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좋다. 자율야구... '야구를 자유롭게... 자기가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만큼만, 꼴리는 만큼만, 자기 맘대로, 멋대로 기분내켜서 하는 야구'가 자율야구일까? 솔직히 고백하는데, 이 글을 쓰는 필자도, 한 때는 자율야구를 이렇게 단어 자체의 의미만으로 유추해서, 짐작한 적이 있었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 여러분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렇게나마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저 막연히 말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자율야구'란 말 한마디로서, 이광환의 야구를 정확히 표현할 수는 없다. 이광환 그 자신도, 자신의 야구를 '자율야구'로 표현한 적이 없다. 그럼 누가?... 도대체 누가 '자율야구'란 단어를 만들어서 인구에 회자되게 했고, 이광환의 대명사인 것처럼 대중들을 각인 시켰는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자율야구'일까?
독자들도 짐작하시겠지만, 정답은 바로 우리들의 영원한 루머 메이커 - 고명하신 '스포츠 저널리스트' 들이다. (우웩!) 그들이 과연, '이광환 야구'의 정확한 뜻을 알고 그 야구를 '자율야구'라 이름 붙였을까? '자율야구'는 과연 합당한 이름인가?
이제 적어도 후추의 독자들은... 이광환 야구의 실체를 일단 제대로 알고, 부르는 건... 독자 판단대로, 마음대로, 편할대로 부르기로 하자. '자율 야구' 던, '자유 야구' 던, '자주 야구' 던... 한가지 분명한 건, 이광환 자신은 본인의 야구를 자율야구 라고 한 적이 없다. 이광환이 얘기하고, 바라고, 그토록 하고 싶어했던 야구는... '책임야구'이다. '책임야구...? 어라? 그거 자율야구 하고는 좀 거리가 있게 들리는데...?'하시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결코 거리가 있는 말은 아니다. 자, 이 이광환식 야구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자. 도대체 이광환식 야구의 정확한 정의는 무엇인가? 이광환식 야구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역시 자율야구에 대한 선입관을 없애기 위해서 말이다.
이광환이 대한민국 최초로, 미국야구를 접했다는 사실은 앞에서도 얘기했다. 이광환의 책임야구는 이 미국 메이저리그 연수 때부터 잉태된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서 약 1년간 교환코치로 뛰며 이광환은 현대식 야구의 모든 것을 온몸으로 배웠다. 투수 로테이션, 조직적인 팀 플레이, 체계적인 훈련과정, 선수 각 개개인들의 자율적이면서도 조직적인 몸관리 등등... 동양에서 온 한 야구인에게 그 당시의 메이저리그는 엄청난 충격, 그 자체였다.
자, 이런 이광환이 귀국해서, OB(현 두산)의 감독을 맡으면서, 우리나라의 전근대적인 야구판을 고치려고, 시쳇말로 혼자 '총대'를 맸다. 반응이 어땠을까? 다른 팀들과 언론, 팬들의 반응은 차치하고라도, 우선 자기팀 내에서부터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는 반응들 이었다. 도대체 어떤 내용들이었길래?...
이광환이 주창한, 자율을 밑바탕에 둔 책임야구의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자.
첫째, 투수진의 운용을 철저한 분담제로 실시하고, 경기 4시간 전에 출장 선수 라인업을 발표한다. (이유 - 투수진의 변칙 등판을 피하고, 갑작스런 선수 기용으로 인한 선수 부상의 방지를 위해서.)
둘째, 비행기 이동 시에는 양복 차림으로 이동하며, 경기 도중 야유나 심판에 대한 항의는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이유 - 프로선수라면 팬들에게 최고, 최선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며, 심판의 오심도 야구의 일부이기 때문에, 또 오직 경기력으로만 승부를 벌이자는 취지에서.)
셋째, 배팅 연습과 수비 훈련, 주루 플레이 등을 별도로 하지 않고 동시에 연습한다. (야구는 조직적인 팀플레이가 필요한 종목이므로.)
넷째, 투수의 피칭은 포수 사인 중심에서 투수의 의사에 따른다. (이유 - 선발투수는 자기가 등판할 경기의 상대팀에 대한 타자분석을 할 수 있어야 하고, 또 해야 함.)
다섯째, 경기장에서 공수교대 시, 내야 땅볼일 때, 전력질주를 한다. (이유 - 선수들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팬들은 원하며, 런닝 효과도 얻을 수 있고, 경기시간의 단축도 가져올 수 있다.)
여섯째, 덕아웃 옆에 라커룸과 선수들의 가족 대기석을 마련하다. (무조건 이성의 접촉을 금지하지 말고, 건전하고 좋은 만남을 유도하며, 화목한 가정 분위기라야 좋은 성적이 나오므로.)
어떠한가? 별 것 아니라고? 당연한 것들 아니냐고? 물론 지금에는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내용들 뿐이다. 그래서 이광환의 이름이 후추 명예의 전당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이광환이 이 내용들을 처음 선언했을 때만 해도, 이광환은 심하게 말해서, '외계인 취급'을 받아야 했었고 이 내용들은 그만큼 혁명적이었다.
지금은 대부분의 팀에서 정착이 된 투수 로테이션 시스템. 선발투수들을 로테이션에 맞춰서 4일 동안 휴식을 하게 한 후, 등판을 하게 하는 것. 이광한은 이미 10년 전 이 시스템을 파격적으로 도입했다. 투수들의 반응이 어땠냐고? "감독님! 어제 던졌어도, 오늘 또 던질 수 있습니다! 왜 저를 등판시키지 않으십니까?", "저는 매일 던질 수 있습니다! 왜 4일동안 등판을 안시킨다는 겁니까? 많이 나가게 해주십시오!" 등등... 정말이지, 지금 들으면 쓴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그 때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 '투수 로테이션'이란 단어는... 아예 없었다. 잘 던지는 투수는 될수록 자주 많이 마운드에 올라가야만 했다. 아니 슬프게도, 투수 본인부터 매일 올라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투수도 사람이고, 무쇠팔이 아닌 이상... 결국 그 연속되는 등판의 댓가는 언제가 치루게 되기 마련이다. (작년 삼성에 소속 된 임모씨 아들 창용 군 경우를 또 다시 상기시킬 필요는 없겠지만...) 당시로선 혁명적이었던, '투수 로테이션'을 도입함으로써 선수, 코치들의 마인드를 서서히 고치려고 시도했었던 것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등판 후 4일 휴식을 하는 동안에, 뭘 해야할 지 몰라서, 술만 퍼마시고 놀기만 하는 투수들이 태반이었다. 그들에게 이광환은 가르쳤다. 휴식 첫날은 전날 사용한 근육들의 피로를 풀기 위해 푹 쉬고, 휴식 2일째부터는 다음 등판 날짜에 예정된 상대팀들 타자들의 전력들을 분석하며, 컨디션을 등판일에 맞춰서 최상의 상태로 끌어올리라 등등...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가르쳤다. 즉, 얼핏 보기에는 투수들에게 4일 동안의 '자유'를 준 것 같지만, 각각의 투수들에게 '책임'을 부여해서 그에 맞는 훈련 등을 자유롭게 하라는 것이다. 프로야구 선수 정도가 되면 자기의 몸관리는 자기가 알아서 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이광환 야구, 즉 '책임야구'이다.
훈련방법에 있어서도 이광환은 많은 것을 고쳐나갔다. 이광환이 미국연수를 마치고 왔을 때, 우리나라 프로야구팀들의 훈련계획표는, 겉으로 보면 그럴 듯 했다. 아침 몇시부터 기상해서, 몇십분간 체조하고, 몇십분간 밥먹고... 각 시간, 아니 분 마다 깨알같이 훈련내용들을 적어놓은 상태였다. 물론 선수들이 만든 것이 아닌, 구단 차원에서 만든 계획들이었다. 또 투수는 한쪽에서 따로 훈련하고 쉬고, 야수들은 또 다른 한쪽에서 따로 훈련을 하고는 쉬는, 그런 제각각의 훈련을 하는 상황이었다.
이광환은 우선, 구단이 만든, '윗분들'에게 보이기 위한 '전시용' 계획표를 과감히 없앴다. 그리고는 큰 제목들만 달고 나서, 세부 훈련 일정 계획은 선수들이 만들도록 하였다. 즉, 아침 몇시까지 훈련장으로 나오라, 언제부터 경기를 할 것이다,... 등의 큰 계획만 잡아준 것이다. 당연히 눈이 휘둥그레진 선수들은, 훈련장에 나와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냥 모여서 잡담을 하고, 빈둥빈둥 놀기가 전부였다. 그런 선수들을 붙잡고 이광환은 가르쳤다. '자기의 몸은 자기가 가장 잘 안다. 프로라면 자기의 몸 관리는 자기 자신이 해야 한다.'면서 선수들이 몸관리를 직접 하도록 가르쳐 나갔다. 불행히도 이 때까지 우리나라엔, '웨이트 트레이닝' 개념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광환은 잠실야구장에 우리나라 최초의 '웨이트 트레이닝 훈련장'을 만들며 - 물론, 이것이 그냥 하루 아침에 뚝딱 만들어진 것은 절대 아니다. 구단 프론트측, 잠실야구장측과 엄청난 싸움을 했다. 괜히 비싼 돈 들여가며 필요 없는 것을 만든다는 웃지 못할 이유로 - '웨이트 트레이닝'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래서 차츰, 선수들은 '웨이트 트레이닝'을 통한, 철저한 자기 책임 하에서 자유롭게, '자기의 몸을 자신이 관리하는' 시대로 들어간다. 그리고 투수 따로, 야수 따로 시행 중이었던 팀 훈련을 모든 선수들이 함께 하는 ‘조직적인 팀 훈련 시대’를 만들어간다.
경기 외적인 면에서도 이광환은 수많은 것들을 뜯어 고치려고 했다. ‘프로는 프로다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지론. 경기장 이동시 정장 착용, 경기장에서 전력질주 하는 모습들 등등... 어쩌면 사소한 것이라고 그냥 무시할 수 있겠지만 그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돈을 받으며, 팬들에게 보이기 위한 야구를 하는 프로야구 선수들이라면, 이런 것들은 당연히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것들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생소한 이광환식 '책임야구'에 대한 반발은, OB 감독 시절엔 반발’의 차원을 넘었다. 이광환이 뽑은 코치들 마저 그를 못 마땅하게 생각했다. LG 감독 시절 때도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LG 시절 이러한 일시적인 의구심을 불식 시킬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LG를 맡자마자 이광환은 프론트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계훈련 차, 선수단 전원과 프론트를 이끌고 미국에 가서 '책임야구'의 본모습을 전원에게 몸소 보고 느끼게 해주었다. 백날 떠들어봤자, 한번 보는 게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50일동안의 미국 전훈을 통해 선수, 코치, 프런트의 시각은 거짓말처럼 달라졌다. 이광환의 말이 옳았다는 걸 직접 보고서야 깨달았다. ‘우리 야구가 갈 길은 바로 이것’ 이란 사실을...
이광환의 책임 야구... 어찌 보면 ‘밥값 하는 야구’ 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누구보다도 개인의 창의력 넘친 플레이를 중시하지만, 수비의 도움 없이는 투수가 승수를 챙길 수 없고, 타선의 뒷받침 없이는 8회까지 완봉하는 투수도 잘해야 비긴다는 간단한 팀 플레이에 대한 진리를 우선시 하는 야구. 우리는 그런 야구를 그제서야 처음 체험한 셈이다. 지금은 애들도 다 알만한 야구 이론을 훈련 방식이나 경기 운영에 직접 적용시키고 매일 같이 주장하던 이광환의 선구자적 개척정신이 10년 전에 소개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우리나라 프로야구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혁신’ 이란 그냥 얻어지고 생겨난 것이 절대 아니라고 후추는 믿는다. 그 엄청난 의심과 비난, 그리고 개인의 명예에 먹칠을 당하는 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바뀌어야 한다'를 주창한 이광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광환의 야구를 뭐라고 부른들 아무 상관없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의 야구를 통해서 국내 프로야구의 새로운 ‘패러다임’ (Paradigm)이 소개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혁신적인 야구 전형은 이제 ‘기본 나가리’로 되어 버렸다. 승, 패를 떠나서 그런 이광환의 도전 정신, 개척 정신, 그리고 장기적인 야구 안목을 우승 트로피 몇 개에 견주어 평가할 순 없다는 얘기다.
비교체험 극과 극-OB vs LG
지금까지 우리가 감독을 평가하는 방식을 보면, 성적이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고 있다. 사회 저변을 흐르고 있는 성적 지상주의가 프로야구계에도 뿌리 깊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그런지 이젠 전격퇴진?, 중도퇴임? 이런 말들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을 만큼 단련이 되어 있다. 심지어, 바닥을 헤매는 팀을 보면 ‘저러다 저 감독 짤리지’ 감독 걱정을 하고, 시즌 후에 살아남는 사람과 짐을 싸야할 감독을 구분하며 여러 사람들을 하마평에 올려 저울질하기도 한다. ‘감독의 능력과 성적은 비례한다’ 는 우울한 원칙 아래 감독들을 죽 세워놓고 ‘넌 몇등 했으니까 너 능력은 이것밖에 안돼는거야.’ 하는 식으로 몰아붙이니 감독과 선수들이 ‘성적의 노예’ 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풍토이다 보니 감독들은 마음놓고 자신의 야구철학을 펼칠 기회를 원천봉쇄 당하고 만다. 까딱 하다간 목이 달아나는데 야구철학이 눈에 보일 리 없는 것이다. 사회 각계 각층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우리 프로 야구 구단의 가장 큰 문제는, 첫 술에 배부를 수 없거늘 단 한번의 시행착오도 겪지 않고 뭔가를 이루길 바라는 '속전속결 식' 풍토에 있다. 조그만 식당을 하나 운영해도 그만의 노하우가 있어야지 손님을 끌 수 있는데, 수 십 명에 달하는 선수들을 다스려야 하는 감독은 그 선수들의 장, 단점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만도 1년이라는 시간은 족히 걸릴텐데...
이례적으로 '젊은 감독'에게 감독 자리를 넘겨 준 88년의 OB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도는 신선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당장의 성적에 급급한 나머지 1년 반 만에 이광환의 목을 치게 된다. 결국, 이광환을 믿고 기다리지 못한 것이 오비의 가장 큰 실패의 원인이었다. 충분한 기회도 주지 않고 우승만을 바라는, ‘손 안 데고 코 풀려고 하는’ 심보로는 애초부터 예건 된 결과인지도 모른다. 이광환이 OB에서 짤린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그에게 지휘권을 넘겨 준 LG는 어땠나? 이광환을 5년이란 세월 동안 비교적 느긋한 마음으로 지켜보면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92년 부임 첫 해 7위의 저조한 성적을 거뒀음에도 그가 원하는 야구를 할 수 있게끔 도와줬다. 결과? 94년 우승이라는 달콤한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수 년 동안 ‘차세대 지도자 이광환’이란 청사진을 그리며 투자를 아끼지 않았던 OB는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조급증을 내는 탓에 ‘엉뚱한 팀이 꽃을 따게 되는 장면'을 보게 된다. 필자는 ‘고로 OB는 죽일 놈, LG는 살릴 놈’ 이라는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아무리 ‘기업 홍보 용’ 프로 야구단을 창단 했다고는 하지만, 요즘 같이 프로 야구가 대중들의 생활 속에 침투 해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이제는 야구를 바라보는 구단의 시각도 좀 더 거국적인 스포츠 문화 선도에 이바지하여야 한다고 본다. 우리 프로야구 구단들의 ‘번개 불에 콩 볶아먹는 식’의결과 지상 주의는 결국 감독들의 무리수를 자초하게 되는 것이고, 그러다 보면 팬들이 아끼고 따르던 스타플레이어들의 수명은 단축되기 마련이다. 결국 많은 관중 앞에서 ‘이기는 야구’를 보여 줌으로서 기업의 우수성을 과시하려던 기업 홍보실의 전략은 텅빈 관객 앞에서 ‘원맨 쇼’ 하는 격 밖에 안 된다는 소리다.
2년간 미국과 일본에서 선진야구를 직접 체득한 이광환은 귀국하자마자 89년부터 김성근 감독의 뒤를 이어 4년 임기로 오비의 지휘봉을 잡게 된다. 82년 프로야구 지도자로서 첫 출발을 했던 ‘친정팀’ 이라서 그런지 의욕도 있었고, 자신감도 많았다. 무엇보다 자신이 보고 배운 야구철학을 마음껏 펼쳐보고자 하는 마음이 강했다. 지난 시즌 팀 성적은 5위에 그치긴 했지만 승률 0.509로 3위 롯데에는 3게임차, 4위 삼성과는 2게임차로 그렇게 나쁘지 않았고, 전력 손실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잘하면 된다’는 희망도 있었다. 앞날이 보였다.
4월8일. 시즌 개막을 알리는 애국가가 3개 구장에서 동시에 울려 퍼졌다. 개막전 선발은 당연히 장호연의 몫이었다. 장호연은 지금까지 개막전 에서만 4승을 거둬’개막전의 사나이’ 로 불렸다. 88시즌 개막전 에서는 롯데를 상대로 노히트노런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기도 했다. 또한, 오비가 지난 7년간 개막전 에서 6승1무를 기록했던 것도 이광환의 데뷔 무대에 힘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장호연이 MBC 의 신인투수 김기범에게 1-5로 패 하면서 오비는 MBC에게 7년만의 첫 개막전 승리를 헌납했고, 이날 패배를 시작으로 4연패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4월13일. 개막전 패배의 분풀이라도 하듯 1실점으로 호투한 장호연의 활약덕분에 롯데를 6-1로 꺾으면서 연패를 탈출했지만 기쁨도 잠시... 또 다시 5연패의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되었다. 초반 10게임 9패의 성적은, 각각 86시즌에 빙그레와 청보에서 감독 데뷔를 한 배성서 감독과 허구연 감독의 감독 데뷔 연도의 초반 10게임 성적과 타이를 이루는 것이었다. 이광환 야구의 잉태 첫 달 성적 - 5승13패, 승률이 0.278... 이게 왠 날벼락??
오비가 연패를 거듭하며 고전을 면치 못 하자 오비를 4강 전력이라고 평했던 사람들은 금새 말을 바꿔 이광환 감독의 지도력 부재를 탓하고 나섰다. 한국의 프로야구 풍토에는 잘 맞지 않는 야구 스타일을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한다고 쑥덕 쑥덕거렸다. 얼마나 씹기 좋은 ‘먹이감’ 이었을까? 그동안 타격 훈련에 길들여져 있었던 선수들은 물론이고, 함께 팀을 이끌어야 할 코치들조차도 이광환의 야구철학을 생소하게 여겼고, 잘 이해하지 못 했다. 한마디로 맨땅에 헤딩하는 거나 다름없는 무모한 도전이라는 평가가 잇따랐다. 결국, 이광환은 임기의 반도 채우지 못하고 90년 6월18일 감독직에서 물러난다. 46게임동안 15승 1무 30패 승률 0.337 7위... 그리고 해임의 외형상 이유는 만만한 ‘성적부진’ 이었다. 타격 인스트럭터 였던 이재우가 감독대행으로 임명되어 나머지 시즌을 맡았다. 하지만 한 번 흐트러진 팀을 재정비하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최종성적은 35승 5무 80패 승률 0.313. 이로써 오비는 창단 이래 처음으로 꼴찌를 하는 수모를 당했고, 팀 역대 최저승률이라는 부끄러운 기록을 남겼다. 또한, 팀타율 0.231, 팀 방어율 4.72도 팀 역사상 가장 저조한 기록이었다.
1년 정도 야구판을 떠나있었던 이광환은, 92년부터 엘지 사령탑으로 부임을 하게 된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니 무엇이 문제이고, 어떤 점을 고쳐야 할지가 눈에 들어왔다. 물론, 망설임도 많았다. 이미 한 번의 좌절을 맛 본 터였고, 전 구단과의 관계가 완전히 정리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척박한 우리의 프로야구 현실을 뒤에서 지켜보고만 있기는 너무 안타까웠다. 몰라서 그런 건 할 수 없지만 문제점을 알고도 가만있는 다는 것은 어찌 보면 가장 치사하고 비겁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번만큼은 반드시 나의 야구를 활짝 피워보겠다.’ 이런 비장한 각오로 다시 승부의 세계에 돌아왔던 것이다. 숙고 끝에 그라운드에 복귀한 이광환이 LG 측에 제일 먼저 요구한 부분은 바로 ‘시간’ 이었다. 너무나도 생소한 ‘선진야구’를 정착 시키기 위해선 ‘최소한 3년’ 이란 시간을 달라고 했다. LG는 기다렸고, 팬들도 기다렸다. 그리고 이광환은 자신, 구단, 팬들과의 약속을 지켰다. 94년. 엘지 감독으로 복귀한 지 3년만에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한마디로 이광환 야구의 승리, 아니 ‘참고 기다리는 자의 승리’ 였다.
94년 국내 프로야구 판은 그야말로 LG의 해였다. LG 만큼 야구를 잘하는 팀도, 그들만큼 야구를 재미나게 하는 팀이 없었다. 페넌트레이스 최종성적은 81승 45패 승률 0.643. 2위 태평양과는 11.5게임차가 났다. 81승은, 92년 빙그레, 93년 해태, 98년 현대가 기록했던 시즌 최다승과 동률을 이루는 것이었고, 11.5게임차는, 한 팀 당 경기가 126 게임으로 늘어난 91년 이후 1위와 2위가 14 게임으로 벌어졌던 98년의 기록을 잇는 것이었다. 또한, 한국 시리즈에서도 태평양을 상대로 4연승을 거두면서 ‘완벽한 시즌’의 최종 느낌표를 찍게 되는 데 한국시리즈 4연승은, 지금까지 해태(86, 91)와 엘지(90) 단 두 팀만 달성할 수 있었던 ‘대기록’이었다. 어쩌면 엘지의 우승은 이미 초반부터 점쳐졌다. 4월26일부터 줄곧 선두를 내달렸고, 6월을 제외하고는 승률이 6할 밑으로 떨어진 달이 한 번도 없을 정도로 시즌 내내 탄탄한 전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엘지는, 그 해 3.14로 팀 방어율 1위, 0.282로 팀타율 1위를 기록한 것은 물론이고, 선수들의 고른 활약 덕분에 팀 역대 최다안타, 최다득점을 경신했고, 82년 팀 최고타율 0.282와 동률을 이뤘다.
제 아무리 ‘야구 개혁가’ 이광환이라 하더라도 그의 야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선수들의 눈부신 활약이 뒷받침 됐기 때문이었다고 이광환이 제일 먼저 고백한다. 그 해 특히 타자부문에서 가장 눈에 띄는 선수들은 ‘신인 3인방’ 김재현, 유지현, 서용빈이었다. 신인왕을 놓고 이들 3명이 치열한 각축을 벌인 것에서도 알 수 있지만 세명 모두 신인답지 않게 펄펄 날았다. 유지현은, 도루 2위 (51개)를 기록하며 신인왕에 올랐고, 김재현은, 신인 최초로 20-20클럽 입회원서에 도장을 찍었다. 서용빈도 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4월16일 롯데전에서 싸이클링 히트를 작성, 프로 통산 6번째로 영광의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들 세명 만큼은 ‘이광환이 찍어서 이광환이 만든 스타’임엔 분명하다.
투수부문은 어떤가? 이광환 야구의 척추인 ’스타시스템’ (투수분업화) 덕분에 ‘신세 고친 선수’가 수두룩했다. 선발진 중 4명이 10승 대 투수 (이상훈, 정상훈, 김태원, 인현배)가 되었고, 마무리 김용수는 다른 팀의 마무리 투수들이 대부분 100이닝 이상씩 던진 것에 비해, 42게임에 등판하고도 규정투구횟수(126)에 반도 못 미치는 63 과 1/3 닝 만을 던지면서 35세이브포인트를 올릴 수 있었다. 특히, 엘지는 홈에서 45승18패로 0.714에 이르는 높은 승률과 8개 팀 중 가장 많은 12차례의 완봉승, 37번의 역전승으로 팬들에게 짜릿함을 선사하면서 2년 연속 1백만이 넘는 관중을 동원하였다. 시즌 후에는 좋은 성적과 팬들의 인기에 힘입어 5명의 골든 글로브 수상자를 냈는데 이것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는 팀 최다 수상기록이다. 자.. 과연 기업 홍보의 수단이라고 하는 프로 야구가 그 해 LG 기업에게 가져다 준 것은 무엇인가? 아니, 이광환 야구가 LG에게 가져다 준 것은 무엇인가? 첫째, 그를 믿고 기다려 준 구단 사무실에 영영 보관 될 우승 트로피이다. 둘째, 그를 믿고 따라 준 선수들에게 주어진 개인상, 고로 ‘연봉 인상’ 이었다. 셋째, 그 넓다는 잠실구장을 물 밀 듯이 치고 들어오는 관중 인파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진 야구’도 국내에서 통할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이 보다 더 확실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아니, 요즘 말로 ‘WIN-WIN’ 사례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광환의 오비감독 시절과 엘지 감독 시절은 이렇듯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 당시 오비는 역대 최악의 기록들을 경신하는 극도의 시련기였다. 하지만 팀의 부진은 한 개인의 탓이 아니었다. 구단 스스로가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을 한 셈이었다. 허구한 날 감독만 바꾼다고 뾰족한 수가 나는 것도 아닐텐데 당장 성적이 나쁘다고 감독의 무능을 질타하면서 중도에 교체했던 팀이 있던 반면에, 길 건너 엘지가 승승장구 할 수 있었던 것은, 감독이 자기의 야구철학을 펼칠 수 있게끔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OB를 탓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당시 OB가 ‘LG 좋은 일’만 시켜준 이유는 어쩌면 OB의 ‘잘못’ 보다는 그들의, 아니 당시 우리 야구인들 모두의 ‘무지’ 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LG는 도박을 했고, 끝까지 그 선택을 믿었던 ‘죄’ 밖에 없다. 우리 일상 속에서도 매일 같이 경험하는 ‘갈등의 순간’ - 과연 끝까지 갈 것인가? 아니면 도중에 꼬랑지를 내릴 것인가? LG의 경우엔 전자를 택해서 빛을 본 팀이고 OB의 경우는 후자를 택해서 ‘쓴 잔’을 마신 경우일 것이다. 이광환에 대해서만큼 두팀의 운명은 바로 그 차이점 밖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