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에 날리는 은행잎, 늘푸른 봉황산, 고풍스럽던 건물, 작고 아담한 운동장, 새벽에 수업을 시작하는 학교, 무감독시험-.’
30여 년 전의 모교 공주사대부고 시절을 돌이켜보면 주마등처럼 스치는 단어들이다. 1972년에 입학해 75년1월에 졸업한 사람으로서는 지금이 2005년 9월이니까 무려 30년 세월이 훌쩍 지난 추억들이다. 아스라한 기억들이 간간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를 뿐 낡은 슬라이드가 연결되지 않는다. 졸업 앨범을 뒤져본다. 학창시절의 이야기나 에피소드도 스쳐 지나가는 한갓 편린에 불과하다는 점을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충분히 자의적 잔상들이다.
논산에서 태어나 논산중학교를 졸업한 뒤 박봉호-이명복-이태범-백종현-이광주-성완경-김서겸 등 10여명과 함께 진학한 필자로서는 사대부고 분위기가 처음에는 아주 생경하고 이색적이었다. 공주라는 작은 도시는 우아하고 단아했다. 봄에 피는 목련이나 벚꽃은 도시를 아름답게 꾸미고 있었다. 가을에 교정에 날리던 노랑 은행 잎새는 지금도 기억에 새롭다. 말씨도 조금 달랐다. 서울에 가까워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한결 세련된 느낌이었다. 청국장을 ‘툰툰장’, 깜밥을 ‘깡개’로 부르는 말들은 아주 맛깔스러웠다.
학교 분위기도 이채로웠다. 우선 아침밥을 먹기 전에 한두 시간씩 새벽 수업을 했다. 학교에서 멀리 통학하는 학생이 거의 없었다. 통학거리가 있던 친구들은 자전거로 통학하거나 학교 앞에서 하숙을 했다. 학교의 학생지도는 매우 세심했다. 입학하자마자 신용철-김광호 등 몇몇 동기들이 퇴학을 당하는 사례도 있었다.
한해 선배인 16회 만해도 남학생 2개 반과 여학생 1개 반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남녀 각각 2개 반씩이었다. 여학생 교복은 설풋 몸빼를 연상시켰지만 깔끔했다. 매력 있는 친구들이 보였지만 감히 말 붙여볼 엄두를 못 냈다. 학교 공부에 급급하기도 했지만 규율도 엄격했다. 신용순-이정웅 등 담임 선생님이 가정 방문도 하고 수시로 교외지도에도 나섰던 것으로 기억된다. 단지 학교에서 공식으로 인정했던 토요문학회에 나가 신관우-구상헌-김진숙-임연숙-이옥주 등 몇몇 남녀 친구들과 대화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상복-이승수-이영수-장종섭-최순배 등 동기동창 커플이 많은 것을 보면 재주가 유난히 많은 친구들인 셈이다.
학교생활 중 무시험 감독 이야기는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자율적으로 시험을 치렀다. 남의 시험지를 훔쳐보는 부정행위를 하지 않는 전통이 있었다. 체육시간의 자율 체육도 기억에 남는다. 중학교 시절에는 지정된 종목으로 수업을 했기 때문에 원하지 않거나 적응하지 못하는 종목이 걸렸을 경우에는 수업이 마냥 지겨웠었다. 그러나 사대부고에서는 자기가 선택한 종목으로 수업을 진행하고 실기 시험도 치렀다. 김동권-남상균-박인준-조석윤-박종걸-안종민-이종직 등 여러 친구들과 축구게임을 즐겨했다. 공주지역대회에 출전해 뛰어난 성적을 내기도 했다. 자유체육은 봄-가을에 벌어지는 종합체육대회를 흥미를 한결 가중시켰다. 3학년 때 춘계체육대회에서 이과반인 3학년2반에게 엄청난 스코어 차로 우승을 내주었던 우리 3학년1반이 가을체육대회에서 극적으로 종합우승, 상품을 받을 때의 감격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봄에 이과반에 패했던 배드민턴에 김종성-양승구-김남혁과 함께 출전,막강 임국진-백구현 조를 누르고 우승하는 등 전략전술에서 승리한 덕분이었다. 김번겸 친구는 다이내믹한 높이뛰기 솜씨로 뽐내기도 했다. 당시 안정호 교장 선생님이 종합성적을 발표하고 부상을 시상하면서 “무거우니?”하던 이야기는 졸업 앨범에도 실렸다.
모교 공주사대부고 시절의 즐거운 추억 중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토끼몰이 행사’로 기억된다. 전교생이 동원되어 몽둥이들을 들고 산을 에워싸며 토기를 몰던 기억을 생각하고 지금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토끼들은 산에 오를 때에는 날쌔지만 산 아래도 도망칠 때에는 갈팡질팡했다. 날렵한 꿩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친구들은 날아가는 참새를 몽둥이로 휘둘러 잡기도 했다. 토끼몰이를 끝내고 여학생들이 미리 지어 놓았다가 퍼주던 하얀 쌀밥과 미역국 맛은 아직도 입안에서 군침을 돌게 한다.
우리 17회 동기들이 1972년 입학하기 직전에 곰나루터 근처의 송산리 고분군에서 발굴된 무녕왕릉의 기억들도 빼놓을 수가 없다. 송산리 7호분에서 출토된 3천여점의 무녕왕릉 보물들은 그 후 공주박물관을 신축하게 했고 찬란한 백제 역사를 재조명하게 했다. 때마침 우리 동기들이 1학년 때 차출되어 무녕왕릉 앞에 단풍나무들을 심었고 얼마 전 공주를 찾았을 때 눈여겨보니 ‘세리기념관’ 옆에 멋진 자태로 짙게 물든 단풍 잎새를 뽐내고 있었다.
백제문화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전교생들이 동원돼 각종 치장을 하고 거리행진을 했다. 필자는 무사로 참가했다. 그러나 왕비로 꾸며졌던 안공자 동기를 비롯해 평소 교복 속에 학생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던 여자 동기들이 오색한복에 마치 선녀들처럼 성숙된 처녀들로 변신해 있었다. 특히 달빛아래 펼쳐진 공산성 앞 백사장에서 펼쳐진 여고생들의 무용모습은 비단처럼 흐르는 금강과 어울려 한 폭의 멋진 그림을 연상하게 했다.
“기인 머리∼짧은 치마∼아름다운∼그녀를 보면-.”
‘토요일 밤에’라는 노래가 유난히 유행하던 시절에 제주도 수학여행은 잊지 못할 추억들이 많았다. 목포까지 기차여행으로 즐거워했던 친구들이 5백t급 선박 지하 3등칸에 승선하면서부터 울렁거리는 배 멀미에 ‘체면이고 점잔하고-’가 사라져 버렸다. 몇몇 여학생들은 만신창이가 된 채로 아예 축 늘어졌다. 남학생들의 등짝에 업혀 제주항 부두에 내린 여자 동기들도 많다. 하지만 하룻밤을 지낸 제주 여행은 마냥 즐겁기만 했다. 간밤에 여학생들이 침입, 얼굴에 다양한 낙서를 하기도 했다. 폭풍우가 밀어닥쳐 예정보다 이틀을 더 묵게 된 우리 일행들은 비가 부슬부슬 내리며 지루해지자 잔꾀가 났다. 박인준과 숙소를 슬며시 빠져나와 천신만고 끝에 제주신성여고 학생 2명을 꼬여 데이트를 시작할 무렵 제주경찰에게 덜미를 잡혔다. 교통법규 위반이라는 죄목이었다. 학교 선생님께 알리고 퇴학을 시킬 것이라는 으름장(?)에 싹싹 빌고 밤 2시쯤에나 풀려났다. 하소연도 못하고 숙소로 돌아와 선잠을 새운 웃지못할 기억이 떠오르면 아직도 입맛이 씁쓸하다.
과거가 있으면 미래가 있다.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 17회 동기들도 어엿한 사회 중견이 돼 있다. 가입회원이 7백60여명에 이르는 멋진 홈페이지(cafe.daum.net/bk17)도 운영하고 있다. 아이들이 고등학교들을 졸업하고 대학입학 소식이 줄을 잇고 있다. 발 빠른 친구들은 조만간 자녀들을 출가시킨다고 청첩장을 돌리겠지-. 얼마전 30주년 홈컴잉 행사를 준비한다고 동기회장을 맡은 정익우 변호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유성에서 만난 친구들은 반갑기도 했지만 머리카락들이 많이 희끗희끗 해졌다. 양우석-양승구-신윤희-이순하-최기용-신관우-김용우-장동영-조옥형-오동균등 여러 친구들이 기금모금에 애를 쓰고 있었다. 김선호-이응삼 등 저 세상으로 먼저 떠난 친구들의 안타까운 이야기도 나왔다.
우리 친구들에게 다시 한번 당부하고 싶다. 지금은 수명 1백년 시대다. ‘스트레스 받지 말고 건강을 챙기라’는 것이다. 이제 자신을 돌아보고 시간을 내서 친구들도 돌아보라는 주문을 하고 싶다. 졸업 30주년을 넘어선 지금 우리 17회 동기들도 조만간 스스로를 위해 약간의 기금 조성도 만들어 내리라 기대해 본다.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친구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잠시 상념에 사로잡힌다.
첫댓글 옛날 학교다닐 때 일들이 새삼스럽게 다가오는구나 ! 그런데 유현이는 문학반에서 배워 글을 잘 쓰나 ?
슬로우비데오를 보는듯 하네요.왕촌골의 토끼몰이,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였는데 그날의 국맛은 지금도 감칠.. 난 무국으로 기억되는데...
유현이가 다방면에 능력 출중하고 재기 넘친다는 건 익히 알고 있지만..이리도 기억력이 좋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덕분에 옛일 추억하며 그리움에 빠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