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전략 폭격에 대해 연재했을당시 독일의 군수상이었던 알베르트 슈페어의 천재적인 행정능력을 간략하게 소개해 드렸던
적이 있었는데요. 오늘은 그의 일생을 따라가면서 그가 어떻게 나치독일의 버팀목이 될수 있었나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ㅋ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장에서 알베르트 슈페어-
알베르트 슈페어는 1905년 3월 19일 독일 동남부에 위치한 만하임에서 알베르트 슈페어와 루이제 슈페어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
났습니다-슈페어 가문은 알베르트란 이름을 물려주는게 전통이나 봅니다. 위 사진의 알베르트 슈페어의 아들도 알베르트 슈페어-
알베르트 슈페어는 건축가였고 어느정도 부유한 중산층 가정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13살 되던 1918년 그의 가족은 옆동네인
하이델베르크로 이사를 가게되었는데요. 거기서 그는 학교를 다니면서 스포츠에 열중했다고 합니다 스키를 타러 다닌다거나
등산을 즐겨하고 학교에서는 럭비팀에서 활약했다고 하는군요. 그렇게 학교를 다니면서 스포츠와 수학에 큰 관심을 보였고, 그는
장래에 수학자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만 아버지 알베르트 슈페어는 그런 알베르트 슈페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삶을 살아가면서 돈이 없으면 사회적 지위도 없고 미래도 없다"
아버지는 그에게 수학자 보다는 가업을 이어서 건축가가 되길 원했고, 알베르트 슈페어는 효자였는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가업인 건축가의 길을 가기로 합니다. 그러나 1923년 독일에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닥치자 아버지의 사업이 흔들렸고, 결국 그는
칼스휴 보통대학에 진학하여 건축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1924년 사업이 다시 정상궤도로 돌아오자 그는 뮌헨 기술대학으로
편입했고, 1925년에는 베를린 기술대학으로 편입했으며 22살의 나이로 졸업시험을 통과하여 당시 유명했던 건축가였던 하인리히
테세노프의 조교로 일하게 됩니다.
-당시 유명한 건축가였던 하인리히 테세노프-
하인리히 테세노프는 이 슈페어를 마음에 들어했는지 강의를 대신 맡길정도로 신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알베르트 슈페어는
23세의 나이에 집안의 반대를 무릎쓰고 마가레타 베버와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1933년 28살의 알베르트 슈페어 상당히 미남인데 머리가(........)-
하인리히 테세노프 밑에서 조교 생활을 하면서 베를린 기술대학서 강의를 하던 알베르트 슈페어는 원래 정치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1930년대는 히틀러가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가던 때 1930년 12월 학생들의 부탁으로 같이 참여한 베를린
나치당 대회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에 감동받아서 'ㅅ' ㅋ 그의 이념과 카리스마에 빠져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결국 정치
에는 관심없던 알베르트 슈페어가 갑자기 정치에 눈뜨기 시작하면서 1931년 1월 나치당에 정식 가입신청을 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건축가의 재능을 살려서 나치당 베를린 책임자였던 카를 한케의 집을 공짜로 리모델링해주었고, 한케는 이 일을 매우 고마워
했고, 그를 기억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한편 이렇게 정치활동을 하다보니 자연스레 테세노프와의 사이가 멀어졌고, 결국
조교직을 사임한 알베르트 슈페어는 아버지 인맥으로 직업이나 구해볼까하여 고향 만하임으로 돌아왔지만 기껏 얻은 일이라고는
형의 재산 관리직이었다고 합니다. 이에 실망한 알베르트 슈페어는 다시 1932년 7월 베를린으로 돌아가 나치당의 선거운동에
자원봉사자로 나서게 됩니다. 여기서 알베르트 슈페어는 전에 공짜로 집 리모델링 해준 카를 한케의 소개로 나치당의 선전부장
이었던 괴벨스를 만나게 됩니다.
-선전의 천재 괴벨스 건축의 천재와 만나다?!-
박사 학위까지 받은 나치당의 고학력자 괴벨스와 대학 조교로 일했던 알베르트 슈페어는 무언가 말이 통했는지 서로 잘맞았고,
-대부분의 나치당원들은 부랑배나 다름없었다죠??-괴벨스는 이 젊은 건축가에게-이 당시 알베르트 슈페어 나이 27세!-베를린의
나치 당사 리모델링을 지시했습니다. 나치당사의 리모델링을 성공적으로 마친 알베르트 슈페어는 다시 만하임으로 내려갔고,
선거에서 크게 승리한 나치당은 히틀러가 1933년 1월 수상에 취임하면서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한편 슈페어가 리모델링한
베를린 나치당사는 나치당 고위직의 마음에 쏙들었고-특히 히틀러가 좋아라했다고 합니다- 카를 한케가 그를 다시 베를린으로
부르게 됩니다. 베를린에 올라온 알베르트 슈페어는 일개 당의 선전부장에서 국가의 선전장관이 된 괴벨스에게 선전부를 재단장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선전부의 재건축을 시작했고, 1933년 5월 1일에 펼쳐지 노동절 기념행사에서 기념 행사장을 꾸미는 일도
맡게되었습니다. 한편 히틀러는 일련의 알베르트 슈페어의 활동을 맘에들어했고, 결국 노동절 기념행사가 끝나고 알베르트
슈페어와 히틀러는 만남을 가지게 됩니다.
-히틀러와 알베르트 슈페어, 슈페어가 건설도면을 히틀러에게 설명해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히틀러는 알베르트 슈페어의 첫인상을 상당히 맘에 들어했고, 만나자마자 그 자리에서 그에게 '당 집회의 예술과 기술적 책임자'
로 임명했다고 합니다. 슈페어는 선전부의 재건축이 끝나자마자 히틀러가 머무를 수상관저를 재건축하는 담당자가 되었고,
히틀러는 알베르트 슈페어를 매일 불러서 일의 진척사항을 보고 받았고, 자연스럽게 알베르트 슈페어는 히틀러의 최측근 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거의 매일 저녁 히틀러의 저녁식사에 초대되었고, 정부가 발주하는 거의 모든 건축에 그의 입김이 들어갔을
정도라고 합니다. 알베르트 슈페어는 특유의 성실성과 천재적인 재능으로 맡겨진 거의 모든 일을 성공적으로 완수해나갔으며
1934년 29살의 나이로 초고속 승진하여서 나치당의 최고위 인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건축부 장관이 되었고, 그에게는 전임자
트로스트가 마무리 짓지 못했던 체펠린펠트 스타디움을 마무리 지으라는 중대한 과제가 주어졌습니다. 그는 체펠린펠트 스타디움
을 수많은 화려한 조명으로 마무리 지었고, 이는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서 그 화려함을 뽐내며 히틀러의 극찬을 받았다고
합니다.
-알베르트 슈페어가 디자인한 체펠린펠트 스타디움의 빛의 성전, 밤에 보면 그 화려함과 웅장함을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합니다-
-참고로 저 빛은 130대의 대공방어용 서치라이트를 한꺼번 키는 방식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34만명을 수용할수 있었던 체펠린펠트 스타디움, 뉘른베르크 집회가 여기서 열렸다고 합니다-
이렇게 건축부 장관으로 재임하면서 알베르트 슈페어가 구상한 독일의 건축물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콜로세움, 파르테논 신전
처럼 수천년이 지나도 그 웅장함과 미적 가치를 남길수 있는 건축물을 건축하고자 하였고, 이는 천녀제국 운운하던 히틀러의
마음에 쏙드는 개념이었습니다. 히틀러는 그 즉시 이 개념을 독일의 모든 건축물에 적용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한편 히틀러와
알베르트 슈페어는 머리를 맞대고 더욱더 거대하고 웅장한 건축물을 만드는데 집착했고, 이는 40만명을 수용가능한 게르마니아
스타디움이라는 건축물로 나타났지만 전쟁의 발발로 건설에는 실패했다고 합니다. 한편 1936년 개최된 베를린 올림픽 주경기장도
알베르트 슈페어의 손에서 탄생하였고,
-알베르트 슈페어가 만들어낸 베를린 주경기장-
그리고 곧 1937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서 알베르트 슈페어는 히틀러에게 독일 맞은편에 소련관이 배치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알베르트 슈페어에게 이를 압도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실제로 알베르트 슈페어는 소련관을 압도하는 듯한 건물을 지어서
당시 엑스포 금상을 소련과 공동수상하게 됩니다.
-낫과 망치를 든 혁명가를 표현한 소련관(왼쪽)그러한 혁명가들을 매의 눈빛(...)으로 내려다 보고 있는 독일관(오른쪽)-
한편 히틀러는 이러한 일련의 알베르트 슈페어의 건축활동을 상당히 맘에 들어했고, 1939년 예전에 그가 만든 수상관저를 다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알베르트 슈페어는 당장 공사를 시작해서 4500명의 노동자를 3교대로 24시간 작업을 실시하여
9개월만에 뚝딱뚝딱 수상관저를 만들어 냅니다.
-그가 만들어낸 수상관저의 외부 처음보는 사람들은 마치 형무소 같았다고 느꼈답니다-
-내부는 화강암과 벽돌로 꾸며졌다고 합니다. 내부의 가장 넓은 복도는 무려 153m나되었다고 하니 ㅎㄷㄷ하죠?-
참고로 이 수상관저는 베르사유궁전보다 크게 지어졌다고 합니다만 전쟁을 거치면서 폭격으로 파괴되었고, 1945년 소련군이
베를린을 점령할때 거의 완파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제 2차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건축부를 국방군 밑으로 집어 넣었고, 자신의
특기인 건축쪽의 재능을 살려서 폭격이나 작전중에 파괴된 교량이나 건물의 잔해를 신속하게 복구하거나 치워버리는 신속대응팀
을 만들어서 필요한 곳으로 파견했고, 이는 많은 곳에서 활약하면서 전쟁물자가 원활히 보급되도록 만들었습니다. 한편 전쟁초바
승승장구하던 독일인지라 알베르트 슈페어는 베를린과 뉘른베르크의 건축물에 집중할수 있었고, 그의 신속대응팀도 승승장구
하는 독일군 밑에서 많은 활약을 했습니다. 이러한 알베르트 슈페어의 활약은 소련의 스탈린 귀에까지 들어갔고, 1940년 스탈린은
알베르트 슈페어를 소련으로 정식 초청했습니다만, 모스크바가 베를린 보다 웅장해질까봐 두려워진(......)히틀러의 명령으로
그 초청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한편 전쟁이 심화되면서 알베르트 슈페어가 건축물에만 집중할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렀고,
결국 역사의 흐름은 그를 새로운 자리로 데리고 가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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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나치독일의 독수리가 먹잇감 내려다 보듯 내려다 보고 있죠 ㅡㅡ ㅋ
거기다 붓을 추가하면 조선린민공화국. 차마 민주주의는 못 붙이겠네요 ㅋㅋㅋ
대체 능력이 얼마나 좋은거야(…) ㄷㄷ;;;
2222
오오 좋은 글이다
한자리 차지하고 이것저것 해먹을 궁리만 가득해서 비리만 잔뜩 저지르고 재물밝히던 인물들이 나치당 핵심 간부들인데 이 사이에 일 아주 제대로 하는 슈페어가 끼어들었으니...처음엔 그냥 흔한 건축가로 여겨 방관하고 있었다가 슈페어와 히틀러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올림픽 전후로 슈페어의 영향력이 급증하자 히믈러나 괴링등의 나치당 간부들이 슈페어를 집중 견제합니다. 티아라 화영급으로 말이죠. 히틀러로서는 맘에 드는 인물이긴 한데 다른 당 간부들이 전부 대놓고 싫어하니 어쩔수 없이 멀리하게 되었는데...전쟁이 시궁창으로 빠지게 되자 다시 그를 불러 군수상에 임명합니다. 연합국의 전략폭격이 극에 달해
독일 국내의 산업시설이 초토화 되어가고 있는 와중에 군수상에 취임한 슈페어는 당시 독일 산업계에 만연한 나치당과의 부패관행을 일소해 버리고 그전까지 없었던 군수물자 생산을 총괄감독하는 조직을 신설하죠. 그러자 공장지대는 박살나고 있는데 독일 군수물자 생산량은 오히려 급증하는 기 현상을 일으킵니다. 이는 독일 본토외에 프랑스나 체코등의 다른 점령지 산업시설도 활용한 성과긴 했지만 대단했죠. 물론 이에 필요한 노동력은 전 유럽에서 강제로 끌고온 노예노동자에 의해 행해져 전후 독일의 흑역사중 하나가 됩니다.
슈페어는 독일에 전쟁범죄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나치당 주요인사였기 때문에 전범재판에 넘겨졌으나 다른 나치당 인사들과 장군들이 수두룩하게 목이 매달린데 비해 비교적 가벼운 징역형을 살고 나오죠.
나치에 가담한거 치고는 말년이 혹독하진 않았네요 ㅎ
애초부터 슈페어를 군수상에 임명했으면 역사 전개가 조금 달라졌을수도 어쨋든 능력자이네요
사실 파시스트 국가의 경우 어지간해선 전시에 국민생활을 쥐어짜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국민들의 정치적 불만을 물자로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죠. 일본의 경우 그게 안되니 종교적 신념에 가까운 천황숭배로 메꾸려고 했고...그리고 슈페어는 뉘른베르크 재판 피고인 중 유일하게 나치의 행위에 대해 반성과 사과를 표명했죠. 형 감량에 그런 것도 감안됬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29살에 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