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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염화실 원문보기 글쓴이: 無憂手
그게 하나라고 원융이라는 말이 하나라는 뜻이야. 圓融해서. 하나라고 하는 말보다는「원융하다」라고 하는게 좋잖아요. 원융하다. 『서로 원만하게 융통된다』 이 말이야 融通. 융통된다. 우리가 그 융화 또는 융통 이러면은 뭐여? 어디든지 다 통한다 이거지. 뭐 과가 다르고 하다고 뭐 거기 못가고 이야기 못하는게 아니라, 과가 아무리 달라도 융통하고 원융하면 막 그냥 無事不通이야. 그냥 막 그냥 통할 수가 있다고요. 이집 저집. 원융한 관계는요 이집 저집 그냥 막 가도 돼. 무상출입 벨도 안 누르고 막 들어가도 괜찮은 그런 관계를 圓融이라고 그래. 그런 관계라고요 이게.
눈에 보이는 것하고 안보이는 것하고 본래 그런 관계라. 그러니 無二相이라고 그랬잖아요. 두 가지 모양이 없어. 둘로 나눠져 있는 것 같지. 말하고 마음하고 다른 것 같지. 또 외모하고 그 속의 그 사람의 그 보이지 않는 그 마음의 어떤 씀씀이 用心하고 다른 것 같지요? 천만에 같은거야. 용심대로 모습이 나타나는 거야. 모습은 그대로 안보이는 마음의 어떤 그 모습이지 뭐 다른 겁니까? 어째서 그럼 그 모습이 그렇게 왔는데? 생각도 안하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 생겼단 말이야? 그건 말도 아니지. 원인없는 그 결과가 어딨습니까. 모습은 結果라면 마음 씀, 用心은 原因이거든요. 원인이라고.
그래 잘 보면은 내면까지 다 알 수 있어. 우리가 하도 이제 삼독에 찌들려가지고 눈이 어두워서 제대로 파악을 못해서 그렇지. 제대로만 파악하면은 환~히 속을 알 수가 있는 거지요 사실은. 그 너무 그렇게 마음 쓸 건 없습니다. 왜냐? 전부 번뇌(煩惱)에 찌들려가지고 못 보니까 상관없어요. 못 보니까 상관없어요. 나도 못 봐요. 신경 쓸거 없어요 그거. 마음 놔도 됩니다.
그러나 둘이 아니라는 사실 요건 알아야 돼요. 둘이 아니라는 사실. “아! 그 사람 보기보단 다르다”고 그건 억지로 다르려고 할 때 조금 어느 순간 다를 뿐이지. 어느 순간 다르려고 하면 달라져요 물론. 달라져. 그러나 그거는 오래가지도 못해. 오래가지도 않고 언젠가 자기의 어떤 그 본래의 모습이 드러나게 돼 있어. “그러면 그렇지.” 요런 소리가 마지막에 나오잖아요. “그러면 그렇지. 내 처음부터 그렇게 알아봤지.” 그렇다고요. 『안팎이 둘이 없다』하는 이야기입니다. 법성원융(法性圓融) 법성은 法과 性品은 圓融해서 두 모양이 없다.
諸法은 不動本來寂이라.
제법은 부동본래적이라.
모든 法은 움직이지 않은 채 그것을 변모(變貌)시키지 아니하고 없게 해서 없어지는게 아니고 本來로 고요하다 이 말입니다. 지금 이 눈앞의 것은 不動이 아니지요. 動 입니다 동. 아주 활발하게 움직이고 활발하게 변해요. 시시각각 변하고 있습니다. 이 너무너무 빨리 변해서 정신이 없을 정도죠. 근데 왜 不動이냐? 諸法은 動이야. 아주 격동(激動)이라 激動. 不動이 아니라 激動이라고. 그냥도 움직이는게 아니라 아주 격동하고 있는 거지. 그렇게 정신 못 차릴 정도로 격동의 어떤 그 시간인데 여기는 不動이라 그랬어요. 그리고 본래 고요하다. 이건 뭔 말 인고하니 本質的으로 저 바탕에서는 이 밖으로만 볼게 아니다 이거지. 눈앞에 나타난 것만 볼게 아니다. 저 本質에 의한, 法性에 대한, 性에 대한 것을 우리가 좀 살펴보자 이거에요. 本質에 대한 것. 그 다음 뒤에 또 이제 나옵니다. 現象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게 돼요.
本來로 고요하다. 이 본래로 고요한 자리, 이거를 우리가 좀 자꾸 지키고 챙겨야 돼요. 지키고 챙겨야 돼요. 요게 사실은 우리의 어떤 그 본 모습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아까 이야기 했듯이 안팎이 둘이 아니다 그건 이제 어디까지나 어떤 그 現象的인 것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고. 원래 우리의 그 어떤 모양으로 나타낼 수 없는 우리의 진실생명의 자리, 本性의 자리, 본마음의 자리, 그것은 사실은 모양으로 그릴 수도 없고 어떤 그 말로 표현할 수도 없는 그런 자리죠. 그런 자린데 그런 그 자리 그게 이제 말하자면 우리가 참선(參禪)을 통해서 또는 기도(祈禱)를 통해서 그 속에 그 속에 우리가 뭔가 安住하는 그런 그 어떤 그 노력이 사실은 그 필요한 거지요.
그래서
無名無相絶一切라
무명무상절일체라
그 자리에는 이런 말입니다. 性品의 그 자리에는. 또 움직이지 아니한 채, 꼼짝도 하지 아니한 채 그대로. 없게 해서 없어진게 아니라, 없게 하지도 아니하고 본래로 고요한 그 자리에는 無名無相絶一切 (무명무상절일체)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 그래서 일체 현상이 다 끊어졌어. 그래서 거기를 부처라고 부처가 뭐 뛰어나지만은 부처라고 할 수도 없어. 菩薩도 아니야. 凡夫니 聖人이니 하는 그런 差別도 없어요. 뭐 남자니 여자니 하는 그런 차별도 없어. 부처라는 이름이 훌륭하다고 해서 여기 이름붙이면 안돼요. 부처라고 하는 이름 붙인다고 해서 그게 더 빛나는 것도 아니야. 그 마음자리. 저~ 마음의 본질자리에는. 그러니까 無名이지. 이름도 없지 형상도 없어요. 아무리 아름다운 형상을 가지고 여기다가 뭘 그 자리를 표현한다고 해서 그건 맞는게 아니라고요. 法도 아니고 法 아닌 것도 아니야. 모든 것이 다 不定된 자리야.
그러니까 일체 반연(一切 絆緣)이라든지, 또 거기에 뭔가 헤아리는 생각. 이렇게 이렇게 좀 이렇게 좀 표현을 해야지 하고 속에 궁리하는게 있잖아요. 그게 다 여기에 해당이 안 돼. 다 끊어졌다 이 말입니다. 절일체(絶一切)라. 일체가 다 끊어졌다. 그런 그 깊고 깊은 마음자리, 한 생각도 일어나기 이전자리, (이전 자리) 부처도 중생도 나눠지기 이전 자리, 이전의 그 경계. 그 참 알기 어렵죠. 우리가 성질을 부리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또 얼굴로 나타나고 하는 그거는 우리가 이해하기 쉬워요. 이해하기 쉬운데. 그것 그 모든 것들의 本質 이름붙일 수 없고 모양 그릴 수 없어서 모든 것이 끊어진 그 자리는 정말 이해하기 쉬운게 아닙니다. 정말 무념경계(無念境界)에 들어가야 되겠죠.
그래서
證智所知非餘境이라
증지소지비여경이라
證智 증득한 지혜 깨달은 지혜란 그런 말입니다. 깨달은 지혜라야 所知 알 바다. 깨달은 지혜라야 알 것이지 다른 경계가 아니다. 보통 우리가 이렇게 사량 분별(思量分別)로 말로 무슨 뭐 생각으로 사변(思辨)으로 이렇게 궁리하고 해가지고 이해될 그런 境界가 아니다 하는 것입니다. 관상 봐 가지고 그 사람 用心을 아는 것은 어지간하면 알 수가 있어요. 그러나 그 밑에 정말 진짜 그 사람의 본질 세계는 깨달아야 알아. 證智라야 所知야. 증지라야 알 바지 다른 境界가 아니다. 보통 우리들의 경계가 아니다.
이거는 말하자면 과거 모든 부처님이 이것을 깨달은 거지요. 바로 그 속 그 속마음을 깨달은 거야. 우리의 그 겉으로 드러나있는 喜怒哀樂하는 그런 그 어떤 그 움직이는 마음을 깨달은게 아니라는 거지요. 뭐 관상 봐 가지고 그 사람 用心을 아는 그걸 안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곤란해요. 그런 과거 모든 조사스님들이 전부 그 자리를 깨달은 거에요. 法의 本質, 眞理의 자리 그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니까 부처님이나 보살들이나 아니면 조사들이 모두 깨달았다 하는게 전부 그 자리를 깨달았다. 그러니까 뭐 우리가 이렇게 공부하면은 뭐 四柱도 잘보고 觀相도 잘 보고 아는 소리도 하고 뭐 이렇게 척 보고 말이지. 前生이 어쩌느니 뭐 過去에 뭘 했을것이다 하고 이렇게 아는거 이거는 무당이나 하는 짓이지, 공부한 사람은 절대 그렇게 하면 그건 공부하고는 거리가 먼 겁니다. 그걸 알아야 돼요. 아는 소리 하는 것. 그건 무당이 하는 짓이야. 그럼 공부해서 아는건 뭐냐? 바로 根本 마음자리 아는 거야. 한 생각도 일어나기 이전 자리. 생각이 일어난 것을 아는 것은 말하자면은 무당이 알 수 있고 아는 사람 신들린 사람들이 알 수 있어. 그 마음의 움직임이니까 작용이니까. 그런데 여기서 이제 부처님이 알고 조사가 아는 그것은 움직이기 이전 자리를 안다니까. 性의 자리를 아는거야 法性의 자리를. 그 자리를 아는 거에요.
그래서 옛날에 중국에 그 인도에서 대이삼장(大耳三藏)이라고 그 큰 대자(大) 귀 이자(耳) 대이삼장이라고 하는 어떤 그 스님이 왔어요. 그 神通을 잘 해. 특히 그 중에서 他心通을 해 가지고 소문이 자자한 거라. 그래 속에 마음먹고 있는 걸 전부 다 들여다보고 말이지. 니는 지금 말이지 집에 거 빨래 널어 놓은거 생각하고 있구나. 아니면 무슨 남편이 뭐 회사에 근무하고 있는거 그거 근무 잘 하는가 못 하는가 그거 생각하고 있구나. 이렇게 척척 생각하는 것마다 알아맞히는 거야 그러니까 그 어리석은 왕이 그런 그 스님을 보고는 “야~! 세상에 이렇게 높은 道人이 있는가!” 해 가지고는 이런 도인이 없다고 그냥 궁중에다 모셔놓고 식사대접을 하고 “우리 중국에는 왜 이런 스님이 없나?” 하고 야단이 벌어진거라. 그래가지고 중국에 있는 큰 스님들 모아가지고 道의 시합을 붙인거야. 그래가지고 그 당시 이제 그 혜월스님인가? (혜충스님) 내 이름은 지금 정확하게 기억이 안 되는데 어떤 스님이 발탁이 딱 돼가지고 궁중에서 시합이 붙은 거야. 그래가지고 이제 왕 앞에서 많은 신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이제 그 사람의 어떤 그 他心通을 이제 시험하는 거라.
그래 중국의 그 스님이 이제 그래 자네가 그렇게 내 마음을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잘 안다니 어디 내 맘 한 번 알아보라고 그렇게 이제 했어요. 그래서 이제 이 스님이 저기 저 공원에 가면 그 중국에 또 원숭이가 많잖아요. 그래 원숭이를 모아놓고 막 이래 재주부리고 하는게 그런게 이제 지나다보면 많이 볼 수 있는 거라. 그 스님이 마침 궁중에 오는 길에 그걸 본거야. 그래서 다시 이제 그걸 기억하는 거라. 아 그 올 때 오다 그거 참 재밌게 봤는데 하고서 이제 딱 마주앉아서 그걸 이렇게 보고 있으니까. 이 대이삼장(大耳三藏)이 이 스님의 마음 움직이는 것을 보니까 기도 안차거든. 이 큰 스님이 말이지 거기 그 원숭이 그거가지고 말이지 이렇게 원숭이 장난하고 원숭이 장난하는 그 뭐 거기 가서 구경을 이렇게 하고 하 이 재밌어가지고 그렇게 하고 있거든. 그래서 대이삼장이 아주 득의만만해가지고서 큰스님께서 말이지 어찌 그 원숭이가지고 놀리는데 어찌 거기 가서 그렇게 구경을 하고 계시냐고. 그래 탁 하는 거라. 그러니까 왕은 척 지켜보고 있는 거라. 그래 왕이 물은 거라. 스님이 과연 그 광경을 생각했느냐니까 그랬다는 거야. 아! 그거 아주 됐죠.
그 담에 이제 다시 한 번 다시 이제 또 알아 맞춰보라 하니까. 그 다음에 스님이 이제 그 다리를 이렇게 건너면서 무슨 그 또 사람들이 이제 거기 뭐 물가에 놀이를 많이 하고 있었는지 그게 이제 생각나서 그걸 이리 다시 구경을 하는 거야. 그러니까 또 대이삼장이 있다가 말이지. 아 이 큰스님께서 아! 이 일국의 큰스님께서 어찌 말이지 사람들 뱃놀이 하는 거나 구경하고 그렇게 넋을 잃고 있느냐고. 그렇게 한거라. 그래 두 번째까지 잘 맞췄다고요. 그래 이 스님이 이제 인정을 한 거라.
그 다음 이제 어디 세 번째도 한번 맞춰보라고 그렇게 하고서 딱 있는데. 이 대의삼장이 그 다음부터 그 스님을 아무리 찾아봐야 중국 천지에 보이질 않는 거라. 그래서 자기의 마음의 어떤 그 능력을 한껏 발휘를 해 가지고. 자기의 타심통의 실력을 한껏 발휘해서 온 우주를 다 뒤졌는데 이 스님이 보이지가 않는 거야. 귀신에 되도 눈에 보이고, 어디 천상에 가도 눈에 보이거든요. 마음 작용이 있는 한은 눈에 보입니다. 마음작용이 있는 한 눈에 보이는 거라. 그 도대체 보이지가 않는 거라. 온 우주를 다 뒤져도 보이지가 않는 거야. 죽어도 몸이 죽었지 정신이 죽나요? 정신은 또 지 인연 따라서 찾아가고 있는데 그 찾아가는거 쫓아가고 하는 이야기가 많이 있잖아요. 그까짓 거 문제가 아니거든요 이 사람 눈에는. 마음의 눈으로 쫓아가니까. 그런데 한참 찾아다녔는데도 도대체 찾을 길이 없는 거야.
그러니까 막 땀을 뻘뻘 흘리고 그냥 당황해가지고 야단인거야. 왕은 말이지 기다리고 있고. 어디 갔냐고 이 스님 도대체 어디 갔냐고 어디 함 찾아보라고. 그 도대체 찾을 길이 없는 거라. 그 땀을 뻘뻘 흘리고 그 다음 계속 당황해가지고 그렇게 어쩔 줄을 몰라 하는데 이 스님이 막 사정없이 이제 꾸중을 하는 거죠. 순 요괴 같은 놈이라고 말이지. 니가 그거 하나 고런 재주 하나 가지고 그게 도인이라고 말이지 여기 중국에 와서 정법을 어지럽히냐고. 그거 순 요괴들이나 하는 짓이고, 무당들이나 하는 짓이지. 어디 그게 불법이라고 어디 와서 누굴 속이려고 하느냐고. 그 미련한 말이지 왕이나 이런 사람들 속이지 말라고. 불법이란 그런게 아니라하고 그렇게 사정없이 호되게 꾸중을 해 가지고 그 사람 그야말로 코를 싸가지고 이제 도망을 가게한 그런 그 역사가 있습니다. 대의삼장이라고.
그래 이제 왕이 물은 거야. 스님 도대체 어디 갔기에 그 사람이 그런 타심통을 하고도 못 찾았느냐. 아까는 어디 가서 구경하는거 보고 있을 때는 환히 잘 찾았는데 어디 갔기에 도대체가 못 찾았느냐. 어디가긴 내가 어딜가. 무심삼매에 들어갔다 이거야 무심삼매. 내 마음에 없으니까 내 아무 생각하는게 없으니까, 무심으로 들어가 버리니까, 화두 일념으로 들어가 버리니까, 찾을 길이 없는 거야. 도대체 보이지가 않는 거지. 자기가 없어진 자리야. 무아자리에 들어간거지. 무아자리. 그러니까 이 타심통한 사람도 찾을 수가 없는 거지.
그래 그거는 증득한 사람이나 알 바지. 어떤 그 무심한 자리 있죠. 그야말로 아무 생각도 일어나지 아니한 그 자리는 진짜 깨달은 사람이나 알 바지. 다른 그런 무슨 그 타심통 했다고 신통 좀 있다고 아는게 아니다 이거야. 그래 불교는 무슨 아는 소리하는거 이건 절대 불교의 정법은 아니다는 사실을 꼭 아셔야 됩니다.
또 우리가 그 들은 이야긴데. 해인사 선방에 있을 때 지월스님이라고 그 아주 그 참 그 정말 만고에 이제 보살인 그런 스님이 계셨어요. 참 수행을 철저히 하신 스님인데. 指月 가리킬 지자(指) 달월자(月)라 그 스님 제자들이 지금 우리나라에 이래저래 계시죠. 그런데 그 스님한테 들은 이야기거든요. 지금 파계사 성전에 거기 있을 땐데. 자기가 참선하고 있을 때라. 그런데 그 밑에 마을에 성팔이라고 하는 아이가 그 이제 저 일제때 일제 때 잡지에 거 다 난거에요. 다 그 잡지에 난거라고.
성팔이라고 하는 애가 어쩌다가 이제 다쳐가지고 죽었는데 채 명이 안 끊어졌는데 그 집에서 죽었다고 삼일간이나 꼼짝도 안하니까 죽었다고 가서 이제 묘를 써 버린거라. 그래 얘는 정신이 어디 혼백이 어디 나갔다가 도로 돌아오니까 지 몸뚱이가 땅 속에 묻혀있어서 어떻게? 할 수 없이 그런 몸뚱이를 버렸다는 거야. 그 가만 놔뒀으면 깨어났을 텐데 한 삼일쯤 꼼짝 안 하니까 그만 그렇게. 그러니까 장의를 빨리 지내는게 아니라구요. 삼일쯤 기다리라고 하는게 바로 그런 뜻이라. 그래서 그 삼일장 최하 삼일장은 하잖아요. 아이가 죽어놓으니까 아마 삼일도 안가고 얼른 묘를 써 버린 모양이지.
그래가지고 이 아이가 영혼이 영혼만 남아가지고 지 인연도 다 안했는데 이제 몸은 벌써 썩어가고 있고. 그래가지고 얘가 평소에 이제 즈그 부모가 절에 다니고 그래 절에 따라오고 해 가지고 스님들이 마을에 내려가면 귀여워하고 그래놓으니까. 지가 아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절에 성전암에 있는 스님들 뿐인거라.
그래 이제 영혼이 성전암에 와 가지고 이제 노는거야. 놀 때. 그 내가 직접들은 이야기니까. 그 지월스님한테. 지월스님 내가 여러철 모시고 살았거든요. 그래 이제 평소에 이렇게 이제 방선하고 이렇게 놀 때는 곧잘 이제 귀에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니까 소리를 이렇게 들리진 않지. 녹음하면 녹음은 안 되는데. 그 사람 귀에 들리는 거라. 사람들 귀에. 귀에는 들려오는 거야. 소리는 나긴 나는데. 그런데 우리가 꼭 대화하듯이 그렇게 꼭 소리가 들린다는. 그래 이제 이쪽에서 말 안 해도 (말 안 해도) 니 뭐라고 물으면 여기서 생각이 바로 나가면 바로 알아듣고 그냥 대화가 가능한거라 이것들.
그래서 뭐 대구 심부름도 시키기도 하고, 어디 가서 누구 보라고하기도 하고, 그런데 이제 심부름을 시키니까 대구에 그 일부러 이제 시험하느라고 스님들이 이제 고런데 관심이 있으니까 시험하느라고 대구에 어느 집에 가보라고 이렇게 이제 시키면은 가기도 하고 그러는데 어떨 때는 굉장히 늦게 돌아오더라는 거라. 대구에서 보냈는데. 그래 그 왜 이제서 왔냐고 그러니까. 거기에 이제 대구는 대구의 어떤 영혼들의 세계가 또 있는 거라. 그래 수문장도 있고 거기에 이제 텃세까지 하는 사람들이 또 있다는 거라. 그래서 이것들이 말이지 계속 지키고 있어서 들어갈 틈이 없어갖고 아이 내 기다렸다가 그래 들어갔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 그래요. 그래 내가 직접 들었어요. 그래서 늦게 왔다는 거라. 늦게 와서. 그게 문제가 아니고 그런저런 일도 많이 있었는데 굉장히 이야기가 많아요. 왜냐하면 몇 년을 거기에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입선 시간이 돼 가지고 죽비를 딱딱 치고 이제 입선에 이제 떡 들어가는 거라. 그러면 이제 아니 어느 스님도 금방 앉아있더니 없다고 한다는 거라. 계속 없다고 하는거라. 스님들이 여남은 명 앉아있다 다 이제 화두를 이제 열심히 화두들면은 전부 무념상태로 들어가니까. 망상부리면 그 사람 갸 하고 갸 눈에 보이는 거야 망상만. 망상부렸다하면 갸 눈에 보이는거라. 그래 공부 잘하는지 안하는지 갸가 다 점검 다 잘 하는 거라. 다 아는 거야. 망상부리면은 얘가 이제 같이 대화가 되고, 망상 안 부리고 화두에 열중하면은 안보이니까 대화가 그 안 되는 거지. 그래서 이제 얘는 혼자 놀다가 심심하니까 이제 가 버린다는 거라. 입선하면 이제 가 버리고 방선해 갖고 이제 잡담하고 망상부리면 그때 또 얘가 이제 어디서 나타나 가지고 같이 이야기도하고 그랬다는 거야.
그래 귀신이 그렇게 사람을 보는 것은 그거는 좋지 않은 일인거야 사실은 우리가 정상적인 그 정신세계에 탁 들어가 있으면은 볼 수도 없어야 되는 거야. 몰입해 있으면. 그래서 아는 것, 보통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하고 여기서 불교에서 소위 그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하고는 그렇게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 것을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돼요. 證智所知非餘境 증지소지비여경이라고 하는 이 대목에서도. 다른 이의 경계가 아니다 하는 이야깁니다.
眞性甚深極微妙
진성심심극미묘
우리의 진성 참마음자리죠 참다운 성품자리는 매우 깊다 심심 그리고 지극히 미묘하다 이 참 쉽게 알 수 있는 자리는 아닙니다. 그 마음자리가요. 망상을 부리면 알 수 있어요. 대의삼장도 알 수 있고, 성팔이란 아이도 알 수 있지만은. 그 망상 부리기 이전 자리 또 망상을 부렸다하더라도 무념으로 화두일념으로 들어가거나 기도 일념으로 들어갔을 때, 그 자리는 심심해서 극미묘야 매우 깊고 깊어서 지극히 미묘한 자리다. 그런데 지극히 미묘한 자리에만 가만히 있는게 아니고, 그 자성자리를 지키지 아니하고 수련성이라.
不守自性隨緣成
불수자성수연성
不守自性隨緣成이야 自性을 그 자리 그 자리가 자성이에요. 우리들 자신의 性品의 자리죠. 본바탕 자리죠. 그것을 不守 지키지 아니하고 인연을 따라서 隨緣. 因緣을 따라서 성취하는 거라 成就라는 말은 成 이룬다 모든 생각을 이뤄가고 일체사법(一切事法)을 이뤄간다. 隨緣成一切事法(수연성일체사법)이라 그래요. 일체 사법을 전부 이뤄가는 거라. 그러니까 붉으면 붉다하고 푸르면 푸르다하고 그 안되면은 안된 그 因緣 따라서 수련(隨緣)한 그 인연을 따라서 또 안된대로 슬퍼하기도 하고. 그게 이제 작용입니다. 고게 작용이야.
고렇게 작용을 할 때는 귀신도 보고 뭐 성팔도 보고 다 보는 거지요. 그 우리가 그 양면이 있는 겁니다 양면. 고 밖으로 현상 드러난 자리 마음의 어떤 작용자리 그게 이제 말하자면 법이라면 자성자리는 성품자리다. 법의 성품자리다. 이렇게 이제 보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뭐 무념무념하더라도 또 거기에 온갖 희로애락을 일으키고 또 희로애락을 일으키니까 또 어떤 그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또 뭐든지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연이라는게 거기에 이제 게재가 되는 거죠. 본래 텅 빈 본성자리만 있다면 별 문제가 없는데 말하자면 우리가 거름을 잘 주고 물을 잘 주고 비료를 잘 주면은 그 나무가 잘 자라듯이, 내 인생의 나무도 내가 좋은 인연들을 자꾸 이렇게 가꿔가고 복도 짓고 지혜도 닦고 이렇게 하면은 그 내 인생의 어떤 그 인연들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거지요. 고게 이제 가능성이란 것입니다. 인연의 가능성이에요. 요 자성자리, 텅 빈 본래 공적한 자리만 지키고 있으면 만인이 평등하겠는데 그런데 우리가 평등하지 못한 이유는 인연을 따르는게 각각 다르기 때문에 평등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 인연을 잘 다뤄야 해. 요는 妙用이라 作用이라 작용이 문제가 있어요.
본래 그 마음자리가 똑 같지. 부처나 중생이나 똑같은 자리야 똑같은 자리인데 그 작용. 인연을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서 부처도 되고 중생도 되는거야. 부자로 살기도 하고, 가난하게도 살기도 하고, 재주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총명하기도하고 둔하기도 하고, 고건 이제 우리가 작용을 어떻게 하느냐 인연을 어떻게 짓느냐 그게 妙用이야 참 그 묘하죠. 그 근본자리는 똑같은 똑같은 재료를 가지고 솜씨 따라서 맛이 다르잖아요. 음식 맛이 다르잖아요. 재료가 똑같다고 하는 것은 본성 자리요. 솜씨 따라서 음식 맛이 다르다고 하는 것은 작용이라. 작용이라구요. 고게 因緣道理거든 인연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