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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 코너 스크랩 수필 34번 째 결혼 기념일
황종원(중앙대) 추천 0 조회 696 11.06.19 13:54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결혼 34년 되는 날, 아내에게 주는 카드. 손에다 먹을 묻히고 수건에 묻히고 온 사방팔방에 널부러진 글씨 더미에 질려 버린 아내가 이 종이 한 장을 좋아할 리 없건마는 내가 줄 마음은 순정의 마음 뿐. 미움 받거나 말거나.

작년에 이런 정성를 했다.

올해는 이마저 없이 보낸다.

 

그러나...

 

 직장 시절에 결혼 기념일이나 아내의 생일에는 쌓인 세월 만큼 장미 꽃 송이를 다발로 엮어 아내에게 주곤 했다. 이제는 속 마음은 어떤지 모르나 아내는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것이 꽃 다발이라고 한다. 엉뚱하게 꽃 다발을 산다고 돈을 쓴다는 걱정에서겠지. 그러니 나는 내 지갑은 없으니 아내의 지갑을 열어서 꽃다발을 사들고 아내에게 건네는 만용을 부리지 않고 집 근처의 장미꽃을 미리 사진을 찍어서 아내에게 통채로 준다.

 

 

 

 

 대개 아내들이 챙기는 결혼 기념일을 아내는 잊고 있다. 결혼 기념일을 애틋하게 생각하는 순정의 세월도 이제는 지난 탓이다.

분위기 있는 음식점에서 한 잔의 포도주를 나누는 감동을 누구는 갖는다지만 젊었을 때 하는 일이다. 세월의 끝에서 우리 부부는 문득 남의 일인 듯이 결혼 기념일을 생각한다.

어제는 아들 생일이었다. 회사 일이 많아서 어머니가 끓인 미역국을 오늘 낮에서야 먹였다.

저녁에 함께 냉면이라도 먹으러 가자는 어머니 말에 아들은 뚝 분지른다.

" 두 분이 재밌게 보내세요. 저는 냉면을 자주 먹어서요. 제 카드 드릴께 냉면, 만두, 수육을 잡숙고 오세요. "

언제는 부모 결혼 기념일이라고 충청도 지방 온천에 데리고 가고, 언제는 뭐 어떻고.

했던 일로 우리 부모는 아들에게 감사한다.

한때는 결혼 기념일에 뭐를 해주겠냐고 아들 딸에게 무수개 소리를 했으나 이젠 그런 말도 안 한다,.

그래도 아직은 카드를 맡기니 냉면 한 그릇으로 우리의 결혼 기념일을 자축합시다.

밥을 먹고 카드를 그으면 뿅하고 아들 휴대폰에 결재 내역이 날아가도 신경 끄고 먹읍시다. 냉면 두 그릇에 2만 원도 아니 될 터이니...

 

 

 지난 번에 딸내미와 함께 왔던 냉면집에 우리 부부가 결혼 기념일을 자축하러 간다.

 

9000원 짜리 냉면, 발써 세 번째. 먹을수록 맛이 떨어진다. ?까? 다른 음식점에는 손님이 가득한데 이 집만 유독 한산하다. 냉면집은 여름철 한 때 장사다.

맛없는 것이 맛있다했던 우리 입맛이 바뀐게 문젠가?

 

 

 

남남끼리 34년, 참 오래도 살았다.

지나간 풍파가 어디 한 두번인가. 그냥 풍파가 아니라 섦과 죽음이 오고갔다. 다시 이런 삶을 살라면 살아갈 엄두가 안 난다.

살아 온 삶이 녹록치 않았다.

앞으로 삶이 고비 고비에 구비구비일 터.

살아도 죽은 듯 살며

저 세상에 가서는 나를 다시 만나지 않겠다는 아내의 말은 농담이 아닌 진담일 것.

그런 고통의 세월에 대한 유죄인은 당연히 내가 아니던가.

만남의 인연이 유죄이기에 험한 일 당해 고통이 진행 중인 아내에게

죽어서 만나자는 말을 어찌하랴.

사는 동안  내가 아내에게 줄 수 있는 진정은,

 

곁에 있어도 그리운 당신

함께 있어주어 행복합니다

 

그 말 뿐.

 

 

몇 년 전인가.
SBS에서 손숙. 김승현의 '아름다운 세상'에 장인 어른 이야기가 방송이 나갔다.

글이 나간 일을 잊고 있었다.
그 참에 방송국과 관련이 있는 출판사에서 전화가 왔다.
여러 사람의 글을 묶어서 책을 만드는데 그 속에 내 글이 실린다며 책이 나오면 한 권을 보낸다고 하더니 드디어 책이 왔다.

어른께서는 세상을 떠나셨어도 사위 사랑하시던 생전의 모습은 이렇게 책에 담겼으니,

" 아버님, 이 책은 아버님의 책입니다. "
하는 사위의 재롱에 싱긋 웃으실 것이다.

 

아내가 다처서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한 세월 뒤, 해마다 어르신은 장미 꽃 바구니를 들고 오셨다.

이런 편지와 함께.

허나 마지막해에는 어르신은 꽃 다발 대신에 우리 집에 오시는 길을 잊으셔서 경찰차를 타고 오셨다.

기억력이 쇠하셨으니, 어찌 하겠는가.

 

 

 

1987년도 교통사고로 죽느냐 전신마비냐하는 고비에서 일어나니 장인 어른께서는 해마다 이런 꽃 바구니를 들고 오시기 무릇 기하이뇨.

꽃바구니와 함께 어르신은 꼭 서신을 함께 주시니

" 딸아, 네 삶이 힘들어도 황서방과 맺어졌으니 행복이라. 남편곁을 지키고 늘 사랑 받고 살거라."

나는 해마다 역시 장미꽃 다발로 우리의 결혼을 축하였으나, 언제 부턴가 나는 장미 꽃바달을 아내에게 주는 대신 집밖의 장미 사진을 찍어 주는 고약한 처지가 되고 말았다.

용서하소서. 어르신.

따님께서는 이미 받은 것으로 됐다하오니 그리 아소서.

 

 

 

 1977년 10월 24일 이때는 UN데이 휴무라서 맞선으로 만났다.

그 뒤였나보다. 갈 곳 뻔한 청춘은 화양동 어린이 대공원에 간다.

나는 늘 이 모양이다. 아내는 명동걸, 나 역시 그랬으나 내가 입은 코트는 군 제대시 입던 미군 군용 레인 코트.

내가 가진 건 가난과 청춘 뿐이었다.

 

 웨딩 사진이 없는 이때, 함지러 간 날에 친구 둘과 함께 함을 들고 색시네 갔다. 그냥 헤어지기 섭섭하여 각시의 동네

명륜동 사진관에서 사진 한 방 찍은니

이것이 바로 웨딩 사진이다.

엄청 마른 나를 보고 각시는 훗날 말한다.

"이렇게 마른 남자를 처음 봤어. 뚱보를 싫어했더니 말라갱이를 만났네. "

내 몸무게 54 kg. 지금은 68KG.

 

 

 

서울 종로 예식장 1977년 6월 18일 오후 2시.

우리는 백년가약을 맺었고, 백년을 향해 살고 있다.

 

 다음해, 우리는 아들을 얻었다. 신혼 시절, 남편은 집 장만이 급하여 중동으로 떠난다.

젊은 아내에게 불면의 밤이 얼마나 깊었으리.

 

 

 

아들은 자랐다. 지금은 엄청 자라 아들은 기를 이때의 아비 나이가 되고 말았다.

 

 세월이 다시 흐르고 딸이 생겼다.

 

때때로 우리는 물놀이을 간다. 참 좋은 시절이 아니었던가.

 

 

 

아내의 중년 곱던 시절이 다리야 나 살려라 달아 나고

 

중년의 문턱을 넘으며 우리는 행복이 내일에 올 줄 알았으나 세월이 지나니 바로 그 '오늘'이 행복이었다.

다시 이 뒤로 세월은 지나니 10년인가 15년인가. 누가 이 나이에 세월을 제대로 꼽으리.

 

가족에서 방송에 나온 글을 모아 '가족'이라는 단행본을 펴냈다.  


 

 

장인어른께서 해마다 결혼기념일에 꽃바구니를 들고 오신 이야기가 실렸다.

 


 


 


 

백송이 장미에 장인 어른 이야기를 담았다.

 


이 해 말에 어르신을 세상을 떠나셨으니 불행을 딛고 일어선

막내 따님이 얼마나 눈에 ?히셨으랴.



이 책의 끄트머리에 글쓴이들이 실렸다.

내 글은 장인어른께서 쓴 글이 아니겠는가. 

 

어르신 염려 놓으세요. 세상에 누가 뭐래도, 저는 따님을 사랑합니다.

그동안 겪은 따님의 고통과 남은 생을 가면서 따라오는 고통과 상처를 저 역시 함께 하며 살아갑니다.

만나 뵙는 날, 당당한 사위로서 뵙고자 합니다.

어르신, 참 뵙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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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6.28 22:50

    첫댓글 황종원 동기! 대단합니다. 어려웠던 시절에 삶이 도토리 키재기였지요. 현생(금생)의 끄나풀이 언제 끊어 질련지는 모르지만
    가는 날 까지 서로를 아끼면서 갑시다. 나는 결혼 35년만인 지난 1월5일에 첫 손자를 얻었습니다. 사모님이 참 미인입니다. 마산 여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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