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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稱贊)의 위력
김영대(충북도립대학 겸임교수.사회복지학박사)
며칠전 36년여간의 군생을 마감한 고귀한 친구로부터 자유월간지의 원고를 청탁받고 적잖은 고민을 해오다 큰 맘 먹고 펜을 잡았다. 나도 조금 늦은 나이에 입대해 32개월여를 근무하고 당당하게 육군 병장으로, 내 아들 역시 학군 장교로 전역했으니 군(軍) 관련 간행본에 글을 게재할 기회를 갖는다는게 자랑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문제는 마땅한 주제와 소재를 선정하는데 어려움이 따랐다 . 장고 끝에 남다르게 파란만장한 나의 젊은시절 인생사 과정과, 남다른 자식사랑과 독특하고도 고집스럽게 자식을 훈육시킨 나의 아버지 얘기로 보따리를 풀어 보기로 마음 먹는다.
<나의 불량시기>
현재는 대학 강단에서 후진 양성을 위해, 그리고 전국의 교육장이나 행사 와 관련한 기획사들로부터 잦은 콜을 받는 제법 그럴싸한 명강사(?) 로 활동 중 이지만 사실 나의 과거사 속내를 들여다 보면 참으로 기고만장하고 가관인, 한편으로 생각하면 털어 놓기조차 민망할 정도의 부정적 젊은 시절을 보냈 장본인 이다. 한마디로 나의 학창 시절은 불량스러운 질풍노도기 였다. ‘아주 얌전하고 공부만 잘하는 모범생’ 이었을 것으로 알고 있는 나의 주위 사람들이 이 글을 통해 많이 놀랄 것으로 우려된다. 특히 내 집사람과 아이들이 이 글을 통해 나의 과거 전력을 속속들이 알게되면 받을 충격은 태풍이겠지만, 젊은 시절의 말썽사건 시효기간(?)도 지났을 것이라 판단하기에....그리고 많은 관계자들이 이 글을 통해 칭찬의 위력과 기다림의 미덕에 필요성을 재인식 하는데 적잖은 도움이 될것이란 신념이 더 크고 위대하기에 이 내용을 털어 놓기로 마음 먹엇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2학기부터 거의 공부를 포기한 채 불량학생들과 휩쓸려 다니며 폭력이나 휘두르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던 천하에 못된 악동이었던 사실을 간단명료하게 고백 한다. 대략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중반의 10여년간 나를 포함해 5~6명 까까머리 또래들은 충북 청원지역의 한 농촌마을 고향을 주 무대로 어른들 담배를 훔쳐다 피우고, 막걸리 (밀주)도 마시고, 이웃집 호박에 말뚝박기에서부터 참외 수박 복숭아 등 갖가지 먹거리 농작물 서리(절도), 계란에 닭까지 훔쳐 잡아먹기 등등 갖가지 못된짓 거리만을 골라 자행하는 악동 패거리의 일원 이엇다. 거기에다 학교가기가 너무 싫어 공부와는 아예 담을 쌓았다. 때문에 우리 부모님들은 거의 매일 속을 태우며 수많은 세월을 보냈고 6학년이 돼서는 중학교 입학을 포기하는 비진학 반을 택해 빈둥거리며 겨우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한 문제아 였다.
다른 친구 대부분은 초등학교 졸업 후 농삿일이나 조기취업으로 고향을 떠났지만 유독 나의 부친만은 ‘그래도 중학교는 나와야 사람 구실을 할수 있다’며 계속해 중학교 진학을 권유 하셨다. 지칠만도 하지만 아버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사랑의 관심과 칭찬을 행 하셨다. 결국 이듬해 중학교를 억지춘향 식으로 입학해 졸업을 했고, 다시 어렵사리 취업을 위해 들어간 직업훈련소(R.tv과)에서도 민망한 사고를 쳐 도중하차 했으며, 다시 이듬해 청주 소재 C고등학교를 입학 했지만 순탄한 학교생활을 하지 못했다. 결국 10년이면 가능한 중학교에서 대학까지의 학창시절이 퇴학과 제적, 일반휴학과 군입대 등으로 모두 20여년이 지난 30대에 겨우겨우 대학 졸업장을 받을 수 있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후 조용히 생각해 보면 아슬아슬하게 입학과 졸업, 퇴학, 제적, 휴학을 반복한 곡예사의 외줄타기같은 학창시절을 보냈고, 그렇게라도 대학까지 마쳤다는게 기적처럼 느껴진다. 학교를 옮길 때마다 함께 몰려다니는 친구들은 왜그리 많이 생기던지.....
이같은 20년넘는 질풍노도기의 학창시절 동안 지역 지서(지금의 파출소나 지구대)를 제집 드나들듯 했고, 여러 피해보상 문제 등으로 우리 식구들, 특히 나의 아버지는 얼마나 속을 끓이셨는지, 생각 할수록 죄스럽다. 더욱이 아버지는 51세에 날 낳아 학창시절에는 60~70대의 노인네 학부형 이셨다. 이 못난 아들의 줄을 잇는 말썽 때문에 노부친의 고난은 더더욱 가중됐으리라. 아무튼 나의 중고등학교와 대학시절 파란만장한 질풍노도 과정을 설명하자면 책 몇권을 써도 모자랄 듯 싶다.
<나는 너를 믿는다>
분명 우리 아버지는 독특한 분이셨다. 많지 않은 논밭을 경작하는 중농으로 모두 9식구가 그럭저럭 끼니만을 때우는 정도의 대가족 가장으로, 사고뭉치 막내아들 해결사 역할까지 도맡아 하시면서 고단한 노년기를 보내셨다. 60~70년대 당시의 우리나라 전반적 경제와 교육의식 등을 감안해 볼때 보통의 아버지라면 아마도 학교는 포기한 채 농사꾼으로 전환시켰으리라 생각 된다. 하루가 멀다하고 사고를 치는 막내에게 언제나처럼 다시, 또다시 기회를 만들어 주신 나의 아버지는 분명 특히한 분이셨다. 어찌보면 인내심이 남다른 철인 이셨던 것 같다.
갖가지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나의 노부친은 항상 화 보다는 여유와 좋은말(칭찬)로 매사건을 다독이시며 마무리를 지셨다. 분명 성격이 다소 급하신데도 불구하고 일이 터지면 일단은 한동안 뜸을 들이신 후 말과 행동으로 옮기 셨다. 내가 저지른 만행중 가장 두드러진 사건은 크고작은 폭행사건 이었다. 누구와 싸워 상대를 다치게해 보상해준(합의명목) 사례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그 때마다 아버지는 곧바로 반응을 보이지 않으시고 한시간, 두시간, 어느땐 하루가 지나도록 뜸을 들으시기도 했다. 아마도 당신 스스로 화가 어느정도 식은후 차분하게 일처리를 하신게 아닌가 싶다. 일정 시간이 지난후 잘못을 인지시키고 나 역시 잘못했음을 인정하면 그땐 사랑의 매질도 하셨다. 보통 횟초리(뽕나무)로 종아리 수십대 씩을 때리셨다. 거의 매질 때마다 종아리나 허벅지에서 피가 흐르거나 피멍이 들도록 많이 맞았다. 어느땐 상처 딱정이조차 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또 종아리를 맞기도 했다.
요즘 같으면 아무리 본인 자식이라도 분명 폭행혐로 입건조치 될 것이다. 매질을 하신후 아버지는 언제나 나지막한 목소리로 “넌 이세상에 유일한 영대다” “넌 누가 뭐라해도 가장 소중한 내 보물이다” “이 세상에서 난 네가 가장 자랑스럽다” “넌 힘도 세고 머리가 너무 좋아 걱정이다” 등등 듣기 좋은 칭찬성 말을 반복 하셨다. 당시엔 부친의 그런 칭찬이 듣기 싫고, 원망 스럽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사랑채로 건너 가셔서 안에서 문을 잠그고 소리죽여 한동안을 우셨던 것 같다.
어느때는 인적이 없는 뒷동산으로 나를 데리고 올라가 내손을 잡고 한두시간을 토닥여 주셨다. 당시는 귀찮고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기만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나에게 수많은 무언의 말씀을, 그리고 다시 기회를 줄테니 정신차리고 열심히 하라는 말씀을 쏟아낸 것이다. 그같은 독특한 매질과 칭찬의 의식은 사고를 칠 때매다 어김없이 지겹도록 반복됐다.
아버지의 훈계매질이 무섭기도 하고, 그리고 적잖은 죄의식 때문에도 다시는 사고를 치지 말자며 다짐하고 또 다짐을 해 보지만 공부를 외면한 채 자행되는 내 탈선의 욕구와 주변의 달콤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사고뭉치 망나니로 방탕한 생활은 이어졌다. 또 그 유혹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은 내가 학창시절 계속 운동선수로 활동한 것도 이유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6척이 넘는 장신에 단단한 체구, 남다른 운동신경으로 전국체전 등 각종 대회에서 두각을 보이며 한때는 프로선수로의 입단을 권유 받기도 했었다(종목을 밝히기 곤란함을 이해 하시길). 당시 운동부 선후배로 뭉쳐진 꾼(?)들은 단합이 참 잘됐다. 뭉치면 남들과 시비걸고 싸움질하고, 편가르고, 짱(우두머리)먹고......왜그리 통쾌하고 재미 있던지 모르겠다. 그때 물불 가리지 못하고 저지르며 쏴돌아 다닌 행위가 지금은 쓴 웃음을 짓게하는 추억거리로 맴돈다.
<칭찬의 힘은 무한하다>
서두에서 수차 반복한 말이지만 망나니처럼 날뛰던 내가 다소 늦기는 했지만 정신차리고 사람구실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아버지의 연속된 긍정적 칭찬과 때를 기다려 준 것이 밑받침 되지 않았나 싶다. 감히 조심스레 결말지어 본다면 두식두묘(豆植豆苗), 팥식팥묘라 할수 있겠다. 콩심으면 콩이나고 팥심으면 팥이 나지 않는가. 결국 긍정적 언행은 다시 긍정을 낳고 칭찬은 칭찬을 낳는다는 말이다. 뒤집으면 부정은 부정을 양산하고 악행은 악행으로 이어진다는 얘기다.
이와같은 큰 은혜를 입었으니 죽은들 나의 부친에 넓고 높은 은혜를 어찌 잊을수 있겠는가. 어느새 환갑의 초로가 다 됐지만 머리와 마음속엔 항상 나의 부친이 자리하고 계신다. 그리고 항상 머리에서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맴돈다. 언제나 애뜻한 사랑으로 망나니 아들을 감싸주고 때로는 가차없이 매질을 하시던 나의 아버지가.....
나 역시 이 긍정적 칭찬 방식을 자식들에게도 이어주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해오고는 있지만 아직 성과를 판단하긴 이를 듯 싶다. 지난해 학군 장교로 제대한 아들과 내 뒤를 이어 사회복지 박사과정을 공부중인 내 여식에게도 부친에게 얻은 교훈을, 아니 그 이상으로 긍정과 칭찬을 전달하려 남달리 노력해오고는 있지만 그 성과(?)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학교 제자들과 주변인들에게도 전파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지금부터는 부친으로부터 훈육되고 내 스스로 체험된 나름의 칭찬 위력을(좋은점)을 두서없이 나열해 보고자 한다.
우선 칭찬이란 다소 원론적인 얘기지만 뭔가 부족한 사람에게 충족감을 줄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칭찬을 받으면 몸과 마음이 가벼워져 힘이 안들기 때문에 맡은 업무나 공부 등이 좋은 성과를 낼수 있다. 돈을 주면 순간은 고맙지만 칭찬은 두고두고 기쁨을 쏟아내는 샘물과 같다. 가능한 상대 본인도 모르는 장점을 찿아 칭찬해 주면 기대치 이상의 효과가 나온다. 그리고 상호간에 칭찬을 주고 받는 조직(부서)은 분명 성골할 수 뿐이 없으며, 설령 실패한다 해도 칭찬이 디딤돌이 돼 다시 회생할 확률이 높다.
해가 뜨면 별이 보이지 않듯 칭찬이 늘어나면 자연스레 원망도 신기하게 없어 진다. 칭찬은 아름다운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에 칭찬을 하는 사람은 마음과 얼굴표정이 평온해 진다. 이와함께 자신을 칭찬하는 사람만이 남도 칭찬할 수 있다. 때문에 먼저 자신을 칭찬하는게 순서다.
결국 유일무이(有一無二)란 자기 존중이 우선이란 의미 아닌가 싶다. 가능한 남의 약점은 듣지도 말하지도 말아야 한다. 특히 가족이나 구성원들끼리는 더더욱 약점을 들춰내는 대신 장점을 말해주는 버릇을 길러야 한다. 또 칭찬은 웃음꽃을 만들어 주는 예술적 구어라 생각한다. 장미도 백합도 진달래도 아름답지만 웃음꽃 만큼 아름답지는 못하다.
기(氣)가 살아야 운도 산다. 사람의 기를 살리는 유일한 처방은 칭찬 일게다. 병원 의료진 처방은 돈이 들지만 칭찬 처방은 무료 아닌가. 칭찬을 받고 싶으면 그대가 먼저 칭찬을 해라. 칭찬말을 들은 상대는 절대 화를 내고 인상을 찌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다.
<내 부친의 금기 사항>
일상속의 칭찬과 함께 나의 부친은 다음 사항을 금기시 하라고 입버릇처럼 나를 훈육 시켰다.
우선 첫째는 조급하지마라(급하면 실수할 확률이 높다), 먼저 화를 내지 마라(화는 이성을 잃어 가슴에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남을 시기하지 마라(시기하는 순간 창조와 생산성은 중단된다), 실망하지 마라(낙심하면 절망이 따라 온다), 속이지 마라(속임에 끝은 결국에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게으름 피우지 마라(게으름은 몸과 마음을 병들게 만든다) 등등 몇몇 금기해야 할 문구를 사랑채 벽면에 붓으로 크게 써 놓으시고 매일 반복해 읽으시라 명(命)하셨다.
88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단 한차례도 주변인들에게, 특히 자식들 앞에서 사소한 실수조차 않으신 나의 부친은 나의 영원한 우상이다. 그리고 너무너무 그립다. 우리모두 일상 생활속에 칭찬을 접목시켜 보자
<5406kyd@hanmail.net>.
첫댓글 오랜세월 직업상 글은 많이 대해 왔지만 수필부문은 난생 처음으로 써 봤습니다. 다행히 본 글이 발행처로부터 수작으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용기를 내 조심스레 공개해 봅니다. 본 카페에는 훌륭한 작가님들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흉이나 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어느때는 인적이 없는 뒷동산으로 나를 데리고 올라가 내손을 잡고 한두시간을 토닥여 주셨다. 당시는 귀찮고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기만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나에게 수많은 무언의 말씀을, 그리고 다시 기회를 줄테니 정신차리고 열심히 하라는 말씀을 쏟아낸 것이다. 그같은 독특한 매질과 칭찬의 의식은 사고를 칠 때매다 어김없이 지겹도록 반복됐다.
아버지의 훈계매질이 무섭기도 하고, 그리고 적잖은 죄의식 때문에도 다시는 사고를 치지 말자며 다짐하고 또 다짐을 해 보지만 공부를 외면한 채 자행되는 내 탈선의 욕구와 주변의 달콤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사고뭉치 망나니로 방탕한 생활은 이어졌다. "
" 우선 첫째는 조급하지마라(급하면 실수할 확률이 높다), 먼저 화를 내지 마라(화는 이성을 잃어 가슴에 상처를 주기 때문이다), 남을 시기하지 마라(시기하는 순간 창조와 생산성은 중단된다), 실망하지 마라(낙심하면 절망이 따라 온다), 속이지 마라(속임에 끝은 결국에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게으름 피우지 마라(게으름은 몸과 마음을 병들게 만든다) 등등 몇몇 금기해야 할 문구를 사랑채 벽면에 붓으로 크게 써 놓으시고 매일 반복해 읽으시라 명(命)하셨다."
@덕유 교수님!!! 안녕하시죠? 항상 마음만 있고, 찿아 뵙지도 못해 참으로 송구 합니다. 여러모로 부족하고 철없는 제자를 용서해 주십시요.
그런데 교수님 핸드폰도 없으시고.....연락드릴 길이 없습니다.
선생님 정말 멋지게 살아오신 인생 대작입니다. 한줄한줄 읽으면서 감동 받았습니다. 훌용하신 부모님이 셨습니다.
그런 부모님은 이세상 몇분 없습니다. 부모님 복도 있었지만 선생님께서 타고 난 인생의 운입니다. 내 부친의 금기사황. 인간의 진리가 아니던가요. 선생님은 인생의 걸작입니다.
예원님의 성원 감사 합니다. ^^
“넌 이세상에 유일한 영대다” “넌 누가 뭐라해도 가장 소중한 내 보물이다”
“이 세상에서 난 네가 가장 자랑스럽다” “넌 힘도 세고 머리가 너무 좋아 걱정이다”
기(氣)가 살아야 운도 산다. 사람의 기를 살리는 유일한 처방은 칭찬 일게다..
천천히...감상 잘했습니다. 좋은글 자주 올려주십시오. 고맙습니다선생님.
진심으로 감사 합니다. ^^
이제야 김대감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교수님의 과거사가 자꾸만 웃게 만듭니다. 현재의 모습과 영 다르셔서요. 아버님의 가정교육은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교수님이 그렇게 당당하신 게 아버님의 칭찬이셨네요. 한동네서 뵙다가 지면으로 뵈니 더욱 반갑습니다.
감사 합니다..ㅎㅎ 고기 거하게 한번 쏘겠습니다..틈만 내주시면 언제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