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창렬 기자 입력 2021.07.03 03:00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야권의 승리가 유력한 상황이 되자, 야당 후보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박근혜 후보와 이명박 후보는 서로 상대방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박 후보 진영에서 BBK 의혹을 제기하고 나섰고, 이 후보 진영에서도 반격할 무기를 만들었다. 고(故) 최태민 목사 일가가 박 후보가 이사장으로 있던 육영재단 운영에 개입했다는 의혹 등을 50여쪽 분량으로 정리해 CD에 담았다. 이른바 ‘박근혜 CD’ ’최태민 파일' 등으로 불린 ‘X파일’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 후보 진영에 몸담았던 A 전 의원은 “당시는 사생결단을 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최 목사와 박 후보의 관계에 대한 자료를 긁어모았고, 은밀히 꼼꼼하게 취재해서 파일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파일은 세상에 공개되지 않았다. A 전 의원은 “파일을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즉각 공개하지는 않는다. 후보의 지지율이나 추세 등을 보고, 파일을 공개했을 경우 득보다 실이 더 많다고 판단해 공개하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국어사전(우리말샘)은 X파일에 대해 ‘아직 알지 못하여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일이나 사건에 관한 문서나 서류’라고 정의한다. 대선을 앞두고 작성되는 문건 등으로 의미를 좁히면, 대선 X파일은 특정 후보에 대한 은밀한 정보를 담고 있는 자료를 뜻한다. 1992년 대선에서 터진 초원복집 녹음 파일, 2002년 대선에서 김대업 녹음 파일, 2007년 대선 당시 이명박 BBK 파일, 박근혜 CD 등이 이에 해당한다. 대선이 내년 3월로 다가오면서 다시 X파일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과거와는 뭔가 다르다. 여의도 정가에서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에 대한 X파일 종류가 11개나 된다는 말이 나온다. 이 파일들은 IT 기술로 개발된 메신저 등을 타고 급속히 퍼져나가고 있다. 하지만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 없고, 정확한 내용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X파일이 있다’는 얘기만 들릴 뿐이다. 왜 그럴까. 그래픽=김현국 ◇녹음기·CD에 담겨 위세 떨쳤던 X파일 초기 대선판에 영향을 끼쳤던 X파일은 카세트테이프에 담겼다. 소수만 존재를 알았고, 세상에 공개되자 대선판은 요동쳤다. 이른바 ‘초원복집 사건’이 대표적이다. 1992년 12월, 대선을 일주일 앞두고 부산 출신인 김기춘 전 법무장관과 부산시장, 부산지방경찰청장, 국가안전기획부(현 국정원) 부산지부장 등이 한 음식점에 모여 “우리가 남이가. 이번에 (김영삼 후보가 당선 안 되면) 영도 다리에 빠져 죽자”라고 말한 음성이 몰래 녹음됐다. 야당 관계자와 전직 안기부 직원이 사전에 모임을 파악했고, 몰래 녹음 장치를 설치했다. 야당의 정주영 후보 진영이 이를 폭로하자, 영남 지역 유권자들이 민주당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우려해 결집했다. 결국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면서 이 파일은 대선 판에 큰 변수로 작용했다. 김태일 장안대 총장은 “이 파일은 명백한 팩트였고, 극소수의 사람만 갖고 있다가 공개됐다는 점에서 강력한 X파일이었다”고 말했다. 2002년 대선에서도 녹음 파일이 공개돼 큰 파문이 일었다. 군 의무부사관 출신인 김대업씨는 당시 야당 후보인 이회창씨의 장남이 국군수도병원 부사관에게 돈을 주고 청탁해 병역을 면제받았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김씨는 그 증거로 해당 부사관이 1999년 병역 비리 수사 때 진술한 것을 녹음해 담았다며 테이프를 검찰에 제출했다. 그러나 이후 검찰은 이 녹음테이프가 조작된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2002년 노무현 후보가 당선된 후, 김씨는 2004년 2월 대법원에서 무고와 명예훼손 혐의 등으로 징역 1년 10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차재원 부산 가톨릭대 특임교수는 “잘못된 정보로 대통령 자리까지 영향을 끼쳤던 나쁜 사례”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5년 뒤에도 X파일이 등장했다. 이때는 녹음 파일이 아닌 문서로 존재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자리를 놓고 경쟁한 이명박·박근혜 후보 진영은 ‘BBK 파일’과 ‘박근혜 CD’ 등의 파일을 만들어 상대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다. 당시 한나라당에 몸담았던 한 인사는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다며 자료를 들고 와 줄을 서는 사람이 많다. 그 자료가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고 하면, 철저히 검증한다. 백방으로 뛰고, 취재도 한다.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형사적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더 철저히 확인했다”고 말했다. 김형준 명지대 교양학부 교수는 “이때 만들어진 X파일은 검증위원회에서 팩트에 기반을 둬 만들어진 것이라 의미가 있다”고 했다. ◇카톡으로 퍼지는 X파일? 희소성도 파괴력도 떨어져 2022년 대선 정국을 앞두고, 윤 전 총장과 가족의 과거 등이 담긴 X파일이 은밀하게 퍼져 나가고 있다. SNS 등을 통해 과거보다 훨씬 빠르게 퍼지고 있지만, 출처를 알 수 없는 데다 아직까진 파괴력에 의문이 남는다. 특정 세력이 작성한 뒤, ‘빵!’ 하고 터트려 큰 반향을 일으켰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윤석열 X파일이 본격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달 말이다. 보수 진영 정치 평론가 장성철씨가 자신의 SNS에 윤석열 X파일을 언급했다. 이후 출처를 알 수 없는 X파일들이 온라인 메신저 등을 통해 유포되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는 ‘윤석열 X파일’이란 제목의 6쪽짜리 PDF 파일이다. 윤 전 총장과 부인·장모의 이력, 누가 그의 책사인지 등이 목차 형식을 통해 담겼다. 그러나 큰 반향을 일으킬 만한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또 다른 파일은 ‘Y_Xfile’이라는 이름을 달고 퍼졌는데, ‘국정원 지하 녹음실’이라는 곳에서 작성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런데 이 문건에는 “윤석열의 이름은 ‘렬’이 아니라 ‘열’로 적어야 한다” “윤석열과 이준석(국민의힘 대표) 이름 획수 궁합이 70%다'라는 식의 황당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밖에 윤 전 총장의 부인 김건희씨의 과거와 예명 등이 윤석열 X파일의 주요 내용이라는 지라시가 200자 원고지 6.8장 분량으로 요약돼 급속히 퍼지기도 했다. 김씨는 지난달 30일 언론 인터뷰를 통해 X파일에 등장하는 자신의 과거가 사실이 아니라고 강하게 부인하며 법적 대응을 예고했다. 정태근 전 한나라당 의원은 “확인되지 않은 정보가 너무 많이 유통되다 보니 유권자들이 신뢰하지 않는다. 정보는 많은데 정작 눈여겨볼 정보가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10가지 넘는 X파일이 떠도는데 내용이 명쾌히 공개되지 않았다는 점도 특이하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신빙성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자칫 공개했다가 사실과 다를 때 형사처벌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종근 데일리안 전 논설실장은 “폭발력이 있던 과거의 X파일과 달리 지금 돌아다니는 X파일은 특정 후보에게 ‘뭔가가 있다’는 것을 은밀하고 광범위하게 알려서 흠집 내는 게 주된 목적”이라고 분석했다. 국민들의 오랜 학습효과로 파괴력이 떨어진다는 분석도 있다. 차재원 부산가톨릭대 특임교수는 “과거 허위로 판명 난 김대업 사건을 경험했고, SNS로 퍼나르는 카더라식 소문에 이골이 난 탓에 X파일을 정치적 흑색선전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