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삶과 종교 099인문 1 200441084 이은혜 기말고사 재시 12월 13일 새벽 메일로 보내왔고 미채점입니다.
교수님 저는 현대인의 삶과 종교를 들었던
200441084 이은혜 학생입니다.
매일매일 아르바이트로 인하여
교수님께서 보내줬던 메일을 학교에서 잠시 읽고
이렇게 새벽녁에 피시방에 들리게 되어
이제서야 메일을 보내게되었습니다.
늦게 보내는것같아 정말정말 죄송스럽습니다.
딱히 기간도 안적혀져있어서 잘 몰랐습니다.
교수님의 넒은 아량으로 살피어주십시오.
한학기동안에 아침수업하시느라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1.동양의 종교와 서양의 Religion은 서로 다른 의미입니다. 각각 어떤 관점에서 종교 혹은 Religion이라고 하는지 밝히되, 그것들이 지향하는 최종목표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울러 설명하시오
서양에서 말하는 종교라는 것은 정신문화양식의 하나로 인간의 문제 중에 가장 기본적인 것에 관해 경험을 초월한 존재나 원리와 연결지어 의미를 부여 또 그 힘을 빌려 해결불가능한 인간의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것이다. 오늘날 동양에서 말하는 미신이나 인륜지학은 있었으되 종교는 없다. 또한 신앙의 대상(조교,신), 신앙의 주체(신도) 신앙의 행위(예식, 제사, 예배행위)를 갖추어야한다.
동양의 종교는 서양에서 말하는 인간학은 있었으되 종교는 없다. 말 그대로 터마루가 되는 가르침, 인륜을 비롯한 모든 질서가 비롯되는 곳이라는 말이다. 그 의미는 바로 인간학이며,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며 가운데이므로 지구에서 삐딱하게 살아간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살 수 있다. 이것이 중이며 태극이다.중자체가 주변과의 관계속에서 변함 없이 의미를 부여해주고 있는 이른바 핵심이다. 이 때문에 내제적 원리인 동시에 초월적 원리이고, 태극인 동시에 사물이기도 하다. 성언의 주체인 인간의 원리라 할수 있으며 그리고 천지인 중간에 종립한 사람이 깃들이게 됨으로써 비로소 중의 원리가 완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중은 가치의 적중이며 평균이 아니다.
결국 종교라 함은 긴간의 정신문화 양식의 하나이고 가장 기본적인 것에 관하여 경험을 초월한 존재나 원리와 연결지어 의미를 부여하고, 그 힘을 빌려서 통상적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불안 죽음 고민 등을 해결하려하며 초인간적인 위력을 인식하고 이예 대한 외경, 또는 신뢰의 감정으로 느끼며 이를 인격화 하고 신앙 기원예배를 통하여 안심입명 해탈 축복을 얻으려고 한다.
2.거룩한 공간과 시간이란 속된 공간이나 시간과 다른 의미와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룩한 공간과 시간이 무엇인지, 그것이 의미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속된 공간과 시간에서 체험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시오
거룩한 공간, 곧 강력하고 뜻있는 공간이며 거룩하지 않은 공간,곧 구조나 일관성도 없으며 형태도 갖추지 못한 공간이 있다는 말이다. 거룩한 공간의 발견, 우리는 이것을 계시라고 부른다. 종교적 인간에게 얼마나 깊은 실존적 가치를 가지는 가도 동일하게 볼 수 있다. 세속적인 경험에 있어서 공간은 균질적이고 중성적인 성격을 띤다. 그리고 계시는 고정점을 획득하고 따라서 균질성의 카오스 속에서 방향성을 확보하며, 세계를 창건, 참다운 의미에서 그 속에 거주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세속적인 경험은 반대로 공간의 균질성을 따라서 그것의 상대성을 유지시킨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세속적인 인간도 종교적 경험에 특유한 비균질성을 상기시키는 가치들을 여전히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비종교적인 인간에게 있어 거룩한 공간이 경험되는 것이라 할수 있다.
동양의 우주는 시공간을 함께 나타내기는 하지만 일단 공간적 의미가 강하다.
종교적 인간에게 있어 시간은 공간과 마찬가지로 균질적인 거솓 지속적인 것도 아니다. 한편으로는 거룩한 시간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종교적 의미를 배제한 행위가 자리를 차지하는 세속적 시간, 일상적인 시간의 지속이 있다. 이 두종류의 시간 사이에는 지속성의 단절이 존재한다. 그러나 종교적 인간은 제식이라는 수단에 의해 일상적인 시간의 지속으로부터 거룩한 시간에로의 이행이 위험없이 수행할 수가 있다.
두 종류 사이에 존재하는 한 가지 차이는 거룩한 시간은 그 본질에 의하여 역전이 가능하다
그래서 거룩한 시간은 무한정으로 회복할수 있고 무한적으로 반복될수 있다.
존제록적 시간에서보면 그것은 지나가지 않는다 라고 하며 곧 정지해 있고 늘 되풀이 된다. 주기적인 축제 때마다 참여자들은 동일한 거룩한 시간을 발견한다. 전의 축제때 현현되었던 바로 같은 그 시간이며 그것은 신들의 행위가 이루어진 때에 그들에 의해 창조되고 성화된 시간이며, 축제는 그것의 재연인 것이다. 종교적 인간은 두 종류의 시간 속에서 살게 되며 중요한 것은 거룩한 시간은 순환적이고 가역적이며 회복 가능한 시간이라는 역설적 양상아래서 나타난다. 제의라는 수간에 의해 주기적으로 회귀하는 일종의 영원한 신화적 현재이다.
비종교적 인간 역시 어떤 단절성과 비균질성을 경험한다. 말하자면 비종교적 인간에게도 축제의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큰 차이점은 비종교적인 인간이 그런 시간들 속에서도 시간의 흐름과 지속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면, 종교적 인간은 비역사적이고 반복적이며 동시에 정지해 있는 시간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3.최근 중동전쟁을 기독교문명과 이슬람문명의 충돌로 보는 입장이 있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주요한 교리를 비교 분석하시오.
불행하게도 당시 마호메트가 사상적으로 영향을 받았던 유태교와 기독교의 종파는 정통이 아니라 이단으로 취급받는 계열이었다. 멀리 떨어져 사는 마호메트로선 유태교나 기독교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가 없었고, 그냥 귀동냥할 따름 이었다. 당연히 그의 얘기가 정통파 유태교나 기독교인들에게 수용 될 리가 없었다. 마호메트는 자신의 체험이 거부당하자, 그 동안 열심히 '짝사랑'해온 유태교 및 기독교에 대한 분노감을 터트린다.
마호메트는 독자적인 적도를 시작하고, 드디어 이슬람교가 독자적인 종교로 출범하게 된다. 메카의 카흐바(입방체란 뜻) 신전이 이슬람교의 가장 거룩한 장소로 부상했고, 유태교 달력에 따라1월 10일 속죄일에 행하던 단식도 라마단(9월)달에 한달 동안 하도록 변경시킨다. 중동의 토속 종교인 달신(월신)을 상징하는 초승달 기호가 모스크(사원)위에 붙여졌다.
이후 이슬람교는 아랍의 민족 전통과 감정을 바탕으로 급속한 교세 확장에 나선다. 이 와중에서 숱한 유태인과 기독교인들이 학살당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슬람교에선 부인하고 있지만 " 코란을 받을 것이냐 칼을 받을 것이냐:"는 구호를 외치며 놀라운 성장세를 거듭했다.
중세의 획을 그었던 십자군 원정을 계기로 양자의 충돌은 역사의 전면에 불거져 나왔다.
특히 이스라엘이 2000년간 유랑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1948년 옛 고향에 돌아와 독립을 선언하면서, 종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파괴적 규모의 기독교, 이슬람교 대결이 시작됐다. 미국을 맹주로 한 친이스라엘 서방 기독교 국가들과 이집트, 이란 이라크를 주축으로 한 반이스라엘 이슬람 국가들의 대결은 첨단 무기에 힘입어 그 대결 강도가 높아져만 갔다.
20세기 말에 유고 코소보사태를 시작으로 체첸, 티모르 등 상당수 지역분쟁이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대결양상으로 비화됬다. 밀레니엄을 앞두고 이스라엘 나사렛에 있는 성수태고지 교회 바로 옆에 이슬람 사원을 짓는 문제로 일대 시비가 불거져 교황청에서 성명을 발표하는 등 곳곳에서 마찰은 계속되고 있다.
21세기를 맞아 국제정치 전문가들은 낙관적인 국제정세를 내놓기도 하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 보면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교 문명의 대회전이 있을 것이라고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종교 갈등하면 기독교와 불교의 대결을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불교는 신앙권이 동북 아시아 쪽에 한정돼 있고 교리체계도 기독교와 완전히 달라 국제적으로 양자가 갈등을 빚을 소지는 희박하다. 하지만 기독교와 이슬람교는 각각 수많은 신도를 거느리고 있고, 교리적으로도 부분적으로 유사한 점이 많으며, 뜨거운 감자인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문제가 결부되어 있어 양측의 긴장 관계가 쉽게 해소될 가능성은 적다.
올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준으로 서방 세계는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았다고 야단들이지만, 아랍인들은 자신들의 이슬람력으로 그저 1420년을 맞았을 따름이다. 그리고 새해 첫날에도 이슬람권은 지난 12월 9일부터 시작된 금식기간인 라마단을 묵묵히 보내고 있다.
4.도교와 자연종교를 오늘날의 자연주의와 비교분석
중국의 민중종교는 다수의 평안한 인간의 정신 생활로부터 발전하였다. 즉, 평범한 민중들에 의해 영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도 종교보다는 민간 신앙으로 구성된 신앙체계이다. 왜냐면 당시 민간 사회는 세속적 측면에서 화를 막고 복을 불러오기 위해 종교를 필요로 해서 이다. 도교는 민간신앙의 여러 요소들을 포함하여 종교적 의례를 갖춘 종교 형태이다.
중국인의 민간신앙이 결합된 형태의 중국적 민족종교라고 정의된다.
자연종교는 계몽주의 시대에 있었던 합리주의 종교로, 인간의 자연적 이성이나 통찰에만 바탕을 둔 종교이다. 계시종교(啓示宗敎)와 대립되는 개념이다. 자연종교의 개념에는 ① 인간의 이성에 근거한 종교를 가리키는 경우와, ② 문화적인 입장에서 본 원시적 미개종교의 경우가 있다. 후자는 자연숭배에 가까운 경우이어서 자연숭배와 혼동되거나 또는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하나, 자연숭배는 애니미즘이나 범신론(汎神論)과 같은 원시적 미개종교를 말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영국의 이신론(理神論)과 독일의 라이마루스 등의 주장인데, 그 특징은 권위주의적이고 제도적인 기성종교에 대한 안티테제이며, 계시가 아닌 자연, 또는 이성에 의한 진리를 중시한다는 점이다. D.흄은 기적을 부정, 조작이 아닌 인간정신으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우러나오는 자연종교를 주장하면서 무신론으로 기울어졌다. D.디드로도 역시 모든 계시종교를 이단이라고 반박, 자연종교를 주장하며 무신론으로 기울었다.
도교는 중국인들 사이에서 자연적으로 성립된 자연종교라고 할수 있다. 따라서 민간 종교적 요소를 많이 흡수 하였기 때문에 도교의 명확한 경계선을 확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농민, 민중의 사회적 집단이 주체가 되는 도교를 민중 도교라고 정의한다고 하면 도교의 전문가인 도사, 도교위 사찰에 해당하는 교단 도교라고 정의 할수 있다. 일반적으로 도교를 성의하는 것은 교단 도교를 중심으로 하고 있고 이 조직은 불교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자연주의에 대해 말할려면 인간중심주의와 함께 말해야 더 좋을 듯싶어서 추가했다.
실재의 내용과 그 드러남에 대한 단상 - 새로운 세기에도 여전히 이항구조의 문제가 중요한 것으로 여긴다. 안과 밖, 겉보기에는 한 사물에 단순한 이중 측면을 표현하는 것 같으나, 한 사물에 대한 여러 가지를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미국으로부터 나온 악의 축이라는 발언에서는, 역사 의식인 것으로 착각하거나 위장하면서(여기에 음모가 있다), 언제나 권력적 국가의식에 의한 행정조치에는 도덕적으로 선과 악을 따로 행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이항 구별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진리와 거짓으로, 그리고 예술적 감성의 기준이라는 이름으로 아름다움과 추함으로 구별되기도 한다. 또한 근대성에 근거한 철학적 담론에도 소박한 관념론과 통속적 유물론이 마치 대립적으로 담론을 생산하는 것으로 여긴다.
사실, 오랜 상식적 관찰이나 양식적 태도는 이런 이항적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나, 20세기말에 우리나라에 알려진 프랑스 철학의 한 부분인 후기 구조주의는 이런 문제가 선전제의 오류 또는 환상, 심지어는 허구성 또는 사기성으로 여기고, 바보스런 짓이라고 한다. 그러면, 이 안과 밖의 문제가 왜 지금까지 당연한 것으로 통용되었고, 그 다음 이 이항구조의 해체와 더불어 어떻게 새로운 구조를 생산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다른 차원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대부분은 안과 밖을 구별하는 생각은 영혼의 문제나 생명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중심주의 사유에서, 종교든 이성적 철학이든, 영혼(정령)은 밖에 존재하고 있다가, 신체(물체, 물질)라는 속으로 들어온다고 믿고 있다. 이런 관점은 형이상학적으로 형상(본래의 모습)이 질료(변화하는 어떤 것)에 관여하는 정도에 따라서 제 각각 다른 신체(물체)가 생겨난다고 본다. 이런 형상론의 입장에는 언제나 전제로서 형상은 완전하고 불변하고 부동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형상이 불완전하고, 잘못되고, 심지어 못나기도 한 질료를 어떻게 구슬를 것인가가 문제이다. 이는 종교나 정치에서 이 형상을 잘 믿고 또는 잘 아는 자가, 잘 모르는 백성을 교화하거나 지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안과 밖이 구분된다는 생각에는 오랜 형상적 사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과 밖이 없다고 주장하는 견해들이 있다. 도대체 살고 있는 인간(자아)이 자연이라는 덩어리 밖에 있는가 안에 있는가? 자아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것은 나의 밖에 있는 것이 분명하지 않는가 라고 한다. 여기서 분명하게 밖에 있다는 것은 눈을 뜨고 보는 지각의 현상이다. 그러면 눈을 감아보자. 나(자아)는 어디에 있는가? 무엇인가의 "그 속에" 있다. 여기서 자아가 '그 속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 속에 있다는 의미이다. 즉 그것은 신체 속에 있고, 그 신체는 자연 속에 있으며, 지구라는 세상은 우주 속에 있다. 그러면 우주 바깥은 있는가?
이런 질문을 받으면, 바깥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상대적이지, 절대적으로 바깥이 있다는 것은 아닐 것 같다. 우주 바깥, 잘 알 수도 없고, 전파 망원경이나 미립자 분석기를 동원하여 아는 수억 광년의 거리 바깥은 인간의 상상과 더불어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역시 인간은 '그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종교는 그래도 영혼이 다른 곳이 있을 것이라고 하고, 천국이나 극락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속에 있지 않는 어떤 것, 즉 밖에 있는 어떤 것이란 사유의 경계 밖을 규정한 것, 그 이상의 것이 아니다. 또한 안에 대해 밖을 먼저 설정하거나 또는 밖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밖을 전제로 안을 설명하는 것이며, 여기서 밖은 허상이며, 빈 개념으로 여기는 것이 후기구조주의자들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이것을 존재로 여기는 것을 멍청한 짓이라 한다.
이들에 따르면 결국 인간(생명, 영혼)은 이항구조가 아니라, 분리되지 않은 하나(질료)로서, 생성하고 변화하는 과정 중에 있는 그 무엇(aliquid)의 한 부분이라고 본다. 이 무엇이 있고, 그리고 이 무엇의 구체적 표출이 다양하며, 이 '하나 속에' 다양한 것들의 양 극한의 위상에서 한쪽이 다른 쪽을 보고 안, 그 안이 다른 쪽을 보고 밖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형상론의 위상에서 존재론적으로 한 극한이 존재이라면 다른 한쪽은 비존재로 여긴다. 또한 인식론의 방식에서 한 쪽이 기하질서를 구축(구성)하는 지성이라면 다른 한쪽이 생명질서를 느끼는 직관으로 여기고, 서로 서로 다른 질서를 무질서라고 한다. 사회적 또는 종교적으로 자기편은 진리이나 다른 편은 거짓으로 여기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이것은 각각이 자신의 경계를 먼저(또는 암묵적으로) 설정하여 다른 쪽을 배척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항적 또는 이원론적 담론은 이미 인간이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으로 살아간다는 것과 다름 아니라고 얼마나 철학자 구도자 종교가 말했던가! 이런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반발은 자연주의자로 볼 수 있는 환경론자에서도 일어난다. 요즈음의 환경론자도 환경 속에 있는 인간이 환경을 바깥으로 생각하고 이용하고 버리기만 한다면, 이미 자기의 일부가 피폐하고 있어서 그 영향으로 자신이 피폐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과 자연사이에 안과 밖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자연과 인간사이에 내재적 연속을 인정하는 것은 자연주의적 태도라 말할 수 있다. 안과 밖을 전제하지 않고, 질료의 자기 생성의 과정에서 다양한 사실과 사물의 전개를 있는 그대로 담론으로 삼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여는 새로운 조직화의 방식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형상이 없는 철학, 원본이 없는 형이상학, 즉 질료형이상학은 문제를 올바로 제시하고, 답을 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 놓는다. 질료가 자기 생성한다는 견해에는 질료의 생성 발전이 긴 과정을 통하여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고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이 진행 중에 있는 어떤 생명체도 소중하다. 이 자연에서 그 무엇(이뭣꼬, 是甚?)이 새롭게 만들어 가는 과정을 더 잘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살아간 세대(생명)가 아니라, 살아갈 세대, 즉 다음에 올 세대이다. 그 영혼(생명)이 완전한 모습으로 이미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흘러가면서 자신의 모습을 보다 잘 적응하게 만들어 가는 노력의 과정이다. 그 모습이 어느 모습이 되는가는 아무도 모른다(이 표현에서 허상으로 신이 있다면, 신만이 알고, 진실로 알아 가는 것은 자연이다). 그러나 노력을 통하여, 이 모습이 잘 드러나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세대는 우리의 아이들이다. 아이들이 제각기 자신의 모습을 실현할 수 있는 삶의 세상을 만드는 것. 즉 이 새로운 조직화는 사회 안전망 장치(무상 교육과 무상의료)를 잘 이끌어 내고, 생태계와 상호보완적으로 ! 적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문제의 제기에는 두 가지 방향이었다. 하나는 이미 자신 속에 해답과 해결을 이미 먼저 지니고 있다고 여기는 인간주의적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자체와 더불어 자신 속에 해결할 권능이, 자연과 상호침투하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기대해보자는 자연주의의 태도가 있다. 이 기대는 여전히 열려진 장에서 활동하는 노력이다. 이 노력이 잘 이루어지면 즉 스스로 일어나는 것처럼 이루어진다는 것을 느낄 때, 우리는 종교성의 의미에서 은총(grace)이라 하고, 자연주의적 태도에서 자연이라고 한다. 이는 내재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밖이란, 신체적으로든 사변적으로든, 인간이 만든 경계 밖에서만 생길 뿐이다. 베르그송은 이미 이런 사유를 어린애의 사유라고 말했다. 이제 자연 속에서 자연과 더불어 성숙한 인간으로 살아갈 때가 되었다. [마실에서 천하루밤]
도교에서의 도의 개념은 인간의 인식범위를 벗어난 근원으로서와 인간이 감각으로 느낄수 있는 현상으로서의 측면을 각각 말할수 있는데, 있음의 근원을 없음으로 상정한 것이 전자이고 공정하고 사적인 감정이 없는 냉정한 자연의 법칙으로 묘사되는데 자연지도라고 한다. 자연은 자연 법칙대로 굴러갈 뿐이라는 것이 후자의 내용이다.
이 세가지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5. 2004학년도 2학기 동안 현대인의 삶과 종교를 수강하면서 배우고 느낀 것을 위 답안과 중복되지 않는 한에서 다 쓰시오
?김교수의 마지막 드리는 말씀?당신은 누구입니까?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지향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기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고,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 이런 모든 것들이 어쩌면 당신과 나를 속이고, 속임 당하는 것 전부일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나는 나입니다. 당신은 당신입니다. 우리는 우리입니다. 우리는 모두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부디 늘 잊지 마소서.
나는 종교를 가지지 않은 학생이다. 이 수업을 들으면서 종교에 대해 내가 생각했었던 과는 좀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단순히 나열되어있는 힌두교, 기독교, 불교, 도교 등 이런 것밖에 알지 못했지만, 그 내면에 어떠어떠 하다는 것을 조별발표를 통해 알게되었다.
윤리 시간에 관심여겨 보았던 유, 불, 도에 들어본 것이 있어서 그런지 더 잘 들었던 것같다.^^
그 중에도 불교같은 경우에는 생로병사, 희노애락에서 벗어난 자유와 평온 속으로 이끌고자 하는 가르림과 이 가르침을 통해 행동으로 실현하게 하는 것이 기본사상을 지닌다. 배웠던 것들이 귀에 들릴때마다의 그 기분은 정말 좋다. 즐겁다ᄒᄒ
불교 교리는 인간이 실천해야할 하나의 윤리 강목과도 같은 불교의 핵심이 되는 가르침이며 기본적으로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12연기, 육바라밀 등이있다.
삼법인의 내용에서는 제법무아, 제법무상, 일체개고가 있다. 이 수업을 들으면서 열반적정을 처음 알게되었으며 나도 열반적정의 상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네가지의 거룩한 진리 사성제/
고,집,멸,도를 외웠던 기억이 난다.
사성제는 연기의 법칙을 이론으로 끝내지않고 해탈과 열반에 도달할수 있는 실천사상으로 전개시켜나간 첫 단계를 말한다. 나는 현재 고성제를 지니고 있다. 고성제에서는 생하고 늙고, 병들고, 죽고, 미운것과 만나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고,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것을 괴로움이다 라고 한다. 나의 상태는 사랑하는 것을 잃어버리고 현재 추구하는 바를 얻지못하고 있다. 나의 이 고성제의 상태에서 멸성제의 상태로 갈려면 팔정도라는 수행방법이 있단다.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
많기도 많다. 정말 이렇게 한다면 나의 괴로움은 없어질까? ᄏᄏ
여툰 이런것이 있고 내가 불교에서 제일 기억에 꽝! 남은 것은 '육바라밀'하고 '중도의 진리'이다. 중도의 진리란, 연기의 도리에서 일체 삼라만상은 무상하고 무아한 것이므로 실로 있다든지 항상된다든지 할 아무런 것도 없고 모든 현상계지법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는 상의성관계에 있기에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님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무아이고 무상이라고 제법이 무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인연으로 결합된 모든 것은 각기 그 인연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말인 인연으로~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라는 말이 팍팍팍! 와 닿았다.
육바라밀은 대승을 실천하는 보살에게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덕목을 말하는 것으로 보살의 영원한 생활자세이자 완성해야 할 수행의 덕목이다.
바라밀이란 피안에 이른 여섯가지 상태를 의미하며 궁극적인 것, 완성된 것과도 통하는 말이다. 즉 육바라밀은 여섯가지로 보살이 닦아야 할 수행의 완성을 의미한다.
나에게는 육바라밀 중에서 정진바라밀―몸과 마음에 게으름이 없이 부지런히 힘쓰라는 의미―과 선정바라밀―마음을 고요하게 통일하는 정신통일 수행방법―이 필요하다
필요하다는 말보다 있어야 한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나에게 부족한 것이라서일까?ᄒ
고등학교시절 열심히 들었었던 부분이고 예부터 우리나라에 미친 유, 불, 도를 다시 이 수업에서 이렇게 듣게 되어 기억 한 부분에서 깨어 나와 다시 알게 된 것같다.
내 친구는 천주교 신자이다. 그 친구와 많은 대화를 나누면 거기에 대해 배울것이 많고 들은바도 많다. 한때는 나도 그 성당에 나가서 세레까지 받을뻔했는데 어쩌다가 가는 횟수가 줄어들게 되고 이제는 그냥 지나가기만 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 친구와는 죽마고우로 아직까지 여전히 친함―
교회같은 경우 매일매일 나가야하는 강압성에 나는 부정적인 시선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매일매일 참석하여 예배하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둥 교회에서 믿는 신을 믿지 않으면 미래가 불행해진다는 둥 지옥에 간다는 둥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종교를 믿을 때 어디 "다닌다"라는 말을 쓰는것같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자신의 평온함을 찾기위해 신이라는 것에 믿음을 주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믿음이 변하지 않는 한 그에 대한 존재의 믿음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어디를 다녀서 표현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다니지 않아도 자신의 평온을 추구하고 믿는 것도 참이라고 생각한다.
종교라 함은 자신에게 평안을 주고 또, 삶에 도움을 주는 요소인 것을 알게 된 것같다.
(ᅮ_ᅮ 교수님 날려서 다시 썼는데 날린것보다 못한것같애용~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