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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먹을 때에(1)
마 26:26-30
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30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마 26:26-30 / 그들이 음식을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이것을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또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시라. 28) 이것은 새 계약을 표시하는 나의 피다. 많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다. 29) 내 말을 잘 기억하여 두라. 이제부터 나는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결코 포도주를 마시지 않을 것이다.' 30) 그들은 찬미의 노래를 부르며 감람산으로 올라갔다.
최후의 만찬이 최초의 성만찬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이것은 내 몸이니라(26) 유월절 두 번째 잔을 받고 본 식사가 끝나기 전 즉, 축복의 잔인 세 번째 잔이 비워지기 전에 예수님이 떡을 가지고 축복하십니다.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이러한 주님의 선언으로 최후의 만찬이 성경 시대의 최초의 성만찬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은 유월절의 중심이시고, 또한 성만찬의 중심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축복하신 떡은 무교절 큰 떡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축복하셨다는 것은 유대인의 유월절 식탁의 전통과 같이 감사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식탁에서 감사드릴 때 하는 일반적인 표현입니다. 여기서 율로게사스를 번역한 축복하시고는 하나님의 축복을 빈다는 뜻으로 이는 하나님이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자손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도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기를 간구하시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떼어지는 떡도 새로운 세계를 여시기 위하여 찢기실 예수님 자신의 몸을 의미합니다. 이 몸을 받아먹어서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다주는 죄(죽음)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의 은혜에 초대하는 주님의 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27-30) 예수님의 공동체가 유월절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을 고려할 때 이 잔은 세 번째인 축복의 잔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포도주 잔을 가지고 감사 기도를 하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떡을 받은 모든 사람에게 “다 이것을 마시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약은 희생의 피로 확증됩니다(창 8:20).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모세의 선언을 반영한 것입니다(출 24:8). 이제 새로운 언약이 선포됩니다. 이 언약은 계속해서 반복해야 할 동물의 피가 아닌 죄인을 위하여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로 확증되기에 완전한 선포가 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유월절의 포도주는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유월절을 완전히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더이상 포도주를 마시지 않겠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러고 난 후 십자가로 가시기 위하여서 감람 산으로 가십니다.
적용: 당신의 삶 속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살과 피는 무엇인가요? 그 살과 피에 온전히 동참하고 있는지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一以貫之[일이관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거나, 초지일관 끝까지 밀고 나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나 세월이 흐른 뒤에도 늘 한결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진정 믿을 수 있는 진실한 사람입니다. 굳건한 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길지라도 인간은 연약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작은 시험에도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에 많은 시련과 역경이 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과 능력으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 설 교 >
예수님은 왜 피 흘려 죽으셨나
마 26:26-28 / 김양인 목사(목양교회)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제사의 종류는 번제,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소제가 있습니다. 이 중에 곡식가루를 기름, 유향, 소금과 섞어서 불살라 바치는 소제를 제외하고는 전부 소나 양이나 염소를 제물로 바쳤으며 이 때에는 반드시 제물의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리거나 또는 단 아래 부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대제사장은 일 년에 한 번씩 온 백성을 위한 속죄제사를 드렸는데, 이 때에는 제물의 피를 그릇에 담아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그 피를 언약궤 위에 있는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렸습니다.
이처럼 모든 제사에서 피를 제물로 바친 것은 피가 속죄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용서 받기 위해 드리는 속죄제나 속건제가 아닌 감사의 의미로 바치는 번제나 화목제라도 기본적으로 속죄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피가 속죄를 가능케 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피는 곧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이르기를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피를 바친 것은 생명을 바친 것과 같습니다. 소나 양이나 염소와 같은 짐승의 생명이 희생당함으로써 이스라엘 자손이 죄 사함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짐승의 생명이 사람의 생명을 대신한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이 이처럼 명한 것은 그것이 가장 공의로운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도록 되어 있습니다(출 21:23-25). 따라서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소나 양이나 염소가 희생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 제물로 바쳤던 짐승의 피는 그 효력에 뚜렷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의 생명과 짐승의 생명은 가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명과 짐승의 생명은 차원과 가치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36)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막 8:)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속죄 제물로 아무리 많은 우양을 바칠지라도 그것이 우주보다 귀한 사람의 생명을 대신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시대에 짐승을 속죄 제물로 허용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일종의 모형으로서 주신 것입니다. 요즘 건설회사는 아파트를 분양하기 전에 모델하우스를 지어서 보여줍니다. 모델하우스는 실제 아파트가 아니지만 지어질 아파트의 내부가 어떠한지 보여줍니다. 구약시대에 짐승을 제물로 바친 제사도 이와 같은 역할을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10장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그러면 구약시대에 바쳐진 수많은 짐승 제물은 무엇의 모형이었던 것일까요? 그것들은 예수님의 모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제물로 독생자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기에 앞서 율법을 통해서 모형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또한 구약의 제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그림자가 있는 것은 실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장차 메시아를 보내어 그들의 죄를 대속해 주실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 그 그림자로서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드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구약의 이스라엘 자손은 짐승을 제물로 바치면서 메시아가 오시기를 대망했던 것입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작정하신 때가 되자, 약속하셨던 메시아를 이 땅에 보내주셨는데,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아이십니다. 이렇게 말하면,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근거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근거를 성경을 통해 이해하는 것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는데 반드시 필요합니다.
첫째로,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다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을 보면, 메시아를 ‘여자의 후손’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모든 인류는 아담의 후손입니다. 그것은 아담이 인류의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남자였으므로 인류는 남자의 후손인 셈입니다. 그런데 메시아는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예언하기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고 했습니다. 이것은 동정녀 탄생을 예언한 것입니다. 남자 없이 여자 혼자 자식을 낳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셔서 탄생하셨다고 증언합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이 메시아이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복음서를 읽어 보면,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에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면 “23)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25)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외에도 소경을 보게 하셨는가 하면,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셨으며, 벙어리와 귀머거리를 고쳐주셨고, 심지어 죽은 사람들을 살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 같은 기적들을 단순히 기적이라고 하지 않고 메시아의 표적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구약성경에 메시아께서 이 같은 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는 것을 예수님께서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언하기를 “5)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6)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사 35:) 하였는가 하면,
“1)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2)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사 61:)고 했는데, 이 모든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외에도,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메시아이신 것을 보여주는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예를 들면,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것이라든지, 물 위를 걸으신 것이라든지, 바람과 풍랑을 명하여 잔잔케 하신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근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는 시편 16편 10절에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하신 예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세상이 생겨난 이래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한 이는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부활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이심을 입증한 중요한 사건입니다. 로마서 1장에 이르기를 ‘3)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었으나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예수님을 인류의 구세주로 인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럴 염려가 없으니 예수님께서 죽은 지 삼일 만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 한 분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인류의 구세주라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셨으며, 사도들도 선포하기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한 분만이 구세주라고 말하면 화를 내며 항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하는 자들로서 무슨 종교든 진실하게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주장을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주장은 하나님의 법인 율법의 요구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대속의 원리를 도외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세주의 필요성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 대신, 사람이 착한 행실을 함으로써, 또는 진리를 깨달음으로써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만약에 착한 행실을 하고 진리를 깨달아서 구원을 받는다면, 과연 구원받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성경은 말씀하기를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의 관점으로는 선한 사람, 의로운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기준에 의하면 선량한 사람과 사악한 사람의 차이란 오십보백보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일 뿐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구세주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신 근거는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죄인은 자기 한 몸도 구원할 수 없는데 어떻게 인류의 구세주가 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갖고 계시지만 죄가 없으십니다. 우리와 같이 희로애락을 느끼셨으며, 배고픔과 목마름과 육신의 고통을 다 경험하셨습니다. 그러나 본디부터 죄가 없으셨으며, 일생동안 단 한 번도 죄를 범치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구세주로서 완전한 자격을 구비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위하여 기꺼이 자기 생명을 희생의 제물로 내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이 대속의 죽음을 당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죽기 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대속하시기 위해 자진하여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0)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13)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14)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밝히 아시고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나 대속의 고난은 예수님에게도 큰 고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죄인취급을 받으시고 유대교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심문을 받으시고, 무례한 자들에게 침 뱉음을 당하시고 뺨을 맞고 조롱을 당하시다니,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더구나 로마 총독에게 심문당하시고 로마 군병들에 의해 조롱당하시고 무시무시한 채찍에 맞으시고 드디어는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을 당하고 죽을 것을 다 아시면서 자원하여 그 길을 택하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체포되시기 몇 시간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곧 이어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빌립보서 2장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복음서를 읽어 보면, 예수님께서는 원하셨다면 얼마든지 유대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죽음을 면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원하여 죽는 자리로 나아가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래야만 우리 인생들을 죄에서 구원할 수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에 예수님 말고 그 누가 인생들을 대속하기 위해 제 목숨을 내 놓은 적이 있습니까? 인간들은 구세주가 될 자격도 없거니와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마음을 갖지도 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희생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신 전날 밤에 예루살렘에 있는 어느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저녁식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 줍니다. 본래 유월절 만찬은 어린양의 고기와 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쓴 나물을 나누는 것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빵과 포도주로 대신하셨습니다. 그것은 유월절 식탁을 제대로 차릴만한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서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새 언약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떡을 가지시고 축복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떼어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하셨으며, 또 잔을 가지시고 사례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시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유월절 만찬을 폐하시고, 친히 자기의 몸과 피로써 새로운 성만찬 의식을 제정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친히 자기의 피로써 만민을 위한 속죄 제사를 드리심으로 구약시대에 소나 양이나 염소를 잡아 그 피로 속죄 제사를 드린 것을 폐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앞에서 설명한 대로, 구약시대에는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매일 같이 백성들을 위한 속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짐승의 피로 드린 속죄 제사는 일시적인 속죄의 효력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속죄를 위해 오늘 속죄 제사를 드렸더라도 그 후에 또 죄를 지으면 다시 속죄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그 사람은 일생동안 수많은 속죄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자주 속죄 제사를 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기의 피로써 단번에 우리 인생들을 위하여 완전한 속죄 제사를 드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로써 드린 속죄 제사는 그 효력이 무한하므로 또 다시 속죄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9장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11)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13)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제물의 종류와 차원이 다릅니다. 구약시대에는 짐승의 피였으나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제물로 바쳤습니다. 구약시대에는 모세가 만든 성막이나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으나,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있는 성소에 들어가셔서 영원한 속죄를 위한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의 피를 힘입어 모든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로운 사람이라는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8장에 이르기를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죄를 짓고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그들이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법 아래 있다는 것은 그 법의 지배를 받는 것이므로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는 사람들은 항상 죄를 짓고 결국은 사망에게 잡혀 먹힐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아무리 지위가 높고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이라도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종노릇하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은 달리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지위가 있건 없건, 재산이 많건 적건 상관없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 의해서 죄의 종에서 해방되어 참 자유인이 되었으므로 가장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보혈을 흘려주셨기에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고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의 피가 그 심령에 뿌려진 사람들입니다. 그 결과,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온 우주보다 고귀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비천한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려고 생명을 희생하셨다는 사실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구원 받은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더불어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전에는 하나님을 거역하여 불화하였으나 이제는 예수님의 피로 화목을 이루었으므로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구주 예수님을 사랑하고 주님께서 명하신 새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가 목숨을 희생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주님의 사랑을 받았으므로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받은 성도님들께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이 늘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만찬의 의미
마 26:26-29 / 김양인 목사
기독교의 성례는 세례와 성찬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이 두 예식은 우리 주님께서 직접 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에 앞서 제자들에게 명하시기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8-20)고 하셨습니다.
세례는 우리가 옛 사람을 물에 장사지냈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부활하였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또한 세례는 초신자가 교회의 정회원으로서 자격을 부여받는 입교의식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의 일원이 되려는 사람은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찬식은 예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것으로 주님의 대속의 죽음과 관련 있는 의식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라는 그림은 최초의 성만찬을 상상해서 그린 것입니다. 본디 성찬식은 식사를 겸했습니다. 그러나 점차 신자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서 식사를 겸하는 것이 여의치 않게 되자 성만찬의 의미만을 살려서 작은 떡 조각과 작은 잔으로 대체하게 되었습니다. 성찬식이 중요한 까닭은 이 예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성도들의 관계를 설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만찬의 의미를 살펴봄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성만찬의 유래에 관하여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삼년 반에 걸친 공생애를 마쳐갈 즈음, 유월절을 앞두시고 열 두 제자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매번 절기가 되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명절을 지키셨으나 이번 유월절은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번에 십자가 고난을 당하실 것을 아시면서 올라가셨기 때문입니다. 하필이면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최고 명절인 유월절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지, 그 이유가 궁금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소중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먼저 유월절의 유래를 간단히 알아봅시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명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애굽왕 바로에게 보내어 히브리 민족을 해방하라고 요구하셨으나 바로는 듣지 않았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 여러 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피 재앙, 개구리 재앙, 이 재앙, 파리 재앙, 생축이 죽는 재앙, 독종 재앙, 우박 재앙, 메뚜기 재앙, 흑암 재앙 등, 아홉 가지 재앙을 내리셨으나 바로는 끝끝내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장자를 치는 재앙을 내리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애굽인의 장자와 짐승의 처음 난 것이 죽임을 당하는 재앙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이 재앙을 피하는 길을 일러주셨습니다. 그것은 재앙이 임하는 날 저녁에, 이스라엘 자손은 가족 단위로 흠 없고 일 년 된 숫양을 잡아서 그 피로 집의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피를 바른 후에 그들은 집안에서 떠날 채비를 갖추고, 그 고기를 불에 구워서 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쓴 나물을 곁들여 먹었습니다.
과연 그 밤에 하나님의 사자가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땅에서 처음 난 것을 다 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자가 문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자손은 넘어갔으므로 무사했습니다. 유월이란 ‘넘어갔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장자를 치는 재앙에서 건짐 받은 것은 유월절 어린양이 피를 흘리고 희생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이 유월절 어린양은 곧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 목숨을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러기에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는 말하기를 “18)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19)고 하였습니다.
유월절 전날 밤에, 예수님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 떡을 가지시고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 주시면서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잔을 가지시고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을 유월절 어린양과 동일시하셨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이 희생됨으로써 이스라엘 자손이 죽음에서 건짐받았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그를 믿는 사람들이 영원한 죽음에서 건짐받아 영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유월절 만찬 후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피땀 어린 기도를 하나님 아버지께 올리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으므로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으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온 인류의 죄를 홀로 다 짊어지고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죄인들의 구세주로 이 땅에 오셨기에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은 얼마든지 죽음을 모면하실 수 있었지만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기꺼이 십자가에 달려 살 찢고 피 흘려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대할 때마다 우리를 위해 생명을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그 대속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넘쳐야 할 줄 믿습니다.
두 번째로, 성찬식의 떡은 우리를 위하여 찢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면서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찬의 떡을 먹는 것은 곧 예수님의 살을 먹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살을 먹는다고 하니까, 기독교의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납득하지 못합니다. 초대교회 당시에 로마인들 사이에는 기독교의 성찬식을 오해해서 기독교인들이 어린아이를 유괴 해다가 몰래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퍼졌고 이것이 교회를 핍박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성만찬 예식은 단순한 종교의식이 아니라 심오한 영적 진리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밝혀주지 않으시면 절대로 성만찬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넘는 무리를 배불리 먹이시고 부스러기를 열 두 광주리나 거둔 기적을 행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이구동성으로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가 아니냐?”고 했습니다. 개중에는 예수님을 억지로 그들의 임금으로 삼을 계획을 세우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 나라의 임금이 되는데 관심이 없으셨으므로 그들을 떠나셨습니다. 그 이튿날, 어제 떡을 얻어먹었던 자들 중에서 한 무리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보고서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라고 문안하니,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묻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하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또 묻기를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입니까,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기록된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고 하였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40년간이나 만나를 먹었는데, 당신은 어제 한번 떡을 준 것밖에 없지 않습니까? 만약에 당신이 메시야라면 모세가 행한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고 하시니, 그들이 말하기를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서로 다투어 말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그들의 말은 조금도 틀린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살을 먹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올바로 알아듣지 못한 결과입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어야 영생을 얻고 먹지 않으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 함은 곧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세주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살을 먹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먹은 음식이 살과 피가 되듯이,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적 생명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어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는 것은 곧 예수님을 영생을 주시는 주님으로 믿는 것을 말합니다.
과거에 이스라엘 자손이 유월절에 양을 잡아서 그 고기를 먹었듯이,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 역시 만민을 대속하시려고 자기 몸을 희생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내 살을 먹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조용히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 보십시오. “이 세상에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려줄 사람이 있을까?”하고 말입니다. 거꾸로 여러분 자신에게 “나는 남을 대신해서 목숨을 내어줄 수 있을까?”라고 질문해 보십시오. 드물긴 하지만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목숨을 희생하는 부모가 혹 있어서 우리의 마음을 감동케 합니다. 예를 들면, 불 난 집안에서 잠자는 어린아이를 구출하기 위해서 엄마가 불길 속으로 뛰어 드는 경우가 여기 해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을 위해 더구나 흉악한 사형수를 위해 목숨을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위대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로마서 5장은 이같이 말씀합니다.
“6)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위대한 이유는 죄인들을 위해서 독생자를 내어주는 희생을 감수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곧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성찬의 떡을 대할 때마다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성찬식의 잔은 우리를 위하여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합니다.
식후에 예수님께서는 잔을 가지시고 감사 기도를 올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습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자손은 짐승의 피로써 속죄 제사를 드렸습니다. 특히, 대 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이 그릇에 제물의 피를 담아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속죄소에 뿌림으로 백성을 위해 속죄하였습니다. 이처럼 속죄를 위하여 뿌린 피를 일컬어 언약의 피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9장 19절 이하에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19)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20)이르되 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21)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22)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구약시대에 율법에 근거하여 바친 제물의 피는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실 보혈을 상징한 것입니다. 성경이 피를 중요시한 까닭은 피는 생명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피를 바치는 것은 곧 생명을 바치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범죄한 사람을 속죄하려면 생명인 피를 속전(贖錢)으로 바쳐야 합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자손이 범한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아무 죄도 없는 송아지나 양이나 염소가 피를 흘리며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바쳐진 희생 제물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제물의 피는 주님의 보혈을 상징합니다.
본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대신하여 죽어준다 해도 그것이 나에게는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은 죄인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죄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다른 사람의 죄 값을 대신 치러줄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런 이유로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으시나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대신하여 속죄 제물이 되실 충분한 자격을 갖고 계십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9장 11절 이하에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11)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13)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원칙을 말하면, 짐승의 피로써 사람의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짐승의 피는 하나의 상징이요 그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그를 믿는 자들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권세는 무한합니다. 온 인류의 죄를 다 대속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시기 때문에 그의 피는 한없는 속죄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 6:)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피를 마실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디서 주님의 보혈을 구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것은 실재로 주님의 피를 마시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의 피를 마신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피를 흘려주셨기에 내 죄가 깨끗하게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곧 주님의 피를 마시는 것입니다.
성찬식에서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이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의 잔을 대할 때마다 우리는 우리 각 사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네 번째로, 성찬식이 주는 유익과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의 자세에 관하여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성찬의 떡과 잔은 우리 주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 만큼 성찬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경건하고 신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찬의 참 뜻을 알고 대한다면 그로 인해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또한 모든 죄책에서 벗어나서 진정한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아직도 주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주님을 전하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됩니다.
반면에,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경홀히 여기는 것은 무서운 죄를 짓는 것입니다. 비록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상징이요 실제로 예수님의 살과 피가 아닐지라도 결코 경홀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1장 27절 이하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27)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28)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29)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는 사람은 성찬에 참여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처음 교회에 나왔더라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면 그 사람은 성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죄를 회개하지 아니한 사람도 성찬에 참여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큰 죄를 지었어도 회개한 후에는 성찬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성찬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마음으로 참예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것으로서 자기 죄를 먹고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하여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약한 자와 병든 자가 생겨나고 심지어는 죽는 자도 생겨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찬에 참여하기 위해 한 주간 동안 기도로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참예해야 합니다. 어린이들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아직 어려서 대속의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혹시라도 성찬을 경홀히 여기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만찬은 이천년 전에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일 뿐 아니라, 동시에 주님의 대속의 은혜를 오늘도 우리가 동일하게 체험하는 예식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성도들의 영의 양식과 음료가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므로 불신 영혼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 주님의 보혈이 그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겨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십니다. 오늘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님들의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더욱 풍성하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언약의 피의 효력
마 26:26-28 / 스데반 황 목사(그리스도의 보혈교회)
히브리서 9:9-14 /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따라 드리는 예물과 제사는 섬기는 자를 그 양심상 온전하게 할 수 없나니 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일 뿐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1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이 장면은 십자가를 지시는 날 밤에 주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음식을 떼시는 장면입니다. 유대인의 달력은 저녁 6시부터 하루가 시작하여 그 다음 날 6시까지이기 때문에 현재 우리 달력으로 목요일 저녁부터 금요일 저녁까지가 유월절 날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달력으로는 유월절 음식을 드신 날과 십자가에 달리신 날이 다르지만 유대달력으로는 같은 날입니다. 즉, 예수님은 유월절 날에 음식을 떼셨고 유월절 날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태양력으로는 본문에서 주께서 유월절 음식을 드신 것은 목요일 저녁이었고, 그 다음 날인 금요일 아침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오후 3시에 운명하신 것입니다.
아무튼 현재 우리 달력으로 유월절 절기의 목요일에 일반 유대인들처럼 예수님은 제자들과 유월절 음식을 다락방에서 나누셨습니다.
출애굽기 12장을 보면, 유월절의 유래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해는 이스라엘의 첫해, 첫째 달로서 14일에 최초로 유월절 양을 먹었습니다. 이는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 양을 먹으며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었습니다. 이때 유월절 양을 먹을 때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었습니다.
유월절 양의 피는 믿는 자들의 집의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발라지게 되었고 그 고기는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다 불에 구워 먹되 아침까지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만일 남으면 아침까지 남지 않도록 곧바로 불에 태워 재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하나님의 심판이 있기 전에 이 일을 해야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어린양을 잡아 피를 흘린 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고기를 불에 태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고 떠날 것처럼 급히 먹어야 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주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면 이 지시를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했다면 그들은 그 날 밤에 죽음의 천사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따랐습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갑자기 하나님의 진노가 온 애굽 땅에 임하였고 가축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장자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주의 말씀대로 믿고 행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때 구원 받은 자들은 마치 애굽 사람들을 전쟁에서 이긴 것처럼 그들에게서 은금패물과 가장 좋은 의복을 받으며 신속히 떠나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날 밤에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자유롭게 나오게 되면서 애굽의 종으로 있던 신분에서 해방되고 이스라엘 나라로 독립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 이후로 매해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국가의 가장 중요한 절기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1900년이 지난 때에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하시며 떡과 포도주로 자신의 죽음을 기념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유월절의 실체요, 궁극적인 성취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이후로는 유월절 대신에 성만찬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유월절과 함께 나타난 사건은 10가지 재앙을 비롯하여 하나님 심판, 구름 기둥과 불 기둥, 홍해의 갈라짐, 하늘로부터 내리는 만나, 반석에서 터지는 물, 낡아지지 아니한 옷, 해어지지 아니한 신발, 그리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는 구약의 어린양의 피가 이처럼 어마어마한 역사를 나타냈는데, 하물며 십자가에서 흘리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보혈은 얼마나 엄청난 역사를 일으키겠습니까?
그렇다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은 그 피를 먹고 마시는 자, 곧 그리스도의 사역을 믿는 자에게 어떤 역사를 일으킵니까? 저는 오늘 네 가지만 알려드리겠습니다.
첫째, 죄사함입니다. 부활하신 주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5-16).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 24:45-48)
그런데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한 죄사함은 그 어떠한 죄인의 죄악도 사할 수 있고 아무리 많은 죄도 사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극악 무도한 죄악도 사할 수 있고 온 인류의 수천 년 동안의 모든 죄를 다 사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의 보혈의 효력은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
그리스도의 보혈은 하나님의 피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누구든지 어떠한 죄인이든지 무한하게 부르시며 무한하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평생 음란한 삶을 살아온 우물가의 여인을 용서하여 주셨고, 일곱 귀신들린 막달라 마리아를 구원하여 주셨으며, 많은 죄를 지은 또 다른 여인을 사하여 주셨고, 로마 제국에 충성하며 권력으로 약자를 괴롭히던 백부장을 용서하여 주셨고, 삭개오처럼 다른 사람을 착취하여 부자가 된 악인도 용서하여 주셨고, 심지어 평생 살인하며 악행하던 십자가 옆에 있던 강도까지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바울을 선한 사람으로 착각하지만 사실 바울은 죄인 중의 괴수였습니다.
그는 사회와 남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을 단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옥에 가두고 죽이는 일에 앞장 섰습니다. 이 얼마나 악하고 무서운 죄인입니까? 이에 바울은 과거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거룩한 양심을 갖게 되었을 때 과거에 자신이 한 일을 고백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찬성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그들에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에까지 가서 박해하였고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한과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행 26:10-12).
“내가 이 도를 박해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라”(행 22:4).
또한 그는 로마서에서 고백하기를 자신 역시 탐심의 죄로 가득했다고 말합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심지어 그는 율법의 의로 최고가 되고자 했던 교만한 자였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사람들 앞에서 고백했지만 사실 그는 단 한번도 하나님을 만나 뵌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그의 고백은 다른 유대인들처럼 거짓되고 헛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바울을 부활 승천하여 영광을 얻으신 주께서 즉사 시켜 죽이셔도 되는 것을 도리어 친히 찾아오셔서 만나 주시고 그에게 하늘의 계시를 보여주시며 사도 삼으셨으니 그를 사하시는 주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무한합니까?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어떤 악인인 줄 알고, 그럼에도 주의 사함을 받은 자이기에 늘 그 사실을 의식하며 살아갔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9-10).
그러면서 바울은 주님의 사랑이 어떠한 사랑인지를 고백합니다.
롬 5:6-8 /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것이 바로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십자가 보혈의 죄 사함의 능력입니다. 바울처럼 하나님의 절대적인 원수로 행하던 자를 가장 큰 은혜로 용서하는 능력, 그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십자가의 은혜를 맛본 자들마다 그들의 삶에서 동일한 죄 사함의 용서를 나타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자는 그 무엇보다 그 마음에 앙심과 독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누구든 다 용서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계속 용서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 세상이 얼마나 무한하게 악한 줄 아십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17).
그러므로 십자가의 용서의 능력을 힘입어 끝없이 용서하고 계속 용서하고 어떠한 악한 사람도 용서해 주기 바랍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둘째는, 십자가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의 요구를 만족시키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안에서 영원히 만족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자신의 거룩함과 의의 기준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죄에 빠진 인류는 그 어떤 사람도 그 기준에 이르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누구도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키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롬 3:23-25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일 2:2).
이 세상에는 십자가 외에는 하나님의 거룩함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는 십자가에서 흘린 그리스도의 보혈의 통로 외에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성령으로 충만한 베드로 역시 동일한 진리를 선포하였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만일 십자가의 보혈이 없었다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은 완전하게 공의한 분이요 율법을 그대로 적용하기에 단 한 사람도 구원 받지 못하고 온 인류가 전부 지옥 불에 던져질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이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가령, 거룩한 하나님을 알려주는 구약의 율법은 이러한 분명한 공의를 보여줍니다. 살인자는 죽임 당하고, 부모를 욕하거나 대들거나 때리는 자 역시 죽임 당하고, 누구를 유괴해도 죽임 당하고, 간음해도 죽임 당하고, 내가 키우는 동물이 사람을 해하여 죽여도 주인인 내가 죽임 당하고, 동물과 관계해도 죽임 당하고, 하나님을 욕해도 죽임 당하고,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해도 죽임 당하고, 우상을 숭배해도 죽임 당하고, 안식일에 일해도 죽임 당합니다.
따라서 구약 사람들은 어린양의 희생 제사가 없었다면 대다수가 매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속죄일로 인해 그들은 매해 죽음을 피하고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구약의 제사는 참으로 하나님을 만족시킨 것이 아닙니다.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 10:3-4).
사실 동물 제사로는 결코 죄 사함을 받지 못하지만 그 제사가 가리키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보혈의 능력이 구약에서도 주의 백성을 용서하고 그들을 보호한 것입니다.
이에 구약에서는 하나님은 언제나 지성소에 계셨고, 오직 대제사장이 일년에 단 하루 속죄일에 모든 주의 백성을 대표하여 어린 양의 피를 갖고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성소 밖에 있던 백성들은 여전히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교통할 수 없었습니다. 단지 대제사장과 선지자와 왕을 통해 간접적으로 교통할 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없이 억만 마리의 동물의 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받아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돈 많은 부자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이는 이 세상의 모든 재물로도 우리의 죄를 단 하나라도 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죄를 씻을 수 없습니다. 결코 불가능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만나 뵐 수 있도록 사람의 죄를 씻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의인으로써 내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 외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 피는 독생하신 하나님의 피이며, 완전한 의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그 피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이기 때문에 무한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거룩함과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완전하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의의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십자가에서 흘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외에 그 어떤 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작은 죄라도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 허락될 수 없고 누구든지 먼지 만한 죄를 짓더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 의미는 그 영혼이 지옥에 떨어지고 결코 나오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마 5:26).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의 요구를 만족시켰고 이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일으키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들과 세상과 화목하게 되었음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 4:25).
이에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속죄가 영원히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의 요구를 만족시켰음을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신 사건일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님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증한 사건입니다.
이에 누구든지 그 어떤 죄인이든지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해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고 하나님은 영원히 만족하시는 상태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든지 언제든지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히 4:14-16 /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이렇게 죄 많은 우리가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자기의 영원한 보혈의 공로로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덕분입니다.
롬 8:31-35 /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그러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을 영원히 태우는 무한한 하나님의 진노 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 자가 있습니까? 영원한 멸망에 이르기 전에 속히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십자가의 보혈은 우리를 영원히 보호할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아도 또 쓰러지고 또 죄를 짓습니다. 호흡이 마치는 순간까지 죄를 짓습니다.
제가 사랑하던 귀한 분은 믿음이 좋은 분임에도 불구하고 죽는 순간까지 섭섭함을 느끼며 차가운 마음을 갖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녀들에게 섭섭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도 연약한 인간의 죄일 뿐입니다. 화를 내는 죄, 미워하는 죄, 더러운 생각이 스치는 죄 등,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았어도 육에 속하여 사는 동안은 결코 완전하게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거의 죄를 사함 받았다고 하더라도 새롭게 짓는 수많은 죄로 인해 지옥에 떨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는 천국은 머리카락만한 죄가 있더라도 들어갈 수 없는 완전하고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범하는 우리의 구원은 사실 전혀 보장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보혈은 주와 믿음으로 연합한 자의 모든 죄를 사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주의 속량 때문에 죄 사함 받은 자로부터 죄와 싸울 수 있는 거룩한 마음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그들은 비록 죄에 쓰러지더라도 죄와 싸울 수 있는 거룩한 생명과 마음이 있기 때문에 회개하고 다시 일어섭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보혈은 우리의 구원을 보장합니다. 이는 그분의 보혈의 효력은 우리가 믿을 때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죄사함의 효력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영원토록 안전합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요, 한번 거듭남은 영원한 영생을 얻어 거듭난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보혈의 무한한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도다”(롬 8:1).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히 10:14 /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히 10:16-18 /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로는 그들과 맺을 언약이 이것이라 하시고 내 법을 그들의 마음에 두고 그들의 생각에 기록하리라 하신 후에 17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거짓 복음의 본산인 거짓 교회 로마 카톨릭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효력은 영원한 능력이 없다고 봅니다. 이에 그들은 미사를 드립니다. 즉, 미사 때에 예수님이 죄를 고백하는 자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또 희생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무한한 능력을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이에 그들 대부분은 천국의 확신이 없습니다. 그 대신 그들은 연옥을 믿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죄사함의 능력은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믿음대로 죽자마자 연옥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연옥이라는 곳은 없으니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질 것입니다.
몇 년 전 유보적 칭의론을 말하는 김모모 교수 같은 사람도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 받더라도 구원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니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십자가 보혈의 무한한 효력을 망각한 어리석고 이단적인 알미니안적인 발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의 십자가 보혈은 무한한 효력을 가지고 있기에 택함 받은 자들을 구원하시며 그들의 죄를 영원토록 무한히 용서하여 주십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주와 언약을 맺는 참 신자들의 구원은 영원토록 보장되며 안전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모든 신자들의 모든 죄를 영원히 무한히 사할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참으로 죄사함을 받고 거듭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과 물로 거듭났습니까? 그것을 어찌 아십니까? 확인해 보셨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거듭나지 않는 사람이 자신은 거듭난 사람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넷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은 누구든지 어떤 죄인이든지 어떤 악인이든지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빚어내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네,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죄인이 어떻게 선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인류가 타락한 이후로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주께 기쁨이 되는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롬 3:9-20 /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 뜻은 사람은 죄의 노예인데 결코 그 무엇으로도 사람을 죄의 권능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과거에 다른 세상사람들과 동일하였습니다. 오직 죄를 짓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을 하지 못하던 죄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동기를 가진 듯 하지만 사실은 궁극적으로 내 자신 외에 다른 동기를 가진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딛 3:3).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라”(엡 2:2-3)
그러나 주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심으로 살리셨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은 죄만 지을 수 밖에 없던 그러한 죄인에게 생명을 주어 변화시킵니다. 이 부분이 사실 복음을 믿는 가장 중요한 목적 중에 하나입니다.
딛 3:4-7 / 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6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7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십자가의 보혈은 죄로 가득한 악인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로 만들어냅니다. 십자가의 보혈은 주를 박해하던 바울을 복음의 선교사로 만들어 놓았고, 혈기 많고 겁 많은 베드로를 침착하고 용기 많은 수제자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감정에 따라 휘둘리던 요한을 사랑의 사도로 변화시켜 놓았으며 사람을 두려워하던 니고데모를 담대한 신자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지금까지 참된 복음을 듣고 믿은 자들마다 십자가의 보혈로 인한 성령의 역사로 인해 엄청난 변화를 나타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역사입니다. 또한 우리 자신 역시 이러한 변화의 산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에 우리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더욱 그리스도를 알아갈수록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살게 되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계속 닮게 됩니다.
롬 6:4-7 / 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이처럼 십자가의 보혈은 완고한 죄인까지 사랑으로 녹여 겸손하고 의로운 삶을 사는 거룩한 성품의 신자로 이끌어 냅니다. 이에 성경은 뚜렷하게 독생하신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변화되어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함임을 증거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멸망을 향하는 모든 사람들을 복음을 믿어 순종케 하여 그리스도를 닮아 변화시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
롬 8:28-30 /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기자 역시 주께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며 고난 당하심은 우리로 그리스도처럼 영광스러운 아들들로 만들기 위함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만물이 그를 위하고 또한 그로 말미암은 이가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히 2:10).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품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는 아직 거듭나지 않았든지 혹은 하나님의 무서운 매를 맞아야 정신차릴 깨어 있지 못한 갓난 신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더욱 십자가의 보혈의 무한한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도록 늘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붙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는 십자가의 보혈의 권능을 네 가지 알아 보았습니다.
1) 죄사함 2) 하나님과의 화목 3) 구원의 보장 4) 우리를 거룩하게 변화시킴.
이러한 주의 보혈의 권능이 여러분의 삶 전체에, 그리고 이 교회 전체에, 더 나아가 한국 교회와 인류 전체에 계속 강력하게 나타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 되려면...
마 26:26~28 / 고신일 목사
할렐루야! 평안하셨습니까?
2월에도 주안에서 평안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누군가를 만났다가 헤어질 때 마땅히 할 말도 없고
그냥 가기에는 서운할 때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언제 한번 만나서 밥이나 먹자’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제게 ‘목사님, 식사 한번 하시죠’하고 소식이 없는 분들이 계십니다.
제가 기억력이 좋다는 것을 잊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일상적으로 하는 것이 밥 먹는 것이지만
누구와 먹느냐에 따라 편하기도 하고 어렵기도 합니다.
저도 처음 뵙는 분과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흥회에 나가도 그 교회 담임목사님과
한 번 정도 함께 식사하고 가급적 혼자 밥을 먹는 편입니다.
그러나 밥을 함께 먹으면 서로 가까워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이 친해지려면
1. 함께 식사를 하고
2. 함께 무엇인가를 하며(게임, 스포츠, 영화관람, 등산, 낚시, 여행)
3. 함께 밤을 지내며 시간을 보내면 친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영의 양식을 함께 먹는 성도들입니다. 보통 관계가 아닙니다.
영적인 양식을 함께 나누는 여러분 모두 주안에서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옆의 분과 인사합니다. “영의 양식을 함께 나누는 사이입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하신 말씀입니다.(마 26:20)
이 식사는 무교절 첫날인 유월절에 행해졌습니다.(마 26:17)
유월절은 ‘넘어간다’(pass over)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을 때 …
이집트(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그 중에 10번째 재앙을 통해 애굽 사람들은
<사람과 짐승 모두> 처음 난 생명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양의 피를 인방과 문설주에 발라 재앙을 피했습니다.
<인방 : 기둥과 기둥 사이 또는 출입문이나 창 따위의 아래위에 가로놓여
벽을 지탱해 주는 나무나 돌
문설주 : 문짝을 끼워 달기 위하여, 중방과 문지방 사이에 있는 문의 양쪽에 세운 기둥>
그때부터 지키기 시작한 절기가 재앙이 ‘넘어갔다’라는 의미의 유월절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날은 가족들이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며 즐기는 날이 되었습니다.
< 하용조, 『비전성경사전』 (서울: 두란노, 2008). p.1040, 참조. >
그 유월을 기억하는 날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셨습니다.
(마 26:17, 막 14:12, 눅 22:7)
요한복음 1장 29절 말씀을 보면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습니다.
오래전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죽음으로부터 구원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으로 죄와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내는 구원의 길이 되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먹자, 마시자
예수님은 유월절 날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마 26:26)
예수님은 떡(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습니다.
오늘은 번역된 대로 “떡”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몸인 떡을 ‘떼’신 것은 그의 살이 찢겨질 것을 미리 보이신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떼신 떡을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내 몸”이라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몸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전 10:16~17)
성찬 예식을 통해 함께 떡을 나누는 것은
떡을 함께 나누는 성도들과 한 몸을 이루는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함께 성찬을 받았다면
서로 각기 다른 지체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여러 출판사가 있는데
그 중에 존더반(Zondervan Publishing)이라는 출판사가 있습니다.
존더반 출판사에서 기독교인들이 어떤 가치관과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알기 위해
미국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조사 결과 교회에 모여서 예배드리고 교제하는 것보다
인터넷과 TV, 라디오를 통해 예배드리기를 선호하는 성도들이 많다는 결과가 드러났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TV로 예배를 드리는데 단순히 예배만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헌금도 드립니다. 화면 자막에 헌금계좌번호가 나오고 개인수표나 신용카드로 헌금을 드립니다.
미국 사람들 중에 그렇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설교자의 설교가 자신들의 수준이나 입맛에 맞지 않다고 여겨지면 채널을 돌립니다.
언제든지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들을 수 있도록
TV나 인터넷으로 설교를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기도 하지만
자기들 마음대로 취사선택하는 것입니다.
< 나침반출판사 홈페이지(www.nabook.net) 내 ‘김장환 큐티 365일’ 2010. 6. 3. 글 참조 >
지금 이 시간에 기둥교회 예배는 전 세계에 인터넷으로 생중계되고 있습니다.
매번 IP주소를 확인해 보면 100개 나라 이상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접속하여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그 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지금 불가피한 상황 때문에 … 교회가 없거나, 여행 중이기 때문에 …
근무 중이거나, 아파서 … 교회에 갈 수 없는 경우라서 …
혹은 기둥교회 예배에 동참하고 싶어서 … 지금 접속하여 예배드리고 계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 물론 이유가 있겠으나 …
그 이유가 사람들이 수긍할 만한 것이라 해도 …
가급적, 교회에 오십시오. 교회에 가시기 바랍니다.
기둥교회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멀고 가까운 것을 따지지 말고 꾸준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교회를 잘 선택해서
하나님의 몸 된 교회의 성도로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공동체에 소속하는 것이 번거로워서 …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 것이 싫어서 …
그래서 혼자 집에서 영상을 통해 예배에 참여하고 계시다면
그것은 정당화 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 열 두 명이나 되는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편안하기만 하셨을까요?
출신이 다르고, 직업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취향도 달랐던 열두 명 …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 때 그 때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던 그들과 …
이곳저곳 다니면서 천국복음을 전하며 다니는 게 좋기만 하셨을까요?
- 베드로는 갈릴리 어부 출신입니다.
직선적이며 다혈질적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어떻게 이렇게까지 할 수 있나 하는 생각될 만큼
어떤 때 보면 생각 없이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그 역시 갈릴리 출신 어부였습니다.
그는 야망 있고 충동적이었습니다.
- 빌립은 의구심이 많은 신중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고
- 도마는 의심이 많았고
- 마태는 가버나움에서 세리였는데 사람들에게 미움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 가나나인 시몬은 극명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 가롯 유다는 음흉하고 재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다른 성격을 가진 제자들과 이 곳 저 곳을 다닌 다는 것이 편하지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함께 하자니 불편하기도 하셨을 것이고 … 답답하기도 하셨을 것이지만 …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활동하셨습니다.
함께 식사하며 한 공동체를 이루셨습니다.
신앙생활 하는 것 …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한 사람으로 살고 …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이지만 …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과의 관계를 이루며 사는 ‘교제’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선교회, 속회 … 등 여러 부서에서 만나는 사람들 중에
교회에서가 아니라면 … 내가 예수 믿지 않았더라면 …
기둥교회에서 신앙생활하지 않았다면 … 세상에 살면서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을 사람들과 어울리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부딪힐 일도 있고, 내가 왜 저런 사람을 만나
마음 고생하는지 모르겠다며 속상해합니다. 당연합니다.
출신도 다르고, 배움의 정도, 직업, 삶의 수준이 각기 다른 사람을 만나는데 …
그리고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별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이해하고 인내하고 사랑하며
어울리지 못한다면 어쩌면 예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교인들 중에 ‘그 사람과는 같은 속회, 선교회에서 활동할 수 없다’고 하며
속회, 선교회 바꿔달라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우리교회 성도들의 생일이 그렇게 다양한지 처음 알았습니다.
호적에는 언제인데 … 원래 태어난 건 언제 … 라고 하면서 바꿔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뀐 곳에 가면 지금 싫은 사람보다 더한 사람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떤 분이 우리교회에 등록을 했고, 선교회에 배정했습니다.
어느 날 연락이 왔습니다.
고등학교 동창이 자기보다 두 살 많은 선교회에 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친구를 자기 선교회로 내려주던지
자기를 그 친구 선교회에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원래 나이가 많은 게 아니냐고 했더니
학교 다닐 때 그 친구와 서로 주민등록을 보면서
생일이 딱 하루 차이여서 너무 신기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과 어울리려고
나이를 속이고 두 살 많은 선교회에 가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제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이를 두 살이나 많다고 했으니
하나님께서 2년 먼저 데려가실지도 모르겠다”고 하며 웃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 하나님의 자녀 되고, 천국 백성되고,
멸망치 않는 영생의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 교회 안에서 먼저 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와 다른 사람과 하나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먼저 하나 될 수 없다면 어디에 가서 하나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 교회에 모여 예배에 참석하고자 힘써야합니다.
- 선교회와 여러 부서 모임에 참석하기를 힘써야합니다.
- 기회가 닿을 때마다 기도회에, 봉사활동에 참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만으로도 아픈 사람의 병을 고치셨습니다. (마 8:13)
그렇다면 거처를 한 군데 정하고 혼자서 편안하게 지내다가
아픈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말씀으로 고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직접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아픈 곳을 만지며
기도하고 함께 식사하며 교제를 나누며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마음 편히 혼자 지내시다가
그 때, 그 때 제자들에게 글을 써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12명의 제각기인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함께 먹고 … 함께 마시면서 … 함께 걸어 다니면서
글로는 가르칠 수 없는 것까지 가르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제자들에게 성찬을 통해
자신의 ‘몸’까지 떼어주시고 자신의 ‘피’를 나누는 의식까지 행하셨습니다.
우리가 온전한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 우리가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서는
사실 몸을 뜯어내는 것만큼의 수고와 헌신이 있어야 하고
피를 나누는 것 같은 희생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 몸 뜯기는 것은 싫고, 내가 희생하는 것은 싫고
다른 사람의 몸만 뜯으려고 하고 남의 피만 흘리라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신 후에 포도주를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 …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 26:27~28)
같은 장면을 누가복음 22장에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
본래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약속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이 협상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 약속은 이렇습니다.
“…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출 19:5~6)
하지만 예수님의 피로 세워진 ‘새 언약’은
예수 믿는 사람마다 누구든지 죄 사함 받고 (행 10:43, 롬 11:27)
구원을 받는다는 하나님의 새로운 약속입니다. (요 5:24, 요일 1:9)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우리는 이 새 언약으로 하나님과 관계 맺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깨끗해진 우리들은
함께 떡을 떼고 잔을 나누며 새 언약에 합당한 삶을 살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 끼 식사만 대접 받아도 그것을 빚으로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갚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삽니다.
살다 보면 자녀를 결혼시키면서 … 가족의 장례를 치르면서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받은 사랑을 잘 기억했다가 갚을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갚으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받기만 하고 갚지 않는 얌체 같은 이가 있습니다.
식사하러 가도 밥값 한번 내지 않는, 베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이는 그와 제가 만난 이후로 단 한 번도 밥값을 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느 날 작정을 하고 음식점에 가서
안쪽 끝자락에 앉아서 천천히 먹었고 되도록 천천히 일어나 나왔습니다.
당연히 그 사람이 먼저 나갔기 때문에 음식 값이 계산되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 화장실에 가서 안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그날 밥값 계산을 하고 난 이후에 그 사람에게 걸려오는 전화는 잘 안 받습니다.
여러분, 너무 얌체 아닙니까! 여러분 그렇게 사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살과 피로 우리를 먹이신 예수님의 만찬을 받으면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최선의 감사를 표현해야 합니다.
성찬 예식을 뜻하는 단어
<‘Eucharist’의 뿌리는 헬라어‘유카리스티아(εὐχαριστία)’>에는 ‘감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성찬은
‘새 언약’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예식입니다.
< 하용조, 『비전성경사전』 (서울: 두란노, 2011). p.1410 참조. >
존귀한 자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진 가장 좋은 것을 자랑합니다.
비싸고 좋은 반지를 낀 사람은 머리가 아프지도 않은데
자꾸 손을 머리 쪽에 두고 머리 아픈 척을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자랑거리가 있습니까? 무엇을 자랑하고 사십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요 6:56)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른 것을 자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는데 무엇이 부러울 것이 있고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보다 더 큰 자랑은 없습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머무시는 것보다 더 부러운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시면 우리는 그 무엇도 부럽지 않은 존귀한 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며 사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가졌느냐 … 외모가 어떻느냐 …
어떤 것으로 치장하였느냐 … 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1491년, 로마 교황청은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에게
예수님과 제자들의 마지막 식사 광경을 벽화로 그려달라고 부탁 했습니다.
부탁을 받은 다빈치는 그때부터 그림의 모델로 세울 사람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엄선 끝에 거룩하고 선하게 생긴 19세의 젊은이를 찾은 다빈치는 그를 모델로 예수님을 그렸습니다.
그 후 예수님의 제자 11명까지 그리고 나서 마지막으로 가룟 유다의 모델을 찾아다니게 되었습니다.
다빈치는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의 모델로는
죄를 지은 사람이 적당할 것 같아 로마 감옥의 사형수중 한명을 모델로 골랐습니다.
몇 달에 걸친 작업을 통해 유다의 모습까지 완성했습니다.
작업을 마친 날 가룟 유다의 모델이었던 죄수가
감옥으로 돌아가기 전 다빈치에게 자신을 모르겠냐고 질문했습니다.
다빈치가 모르겠다고 하자 막 완성된 최후의 만찬 벽화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기 저 그림 속에 그려진 6년 전 예수의 모델이 바로 접니다.”
< 남도교회 홈페이지 게시판, “최후의 만찬” 참조. >
이 이야기가 실화인지는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존귀함’이란 외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존귀함’은 ‘우리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를 통해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안에 품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며 사는
존귀한 삶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존귀하게 보이려고 외모만 가꾸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소유한 것만으로 존귀하게 여김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모심으로 존귀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미 내 안에 들어와 계신 예수님으로 인해 존귀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1.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 변하여 새 사람 되고
내가 늘 바라던 참 빛을 찾음도 /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후렴: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물밀듯 내 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예수님이 내 마음에 들어와 계시기 때문에 내가 변하여 새 사람 된 것이고
내가 값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존귀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교회는 매달 1일 성찬을 합니다.
1일이 평일이면 새벽기도회 시간에 성찬 예식을 하지만
주일이면 매 예배마다 성찬 예식을 진행합니다.
예배드리는 인원이 많아 시간이 걸려도 생략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셨기 때문입니다.(눅 22:19)
성찬 예식을 통해 얻는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먹고 마셔야 ‘힘’을 얻습니다.
하루만 굶어도 힘이 빠집니다.
우리의 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를 먹이시는 예수님의 힘으로 살아야 우리 삶이 존귀해집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 머무시는 예수님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
오늘 성찬을 통해 주님과 하나되는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
중계를 통해 말씀을 듣는 분들, 성찬을 받을 수 없는 분들
마음으로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거룩한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에서 … 일터에서 …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 성도답게 …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거한다’고 자랑할 만한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 만찬과 부인 예고
마 26:26-35 / 장찬영 목사
오늘 말씀은 유월절 식사와 더불어 행하셨던 성만찬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자들과 가륫유다의 배신을 알면서도 주님은 그들에게 떡과 잔을 함께 하십니다. 이 장면은 바로 당신이 스스로가‘유월절 어린양’이 되심을 드러내시고, 또 제자들에게 떡과 잔을 나누므로 이 마지막 성만찬의 예식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말씀하십니다.
26-28절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자,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무엇 때문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유월절을 기념하는 만찬을 하고 있으면서도, 사실 예수님이 가시는 ‘십자가 길’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기대하는 것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심으로써 자신들이 갖고 있는 소망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즉, 자신들의 몸과 이름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세상에서 영광된 존재로 부각되는 그 때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몸과 이름을 영광된 것으로 세워주기 위해 오시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영광된 존재가 된다고 해도 죄인으로 멸망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몸을 버리시고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스스로 저주의 길을 가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같은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주시면서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떡을 먹으므로, 예수님의 몸과 하나가 되는 관계에 있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과 하나가 되는 것은, 예수님이 몸으로 누리시는 모든 것이 제자들이 누리는 것이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몸이 저주를 받으신다면, 그 저주에는 제자들도 함께 있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의 몸이 부활하신다면, 그 부활에 제자들도 함께 있게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결국 예수님의 몸에 연합되어 있는 신자가 누리게 될 축복의 사건들입니다. 내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의 몸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피를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제자들은 주시는 잔을 마심으로써,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예수님의 피의 은혜에 참여하게 됩니다. 즉,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제자들에게는 ‘죄사함’의 은혜라는 놀라운 복된 사건으로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몸과 피는 제자들을 저주에서 해방되게 하시고 죄사함을 얻게 하심으로써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영광된 몸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장차 제자들이 죽음을 통과하고 앞으로 목격하게 될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이라는 ‘언약의 성취’의 그림자가 되기에, 이 떡과 잔을 대할 때마다 예수님의 죽음과 고난 그리고 부활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주 의미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29절“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떡과 잔을 주시면서 하시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제자들이 이해했을까요? 그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직 ‘자기 몸’을 위해 살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몸을 의미하는 떡을 먹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그 의미가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않겠다니.....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들은 앞으로 자신들이 삶이 어떻게 될지, 그들의 몸이 어디로 이끌림 받을 것이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가야만 하셨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내가 가고 안 가고의 선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떡을 받아 먹으므로, 예수님의 몸에 연합되었다는 것은 앞으로 제자들의 몸, 즉 인생 역시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게 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사람은 자신이 ‘죽는 길’을 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죽음의 길을 피하고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을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우리를 그처럼 원하지 않는 ‘죽음의 길’로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29절에서 말씀한 ‘새 것’이 의미하는 것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찬을 행하시면서 ‘성령님’을 소개하십니다.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즉, 너희와 마시는 이 포도주가 이 땅에서의 마지막 음료가 될 것이지만, 너희는 나와 더불어 이제부터 그 나라에 이르기까지 ‘새 것’ 즉 ‘성령’으로 마시게 될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고전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과연 제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였을까요? 이 장면이 참 슬픕니다.
30절 “이에 저희가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
앞으로 무슨 일이 있을지 전혀 모른체, 찬미를 하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새 것’ ‘성령’을 얘기하는 것에 대한 복선과도 같습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이해될 수도 깨달을 수 도 없는 일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의 인생과도 같습니다.
사실 이번 사순절 새벽기도를 인도하면서, 제 마음에 적지 않은 부담이 왔습니다. 왜냐하면 어제 말씀드린대로, 말씀은 우리에게‘새로운 정보’가 아닌, ‘새로운 삶’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삶’은 자기를 부인하고, 나아가 자기를 포기하고 자기를 버리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말씀에 목마르다’라는 반응과 동시에 그러나 ‘말씀대로 사는 것은 어렵다’라는 이중적인 태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중적인 모습은 적지 않은 시간 동안 우리 안에 생각지 못한 습관을 형성하게 되는데... 사실 이것이 바로 ‘종교’라고 하는 껍데기입니다. 이 ‘종교’라는 관습은 목회자와 성도에게 각자 원하지 않는 모습을 가져오게 합니다. 목회자에겐 ’해산의 수고‘에 대한 열심을 갖지 않게 합니다. 삯군이 되는 것입니다. 시간만 때우면 됩니다. 성도에겐. ’열매에 대한 소망‘이 없게합니다. 다 해 보았다는 마음으로, 자리를 채워주고 말씀을 들어주는 척 합니다. 둘의 공통점은 “예수님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다. 신랑이 없는 신부의 모습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누구를 위한 예식입니까? 누구를 위한 잔치입니까? 신랑을 기다리는 우리의 수고와 헌신은 누구에게 보상받습니까?오직 그 자리엔 돈을 주고 고용한 들러리와 장사치들, 탐욕스런 신부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떡과 포도주를 받는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떡과 같이 나누어지고 쪼개어질 줄 몰랐고, 예수님이 포도주와 같이 산산히 으깨어져 피 한방을 남김없이 보혈을 흘릴 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한데도 주님은 묵묵히 당신의 유월절 식사를 행하시고, 당신의 길을 걸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이 이 땅에서 죽으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주님이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 한 가지는 이유는 ‘새 것’ 즉‘성령님’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1절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우리는 베드로의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33절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한 형제분이 이번 주에 저에게 이런 메일을 주셨습니다. 형제님 가운데 이런 감성과 영성을 가진 분이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목사님께 이런 식의 메일을 드리는 것이 처음이지만, 목사님, 매일 마다 주시는 말씀으로 많은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이번 사순절이 저에게는 정말 특별한 것 같습니다. 확실히 작년 세이레와는 다른 것 같습니다. 그때는 정말 뭘 모르고 은혜를 받고 열광한 것 같은데, 이제는 뭔가를 안다 싶으니 예수님 믿는 게 마음이 마냥 쉽고 편한 게 아니라는 것을 날마다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제 양심에 이렇게 강하게 부딪혀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사실 저는 아직도 무덤덤한 제 모습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내가 집으로 가면서 ”은혜 받았냐고?“ 물어보면, 늘 ”그렇지 뭐. 말씀은 다 좋은거지”하면서 왔는데, 이번에 이런 제 자신의 두 가지 모습을 보면서. 참 육이 강하구나, 여전히 제 방법을 포기하지 않는 제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이 잘 힘드시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다음으로 목사님이 참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일 마다 혼신으로 주님의 말씀을 주시는데, 저는 너무 안일하게 말씀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라는 마음이 들어, 저 같은 사람도 저를 돌아보고 있으니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올립니다. 목사님 힘 내십시오”
제가 이 글을 읽으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로 생각이 압축되는 것은, ‘성령님이 하신다’라는 결론이었습니다. 이게 목사 혼자서 애 쓴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또 그게 애 쓴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또 여러분의 마음도 목사가 애 쓴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성령님이 만져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교회는 식당이나 학교도 회사가 아닙니다. 성령님이 주인인 곳이 교회입니다. 그렇기에 성령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것입니다.
가만 생각해 보세요. 지금 우리가 고백하고 기도하고 있는 종말, 천국비유, 자기 죽음.,.. 구원, 생명, 십자가 그리고 오늘 ‘성만찬’....그리고 부활.....승천.... 사실 이 모든 게 우리가 경험한 게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말씀들은 때론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이요, 단어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이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까? 아니 지난2,000년 동안 교회는 어떻게 이 말씀을 지키고 왔을까요? 이것이 인간의 지혜와 전략으로 가능할까요?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분이 있어요. 바로 ‘성령님’이세요. 저는 때론 생각이 드는 것이, 목회의 기쁨과 소망으로, 주님 제가 다시 이 땅에 태어나도 목사하고 싶어요 할 때도 있고, 또 유명한 목사님들이 본인은 다시 태어나도 두 말 할 것 없이 목회자의 길을 걷겠다고 하니까, 얼떨결에 “저도 그래요” 하지.,. 정신 차리고 현실을 보면, 다시 태어나면 솔직히 않 하고 싶을 때가 더 많아요. 빨리 은퇴하고 싶어요. 아마 여러분, 이 부담을 모르실거예요. 어쩔 때는 거의 정신이상자 같아요. 마치 강박관념자 같아요... 가까이서 안 보셔서 다행이지, 자다가도 벌떡 벌떡 일어나고, 잠이 안 온다고 돌아다니고, 말씀을 깨달아서 소리를 지르고, 한 영혼이 돌아오는 기쁨으로 흥분하다가도, “아니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지”하는 마음으로 분하여서 잠을 못자고 ...이렇게 살면 되나 하는 부담으로 스스로에 안절부절하고....
그런데, 그러다가 깨닫는 종착점이 있어요. “아, 목회는 내가 하는 게 아니구....” 애쓰고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구나....하나님의 은혜로 하는거구나... 내 안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내 안에서 아무리 짜내어도 되지 않는구나..... 목회는 배워서 하는 게, 흉내내는게 아니구나.... 결국‘받아서 하는구나“ .... 믿음생활도 그러합니다.
보십시오. 떡은 내가 먹는 게 아닙니다. 26절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떡은 ‘받아 먹는 것’입니다.
성령은 내가 취하는 게 아닙니다. 어디가서 가져오고 흉내내는 게 아닙니다.
요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성령은 ‘받는 것’입니다.
성령충만도 어디에서 내가 채워 놓는 게 아닙니다.
엡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내 힘으로 안 됩니다. 지식으로 안 됩니다. 잔머리로 안 됩니다. 교양으로 안 됩니다...
34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오직 성령님의 임재 안에서만이 구원이, 생명이, 자기 죽음이, 십자가가, 부활이 믿어지고 가능합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요14: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이 잔을 받으라. 이 떡을 먹으라. 이 떡은 너희를 위하여 찢긴 바 내 몸이니라.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린바 내 보배로운 피니라.“ 성령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
마 26:26-28, 요 11:40-42 / 이동원 목사
한 크리스챤 작가요 심리학자가 다음과 같은 권두언으로 자신의 책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최근 나의 사무실 스태프들의 월급을 지불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아내는 최근 오른쪽 팔꿈치에 혹이 만져져서 MRI사진을 찍었는데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올 것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아내 캐롤은 또한 홀몬 불균형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아직 효율적인 치료책을 못 찾고 있어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최근 집안 정리나 청소할 시간이 없어 언제 시간을 내어 산만한 집안 살림을 정리할 것인가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최근 미국 대통령의 국정 운영이 너무 맘에 들지 않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물론 이런 모든 문제에 대하여 ‘너희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성경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말씀을 생각할 때 마다 염려를 떨쳐 버리지 못하는 제 자신이 더욱 염려가 됩니다. 저는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 제 자신을 염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증세가 어떻게 내 관절을 아프게 하는지, 어떻게 내 침을 마르게 하는지, 어떻게 내 손바닥에 땀이 나게 하는지, 어떻게 호흡곤란을 일으키는지, 어떻게 소화불량과 위경련을 일으키는지, 어떻게 우울증을 유발시키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와 나의 아내는 우리들의 문제에 대한 너무나 완벽하고 강력한 치료책을 찾아냈습니다. 이 치료제의 효율성은 거의 기적적인 것입니다. 저와 저의 아내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치료제의 효율성을 임상적으로 경험했습니다. 이 치료제는 식전이나 식후에 복용하시면 됩니다. 호흡곤란을 느낄 때 가슴에 통증이 느껴질 때 수시로 복용하실 수도 있습니다. 물과 함께 드실 수도 있고 물 없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특별한 처방 천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 치료제는 절대로 부작용이 없고 안전합니다. 더욱이 이 치료제는 무료입니다. 이 치료책을 일컬어 저는 ‘댕큐 테라피’(thank-you therapy)라고 부릅니다. 이 이야기는 단 베이커(Don Baker)라는 분이 자신의 책 ‘탱큐 테라피’를 소개하며 한 말입니다.
그런데 오래전 지금으로부터 이 천년 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문자 그대로 ‘탱큐 테라피’를 자신의 평생에 적용하며 사신 분이셨습니다. 오늘 목장 종려 주일을 맞아 우리는 예수님의 또 하나의 거룩한 습관인 감사에 대하여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지상생애에 나타난 일상의 자취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언제 어떻게 감사하며 우리의 일생을 살 것인가를 학습하고자 합니다.
첫째 질문은, ‘언제 감사할 것인가’입니다.
1. 음식을 취하기 전 감사하십시오.
성도 여러분, 식사 전에 반드시 기도하십니까? 꼭 매끼 먹을 때마다 기도해야 하느냐고 반문하실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범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의 본문이 최후 만찬의 장에서 27절에 보면 예수께서 또 잔을 가지사--무엇을 하셨습니까? 맞습니다. 감사기도를 하시고 떡과 잔을 나누시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이것은 최후의 만찬 때만이 아니었습니다. 유명한 5병2어의 기적에 앞서 그분은 먼저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고 했습니다. ‘감사했다’는 말입니다. 감사는 그분의 거룩한 습관이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분이 주님이시라면 그 일용할 양식을 받고 이 땅에 생존의 은혜를 누림을 인하여 우리가 그분에게 감사하는 것은 얼마나 당연한 일이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아직도 적지 않은 인류들이 생존의 문제로 씨름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먹을 수 있는 은혜가 적은 은혜이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오늘처럼 문명사의 기적을 이룬 21세기에도 유엔 식량 농업기구(FAO,2003년 통계)에 의하면 지상에서는 세계 인구 가운데 8억 4천 이백만이 기아인구라는 것을 아십니까? 이것은 적어도 이 땅에 살고 있는 전 세계 인구 의14%, 그러니까 7-8명중 한 사람은 하루 한끼 양식을 해결하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들 중 매년 약 2천만 명이 기아로 죽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생존의 현실이라면 우리가 한 끼의 식량을 앞에 놓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는 얼마나 절실한 일상의 기도이겠습니까? 가정이든 직장이든 식사 전에 기도하심으로 나의 생존의 원천이 그분 이신 것을 고백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나 동시에 나처럼 먹지 못하는 이웃들에게도 먹을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2. 축복을 인지할 때 감사하십시오.
우리 말 성경번역에서 예수께서 식사 전에 ‘감사하셨다’를 많은 경우 ‘축사하시고’라고 번역한 것을 볼수 있습니다. 거의 신약 성경에서는 ‘감사’와 ‘축복’이 동의어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작은 식량이라도 먹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인지하셨고, 그래서 그분의 식전 ‘감사의 기도’는 동시에 그 축복이 다시 나누어 지기를 소원하신 ‘축복의 기도’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축복의 기도는 다시 축복을 나누는 기적을 초래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5병2어 기적의 본질이었던 것입니다. 마태 14:19의 소위 5병2어의 기적의 현장의 리포트를 다시 읽어 보십시오. “무리를 명하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감사하시고)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사실 이 상황에서의 감사는 매우 비현실적인 것이지 않았습니까? 무리들의 필요는 엄청났는데(마태14:21에는 먹은 사람이 여자와 어린이외에 오천 명--그러니까 실제로 2만 명 가까운 군중들이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한 아이가 가져온 점심은 겨우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라도 감사할 수 있었을 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5병2어의 기적의 정체는 차라리 ‘감사의 기적’이라고 할만 합니다.
그래서 유명한 스펄전 목사는 “한 자루의 촛불을 인하여 감사하는 자에게는 별빛을 주시고, 별빛을 인하여 감사하는 자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인하여 감사하는 자에게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인하여 감사하는 자에게는 햇빛도 필요 없는 천국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그것이 축복임을 인지할 때 예수님처럼 즉각적으로 감사하십시오. 감사는 또 다른 축복과 기적을 가져 올 것입니다.
3. 삶의 위기 앞에서 감사하십시오.
예수님은 언제 감사하셨습니까? 그는 식사 전에 그리고 축복을 인지하셨을 때 감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또 언제 감사하셨을까요? 그는 위기 앞에서 감사하셨습니다. 오늘의 두개의 본문의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두개의 본문이 다 삶의 위기를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본문인 마태복음 26장은 소위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의 예수님의 감사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마지막 만찬이 끝나면 당신이 체포당하시고 십자가로 가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가 지금 나누시고 있는 떡은 잠시 후 십자가에서 부서져야 할 그의 몸이셨습니다. 그것이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하신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지금 나누시고 있는 잔은 잠시 후 십자가에서 흘리셔야 할 그의 피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마태 26:28에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이런 당신 자신의 인생의 최대 최후의 위기인 죽음의 위기 앞에서 예수님은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계셨습니다.
둘째 본문인 요한복음11장은 예수님의 사랑스런 친구가 직면한 위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친구가 병을 앓다가 갑자기 죽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친구의 무덤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는 친구의 죽음이 친구의 부활의 현장이 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여전히 슬픈 것이고 아픈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친구의 무덤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슬픔은 이내 감사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11:41을 읽어 보십시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이 죽음의 마당에서도 기도할수 있다는 것, 그리고 기도하면 그 기도를 들으실 아버지가 계시다는 사실을 인하여 감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본문이 던지는 가장 큰 질문과 연결됩니다. 어떻게 그분이 자신의 죽음 앞에서 그리고 친구의 죽음 앞에서도 감사할 수 있으셨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질문을 해결할 수 있다면 우리는 문자 그대로 축복을 인지하는 소위 축복된 순간만이 아닌 어떤 삶의 위기, 어떤 삶의 상황에서도 범사에 감사하며 살수가 있을 것입니다.
둘째 질문(결론적 질문)은, ‘어떻게 감사하며 살아갈 것인가’입니다.
그 대답은 난해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그 성경적 대답은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슬프고 아픈 상황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이 다스리고 있음을 믿으시면 됩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를 믿으시면 됩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확신위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계셨다고 믿습니다. 그 분의 죽으심이 인류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것을 믿으셨기에 십자가의 피의 잔도 감사로 받으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또한 친구의 죽음조차도 인류에게 부활의 소망을 가르치는 도구가 될 것을 믿으셨기에 감사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만일 우리도 우리의 삶에서 부딪히는 모든 역경의 상황 배후에 존재하고 움직이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 오늘은 보이지도 않고 이해도 안 되지만 내일에 보여 지고 이루어질 그 선하신 뜻을 믿을 수만 있다면 바울 사도가 가르친 그대로 우리도 ‘범사에 감사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5:18의 말씀을 같이 읽어 보실까요.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그러므로 이 설교 서두에 언급한 소위 댕큐 테라피는 이런 하나님의 주권을 수용하고 살아가는 성도들만이 적용할 수 있는 인생의 처방인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야 말로 인생의 고난을 승리로, 죽음을 부활로 바꾸어 사는 기적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종려 주일의 메시지를 감사 테라피(치유법)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저는 다시 제이 데니스(Jay Dennis)라는 한 설교자가 소개하는 ‘감사 테라피’의 위력을 증언해 드림으로 이 설교를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들어 보십시오.“당신이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에게 안정된 직장과 사업장이 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몸무게가 늘어 옷이 맞지 않는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은 먹을 것이 넉넉한 인생을 살아오신 것입니다. 세탁할 옷이 집안 한 구석에 쌓여 있거든 감사하십시오. 당신에게는 적어도 갈아입을 옷의 여유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집에 대 청소가 필요하고 문고리를 갈아야 하고 창문을 갈아야 한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의 몸을 위탁할 집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멀리라도 주차할 공간을 찾았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에게 잠시라도 걸어갈 운동의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 불평할 대통령이 있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뒷 자리에 앉아 있는 교우의 찬송 음정이 억망으로 들려오고 있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의 청각은 정상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울리는 자명종 소리가 고통스럽게 들리거든 감사하십시오. 당신에게 일어나 일해야 할 하루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해가 저물어 온몸이 나른하고 피곤하거든 감사하십시오. 당신은 오늘 하루를 생산적으로 사신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목장 모임이 여러 가지 문제를 나누는 기도의 마당일 뿐 아니라, 감사를 나누는 목장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물론 힘들고 어려운 문제들이 너무 많지만 기도할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기도를 나눌수 있는 목장이 있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기도를 올려 드릴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이 감사하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우리의 기도에 선하신 응답이 이루어 질 것을 믿기에 감사하는 목장-이런 목장이야말로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의 테이블처럼 구원의 은혜와 부활의 기적을 경험하는 축복의 마당이 될 것을 믿습니다. 감사하십시다. 감사를 습관화 하십시다. 그러면 오늘 종려 주일을 맞아 우리도 호산나를 외치던 예루살렘의 아이들처럼 큰 소리로 외쳐보십시다. “감사합니다. 주님/Thank You-Lord”라고. 할렐루야!
감사하는 습관이 축복을 부릅니다
마 26:26-30 / 문기태 목사
여러분,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원하십니까? 생활습관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스트레쓰를 받지 않고 즐겁게 살고 싶습니까? 그럼 생활습관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성공하고 싶습니까? 그럼 생활습관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믿음이 잘 성장하여 좋은 열매를 많이 맺고 싶습니까? 그러면 생활습관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잘못된 생활 습관이 자신의 삶을 망칩니다. 나쁜 습관을 고치지 않으면 질병에 노출되어 고생을 많이 합니다. 나쁜 습관을 다스리지 못하면 중독의 올무에 갇히게 됩니다. 중독된 습관은 몸과 마음, 삶을 망치게 합니다. 모든 일에 성공하는 사람들은 성공을 부르는 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똑같은 상황인데 어떤 사람은 성공하려는 동기를 끝까지 잃지 않고 어떤 사람은 쉽게 포기합니다. 같은 상황인데 어떤 사람은 여유있게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스트레스로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마음의 습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습관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축복된 삶을 기대한다면 좋은 생각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자신을 훈련해야 합니다.
미국 조지아주 중서부에서 대부호로 명성을 떨친 레스터가(家)가 있었습니다. 레스터는 이곳에서 담배농사를 지어 많은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는 주변의 농토들을 모두 사들여 담배농사를 지었습니다. 레스터의 땅을 밟지 않고는 주민들이 마을에 들어올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길을 토바코 로드로 불렀습니다.
레스터는 후손들에게 엄청난 땅과 돈을 유산으로 남겨 주었습니다. 그런데 레스터의 3대 후손들은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3대손인 지이터가 소작농으로 전락해 유일하게 그 마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17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5명은 일찍 사망했고 9명은 가출했습니다. 이 부부는 고향을 지키며 외로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지이터 부부가 잡초더미에 불을 놓았는데 그 불이 집에 옮겨 붙어 타죽고 말았습니다. 땅과 돈만 유산으로 물려주고 좋은 습관을 물려주지 않으므로 저주를 부르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녀에게 돈 대신 좋은 습관을 유산으로 남겨줍니다. 철학이 없는 많은 유산은 자녀를 불행한 늪으로 몰아 갑니다. 여러분은 자녀에게 좋은 습관을 심어 주고 계십니까? 아니면 자식은 고생해선 안된다고 유산을 물려주시기 위해 뼈를 깎는 고통으로 일에 몰두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어떤 크나큰 계기나 사건이 나의 인생을 변화시켜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을 요술처럼 멋지게 만들어 주고 성공시켜 주는 것은 연속적으로 반복되는 작은 일들입니다. 우리를 참으로 복되게 하는 것은 작지만 좋은 습관들입니다.
습관이란 '무엇이든 여러 번 거듭하는 사이에 몸에 배어 굳어진 성질'을 말합니다. 어떤 습관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성패와 행불행이 결정됩니다.
어거스틴은 '신앙이란 거룩한 습관을 들여가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다름이 아니라, 거룩한 것이 몸에 배어 습관화 되게 하는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훈련과정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 역시 좋은 습관을 많이 가지고 사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 16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예수님은 습관에 따라서 안식일 날 회당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습관에 따라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읽은 것이 아니고 성경을 읽는 것이 습관화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막 10:1) 여기 '전례대로'라는 말을 표준 새번역에는 '늘 하시던 대로'로 번역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습관을 따라서 가르치셨습니다. 뭘 가르쳤습니까?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입을 여시면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전도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 가셨습니다.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만나면 전도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습관화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또 하나의 습관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눅22:39절) 표준새번역은 이것도 '늘 하시던 대로'라고 번역했습니다. 예수님은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기도생활을 통해 경건이 습관이 되었고 중요한 순간마다 기도를 통해 승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습관이 많았습니다. 좋은 생활을 반복하여 훈련하며 경건하고 의로운 삶이 몸에 배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치실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또 하나의 중요한 습관을 가지고 생활하셨음을 보여 주십니다. 최후의 만찬자리에서도 떡과 잔을 앞에 놓고 축복과 감사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것도 이날만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늘 하시던 대로 하신 것입니다. 요6:11에 보면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는 기적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적은 마술로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나눠주시니까 계속 바구니에서 떡과 생선이 나온 것입니다. 축사가 무엇입니까? 축복과 감사입니다. 표준새번역은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감사기도가 기적을 가져온 것입니다. 감사하는 습관이 축복을 부릅니다.
요한복음11장은 나사로의 죽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하는 친구가 병을 앓다가 갑자기 죽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친구의 무덤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슬픈 것이고 아픈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친구의 무덤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슬픔은 이내 감사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11:41을 읽어 보십시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이 죽음의 마당에서도 기도할수 있다는 것, 그리고 기도하면서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아름다운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감사하는 습관이 몸에 배셨습니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의 자리에서도 음식을 놓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이 어떻게 감사하는 습관을 형성해 갈 수 있습니까?
1. 음식을 먹을 때마다 감사하십시오.(27)
여러분, 식사 전에 반드시 기도하십니까? 뭐라고 기도하십니까? 식사 기도를 감사의 기도로 드리십시오. 꼭 매끼 먹을 때마다 기도해야 하느냐?고 감사해야 하느냐? 고 생각하실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범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의 본문 27절을 보면 예수님이 감사기도를 하시고 떡과 잔을 나누시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이것은 최후의 만찬 때만이 아니었습니다. 유명한 5병2어의 기적에 앞서 그분은 먼저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고 했습니다. '감사했다'는 말입니다. 감사는 그분의 거룩한 습관이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분이 예수님이시라면 그 일용할 양식을 받고 공급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아직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먹을 것이 부족하여 굶주리고 있는데 먹을 수 있는 은혜가 적은 은혜이겠습니까?
유엔 식량 농업기구의 통계에 의하면 지상에서는 세계 인구 가운데 8억 4천 이백만이 기아인구라고 합니다. 이것은 적어도 이 땅에 살고 있는 전 세계 인구 의14%, 그러니까 7-8명중 한 사람은 하루 한끼 양식을 해결하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매년 약 2천만 명이 기아로 죽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현실이라면 우리가 매 끼마다 음식을 앞에 놓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않습니까?
또한 날마다 식사기도를 드리며 감사를 표현하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축복을 부르는 좋은 습관이 몸에 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에게 축복을 부르는 감사의 습관을 몸에 익히도록 좋은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2. 작은 은혜라도 임할때 감사하십시오.(26)
어느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식사기도를 하는 기준이 애매하단 말이야. 간식으로 과일 한쪽을 먹을 때에도 매번 기도를 해야 하나?" 어떤 목사님이 조크로 3천원 이상만 감사기도하면 되지!
우리 말 성경번역에서 예수께서 식사 전에 '감사하셨다'를 많은 경우 '축사하시고'라고 번역한 것을 볼수 있습니다. 거의 신약 성경에서는 '감사'와 '축복'이 동의어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작은 식량이라도 먹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인지하셨고, 그래서 그분의 식전 '감사의 기도'는 동시에 그 축복이 다시 나누어 지기를 소원하신 '축복의 기도'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감사의 기도는 다시 축복을 나누는 기적을 불러왔던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광야에서도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음식을 나누어 주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실제 2만 명 가까운 군중들이 배불리 먹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감사가 축복을 불러온 것입니다. 한 아이가 가져온 점심은 겨우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족하다고 불평하지 않고 그것이라도 감사하였을 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유명한 스펄전 목사는 "한 자루의 촛불을 인하여 감사하는 자에게는 별빛을 주시고, 별빛을 인하여 감사하는 자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인하여 감사하는 자에게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인하여 감사하는 자에게는 햇빛도 필요 없는 천국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그것이 축복임을 깨달을 때 예수님처럼 즉각적으로 감사하십시오. 감사는 또 다른 축복과 기적을 가져 올 것입니다.
3. 삶의 위기 앞에서 감사하십시오.
예수님은 언제 감사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위기 앞에서 감사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에는 예수님의 위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소위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예수님은 감사기도를 드리십니다. 예수님은 이 마지막 만찬이 끝나면 당신이 체포당하시고 십자가로 가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가 지금 나누시고 있는 떡은 잠시 후 십자가에서 부서져야 할 그의 몸이셨습니다. 그것이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하신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지금 나누시고 있는 잔은 잠시 후 십자가에서 흘리셔야 할 그의 피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마태 26:28에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이런 당신 자신의 인생의 최대의 위기인 죽음앞에서 예수님은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위기를 만나면 마음의 여유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감사를 잊기 쉽습니다. 감사를 잘 하는 사람도 감사대신 불평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습관이 어떤 상황에서든지 축복을 부른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감사하는 성도들에게는 원수 마귀의 간계가 통하지 않습니다. 위기를 맞게 하여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다가온 사단의 세력이 당연히 불평하고 원망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기도하며 감사까지 하는 우리의 모습을 볼 때 얼마나 당황하겠습니까? 여러분 감사를 통하여 마귀를 당황시키며 사시기 바랍니다. 놀라서 단숨에 도망가게 만듭시다.
만일 우리도 우리의 삶에서 부딪히는 모든 역경의 상황 배후에 존재하고 움직이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 오늘은 보이지도 않고 이해도 안 되지만 내일에 보여 지고 이루어질 그 선하신 뜻을 믿을 수만 있다면 바울 사도가 가르친 그대로 우리도 '범사에 감사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당신이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에게 안정된 직장과 사업장이 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몸무게가 늘어 옷이 맞지 않는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은 먹을 것이 넉넉한 인생을 살아오신 것입니다. 세탁할 옷이 집안 한 구석에 쌓여 있거든 감사하십시오. 당신에게는 적어도 갈아입을 옷의 여유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집에 대 청소가 필요하고 문고리를 갈아야 하고 창문을 갈아야 한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의 몸을 위탁할 집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멀리라도 주차할 공간을 찾았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에게 잠시라도 걸어갈 운동의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 불평할 대통령이 있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뒷 자리에 앉아 있는 교우의 찬송 음정이 억망으로 들려오고 있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의 청각은 정상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울리는 자명종 소리가 고통스럽게 들리거든 감사하십시오. 당신에게 일어나 일해야 할 하루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해가 저물어 온몸이 나른하고 피곤하거든 감사하십시오. 당신은 오늘 하루를 생산적으로 사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