회,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한경직 목사님같은 성자를 못 모실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부족할지라도 하나님이 보내신 줄 알고 잘 모시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다시금 한경직 목사님의 목회시절의 첫사랑, 첫 사명을 회복해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그런 사건은 다른 교회의 일만 아니라 한국교회에 전부에게 주시는 멧시지 임을 깨닫고 이번 사순절 기간동안 회개할 것을 철저히 회개하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마리아는 힘을 다하여 희생함으로 칭찬받았지만, 가룟 유다는 아무 희생도 나타내지 않음으로 책망 받았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 300데나리온, 우리 돈으로 치면 1,500만원 어치의 향유를 부었다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어느 성경학자는 이 향유는 그 여자가 시집갈 밑천으로 조금씩 조금씩 모아 두었던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것을 주님을 위해서 아낌없이 희생적으로 바치었던 것은 너무나 놀라운 일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요12:3에 보면 그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붇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자들은 머리털을 얼마나 귀하게 여깁니까? 그 귀한 머리털로 발을 씻겼다는 것은 전적인 헌신, 전적인 희생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 엄청난 금액의 헌물과 헌신이 우리 주님을 기쁘게 했습니다. 그 때 당시 예수님은 완전히 궁지에 몰리시고 계셨습니다.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노골적이고 조직적으로 압박을 가할 것이요, 어제까지 자기를 환호하던 군중들이 돈 몇 푼에 팔리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칠 것이요, 그렇게 3년 동안 훈련시켰던 제자들은 다 도망치고 그 중의 하나가 자기를 팔 것입니다.
하나님마저도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시기까지 고개를 돌리시고 외면하실 것입니다. 정말 인간적으로 어디 하나 위로 받을 곳이 없습니다. 천지에 혼자 계신 최고조의 고독감이 예수님을 향해 조여오고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마리아의 전적인 헌신과 희생이 예수님에게 큰 위로가 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마리아를 통해서 유일하게 위로 받으시고 계신 예수님을 향해 가룟 유다는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엄청난 십자가 사건을 앞두시고 유일하게 위로 받으시는 것을 오히려 구제를 핑계하고 공개적으로 비판하였던 것입니다. 아니, 주님께 위로를 드리는 것을 가지고 왜 구제타령입니다. 만약에 부모님에 칠순 잔치를 벌리고 있는데 아들이라는 자가 와서 "아니, 왜 이렇게 돈을 낭비하는가? 이 돈을 아껴서 불우한 사람을 도우면 얼마나 좋은가?"라고 한다면 천하 불효자일 것입니다. 사실, 평소에 구제를 많이 하는 사람은 그런 소리를 잘 안 합니다.
오히려 그런 생활을 못 하는 자들이 그런 타령을 더 많이 할 때가 많습니다.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그는 구제를 많이 하는 사람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평소에 구제는커녕, 오히려 예수님의 일행의 생활비에서 몰래 몰래 도적질하던 자가 가룟 유다가 아닙니까? 그리고 마26:14을 보십시오. 그 사건이 있은 후에 곧 이어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은30냥에 팔았던 자가 바로 가룟 유다였던 것입니다.
그런 자가 가난한 자들을 가장 위하는 것처럼 입에 발린 소리를 하고 있으니 너무나 기가 막힙니다. 너무나 가증합니다. 자기 것은 하나도 내놓지 않은 채, 말로만 하는 충성, 구제 누가 못합니까? 안 됩니다. 우리는 말로만 번지르게 하는 믿음, 말로만 하는 충성, 말로만 하는 구제를 외치는 가증한 태도에서 과감히 벗어나 이번 사순절부터는 희생이 담긴 믿음, 희생이 담긴 충성, 희생이 담긴 구제를 생활화해 봅시다. 우리 주님은 믿음과 희생의 그릇만큼 역사 하시는 분이십니다.
적은 믿음과 희생의 그릇에는 적은 은혜를 담아주시고 큰 믿음과 큰 희생의 그릇에는 큰 은혜를 담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니, 더 나가서는 마리아처럼 깜짝 놀랄만한 믿음과 희생에는 깜짝 놀랄만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피투성이가 되어 감옥에 던져진 후에도 거기에서 찬송을 부르는, 깜짝 놀랄만한 믿음의 헌신을 보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도 깜짝 놀랄만한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옥터가 움직이고 감옥 문이 열렸습니다. 모든 매인 것이 풀리면서 전도의 문이 열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김상호 목사님이란 분이 6·25 사변 때 만난 기적입니다. 그는 피난을 못 가고 낮에는 산 속에 숨어 있고 밤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하면서 밤에 교인들의 집을 심방하고는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웃 동네의 청년들이 30-40명이 공산당에게 몰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온 동네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싸이게 되었습니다. 살아 남은 이장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친구인 김목사님을 찾아와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대책을 물었습니다.
친구인 이장의 말을 듣고 김목사님은 마을에서 부흥회를 하여 사람들을 안심시키자고 상의하고 날짜를 정하였습니다. 예정된 날, 이장의 연락을 받고 동네 사람들이 이장집 마당에 모여 부흥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니, 공산 치하에서 부흥회를 열다니 이것은 미친 짓이었습니다. 그러나 김목사님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으로 부흥회를 열고 설교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가만 보니까 사람들이 하나 둘씩 슬금슬금 자리를 뜨더니, 나중에는 이장까지 도망칩니다. 보니까. 공산군의 일개 분대가 이장집을 완전히 포위하고 좁혀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김목사님은 "이제 죽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왕 죽을 바에야 떳떳하게 죽으리라" 결심하고 더욱 더 크게 설교를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가까이 오던 공산군이 무엇인가 놀란 표정이더니 모두가 도망쳐 버리더랍니다.
그러자 도망쳤던 이장이 와서 김목사님을 붙잡고 울면서 말하기를 "나는 오늘 하나님을 보았네. 공산군이 자네 가까이 왔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비취고 흰옷 입은 사람들이 자네 주위에 둘러서는데 그 수가 많았네. 그러자 공산군들이 자네 주위를 서성거리며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더니 도망 가버리고 말았네. 그러자 흰옷 입은 사람들은 사라지고 하늘에서 내려오던 빛도 없어졌네. 이제 나도 자네가 믿는 하나님을 믿겠네"라고 하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우리도 마리아처럼 주님 중심으로 기회를 잃지 않고 하나님이 깜짝 놀랄 정도로 힘을 다하여 충성하고 희생함으로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성도, 하나님이 강하게 도와주시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