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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가 이해되지 않는다면 진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다
2024년 나해 삼위일체 대축일
복음: 마태오 28,16-20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보통 삼위일체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 근거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에 대해 고민하다 바닷가에서 아이를 만난 예화를 사용합니다. 아이는 조개껍데기로 작은 웅덩이에 바닷물을 담고 있었습니다. 바닷물을 어떻게 작은 웅덩이에 다 담으려고 하느냐고 어리석은 행위라고 말하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아이는 “당신도 인간의 작은 머리로 하느님의 무한한 진리를 채워 넣으려 하지 않느냐?”며 반문합니다. 아이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단순히 우리가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만을 도출하고 끝내야 할까요? 어쩌면 무한한 삼위일체 진리를 어느 정도는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아닐까요? 바다를 다 담을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작은 바다를 만들 수는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삼위일체는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에게 계시되었다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삼위일체가 가장 명확하게 계시되는 때는 예수님의 세례와 죽음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셨다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삼위일체가 나타납니다(아버지-아드님-모든 권한).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주시는 모든 능력이 성령이십니다. 성령 안에는 아버지의 모든 것이 들어있기에 아버지와 같으신 분이십니다. 그것을 아드님께 전해 주시고 아드님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써 마치 하와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빼낸 갈비뼈로 탄생하였듯이 우리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피와 물로 탄생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며 세례를 베풀라고 하는 말씀에도 ‘그리스도-제자들-성령’의 삼위일체가 나타납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라는 첫 명령과도 같습니다. 이름은 새로 태어날 때 받는데 이를 위해서는 아담의 ‘피’ 흘림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 순종하여 아담이 흘리는 피가 성령입니다. 세례는 성령으로 이뤄지는 성사입니다. 새로 태어남은 ‘믿음’으로 이뤄지는데 성령께서 주시는 열매가 믿음입니다. 만약 아버지로부터 받아 어머니께서 나를 위해 흘리신 피가 아니었다면 나는 부모와 같은 인간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 하느님이 세 분이셔야 할까요?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영원하고 사랑만이 창조합니다. 사랑을 하려면 최소 단위는 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둘만으로는 사랑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자기 모든 것을 선물하는 ‘관계’가 일어나야 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51 참조). 관계의 기본은 남자와 여자의 사랑인데, 하느님은 그것이 삼위일체를 닮았다는 힌트를 성경에서 주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7)
오헨리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에서 가난한 남편은 아내를 위해 가보처럼 내려오는 시계를 팔아 아내의 빗을 사고 아내는 머리카락을 팔아 남편을 위한 시곗줄을 사서 선물했습니다. 선물 안에는 주는 이의 존재가 담깁니다. 선물은 성령인데 선물을 무시할 때 관계가 끝납니다. 아내는 분명 남편으로부터 받은 선물에 감사해서 자녀를 낳게 될 것입니다. 자녀는 자신의 탄생이 ‘아빠-엄마-선물’로 이뤄짐을 알지 못할 수 없습니다. 태어나면 삼위일체를 저절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자녀는 부모의 삼위일체 사랑으로 탄생합니다. ‘아버지-어머니-피’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만들어 길거리 짐승들처럼 살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교회가 ‘아버지-아드님-성령’ 삼위일체로 탄생하였듯이, 우리도 ‘그리스도-교회-성령’으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세례는 성령으로 받는데, 성령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따라서 세례로 하느님 자녀가 되었는데 삼위일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리고 나도 ‘교회-나-성령’으로 자녀를 낳으라고 파견받습니다. 이는 마치 성모님께서 그리스도께 파견받아 엘리사벳에게 성령을 주셔서 새로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 그녀의 집을 방문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나의 피에 성령을 섞어 내어주며 하느님 자녀라는 믿음을 전해 주는 삶이 삼위일체 신비에 참여하는 삶이고 삼위일체만이 사랑이며 사랑만이 영원합니다.
- 전삼용 신부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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