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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학생의 책가방
조순희 (예원)
산들이 사방으로 둘러싼 두메산골 산간 벽지마을에서 1940년 초반에 태어나 가난
에 빠진 아주 어려운 농부의 자식으로 삶에 터전을 잡게 되었습니다. 부모님 슬
하에 따뜻한 사랑으로 자라면서 50년대에 접어들어 초등학교에 입학하라는 예비입학통
지서가 나왔습니다. 입학통지서를 받은 저는 너무 너무 기쁘고 좋아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저 입학통지서만 받으면 무조건 학교에 다니는 줄만 알
고 밤낮없이 학교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는 마음은 하루가 열흘같이
멀기만 했습니다. “시간이 왜 그렇게 빨리 안가나. 나도 빨리 학교에 가서 남과 같이
공부를 배워야할 텐데… 가방끈을 묶어 둘러맸으면 좋겠네." 하고 야무진 꿈을 펼쳐 놓
았습니다. 아침이면 동네 오빠 언니들이 예쁜 옷을 입고 흰 양말에 검은 고무신을 신고
보자기로 싼 책가방을 옆구리에 메고 손에는 양은으로 된 도시락을 손수건에 싸서 들은
채 “친구야 학교 가자." 소리를 치며 골목길을 가득 채우는 듯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
이 좋아 보이고 부러웠습니다. 흰 저고리에 짧은 치마를 입고 머리에는 반짝이는 보석
같은 예쁜 핀을 꽂고 동백기름을 바른 머리로 단정하게 땋아 내린 머리끝에는 빨간 댕기
가 예쁘게 장식되어 리본으로 매여져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등교하는 언니들이 무
척 행복해보였습니다. 언젠가는 나에게도 그런 모습들이 오겠지 그리운 마음뿐이었습니
다. 하루해가 어느 듯 지나 해가 산마루에 올라 탈 때 동네 입구 골목길을 내려다보면
산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처럼 언니 오빠들이 떠들썩하게 산에 메아리가 울러 퍼지도록
흥겨운 모습으로 노래를 부르며 오순도순 지나갑니다. 언니 오빠들이 오는 것을 보고선
좋아하는 언니에게 마중을 나가 언니의 허리를 끌어안고 “언니, 오늘 재미있었어? 오
늘은 무얼 배웠어?" 물어 보면서 “가방은 이리 줘, 내가 들고 갈게.” 하면 언니는
“무거운데 놔둬.” "싫어, 안돼! 내가 들고 갈 거야." 하면은 언니는 웃으면서 “그래,
네가 들고 가.”라고 하면서 가방을 저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꼭 제가 학교에 다니는 것
처럼 가방을 받아서 어깨에 메고 언니 손을 잡은 채 펄쩍 펄쩍 뛰면서 집에 돌아오곤 하
였습니다. 그러면 언니는 가끔씩 책가방속에서 옥수수 빵이나 건빵을 꺼내 주기도 하였
습니다. 빵이나 과자 얻어먹는 재미로 학교에 다니는 언니를 누구보다도 더 좋아했고
매일 같이 학교에서 돌아올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때 그 시절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보
리 고개 넘든 무명옷 시절 입을 옷이 많았었습니까, 먹을 것이 많았었습니까. 땔감이 많
았었습니까? 옷이라면 목화씨를 심어서 활짝 핀 목화송이에서 뽀얗고 하얀 솜을 따서
씨를 바르고 타서 물레로 뽑아낸 무명실로 베틀에 짜서 천을 해 입었습니다. 명절이 오
면 부잣집에서야 인조 옷감으로 옷을 해 입었지만 가난한 집에서는 손으로 짜낸 명주천
도 아닌 무명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어려운 가정식단에는 대부분 나물무침에
보리쌀이 드문드문 섞인 비빔밥이 주식이었고 까맣게 질들은 무쇠솥에서 삶은 감자가
중식이였습니다. 보리쌀을 맷돌에 둘둘 거칠게 타서 아욱죽으로 여러 때를 만들어 먹기
도 했습니다. 겨울이면 통갈이에 들은 고구마, 땅속에 묻은 단지속에 김치, 누렇게 삭
혀진 동치미와 고추 등 때에 따라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극심한 가난으로 굶주림에 허덕일 때 언니는 부유한 가정에서 남
부럽지 않게 잘 사는 서로 가정형편은 달랐지만 우리는 서로 의지하며 챙겨주는 친형
제나 다름없이 오고 가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언니가 학교에 입학하러 안가
느냐고 저를 데리러 왔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른 체 "응! 오늘 가는 거야? 난 몰랐는
데”하고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보시는 앞에서 주저앉아 울고불고 하였습니다 어의가
없어서 한동안 엎드려 울다보니 저를 데리러 온 언니가 간 곳 없이 없어지고 학교로 떠
났습니다.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
기를 “형편이 안 되는데 어떻게 학교에 보내느냐?”고 오히려 야단만 치셨습니다. 그리
하여 저는 그렇게 고대했던 학교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 뒤로 식음을 전폐하
고 누워 앓았습니다. 학교에 다니는 모습들이 그리워서 밖으로 나오기도 싫었습니다.
한없이 아버지가 밉고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렇게 나날을 보내다 문득 아버지를 설득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버지를 찾아갔습니다. 짚으로 새끼줄을 꼬는 아버지 앞에 무
릎을 꿇고 “저는 공부하는 것이 소원이에요. 꼭 배우고 싶어요 아버지, 그럼 다음해에
는 꼭 보내주세요?" 하고 말씀드렸더니 “내년에는 별 수 있니? 마찬가지지.” 하시며 호
령을 치셨습니다. “그럼 아버지 저는 눈 뜬 봉사가 되라고요? 왜 저를 낳으셨어요? 낳
지를 말지.” “누가 낳고 싶어 낳았어? 네가 생겼으니깐 낳았지." 하며 말씀하셨습니
다 그 당시 아버지 말씀에 충격 받은 절망 속에서 다른 생각을 모색하였습니다. 이리
저리 생각한 끝에 동네 아저씨를 찾아가 제가 학교에 들어갈 수 있도록 저의 아버지를
설득해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고집이 세서 동네 분들이 학교에 넣어주
라고 청을 드려도 막무가내였습니다 독이 머리끝까지 오른 저는 마지막 승부를 걸고
친구의 아버지인 동네 이장아저씨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아저씨, 저도 친구
랑 학교에 다니고 싶어요. 아버지께서 내년에도 학교에 안 보내주신다고 고집하십니다.
아저씨가 잘 말씀드려서 내년에는 초등학교 1학년에 꼭 다니게 해주세요.” 하고 말씀드
렸더니 그 이후에 저의 아버지와 면담을 하셨답니다. 천지신명이 도와주셨는지 고집 센
저의 아버지께서 내년에 보내도록 노력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날 이장님께서
저를 불러 “순희야 내년에는 학교에 갈 준비 하고 있어." 라고 말씀하셨고 너무 감격
하여 저도 모르게 넙적 절을 했습니다.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온 언니를 찾아가 싱글벙
글 웃으며 “언니, 나 해냈어.” “뭘 해냈다는 거야? 이렇게 좋은날이 또 있을까 기분이
좋네?” “응, 하고 싶어 하던 공부를 하게 되서 아버지가 내년에는 학교엘 넣어주신다
고 하셨어. 이젠 언니 따라 학교에 갈 수 있겠네. 날개가 달렸으면 하늘로 날아갈 것 같
아 좋아 너무 좋아 언니야 이젠 나도 글 쓸 수 있겠네. 글을 배우면 읽을 수도 있고,
그러면 내가 글을 배워서 언니에게 그리운 편지도 쓰고 사랑한다는 글도 쓸게.” 언니는
그 자리에서 정말 기쁘다고 하면서 학교에 들어가면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
라고 하시며 말끝에 너의 도시락은 내가 하나 더 싸 갈 테니깐 동생은 수저만 챙겨서 가
져오라고 하였습니다. 공부도 하고 도시락도 생기고 부잣집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저에게 자리마다 힘든 고비를 탐문하여 책가방속에 든 공부를 할 계기가
닿았습니다. 그 후로 저는 언니한테 의지하며 많은 고난 속에 생활을 유지하며 1단계 관
문을 통과하여 마쳤습니다. 아버지는 몇 년 동안 저를 지켜보시더니 학교를 안 보내려
고 하시던 마음과는 아주 천지차이로 중학교를 넣어 주시려고 많은 애를 쓰셨습니다.
아버지의 변한 마음은 참으로 고마웠지만 그때도 역시 생활이 어려워서 중학교 갈 형편-
이 못 되었습니다. 저는 1단계만 졸업한 것만 해도 아버지, 어머니께 쓸 수 있고 어려운
형편에 가르쳐 주셨다는 게 너무 고마웠습니다. 어느 날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친구의
아버지인 이장님께서 입학원서에 쓸 도장이라면서 새로 새긴 도장을 주셨습니다. 저는
“중학교 안 가요 형편이 안 되서 못 가요.” 하니 "나도 모르겠다. 너의 아버지가 새겨
달라고 부탁하더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편으로는 좋으면서도 걱정이 되었습니
다 '도대체 가진 것도 없는데 아버지는 이상하시네. 무엇으로 등록금을 내시려고 하시
나? 밑에 동생들도 많은데.’ 이런 생각을 하며 집으로 와 저녁식사 자리에서 아버지를
뵙게 되었습니다 “이장님께 도장 부탁하셨어요?” “그래, 너 중학교에 보내려고."
“돈이 있어요? 먹고 살기도 힘든데요. 저 중학교에 안가요 이것으로 만족합니다."
“아니야 내가 힘닿는 데 까진 열심히 뒷받침 할게. 돈 걱정하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
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 죽기야 하겠니? 우선 마당에 말뚝에 매진 소라도 팔아서 등록금
내고 교복 맞추는 거야 너는 준비나 하고 아무 걱정하지 말아." 하시며 이렇게 저에게
잊지 못 할 말씀하셨습니다 부잣집만 중학교에 가는 줄 알았는데 내가 진짜 갈 수 있을
까? 믿어지지 않는 의심 속에서 도장을 갖고 원서를 썼고 일등은 아니지만 좋은 성적으
로 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교복 차림에 가방을 들고 9km가 넘는 거리를 열심히 걸어 다
녔습니다 수업시간이 끝나면 운동장에 나가서 선배언니들과 함께 농구놀이도 하고 피
구놀이도 하며 즐겁게 생활하였습니다. 보람을 느끼며 만족스런 학교생활을 보내던 저
에게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겼습니다. 어머니께서 병으로 눕게 되셨고 이에 가정살림은
저의 몫이 되었습니다. 가사에 종사하며 한자라도 배워보려고 먼 길에 통학을 하니 병
든 어머니와 간호해야 할 병 수발이 너무 벅차고 공부는커녕 제가 죽을 지경이었습니
다. 공부는 나중에 해도 되지만 병드신 어머니는 한번 돌아가시면 다시는 못 뵈기 때문
에 학업을 폐하고 어머니 곁에서 열심히 간호하여 병줄을 놓고 일어나셨습니다. 현재
건강하게 잘 살고 계십니다.
몇 개월 만에 다시 학교에 들어가 배워보려고 생각했지만 진도가 너무 차이가 많이 나
고 제자리에 갈 능력이 없어서 포기를 했습니다. 초등학교처럼 한글을 배우는 것도 아
니고 어려운 영어과목이 있었기에 자진 중퇴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 담임선생님께서
늦은 감은 있어도 나와서 배우면 제자리에 갈 수 있으니까 용기를 갖고 나오라고 하셨지
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자퇴하고 말았습니다. 공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 천지 운명
을 타고 나야 하는 것 같다고 느꼈습니다. 여기까지 오기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나의 공
부가 끝나다니 뼈 속에서 흘러나오는 내 눈물을 통곡한들 저 바다를 메워도 모자를 것
같았습니다. 눈물로 호소하고 신세 한탄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조물주가 이름
을 창조하듯이 너는 거기까지만 배우라고 막을 내린 것 같습니다. 못다 한 공부는 아쉬
웠지만 어머니께서 병석에서 일어나셨기에 기쁘기 한량없었습니다. 여한 없이 명랑한
표정으로 “엄마 공부는 때에 따라 또 할 수 있어요. 걱정하시지 마시고 앞으로 건강이
나 챙기세요. 나보다 못 배운 사람이 얼마나 많은 데요. 그래도 부모님 덕택으로 편지도
쓸 수 있고 대충 글도 읽을 수 있잖습니까? 저 모든 면에 만족합니다. 어머니 마음 편히
가지세요. 매사에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하고 내 자신을 위로 했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생사고락을 보내면서 평생 살아 갈 가정을 찾았습니다. 평범한
가정으로 보금자리를 누리며 가족계획도 위반하면서 아들이 무엇인지 아들을 낳고자 슬
하에 1남 5녀를 두었습니다. 삼신할머니께서 깜박 조르실 때 나는 얼른 아들을 낳았지
요 그 중 1남 2녀는 충북대학교에 입학해서 사범대 의대 수의대를 졸업하여 각자 위
치에서 충실히 근무하고 있습니다. 자식들 교육과정을 마치고 삶에 벅차던 숨을 쉬면서
앞으로 나에게 남은 인생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말년 길에 말 탄 나의 여생을 어떻게 보
내볼까 하고 고심을 하였습니다. 세상 밖을 내다보고 둘러보니 이 나이에 뭘 해볼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몸과 마음을 담은 채 의지하며 살아온 여정을 엮어볼까 생각했죠. 교
육과정에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한길만 보고 살았는데 얼마 남지 않은 내 인
생길이 소중해 보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노년의 생활들을 지켜보고 살펴보
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것보다는 값어치 있게 살아갈 수 있
는 취미생활이 없나 찾아보았습니다. 주위 플랭카드, 신문, 교차로 TV 등을 눈여겨 찾
아보았더니 소신대로 배워보라는 문구가 많았습니다 순간 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때는 이때다. 쓰고 싶던 글을 못 펴내고 이대로 눈을 감나 했는데 기회가 오는구나.'
하지만 내 나이가 너무 많아 그런 자리에 나간다는 것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젊은 사람
들 앞에서 배운 것도 없고 말귀도 어두운지라 자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늘 배우고 싶
어 했던 소재라 용기를 내어 충북대학 평생교육원으로 전화를 걸어 구체적인 사항을 물
어보니 친절하게 호감이 가도록 자세히 설명해주시더군요. 특히 문제가 되는 나이 많고
공부가 부족하여 적응을 잘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는 말에 연세가 일흔 살도 넘은 분
도 있고 오시면 다 하실 수 있다는 말로 제가 배우게끔 독려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자
리에서 입학금을 내고 등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정상적인 학생은 아니지만 일종의 평생교육원 학생이 되어 책가방을 손에 든
노학생이 되었습니다. 늘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고 맴돌며 뼈 속에 싸인 앙금과 상처
들을 죽기 전에 풀리라 굳은 의지로 목표했던 일을 바라볼 수 있기에 용기가 솟아 행복
한 마음으로 등교할 날을 기다렸습니다. 충북대학교 정문을 아무나 넘어 다니며 공부하
는 것이 아닌 줄 알았는데 이 나이에 생각지도 않게 평생교육원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삼
남매가 6년씩 넘고 밟고 다니던 길을 다닌다는 자체가 너무 감미롭고 행복합니다. 저는
가까운 학교 정문 앞에 거주하고 있지만 교육원이 어디에 자리 잡고 있는지 몰랐습니
다. 처음으로 등교하는 날 길을 몰라서 옆에 가는 학생들한테 물어서 꼬불꼬불한 길을
돌아서 오솔길을 찾아 입구에 도착하니 초행인 듯한 저를 젊은 분들이 안내를 잘 해주셨
습니다 교실에 막상 들어서서 보니 연세가 많으신 분에 젊은 아기 엄마들이 자리에 앉
아 있는 것을 보고 잘못 온 게 아닌 가하고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저린 마음에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매우 쑥스러웠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한 자리에 다소곳이 앉아 교수
님의 식순에 의해 수필 창작과에 입학하여 글을 쓸 수 있는 학생이 되었습니다.
한번도 보지 못한 낯설은 늙고 젊은 얼굴들의 학생들의 인사소개로 너무나 행복했습
니다.
2004.19집
첫댓글 평생공부 교실에서 정영자 선생님의 내팔자여 내인생이여를 읽고
아직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는데
선생님들의 삶을 글로 접하며 저절로 고개가 숙여 지고 부끄러워 집니다.
삶 자체로 큰 가르침이 됩니다.
배움이 자랑이고 행복이고 감사 인 것을 두 선생님의 삶을 접하며
다시 한번 깨닫고 저의 게으름을 반성 합니다.
글 올려 주신 교수님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