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질마재의 첫눈
고갯길 저수지아래 선운리의 위뜸이나 새뜸 그리고 아랫뜸 비탈길사이로 고추밭엔 고추가, 복분자밭엔 복분자가, 콩밭엔 콩이, 인삼밭엔 인삼이, 논에는 나락이, 나무에는 새들이, 풀숲에는 들쥐나 고양이가, 고샅에는 술주정뱅이 정수가, 천석꾼 천수가, 홀어미 고잔 댁이, 노총각 천식이가, 홀아비 서영감이 동네 방앗간 집 헛간에서 소요산으로 내리는 눈을 맞는데 …
소요산에 목탁소리, 장수강변에 저어새, 하전갯벌에 바지락, 칠산 바다에 재갈매기, 미당산소에 까마귀, 고추밭 고랑에, 복분자밭 이랑에, 국화꽃밭 언덕길에, 아름이 등교 길에, 서순네 담뱃가게 앞에 오늘 첫차 시내버스에도 눈이 쌓인다.
눈 쌓인 인삼밭에는 농부들이 모닥불을 피우고, 아낙들은 김장이다, 참기름이다, 국화차다, 복분자다, 손자다, 서방님이다 화롯불에 고구마를 굽는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날은 고샅길에 정수가 까마귀목소리로 “리-미럴 내가 해서 안 되는 거 봤어” 몸짓을 하는데, 천식이도 남의 밭두렁 논두렁을 걸을 때마다 “시상 빚이 질 무서운 것이랑게, 리미 돈이 웬수여, 건강이 최고제”라고 '기억하며' 암자의 목탁소리처럼 손바닥을 친다. 더구나 천수도 노랑머리갈매기처럼 어촌 갯벌만 기웃거리는데 고잔 댁은 또 하는 말이 “긍-께 내 눈에 차는 놈이 있어야제”라며 딴짓을 하다가 서당골 물가에 무자치처럼 바지락밭만 찾아 기웃거린다. 뿐만 아니라 오늘도 서영감은 소재지 길 다방에 새로 온 꽃순이에게 갔다가 “아 긍게 이리 와 바아,” “아따 이리 와봐야,” “이리 와 보랑게” 양다리만 오므렸다 폈다 세운다. 그래서 이런 궁상窮狀들이 눈발 맞은 바다에서 잡아 끌어올린 숭어회나 장수강변에서 움켜잡아 올린 풍천장어에다가 국화주나 복분자술 한 잔으로! 질마재 고갯길에 바람 쌩쌩 지나가게, 명사십리 동호 앞바다에 파도 높이 치게 하는가 …
서당골書堂搰
그래도 하늘 천 땅 지로 고삿 안팎에서 어거리풍년이다
천둥벼락에 맞서는 개미 금방에다 밤길 내는 달팽이 사방에다 오솔길 내는 구렁이 칡넝쿨과 등-덩굴에 맞서는 중심 어둠에 올무로 애면글면하는 밝음 녹차 밭에 무싯날로 엿보는 팽나무 보살의 결단에 맞서는 이 처사 개소리와 새소리에 버티는 침묵 파종에 시계바늘인 그 농부 상류를 막 채운 저 갈대숲 갈대숲에서 하류로 용트림 용트림에 지천으로 핀 개망초 개망초만큼 널린 새벽 거미줄 아침거미줄에 걸려 붙은 날벌레 자귀꽃과 백일홍이 피기 전, 때까치 감꽃이 필 때 헛간에서 새끼고양이 감이 떨어질 때 고삿에서 어미고양이 하늘에서 땅이 멀어지면 울그락 땅에서 하늘이 가까워지면 불그락
아직도 내남없이 하늘 천 땅 지에 글 멀미로 서당골 안팎에서 비나리치는데 훈장 댁에 은행나무도 아귀차게 쏘개-질이다
*'서당물 서쪽 계곡상류와 하류의 중간에 미당이 생전 처음으로 사본 땅(돌밭,90평 정도)이 있다고. **이재 황윤석(1729~1791)의 말년에 이곳 서당마을에서 그의 교유권에 있는 사람들과 제자들이 학문을 논의 하였다는 넓고 큰 글 바위가 서당 골의 상류(70m)와 하류의 중간쯤에있다 김준성노인회장. 김갑성질마재권역위원장, 정인석추진위원장, 김정식 질마재청년회장/이기영작가[문학마을의 일주문] 신흥리의 봄*
두텁게 깔린 썩은 나뭇가지 속에서 무채색에 산천을 바꾸는 꿈을 꾸는 두더지가 흙질에 탄력을 키우는 꿈을 꾸는 지렁이가 지층 속에 묻힌 꽃향기와 새소리가 겹치는 신록까지 묻혔을 매장지를 찾아 꿈을 꾸는 곳 제 집 담장 안팎에서 남의 집 살림만 토의 하던 입들이 새끼 깐 짐승은 건들지 말자는 입들이 늘 같은 자리에다 삽질하자는 입들이 한 치도 바꾸면 안 된다는 입들이 이웃들과 의견만 모아서 끄덕 대는 곳 바람이, 짐승들이 들고 난 구멍을 가지런히 생긴 텃밭과 마당과 꽃밭을 더듬거리며 생긴 허공에다가 전답과 냇가와 산들이 생긴 비율로 계절의 붓으로 찬찬히 그려지는 곳 어떤 일도 도전하겠다는 두더지와 지렁이가 있어서 산과 강과 바다와 전답이 서로 맞닿아 있는 곳
<자화상>을 형상화한 [대형자전거] 이기영작가
호 홀로 설수 없는 산
추워지지 않으면
싹트지 못하고 더워지지 않으면 자라지 못하는 산
봉우리는 높아서 뜨겁고 골짜기는 낮아서 추운 산
그래서 산은,
하늘여는 숲으로 뒤척이며 찾아 가는 산 *문학관 뒷산. 방장산, 두승산, 변산의 삼신산의 모산
남출북류하는 <선운 천>과 <선운교> 귀천의 미당국그릇
지월의 홍시
경철의 눈꼽
동진의 나무 고잔댁
해와 달이 도깨비의 흉내로 만개의 소요봉에 천지개벽을 늘리고 오르고 지기 까지는?
땅과 바다도 달과 해처럼 늘린 비, 바람으로 꽃이 피고지기까지 흉내로 본 도무지! 정승 댁
꼭
그 댁
꼭, 꼭...
꼭 그 댁 – 꼭, 꼭...
꼭, 그 댁은
이만 댁인지 저만 댁인지
꼭 그 댁 – 꼭, 꼭
이 소린!
그만 댁에서 나는 소린데
꼭 그 댁 – 꼭, 꼭... 꼭 그 댁 – 꼭, 꼭...
때깔 중 가는 중-오는 중
생부는 막막했으나 생모는 먹먹하였다. 그래서일까 나의 두멧집은 동네북쪽 끝 산자락에 간신히 붙어 있었고, 남출북류하는 용두 천은 나의 굴렁쇠 길처럼 집 앞으로 흘렀다. 그래선지 우리 집은 큰방 한 칸, 작은 방 한 칸, 부엌 한 칸, 헛간이 서로 울력을 하고 있었으나 나는 용두 천을 바라보았다. 그래서인지 집과 산과 세상이 서로 울력을 하고 있는 용두 천에, 언덕위에 내려 앉은 의뭉한 까마귀를 나도 모르게 점점 닮아갔다. 뿐만 아니라 용두 천 둑 나무위로 올라앉은 까마귀를 동네 개들이 끊이지 않는 증오로 컹, 컹, 컹 짖는 날에... 그래 그 날은 나도 막간 날건달들에게 막막하게 얻어맞고 먹먹하게 돌아서서 씻고 또 씻던 곳이었으나 그 웅덩이 속은 알지 못한다. 더구나 나도 짐작만 할 뿐이다. 따라서 나와 까마귀와 웅덩이가 서로 울력을 하면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기를 동전銅錢의 수 만큼 했을 것이다. 요컨데 동전마다에는 그 세월을 적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만 잘 되면 한 일이나, 남의 설렘을 알지 못한 일이나, 내 일로 남의 빚쟁이 만든 일이나, 나를 키운 부모 인생에 울력하지 못한 일이나, 성공을 해보지 못한 일이나, 높고 강한 이에게 곱게 군일이나, 낮고 낮은 곳으로 가보지 못한 일이나 읽어야 할 동전이 아직도 도솔천*에 남아 있을 것이다.
*욕계 육천慾界六天의 넷째 하늘. 미륵보살의 정토淨土 '서건'이가 할아버지 산소에 미당-촌
죽음께서는 만약이라도 땅과 하늘의 시작을 격한 환영으로 불길이 오르듯, 물길이 내리듯 100억 광년-전 일들까지도, 빠짐없이 이성과 감정으로… 생각하시고 그러다가 어둠과 빛으로 다투어 간 아까를 지금 찾기도 하시는가?
질마재권역주차장-안현벽화마을-미당산소(6000평)국화밭과 윤씨선산 그리고 이씨문중선산(이태문 노인회장 그리고 윤만수장로와 정연순권사)미당산소 주차장옆에 12그루의 소나무의 의미와 쉼터-정자 질마재의 국화꽃길
멈추어라 별아 기다려라 달아 거기서라 해야
푸르름도 울긋불긋 오고 울긋불긋 푸르름도 가고
오늘은 11월 11일!
별도 달도 해도
100억송이 황금 알로 품고 100억송이 황금 새로 날고
울긋불긋 푸르름도 가고 푸르름도 울긋불긋 오고
내죽도*
변산과 소요산사이로
호수 같은 바다가 잔잔하다
그 바다에는
고래 등 같은 섬이 솟아 멈칫하다
봄이 오면 그 섬에 먼저 꽃이 핀다.
이 꽃이 필 때쯤이면
변산 짐승은 굶어 죽고
소요산짐승은 얼어 죽는다
섬이 가뭇하다
*미당시문학관과 변산 사이에 있는 섬
담쟁이
큰 더위와 추위로 벽에 오르면
벽의 목과 가슴은 겁내지마라 지게 지고가자 저비린 것 아까워 두지 말고 냅다 끌어 올려 지고가자 101, 천상 푸른 뜰에 불 붙던 태양이 꽃 길을 묻네유
외죽도*
당산나무는 아마도 구백 살, 사람도 이렇게 살 수 있으면 정수리를 하늘에다 두고 생각하는 일이 굉장히 생길 것인가, 구백 살의 나무가 읽는 세월의 책을 읽을 수 있을 것인가, 서러운 건 서러운 대로 설레는 건 설레는 대로 껴안아 품을 수 있을 것인가
바닷가 바위틈으로 파도를 얼마든지 적시어 맞던 당산나무가, 이제는 바다와 하늘을 사이에 두고 서서 섬 바깥을 꼼꼼히 읽고 있다. 지금도 가끔 이 나무 가지가지마다 눈에도 불이 켜지는 걸로 보아서 아마도 멀고 먼 별을 찾고 있나보다
남진계집처럼 원래 듣는 일이 장기이던 이 나무는, 모두가 잠든 밤에 정수리를 하늘에다 두고 새소리를 풀어놓기도 하는데, 아쉽게도 아무도 듣지 못하는 모양이다. 하기에 코 좋고 귀 좋고 눈 좋은 이 나무는 바람의 냄새도 소리도 볼 줄도 아는 눈치꾼이다가 소리 한 자락으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명창이 또 되나보다
그리고 여길 처음 본 꼬마들이 바닷가 조약돌로 알 발로 깔깔거리자 바다가 이걸 보고 생청거리는 것을 당산나무가 다투어 볼 뿐. 그래선지 엊그제 친정어머니도 죽고 올케도 어디론가 가버렸다며 우는 우두망찰한 과수댁의 울음소리와 간밤에 과수댁 새신랑이 용궁으로부터 여기에 왔다간 것 까지도 모르는 체 했다 *내죽도에서 보면 서쪽에 있는 큰 섬 선운사*
민물과 바닷물이 맞닥뜨리는 장수강변에서 백로가 부처의 꽃 미소로, 왼발로 서 있는 것은 붕어를 보면 오른발로 날벼락을 칠랑갑다
천년의 동백꽃이 피면 동박새가 날아들고 그 아래로, 상사화와 꽃무릇이 피는 도솔산에서 부처도 백로에게 천둥번개를 칠랑갑다
*고창군 아산면 선운사로 158-6
갈대!
땅은 더하고
저 수직과 수평이 하늘만 빼고
질마재권역주차장 건너 미당생가마을(진마) 춘 곤 증
산짐승이나 다녀갔을, 들짐승이나 드나들었을, 새들이나 앉았다 날아갔을 나만 아는 나만 다니는 옹달샘 일출에 안개구름까지 깔린 그 어디쯤 산다는 소녀는 꽃밭을 가꾸는 어머니와 탱자나무에 기와집을 가진 아버지의 딸이었는데. 그래서 일손이 모자란 소녀의 집에, 꼭두 새벽에 이 집 담장을 아무도 몰래 넘어온 건너 마을 외딴집 소년은 논밭에 풀을 뽑고, 마당을 쓸고 꽃밭을 가꾸던 어느 날을, 들키지 말아야 할 이 일을 이 집 멍멍이에게 들켜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일로 이집에 감동한 이 소녀는, 아무도 없는 날. 산 너머에 까지 찾아가 멍하니 서성이는 이 소년을 쫓아 불러서 서로 거칠게 풀을 뽑고 꽃밭을 하나, 둘 헤쳐 걷던 날. 장독대 우물가 플라타너스 그늘 아래에서 넘실대는 우물 속 이 우물거울에 비친 네 개의 눈동자로 달아올랐는데, 그런데 이 일로 그만 소년은 우 탕, 탕, 쾅 찌그러지는 깡통 소리에 깜짝 단잠에서 깨어나 버렸습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허망한 오후에 깡통만 찌그러졌습니다.
서생원님!
신흥리와 동출서류하는 선운 천
산 -문필봉- 높은능선따라 백마타는소년 깊은산중으로 청마타는소녀
산 -장군봉- 첩첩산중에서 산울림총각이 태풍에뛰올라 붉새와붉살로
산 -방장산- 심심산골에서 심마니영감이 석등에불붙여 빈대만겨누고
백건우와 윤정희가 2000년 12월 25일날 미당 장례식에!(미당시문학관) 5월 청-산이 꽃불을 켤 때 내님은 외출 중이었다
7월의 풍장 외외한 생 등걸이 그 유래의 구매자로… 무궁불꽃과 무량빗물을 무한천궁과 대천바당에 물결마루로 파도치는가? 그 생 토막 앞에서는 그 유례의 판매자로… 무량빗물과 무궁불꽃을 대천마당과 무한천궁에 파도로 물결마루치는가!
참당암의 연리목
깊고 높은 밤 이 때에 지장보살의 맘으로 외외한 염불에도 들키지 않게 내원 궁 건너 천마봉에서 어린 장단이와 늙은 조화님의 맹세 하늘에서는 봉황새나 그 둥지가 되기 원하고 바다에서는 해룡이나 그 난바다가 되기 원하며 땅에서는 이팝이나 조팝나무로 그 연리근이 되기 원하네 높은 하늘 깊은 바다 넓은 땅 그 수명 있건만 장단이와 조화님의 맹세 그 수명 영원하네 황금의자 오늘도 하늘의 태양 향해 바다, 산 들은 황금의자 들고 붙잡고 태양은 자꾸 뿌리치고 바람, 꽃 구름은 벌, 나비 따라서 보채고 인감도장 혀 뿌리 촉 뿌리 발 뿌리 나무
지나간 시간은 다아 알아서 굽고
다가올 시간은 다아 몰라서 곧다 복수초
'가게'가 그 무엇인가로 돌아온다면 어제와 같은 오늘
'오게'가 저 무엇인가로 찾아간다면 내일과 같은 지금 질경이
이 들, 저 산 그 하늘에 흔들려서 생긴 그 곳에 아니 갖을 이유가 없는 자발적인 그 땅에다가 생겨가는 그 무엇으로 어떤 씨를 골라 뿌릴까? 아무나 밟아도 괜찮은 누구나 가져도 괜찮은 쉬지 않는 멈춤에다가 익숙함을 거부한 꽃으로 그래서 나도 흔들어보고
품앗이로
-질마재의 사람들-
아무튼 북새통이 일출로 밀려 오를 때 별, 별 용심으로 노적가리를 쌓자.
좌우간 북새통이 일몰로 밀려 내릴 때 별, 별 용춤으로 푸른 숲을 가꾸자.
끄느름한 꽃밭 고샅-길에 서슴없이 들어서는 것들아!
인제는
산 몰랭이 바람도 쌩쌩쌩 막 오른 태양도 후끈후끈 때 이른 매미도 맴맴맴맴
하여간, 우리도
바다의 수평선이나 능선에 노가리*처럼 노적가리도 쌓고 푸른 숲도 가꾸자!
* 씨를 흩뿌리어 심는
동살의 꽃*
삼인리의 소녀가 도솔산의 차밭에서 깜냥대는데
도솔천에서 장수강까지 너나없이 그 눈썰미가 선겁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오소리 같은 장수강-갯벌 소년들은 배맨바위위에서 투미하게 타울댄다
*백파율사, 석전박한영, 전봉준, 차경석, 손화중,김성수, 서정주, 등.... 풍천 짱둥어
사랑은 행위에서 온다는 이야기 속에 눈을 감지 않은 짱뚱어가 물속에 사는데 그 물고기 부레에서 쏟아진 들꽃은 아침햇살에 삶아내도 여전히 비리다. 이 산마루마다 그 비린들꽃이 피어서 구름이 머물다 간 그 산봉우리마다 소두락질처럼 바람이 부는데... 이 산 능선마다 맨발로 올라 선 발끝이 낮에는 이마가 뜨거운 돌덩이 밤에는 그 무릎이 추운 흙덩이 그래서 이산보다 높은 등만 있는지! 바다보다 넓은 저가슴만 있는지? 그래선지 이 강물로 눌러 앉힌 강에서 더 깊이 숨을 쉬고 꿈꾸는 것은? 산이 되고 바다가 된다는 것을 터득하고 마뜩한 부레가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사랑은 행위에서 온가요.
용선교 건너 '선운포구'가 '좌치나루'와 맞닿아 보였을 것 선운포구의 추억
나는 꿈꾸듯 당신을 보고 있습니다. 꼬마 영혼 갈무리한 눈빛을 칠보단장한 당신 모습을 그러한 당신이 나를 오라 하여도 나는 갈 수가 없습니다. 선약이 있어서 입니다. 그래도 사실은 당신에게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날마다 당신 생각에 가슴 설레거든요.
철쭉꽃길따라 온 우리 언약에도 나는 갈 수가 없습니다. 낙엽 날리는 외길 숲속에서 나를 기다려도 나는 당신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선약을 지켜야 하니까요. 그렇지만 나는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새벽길따라 떠나간 당신 자리에서 나는 또 당신을 찾아 떠납니다. 언제까지 당신을 향한 결딴이 난바다에서 멈출지 나는 모릅니다. 그래도 나는 선약을 지켜야 합니다. 천마봉에서 본 마애불 -내원궁에서 본 천마봉-
처음부터 숲이었을 저문 길 안팎으로
가시넝쿨, 송악넝쿨, 칡넝쿨 위아래에
백일홍과 달리 굽은 허리 꼿꼿이 세워
억새꽃 같은 바램 허공에 보내는 것은?
바다 속 불가사리 같은 선운천자갈이
왼팔을 앞으로 쳐들면 왼발은 뒤로
오른발이 앞으로 가면 오른 팔은 뒤로
두 팔의 어긋남과 두 발의 어긋남으로
층층나무에 그 숲 사이로 눈이 녹아
뜻밖에 이별 뒤 만남이 있기 때문일까.
하기에 시안 도솔천에 얼음이 풀리듯
솔잎에 동백나무에 조릿대에 태맥이 뛰면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는 꽃 무릇도
오늘 아니면 볼 수 없는 하늘에 별꽃도
굼벵이나 개구리나 두더지나 구렁이가
사방을 밀어 올리는 협력의 손짓으로
깊은 골짜기나 높은 능선 벼랑길에서
더구나 너구리나 텃새 같은 몸짓으로 이미 울퉁불퉁한 검은 바위도시 좌우로
시끌벅적한 그숲이 생겨오기때문일까. [보천교의 차경석]생가와 고려시대의 [연기사의 터]가 있는 연기마을. 그리고 연기제 너머 소요산의 전경 부모님의 심정은 신의 심정
부모님은 열손가락 깨물어 안아픈 손가락이 없듯이 신은 인류의 부모님이시며
부모님은 천하를 준다해도 내 자녀를 원하듯이 신은 인류를 천주와 바꾸지 않으며
부모님은 내 자식이 행복하고 완전하기를 바라듯이 신은 인류를 위해 존재하고
부모님은 결혼하기전 정조를 원하듯이 신의 순결은 사랑과 생명과 혈통과 영혼의 중심이며
부모님은 잘난 자녀보다 불행한 자녀 때문에 근심하듯이 신은 불행한 인간과 민족 때문에 노심초사하시며
부모님은 형제의 다툼을 싫어하시며 신은 인류의 평화를 원하며
부모님은 열 자식을 키워도 그 자식은 한 부모를 모시지 못 하듯이 신은 각 분야에 절대가치를 이루어 조화를 바라며
부모님은 사랑을 중심한 정지의와 진선미를 갖춘 자녀를 원하듯이 신은 참사랑을 중심한 정지의와 진선미를 갖춘 공생, 공영, 공의의 주체자로 역사하시며
"신인지관계-부자지인연" 참 부모
어버이 사랑 나아 이루어 지고
어버이 정성 나아 이루어 지네 연기동 -풍경- 씨-줄의 순간과 날-줄의 시간이 지금에 내려 나무의 종과 넝쿨의 횡으로 동서남북이다가 시간이 순간을 잡고 순간도 시간을 닮는가! 그래서 새가 숲이고 숲이 짐승인가? [2004고창국화축제]의 시작에이석형함평군수님은 찾아오시고, 마산시장님은 [가고파국화축제]에초청해주시고
그리고 나의 천성경이!*
까마득한 날 처음으로 하늘이 열리기 전 노가리@로 왔노라 헝클어진 구름이 싸늘한 달과 별사이로 모든 산맥을 가두어도 푸른빛을 가둘 수 없는 그림자를 둘 수 없는 저 허공에서, 오장육보&에 벼랑길로 들이쉬고 내쉬는 오고가는 바람 속에 흔들림이여 그 바람 속에 꽃 같은 내 영혼이여 새벽빛에 생겨 나와서 어둠 속에 날 가게 놨으면 사랑으로… 정성으로… 천성 산에 보내져야지 천성 궁에 보내져야지 그래 나 여기 가노라 내 안에 와 계시는 참 부모님께 구름 끈으로 둘러맨 ‘천성-경’을 메고 저 싸늘한 우주 속에 들고 나는 끓어오르는 사랑과 가둘 수 없는 분노로 꽃 같은 별님에게 아, 바람이야! 푸름이야!
*이상세계의 진리서 @농부가 씨 뿌리는 &갈등이나 심통 창내제에서 본 방장산, 변산, 두승산의 모산 삼신산 '소요산' 칠산바다*
찾아오면 산 뒤로 줄줄이 숨고 돌아서면 산 뒤에서 줄줄이 일어서는
저 산 때문에!
왔다가 돌아가고 돌아갔다 찾아오는
이 파도 *칠산바다는 원래 육지였으나 지금은 일곱개의 봉우리가 섬으로 있다
창내-골
앗-찔과 처음에 바람이 불어싸면 ‘해보자’를 외치자
제법과 지금에 눈, 비가 내려싸면 ‘괜찮아’를 버리자
숲정이
성이 다른 바위산이 나도 어쩔 수 없다며 묵언 중이라는데… 그 속을 눈치 챈 생채기의 저종들은 제각기, 다투어서 언제 어디서든 무엇으로 어떻게든…
꽃-달래
가-달래 놔-달래 되-달래 롱-달래 막-달래 봐-달래 사-달래 와-달래 진-달래 차-달래 커-달래 타-달래 파-달래 해-달래
방장산 -나무꾼과 소년-
방장산 정상에 솟는 태양보다 일찍 아버지는 지게지고 나가시고 어머니는 물동이를 이고 흐르는 물을 길러 왔는데, 그럴 때마다 나도 동생들보다 일찍 잠에서 깨어나 냇가로 갔다. 그래 이런 날은 팔방천 둑 위에서 새벽하늘에 새들이 날고, 나는 그 새들을 바라보며 산모퉁이 길을 아버지의 뒤를 따라서 걸었다. 하기에 이 길은 산신령님 용왕님 하나님이 생각 날 만큼 낯설기만 하였는데, 이 산길은 여우가 멧돼지가 토끼가 숨어사는 생굴로 통하는 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어머니가 싸준 밥통을 받아 지게에 붙들어 매달고 이 숲길을 숨이 거칠게 올랐다. 그래서 이 날도 아버지는 남루한 옷이 땀에 젖어서 등짝에 가슴팍에 짝 달라붙도록 황금빛 솔잎을 긁어모았는데, 나도 작은 나뭇짐을 시늉해서 아버지의 뒤를 서둘러 따랐다. 더구나 어머니는 한 겨울부터 봄이 올 때까지 황금빛솔잎을 아꼈는데, 방장산은 이때부터 칠산 바다에 봉우리를 높이고 칠산 바다까지도 방장산에 자리를 낮춘다. 어쩌면 이렇게도 이런 날은 방장산의 인공사 미륵사 만물사 상원사에서 생기는 소리로! 새소리 풍경소리 북소리 목탁소리 발자국소리 바람소리…… 미당선산에 관광객과 주민과 문인들을 위한 [미당정자] 거미집
가죽나무 감나무 탱자나무 은행나무가
헛간 똥간 개집을 사이에 두고 흔들리고 있다
거미는 흔들리는 것들 사이에 집을 짓는다.
지금에 거미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허공도 모르게 흔들리는 집을 짓는다.
흔들리는 나뭇가지에서 헛간까지
허공의 거미는 홀로 영토를 넓힌다.
허공에 날개 달린 것들이 날다가
흔들리는 거미줄에 걸린다.
날개도 눈도 없는 나뭇잎들도
덩달아 거미집에 걸린다.
거미줄에 걸린 밤의 새벽 때문에
저 별들도 새벽의 밤으로 좇아가는데
그래서 허공은 별이나 날짐승의 권리로
별이 거미집에 기웃 거리거나
날짐승이 거미의 덫에 걸리면
나무나 꽃들에게 그 흔적이 생기는
따라서 거미는 별의 하늘에
바람만 걸리지 않게, 그 꽃이나 나무들 말고 촘촘히 거미줄을 짜는가 당골네 말씀
아마, 우리는 구만리 전에 삼신할머니 앞에서 두동지게 선택 했으리
높게 살든 지 낮게 살든 지
높게 살려면 태몽대로 고난 길 주어지고 예를 들면 부족할 것 있는 너울파도 팔자 앞에 살고
낮게 살려면 태몽부터 대접이 다른 이를테면 부족할 것 없는 무량불꽃 팔자 앞에 살고
산다는 것은
골짜기로 가든지 기와집에 살든지 멧부리로 가든지
우리는, 막 이 중에 한 길로 가고 있는데 꼭. 그렇게 살아가야 할 것이네
피그말리온@ -본촌 댁-
숲정이에는 아직도 길이 없다 내가 미루나무와 같이 서서 그 너머 새들이 날아 갈 때마다 늙은 본촌 댁은 또 하는 말이 명 타고, 복 타고, 돈이 질이여! 그래서 돈만 있으면 산 호랭이 이빨도 뽑아! 맘대로 모셔와 저 '수미'도! 늙은 할멈의 간절함에 난 결심을 했다. 그리고 걸막을 나섰다. 지금 생각하면 보이는 땅은 넓고 산봉우리는 우두커니 같고 흐르는 강도 깊은 것을 난 지금도 알지 못하는 데 문밖에서 호랭이는 어슬렁거리고 매일 다리를 꼬는, 저 여자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이상형으로 의인화 한 작가
서시序詩
넓어지기 위해 깊어지는 강에서
다니러 오지 않는 꿈 들어와 가지 않는 별 안아 들이지 않는 꽃
이미 보다도 더 깊이 강물로 손짓하며 흐를까,
낮아지기 위해 높아지는 산에서
안아 버리지 않는 꽃 찾어와 지지 않는 별 와서는 가지 않는 꿈
아직 보다도 더 높이 산으로 발짓하며 오를까, 발행인
혁명이 음모다
경사도 7.5에 계절이 쿨룩거린다.
허공은 강도 8.9에 지진 층이다
꽂은 열쇠구멍에서
경고음이 울린다.
유가가 300에서 2000
절대공식에 복부가 터지면서
우-루루 와서 붙인 압류딱지마다
빨강 도장으로 도배를 한다.
자, 디카로 찍겠습니다.
필름은 근거가 될 수 있으니까요
이 부분부터 저 부분까지
정중하게 삭제합니다.
사주社主가 없는 선운리신문엔 기자도 없고 기사가 없다 쑥부쟁이
만약에 불쑥 핀 꽃조차도 빠른 기다림이 아니다 그 역시 하나의 생명이다 그도 한 삶을 시작 해야하고 맨 나중을 두려워하며 하늘마저도 피울 수 없는 어긋나고 별난 꽃을 피운다. 우리도 이것을 알아야 할까? 그래서 그의 꽃향기와 모양이 나에게로와서 제대로 들켰다 그렇다면, 나도 이 땅의 기적인가? 아니면, 품앗이의 고샅 텃밭에서 오히려 세상의 고갱이*가 되는 저 비암같은 넝쿨은 다 무엇인가? 하찮은 벌레도 저와 같아서 간절한 맘으로 별을 노래하고 쑥부쟁이조차도 이와 같아서 여명의 빛처럼 꽃을 피우는가!
*사물의 핵심 문태준시인과 함께(중앙일보 미당문학상시상자)
풀벌레
풀벌레가 풀잎에서 펴진 허릴 다시 웅크리면 풀벌레가 풀잎가운데로 성큼 다가서게 되는데 풀벌레가 풀잎에서 웅크린 허릴 또 다시 펴면 풀벌레가 풀잎 가상 자리로 냉큼 사라진다
풀벌레가 풀잎에서 크지 않게 꿈틀거리는데 아니나 다를까 하루살이도 생 숲에서 맴돈다 풀벌레는 앞산에 초록나무에서부터 뒷산에 갈색나무가 될 때까지 꿈틀, 꿈틀 곁고트는
아, 그러기에
웅크림이 초록색이라면 펴짐은 갈색이 되는 초록색이 땅위라면 갈색은 땅 속이 되는 앞산에 초록나무부터 뒷산에 갈색나무까지 애오라지에 꽃과 나뭇잎이 피었다가 지는
하루살이에 날개 짓으로 하늘은 콩케팥케 그 아래 땅은 앞산과 뒷산으로 뒤돌아보는
구절초
묵정밭이 구절초밭에서 바람이나 구름꽃같이 높고낮게 좌우의 북극에서 풀잎허리까지 낮추어서 꽃이다가. 산자락의 어디쯤에 그 산자락에서 그꽃이 지면 그 누거樓居에 숨어있다가 강둑 풀벌레나 불러들여서 가을하늘 제비보고 윙크하면 남쪽 나라에 그 공주같이 빨간 잠자리로 따라 와서 묵정밭이라도 옛 꽃이 필까?
풀꽃 풀꽃은 별인가?
별은 땅에서 멀-수록 더 빛나고
꽃은 땅에서 가까울수록 이쁘다
별은 풀꽃인가! 전)정원환미당문학관이사장-이어령장관-동국대총장-중앙일보사장-김원건축가-장사익가수 등 봄
풀피리 보리피리 불며 달리던 초원들녘에서
산책나온 부지런한 머슴은,
아지랑이 따라 나선 냉이 낭자를
전)미당문학관이사장 정원환, sbs전옥란작가, 서ㅇㅇ, 동국대윤재웅교수
올 한해
춘 만삭인 텃밭이 태양을 흔들어 깨우고자 한다
하 때 늦은 꽃들이 땡볕을 잡고서 덫을 놓고 있다
추 덫에 걸린 해가 첩첩 산중에서 후덜덜덜거린다
동 능선의 양 끝에 구만리의 난새가* 철새로날고 있다
*상상의 새
김성종추리소설가, 남한산성전보삼만해기념관관장, 아래 전)이석형 함평군수,2004, 마산국화축제위원장
아기가
별똥 같은 버릇을 똑, 딱, 뚝 갖추면서
그 땅에서는 그 똥이 꽃으로 피어요
꽃이 피면
노랗게 하얗게 걸어요 응아를 하다가 쉬 아도 하면서 달릴거예요 개나리
개가
컹, 컹, 컹,
짖는다.
이 개 짖는 소릴 듣고, 저 노 오란 꽃이!
“나리, 나리, 개나리!”라고 부른다.
‘나리, 나리, 개나리!’ ‘나리, 나리, 개나리!’ 황사
벚꽃아래
어린
풀꽃이나
난초나
쑥이나
머루 잎이
다른 표정의 순서가
아기에
배내 짓 웃음 같아서,
하늘에서
참새가
매가
땅에
곡식이나
쥐를
본 순간에
그 비율이 0.618%* 이거나
기울기 23.5도**가
바로
저런 이유인지도 몰라
그래서
아기는
또
나날이
다른 표정으로
해석하는 지
몰라
하기에 천사는
그 해석을
하늘로
우주로
보내는지도
몰라!
*그림 그리기의 비율
**지구의 기울기
시나브로 -본가네 새끼들-
앞으로도 소녀여, 소년이여 봄꽃이여! 달나라에서 웡, 웡, 웡 짖는 강아지여!
항상. 금빛침대에 함께 있지만 이 빛이 한시도 멈추지 않기에 따로 같이 숨을 수 없는 내가
이미, 굳은 언약에도 하나 된 적이 없는 우리가
견인할 수 없는 무게를 도달할 수 없는 거리를 당도할 수 없는 사랑을
아! 분노할 수 없는 발톱으로 부리로 날개 짓으로 황조롱이가 참새를 낚아채듯, 말똥가리도 들쥐를 겨눈다.
그래서 뜬 구름도 하늘에 두둥실, 덩더꿍, 얼-쑤로 비나리치자
어쩌면 그렇게도 해거름의 까마귀가 그루잠의 달을 물어서 서역으로 날아간 후 그때마다. 동쪽에서 저 해도 그 속을 알길 없는 달의 밤을 좇는다.
그때부터 가깝고도 먼 나의 전답에서 넝쿨과 야생화의 강둑에서 풀벌레가 윙윙대면 그때마다. 떡갈나무의 숲정이에 새들이 날아들고 이 순간 내 몸의 얼-짱에도 핏줄이 생겨 얼마나 벌떡대는지
아니, 그렇게 나는 왔다.
아기똥한 뒤태나, 잔다리밟는 들꽃으로! 별나라에서 컹, 컹, 컹 짖는 ‘개나리’로! 전)이학성들꽃학습원원장 작품(도깨비집)고창 서동진 *모양성牟陽城
생성의 연대기 속에 한번은 타올라야 할 원시림의 핏줄로
꼭두새벽부터 창과 쟁기를 손에 들고 등에 지고 파랑새와 황소를 앞에 세우고 날고 걷게 하면서 워, 워, 워 -몰아 나간 머슴아가,
캄캄한 막장의 절망을 살아생전 이룬 성전으로 불꽃 화차에 실어내고
* 고창군 고창읍 모양성로1 탑-풀과 톱꽃
아시다시피 사방에서 얼마나 흔들려야 하나
긴 가 아닌 가 되모시같이 몽상적인 걸태질 줄까 뺏을까 하이에나같이 산봉우리마다 궁-따다 할까 말까 대결 검법같이 줄줄이 고빗사위 올까 갈까 여우비같이 기와집에 없는 돌담길 여기저기 머물 텃새같이 노박이로 구들장 길 이리저리 해맞이 가늠 길로 까막과부에 소원 덮어놓고 왼발과 오른발로 미쳐서 가운데 길 더구나 천수답天水畓건너 두루미 앉는 다랑이 길 뿐만 아니라 곰 같은 몽니로 산마다 민낯 바위 아니나 다를까 용龍등 같은 강둑에 핀 달개비 꽃 그러므로 길 잃은 묵정밭에 새로 핀 민들레 한시바삐 나무가 크는 공기로 숨을 쉬는 버커리 그런데 자지 않고 보지 않는 모르쇠로 옹달샘 그렇기 때문에 설해雪害목의 빈-둥지에게 숫총각 요컨대 갈매기의 날갯짓 시늉으로 바다는 구역질 그래서 기린 같은 생각으로 사방을 좇는 미루나무 이를테면 물개와 같은 사타구니의 상상력으로 도솔천에 다다르지 못한 탱글탱글한 연꽃의 생각과 버드나무연리지의 길라잡이 길로 구성지게 불려가는 벼락 맞은 팽-나무마다 그 아랫도리의 꽃바람이
알거니와 아직도 구들장 길 다랑이 길 해맞이 길 돌담길 용머리 길에서 아따 진짜, 얼쑤 – 덩더꿍 미딩이 평생을 앉아 작품을 쓰시던 의자(미당시문학관)
우산도는 용의 뿔
붉새와 붉살이 오르명 나리명이더니 뚤은물의 무궁불꽃이 용龍의 형체로 수수리목에 솟았다. 그래서 용을 닮은 것이 들명나명이더니 난바다에 너울파도가 높다. 그러기에 너울파도에 무수리바람이 불더니 용의 머리를 닮은 우산도⒤가 오르명 나리명거린다. 그러므로 외외히 서서 벗은 삼봉도⒤엔 가닥가닥 층층별로 넝쿨져서 꽃이 피고, 똬리솔 해송이 자라고, 물개가 물개새끼가 기어오르고, 가닥가닥 층층별로 들고나는 새들의 둥지가 앙코르와트사원⒦에 창문 같다. 뿐만 아니라 갯벌이 없는 우산도엔 갱변이 없고, 거룻배가 없고, 갯땅새가 없고, 숫 바다와 암 바다가 되어 한류와 난류가 만난다. 더구나 뚤은물의 무궁불꽃을 읽을 줄 아는 용은 석근별과 물너울의 책을 읽는다. 그리고 벼룻길에서 보내온 신간도 읽는다
⒤우산도와 삼봉도는 독도의 옛 지명 ⒦캄보디아에 있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꽃-무릇
‘지겠네’가 피겠소에게 아는 척 일찍 갔다가 무슨 일 없소
‘피겠네’가 지겠소에게 모른 척 늦게 왔다가 무슨 일 있소
인터뷰 원고(인텃넷 뉴스편집장 김들풀)
☺매년 이 맘 때(11월)면 온 마을이 노란 국화꽃으로 물들고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 데 ‘질마재국화축제’는 언제부터 시작됐나요. ‘질마재국화축제’는 제가 미당시문학관개관 때부터 질마재마을(진마, 신흥, 서당, 안현)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미당시문학관이 질마재주민이고 질마재주민이 미당시문학관입니다. 서정주선생님을 알고 배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선 모든 회의와 대소사의 일들을 미당시문학관에서 서정태선생님을 모시고 의견을 모아야 합니다라고 설득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회의나 대소사의 일들이 미당시문학관에서 의논되고 그 실천이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2003년 11월 중순경 정우영(한국문화예술진흥위원회부장)시인이 찾아와서 하는 말이 서정주선생님 묘소를 찾아가 뵈니 참 부끄럽습니다. 「국화 옆에서」 시가 있는데 산소관리를 부탁합니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 고창군의원이던 정원환과 그의 부인이 우연히 사무국장을 찾아왔습니다. 여기에서 서정태, 정원환의원 부부, 서동진이 며 칠 전 정우영부장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정원환부부는 저의가 고창군을 위해 국화꽃(「국화 옆에서」)을 심고 책임지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몇 달 후부터 주저 없이 잡목과 쓰레기로 뒤덮은 미당선산(6,000평)에 정원환의 사비로, 그의 지인(들꽃학습원-이학성)에 도움으로, 윤만수(선운교회장로, 윤씨 선산지기)에 배려로, 이태문(안현마을, 이씨문중대표)에 신의로 질마재가 들썩거렸습니다. 전국에 국화꽃축제의 시작이 된 2004년 11월 3일 4,000평 ‘황금빛 국화꽃’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특종으로 시작해서 전국의 사진작가와 관광객이 한 달간 30만 명이나 찾았습니다. 그리고 2005년에는 전년도의 10배인 3만평에, 2006년도에는 전년도의 10배인 고창읍내 석정온천에 30만평에, 그리고 고창군민의 후원으로 질마재에서 고창읍(12㎞)까지 도로 양옆에 국화꽃을 심었습니다.
☺‘미당시문학제’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미당시문학관 사무국장 서○○ 부부는 한국문학관협회회의에서 위 사실을 발표한 바, 모두로부터 한국문화예술진흥위원회에 『미당시문학제』 공모사업에 응모 권고를 받았습니다. 위 사실을 고창문인협회회 진기동회장께 말씀드렸고, 진기동회장은 정일묵, 표순복, 신미수 등과 함께 사방으로 『미당문학제』 준비했습니다. 『미당문학제』는 동국대 윤재웅, 중앙일보 이경철, 미당시문학관 정원환이사장, 진기동, 서동진, 신미수, 질마재마을 주민들이 서정태선생님을 모시고 준비(진흥위원회공모기금, 1,800만원, 현금-현물모금 3,000만원, 복분자술 50병, 고구마 50박스, 계란 100박스 등)하였습니다. 2005년 11월 3일 『미당문학제』는 황금빛 국화꽃과 함께 질마재에 가득했다. 이날 『미당문학제』에 참여한 인사로는 중앙일보사장, 동국대총장, 이어령장관, 신경림시인, 황동규교수, 김재홍교수, 이근배시인, 장사익가수, 김남곤전북일보사장, 송하선교수, 이상인시인, 정주환수필가, 전원범교수, 진동규시인, 김해동사장, 이기영작가, 이남호교수, 전옥란작가, 서지월시인, 민용태교수 부부 등이 참석했다. 이날 질마재주민들은 자기들이 가져온 계란과 고구마와 복분자와 부녀회에서 손수 만든 마을음식들로 손님들을 대접하고 지역 특산품을 선물하였습니다.
☺먼저 미당 시문학과 건립 동기는 어떻게 추진됐나요?
국내 최초로 민선지자체에서 개관한 미당시문학관은 한국 현대 시사에서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 1915~2000)의 위치는 확고하여서. 후학 시인 고은은 「서정주 시대의 보고」라는 글에서 “서정주는 하나의 정부(政府)”라고 말한 바 있고, 어떤 이는 서정주를 “살아 있는 시신(詩神)”이라고 하여서, 신라의 국선도와 불교의 윤회전생, 그리고 민간에 떠도는 온갖 설화를 에두르는 그의 시적 방황 또는 정신사적 편력은 한국인의 심상과 우주에 떠올라 있는 역사의 총체, 생사관, 이승과 저승을 한데 아울러서. 그래서 초, 중, 고, 대학교에서 그의 작품을 배우고 연구하였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그의 고향집(선운리)으로 학생, 교수, 기자 등이 찾아왔어요.
그 당시(1995) 우리나라 민선정부가 시작되면서 지자체에서는 민심의 수요와 공급을 찾는 데 군력을 힘을 모으던 차에, 서정주의 생가(선운리)가 폐가인 점이 찾는 이마다 안타까워했습니다. 이것이 전국에 소문이 나면서 생가복원과 미당시문학관으로 건축하자는 여론이 그 때에 앞서갔던 것 갔던 것 같아요. 그래서 고창군수(이호종)는 생가복원을 하여서 서정태(미당아우, 귀촌)옹이 그 집에서 거주하면서 서정주의 문학을 선양하기를 바랬고요. 그리고 김원(광장-건축환경연구소)교수에게 미당시문학관 설계를 1998년에 의뢰했어요.
이때에 광장-건축환경연구소에서는 미당생가에서 외가 쪽 길가 안(70~80m)까지 거리에 지하터널을 만들어서 미당시문학관을 만들자는 설계(398억)를 제출하였고. 이에 미당시문학관건축은 이호종군수의 민선초기의 군정에 사정(군비)과 김원교수가 생각하는 미당서정주시인의 아우라(예술작품에서 흉내낼 수 없는 고고한 분위기)에 충돌 같았습니다. 이호종군수는 선운리에서 주민, 교수, 향토사학자들과 최선의 방법을 찾던 차에, 문득 서정태옹으로부터 귀에 번뜩이는 제안을 듣게 됩니다. “지금 이 앞에 선운분교(3,000평)가 폐교 상태입니다. 이 선운분교를 활용하면 환경문제와 제정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 같네요.” 그래서 이 기쁜 소식을 남현동 서정주선생님께 의논 차, 서정태, 이호종, 김원, 김준형(부안면 군의원)이 찾아 갔는데, 서정주선생님은 “문학관은 나 죽거든 짓든지 말든지 해라.”하고 문전박대를 합니다. 이 환경을 가지고 김원교수가 새로운 설계로 제안을 하였는데, 선운분교(폐교)는 낡았고 미당시문학관 설계는 새로워서 건축이 어려웠어요. 그리고 건축비용(성금 1억, 국비 3억, 군비 3억)마저 빠듯하였는데, 민족문제연구소, 태평양유족회 등은 연일 친일문제와 전두환 찬양을 문제 삼고. 다시 말하면 국내 최초로 지어진 미당시문학관과 생가 복원은 3~4년에 우여곡절 끝에 2001년 11월 3일에 개관합니다. 이는 미당의 중앙고보 재학시절 광주학생의거 지원시위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정해진 날이죠.
☺문학관과 관련된 친일 논쟁에 대한 얘기를 해 달라.
미당시문학관이 개관 때부터 온라인과 사이버상에서 고창군수(이강수)와 미당시문학관, 그리고 관계된 곳을 찾아다니며, “공부도 않고 신문도 안보는 무식한 것들이, 혈세로 친일분자를 선양하다니”를 구호로 태평양유족회와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등이 무리지어 다녔다. 이에 서◌◌ 미당시문학관 사무국장은 문학관 개관 때부터 태평양유족회는 일본의 정책 「대동아공영권(대동아공영권은 '아시아민족 끼리 같이 번영할 권리'-유럽세력을 일본이 몰아내고 보호 해준다는 뜻)」에 참여한(유족의 주장은 300만을 강제로 징발했다고 하나 일본의 전쟁 승리를 위해 의무와 영광을 위해 참여했다고 서◌◌은 주장) 전범에 후예이니 자 민족을 심판할 권리가 없다라고 주장하였고, 민족문제연구소에게는 ‘죄’는 연대 죄와 자범 죄로 구분할 줄(모든 주장이 태평양유족회 같음)알라며 옥신각신 세월이 흘렀다.
☺미당의 친일시는 언제부터인가 문학관에 걸려 있다.
‘미당의 친일시 달기’는 국화축제(2004)와 미당시문학제(2005) 때부터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유족회측이 줄기차게 요구해온 바, 그 당시 미당시문학관 박우영 이사장과 김정웅이사 등이 협의 하였다고 들었다. 미당의 친일시를 미당문학관에 벽(관람하기 좋은 자리)에 게첨하는 날(2004년 11월)은 미당문학관측에서 박○○, 김○○ 등이 참여하였고, 상대 쪽에서는 손○◌, 오◌◌, 이◌◌ 등이 참여해서 서로 간에 협의하였다.
☺미당 서정주를 개인적으로 설명 한다면?
나는 개인적으로 미당서정주는 특별한 애국지사(김구, 김좌진 등외)는 아니지만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서는 부모님을 위해서 일본 동경대 법대의 꿈도 꿨고, 주변의 불의를 보면 행동도 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중앙고보(광주학생 독립운동)사건, 그 이듬해 고창고보 자퇴(독립운동/불온자, 퇴학권고)사건, 매번 만주로 독립운동하기 위해 가출사건, 보다 나은 효도를 위해 스승을 찾고 친구를 찾아 공부도 하지요. 그래서 주변의 도움으로 『화사집』(1940) 발표 후에 박한영대종사, 만해한용운선생, 조선일보사장, 동아일보사장 등 우리 민족진영의 지사들로부터 최고의 인품과 시인이란 칭찬을 받게 된 미당서정주는 조선일보( 폐간시), 김좌진전기, 이승만전기 등은 그 분들의 부탁에 의해 쓰게 됩니다. 이 후 미당은 한시도 게으르지(식민지, 분단, 전쟁, 가난을 극복) 않아서 모두로부터 배우고자하고 부탁받는 시인이 됩니다.
☺개인적으로 미당 서정주의 시를 하나 소개한다면? *아버지의 밥숟갈 아버지가 들고 계시던 저녁 밥상머리에서 나를 보시자 떨구시던 그 밥숟갈 정그렁 소리내며 떨어지던 밥숟갈 광주학생사건 2차년도 주모로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감옥에 끌려간 내가 해 어름에 돌아와 업드려 절을 하자 저절로 떨어져내리던 아버지의 밥숟갈 `````그래서 나는 또 아버지가 끼니밥도 제대로는 못 먹게하는 대불효의 자격을 또하나 얻었다.
☺‘광주학생사건과 고창고보자퇴(퇴학권고)의 사상배경은 어떻게 설명해야 되나요?
<일본제국의 식민지 노예교육을 반대한다! 우리 조선독립만세>의 배경은 제국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로 레닌의 『러시아 혁명의 거울로서의 레오 톨스토이』와 일본인 사회주의자 누군가의 『제이빈핍물어』, 자본주의의 『가다꾸리니』, 『아메리카 기행』 등 다양한 전문서적이 다양한 이론과 행동으로 자리를 잡아간 것 같습니다.
위와 같은 사상적 배경과 조선일보 ˂폐간시˃행진곡이 독립운동 연극 ‘시나리오‘로 암암리에 활성화되자 1944년 고창경찰서에 투옥이 됩니다.
☺동아일보의 사회부장과 문화부장(1946년), 그리고 대한민국 서기관(문교부 초대 예술과장, 3급, 1948년)에 합격하고도 그만 둔 이유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미당은 천재였지만 정신적환경(1915~2000)은 항상 어려웠다고 생각합니다. 미당(未堂)의 뜻은 본인은 집터도 안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더듬더듬 조심조심 사셨다고(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 생각해요.
☺개인적으로 1900년대 일본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청일전쟁, 러일전쟁, 미국 진주만공격 등 가히 일본은 세계 최고의 힘을 가진 아시아의 일등 국가였다고 생각합니다.
☺‘을사늑약’과 ‘한일합방’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변명할 여지가 없다. 우리(한민족)의 잘못이다. 일본은 탓할 이유가 없다. 모든 생명체는 생겨나면서부터 ‘약육강식’의 생태계가 존재한다. 일본국민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해서 국력을 키운다면, 우리도 그에 못지않게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을사늑약’에서 해방 때까지 우리 한민족의 백성들은 그 ‘삶’과 ‘심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기업’으로 말하면 기업경영진이 바뀐 것이 아닌가? 우리 편이 아닌 저 편이 와서 기업을 활성화 시키는 것이다. 이 회사 직원과 가족들은 다양한(각 분야) 방법으로 이 전의 〈기업주권〉을 위해 희망하고 살았을 것이다. 손은 안으로 굽는 것 아닌가! 이때에 살았던 모든 분들에게 아픔을 전하고 싶다.
☺태평양전쟁유족회와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과 논쟁도 대단했다. 돌이켜 생각한다면 바뀐 것은 없는가?
태평양전쟁유족회와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은 온라인과 사이버상에서 “공부도 않고 신문도 안보는 무식한 것들이, 혈세로 친일분자를 선양하다니”라는 구호로 미당시문학관과 고창군수에게, 사이버상에서 더욱 극렬하였다, 그러던 차에 사이버상에서 본인신분을 이렇게 밝히고 있었다. 나는 돌○○로서 고려대 학사, 석사를 마친 현직교사이다. 고창군청공무원 〷새끼들은 신문도 텔레비전도 안보니까 혈세로 〷들을 하지! 쓰고 있었다. 그래서 서○○은 「대동아공영권」(일본에는 자신들이 또 다른 유럽이라는 기묘한 사상으로, 그 원류로서 유럽사가 있고 원류의 원류로서 로마제국이 있는데 그 로마가 붕괴된 후 되살리려 했던 게 르네상스이고, 그걸 이어받아 크게 발전시킨 것이 대영제국, 그 영향을 받은 게 일본이라는 생각이다.)은 일본과 조선은 동등한 일선동조론에 근거해서, 권리와 영광을 함께하는 차원에서, 일본의 정치적 활동에 징용이든 보급이든 일본신민으로서(태평양전쟁유족회의 조상) 참여한 매국노후손들이 마치 대한민국애국자인 것처럼 행동하지마라! 이 후 댓글은 없었고, 그 당시 고창군청 미당시문학관 담당 팀장님(이○○)과 교육청 장학사(박○○) 께서는 미당선생님 제자들이 그리 많은데, 사무국장님께서 큰 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이버상’에서는 위와 같은 댓글은 없습니다.
☺끝으로 ‘질마재권역’과 ‘미당시문학관’의 콘텐츠가 대단하다. 앞으로 어떤 게획을 가지고 있는가?
질마재권역의 콘텐츠는사리안마을(진마, 신흥, 서당, 안현)에서는 각 마을별로 그 동안 공부하고 실천한 내용을 가지고, 국화벽화체험마을, 맛 체험마을, 마을 가꾸기마을, 미당선생님의 『질마재 신화』를 읽고 각 마을의 정체성을 찾아서 『질마재권역』 마을 사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고창군청에서는 현재 『고인돌 박물관』과 『질마재권역』에 각종 국화꽃을 키워서 축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미당시문학관의 콘텐츠는2015년 2월 7일 고창부안축협 참예 우한우명가에서 〖미당문학회〗 창립총회를 열고, 『미당문학』 창간호를 발표하는 등 ‘미당정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 창간호에서 ‘미당문학회’ 김동수회장은 ‘문학의 본질은 우리의 사회적 편견과 독선에 맞서, 인간 본연의 존엄과 자유를 향한 끝이 없는 사랑과 연민에 있다고 본다. 이러한 인간적 지향이야말로 문학의 자율성과 심미적 고양의 세계가 아닌가 한다. 미당이 일찍이 《시인부락》(1941) 창간호에서 언급한, 우리는 한 정신의 편향을 바라지 않고, 여러 지향을 합해 하나의 심포니를 만들어 보려한다는 창간사를 떠올린다. 《미당문학》도 그러한 마음으로 우리의 영혼을 되살리고 대립과 분열을 화쟁(和諍)으로 이끌어 가면서 한국문학에 또 하나의 정신세계를 열고자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앞으로도 질마재주민과 고창군이 지금처럼 노력하리라 믿습니다. (2017년 11월/고창사람들 자유계시판)
귀한손 17.11.04. ┗ 귀한손 17.11.05.
미당 서정주!
국화 옆에서 라는 시가 왜 일본 황실을 찬양을 한 시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뿐더러, 사실 냉혹하게 생각을 해보고 평가를 해보자면 미당은 친일파는 아니지 않습니까? 친일파입니까? ??? 자신의 과거 행적 지우고, 그러고선 미화시키고 왜곡시키는 자들이 판치는 세상, ... 허나 미당님은 친일 발언을 하였노라 스스로 고백을 하신 분이십니다. ... 그외 그분이 친일한 행적은 없슴. 장택상 같은 정말 악질 친일파들은 냅두고 애먼 서정주님만 잡는 고창양반들님이 있으시던데 놀랄 놀짜입니다. ... 외부 다른 국민들은 고창분네님들만큼 서정주는 친일파다 하고 입에 거품무는 국민들 별로 거의 없어요. 없습니다 휘바람 17.11.05.
내자식은 영식 영애고, 남자식은 개똥 또순이고,
내집돼지는 돈사에서크고 남집돼지는 돼지굴에서 크고 나는 사랑하고 남은불륜하고, 하는 이런편협함과 단견을 우리 고창선조들은 후손들께 가르치지 안으셨죠! 제가배운 훈육으로는?저희선조들은 상추밭에 똥누는 개가되지 말라는 교육을주셨죠ㆍ 미당이 고창인으로 문학이 뛰어나다고 그큰 과오를 덮지 마세요ㆍ미당은 필설로 일본에 개짓했습니다ㆍ 내집식구를 감싸기보다 부꾸럼을 감출줄도 압시다! 귀한손 17.11
오늘 미당문학제 방문했어요. 도착하니 가수가 무대에 올라서서 노래부르드라구요. 송창식의 노래 푸르른 날, 하늘은 푸르르고 날은 청아하니 약간 춥기도 한데 날이 굉장히 맑고 그러한데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하는 미당님 시가 노래로 음율로 울려퍼지니 눈물이 나더이다. 문학관 안을 둘러보고 문학관 3층에 올라가니 미당님 친일시 전시가 되어 있더라구요. 놀랐습니다. 거기 머물 시간은 한정되어 있어서 깊이 있게 못 들여다 보았는데 저걸 어떻게 친일시라 전시를 했는지, 그러다가 문학관의 커다란 배포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미당님이 당신을 두고 친일파다 하는 말에 대해 말씀을 하시었던데 미당님은
┗ 귀한손 17.11
친일을 한 기억이 없노라 하셨드라구요 그러면서 그렇다면 종천친일파쯤이 되겠다 하고요. ...
내부 올라가는 계단을 수리를 한 모양이에요. 문학관을 나와서 미당 묘소까지 둘러보았네요. 거기 문학관 방문을 했을 때, 50-60대쯤 된 청주여고 동창들이 20여명쯤 와서 문학관 앞 무대를 접수를 하고 놀던데, 여고시절로 돌아간 소녀들 같았어요. 문학제를 빛내주고 그러는 장면에 부러웠고 눈물이 나드라구요. ... 호명護明 17.11
경남 합천에 가면 황강이 있고 강가 숲과 강모래가 아름답게 펼처져있습니다.
2000년에 공원을 만들어 새천년공원이라 이름 했다가 일해공원으로 고쳤습니다. 그때 한참 이름에 대한 시비가 있었는데 합천군에서 일해공원으로 고집하여 그렇게 정해졌습니다. 일해는 전두환의 호입니다. 그리고 합천군 출신으로 그들은 애지중지 전두환을 옹호하며 칭송하고 그들의 자랑스러운 인물로 삼습니다. 그런데 공원시비가 있을 때 합천 농산물 불매운동을 했고 합천군에 대한 이미지가 떨어지고 한편 멸시를 하기도 했습니다. 서정주는 전두환이 5.18 항쟁을 유발하여 반역의 역사를 만든 장본인을 칭송하여 1987.1.18일 56회 생일에 송시를 바쳤지요. 호명護明 17.11
그리고 1981년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 tv에 출연하여 찬조연설을 했습니다.
그의 친일의 역사와 이승만 독재자를 옹호하고 전기를 써서 칭송한 행적은 지울 수 없는 사실이기에 사실을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기록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전국 도서관이나 학교에 비치된 친일인명사전 2권. 267~271P (민족문제연구소 간. 2009년 )을 한 번 열람해 보세요. 사료에 근거한 사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정주문학관에 전시된 친일 시5편도 의식있는 분들의 강력한 주장의 결과이지 문학관 측이나 고창군의 자발적 의지는 아님을 밝힙니다. 참고로 친일문학자를 기리는 문학상에 대한 비판도 거세고 중앙일보사에서 재정한 서정주문학상 호명護明 17.1
(상금 3000만원) 2017년 후보였던 송경동시인은 단호하게 거절하했습니다. 합천 군민과 같이 우리고장 인물이란 이유 만으로 무조건 칭송하고 옹호할 일은 아님니다. 보다 냉철한 의식을 갖고 부끄럽지 않게 역사를 가꾸며 고창을 발전시켜야 하겠지요. 저도 생각 없이 중고등학교를 고창에서 다니며 우리 고장의 빛나는 시인이라고 칭송하며 자랑했던 서정주 시인을 지금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휘바람 17.11.
호명님은 고창중 고 졸업하시고 영남지방서 30 여년 공립고등학교 봉직 교감 정년퇴직 하신 저희 선배님이시고 작고하신 항농님과 동기분이십니다ㆍ
귀한손 17.11.
... 일본의 “욱일승천지세 밑에서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로 체념하면서 살아간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강변했던 것이다. ‘하늘뜻에 따라 일제에 순응했다’는 <- 올려진 글에 있는 내용입니다. 이분이 친일발언을 했다고 인정을 했잖아요. 허나 이분이 친일파입니까? 친일파는 아니에요. 자기변명이다 하고 비난들을 하고 비난을 받지만 친일파는 아닙니다. 그리고 또한 글 내용을 주욱 읽어내려오니, 일제시절 이분 나이대는 30대, 이광수처럼 거물 문학인도 아니어서 이분의 그런저런 내용들이 사회에 영향을 미쳤으면 얼마나 미쳤겠습니까? ???? 아니그러합니까? 그리고 올려진 글을 보건데 문예지 편집인 자격으로 글을 실은 부분 중 ┗ 귀한손 17 그런 부분만 잘라 가지고 비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요, 이부분, 문예지 편집인이라는 부분에 주목을 해서 내용을 접하면, 80년대 언론 검열 심했다는 것, 당시 일제 검열 또한 더 심했겠지요. ... 내가 여기에, 즉 그 부분에 개입할 사항은 아니어서, 그리고 또 내 생각을 달면 긴 사설이 될 것이고, 또 누군가 끼어들어서 엉뚱한 곳으로 불똥 튈 것이고, 그리고 사설이 사설이 아닌 쓸데없는 사족이 될 수도 있으므로, 생략을 합니다. 문학인으로서 작품을 쓴 것을 음미했을 때, 친일 숭배까지는 아닙니다. ... 마지막, 이분 젊은시절 학생운동 참여해서 방황을 많이 하셨네요. 이 부분은 왜 수면아래로 가라앉는지, ... 이상입니다. 사족....친일파이니..
친미파이니...친러파이니 친중파 이니... 누가 만들어 낸 말 일까요. 어쩔수 없는 4대 강국 사이에서 험한 세월을 사신 분들의 몫.... 이완용후손들의 제 땅 찾기도 벌어지고 있는판에..참.. 고창은 미당 부안은 석정 이름만 들어도 멋진 분들.. 전부 다 가 아니라 일부분을 가지고 고향에서 까지 허물을 들춰 내는것은 안타까운 일 이 아닐런지.. 호명護明 17.11.
그를 시성이라고 합니다.
문학인은 글로써 모든 걸 말합니다. 그 시대 애국자와 친일파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합니다. 나는 한때 그러했기 때문에 나는 이럴게 살겠다 참회하며 평생을 그렇게 사신분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청산되지 않은 역사였기에 계속 이승만독재자를 칭송하고 추앙하는 제자들의 존경과 전두환 헌시로 꽃길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친일인명사전에 5P에 달하는 친일의 삶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지식으로 요약해보면 땅바닥에서 기는 사람이
하늘의 옥황상제께 올리는 최고의 딸랑딸랑 상소문 이네요 ㅎ 요즘 회자되는 레밍이네요 귀한손 17.11.
먼저 다시 밝힙니다. 제가 미당님의 친일 발언 부분을 부정을 한 것은 아닙니다. 또한 미당님도 그 부분을 인정을 하셨어요. 이것을 자꾸 다르게 보시는 듯 보입니다. 이광수처럼 미당께서 당시 문학으로 그 당시 사회를 이끄는 지위에 있지 않으셨음을 감안을 하신다면 충분히 그 부분은 비판적 수용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시 어느 시를 보아도 친일파다 하고 주홍글씨 매길 정도의 시는 없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을 했습니다. 여기 물론 국문학 공부 그 이상으로 하신 분들 많으시겠지만 제가 이렇게 제 전공까지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 시인을 분석비판하려면 국문학비평이론서를 가지고 분석 비판을 해야 맞습니신고
┗ 귀한손 17.11.08. 18:41
예컨데 국화옆에서라는 시를 분석하고 비평을 하려거든 거기에 맞는 비평이론서가 있습니다. 구조주의분석이라든지, 신화비평서라든지 거기에 대입을 해서 비평을 해야 해요. 그러지 않고, 이상하게 미당님 시를 문학비평서가 아닌, 예컨데요, 국화옆에서를 짖찧은 글을 열어 읽어보니, 하아, 국화와 칼이라는, 그것은 역사 이론서도 아니고 그것은 역사 이론서도 아니고 미국무성에서 일본인들의 성향을 조사분석한 보고서인데, 보고서가 너무도 잘 정리가 되어 있고, 일본인들의 특성을 정확하게 분석이 되어서 그것이 그대로 책을 발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서 시를 분석을 하다니요. 첫쨰 분개치 않을 수 없습니다. 문학 한 편이
┗ 귀한손 17.11.08. 18:49
만들기 쉬운 줄 아십니까? 미당님은 시인이십니다. 미당님 시를 분석을 하려거든 문학비평이론서를 가지고서 분석을 해야 맞습니다. 국화와 칼 이런 것으로 분석을 하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것이고요 옳지 않습니다. 또한 국화가 일본황실의 국화이지만, 국화는 예로부터 우리 선조분들께서 매란국죽, 사군자의 하나로 칭송을 하고 즐겨 시서화의 소재로 사용을 했던 것입니다. 이부분을 제가 약 15년 전에 어떤 카페에서 이 문제가 대두가 되어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요, 제 댓글이 참작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후일 어느 문인께서 문인협회 내부에서 국화 옆에서의 국화는 일본 황실을 찬양한 시가 아님이라고 의견을 모았다는 그런 내용을
┗ 귀한손 17.11.08. 18:48
문인협회 내부에서 국화 옆에서의 국화는 일본 황실을 찬양한 시가 아님이라고 의견을 모았다는 그런 내용을 접했었습니다. 문학인들 내부에서는, 물론 저는 들은 내용이니까 아닐 수도 있지만, 이렇게 정리가 되었는데 계속 국화옆에서를 가지고 혹자들이 입에 친일시입네 하고 씹고 다니드라구요. 절대 국화옆에서는 일본황실 찬양아닙니다. 일본 패망은 1945년이요, 국화옆에서 발표년도는 1948년도입니다. 45년도에 패망을 한 일본을 48년도에 찬양을 한단 말인가요? 이러저러한 이유로 문인협회에서는 그렇게 의견을 모았답니다. 물론 저는 확인을 못했습니다만, ... 미당의 시는 친일시가 없습니다.
┗ 귀한손 17.11.08. 20:56
들어오자마자, 열어 읽어보곤, 마치 즉문즉설처럼 댓글을 1초의 생각 가다듬지도 않고 적어나가면서 사이사이 수정하고 끼워넣고 했더니 댓글이 이상해져 있네요.
요약을 하면, 1)국화 옆에서의 국화는 우리 선조들께서 매란국죽,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이 네 식물을 사군자라 칭하고 시(詩),서(書),화(畵)의 소재로 즐겨하셨던 식물이다. 미당님 시 국화 옆에서는 절대로 일본 황실을 찬양을 한 것이 아니다. 2)일본 패망은 1945년도요, 국화 옆에서 발표년도는 1948년도 11월이다. 패망한 국가를 찬양을 할 이유가 없다. 3)미당은 시인이요 문학인이다. 그의 작품을 분석을 하려거든, 문학분석비평이론서를 가지고 분석비평평가를 하라. 귀한손 17.11.08. 22:20
송정오장 송가를 다시 들어가서 읽었습니다. 나라 잃은 백성이 뭐 특공대원인지로 활동을 하는데, 국가 있고 임금이 있다면 당연 임금님이 치하위로격려하실 터인데 나라 잃은 동포에게 미당님은 총대를 대신 매고 위로를 하고 있습니다. 송정오장인가 성씨가 인씨였던 모양인데요 이 인씨를 위로하는 시로 저는 읽혀집니다. 일본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고요. 다른 시나 등등 부분들도 일본을 찬양을 하는 것이 아니고 당사자를 위로하는 시들로 읽혀집니다. 민족문제연구소도 이 부분을 검토를 하셔야 할 듯요. 더불어서 태평양 유족회 되시는 분들도 다른 시선으로 검토를 해보시면 어떠실런지요. 돌 맞기 싫지만 던지시면 맞겠습니다만,
┗ 귀한손 17.11.08. 22:21
미당님이 같은 백성 동포에게 태평양전쟁에 참여하라 종용한, 즉 일본찬양을 하려 지은 시로는 안 보이고요, 나라 잃고 지도자 없는 백성 대신해서 위로 격려한 시다 하시고 보시면, ... 그렇게 보입니다. ...
이하 다른 부분도 딱 고 부분만 잘려져 올려져 있으니 뭐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할지, 저기 아래 글에도 제 생각을 적어뒀지만요, 덧붙이자면, 요즘도 문예지 그 누가 관심이 있어서 읽어보는 이 없거든요. 거의 없습니다. 하물며 당시에는 오죽하리요. 0,001% 정도나 사회에 영향을 미쳤을까, ... 편집인 입장에서 지면 채우는데 사회 상황이 태평양전쟁 상황이니, 어쩔 수 없이 지면을 채우지 않을 수 없었지 않았을까 싶네요. ... ┗ 귀한손 17.11.08. 22:22
참고로 다시 적지만, 저는 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을 했습니다. 2005년도에 수필 등단, 2006년도에 소설 등단을 한 작가입니다. 대학까지 나온 지식인 입장에서와, 문학인 입장에서와, 그리고 내 고향 고창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댓글을 적었습니다. 댓글을 갑작스럽게 적어서 매끄럽지는 않지만 댓글을 읽으시고, 더는 미당님에 대한 친일운운 거세지 말아 달라, 고 한다면 지나친 걸까요? ...
┗ 귀한손 17.11.08. 22:23
이상은 제가 미당님의 친일 부분에 대해서 좀 가혹하다 여겨져서 제 짧은 견해을 말씀드린 것입나다. 그리고 80년대 전두환 칭송 부분은 제가 건드리지도 않았습니다만, 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는 가타부타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만, 호명님께서 급기야 전두환 칭송한 시를 올리셨는데 제 닉네임이 또 제목으로 걸려져서 불가분 어쩔 수 없이 제 생각을 적어보겠습니다. 이후 더는 어떤 글이나 이의를 제기하는 댓글 등등에 응하지 않겠습니다. ... ...
귀한손 17.11.08. 22:25
다음 문제의 전두환 송시건에 대해서 제 생각을 적겠습니다. 먼저, 전두환을 전두환 전대통령 이렇게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붙이면 절대로 안됩니다. 직함을 박탈당했습니다. 그러니까 전두환 이렇게만 적어야 법적으로 맞는 것입니다. 그 누군가 또 전두환이 니 또래냐 하고 시비를 걸 것 같은 트라우마가 있어서 적어 둡니다. ... ...
귀한손 17.11.08. 22:09
80년도 서울의 봄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봄은 봄이로되 안개가 낀 봄이었습죠.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거리에는 최루가스 자욱한 5월 어느날, 저는 종로에서 광화문을 걷다가 동아일보사 앞 근처에서 바닥에 뿌려진 종이들을 보고, 그 중 한 장을 집어 읽었습니다. ... 5,18 광주사태(광주사태 알리는 내용. 저는 이날 광주 사태를 호외를 통해서 접했습니다.만 다른 애들에게 말을 해주면 되려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았습니다. ...) 호외였어요 동아일보사 발행 호외, ...
세월이 흘러서 정확지 않아서 대략 적습니다. 대학교 휴교령, 김옥길인가 당시 문교부 장관이 직접 나와서 광주에서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 유언비어에 속지 말라 그 ┗ 귀한손 17.11.08. 22:15
그런 말 퍼뜨리고 다니는 자 신고를 하라 뭐 대대적으로 광주사태는 유언비어다 방송에서 대대적으로 단속을 했어요. 저는 이미 호외를 봐버렸기 때문에 저것 거짓말이다 큰 사건이 일어났어 하고 애들에게 말을 하면 나만 이상한 자가 되었어요. ... 세월이 흘러 87년도인가 대학교 게시판, 일명 대자보판에 광주살상 사진이 게시되는 것을 보고 다들 경악을 했고, 그 게시물을 본 자, 울지 않은 애들이 없었어요.
┗ 귀한손 17.11.08. 22:30
그렇게 서울은 철저히 통제가 되었었습니다. 몇 년 동안. 약6-7년 동안.
지금 이 게시물에 미당님의 전두환 송시가 있으니, 미당님이 왜 저러해야 했을까? 욕 자실 만하시다고 일단 평가를 내립니다. 그런데, 이렇게도 생각을 해봅니다. 미당님 역시 서울에 거주를 하시었으니 당연 광주사태는 순전히 유언비어다 하는 뉴스를 접하셨을 듯요. 거기에다, 전두환 이 일당들이 호남인을 총리지명 해서 호남인들에게 선심쓰듯 했고, 또 당시 예총 회장 선거가 있었다는데 당시 소설가 김동리와 미당님이 붙었답니다. 김동리는 경상도 사람이고 전두환도 경상도고, 문학인에는 경상도인들도 있으니 경상도인 표와 정권입김도 무시를 못하는 당시 상황 호명護明 17.11.09. 08:11
귀한손 님께 한마디만…….
수필로 등단하시고 소설까지 등단하신 대단한 역량의 문인이십니다. 그렇다면 위에 쓰신 답글을 논리정연하게 정리해서 달아주시면 쉽고 이해력이 높을 것인데 뒤죽박죽되고 겹쳐져 일관되게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서정주시인에 관한 친일행적은 전문 역사가들이 사료에 근거하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2009년에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2권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일독을 권하며 생사를 넘나들며 광복을 위해 싸웠던 애국지사 들과 꽃자리 만을 탐하며 살았던 서정주님의 삶을 비교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귀한손 님 같은 논리라면 이 세상에 친일파나 독재자나 변절자는 한 사람도 없겠다 여겨집니다. ┗ 귀한손 17
대단한 역량의 문인이라, 칭찬으로 받습니다 고맙습니다.
만, 호명님 댓글이 참 안 부드러우셔서, 원인을 찾습니다. 매끄럽지 못하지만 뒤죽박죽은 아니죠. 미당님 관한 건만 적었어요. 일관되게 미당님 관한 건만요. 그리고 번호 매겨서 1), 2), 3) 요로케 해서 정리해뒀어요. 나머지는 두 번 정도 읽으면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감선생님까지 하셨다면 1등 학생부터 말등학생까지 두루 다 경험을 하셨을 텐데, 비아냥조로 보여서 갈등이 생깁니다 지울까 말까, 제 댓글이 뒤죽박죽이어도, 말등학생으로 치시고 잘 헤쳐 읽어보십시요. 교감선생님이 되신 과정에 꽃자리만 계시었는지요. ┗ 귀한손 17.11.
귀한손
민초들 생각하시는 그 넓으신 마음으로 두 번의 수고를 하시면 다 이해를 하시리라, 참으로 고약스러우십니다. ... 사람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누구는 감처럼 빨갛게 익어가서 가을 하늘을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데요, ... 미당님 삶을 여기 댓글 달면서 추측을 해보니 참 고단한, 그 높은 경지에 다다를 떄 그냥 특등 열차 타고 올라가지 않으셨구나 해졌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고요. . 약간 맑으신 분이시라 여겼는데 약간 실망을 하게 되었습니다. 읽기 거북스러우시다면 저녁에 삭제를 하겠습니다. ... 그리고 애국지사분들과 미당의 행로는 달랐는데 어떻게 비교를 해야 하나요. ? 휘바람 17.11.09. 13:18
친일인사를 존경과추앙하는
인사들 있어 생각나는 대목 들춥니다ㆍ 이완용이가 죽음 앞두고 자식에게 유언" 내가보니까 앞으로 미국이 득세할 것 같으니 너는 친미파 되거라" 그와너무도 반대길 걸으신 윤봉길의사 께서 죽음앞둔 편지에서 자식들께 " 너희도 만일 피가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ㆍ태극기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앞에 술잔을 놓아라~~" 미당보고 두사람 행적을 평 해달라고 하면 이런 답이 나오지 안았을까요? 일제 재품이 지금도 다좋아 !!! 오산 17.11.09. 20:34
모든 선생님께 감사! 그래도 '귀한 손' 선생님께 너무 감사!!! 옛날엔 지금처럼 높은 뜻의 말씀이 없었어요. 많은 분들이 일제 때는 이해가 되나, 전두환때는 안돼! 단호합니다. 그래서 2005년 [미당문학제]세미나에서 홍지삼(동국대총장)교수께서 발표한 내용을 기억이 되는 대로 몇자올립니다. 미당은 <화사집, 1941>이후 그 당시 문단에서 천재(축구천제박주영선수처럼)로 소문이 났고, 미당은 나름 열심히 공부를 해서 여기저기에서 최고가 되고자 했을 거구요. 그렇지만 미당은 그 당시 사방천지에 백수로서 뭘 해보려고 집에 돈을 훔쳐서(논에병해충처럼) 쓰고, 아버지가 결혼까지 시켜줘서 자식까지 낳고, 그의 아버지는 결국 생겨나지 말 오산
야한 뻘xx라고 한탄만 하는 별소릴 듣는 자식입장이었고요. 1942년 결국 미당부친은 미당때문에 화병으로 돌아가시고 5남매의 장남으로서, 가장으로서, 어느 곳에 밥벌이(번역, 교사, ????)가 난감했구요. 그렇게 세월은 흘러 해방이 됐고, 동아일보 사회부장, 문화부장, 대한민국 초대문교부과장, 6,25전쟁 종군기자 등 큰 취직도 했지만 오래버티지 못하고. 결국 '공황장애'(특별한 이유없이 예상치 못하게 나타나는 강력한 불안과 공포)가 찾아와서 평생을 같이한 고질병환자였습니다. 오늘 날 우리선생님들처럼 똑똑하고 완전한 분이 아니었던 거지요. 칭찬받는 가장, 교수, 잘 챙겨주어야 할 사람, 신기있는 글쟁이, 사방에서 찾아와 원고
오산 1
청탁하고자 하는 이 사회 환경!!! 그리고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제자들이 - 찾아와 대는 주변상황! 그 중에 김춘수시인은 이렇게 걱정했어요. '아이구 미당성 초등학교 정신수준!!! 안타까워'-많이?했대요! {내 생활이 급한 사람에게} 똑똑한 내 기준에 안 맞는다고 매질을 해댄다면!!! 멋진 군복을 입은 군인이 과일바구니를 들고 찾아와 예의를, 전두환 그 패거리를 만난다면 여러분은 상대방의 의도를 정확히 하시겠죠! 미당도 그랬으면 얼마나 좋아겠냐고 - 여러분에게 미당의 제자로서 이해를 해 달라고 열심히 머리를 우리를 향해 굽혔습니다. 똑똑한 여러분들이 모든 걸 용서하고 좋은 사회를 위해 꿈꾸고 실천했음!!! 합니다.
답
연방죽 17
우리백부님(1908년생)과 숙부(1915년생)께서는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했으나 해방후 좌익으로 분류되어 자식들과 일가들은 고위공직에 응시는 해도 신원조회에서 모두 낙오.
백부님께서는 해방후 친일경찰들에게 고문을 당해 후유증으로 돌아 가셨고 숙부님 일가족은 한강폭파당시 일가족이 처형을 당했습니다. 쉽게 말해 일신을 위해 조국을 수난을 준 세력과 가족도 제대로 돌보지 않고 고난의 길을 걸으며 조국해방을 위해 몸을 바친 분들과 어찌 차이가 나지 않을지.. 이상한 논리로 죗과를 덮으려만 한다면 분명 정의도 정의만은 아닐수가 있다. 오산 17.
맞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가문에 후손(연방죽)들이 주변 강대국을 극복할 수 있는 [비젼]을 저희들에게 주셨으면 합니다. 앞으로는 우리 후손들이 이런일로(약자로의 환경) 갑론을박하는 창피한 민족(한민족)이 되지 맙시다. 제발, 다시 부탁한다면! 갑, 을 관계에서 '을'은 '갑'에게 저주와 복수로 못나게 굴 것이 아니라 실력(능력)을 갖춰 선의를 베풀어야 한다면 안됩니까! /// 미당 촌의 [누거]에서 오산 ㅇㅇ진이가 |
내일 미당 문학관 국화축제장 방문을 합니다.
오늘은 고인돌 국화축제장을 찾았어요.
이미 지난 10월29일 방문을 해서 다 둘러봤던 터라,
운곡습지를 들어갔다가 나와서 바로 미당 문학관 국화축제장으로 향하는 것이 오늘 일정이었는데,
운곡습지 둘레길이 어마어마 하더군요. 들어가서 길을 잃어 헤메는 통에 시간을 다 써버렸지 뭐예요.
그리하여, 일정 변경,
미당문학관은 내일 방문을 하게 생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