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대한신민단 단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교통차장, 대한의용군 단원, 고려혁명군 참모부원…. 빨치산 운동의 대부 백추 김규면 장군(1880~1969)을 수식하는 단어는 많다. 학계에서는 김장군을 홍범도, 김좌진 장군에 견줄만한 대표적인 항일무장투쟁가로 손꼽지만 모스크바로 망명해 그 곳에서 터를 잡고 눈을 감은 때문인지 일반인들에겐 여전히 낯설다.
지난달 20일 모스크바에 생존해 있다는 김규면의 친손녀 김에밀리아(72)를 찾았다. 에밀리아는 첫째 부인 김성근의 셋째아들 김인덕의 딸로 둘째 부인 김나자와의 사이에서 난 김베라(89)와 함께 유이하게 생존해 있는 혈육이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은 김베라는 지병인 심장병으로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김규면은 김성근에게서 4남1녀를, 김나자에게선 1녀를 얻었는데 김인덕과 김베라를 제외하곤 자신보다 먼저 떠나보냈다.
옆집 할머니같은 후덕한 인상의 에밀리아는 오랜만에 맞은 한국 손님이라며 차와 간식거리를 내놓느라 분주했다. 그는 서재에서 커다란 앨범을 꺼내더니 유일하게 남은 조부의 초상화를 꺼내 보였다. “내 할아버지가 만주, 러시아 지역의 대표적인 항일운동가임에도 냉전의 논리에 가로막혀 지금껏 한국에서 그의 일대기를 다룬 책이 없다는 것이 가슴아픕니다.”
실제로 노령 지역 독립운동에 지대한 공헌을 한 김규면을 단독으로 다룬 전기는 아직껏 없다. 게다가 1927년 모스크바 망명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자세히 알려진 바 없다. 이는 대부분 생존해 있는 후손들의 입에 의존해야 할 실정이다.
김규면은 함북 경흥 출신이다. 국립사범학교 사관학교 속성과를 나와 신민회 회원으로 신교육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1908년부터 조선 북쪽지역에서 게릴라운동에 뛰어들었다. 한일합방이 되면서는 침례교 목사로서 기독교를 수단으로 조선인 교육에 앞장섰다. 그러나 1913년 조선총독부의 포교규칙이 발표된 후 영국과 미국 선교사들이 총독부와 밀착된 것을 보고 독립교회인 성리교를 독자적으로 만들어 교주가 된다.
김규면은 민족의식을 가진 300여명의 핵심적인 침례교 신도를 모아 1919년 3·1운동 직후 북간도와 노령 연해주에서 조선인 유격대인 대한신민단을 만든다. 신민단은 그 해 4월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과 손을 잡고, 김규면은 한인사회당 부의장 겸 군사부위원장까지 오른다. 이동휘, 김립 등이 주축이 돼 1918년 4월에 결성된 한인사회당은 원동에서 소비에트 주권의 확립을 위해 볼셰비즘을 추종할 것, 사회주의 방식으로 한인독립운동을 추진시킬 것 등을 주창한 정당으로 상해파 고려공산당 전신이다.
김규면은 1920년 홍범도와 연합해 일본군 1개 대대를 궤멸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만주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서 일군 토벌대와의 첫 대결로 보니코르 전투, 즉 그 유명한 봉오동 전투다. 에밀리아는 “일군을 섬멸한 이 전투는 당시 일본 도쿄신문에 ‘신민단 무장대 일군 기습’이라는 제목으로 크게 실렸다”며 “일본인 사이에 악명이 높았다”고 전했다. 봉오동 전투를 기화로 일본 군벌이 토벌대를 대규모로 증강해 조선인 유격대는 러시아로 근거지를 옮기게 된다. 신민단은 수찬유격대, 수이푼, 아누치노로 이동해 현지 유격대에 합류했다. 그 때부터 신민단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조선인 연합유격대를 편성했다. 빨치산스크의 대표주자 한창걸, 이승조, 박경철 등이 수찬유격대 일대를 지휘했고, 조선의 나폴레옹 김경천, 정재관이 아누치노 유격대를 이끌었고, 신민회 지도자 한경세와 신우여 등이 수이푼 유격대를 다스렸다.
이후 김규면의 전력은 더욱 화려하다. 대한독립군, 북로 군정서군 등과 같은 항일 무장단체 중 하나인 연해주의 혈성단 명예단장을 비롯, 정재관(대한제국의 미국인 고문 스티븐스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예찬하자 스티븐스를 구타하고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계획을 지원한 것으로 유명) 등과 함께 항일 빨치산활동을 위한 창해청년단을 조직해 단장을 맡았다. 또 다른 항일 무장부대인 대한의용군 간부로 활동했다.
1922년 러시아 내전이 종식되자 김규면은 중국관내로 이동해 항일 무장투쟁을 계속했다. 정치에도 관여했다. 상해 임시정부내 멤버들의 의견충돌로 임정이 해체 위기를 맞자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개최한 국민대표회의(1923년)에서 임시정부를 해체하자는 창조파로 나서기도 했다.
한국외국어대 반병률 교수는 “사회주의자 김규면이 이동휘가 떠나고 우파들만 남은 임시정부에서 교통차장으로 임명(1924년)된 것을 보면 상당한 명예욕이 있는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1927년 장제스의 반공쿠데타로 국민혁명이 좌절되자 연해주로 돌아왔다. 에밀리아는 “할아버지는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책방에서 동양서적 판매원으로, 외국문학출판사에서 한글 서적을 번역하며 연명하면서 빨치산 동료들의 일을 도왔다”고 들려줬다. 그는 “모스크바 세베르나야 여관에서 할머니 김나자와 함께 쥐꼬리만한 연금으로 어렵게 여생을 보냈다”며 “그런 가운데도 모스크바를 찾는 독립운동가와 후손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다”고 전했다. 김규면은 1969년 2월2일 모스크바 근교 볼로그라드스키에 있는 한 양로원에서 눈을 감았다.
수원대 박환 교수는 “러시아혁명 후 이 지역에서 활동했던 한인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오랫동안 이념의 굴레에 묶여 있었다”며 “일제와 제정 러시아군에 대항해 볼셰비키와 힘을 합쳐 싸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평가는 당시의 상황 및 지역의 논리에 맞게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수도원 132번 벽면 묘지. ‘김백추, 극동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위한 투쟁에 참가.’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이곳에 묻혀있는 빨치산 영웅 백추 김규면 장군의 묘비엔 투쟁경력이 간략히 기록돼 있다. 가로 35㎝, 세로 45㎝의 묘지 덮개 상단 중앙에는 김규면의 사진이, 하단 왼쪽에는 합장한 두번째 부인 김나자의 사진이 새겨져 있다. 노보데비치 수도원은 1524년 바실리2세가 모스크바와의 연합을 기념해 지은 곳으로 묘지 조성 초기부터 일반인의 매장이 금지됐다. 이 곳에는 러시아 문학의 거두 안톤 체호프, 옛 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루시초프, 인류 최초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부인 고르바초프 여사 등이 묻혀 있다. 한마디로 러시아 ‘국가 영웅들의 묘지’. 김장군의 묘가 이 곳에 있다는 것은 그가 소련 정부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이 사실이 알려진 것은 불과 3년도 안된다. 2002년 8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수원대 박환 교수가 김규면의 궤적을 따라가던 중 현지 후손들로부터 알게 된 것이다. 그는 “대표적인 관광지인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묻혀 있었는데도 몰랐다”며 “그동안 독립운동 사적지 발굴에 대한 한국 학자들의 무관심의 소치로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