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혼 34년 되는 날, 아내에게 주는 카드. 손에다 먹을 묻히고 수건에 묻히고 온 사방팔방에 널부러진 글씨 더미에 질려 버린 아내가 이 종이 한 장을 좋아할 리 없건마는 내가 줄 마음은 순정의 마음 뿐. 미움 받거나 말거나.
작년에 이런 정성를 했다.
올해는 이마저 없이 보낸다.
그러나...
직장 시절에 결혼 기념일이나 아내의 생일에는 쌓인 세월 만큼 장미 꽃 송이를 다발로 엮어 아내에게 주곤 했다. 이제는 속 마음은 어떤지 모르나 아내는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것이 꽃 다발이라고 한다. 엉뚱하게 꽃 다발을 산다고 돈을 쓴다는 걱정에서겠지. 그러니 나는 내 지갑은 없으니 아내의 지갑을 열어서 꽃다발을 사들고 아내에게 건네는 만용을 부리지 않고 집 근처의 장미꽃을 미리 사진을 찍어서 아내에게 통채로 준다.


대개 아내들이 챙기는 결혼 기념일을 아내는 잊고 있다. 결혼 기념일을 애틋하게 생각하는 순정의 세월도 이제는 지난 탓이다.
분위기 있는 음식점에서 한 잔의 포도주를 나누는 감동을 누구는 갖는다지만 젊었을 때 하는 일이다. 세월의 끝에서 우리 부부는 문득 남의 일인 듯이 결혼 기념일을 생각한다.
어제는 아들 생일이었다. 회사 일이 많아서 어머니가 끓인 미역국을 오늘 낮에서야 먹였다.
저녁에 함께 냉면이라도 먹으러 가자는 어머니 말에 아들은 뚝 분지른다.
" 두 분이 재밌게 보내세요. 저는 냉면을 자주 먹어서요. 제 카드 드릴께 냉면, 만두, 수육을 잡숙고 오세요. "
언제는 부모 결혼 기념일이라고 충청도 지방 온천에 데리고 가고, 언제는 뭐 어떻고.
했던 일로 우리 부모는 아들에게 감사한다.
한때는 결혼 기념일에 뭐를 해주겠냐고 아들 딸에게 무수개 소리를 했으나 이젠 그런 말도 안 한다,.
그래도 아직은 카드를 맡기니 냉면 한 그릇으로 우리의 결혼 기념일을 자축합시다.
밥을 먹고 카드를 그으면 뿅하고 아들 휴대폰에 결재 내역이 날아가도 신경 끄고 먹읍시다. 냉면 두 그릇에 2만 원도 아니 될 터이니...

지난 번에 딸내미와 함께 왔던 냉면집에 우리 부부가 결혼 기념일을 자축하러 간다.

9000원 짜리 냉면, 발써 세 번째. 먹을수록 맛이 떨어진다. ?까? 다른 음식점에는 손님이 가득한데 이 집만 유독 한산하다. 냉면집은 여름철 한 때 장사다.
맛없는 것이 맛있다했던 우리 입맛이 바뀐게 문젠가?
남남끼리 34년, 참 오래도 살았다.
지나간 풍파가 어디 한 두번인가. 그냥 풍파가 아니라 섦과 죽음이 오고갔다. 다시 이런 삶을 살라면 살아갈 엄두가 안 난다.
살아 온 삶이 녹록치 않았다.
앞으로 삶이 고비 고비에 구비구비일 터.
살아도 죽은 듯 살며
저 세상에 가서는 나를 다시 만나지 않겠다는 아내의 말은 농담이 아닌 진담일 것.
그런 고통의 세월에 대한 유죄인은 당연히 내가 아니던가.
만남의 인연이 유죄이기에 험한 일 당해 고통이 진행 중인 아내에게
죽어서 만나자는 말을 어찌하랴.
사는 동안 내가 아내에게 줄 수 있는 진정은,
곁에 있어도 그리운 당신
함께 있어주어 행복합니다
그 말 뿐.
몇 년 전인가.
SBS에서 손숙. 김승현의 '아름다운 세상'에 장인 어른 이야기가 방송이 나갔다.
글이 나간 일을 잊고 있었다.
그 참에 방송국과 관련이 있는 출판사에서 전화가 왔다.
여러 사람의 글을 묶어서 책을 만드는데 그 속에 내 글이 실린다며 책이 나오면 한 권을 보낸다고 하더니 드디어 책이 왔다.
어른께서는 세상을 떠나셨어도 사위 사랑하시던 생전의 모습은 이렇게 책에 담겼으니,
" 아버님, 이 책은 아버님의 책입니다. "
하는 사위의 재롱에 싱긋 웃으실 것이다.
첫댓글 황종원 동기! 대단합니다. 어려웠던 시절에 삶이 도토리 키재기였지요. 현생(금생)의 끄나풀이 언제 끊어 질련지는 모르지만
가는 날 까지 서로를 아끼면서 갑시다. 나는 결혼 35년만인 지난 1월5일에 첫 손자를 얻었습니다. 사모님이 참 미인입니다. 마산 여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