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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과 주자학
제자백가(諸子百家)가 출현하여 백가쟁명(百家爭鳴)하던 춘추전국시대에 공자가 중심이었던 한 학파가 유가(儒家)이고, 공자와 그 제자들의 가르침인 경전(經典)을 연구하는 학문이 유학(儒學)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유학이 학문적, 이론적 영역이라고 한다면 유교(儒敎)는 교화적, 실천적 영역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일상에서는 두 용어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공자는 일찍이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고 하여, 자신은 과거 성인의 말씀을 서술하여 전할 뿐 새로운 설을 지은 바가 없다고 했다. 실제로 유학의 경전은 공자가 새로운 학설을 저술한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있던 고전들을 정리하여 편찬한 것이다. 다만 공자는 이 고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남겼고, 제자들이 그 맥을 이었다. 공자와 제자들이 남긴 책들 중에서 선별한 것이 소위 유학의 경전이다. 그런데 이 경전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그 구성을 달리하였다. 공자시대에는 시(詩)·서(書)·예(禮)·악(樂)이 주요 학습내용이었고, 후세에 다시 역(易)과 사(史)가 추가되어 춘추시대에는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경(禮經), 악기(樂記), 주역(周易), 춘추(春秋)의 육경(六經)이었다. 그 후 시대에 따라 유교의 경전은 9경도 되고 12경도 되었다가 송나라 때에는 십삼경(十三經)까지 늘어나기도 했다. 송나라 때는 또 사서(四書)라 하여 대학(大學), 중용(中庸), 논어(論語), 맹자(孟子)가 추가되면서, 경전은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춘추(春秋), 예기(禮記)만을 택하여 사서오경(四書五經)으로 정리되었다. 사서(四書)는 경전에 앞서 배워야 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책들이다.
공자의 가르침은 맹자로 이어지면서 유교사상의 고전적 원형이 정립되었다고 보는데, 이를 ‘선진유학(先秦儒學)’ 내지 ‘근본유학(根本儒學)’이라고 한다. 그 후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진(秦)나라 때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유교의 경전을 비롯한 제자백가의 서적들이 모두 사라졌다. 진나라가 망하고 한(漢)나라가 들어서면서 유교가 국가통치의 원리로서 국교(國敎)로 받아들여지자 망실된 유학 경전들에 대한 복원이 시도되었다. 그런데 이때 공자의 옛 집 벽속에서 과두문자(蝌蚪文字)로 쓰여진 서경(書經)을 비롯한 소위 ‘벽중서(壁中書)’라 불리는 옛 전적들이 발견되었다. 이에 한나라 때의 유학은 복원된 경전을 기반으로 하는 금문학파(今文學派)와 공자의 집에서 발견된 경전을 기반으로 하는 고문학파(古文學派)로 갈렸고, 학술적 관점에 따라 서로 해석을 달리하며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따라서 이 시대의 유학은, 구술에 의해 복원된 경전과 옛 과두문자로 된 경전의 내용 파악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됨으로써 경전의 음운과 자구를 통하여 그 의미를 심층적으로 파악하는 훈고학(訓詁學)이라는 학문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한나라를 뒤이은 위진남북조시대에는 의소학(義疏學)이 발달했다. 의소(義疏)는 경의(經義)를 소통(疏通)한다는 의미로, 의소학은 글자나 구절에 대한 상세한 해석과 서술을 통하여 경전의 의미와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하는 학문을 말한다.
이후 수(隋)와 당(唐)나라 시대에 이르면 유가의 경서들을 노장(老莊)사상을 바탕으로 해석하며 형이상학적인 철학 논변을 전개하는 현학(玄學)과 신선사상의 기반에다 노장사상, 유교, 불교 그리고 통속적인 여러 신앙 요소들을 받아들인 중국의 대표적 민족종교이자 철학사상인 도교(道敎)가 일어나고 불교의 여러 종파가 널리 전파되면서 유학은 침체하게 된다. 몇 백년을 이어온 유학사상에 점차 진력이 나면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게 된 결과였다. 그래서 이때의 유학은 경전을 공부하는 경학(經學)은 소홀히 되고 문장과 시부(詩賦)를 중시하는 사장학(詞章學) 중심으로 변모되었다.
송(宋)나라 때에 이르러 경전에 담긴 본뜻을 찾아내려는 의리(義理) 중심의 학풍이 출현했다. 이러한 학풍이 발달하면서 유학의 사상체계를 새롭게 정립하여 구성하는 소위 신유학(新儒學)이 출현하였다. 송대(宋代)의 유학자들은 유교가 인간존재의 근원적 문제와 형이상학적 세계관에 대한 답을 내놓지 못하여, 수와 당 시대에 유교가 불교와 도교에 위축된 것에 각성하는 한편, 도교와 불교를 비판하고 나섰다. 불교와 도교의 도는 세속을 떠난 도이기 때문에 현실의 일상생활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유교야말로 일상생활에 가장 적합한 도라고 주장했다. 또한 공자에서 맹자에 이르는 도통(道統)을 주돈이(周敦頥)와 정호(程顥), 정이(程頥) 형제가 계승했다는 도통론(道統論)도 정립하였다.
이러한 송대 유학자들의 논리를 주자(朱子)가 집대성하여 도통론에 기초한 경학(經學) 체계와 유학 우위의 입장에서 불교의 선사상과 도교의 자연사상의 장점을 포용한 유교의 형이상학적 체계를 수립하였다. 이러한 학풍을 중국에서는 주자학(朱子學), 정주학(程朱學), 이학(理學), 도학(道學), 신유학(新儒學) 등으로 불렸고, 고려와 조선에서는 성리학(性理學) 또는 주자학(朱子學)으로 불렸다. 성리학이라는 용어는 ‘성명과 의리의 학(性命義理之學)’의 준말이다. 공자와 맹자의 유교사상을 성리(性理), 의리(義理), 이기(理氣) 등의 형이상학 체계로 해석하였다는 의미다. 이러한 신유학을 중국에서는 송명이학(宋明理學)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신유학 핵심이 '이(理)'를 궁구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고, 그 유행했던 시기가 송대에서 명대까지였기 때문이다.
명나라가 몰락하고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들어서자 유학자들은 망국의 원인을 지나치게 공리공담에 치우친 이학(理學)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성으로 경세(經世)를 위해서 실사(實事)에 기초하여 옳은 것을 구하는 것, 즉 실사구시(實事求是)를 내용으로 하는 실학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그 학문적 배경이 되는 경학(經學)과 사학(史學)에서 송명이학자들의 연구방법을 배척하고, 한과 당나라의 훈고학(訓詁學)을 계승하여 실증적인 연구방법을 채택하였다. 이로써 청나라에서의 유학은 경전 자구의 정확한 풀이와 엄밀한 고증을 중시하는 고증학(考證學)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사실 고증학은 한대의 양대 학파 가운데 고문학파의 전통을 이은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중국의 유학은 다시 천오백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 것이다.
[중국 청대 화가 초병정(焦秉贞, 1689 ~ 1726)의 공자성적도(孔子聖迹圖) 중 35폭 <치임별귀(治任别歸)> : 기원전 479년, 공자(孔子)는 노나라 도성 북쪽 사수(泗水) 언덕에 묻혔다. 제자들이 3년을 복상한 뒤에 돌아가자, 자공이 홀로 공자의 묘소 옆에 초막을 짓고 3년 동안 더 공자의 묘를 지켰다는 내용을 그린 그림.]
이렇게 보면 주자학 또는 성리학은 송명(宋明)대에 유행했던 유학의 한 학문 방법이다. 같은 유학 경전을 중심으로 한 학문이지만 공자 때의 유학과 주자 때의 유학은 그 핵심이 다르다.
공자, 맹자의 유학은 이미 한나라 때 한 번 변질이 되었다. 유학이 한나라의 국가 이데올로기로 정착하면서 수직적 권위주의와 신비적 색채가 강화되고,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이나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 같은 것을 유학에 끌어들임으로써 공맹시대의 유학에서 크게 변질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시대 유학의 가장 큰 흐름인 금문학파와 고문학파는 서로 공자를 바라보는 관점도 달랐고, 금문과 고문이라는 경전의 글자 차이뿐만이 아니라 경전의 배열순서도 다르고 중시하는 경전도 달랐다. 금문학파에서는 공자가 비록 왕위는 없었지만 요순(堯舜)임금이나 주(周)나라의 문왕, 무왕과 같은 성왕(聖王)으로 받들었다. 그리고 경전에 대해서도 비록 고대의 전통이 있었지만 공자가 새롭게 정리했다는 점에 더 초점을 두었다. 경전의 순서는 가장 쉬운 『시경』을 앞에 둔 반면, 심오하고 난해한 『역경』과 『춘추』는 뒤에 두었다. 또한 여러 경전 가운데서도 미세한 표현 하나에도 공자의 심오한 뜻이 숨겨져 있다는 『춘추』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이에 비하여 고문학파는 고대의 전통을 더 중시하며 공자는 바로 그 고대의 전통을 잘 계승하여 정리한 사람으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경전의 배열도 시대 순이다. 『주역』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주역의 팔괘가 전설상의 삼황 가운데 하나인 복희씨가 지었기 때문이고, 『서경』이 다음인 것은 요순임금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공자가 정리했다는 『춘추』는 맨 마지막이었다. 고문학파는 특히 주나라 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이복동생으로 주나라를 창건했던 공신 중의 하나인 주 문공(文公)을 높이어 『주례(周禮)』를 중시했다. 또한 역사적 전통을 중시하다 보니 경전에 대한 정확한 자구해석을 중시했다. 두 학파는 이후 시대에 따라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결국 고문학파가 득세했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의 주장이 혼합되는 결과도 나타났다.
그런데 뒤의 송명(宋明)대 유학은 또 이 한당(漢唐)대의 유학과도 또 달랐다. 우선 중시하는 경전부터 달랐다. 한당대에서는 공자가 정리하거나 저술했다고 믿어지는 오경을 중시했다. 오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양이 방대한데, 거기에 훈고학과 의소학이 발달하면서 경전 주석서의 양 또한 획기적으로 늘어났다. 이에 비해 송명대에서는 짤막하지만 유교의 대의를 전체적으로 잘 설명하고 있는 「대학」, 유교의 글 가운데서는 철학성이 뛰어난 「중용」, 공자의 실제적인 언행이 담겨 있는 「논어」와 공자사상을 잘 계승한 「맹자」를 묶어서 사서(四書)라 하고 이를 오경보다 더 중시했다. 또한 주희는 이 사서에 주(註)를 달았는데 이 책들은 이후 유학자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대학」과 「중용」은 『예기』 가운데 각각 한 편씩에 불과한 것을 독립시킨 것이다. 사서는 다 합쳐도 오경의 한 권 분량도 채 되지 않는다. 송명대의 유학은 수많은 경전을 읽어 방대한 지식을 쌓기보다는 적은 분량의 경전을 깊게 읽어 유교의 요체를 파악하는 것을 중시했다.
또한 맹자를 새롭게 중시하게 되면서 이전까지 내려오던 주공(주 문공)과 공자를 병칭하던 관례가 점차 공자와 맹자를 병칭하는 쪽으로 흘러가게 된 것도 이 시대 유학의 특징이다.
송명대 유학의 또 다른 특징은 한당유학에 비해 매우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인 측면이 많다는 것이다. 유학자들은 불교와 도교를 비판하는 한편 그 장점을 수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도교로부터는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선천후천설(先天後天說) 등의 우주론에 관련된 부분을 보충했고, 불교로부터는 주로 심성론과 수양론을 보완했다. 즉 불교와 도교의 성스러움을 안으로 수용하고 겉으로는 다시 유교의 범속함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理)'와 '기(氣)', '성(性)'과 '정(情)' 등의 철학적 개념을 치밀하게 논하는 것은 이전의 유교에서는 없었던 것이다. 이기론은 『화엄경』의 이(理)와 사(事)의 논리구조를 따온 것이다. 화엄철학에서는 이 우주의 현상계를 '사'라고 하고 그 배후에 있는 근원을 '이'라고 했는데 신유학에서는 '사' 대신에 '기'를 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송명대의 유학자들은 ‘배워서 성인에 이르는 도’를 유교의 요체로 보았다. 신유학의 선구자라고 불리는 주돈이(周敦頥)와 신유학 초기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정이(程頥)는 모두 ‘성인이란 배워서 이를 수 있는 것’임을 강조했는데 이는 후대 주자학의 발달 과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주자학이 이전의 유학에 비해 심성론과 수양론을 중시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조선 마지막 왕실화가 채용신(蔡龍臣, 1850 ~ 1941)의 <주자(朱子) 영정>, 경상대]
이처럼 대강 훑어보아도 공자의 유학과 주희의 주자학은 그 내용이 다르다.
공자의 유학은 주공이 확립한 예(禮) 문화를 수용하면서 그 위에 인(仁)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추가하여 인을 바탕으로 예를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을 군자(君子)라고 하였다. 반면 주희의 주자학은「대학」에 나오는 팔조목(八條目)인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개인의 수양과 국가의 통치를 위한 행위 규범으로 삼는다.
말하자면 공자의 유학과 주자의 주자학은 카톨릭과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 탄생한 개신교와 같은 관계이다.
유대교, 가톨릭, 개신교. 이 세 종교는 같은 성경을 기반으로 시작하여 비록 부르는 호칭은 다를 지라도 모두 같은 하나님을 믿는, 뿌리가 같은 종교다. 그렇지만 유대교를 개신교라 하지 않으며 카톨릭과 유대교를 같이 보지 않는다. 같은 성경에 기반했더라도 그 해석에 의한 교리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주자학과 유학은 다른 학문이다.
참고 및 인용 : 대교약졸(박석, 2005, 들녘), 학문명백과(강용중, 형설출판사), 한국 유학의 탐구(금장태, 1999, 서울대학교출판부), 한국민족문화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출처] 유학과 주자학 종심소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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