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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먹을 때에(2)
마 26:26-30
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29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30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마 26:26-30 / 그들이 음식을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들어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이것을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7) 또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이 잔을 받아 마시라. 28) 이것은 새 계약을 표시하는 나의 피다. 많은 사람의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다. 29) 내 말을 잘 기억하여 두라. 이제부터 나는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결코 포도주를 마시지 않을 것이다.' 30) 그들은 찬미의 노래를 부르며 감람산으로 올라갔다.
< 설 교 >
감사하는 습관이 축복을 부릅니다
마 26:26-29 / 문기태목사
여러분,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원하십니까? 생활습관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스트레쓰를 받지 않고 즐겁게 살고 싶습니까? 그럼 생활습관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성공하고 싶습니까? 그럼 생활습관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믿음이 잘 성장하여 좋은 열매를 많이 맺고 싶습니까? 그러면 생활습관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잘못된 생활 습관이 자신의 삶을 망칩니다. 나쁜 습관을 고치지 않으면 질병에 노출되어 고생을 많이 합니다. 나쁜 습관을 다스리지 못하면 중독의 올무에 갇히게 됩니다. 중독된 습관은 몸과 마음, 삶을 망치게 합니다. 모든 일에 성공하는 사람들은 성공을 부르는 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똑같은 상황인데 어떤 사람은 성공하려는 동기를 끝까지 잃지 않고 어떤 사람은 쉽게 포기합니다. 같은 상황인데 어떤 사람은 여유있게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은 스트레스로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마음의 습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습관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축복된 삶을 기대한다면 좋은 생각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자신을 훈련해야 합니다.
미국 조지아주 중서부에서 대부호로 명성을 떨친 레스터가(家)가 있었습니다. 레스터는 이곳에서 담배농사를 지어 많은 재산을 모았습니다. 그는 주변의 농토들을 모두 사들여 담배농사를 지었습니다. 레스터의 땅을 밟지 않고는 주민들이 마을에 들어올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길을 토바코 로드로 불렀습니다.
레스터는 후손들에게 엄청난 땅과 돈을 유산으로 남겨 주었습니다. 그런데 레스터의 3대 후손들은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3대손인 지이터가 소작농으로 전락해 유일하게 그 마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17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중 5명은 일찍 사망했고 9명은 가출했습니다. 이 부부는 고향을 지키며 외로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지이터 부부가 잡초더미에 불을 놓았는데 그 불이 집에 옮겨 붙어 타죽고 말았습니다. 땅과 돈만 유산으로 물려주고 좋은 습관을 물려주지 않으므로 저주를 부르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녀에게 돈 대신 좋은 습관을 유산으로 남겨줍니다. 철학이 없는 많은 유산은 자녀를 불행한 늪으로 몰아 갑니다. 여러분은 자녀에게 좋은 습관을 심어 주고 계십니까? 아니면 자식은 고생해선 안된다고 유산을 물려주시기 위해 뼈를 깎는 고통으로 일에 몰두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어떤 크나큰 계기나 사건이 나의 인생을 변화시켜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을 요술처럼 멋지게 만들어 주고 성공시켜 주는 것은 연속적으로 반복되는 작은 일들입니다. 우리를 참으로 복되게 하는 것은 작지만 좋은 습관들입니다.
습관이란 '무엇이든 여러 번 거듭하는 사이에 몸에 배어 굳어진 성질'을 말합니다. 어떤 습관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성패와 행불행이 결정됩니다.
어거스틴은 '신앙이란 거룩한 습관을 들여가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다름이 아니라, 거룩한 것이 몸에 배어 습관화 되게 하는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훈련과정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 역시 좋은 습관을 많이 가지고 사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 16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예수님은 습관에 따라서 안식일 날 회당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습관에 따라서 성경을 읽었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읽은 것이 아니고 성경을 읽는 것이 습관화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막 10:1) 여기 '전례대로'라는 말을 표준 새번역에는 '늘 하시던 대로'로 번역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습관을 따라서 가르치셨습니다. 뭘 가르쳤습니까?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입을 여시면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전도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 가셨습니다.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만나면 전도하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습관화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또 하나의 습관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눅22:39절) 표준새번역은 이것도 '늘 하시던 대로'라고 번역했습니다. 예수님은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기도생활을 통해 경건이 습관이 되었고 중요한 순간마다 기도를 통해 승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룩한 습관이 많았습니다. 좋은 생활을 반복하여 훈련하며 경건하고 의로운 삶이 몸에 배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치실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또 하나의 중요한 습관을 가지고 생활하셨음을 보여 주십니다. 최후의 만찬자리에서도 떡과 잔을 앞에 놓고 축복과 감사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것도 이날만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늘 하시던 대로 하신 것입니다. 요6:11에 보면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는 기적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적은 마술로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나눠주시니까 계속 바구니에서 떡과 생선이 나온 것입니다. 축사가 무엇입니까? 축복과 감사입니다. 표준새번역은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감사기도가 기적을 가져온 것입니다. 감사하는 습관이 축복을 부릅니다.
요한복음11장은 나사로의 죽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하는 친구가 병을 앓다가 갑자기 죽어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친구의 무덤 앞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슬픈 것이고 아픈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친구의 무덤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슬픔은 이내 감사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11:41을 읽어 보십시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이 죽음의 마당에서도 기도할수 있다는 것, 그리고 기도하면서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아름다운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감사하는 습관이 몸에 배셨습니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의 자리에서도 음식을 놓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이 어떻게 감사하는 습관을 형성해 갈 수 있습니까?
1. 음식을 먹을 때마다 감사하십시오.(27)
여러분, 식사 전에 반드시 기도하십니까? 뭐라고 기도하십니까? 식사 기도를 감사의 기도로 드리십시오. 꼭 매끼 먹을 때마다 기도해야 하느냐?고 감사해야 하느냐? 고 생각하실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범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의 본문 27절을 보면 예수님이 감사기도를 하시고 떡과 잔을 나누시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이것은 최후의 만찬 때만이 아니었습니다. 유명한 5병2어의 기적에 앞서 그분은 먼저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고 했습니다. '감사했다'는 말입니다. 감사는 그분의 거룩한 습관이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분이 예수님이시라면 그 일용할 양식을 받고 공급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닙니까?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아직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먹을 것이 부족하여 굶주리고 있는데 먹을 수 있는 은혜가 적은 은혜이겠습니까?
유엔 식량 농업기구의 통계에 의하면 지상에서는 세계 인구 가운데 8억 4천 이백만이 기아인구라고 합니다. 이것은 적어도 이 땅에 살고 있는 전 세계 인구 의14%, 그러니까 7-8명중 한 사람은 하루 한끼 양식을 해결하기 위해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매년 약 2천만 명이 기아로 죽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현실이라면 우리가 매 끼마다 음식을 앞에 놓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않습니까?
또한 날마다 식사기도를 드리며 감사를 표현하는 것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축복을 부르는 좋은 습관이 몸에 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에게 축복을 부르는 감사의 습관을 몸에 익히도록 좋은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2. 작은 은혜라도 임할때 감사하십시오.(26)
어느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식사기도를 하는 기준이 애매하단 말이야. 간식으로 과일 한쪽을 먹을 때에도 매번 기도를 해야 하나?" 어떤 목사님이 조크로 3천원 이상만 감사기도하면 되지!
우리 말 성경번역에서 예수께서 식사 전에 '감사하셨다'를 많은 경우 '축사하시고'라고 번역한 것을 볼수 있습니다. 거의 신약 성경에서는 '감사'와 '축복'이 동의어처럼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리 작은 식량이라도 먹을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인지하셨고, 그래서 그분의 식전 '감사의 기도'는 동시에 그 축복이 다시 나누어 지기를 소원하신 '축복의 기도'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감사의 기도는 다시 축복을 나누는 기적을 불러왔던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광야에서도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음식을 나누어 주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실제 2만 명 가까운 군중들이 배불리 먹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감사가 축복을 불러온 것입니다. 한 아이가 가져온 점심은 겨우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족하다고 불평하지 않고 그것이라도 감사하였을 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유명한 스펄전 목사는 "한 자루의 촛불을 인하여 감사하는 자에게는 별빛을 주시고, 별빛을 인하여 감사하는 자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인하여 감사하는 자에게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인하여 감사하는 자에게는 햇빛도 필요 없는 천국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해도 그것이 축복임을 깨달을 때 예수님처럼 즉각적으로 감사하십시오. 감사는 또 다른 축복과 기적을 가져 올 것입니다.
3. 삶의 위기 앞에서 감사하십시오.
예수님은 언제 감사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위기 앞에서 감사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에는 예수님의 위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소위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예수님은 감사기도를 드리십니다. 예수님은 이 마지막 만찬이 끝나면 당신이 체포당하시고 십자가로 가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가 지금 나누시고 있는 떡은 잠시 후 십자가에서 부서져야 할 그의 몸이셨습니다. 그것이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하신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지금 나누시고 있는 잔은 잠시 후 십자가에서 흘리셔야 할 그의 피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마태 26:28에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이런 당신 자신의 인생의 최대의 위기인 죽음앞에서 예수님은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위기를 만나면 마음의 여유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감사를 잊기 쉽습니다. 감사를 잘 하는 사람도 감사대신 불평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습관이 어떤 상황에서든지 축복을 부른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감사하는 성도들에게는 원수 마귀의 간계가 통하지 않습니다. 위기를 맞게 하여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다가온 사단의 세력이 당연히 불평하고 원망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기도하며 감사까지 하는 우리의 모습을 볼 때 얼마나 당황하겠습니까? 여러분 감사를 통하여 마귀를 당황시키며 사시기 바랍니다. 놀라서 단숨에 도망가게 만듭시다.
만일 우리도 우리의 삶에서 부딪히는 모든 역경의 상황 배후에 존재하고 움직이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 오늘은 보이지도 않고 이해도 안 되지만 내일에 보여 지고 이루어질 그 선하신 뜻을 믿을 수만 있다면 바울 사도가 가르친 그대로 우리도 '범사에 감사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당신이 많은 세금을 내야 한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에게 안정된 직장과 사업장이 있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몸무게가 늘어 옷이 맞지 않는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은 먹을 것이 넉넉한 인생을 살아오신 것입니다. 세탁할 옷이 집안 한 구석에 쌓여 있거든 감사하십시오. 당신에게는 적어도 갈아입을 옷의 여유가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집에 대 청소가 필요하고 문고리를 갈아야 하고 창문을 갈아야 한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의 몸을 위탁할 집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멀리라도 주차할 공간을 찾았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에게 잠시라도 걸어갈 운동의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 불평할 대통령이 있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뒷자리에 앉아 있는 교우의 찬송 음정이 억망으로 들려오고 있다면 감사하십시오. 당신의 청각은 정상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울리는 자명종 소리가 고통스럽게 들리거든 감사하십시오. 당신에게 일어나 일해야 할 하루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해가 저물어 온몸이 나른하고 피곤하거든 감사하십시오. 당신은 오늘 하루를 생산적으로 사신 것입니다.“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마 26:26-29 / 이필재목사
예수님은 자신의 생애에 두 번 제자들을 자신이 준비하신 식탁에 초대하셨습니다. 한번은 오늘 말씀이고, 또 한번은 부활하신 후 갈릴리 해변에서 조반식탁을 마련하신 적이 있습니다. 부활 후에 조반식사 초대 때는 떡과 생선을 숯불 위에 구워 놓으시고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며 아침 식사를 직접 하신 것을 성경을 통해서 볼 수 있고, 조반 먹은 후 베드로를 중심으로 반문형식의 설교를 하셨는데 그때는 제자들의 사명감을 위한 영성 훈련이었다고 우리가 평가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 성찬의 목적을 예수님 자신이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28절에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주님의 성찬의 목적을 확실하게 정의하셨습니다. 성찬의 의미는 “죄 사함”이 됩니다. 우리 기독교 진리의 인간 정의는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비단 기독교뿐만이 아닙니다. 모든 종교의 노력은 “선(善)의 추구”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은 누구나 이미 죄인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악을 버리고 선을 향하기 위한 진리로의 방향제시라고 우리가 평가를 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족들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나름대로의 법문화를 만들어 왔습니다. 모든 법문화의 기초가 있습니다. “상벌”문화로 되어 있습니다. 죄를 지은 자는 벌을 주고, 선을 행한 자는 이에 해당하는 상을 준다는 문화입니다. 왜 그렇게 되어 있는가? 성경 자체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죄를 지은 인간이 벌을 받아서 에덴을 쫓겨났고 그 회복을 위한 구원의 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열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 구성에 원인이 되고 있는 “피”를 속죄의 조건으로 하나님이 열어 놓으신 죄 사함의 길을 인간은 가게 되는데, 구약시대는 짐승의 피로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속죄 축복을 인간들이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 이후는 십자가의 피가 죄 사함의 이유가 되게 하심으로 인간의 죄를 이 성찬의 의미로 사해주신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렇다면 기독교 진리는 확실해졌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공로 없이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를 죽이고 내가 살아난 자리에 사는 것입니다. 아울러 누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가? 바로 기독교 진리의 진정한 참여자는 용서의 능력이 소유된 자입니다.
어느 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기도문의 중심 부분은 의무가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 말의 해석은 “우리에게 죄 지은 자에 대한 용서 없이 하나님의 죄 사함 은총을 기대하지 말라!” 이렇게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한번 심각한 생각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류는 누구나 공동체 속에 일원으로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가정에서 출발해서 수많은 사회생활과 우리처럼 이렇게 교회 공동체, 혹은 국가 공동체 하나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어떻게 이러한 공동체가 건강하게 인간 행복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용서의 진리 실천이 없이는 절대 불가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약 용서하는 진리가 없다면 이 세상은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는 악순환의 길을 걸어야만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하여 주시며 너희도 이렇게 용서하라고 하는 진리가 인류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어 가는 기초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가 무엇인가? 아픔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 그러니까 주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제자가 있다면 십자가를 지는 제자인데, 십자가는 곧 자기 아픔을 말합니다. 우리가 나누는 사랑을 두 가지로 구분을 합니다. 이것을 하나는 “because”라고 하고, 하나는 “in spite of”라는 말을 합니다. 먼저 “because” 즉, “왜냐하면” “때문에” 우리는 사랑합니다. 예쁘다든지 능력이 있다든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무슨 조건 하나가 나로 하여금 그를 사랑하게 만드는 그런 사랑에 우리가 머물고 있습니다. 그러나 “in spite of”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면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에까지 갈 수가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관계를 가질 수 있는 데까지 가는 것이 사랑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자신을 죽이고 있는 사람을 향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스데반은 돌에 맞아 쓰러지면서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이것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에 도달하는 표현입니다.
저는 이민자들을 위해서 오랫동안 목회를 하면서 미국 사회에서 내가 바라본 미국의 부흥사와 목회자 중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를 받는 부흥사 한 사람과 목회자 한 사람을 생각했습니다. 부흥사는 여러분도 잘 기억하시는 “빌리 그래함” 목사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보다 더 훌륭하고 열매가 많은 부흥사는 현재까지 없습니다. 목회자는 달라스 침례교회의 “크리스 웰” 목사입니다. 어떻게 그가 미국 침례 교단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훌륭하고 존경받는 목회자가 되었는가 제가 좀 살펴봤습니다. 현재 그 목사님이 한 교회에서 43년간 목회를 했는데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교회에 43층의 기념관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영원히 그를 기념하자.” 그럴 만큼 존경을 받습니다. 미국에서 개신교 가운데 침례 교단이 가장 교인 숫자가 많고 큽니다. 그런데 전체 침례 교인들은 그를 ‘침례교회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만큼 존경을 받습니다. 어떻게 목회를 했는가? 그의 목회 철학의 특징은 하나입니다. 바로 “용서”입니다. “용서” 하나로 43년의 목회를 한 교회에서 했습니다. “우리는 용서 하나로 우리의 삶을 시작하자.” 자신이 실천하고 자신이 용서하며 살았습니다.
어떻게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에게는 젊은 목회자 시절에 잊지 못할 일화가 있습니다. 외국 목회자들의 사는 모습을 보면 우리 한국 목회자들이 그렇게 취미 활동을 하면 아마 교인들에게 상당히 비판의 대상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부분들을 외국 목회자들은 종종 합니다. 취미 활동도 보통 우리 한국인 목회자들은 절대로 하지 아니하는 그런 취미 활동을 아무 불편 없이 잘 합니다. 크리스 웰 목사님은 젊은 목회자 시절부터 사냥을 좋아했어요. 대한민국 목사 가운데 사냥을 취미로 하는 목사님은 거의 없잖아요? 사냥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것도 꼭 토요일 날 간단 말입니다. 한국인 목회자들은 기도하고 성경보고 설교 준비하고 내일의 주일 준비를 위해서 마음 자체를 아주 경건하게 가져야 되는 시간인데, 이 분은 토요일이면 틀림없이 사냥터를 찾아가서 사냥을 하는데 짐승을 수없이 잡으면서 잘 한단 말입니다. 어느 날 토요일도 사냥을 나갔어요. 그래서 신나게 짐승을 잡는데 멀리서 물체 하나가 움직이는데 아, 노루가 한 마리 지나간단 말이에요. 그래서 정 조준을 해서 쐈는데 가서 보니까 노루가 아니라 사람이었어요. 현장에서 죽었어요. 그러니 목사 생활은 끝난 거지요. 목사가 어떻게 했기에 토요일 날 사냥을 즐기는 것도 문제가 되지만 아니, 사람과 노루를 구분하지 못하고 사람을 죽였으니 멀쩡한 사람이 한 명 죽었단 말이에요. 크리스 웰 목사가 아주 젊은 시절입니다. 30대 초반에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 그의 목회는 끝났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는 돌아와서 교회에 사실을 보고하고 목회직에 사표를 냈습니다. 사실 교회도 ‘사람 죽이는 목사’라는 별명이 붙은 목사를 존경하기 힘들잖아요? 그런데 그때 온 교회가 결정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때에 최고의 좋은 결정을 해야 되는 기회를 만났는데 담임 목사의 실수를 용서하자.” 그래서 크리스 웰 목사에게 계속 목회 요청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받아들여서 43년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침례 교단의 아버지’가 되었는데 그는 그 사실을 기억하고 “기독교의 진리는 바로 용서이다. 내가 용서함을 받았기 때문에 평생을 통해서 용서하는 자가 주님의 제자이다.” 눈물의 설교를 했고 자신이 실천을 함으로 미국에서 제일 큰 교단인 침례 교단에서 가장 존경받는 목회자로 ‘침례교의 아버지’가 되어서 43년을 그 교회에서 목회를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죄 사함을 주시는 떡과 잔을 받는데, 주님이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내가 떼는 살과 피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온 세상이 다같이 오늘 이렇게 하는 것은 이 세상을 이렇게 함으로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영적 판단 때문에 오늘 성찬 예식을 함께 하자는 약속을 지키는 것입니다. 용서받음과 용서함의 마음으로 이 성찬에 참여하시고 영적 축복의 임재가 가슴마다 임재하는 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것은 너희를 위해서 내가 흘리는 죄 사함의 피요 언약의 피라고 주님이 성찬의 의미를 정의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떡과 잔을 받음으로 이 떡과 잔의 의미가 주는 영적 축복과 은혜를 오늘 참여하는 모든 사람마다 받을 수 있는 축복의 성찬 예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성찬의 내용, 의미 및 기한
마 26:26-29 / 박상훈목사
18세기에 독일에 있는 어떤 가정에서 한 남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서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머리도 남달리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한 가지 신체적인 장애가 있었습니다. 그는 허리가 굽은 곱사등이였습니다.
그는 청년이 되면서 같은 동네에 사는 한 처녀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처녀에게 자기의 사랑을 고백하면서 결혼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 처녀는 그가 가진 장애 때문에 선뜻 마음의 문을 열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잠을 자면서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식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자기는 건강하고 자기의 아내가 될 신부는 허리가 굽은 곱사등이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는 너무나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애원을 했습니다.
"하나님 차라리 저를 곱사등이로 만들어 주시고, 제 사랑하는 아내는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의 간절한 소원이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래서 그의 신부는 허리가 펴지고 그 대신 그의 몸은 허리가 굽어져서 곱사등이가 되었습니다.
그는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비록 꿈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에 대해서 그는 깊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러고 난 뒤에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결혼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 이루어지는 것임을 믿으십니까? 그리고 남편과 아내가 짝 지움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믿으십니까?"
그 여인도 믿음이 깊은지라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진솔하게 자기가 꾸었던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의 말을 들은 여인은 그가 얼마나 자기를 사랑하는지 깊이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동안에 닫았던 마음의 문을 열고서 그를 자기의 남편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독일의 음악가 멘델스존의 할아버지였고 또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였던 모제스 멘델스존과 그의 헌신적인 아내 프롬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과 우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받는 신부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아름다운 신부로 만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모든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우리를 의인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자신이 대신 죄인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고초를 겪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노르웨이에 있는 어느 시골에 가면 종탑의 모양이 특이한 교회가 하나 있습니다. 보통 교회의 종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뚝 서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종탑에는 어린양의 조각이 서 있습니다.
거기에는 이런 사연이 있습니다. 그 교회가 건축을 할 때였습니다. 시골 교회라서 재정이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 교인들은 교회를 건축할 때 직접 나서서 일을 했습니다. 교회의 건축이 거의 마무리될 때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높은 종탑을 세우기 위해서 교인 가운데 한 사람이 건물 꼭대기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만 실수로 그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모두가 그 사람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때마침 그 시간 그 밑에는 한 무리의 양떼가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양떼위로 떨어졌습니다. 그 결과 어린 양 한 마리가 깔려서 죽고 그는 조금도 다치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 놀라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 그 교회는 종탑에 죽은 어린양의 조각을 세워놓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서 외쳤던 음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고초를 겪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 대신 우리의 모든 죄는 깨끗하게 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찬에 참여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눈물샘이 터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해서 눈물짓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기 위해서 밖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그의 신실한 열 한 제자들과 함께 남으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옛 언약을 의미하는 유월절 만찬을 종료하셨습니다. 그 대신 새 언약을 의미하는 성찬을 새롭게 제정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해서 성찬과 관련해서 세 가지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찬의 내용과 성찬의 의미와 성찬의 기한입니다. 말씀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성찬의 내용을 살펴봅니다.
성찬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두 가지로 되어있습니다. 떡과 포도주입니다. 유월절에는 누룩이 없는 떡, 이른바 무교병을 먹었습니다. 딱딱하고 맛도 없습니다. 포도주도 평소 마시던 포도주에 물을 많이 타서 희석을 시켰습니다. 거룩한 예식이 술기운으로 인해서 경건에 지장을 입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찬의 내용물은 지극히 간단하지만 그 예식은 너무나도 거룩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26절 말씀입니다.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여기에 여러 가지 동작들이 나옵니다. 누가 떡을 가지셨습니까? 누가 축복하셨습니까? 누가 떡을 떼셨습니까? 누가 제자들에게 떡을 주셨습니까? 누가 받아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 모든 동작의 주인공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27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잔은 가지신 분도 예수님이시고, 사례하신 분도 예수님이시며, 그것을 제자들에게 주신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고 말씀하신 분도 역시 예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성찬을 제정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아울러서 성찬을 집례하시는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떡을 받고 잔을 받을 때 우리 믿음의 눈을 통해서 친히 성찬을 집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떡을 받고 잔을 받을 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찢기신 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손을 분명히 바라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갔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던 골고다 언덕에서 지팡이 하나를 기념품으로 샀습니다. 자기의 절친한 친구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는 성지순례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자기의 친구를 만나서 자기가 선물로 사온 지팡이를 건네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도 우리와 함께 성지순례를 갔더라면 참 좋았을 것을 그랬네.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 있던 골고다 언덕에서 자네 생각이 하도 간절하게 나기에 자네에게 주려고 이 지팡이를 선물로 사 왔다네."
그러자 친구는 선물을 받으면서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네가 나를 잊지 않고 생각해 주어서 너무나도 고맙네. 그런데 이 지팡이를 보면서 이런 느낌이 강하게 전해지네. 그때 그 자리에는 자네말고도 또 나를 잊지 않고 생각해 주셨던 분이 계셨다네."
그가 누구인지를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자네는 믿음이 그토록 좋다고 하면서 그분이 누구인지를 모르겠는가? 바로 예수님일세.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네와 나를 생각하시면서 그 모든 고초를 겪으시고 돌아가지 않으셨는가?"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생각하시면서 그 모든 고초를 달게 받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임마누엘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시간 성찬을 친히 집례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찢기신 손, 예수님의 피 흘리신 손, 우리에게 떡과 잔을 주시는 예수님의 손을 우리 믿음의 눈을 통해서 우리가 분명히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성찬의 의미를 살펴봅니다.
방금 우리가 살펴본 대로 성찬의 내용물은 지극히 간단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에 엄청나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떡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26절 끝 부분입니다.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떡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찢어 주신 예수님의 몸이요, 예수님의 살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유월절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였습니다. 그들은 유월절이 되면 반드시 누룩이 없는 떡, 이른바 무교병을 먹었습니다. 왜 그들은 유월절에는 누룩이 없는 무교병을 먹었습니까? 본시 누룩은 영향을 미치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과거의 삶에 영향을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제 우리가 애굽에서 살던 삶의 영향을 받지 않겠습니다. 과거와 단절된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면서 살겠습니다."
그러한 의미로 그들은 누룩 없는 떡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떡에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떡을 받아 먹을 때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찢어 주신 예수님의 몸이라는 사실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잔 안에 담긴 포도주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28절입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잔에 담긴 포도주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한 방울도 남김없이 우리를 위하여 아낌없이 흘려주신 예수님의 거룩한 피, 예수님의 뜨거운 보혈입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언약을 맺을 때 반드시 짐승을 잡아서 그 피를 뿌렸습니다. 그리고 죄 사함을 받고자 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언제나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려야만 했습니다. 생명은 피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피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인 우리는 더 이상 짐승을 잡아서 피를 뿌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어린양이 되셔서 피를 흘리시면서 우리를 위해서 죽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리면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옛 언약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새 언약의 백성들이 된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친히 몸 버려 피 흘려 우리의 모든 죄를 한꺼번에 씻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히9:22절 하반부의 말씀입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도 없느니라."
우리의 죄가 사함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흘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되 단순히 죽으실 수는 없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병에 걸려 돌아 가신다든지, 심장마비로 돌아가실 수는 없으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서 반드시 피를 흘리시면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가시면류관에 찔리셨습니다.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굵은 못에 박히셨습니다. 날카로운 창으로 허리를 상하셨습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셨습니다. 그리함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받는 잔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한 방울도 남김없이 흘려주신 예수님의 피라는 사실을 우리가 다시 한번 깊이 명심을 해야 할 것입니다.
20세기 초에 이탈리아에 지오바니 파피니라는 유명한 소설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글을 잘 썼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믿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늘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파피니가 죽을병에 걸려 꼼짝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백약이 무효했습니다. 그의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어떤 사람이 그의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일러주었습니다.
"그의 병에는 인육, 사람의 고기가 제일 좋습니다. 사람의 고기를 구해서 먹이면 어쩌면 그의 병이 나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파피니의 어머니는 예리한 칼로 자기의 허벅지를 도려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으로 요리를 해서 아들에게 먹였습니다. 그 덕분인지 파피니는 차츰 원기를 회복했습니다.
며칠 뒤에 파피니는 자기 어머니에게 그 고기를 다시 한번 먹게 해 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외출한 틈을 타서 또다시 자기의 다른 쪽 허벅지를 도려내었습니다. 그러다가 동맥을 잘랐습니다. 피가 멈추지를 않았습니다. 결국 그의 어머니는 정신을 잃고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습니다.
잠시 뒤에 외출에서 돌아온 파피니는 그 끔찍한 장면을 보고서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죽어가는 어머니를 품에 안고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의 오열하는 목소리를 듣고 그의 어머니는 겨우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들에게 이렇게 당부하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아들아, 나는 죄 많은 몸으로 너의 목숨을 일시적으로 구했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으신 몸으로 우리 모두의 죄를 사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과 피를 아낌없이 주셨다. 그러니 너는 반드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예수님을 믿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내가 마지막으로 간절히 부탁한다. 꼭 예수님을 믿도록 해라."
그때부터 파피니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는 그의 어머니의 유언대로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뒤 그는 "그리스도의 이야기," "떡과 포도주"등 신앙적인 글을 통해서 자신의 남은 삶을 복음을 전하는데 바쳤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과 피를 아낌없이 다 주셨습니다. 오늘 성찬을 통해서 우리가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하루는 성 프랜시스가 자기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다가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이 깜짝 놀라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갑자기 왜 우십니까?"
성 프랜시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생각나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린다네."
그 뒤로도 성 프랜시스는 종종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흐느껴 울곤 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바랍니다. 가물어 메마른 땅처럼 심령이 메말라 있는 우리들, 눈물이 메말라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우리의 눈물샘이 터지기 바랍니다. 우리를 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십자가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시면서 자신의 몸과 피를 아낌없이 우리에게 다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격해서 눈물짓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성찬의 기한을 살펴봅니다.
우리가 성찬을 언제까지 지켜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시고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입니다.
29절 /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포도나무에서 난 것, 곧 포도주를 이제부터 하나님 나라에서 새것으로 제자들과 함께 마시는 그 날까지는 다시 마시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구약의 유월절 만찬이 종료된 것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 이후 우리는 두 번 다시 유월절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때의 만찬을 일명 "최후의 만찬"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유월절 만찬이 종료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새롭게 제정해 주신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찬을 지키고 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은 성찬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언제까지 성찬을 지켜야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우리 주와 더불어서 먹고 마시는 그 날까지입니다. 예수님이 구름을 타시고 우리에게 오시는 그 날에 우리는 공중으로 끌어 올려갈 것입니다. 그 직후 우리는 계19:9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지극한 영광 가운데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해서 다시금 먹고 마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까지는 우리는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명에 따라서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찬을 계속해서 거룩하게 지켜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다시금 성찬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제 성찬 앞에 놓여있습니다. 우리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믿음의 눈을 통해서 골고다 언덕에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조용히 바라보십시다.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가시에 찔린 예수님의 얼굴에서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습니다. 양 손과 양 발에는 굵은 못이 박혀 있습니다. 못 박힌 자리에서도 붉은 피가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우리를 위해서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 밑에서는 예수님을 못 박은 자들의 희롱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시간이 지날수록 예수님의 몸은 아래로 처질 수밖에 없습니다. 상처는 더 커져갑니다. 예수님의 찢겨진 몸은 점점 더 크게 찢어져만 갑니다.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시간은 흘러갑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예수님의 음성을 우리가 들을 수 있습니다. 땅에서 올라오는 열기와 예수님의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출혈로 인해서 예수님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습니다.
"내가 목이 마르다."
그 소리를 듣고서 어떤 사람이 달려가서 해융에 신 포도주를 적셨습니다. 갈대에 꿰어 예수님의 입에 대었습니다. 네 시간, 다섯 시간, 여섯 시간.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 말씀을 하신 후 드디어 예수님은 운명하셨습니다. 잠시 후에 군병들이 예수님께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 가운데 한 군병이 날카로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사정없이 푹 찔렀습니다. 그곳에서는 피와 물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하늘과 땅도 차마 그 광경을 지켜볼 수가 없었습니다. 해는 빛을 잃었습니다. 온 땅에는 어둠이 내렸습니다. 땅은 진동하며 바위가 터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도대체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하여 아무런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이와 같이 온갖 고초를 겪으시면서 돌아가셔야만 되었습니까?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에 한번 귀를 기울여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은 전적으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모든 고초를 겪으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해서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조금이라도 동참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자 몸부림이라도 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그 사랑에 감격하며 눈물짓고 헌신을 다짐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의 남은 생애를 주를 위해서 쓰임 받기를 원하는 거룩한 마음의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만찬의 축복
마 26:26-29 / 이삼규목사
이탈리아의 작가 지오반니 파피니의 이야기입니다. 본시 그는 철저한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무서운 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의 소식을 들은 어떤 사람이 믿음이 독실한 그의 어머니에게 인육(人肉)을 먹여보라고 일렀습니다. 인육을 구하기가 쉽습니까? 그의 어머니는 궁리 끝에 칼로 자기의 허벅지 살을 잘라 요리해 아들에게 먹였습니다. 그 요리를 먹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아들의 병이 차츰 낫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지난번에 먹었던 그 고기를 또 한번 먹었으면 좋겠다고 소원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들 몰래 자기의 살을 베려다가 그만 동맥을 잘라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외출에서 돌아온 그는 충격적인 광경을 보고는 오열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 지난번에 먹은 고기도 어머니의 살이었군요!”
어머니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간신히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당부했다.“나는 죄 많은 몸으로 너를 구했지만 예수님은 죄 없는 몸으로 우리를 위해서 살을 찢기시고 피 흘리셨단다. 그러니 너는 반드시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그후 그는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의 이야기’, ‘떡과 포도주’ 등의 저술로 남은 여생을 복음을 전파하며 살았습니다.
오늘은 성례주일입니다. 말씀 강론이 끝나면 우리는 성찬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성찬의 축복"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성만찬의 성경적 기원
성만찬의 성경적 기원으로는 구약의 유월절에서 처음으로 찾을 수 있습니다.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되기 직전에 제정된 유월절은 하나님 자신이 종되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행위였습니다. 따라서 유월절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년에 한번씩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을 다시 체험하는 역사의 순간입니다.
수세기 동안 유월절은 유대인들에 의해 매년 축제로 지켜져왔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유월절 축제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 사건 자체에 직접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사건을 온 가족이 드라마로 재연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치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한 것처럼 옷을 입고, 유월절에 먹도록 지정된 음식을 먹으며,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받는 과정을 이야기와 행동을 통해서 다시 체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던 날 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수많은 유대인들이 했던 것처럼 유월절 음식을 먹으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축하하는 의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의미에서의 유월절은 그리스도 자신의 죽음과 그 뒤를 따르는 부활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기도를 바꾸셨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유월절 사건의 의미를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들은 일년에 한번 유월절을 축하한 것이 아니라 매번 모일 때마다 가능한 한 자주 축하하였습니다.
신약에서 성만찬을 묘사한 몇 가지 단어들을 생각해 봅시다.
1)떡을 뗌(The Breaking of Bread)-그리스도의 임재 하심과 부활의 기쁨을 의미합니다.
이 말은 가장 초기에 사용된 단어입니다.
행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떡을 떼어 그들과 함께 잡수시던 그들의 경험(눅 24장, 요 21장 참조)이 바로 그것입니다. 모든 식사에서 그리스도의 임재 하심이 축하되어졌고, 예배 중에 떡을 떼는 것은 떡과 잔의 표적을 통해 예배 공동체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 하심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하게 되었습니다.
2)주의 만찬(The Lord’s Supper)-그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전 11장에서 언급하였습니다.
고전 11:20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바울이 볼 때 고린도교회는 술주정을 하면서 떡을 떼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잘못된 행동을 나무란 것입니다. 그는 유월절 식사를 상기시켰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죽음을 묵상하는 기회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주님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죽음(배반과 후속 되는 고통) 전날 밤과 관련되어집니다.
3)성찬식(Communion)-그리스도와 우리 서로 간의 신비한 연합을 의미합니다.
바울 서신인 고린도전, 후서 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우상에게 희생 제물로 바쳤던 고기를 먹어야 하는가에 대한 본문에서 나타납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을 반대하는 그의 논쟁은 이 행위는 이방신을 숭배하는데 참여하는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고전 10:20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동시에 그는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찬이라는 단어는 '참여'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고전 10: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여기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떡과 잔을 나눔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성취된 신비한 결합에 참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무엇인가를 시작함으로써 비롯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믿음을 통해 성도들과 연합을 시작하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4)성찬(Eucharist)-찬양과 감사의 제사를 의미합니다.
이 말은 '감사'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고전 14:16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여기에서 감사라는 말이 "유카리스트/Eucharist"이다. 유카리스트의 강조 점은 항상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그의 생명을 내어준 아들을 선물로 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리는 데 참여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찬에 참여하게 되는데 앞에서 말씀드린 것들을 기대하면서 성찬에 참여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주님이 우리의 상한 마음을 치료하시고, 상처를 싸매 주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등의 독특한 방법으로 우리와 만나 주실 것을 믿으면서 참여해야 합니다.
2. 주님이 제정하신 성만찬
우리 주님께서 제정하신 성만찬은 오늘 우리들이 행하는 성찬과는 약간 달랐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찬에서 우리가 무엇을 먹습니까? 먼저 떡을 먹습니다. 떡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양식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고전 10: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초대교회 성찬식은 큰 덩어리로 된 빵을 집어들고 기도하고 떼어서 성도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으로 매우 간단하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떡을 미리 잘라서 성찬식을 거행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처음으로 거행하셨던 최후의 만찬장면으로 우리가 돌아가 봅시다.
1)그가 취하셨습니다(He took).
떡과 잔을 취한다는 것은 성만찬을 준비하는 행위 가운데 상징화됩니다. 우리들은 예배부에서 미리 준비하므로 예식을 거행하지만 초대교회에서는 성도들이 성만찬을 위하여 음식과 물건을 바쳤습니다. 또는 헌금을 바쳤습니다. 그것을 취하는 것이 성만찬의 일부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2)그가 축복하셨습니다(He blessed).
마지막 성만찬에서 주님은 유대인의 전통적인 기도에 따라서 떡과 잔을 가지시고 축복하셨습니다. 이러한 성만찬 기도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주장하시며, 모든 것을 돌보시며, 특별한 복을 내리시는 분임을 고백합니다. 성찬식의 기도는 하나님의 좋은 선물과 특별히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에 대해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3)그가 주셨습니다(He gave).
성만찬의 마지막 행위는 떡과 잔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즉 성찬식을 행하는 것입니다.
고전 10: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떡을 받고 잔을 받음으로 해서 그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신비적인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하나되는 비결인 것입니다. 교회는 피와 살을 나눈 가족들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초대교회에서 행했던 방식대로 성만찬 예식을 거행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 정신은 똑 같음을 여러분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우리 성도들이 주님과 신비적인 연합을 이루고 이 땅에서 주님을 의지하여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내 몸이니라
마 26:26-29 / 김명혁목사
오늘 아침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주님이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하신 말씀 "이것이 내 몸이니라" 라는 말씀의 뜻을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떡과 포도주는 주님의 몸입니다.
성찬은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기념의식이지만, 성찬은 단순한 기념의식이 아니고 주님의 몸을 실제로 받아 먹는 체험의식 입니다. 고전11장에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사역과 주님의 죽음과 주님의 부활을 항상 기억하고 기념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머리로 생각하고 기념하는 기념의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과거의 사실을 나의 삶에서 재현하고 체험하는 재현의 종교요 체험의 종교입니다. 성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찬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쯔윙글리의 견해는 성찬은 주님의 죽음을 기념하는 싸인이나 씸볼이라는 것입니다. 이 기념설은 성찬에서 영적이고 신비적인 요소를 제거해 버리고 맙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견해는 성찬식에서 사용하는 떡과 포도주는 주례자가 기도하고 "이것이 내 몸이니라"라고 선언하는 순간 떡과 포도주가 즉시 화학적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 화체설은 성찬을 지나치게 요술적으로 또는 기계적으로 만듭니다. 루터와 칼빈의 견해는 성찬식을 거행할 때 떡과 포도주에 그리스도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임재설을 우리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들이 취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 조금 색다른 견해를 취하려고 합니다. 저의 견해는 우리가 받는 떡과 포도주가 바로 주님의 살과 피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근거를 "이니라" 라는 주님의 말씀에 둡니다. 주님께서 떡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이 내 몸이니라" "이것은 내 피니라" 라고 분명하게 말씀했습니다. "This is my body." "This is my blood."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Is is is. 라는 말을 했습니다. 즉 이다는 이다 이다라는 말입니다.
물론 저는 로마 카톨릭 교회처럼 떡과 포도주가 즉시 화학적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받는 떡과 포도주가 영적으로 주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견해를 "영적 화체설"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떡을 받아 먹고 잔을 받아 마시라고 말씀하실 때 떡이란 말과 살이란 말을 번갈아 사용했고 잔이란 말과 피란 말을 번갈아 사용하셨습니다. 즉 떡을 주시면서 자기 살을 먹으라고 말씀했고 잔을 주시면서 자기 피를 마시라고 분부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53-55). 예수님께서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라고 말씀했을 때 떡과 포도주를 단순히 주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며 받을 것이 아니라 실재로 주님의 몸과 피라고 생각하며 받으라고 말씀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오늘 아침 믿음으로 떡과 포도주를 받을 때 이 떡과 포도주는 영적으로 주님의 살과 피가 됩니다. 주님의 생명의 일부를 우리 몸 속에 받아 드리게 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요 신비한 일이요 두려운 일이요 축복의 일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아 먹는 것입니다.
2. 떡과 포도주를 받을 때 주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부어집니다.
성찬식을 거행할 때 우리는 주님을 지성적으로 또는 윤리적으로 생각하고 닮는데 그치지 않고 주님의 생명을 신비한 방법으로 받게 됩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고상한 가르침과 윤리를 받고 닮는 지성적인 종교도 아니고 윤리적인 종교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그저 정직하고 선하고 자비로운 윤리를 가르치는 고등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생명을 신비하게 받아 드리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이 내 속에 들어와 계시는 인격적인 종교요 신비로운 종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예수님께서 그저 상징적으로 비유적으로 지성적으로 윤리적으로 우리에게 들어오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신비한 방법으로 우리 몸 속에 들어 오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일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저 상징적으로 또는 비유적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실재로 신비한 방법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귀신도 사람의 몸 속에 들어오는데 왜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와서 사시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제는 나의 심장이 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심장이 내 속에서 뛴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성찬을 통해서 우리 안에 들어 오십니다.
우리가 오늘 아침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떡과 포도주를 받아 먹을 때 이 떡과 포도주는 영적으로 주님의 살과 피가 되고 그래서 주님의 생명이 우리 몸 속에 부어지고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두려움이 물러가고 죄악의 세력이 무너지고 사탄 마귀의 세력이 항복을 하게 되고 질병의 세력이 물러가게 됩니다. 주님이 우리 몸 속에 오시면 우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사하고 행복해 집니다. 오늘 아침 성찬식을 거행할 때 주님이 우리 몸에 오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요 신비한 일이요 두려운 일이요 축복의 일입니다. 주님이 오십니다. 영광의 주님이 우리 안에 오십니다. 할렐루야 아멘.
3. 떡과 포도주를 받을 때 우리는 천국과 연결됩니다.
성찬식은 이 땅에서 거행하는 의식이지만 사실은 천국과 연결되는 천국 행의 의식입니다. 예수님은 지상에서 성찬식을 거행하면서 그것을 천국에서 거행할 천국잔치에 연결시켰습니다. "내가 이제부터는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마26:29). 이 말씀의 뜻은 지금 세상에서 성찬에 참예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아버지의 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천국잔치에 참여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찬식은 천국잔치의 예표이고 천국잔치에 참여할 자격을 부여하는 보증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요6:54).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요6:57). 오늘 아침 우리가 떡과 포도주를 받아 먹을 때 우리는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 보증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 몸에 받은 주님의 몸이 천국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보증이 됩니다. 우리 몸 속에 있는 주님의 몸을 보이면 천국잔치에 들어 갈 수 있게 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요 신비한 일이요 축복의 일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돈합니다.
성찬은 십자가의 죽음을 기념하는 과거적 기념 의식인 동시에 살아계시는 주님을 우리 몸 속에 받는 현재적 체험 의식입니다. 동시에 주님과 함께 천국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 받는 미래적 보증 의식입니다. 우리는 이제 떡과 포도주를 받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주님을 기억하고 묵상합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 안에 들어 오시는 주님을 우리 몸에 받아 드립니다. 그리고 앞으로 주님과 함께 참여할 천국잔치를 바라봅니다. 오늘 아침 주님께서 우리의 성찬식을 축복하시고 우리 속에 임재하시고 우리에게 승리와 기쁨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천국의 영광을 바라보고 소망 가운데서 즐거워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를 축복하시옵소서.
성찬의 은혜
마26:26-29 / 김명혁목사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103:8).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도다"(요엘2:13).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는 은혜를 천대까지 베푸신다고 말씀했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6).
1. 은혜의 수단 (Means of Grace)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 세 가지 은혜의 수단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 세가지 은혜의 수단은 말씀과 기도와 성례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습니다. 베드로가 말씀을 전했을 때 예루살렘에 모였던 3천명이 은혜를 받았고 베드로가 말씀을 전했을 때 고넬료 집에 모였던 가이사랴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전했을 때 루디아와 빌립보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은혜를 받습니다. 120명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했을 때 은혜를 받았고 고넬료가 기도하다가 은혜를 받았고 루디아가 기도하다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또한 성례를 통해서 은혜를 받습니다. 성례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세례와 성찬입니다. 3천명이 세례를 받았을 때 은혜를 받았고 고넬료와 루디아가 세례를 받았을 때 은혜를 받았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떡을 받아 먹었을 때 은혜를 받았고 디베랴 해변에서 일곱 제자가 떡을 받아 먹었을 때 은혜를 받았으며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떡을 떼며 성찬을 거행하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2. 은혜의 본질 (Essence of Grace)
성찬은 은혜의 핵심이요 본질입니다. 우리는 성찬을 통해서 세 가지 은혜를 받습니다. 과거적인 은혜와 현재적인 은혜와 미래적인 은혜를 받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죄 사함의 은혜를 받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우리가 십자가 사건을 기념하며 가슴으로 받아 드릴 때 우리들은 지금 죄 사함의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는 성찬을 받으면서 현재적인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가 떡과 포도주를 받아 먹고 마실 때 그 떡과 포도주는 영적으로 주님의 살과 피가 됩니다. 주님께서 떡과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면서 "이것이 내 몸이니라" "이것은 내 피니라" 라고 분명하게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찬을 받아 먹을 때 주님의 생명이 우리 몸 속에 부어집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두려움이 물러가고 죄악의 세력이 무너지고 사탄 마귀의 세력이 항복을 하게 되고 질병의 세력이 물러가게 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요 신비한 일이요 두려운 일이요 축복의 일입니다. 주님이 오십니다. 영광의 주님이 우리 안에 오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는 성찬의 현재적인 은혜입니다.
우리는 성찬을 받으면서 미래적인 은혜를 받습니다. 성찬식은 이 땅에서 거행하는 의식이지만 사실은 천국과 연결되는 천국 행의 의식입니다. 예수님은 지상에서 성찬식을 거행하면서 그것을 천국에서 거행할 천국잔치에 연결시켰습니다. "내가 이제부터는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마26:29). 이 말씀의 뜻은 지금 세상에서 성찬에 참예하는 사람들은 앞으로 아버지의 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천국잔치에 참여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찬식은 천국잔치의 예표이고 천국잔치에 참여할 자격을 부여하는 보증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떡과 포도주를 받아 먹을 때 우리는 천국에 들어 갈 수 있는 보증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 몸에 받은 주님의 몸이 천국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보증이 됩니다. 우리 몸 속에 있는 주님의 몸을 보이면 천국잔치에 들어 갈 수 있게 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요 신비한 일이요 축복의 일입니다.
3. 은혜의 삶 (Life of Grace)
성찬을 받은 사람은 세 가지 은혜의 삶을 살게 됩니다. 첫째 주님을 위한 삶을 살게 됩니다. 나를 위해서 죽으신 주님을 위해서 살게 됩니다. 그래서 시간도 드리고 물질도 드리고 모든 것을 다 드립니다. 마게도냐 지역의 성도들은 이와 같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드리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성찬을 받은 사람은 둘째 이웃을 위한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이 위해서 죽으신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살게 됩니다. 성찬을 영어로는 holy communion 이라고 하는데 성찬 의식을 통해서 우리들이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어졌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살과 피로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를 위해서 다른 성도들을 위해서 우리의 모든 이웃을 위해서 사랑의 삶을 살게 됩니다. 길 잃고 헤매는 우리 밖에 있는 어린양들을 위해서 살게 됩니다.
성찬을 받은 사람은 셋째로 자기를 죽여서 제물로 드리는 헌신의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이 자기 몸을 부순 것처럼 우리도 몸을 부수는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게 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12:1).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신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라"(롬6:13). 자기 몸이 부서지도록 자기를 죽여서 제물로 드립니다. 이것이 성찬을 받은 사람이 사는 은혜의 삶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 세 가지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말씀과 기도와 성례의 수단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와 성례를 통해서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는 은혜의 본질(essence of grace)인 성찬을 통해서 세 가지 은혜를 받습니다. 과거적인 은혜와 현재적인 은혜와 미래적인 은혜를 받습니다. 죄 사함의 은혜와 주님을 우리 몸에 모시는 내주의 은혜와 천국잔치에 참예하는 영광의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성찬을 받은 사람은 은혜의 삶(life of grace)을 삽니다. 주님을 위해서 사는 드림의 삶과 이웃을 위해서 사는 사랑의 삶과 자기를 부수고 죽이는 제물의 삶을 삽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분부를 따라 성찬을 받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아 먹을 때 여러분 모두에게 죄 사함의 은혜와 주님 모심의 은혜와 천국잔치 참예의 은혜를 다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찬을 받은 사람답게 주님을 위한 삶, 이웃을 위한 삶, 자기를 부수고 죽이는 제물의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찬의 은혜를 우리들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성찬의 은혜 (요약) 2002.4.7
마26:26-29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103:8).
1. 은혜의 수단 (Means of Grace)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 세 가지 은혜의 수단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 세가지 은혜의 수단은 말씀과 기도와 성례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습니다. 베드로가 말씀을 전했을 때 예루살렘에 모였던 3천명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은혜를 받습니다. 120명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했을 때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성례를 통해서 은혜를 받습니다. 성례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세례와 성찬입니다. 3천명이 세례를 받았을 때 은혜를 받았고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떡을 떼며 성찬을 거행하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2. 은혜의 본질 (Essence of Grace)
성찬은 은혜의 핵심이요 본질입니다. 우리는 성찬을 통해서 세 가지 은혜를 받습니다. 과거적인 은혜와 현재적인 은혜와 미래적인 은혜를 받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죄 사함의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는 성찬을 받으면서 현재적인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가 떡과 포도주를 받아 먹고 마실 때 그 떡과 포도주는 영적으로 주님의 살과 피가 됩니다. 주님의 생명이 우리 몸 속에 부어집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모든 두려움이 물러가고 죄악의 세력이 무너지고 사탄 마귀의 세력이 항복을 하게 되고 질병의 세력이 물러가게 됩니다. 우리는 성찬을 받으면서 미래적인 은혜를 받습니다. 성찬식은 이 땅에서 거행하는 의식이지만 사실은 천국과 연결되는 천국 행의 의식입니다. 성찬식은 천국잔치의 예표이고 천국잔치에 참여할 자격을 부여하는 보증입니다.
3. 은혜의 삶 (Life of Grace)
성찬을 받은 사람은 세 가지 은혜의 삶을 살게 됩니다. 첫째 주님을 위한 삶을 살게 됩니다. 나를 위해서 죽으신 주님을 위해서 살게 됩니다. 그래서 시간도 드리고 물질도 드리고 모든 것을 다 드립니다. 성찬을 받은 사람은 둘째 이웃을 위한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이 위해서 죽으신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살게 됩니다. 성찬을 영어로는 holy communion 이라고 하는데 성찬 의식을 통해서 우리들이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어졌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공동체를 위해서 다른 성도들을 위해서 살게 됩니다. 성찬을 받은 사람은 셋째로 자기를 죽여서 제물로 드리는 헌신의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이 자기 몸을 부순 것처럼 우리도 몸을 부수는 희생과 헌신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분부를 따라 성찬을 받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살과 피를 받아 먹을 때 여러분 모두에게 죄 사함의 은혜와 주님 모심의 은혜와 천국잔치 참예의 은혜를 다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성찬을 받은 사람답게 주님을 위한 삶, 이웃을 위한 삶, 자기를 부수고 죽이는 제물의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찬의 은혜를 우리들에게 충만이 주시기를 바랍니다.
춘계성찬식 - 의미있는 성찬
마 26:26-30 / 오창우목사
오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이번 주간은 고난주간으로 지내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주일이라고도 합니다.
우리는 이날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면서 성찬식을 갖게 됩니다. 성찬식은 예수님께서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행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성찬에 참여한다고 하는 것은 "나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하는 증표가 되는 것입니다.
꼭 알아야 될 일은 아무나 참여할 수 없는 것이 성찬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이 성찬에 참여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남녀는 사랑을 하고 결혼을 약속해도 결혼하지 않고 혼인신고하지 않으면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세례 받은 사람만이 성찬의 은혜를 나눌 수 있고, 받을 수 있습니다. 성찬에 참여하려면 먼저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세례는 죄씻음 받은 표입니다. 그리스도인된 증거입니다. 그래서 세례 받은 사람만이 참석한다 하는 것이 성찬의 규칙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거룩을 해하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옆에서 달라 그런다고 해서 주는 실수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뭐 그까짓 빵 한 조각, 포도주 한 모금 얼마나 된다고 인색하게 구느냐? 이런 식으로 불평하거나 시험 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는 인색하게 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빵은 얼마든지 줄 수가 있어요. 그러나 이 성찬의 떡은 내가 주고 싶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면 이 성찬에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찬의 의미를 알면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교회가 왜 이런 규칙을 정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우리 말씀을 같이 나누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 앞에 17절부터 20절까지 있는 말씀을 한 목소리로 같이 읽겠습니다.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아멘.
예수님께서 성찬을 시작하신 날이 유월절입니다. 유월절 잔치 때 이일을 하셨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히브리 사람들은 유월절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 전국각지에서 세계각지에 흩어져 살던 교포들까지 모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200만 내지 300만이 모였다 그럽니다. 굉장한 숫자입니다. 여관은 물론 각 집, 그리고 빈터마다 텐트들로 인산인해였다 합니다. 오늘날도 유대인들은 유월절을 민족 최대의 명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여러분, 유월절이 어떤 날입니까?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다가 해방된 날입니다. 이 날이 이 유대인들에게 그렇게 의미가 있는 것은 이유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애굽이라고 하는 나라가 당시 최강대국입니다. 피라밋이 불가사의 아닙니까? 피라밋을 건축하는 나라니까 굉장히 힘이 센 나라다 상상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나라를 대항해서 종살이하던 이들이 해방 받아 자유를 쟁취했다 이거는 이스라엘의 자부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그것도 창과 칼을 쓰지 않고 하나님의 도움심과 은혜로 해방을 받았다 이것도 하나님을 믿는 백성의 자부심입니다. 이런 간증이지요. 여러분, 내가 이북에서 내려올 때 죽을 뻔했는데 살았다 그 간증이 하루 이틀 하고 끝나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한다구요.
이번 부활주일 앞두고 지난 번 장장로님 환송하느라고 같이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다 마치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죽었다 살은 얘기를 했어요. 우리 고장로님이 새벽기도 오시다가 중앙선 침범해서 다 죽었다가 차는 폐차 되었는데, 내외가 살았어요. 야 좋으시겠다 말이에요. 옆에 신장로님 최권사님 다 돌아가실 뻔하고, 장례식 준비하다 살았다, 얼마나 좋겠느냐? 그 다음에 채장로님 한집사님 그랬지요, 방장로님 그러셨지요. 그러니까 한턱들 내십시오 그러니까 다들 그렇게 합시다. 이번 부활 주일에 아마 큰 턱이 있을 겁니다. 부활 주일이 다음 주일이에요. 멀지도 않습니다.
죽었다가 살았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 이거는 평생 자랑입니다. 이거는 신앙인의 자부심이라고요. 그래서 유월절은 지킨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잔치해서 먹는다 이런 의미가 아니라 그런 자부심이 그 안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의 속국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소망이란 딴 거 아닙니다. 로마에서 해방 받고, 승리하면 좋겠다 하는 그런 염원과 열정들이 유월절 잔치 속에 들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잔치라고 하는 것이 대단하게 치뤄질 수밖에 없습니다.
유월절 첫날이 되게 되면 오후 3시쯤 해서 제사가 시작이 됩니다. 그래 예배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가져온 양을 가지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도살을 하고 제사를 지냅니다. 200만 명이 모이면 한가족이 한 마리를 먹는다 좀 어렵거든요. 그러니까 보통 10명에 한 마리 정도 따집니다. 200만 명이 모이면 20만 마리의 양이 죽는 겁니다. 300만 명이 모이면 30만의 양이 그 날 죽습니다. 대단한 일이죠.
그래서 이 집안에 가장이 양을 메고 성전을 향해서 들어갑니다. 그럼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 이 죽은 양을 가지고 제사를 지내는데, 그 양고기를 이들이 먹어야 되니까 그 제사장들이 죽이는 일을 합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20만 마리가 그 피를 흘리고 그 피를 쏟아냈다 어떻겠습니까? 피비린내가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걸 어떻게 다 하느냐? 제사장과 레위 사람은 24개조가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반열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24개조가 1년에 15일씩 돌아가면서 이 성전에 와서 봉사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머지 조는 각 지파가 나누어준 레위 사람들의 거처에서 자기생활을 하다가 자기 순서가 되게 되면 올라오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비유에서 제사장이 그래서 올라온 것이 아니냐? 그런 얘기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이렇게 순서를 돌아가면서 하는데 유월절이 되게 되면 24개조가 풀가동이 됩니다. 다 올라오는 거지요. 그래서 와 가지고 이 제사를 지내게 되는데, 이 제사를 지낼 때에 한번은 한 노인이 그만 많은 인파에 깔려 죽는 불상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이후로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이러면 되겠느냐 해서 질서 있게 진행이 되면서 예수님 당시에는 20만 마리, 30만 마리가 2시간이내에 다 양을 도살하는 일을 끝냈다고 하니까 얼마나 일사분란하게 일이 진행되었는가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유월절 희생 제사를 드리고 난 가장들은 자기의 희생제물인 양을 도로 받아 가지고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의 처소에 돌아와서 저녁부터 유월절 잔치를 시작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성경말씀의 20절에도 보게 되면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그랬습니다.
유월절 잔치는 예루살렘성에 어두움이 드리워지기 시작하는 바로 그 저녁 때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우리 나라도 이 계절이 날씨가 좋습니다. 꽃도 피고 좋은데, 유대나라는 이 계절이 굉장히 좋은 계절입니다. 그래서 이제 비가 오고 싹이 나고 꽃이 피고 향이 나고, 그러니까 초여름입니다. 날씨가 좋습니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면 이 날이 바로 보름 전날이니까 달이 환하게 떠 있습니다. 좋은 일기 속에서 하늘의 보름달이 거의 만들어지는 그 밝은 아래서 이들이 잔치를 벌이게 되는 것입니다.
가장이 앉고 가족들이 앉아서 같이 합니다. 예루살렘 성에서 집집마다 잔치마다 양고기를 굽는 냄새가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낮에는 피비린내로 대단하고 밤에는 양고기 굽는 냄새로 얼마나 대단한 지 모릅니다.
그러니 예루살렘 성안에가 이 냄새로 얼마나 지독했겠는가는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아주 끔찍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방 사람들이 전혀 의미가 없는 사람들이 유월절 잔치에 참가했을 때는 냄새가 역해서 아마 한순간도 못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그 냄새의 의미가 다릅니다. 바로 이 양고기를 먹고 그 양고기를 굽고 그 피를 받을 때에는 우리는 애굽을 이기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자유인이 됐다. 그 의미를 가지고 그 양고기를 굽고 그 피비린내를 어떻게 봤겠습니까? 얼마나 은혜로 봤겠어요. 그러니 의미를 가진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가 이렇게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그런 잔치를 지금 합니다. 그래서 이날 잔치날이니까 아주 흰옷들을 쫙 입고 집집마다 다 흰옷을 입고 잔치를 하고 그 잔치가 끝나게 되면 아이들은 한 2시쯤 끝나는데 잠자리에 들고 나머지 식구들은 또 모여 가지고 신앙 토론도 좀 하고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도하고 예배드리는 것으로 유월절 잔치를 계속 하게되는 것입니다.
이 유월절 잔치에 있어서 크라이막스는 음식을 나누는 것입니다. 이들이 음식을 먹는 것이 예수님 당시에는 양고기 그 다음에 쓴나물, 이 쓴나물은 양고추냉이 여러분 고추냉이 뭔지 아시죠? 와사비..쓰죠? 와사비 씁니다, 고거 하고 그 다음에 마짜라고 하는 유대인의 빵이 있습니다.
누룩 없는 빵인데요. 밀가루 반죽해 가지고 이스트 안 넣고, 부풀리지 않고 그냥 만든 빵 있잖아요. 맛없잖아요. 그 빵. 요 세 가지를 먹습니다.
오늘날 유대인들은 요 세 가지 외에 세 가지를 더 먹는데, 정강이 뼈, 그 다음에 삶은 달걀, 그 뭐냐며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던 것을 상징해 가지고, 그 우리의 정강이뼈가 없으면 걷질 못하잖아요. 우리가 이런 고통을 겪고 있다. 계란을 먹으면서 우리는 고난을 받으면 받을수록 계란이 그렇잖아요, 삶으면 삶을수록 어떻게 되요? 단단해져요. 우린 고난을 받을수록 단단해 진다. 그래서 이들은 그것을 통해서 다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것을 소망하면서 이것을 먹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 파슬리나 샐러리 같은 것들을 양상추 같은 것들을 소금물에 찍어서 먹는데 소금물이 짜지 않습니까? 그 때 고통을 생각하면서 이 봄, 즉 봄 날씨에 채소가 있으니까, 그 봄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민족에게도 봄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제 그걸 먹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 먹었던 것은 이 양고기, 마짜, 쓴나물 이 세 가지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유월절 잔치상에 벌려진 음식들의 종류를 보면서 우리가 한가지 느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부페가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면 음식잔치가 아니라는 겁니다. 유월절 잔치는 단순히 음식 먹고 마시고 뭐 얼마나 먹느냐 배부르냐 이런 잔치가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의 예식이고 제사고 예배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유월절 잔치입니다. 유월절 잔치는 그렇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 이것을 순서로 딱 짜놓고 이제 예배를 드립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배 순서를 보시게 되면 주께 나아갑니다, 주께 경배합니다, 말씀하소서, 주여 나를 받으소서, 주여 나를 보내소서. 이 예배 순서라고 하는 것도 그냥 짜진 것이 아닙니다. 요것도 하나님 앞에서 순서를 만듭니다. 내가 주님 앞에 나갑니다. 겸손하게 나가고 주님께 경배합니다. 주님 말씀하시고 내가 주님께 나를 받칩니다. 이제 나를 하나님 세상을 향해 보내달라 이런 순서대로 이들의 유월절 잔치도 과거, 현재, 미래, 이런 순서대로 진행합니다.
그래서 과거 그러면은, 지난날의 어려운 시절들과 고난과 슬픔을 기억하면서 과거, 또 현재의 축복을 감사하면서 현재, 미래의 소망을 주실 것을 원하면서 미래 이런 순서대로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에 이들이 포도주 잔을 놓고 포도주 잔을 4번 따르고 4번 마시고 하는 것으로 순서가 진행이 되는데, 이제 가장이 앉고 가족이 쭉 둘러앉습니다.
그러면 가장 앞에 포도주잔이 있고 거기다 포도주 한잔을 붓습니다. 그리고는 얘기를 합니다. `지금부터 유월절 잔치를 시작한다` 그리고 `하나님 이 자리를 축복하소서` 하고 축복의 선언을 하게 되면 앉아있던 가족은 일제히 일어나 가지고 밖으로 나가서 손을 씻고 옵니다. 깨끗이 씻고 다시 그 자리에 옵니다.
그리고 그 앞에 놓인 음식을 마짜를 부수고, 그 다음에 쓴나물을 놓고 양고기를 펼쳐 놓습니다. 자 거기까지 합니다. 그러면 `다 준비 됐는가` 그러면 주인은 포도주를 쫙 마십니다. 내려놓습니다. 다시 포도주잔이 올라옵니다. 채웁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시작이 됩니다. 이때가 과거를 회상하는 겁니다. 그러면 맏아들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아버지, 이 밤이 다른 밤하고 다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습니다. 요즘에 유대인들은 이렇게 한다고 합니다. 어린 자녀부터 시작해 가지고 한마디씩 묻습니다. `아버지 우리가 왜 쓴나물을 먹어야 합니까?` 또 다른 아들이 `아버지 우리가 왜 마짜를 먹어야 됩니까?` `아버지, 우리가 왜 이 양고기를 먹어야 됩니까?` `아버지 우리가 왜 이 정강이뼈와 삶은 달걀을 먹어야 합니까?` 이렇게 음식 하나 하나를 놓고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그 질문을 하게 되면 그 아버지는 그것에 대해 대답을 해주는 겁니다.
먹기 전에 대답을 해주는 거예요. `쓴나물은 지난날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고난과 슬픔을 생각하면서 먹는 것이다. 마짜는 하나님께서 너희들의 해방시켜 줄테니까 빨리 출애굽 준비를 하라 그럴 때 시간이 없지 않았느냐. 그러니 누룩 안넣은 빵을 만들어서 우리는 그것을 먹었다. 바로 급한 상황을 얘기 하는 것이다`
`양고기는 뭡니까?` `양고기는 하나님께서 말씀하기를 피를 뽑아서 문설주에 바르고 너희는 여행을 위해서 음식을 잘 비축해두라. 그리고 피를 바르고 난 그 집에는 하나님의 사자들이 다니면서 그 피가 있는 집은 그냥 지나갔다. 유월했다. 그냥 담장을 넘었다. 그래서 유월. 유월의 표시다 그것은 우리를 살리는 상징의 표시다. 그래서 양고기는 단순히 고기가 아니다. 바로 이 속에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 속에 있다`
`그러면 삶은 달걀은 왜 먹습니까?` 이건 요즘 나오는 얘기죠. `이것은 우리가 더 고난받아서 단단해 져야한다.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설명이 다 끝나고 나면 또 가장은 포도주 한잔을 쫙 들이켜 마십니다. 그리고는 또 놓으면은 세 번째 잔이 부어집니다. 이 세 번째 잔이 부어질 때 이들은 정 자세를 합니다.
그런데 그 전에까지는 어떤 자세를 하냐면은 이들이 이렇게 반 누워있는 상태대로 가족들이 다 누워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유대인들의 `미쉬나`에 보게 되면, 교훈집입니다. 탈무드 같은 교훈집인데, "유월절 음식은 꼭 비스듭히 누워서 먹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예수님 당시의 로마 사람들은 그 중에 자유인, 로마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은 자유인입니다. 이 자유인들은 식사를 할 때 누워서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꼭 유월절 잔치를 할 때 누우라는 거예요, 옆으로. 다 누우라는 겁니다.
그 이유는 뭐냐면 `우리는 하나님의 힘으로 자유함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육신적으로는 노예지만 이 속국에 살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우리가 자유함을 받은 자들이다` 그런 상징으로 눕습니다.
그러다가 세 번째 잔이 따라질 때, 이들은 정 자세를 합니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음식 먹을 준비를 하는데 쓴 나물과 마짜, 이것을 먹습니다. 요즘에는 마짜에다가 쓴나물을 집어넣어 가지고 먹습니다.
제가 성지순례로 이스라엘에 갔을 때에도, 그 식당에서 그들이 먹는 것을 보니까, 그 마짜가 이렇게 쌓여있어요. 그래서 동그란 빵인데요. 그것을 열면은 우리의 호떡처럼 이렇게 벌어집니다. 그 안에다가 야채를 막 넣어 가지고, 그렇게 먹더라구요. 저도 또 그렇게 먹었죠. 그리고 쓴나물을 마짜 속에 넣어 가지고 샌드위치처럼 먹습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나물이 씁니다. 마짜는 누룩이 없어요. 누룩 없는 마짜입니다. 부풀지 않았어요. 그러니 그 딱딱한 그것을 쓴나물과 함께 먹었다. 맛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맛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정자세로 앉으면서 아버지가 우리에게 설명해주신 그 내용들을 기억하면서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살이 하다가 하나님의 그 구원의 해방의 은혜 그것을 생각하면서 먹습니다.
음식은 맛이 없지만, 그 안에는 엄청난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지금 알고 먹는 것입니다. 그러니 맛이 있다 없다 얘기를 할 수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대단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먹고 난 다음에 양고기를 메인 메뉴를 먹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럽니다. 그 예수님의 성찬의 그림이 잘못 그려졌다. 그것은 단순히 누워서 식사한다는 그 의미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성찬을 나눌 때, 이들이 정자세 하면서 그것을 받았다,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정자세로 먹는 것입니다.
유월절 식사 때에 유대인들은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를 부르면 그들의 유월절을 더욱 실감나게 음미할 수 있습니다.
아바딤 하이누 하이누 아타 브네 호린 브네 호린
아바딤 하이누 아타 아타 브네 호린
아바딤 하이누 아타 아타 브네 호린 브네 호린
우리는 노예들이었네 그러나 지금은 자유롭다네 자유롭다네
우리는 노예들이었네 그러나 지금은 자유롭다네
우리는 노예들이었네 그러나 지금은 자유롭다네 자유롭다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 하시는 내용은 바로 3번째 포도주잔을 따르고 난 다음에 주신 말씀입니다. 이들은 당연히 마짜와 쓴나물과 함께 양고기를 먹어야 되는데, 그 시간에 주님께서 그 의미를 새롭게 만들어 주시는 겁니다. 그것이 26, 27, 28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같이 한번 읽겠습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아멘.
자! 여태까지 먹었던 빵을 가지고 제자들도 유월절 잔치에서 마땅히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민족을 구출해낸 광경을 연상해야 될 터인데 주님은 그것을 가르켜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언약을 세우겠다 바로 이것이 내 몸이다 이것이 내 피다 바로 이것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 바 나의 피, 언약의 피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우리가 다시 출애굽기로 돌아가면은 자명해집니다. 출애굽기 6장 1절부터 있는 말씀인데요, 제가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이니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가나안 땅 곧 그들이 거류하는 땅을 그들에게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이제 애굽 사람이 종으로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 소리를 내가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여러분, 포도주잔 첫잔이 올려지고 식사를 하기 전에 가장은 무슨 얘기를 하냐면 출애굽기 6장 1절부터 6절까지 있는 말씀, `나는 여호와다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우리에게 가나안을 약속한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신음소리를 듣고 자유하게 하실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이 오늘 이 잔치를 하라고 그랬다` 축복의 제1선언이 바로 그것입니다.
두 번째 잔을 마시면서 하는 것이 무어냐면 유월절 잔치의 의미를 얘기하는 것인데, 그것이 6장 6절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그래서 그들의 상황을 설명했던 것입니다.
세 번째 잔을 마시면서 이 아버지가 이 마짜와 쓴나물과 양고기를 먹으면서 하는 얘기가 무어냐면 바로 이 애기입니다. "편 팔과 여러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속량하여" 라는 말이 나옵니다. 속량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갚아준다고 하는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은 애굽 사람의 종이라 그랬습니다. 노예입니다. 종이 해방을 받으면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 종이 자유인이 되는 방법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돈을 갚아주는 겁니다. 종을 돈주고 사는 겁니다. 두 번째 방법이 뭐냐면 이 주인하고 전쟁을 해가지고 이 주인을 죽이고 그 종을 뺏아 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종이 자유인이 되는 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니고 속량, 대가를 치뤄야 되는 것입니다. 돈이든지, 전쟁을 하든지.
하나님의 선택은 돈을 치루는 것이 아니고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너희를 어떻게 속량하냐 "편 팔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손을 내미시는 겁니다. 다시 불러모으는 겁니다. 사랑의 관심입니다.
그리고 "여러 큰 심판들로써"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전쟁을 선전포고하시는 거예요. `내가 너희 때문에 전쟁을 할거다 심판하는 일을 할거다` 그것이 바로 열 가지 재앙입니다. 그것도 작은 심판이 아니고 큰 심판을 열가지를 할거다. 열가지 재앙이 말이죠, 얼마나 대단한 재앙들이었습니까? 바로 그것을 통해서 너희들에게 자유할 수 있도록 갚아 주겠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유인되게 하기 위해서 이 선택을 했던 것입니다.
속량한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그 말씀이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언약의 피니라 내가 너희들을 죄에서 구속하기 위해서 바로 내 몸과 내 피, 내 생명을 너희에게 대속물로 주노라"
오늘 우리가 주님의 성찬을 나누는 것은 따른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를 대속하기 위해서 내어주신 주님의 몸과 피를 먹는 겁니다. 이거 아무렇게나 먹을 수 있겠어요? 여기 이런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애굽의 바로를 무너뜨리면서 자유를 주셨는데, 지금은 다른 것이 무어냐? 똑같은 대가를 치르고 자유를 주는데, 다른 점이 뭐냐? 그 때는 바로를 쳐부수고 자유를 줬지만 지금은 예수님이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를 희생해서 우리에게 자유를 줬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유월절 양이 제물이 되어서 백성들을 살린 것처럼 예수님이 제물이 되어 가지고 오늘 우리들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셨다는 사실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영국 빈민가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하며 사는 한 유대인 크리스천이 있습니다. 바로 그 분을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떻게 크리스천이 되었습니까?" 그랬더니 이 여인이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유대인이 예수를 믿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 아닙니까?
그런데 말이죠, 2차대전 때, 자지가 블란서에 있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독일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이 죽임을 당했어요.
자기에게도 그 죽음의 위협이 찾아왔다는 거예요. 독일의 비밀경찰이 찾아와서 숨어있는 자기를 잡아가려고 하는 순간에 이웃집에 사는 한 미망인 크리스천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당신 신분증을 나에게 주고 당신은 빨리 피신하시오" 그러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는 물었다는 거예요. "어째서 당신은 나에게 이런 친절을 베풀 생각을 했습니까?" 그랬더니 그 분이 하는 말이 "나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 주님은 더 큰 사랑을 하셨습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신 그 사랑에 비하면 나는 아주 작은 사랑일 뿐입니다." 그 말 한마디했대요.
그래서 그 유대인의 신분증을 가지고 그 크리스천 여인은 붙잡혀가 수용소에서 6개월동안 있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겁니다. 이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한 사람이 증거한 예수님의 사랑의 증거을 듣고 그는 가만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는 예수를 믿게 되고 그는 일생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의미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엄청난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생을 뒤바꾸어 놓은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의미있는 성찬이 되기 위해서 적어도 두 가지 질문을 해야 될 것입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대속의 의미를 아느냐? 그 분의 생명 바쳐서 나를 구원하셨어요.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감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의미있는 성찬을 위해서 두 번째 질문, 나도 예수님처럼 살아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저 강원도의 양양 남대천의 연어는 저 알래스카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그 남대천에서 알을 낳고 죽는다고 하더라구요. 여러분, 알래스카에 살면 거기서 살다가 알낳고 죽지, 왜 거기까지 오는 겁니까? 만약에 알라스카에다가 알을 나면, 그 바다에다가 알을 나면, 그 알은 부화되기 전에 다 죽을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한 생명 살리기 위해서 연어는 그 알라스카에서 이 남대천까지 죽음의 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와서 알을 낳고 죽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연어의 생명이 지금까지 보존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물 뿐아니라 식물도 마찬가지예요.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거기서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생명을 바치지 않고 생명이 탄생하는 법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으로 죽으시니까 우리가 사는 거예요. 우리가 생명 바쳐 죽을 때에 우리의 생명 때문에 또 다른 생명이 나오는 것입니다. 육신적인 생명도 그렇잖아요.
하물며 우리가 주의 복음을 증거하겠다매요, 많은 생명들을 주 앞으로 돌아오게 하겠다매요, 죽어가는 이들을 살리우겠다매요.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딱 한가지입니다. 너도 생명 바쳐라 하는 겁니다.
생명이 생명을 낳게 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도, 하나님의 교회 역사도 순교하는 자가 있으니까 오늘 교회가 이 시간까지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요, 피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지난 주간에 새벽기도하면서 다섯 가지 제사를 우리가 배웠습니다. 속죄제와 속건제, 내 죄를 용서받는 의무제입니다. 그러나 내 생명 바치는 번제, 내 재물을 헌신하는 소제, 그리고 이웃과 나누는 화목제는 다 자원제입니다. 내가 스스로 해야 됩니다. 스스로 하는 일이 있을 때에 하나님의 생명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 건설하겠다면서, 복음화하겠다면서, 이 생명 주는 사명 없이 불가능하다 그 말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돈 잘 벌기를 원합니다. 출세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돈 벌고, 출세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지 않고, 우리는 주님의 성찬에 참여하면서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생명, 이런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 예수 닮아 가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는 기도하는 분들이, 많은 분들이 그러더라구요. `목사님 설교에 감동 받게 해주고` 여러분, 말씀은요, 감동 받아서 하는 게 아닙니다. 감동 받아서 말씀대로 사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수학에 공식이 있고, 과학에 공식이 있습니다. 감동 받아서 문제 풉니까? 풀다 보니까 감동이 되더라구요. 우리가 인생의 공식이라는 것도 딴 거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공식이 딴 거 아니에요. 아이가 감동이 되어서 사랑합니까? 사명이니까 사랑하는 거예요. 사랑하다 보니까 더 사랑하는 겁니다.
예수로 사는 것도 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를 주실 때에 그 계시가 감동이 되든, 안되든 그냥 받는 겁니다. 그리고 말씀을 받고 순종하였더니 그랬더니 하나님이 복을 주시더라는 거예요.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이루리라" 말씀했거든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랬거든요.
말씀이 뭐 감동입니까? 순종하는 것이지. 주의 오늘 말씀하실 때에 순종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역사하시는 겁니다. 성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대속에 은혜에 감사하고, 그리고 나도 생명 바쳐 주를 위해 살겠습니다.
이 약속 이것 없이는 우리가 바른 성찬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생명 때문에 내가 살은 것처럼 내가 생명 바쳐서 많은 사람을 구원해내는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마 26:26-30 / 손상률목사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가 그린 「최후의 만찬」은 종교 미술의 대표작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열두 제자가 좌우에 여섯 명씩 앉아 있고 넓은 식탁 위에는 먹다 남은 떡 조각들이 널려 있는가 하면, 제자들이 잔을 나누며 예수님과 환담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의 저자들은 하나 같이 이 성만찬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주간인 유월절 전날 밤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어느 집 큰 다락방에서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시킨 채 제자들만 앉혀 놓고 이 뜻 깊은 예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성만찬을 집례하신 예수님께서 떡을 거머쥐고 축복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어서 잔을 들고 사례하신 후 제자들로 마시게 하였습니다. 이때 나누어주신 떡과 포도주는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나타내는 것으로써 속죄의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예식을 거행하시면서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고 하시며 이것이 최후의 만찬임을 말씀하셨습니다(29절).
한편 공관복음 저자들과 다른 시각에서 예수님의 생애를 조명한 요한은 성찬식 행위보다 그 이면의 내용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찬식을 시작하기 전에 있었던 발 씻기신 일과(요 13:4-14), 그 후에 예수께서 당부하신 새 계명의 의미를 강조하였습니다(요 13:34).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과 함께 거행하신 성찬식을 통해서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 교회의 성분을 규정짓게 하시며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지니는 참된 의미를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Ⅰ. 그리스도로 연합된 공동체
「교회」(敎會)라는 말은 「사람들의 모임」을 뜻합니다. 성경적 어원은 「부름 받은 무리」를 의미하는데 이를 설명하면 하나님이 세상 사람들 가운데 그의 자녀로 불러내신 무리들인 것입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불러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일 뿐 부름 받은 사람에게 어떤 특징이 있거나 공통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만 보더라도 그들은 성격이나 출신 배경이나 그들이 가진 소양이나 어느 것 하나도 공통점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있을 때 서로 큰 자라고 으스대거나(막 9:34), 질투하기도 하고(마 20:24), 위험을 당할 때는 자기만 살려고 뿔뿔이 도망가는 비겁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마 26:31).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연합하여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모델로 삼았습니다.
(1)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연합입니다.
성경에는 교회를 사람의 몸으로 비유하는가 하면 건물로도 비유하였습니다.
에베소서 1:22-23에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곧 예수님은 머리요 우리 성도들은 몸이라는 뜻입니다. 에베소서 4:16에는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 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교회를 건물에 비유하면서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리 돌로 하고 성도들은 거기에 연결되어 지어져 간다고 하였습니다(벧전 2:4-6).
(2) 성별된 연합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인 교회는 거룩한 집단입니다. 죄로 오염된 세상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구별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거룩한 무리 곧 성도(聖徒)라고 불립니다. 고린도전서 1:2에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원래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향하여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레 11:45). 그러나 범죄한 인간이 스스로 거룩하여 질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자녀 되는 우리들을 거룩하게 만들어 주심으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에베소서 1:4에는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 전에 선택하여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로 구별하였다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1:7에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구속 곧 죄사함을 받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원래는 다 죄인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 보혈로 사죄를 받고 거룩한 신분으로 연합을 이룬 사람들인 것입니다. 로마서 3:23-24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3) 신비로운 연합입니다.
사람의 육체는 머리와 옴과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으나 거기에는 골격과 힘살과 혈관 등이 서로 연결되어 몸을 지탱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신경 작용이 있어 몸 전체가 하나처럼 유기적으로 움직이게 합니다.
교회의 유기적 연합도 매우 신비로운 요소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개성이 다르고 소양이 다르지만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까지 서로 같이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성령이 그 속에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4-6에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고 하였습니다.
Ⅱ. 사랑으로 연합된 공동체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를 부부의 관계로 비유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에베소서 5:22-33에 보면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며 섬기는 것은 교회가 예수님께 하듯 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는 것처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와 같은 원리를 말하면서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고 하였습니다(엡 5:32). 교회는 사랑으로 연합된 공동체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주인입니다. 교회의 성분을 알려면 주인 되시는 예수님의 성향을 아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사도 요한은 사랑에 대하여 가장 실제적으로 교훈 하였습니다. 요한1서 4:7-8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1서 4:10에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가 사랑의 실제라는 뜻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이라면(요 3:1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을 십자가 위에 내어주시고 살을 찢기고 피를 흘려서 대속의 제물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거행하는 성찬예식은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사랑을 형상화하는 신령한 의식이 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한 연합
다같이 부모의 사랑을 나누며 자란 형제들은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동기간에 우애를 돈독히 하며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 더불어 종적(縱的)관계에서 사랑의 공급을 받은 자들로써 이것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횡적(橫的)관계로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제자들과 함께 가진 성만찬 자리에서 사랑으로 연합할 것을 언급하신 것도 그의 행하신 일과 더불어 실제적인 교훈이 됩니다. 고린도전서 11:24에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였습니다. 곧 한 덩이의 떡을 가지고 제자들이 서로 나누어 먹게 하므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같이 나누는 공동체임을 인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 있어서 가장 큰 동인(動因)은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고 하였습니다(고후 5:14). 골로새서 3:12-14에는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고 하였습니다.
(3)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연합입니다.
요한복음 13장에는 성만찬과 관련된 예수님의 교훈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찬에 임하시면서 먼저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주인이 밖에서 들어올 때 기다리고 있던 하인이 상전의 발을 씻기고 수건으로 닦아주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는 것은 너무나 파격적이고 주객이 전도된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일을 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하였습니다(요 13:13-15).
그리고 사랑의 계명을 선포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3:34-35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하였습니다.
Ⅲ. 그리스도의 이상을 이루는 공동체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삼 년 동안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는 한편 제자들을 양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자기의 교회 설립을 선포하신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6:18에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 교회가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과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 가르치는 일을 하게 하였습니다(마 28:18-20). 교회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께서 자기 교회가 사명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권세를 부여하셨습니다(마 16:19).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주님오시는 그 날까지 예수님께서 의도하시는 그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세움을 받은 기관입니다.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입니다.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을 살아야됩니다(고전 10:31). 성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예배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곧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요 4:23).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인이 드리는 경건한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준비하여야 되고 그 일을 위해서 시간과 물질을 드리고 환경을 만들어 나가야됩니다. 로마서 12:1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였습니다.
(2) 복음을 증거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들을 훈련시켜 전도자로 쓰시고자 계획하였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와 그 형제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마 4:19). 예수께서 열두 명의 제자단을 구성하시고 그들에게 「사도」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사도」라는 말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삼 년 간 제자들을 말씀과 행적으로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신 다음 그들에게 증거자의 사명을 주어 세상으로 내어 보냈습니다. 마태복음 10:6-7에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도자들에게 성령과 권세를 부여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0:20에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0:1에는 “예수께서 그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곧 하나님의 교회는 이와 같은 성령의 역사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증거의 사역을 감당하는 기관입니다.
(3) 생명의 즐거움을 나누는 것입니다.
교회는 생명운동의 산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본체입니다. 요한복음 1:4에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요 10:10).
세상에는 참 생명이신 예수님을 멀리하고 죄와 마귀의 세력에 포위된 채 질식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진동합니다(눅 21:25). 그리스도의 교회는 죄와 죽음 아래 있는 인생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고 새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복음의 소망을 제시하여야 됩니다. 그리고 회복되는 그들과 함께 최상의 즐거움을 누리게 하여야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탕자의 비유를 통하여 잃었다가 다시 찾는 새생명 운동의 감격이 어떤 것인가를 일러주었습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 15:32).
성찬의 공동체
마 26:26-30 / 이동원목사
우리 교회내 작은 교회들인 1,050개의 작은 교회 목장 교회들도 일제히 오프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금주내 대부분의 목장교회에서는 성찬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포함하여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 교회에서 성찬식은 일년에 몇번 특별한 절기에 갖는 성례식으로만 이해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의 경우 그들의 모임의 이유 그 자체가 성찬식이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자주 반복되는 표현의 하나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였습니다. 떡을 떼기 위하여 곧 성찬을 위해 모였다는 것입니다. 교회 출석한 세월이 웬만큼 경과한 성도들이라면 성찬이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은 거의 상식으로 알고 있는 일입니다. 떡을 떼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념하고 포도주를 마시며 그의 피흘리심을 기억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영성작가인 고 헨리 나우엔은 그의 명저인 "나의 사랑하는 자요"라는 책에서 그의 유대인 친구에게 우정의 편지를 쓰면서 성찬식이야 말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상징이라고 설명합니다. 본문26절에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로 가시기 전날밤 소위 최후의 만찬의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시는 장면에서 복음서의 기자는 네 개의 의미심장한 동사들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1)가지사(take/took) 2)축복하시고(blessed) 3)떼어(broke) 4)주셨다(gave)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엔은 이 네 개의 동사를 근거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1)선택받은 자 2)축복받은 자 3)상처받은 자 4)나누어주는 자라고 선언합니다. 성찬식은 이런 우리의 정체성(우리가 누구인가?)을 확인하는 자리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확인하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철저하게 성찬 공동체라고 할수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성찬을 통해서 확인해야 할 우리자신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1. 우리는 선택받은 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할수 있는 여러 개의 떡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성찬용으로 사용합니다. 그 구별된 떡은 선택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인류를 위한 속죄의 어린양으로 창세전부터 선택되셨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당신과 나도 창세전부터 그리스도안에서 선택되었다고 증거합니다.(엡1:4) 이 선택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되어진 것이며 전적인 그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를 어떻게 느끼고 있던 상관없이 하나님의 기쁨과 사랑의 대상들인 것입니다. 그는 기쁨과 사랑으로 우리를 그의 자녀로 선택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의 문이 열리며 하늘의 음성이 들려온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을 선택하신 하나님이 당신에 대하여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신 일이 있으신지요? "너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마태3:17)고.
사단이 하는 가장 파괴적인 일은 우리의 자아상과 자존감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는 우리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아 있을 뿐이지 아무도 우리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없으며 우리를 인하여 기뻐하는 자는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단의 음성을 진리로 믿은 사람들의 현저한 특성의 하나는 스스로를 학대하고 스스로를 포기합니다. 최근 자신의 존재와 스스로의 인생에 대한 열등감에 빠져 계신 분은 안계시는지요? 아니면 최근 나를 주의 자녀로 선택하신 그 기막힌 은혜를 인하여 감격해 보셨는지요? 조시 맥도웰(Josh Mcdowell)이라는 학원 순회 전도자가 비행기를 탔는데 여 승무원이 장미를 들고 웃고 있어서 "축하합니다. 애인에게 받으셨나요?"하고 물었더니 뜻밖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아니에요. 제가 저 자신을 위하여 샀답니다." 그말을 들으니 갑자기 그녀가 측은해 지더랍니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고 합니다. "무슨 그럴만한 이유라도 있으셨는지요? 혹시 오늘이 생일이십니까?" "아닙니다. 제가 살아있고 여기에 존재하고 오늘도 이 비행기내에서 사랑하는 이웃들을 만나 그들을 섬기는 자로 선택되어 있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하고 감격해서요. 나 자신을 축하하고 싶었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선택받은 나 자신을 위하여 한송이 장미를 사실 의향이 없으신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선택받아 예수님의 손안에 취하신바가 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2. 우리는 축복받은 자입니다.
예수께서 떡과 잔을 가지신후 바로 그 다음에 하신일은 축복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주께서 저와 여러분을 자신의 자녀로 선택하신후 제일 먼저 하신일도 축복하시는 일이었습니다. 창1:28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나서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이 축복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아동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축복하는 일입니다. 아이기 태어나면 제일먼저 축복합니다. 아이의 생일 행사의 최고 절정은 축복의 메시지를 주는 것입니다. "바 미츠바"-성인식의 절정도 랍비와 부모, 이웃들이 함께 모여 어른이 되는 아이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아이가 학교에 입학할때 축복합니다. 여행을 떠날 때에도 전장에 나갈 때에도 축복합니다. 부모가 자신의 인생이 다했다고 느낄 때 그는 마지막으로 자녀들을 불러 유언과 같은 마지막 축복을 남깁니다. 우리는 모두 축복속에 태어났으며 축복을 누리고 살다가 축복을 남기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적인 인생입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에게 어떤 사람의 인생은 저주받기 위해서 태어난 것처럼 보여질 때가 있습니다. 아니 나 자신의 인생을 그렇게 느끼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사단이 하는 일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기억나십니까? 예수께서는 요한 10:10에서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여기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가 가진 소중한 것을 훔치고 우리를 멸망시키는 도적이 누구이겠습니까? 사단 마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저주하고 싶을 때 인생이 저주라고 느끼고 싶을 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순간 우리안에 저주의 영들이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영들을 결박하십시오. 그리고 자신을 축복하십시오. 여러분의 배우자를 축복하십시오. 자녀들을 축복하십시오. 이웃들을 축복하십시오. 이웃을 파괴하고 저주하는 사단의 도구가 되지 마십시오. 축복의 도구가 되십시오. 예수의 영은 축복의 영이십니다. 말로 축복하십시오. 기도로 축복하십시오. 미소로 축복하십시오. 기독교 문화가 낳은 가장 아름다운 언어는 "God bless you"입니다.(생일 축하 노래에는 본래 이 말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축복 받은 자, 아니 축복 받아야 할 인생인 것입니다.
3. 우리는 깨어져야 할 자입니다.
성찬의 떡은 선택되어졌고 축복받은 떡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축복하신 떡을 다시 취하신 예수님은 이제 그 떡을 깨트리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는 개역 한글역에는 "예수께서 떡을 떼며--"하셨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broke the bread"라고 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 깨트림이 필요할까요? 그것은 마지막 단계인 "나누는 자"가 되기 위해서 인 것입니다. 깨트려지지 않으면 나눌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약 사사시대 기드온의 항아리를 기억하십니까? 그가 미디안의 적들과 싸울 때 그는 자기 군사들로 하여금 항아리 안에 횃불들을 숨기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시간에 항아리를 깨고 횃불들을 들게 했습니다. 항아리가 깨어짐으로 횃불이 드러나 빛을 발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리아의 옥합을 기억하십니까? 마리아가 목합을 깨트리자 순전한 나드 향이 흘러나와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온 집안을 그 향기로 가득 채울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의 항아리가 깨어져야만 했고 마리아의 옥합이 깨트려 져야만 했었던 것입니다. 같은 이유로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깨트리고 계신다는 것을 아십니까?
헨리 나우엔은 이 단계의 우리를 가르쳐 상처받은 자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깨트리실 때 우리에게는 상처가 생깁니다. 그러나 그 상처는 필요한 상처인 것입니다. 아무도 깨트림의 경험을 즐거워 할 수는 없습니다. 깨트림은 아픔이요 고난이요 상처인 것입니다. 그러나 깨트림은 필요한 것입니다. 깨트려져야 빛이 흘러나오고 향기가 전달됩니다. 인생의 상처없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이웃의 상처를 만져주는 인생을 살아갈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상처는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그의 상처는 십자가였습니다. 그가 십자가로 가시기전에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요한12:24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거니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신 말씀을 말입니다. 한알의 밀로 오신 그분이 십자가의 깨어지심으로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십자가는 필요했던 것입니다. 당신의 십자가도 그래서 필요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피하지 마십시오. 십자가에 달려 우리는 죽어야 하고 피흘려야 하고 찢어져야 하고 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4. 우리는 나누어주는 자입니다.
예수께서는 최후의 만찬 그리고 성찬의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그가 취하시고 축복하시고 깨트리신 떡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나누어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다시 말하면 그가 떡과 잔을 나누어주실 때 그는 단순히 떡과 잔을 나누어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몸 곧 자신의 존재 그 자체를 나누어주신 것입니다. 성찬을 통해 우리는 이제 그의 몸 곧 그의 생명을 먹은 자가 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친히 요한6:53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그러나 성찬의 은혜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이 생명을 받은자들이 이 생명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찬의 궁극적인 목적은 나눔으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나누시기 위하여 그분도 취하시고 축복하시고 깨트리셨던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미국에서 신학생 시절에 출석했던 미국 교회에서는 성찬이 나누어 질 때 목사님으로부터 일방적으로만 받는 것이 아니라 떡을 받은 사람이 자기 옆 사람에게 전하면서 목사님에게 받은 동일한 메시지를 반복합니다. "이것은 형제를 위하여 깨어지신 주님의 몸입니다. 받아 드시지요. 그리고 이 떡을 또 다른 이웃에게 나누어주십시오."
그렇습니다, 나눔이야말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존재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나누어 준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이런 천국유머를 들어보셨습니까? 사랑을 나누며 산 사람들-금 메달/사랑을 받으며 산 사람들-은메달/사랑을 기다리며 산 사람들-동 메달/사랑을 잊어버린 사람들-목 메달/ 그리스도인들이 나누어주기를 거부했을 때 하나님은 강제로 공산주의를 일으켜 억지로 나누게 하셨습니다. 공산주의나 잘못된 이데올로기를 예방하는 최선의 방법은 솔선해서 나누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나눔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런 곳에 사단은 역사할 수가 없습니다. 물질만이 아니라 미소를, 관심을, 격려를, 부담이 없는 선물을 나누어 보십시오. 인기 절정의 여배우로서의 안락한 삶에 안주하지 않고 월드 비전의 홍보대사로 지난 10년 이상 소말리아, 인도, 르완다, 방글라데시의 빈민촌을 누비며 나눔과 봉사를 실천한 김혜자 권사님은 그녀의 자서전적인 베스트 셀러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에서 이렇게 절규합니다. "나는 슬픔의 유일한 치료제는 나눔이며, 이 사랑의 나눔이야말로 그 어떤 전쟁과 죽음보다 더 강하다는 걸 나는 믿습니다."고.
그녀의 책의 첫장은 오드리 헵번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열려집니다./매력적인 입술을 가지려면 친절한 말을 하라/사랑스런 눈을 가지려면 사람들속에서 좋은 것을 발견하라/날씬한 몸매를 원하면 배고픈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라/아름다운 머릿결을 가지려면 하루에 한번 그 머릿결을 어루만져라/균형잡힌 걸음걸이를 유지하려면 당신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며 걸으라/--당신이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할 때 당신역시 팔 끝에 손을 갖고 있음을 기억하라/나이를 먹어가며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은 당신이 두 개의 손을 갖고 있는 이유이다/ 한손은 당신 자신을 돕기 위해 그리고 나머지 한손은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서라는 것을.
성찬의 삼대 언약
마 26:26-30 / 김광선목사
오늘 우리가 하는 성찬식은 교회가 이 예식을 만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하시면서 직접 성찬의 의미를 설명하시고 그리고 성찬의 방법까지 보여 주셨습니다.
마지막 만찬을 유월절에 하시면서 성찬을 제정하신 것은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 바로 택한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대신 죽임을 당하게 될 자신을 상징했음을 알리시는데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애굽 전역에 열 가지 재앙을 내렸는데 그 중 마지막 재앙이 모든 장자들과 짐승의 처음 난 것들이 죽임을 당하는 재앙이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양을 잡아 그 피를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고기는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함께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대재앙에서 사는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그날 밤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장자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멸할 때 어린양의 피가 발라져 있었던 집은 안전했습니다.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는 언약대로 살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유월절 절기입니다.
어린양의 피와 살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렸습니다.
성도들이 사는 길은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길입니다.
유월절의 양은 택한 자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죽으실 하나님의 어린양을 예표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고 했습니다.
주님 자신도 자신이 세상에 온 목적에 대해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는 성찬식은 유월절 만찬인 것입니다.
여기 여러분들이 먹게 될 성찬의 빵은 주님의 몸을 상징합니다.
본문 26 절에,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여기 여러분이 마실 성찬의 잔은 주님의 피를 상징합니다.
본문 27-28절에,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람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했습니다.
이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들에게 주께서 세 가지 중대한 언약을 하셨습니다.
이 언약은 영원히 이루어질 축복의 언약입니다.
I.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성찬에서 우리가 먹고 마시는 떡과 잔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예수께서 요한복음 6장에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에,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즉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들, 주님을 믿는 성도들은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는 부요함의 축복’을 언약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기 전날 주님은 디베랴 광야에서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인 오천여명의 무리들을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배불리 먹이고 남는 부수러기를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차게 하는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때문에 이땅에서 부요함을 누리게 됩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와 허물만 대신 담당하신 것이 아니라 가난과 결핍까지도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성도는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가난과 결핍으로부터도 해방된 것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한 없이 가난하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남들이 보기에 가난한 것 같으니 실로 부요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이 성찬에 믿음으로 참여하는 여러분들은 결코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는 축복을 받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언약입니다.
주님의 언약을 반드시 언약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혹 여러분들 가운데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거나, 직장과 사업의 문제로 어려움이 있다거나 새로운 일을 기대하는 분들은 이 성찬에 참여함으로 형통과 부요함의 축복을 받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의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하시는 주님이시라는 것은 그 무한한 능력으로 무한정의 택한 성도들의 영혼의 배고픔과 목마름도 해결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자는 결코 주림이 없고 영원토록 목마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의 살을 먹고, 나의 피를 마신다’는 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먹고 마시는 것은 가장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느낌이 있는 행동입니다.
그만큼 주님을 구체적으로 믿고 그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으로 이 성찬에 참여하는 여러분들이 정말 예수님을 내 죄를 해결해 주신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믿고 주님의 말씀대로 산다면 어린양이신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셨듯이 기적의 방법으로 우리의 영혼을 만족하게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임합니다.
이 성찬에 참여하는 여러분들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마음에 임하여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고 살 때 심령은 기뻐하게 되고 풍성한 삶이 이루어집니다.
이 땅에서부터 맛 보는 하나님의 나라의 풍성함은 장치 믿는 성도들이 들어갈 살 영원한 나라를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이 성찬에 참여하는 여러분들에게 영육간에 결코 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II. 영생을 얻을 것이다!
요한복음 6장 47-48절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고 했습니다.
51절에,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4장 14절에,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먹고 마실 때 영생을 얻습니다.
출애굽한 백성들은 광야에서 농사를 지을 수 없었습니다.
계속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행군을 해야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 주셨습니다.
마치 눈처럼 아침에 일어나면 소복히 쌓여 있었습니다.
그것이 만나였습니다.
깟씨 같고도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습니다(출16:31)
하나님이 하늘로서 내려 주신 기적의 양식이었습니다.
만나는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먹고 영원히 살 생명의 떡인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33절에,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저희가 가로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영생을 얻습니다.
예수께서 “나는 부활이여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5-26)고 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후 주님은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나사로는 주님의 사랑하는 친구였습니다.
죽어 무덤에 장사된 지 나흘이 되었습니다.
무덤에 도착했을 때 이미 시체 썩는 냄새가 났습니다.
하지만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은 무덤에 있는 나사로를 향해 소리쳤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때 죽은 나사로가 살아서 나왔습니다.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들에게 주님은 언약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다”고 했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우리가 주님의 언약대로 영생을 얻으며 영원히 부활하여 살 것을 믿는 것은 죽은 나사로가 부활을 했고, 주님 자신이 부활을 했고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속에 임해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이 성찬에 참여하는 여러분 모두 영생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III. 하나님과 하나되는 생명의 연합이 이루어지게 된다!
요한복음 6장 56-57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를 인하여 사는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하게 될 때 성삼위 하나님과 성도가 하나가 되는 생명의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영으로 하나가 됩니다.
예수께서 세상에서 제자들을 위해 마지막 기도를 드리면서,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17:11)라고 했습니다.
성찬을 통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연합을 이루어야 할 이유를 예수께서 요한복음 15장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말씀했습니다.
성찬을 통해 생명의 연합이 이루어질 때,
1. 열매를 맺습니다.
요한복음 15장 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생명의 연합을 이루면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열매는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니라 연합의 결과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실을 많이 맺어야 할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기 때문입니다.
8절에,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며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둘째는 제자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8절에, “과실을 맺으면 내 제자가 되리라”고 했습니다.
포도나무 둥치인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있으면 열매를 맺게 됩니다.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여러분들 모두 열매 많이 맺는 참 제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기도응답이 이루어집니다.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했습니다.
생명이 연합이 이루어질 때 아버지의 일이 내 일이며 내 일이 아버지의 일이 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내가 알고 나의 마음을 아버지가 압니다.
소원만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십니다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여러분들 모두 하나님의 일이 내 일이고 내 일이 하나님의 일이 되어 무엇이든지 구하는대로 응답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기쁨이 있습니다.
11절에,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일을 이루고 난 다음에 ‘성령으로 기뻐하사’라고 했습니다.
성찬에 참여할 때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찬식 후에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나아갔다고 했습니다.
위대한 한 주간
마 26:26-35 / 임덕순목사
예수님의 생애 33년 동안에 관하여 기록한 사복음서는 총 89장인데, 그중에서 30장을 주님의 마지막 1주간의 삶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33년을 주간으로 계산하면 1716주간입니다. 그런데 1716 주간 중에서 마지막의 단 한 주간에 관한 기록을 전체의 삼분의 일이나 할애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복음서는 단순한 한 사람의 전기가 아니라, 특별한 분의 죽음과 그 의미에 관한 기록입니다. 마지막 한주간은 예수님의 생애에 비추면 1/1716에 불과하지만, 너무나 중요하고 위대한 한 주간 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마지막 일주간의 고난과 고난 뒤에 이어진 부활과 승천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위대한 한 주간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주님의 한 주간을 추적해보며 은혜를 받읍시다.
1. 일요일(종려주일) /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날.
(마21:1-11, 막11:1-11, 눅19:29-44, 요12:12-19)
부활절 전 주일을 종려주일이라고 하는데, 그날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것을 결심하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날입니다. 그날 오후에 예수님은 감람산에서부터 작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때, 군중들은 자기들의 옷을 벗어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깔고는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며 환영하였기 때문에 그날을 종려주일이라 했습니다.
1) 군중들은 호산나, 호산나라고 외치면서 주님을 환영했습니다.
호산나란, “주여, 구원하소서.” 혹은 “만세" 하는 의미인데(마21: 막11:), 그들은 이제 드디어 로마제국의 압제를 물리치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이루어줄 새 왕이 오셨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정치적인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지만, 그것은 임시방편일 뿐이어서 인간의 근본적인 불행의 원인인 죄와 사망을 해결하지 않으면, 정치와 경제와 국방이 해결된다고 하여도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들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려고 오신 분이셨습니다.
2) 예루살렘을 바라보시고 우셨습니다(눅19:41-45).
환영에 감격해서 우셨을까요? 아닙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를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라" 저희의 구주로 오신 예수님을 거절하고 십자가에 못 박을 저희들의 죄로 인하여 장차 당할 진노를 주님은 내다보시면서 그들의 장래를 보고 우신 것입니다. 우리가 욕심과 무지 때문에 가까이 다가온 하나님의 진노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멸망의 날 불타버릴 작은 이권을 위하여 진리를 거스리며 싸우는 우리의 모습 때문에, 주님은 오늘도 우시지 않으실지 생각해야 합니다.
3) 성전을 청결케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가장 먼저 성전에 가보셨는데, 그곳은 장사꾼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이들과 돈 바꾸는 환전상이 가득했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소굴로 변모시킴을 보시고 그들의 상을 엎고 쫓아내셨습니다. 성전을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인간의 이익추구의 장으로 만들어버린 모습을 보시고 분노하셨던 것입니다.
2. 월요일 / 권위의 날 막11:12-14 마21:18-22
예수님은 이른 아침에 베다니에서 들어오시는 길에, 길가의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셨습니다. 누구하나 아침식사 대접하는 이 없어서 시장하셨기 때문에,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잎을 들추셨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에는 잎사귀 외에 열매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실망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무에게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고 하시자, 곧 나무가 말라버렸습니다. 제자들이 이 일을 보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이 나무가 곧 말랐나이까?”
예수님은 열매 없는 인생들을 심판을 하시는 분임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무화과나무는 마디마다 잎사귀하나에 열매하나씩을 맺는 나무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잎사귀만큼의 열매가 맺히기를 바라십니다. 잎사귀는 있는데 열매는 없는 나무는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말은 많고 직분은 여럿 갖고 있어서 이름은 요란한데, 열매는 맺지 못하는 사람을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구주이시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나 열매가 없는 자에게는 심판주가 되신다는 것을 그날에 알려주셨습니다.
3. 화요일 / 논쟁의 날 막12: 13- 27
화요일 주님은 유대 관원들과 논쟁을 하셨습니다. “화있을진저" 라고 하시면서 그들을 책망하시고, 주님께 올무를 씌우려고 묻는 두 가지의 질문에 완벽한 대답으로 입을 막으셨습니다.
1) 가이사에게 납세하는 것이 옳으냐는 질문 (막12: 13- 17)
헤롯당원 하나가 예수님께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라 하시면, 유대 민족주의자들을 선동하여, 예수는 반민족적인 매국노라고 매도할 계획이고, 납세하지 말라 하시면, 로마당국에 반정부 음모를 꾸미는 자라고 고발하여 체포케 하려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세금으로 내는 돈을 보여달라고 하셨고, 그 돈에 쓰여진 글과 얼굴이 누구의 것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이라고 대답하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리라"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이 대답은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임기응변적 대답이 아니라 우리가 이 땅의 왕국과 하늘의 왕국의 두 나라의 시민임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우리의 생명을 부르시는 날 까지, 우리는 이 세상나라에서 충성된 시민노릇을 해야 하며, 동시에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나라의 시민임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백성들이 낸 세금으로 유지되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영접하시는 나라인데, 그 나라의 백성은 세금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를 바쳐서 헌신하여야 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직장, 가정, 사회에 충실한 시민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께는 삶을 바치는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2) 부활에 관한 질문 (막12:18-27)
이번에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들이 주님께 교묘한 질문을 했습니다. 어떤 집에 7형제가 있었는데 그중에 맏아들이 장가갔다가 아들이 없이 죽었답니다. 유대인 민법에 의하여 둘째아들이 형수를 아내로 맞아 장가갔으나 그도 후사가 없이 죽었습니다. 그렇게 하여서 일곱이 다 한 여자에게 장가들었으나 일곱이 다 아들이 없이 죽고 말았다고 가정하면서, 만약 부활의 날이 온다면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는 겁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고 자신을 소개하시지 않으셨느냐? 하나님이 옛날에 죽어버린 사람들의 하나님 노릇을 하시겠느냐? 그들이 천국에 살아 있으니까, 내가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이 아니냐 라고, 성경을 들어서 부활을 증명하셨습니다. 또한 부활 때에는 이 땅위에서 잠시 관계를 맺고 살아온 부부, 형제, 부자 등의 관계가 해소되고 진정한 아버지인 하나님과 구주이신 예수님과의 관계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밝혀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 몸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부활을 의심할만한 근거나 능력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다만 믿는 것이 지혜입니다.
4. 수요일 / 휴식의 날, 그날 행하신 기록은 성경에 없습니다.
5. 목요일 / 제자와 최후 동행일 (마26:17-30, 막14:12-16, 눅22:7, 요13:1-15)
주님은 이날,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겨 주셨습니다.
첫째는, 성만찬입니다.
주님께서 목요일 밤에 그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시게 되는데, 그 저녁식사를 성만찬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주님은 떡을 들고 축사하시고 떼어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먹을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 하셨고, 식후에 다시 잔을 부어 주시면서, ‘마시라.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피니라.’ 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또 말씀하시기를 “너희 조상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나는 하늘로서 내리는 산 떡이라 하셨고,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6:49,54) 고 말씀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언약의피" 인 것은, 옛날 창세기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구원자가 피를 흘려주신다고 예언되어온 바로 그 피라는 뜻이며, 주님은 당신의 피로 우리들과 영원한 생명의 언약을 맺어주신다는 뜻입니다. 그 언약은 영구불변입니다.
둘째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일입니다(요13:). 그 당시 부자들은 하인을 고용하여 손님들의 발을 씻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일행은 하인을 고용하지 않고 서로 돌아가면서 발을 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은, 사단이 역사하여 가롯 유다는 예수 팔려는 생각이 가득 하였고, 다른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고 경쟁하고 있었습니다. 동료의 발을 씻어줄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안타까우신 주님은 겉옷을 벗고 허리에 수건을 동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들어오셔서 하나씩, 하나씩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주님은 그 모범을 통해서 너희는 서로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셨고, 섬기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6. 금요일 / 수난의 날
이 날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날입니다. 목요일 저녁, 주님은 성만찬을 마치고 제자들을 데리고 감람산으로 기도하러 가셨기 때문에, 주님은 금요일의 새벽을 겟세마네 동산에서 맞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두렵고 졸려서 어찌할 줄 몰라서 잠자고 있었으나, 주님은 피땀 흘리는 기도를 하고 계셨습니다.
“아버지여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떠나가게 하옵소서. 하오나 내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육신을 가지신 주님의 바램은, 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를 지지 않고 인간의 죄를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죽지 않고 죄를 해결할 길을 찾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정한 대가를 요구하셨습니다. 죄인을 살리려면, 누군가는 죄인이 지은 죄를 책임지고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였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습니다. 그 복종은 죽음을 피해보려고 피땀 흘리는 고민과 갈등과 아픔 뒤에 결정한 위대한 결정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결단을 위해서 밤새워 찬 밤이슬을 맞으며 기도하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성만찬 자리에서 살짝 빠져나가 유대인들을 만나서 예수님을 넘겨주겠다고 약속하고 은 삼십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른 새벽에 검과 몽둥이와 횃불을 든 군병과 하속들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다가왔습니다. 내가 입 맞추는 그가 예수니 그를 잡으라고 약속하고는 예수님께 다가와 안녕하시냐면서 입을 맞추었습니다. 군병들은 우르르 달려들었고, 베드로는 검을 빼어 휘두르며 저항했지만 주님은 검을 거두라고 말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고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하셨습니다. (마26:47-56, 막14:43-52, 눅22:47-53,)
주님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전직 대제사장인 안나스와(요18:13)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았는데(마26:57-68,요18:24), 가야바는 예수님께 “네가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겠느냐?”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 라면서 심문하였고, 주님은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집의 하인들은 예수께 침을 뱉고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희롱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뒤를 따라왔다가, 그 집 계집종이 ‘너도 저 사람의 제자지’ 라고 추궁당한 베드로가 ‘나는 절대 아니라’고 세 번 부인하며 맹세하고 저주하는 것을 지켜보셔야 했습니다.
이번에는 총독인 빌라도에게 넘겨졌습니다. (막15:1-5, 마27:11-32, 눅23:1-25, 요18:28-38) 사람들은 이 예수가 백성을 미혹했다. 납세를 방해했다. 자칭왕이라고 했다는 등 여러 가지로 고발 했으나, 빌라도는 ‘네가 왕이냐’고만 물었습니다. 백성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아우성이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주님에게는 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죄를 선언하고 얼마의 태장을 치고는 석방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우매한 유대인들은 예수는 못 박아 죽이고 강도 바라바는 놓아달라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빌라도가 물을 가져다 자기 손을 씻으면서 ‘나는 아무 책임 없으니 그럼 너희 마음대로 하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그들에게 내어주었습니다.
사형수가 된 예수님에게 로마군인들은 온갖 수모를 주었습니다(마27:27-30). 군인들은 예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힌 후에 가시면류관 씌우고 갈대로 치며 희롱했습니다. 희롱을 다한 후에 십자가를 지게 하고, 심한 채찍질을 하며 골고다 언덕으로 끌고 갔습니다. 연약하신 주님이 십자가의 무게를 감당 못하고 넘어지자 구레네 시몬을 시켜서 대신 십자가를 지게 했습니다.
금요일 아홉시 경, 예수님은 두 강도와 함께 골고다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막15:25). 그 후 정오부터 오후 세 시까지, 세 시간동안 하늘은 갑자기 어두워졌습니다.(마27:45) 그리고 오후 세 시경,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고통을 호소하시더니,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돌아가셨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체포되셨고, 한마디의 항의나 불평도 없었으며, 마취제로 쓰는 쓸개 탄 포도주도 거절하셨고,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고 자의에 의한 것이었으며, 우리를 구하기위한 필연적 과정이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하신 말씀 그대로였습니다. 그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를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신 우리의 구주였습니다.
7. 토요일, 묘 중의 날
이날은 생명의주님이신 예수님이 사망에게 매여 계셨던 날이요,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죄인이 들어가는 무덤과 지옥의 고통 가운데로 내려가신 날입니다. 예수를 못 박은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엄청난 실수와 죄를 깨닫지도 못하고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습니다. 이제는 눈에 가시 같은 예수가 없어졌다고 신이 났고, 이제는 그들의 천하인 것 같아보였습니다.
그러나 악인에게는 평안이 없는 법,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예언에 신경이 쓰여서 군병들과 자기네 하속들을 시켜서 이중으로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게 했습니다. 그것도 못미더워서 예수님의 무덤에 종이를 붙이고, 거기에 황제의 도장을 찍어 인봉하고 떼는 자를 엄벌한다고 협박하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 끝난 것 같았고, 세상은 불의한 사람들이 지배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지낸 토요일, 그날은 그들의 유월절 이었습니다. 그들은 태연하게 유월절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유월절은, 예수를 유월절 양으로 믿는 자들의 유월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서 죽은 유월절 희생의 양이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5: )
토요일 단 하루가 지난 뒤, 일요일 새벽이 되자 예수님은 말씀하시던 대로 무덤을 열고 부활하셨고, 그 소식은 온 나라에 퍼져나갔으며, 예수를 죽이고 안도하고 있던 그들은 당황하여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예수의 부활소식을 막아보려 했으나 도리가 없었습니다. 주님은 약속하신대로 다시 살아나셔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몸을 보이셨습니다. 그날이 바로 부활주일인 것입니다. 이 모든 엄청난 일들이 주님의 생애 마지막 한 주간 동안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이 주간을 보통 ‘고난주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저는 한 주간을 위대한 한주간이라고 부르렵니다. 이번 주간은 바로 그 위대한 고난주간입니다.
이 고난주간에 우리대신 희생하신 주님을 기억하고 믿고 따르는 것이 우리의 자세입니다. 이 한 주간 고난주간 하루하루의 일정을 음미하면서 지냅시다. 부활주일인 다음주일에 새로운 기쁨과 소망으로 다시 모여 경배를 드립시다.
그리고 오늘은 주님의 수난의 결정체요 언약의 증거인 성찬을 함께 나눕시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과 약속을 받은 사람답게, 바르고 힘차게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