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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皇帝)와 염제(炎帝)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군주. 소전의 아들. 도교의 신이자 현효와 청양의 아버지. 성은 공손(公孫), 이름은 헌원(軒轅)이라고 한다. 그래서 공손헌원(公孫軒轅), 황제 헌원씨(黃帝軒轅氏), 헌원씨(軒轅氏)라고 부른다. 그 외에도 유웅씨(有熊氏)라고도 하고 제홍씨(帝鸿氏)라고도 부른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도 언급되었다.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오제의 필두다. 황보밀의 ❮제왕세기(帝王世紀)❯에서는 삼황의 첫 번째로 언급된다. ❮전국책(戰國策)❯, ❮주역(周易)❯, ❮예기(禮記)❯, ❮회남자(淮南子)❯에서는 오제의 세 번째, 나머지 기록에서는 오제의 첫 번째이다. 사후 신나라를 세운 왕망이 ‘태초조(太初祖)’로 추존했다.
서양에 제우스가 있다면 동양엔 황제 헌원씨가 있다는 말 그대로, 중국 신화의 주신이다. 한국의 단군처럼 중국의 한족들이 전설적인 시조로 가장 흔히 일컫는 존재이기도 하다. 황제에 염제 신농까지 포함해서 염황의 자손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대만에서 사용하는 중화민국 국기가에서도 ‘염제와 황제의 후손(炎黃世冑)’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현대 중국에서 가장 널리 통용되는 설에 따르면, 황제 헌원씨는 기원전 2717년에 태어나 20세가 되는 기원전 2698년에 즉위하였고, 119세되는 기원전 2599년 천제(天帝)가 보낸 용을 타고 승천했다고 한다.
근데 따지고 보면 사람이다. 그냥 사람들이 신으로 추대한 것 뿐이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고대 군주 헌원씨라고 신으로 추대하지 않았으며 사람으로 칭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원래부터 신이었고, 후대에 인간이 승천 한 거라는 이야기가 붙었다고 주장한다.
황제는 화하(華夏)라는 실체를 구성했다고 일컬어지는 전설상의 군주로, 사마천은 삼황오제에서 삼황 부분은 전설이라고 치부해 아예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오제부터는 ❮본기(本紀)❯로 저술했으므로 이 부분부터는 역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황제라는 칭호는 ‘황천상제(黃天上帝)’를 줄인 것으로 ‘천상의 위대한 신’이란 뜻이다. 이에 걸맞게 천상과 지상을 호령하는 위대한 신이자 군주였다고 한다. 끝없는 싸움과 투쟁의 결과로 지배자가 되었기에, 중국에서 황제 공손헌원(公孫軒轅)을 묘사할 때에는 한 손에 항상 헌원검(軒轅劍)이라고 하는 칼을 쥔 전쟁군주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고대의 다른 전승에 나오는 황제 헌원씨는 인간이 아닌, 확실히 신(神)이다. 제(帝)는 본래 인간의 군주를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었다. 고대 동아시아의 종교는 가문의 조상을 다른 종교의 신에 상당하는 대상으로 섬기는 구조(가부장이 제사장의 역할을 수행)였는데, 이 조상신을 부르는 이름이 제(帝)였으며, 좀 더 정확히는, 상나라의 가장 고귀한 가문인 자(子)성 왕실의 조상을 신격화하여 제(帝)라고 불렀다. 따라서 노란(黃) 제(帝)라고 불리는 존재가 본래 인간이 아님은 명백하다. 다만 처음부터 신적 존재로 섬겼을지는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 책세상에서 펴낸 ❮만들어진 민족주의 황제 신화❯에 나오듯이 헌원은 역사적으로 수도 없이 덧칠되었다.❮포박자❯에 보면 황제가 동서남북 사방의 여러 나라의 신선들을 만나 가르침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개중에는 청구국(靑丘國, 고대 한국)의 자부선인이란 신선도 있다. 참고로, 상나라를 엎고 개국한 주나라의 희(姬)성은 자신들의 조상신을 천(天)으로 칭하며 하늘에 대입하고, 이것으로 제(帝)를 대체하는 프로파간다(propaganda, 宣傳)를 행하였다. 천자라는 명칭도 이에서 유래되었다.
그리고 황제 공손헌원(公孫軒轅)은 신화적으로 창조신이자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도구들을 만들어낸 발명의 신이라고 한다. 신화상에서의 황제, 즉 신으로서 황제 공손헌원은 얼굴이 4개 있어 동서남북으로 자신의 땅을 바라볼 수가 있었고, 그가 움직일 때에는 많은 동물들이 행렬을 뒤따랐다고 한다. 황제는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왕위를 내려놓고 수련하여 신선이 되어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그리고, 단순히 얼굴이 넷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름에 누를 황(黃)자가 들어가는 신답게 노란 용, 즉 황룡의 모습으로도 묘사되곤 한다. 노란색은 황제가 흙의 기운을 지녔기 때문이고, 용이기 때문에 모든 기상현상 그 자체를 마음대로 주관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 즉, 황제는 비바람 등을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었다. 황제는 전설 속 곤륜산에서 머무는데, 천계와 곤륜산을 오가며 천하를 다스렸다고 한다. 그러면서, 오행 중에 토(土)를 관장하며, 그 자체로 전쟁의 신이었다고도 한다.
황제는 모든 신들 위에 군림할 뿐만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귀신과 요괴들을 지배했다. 천하를 순시하다 동해 바닷가에 이를 때 백택이라고 하는 짐승으로부터 1만 1520종 귀신과 요괴들의 모습을 배웠기에 이후로 귀신과 요괴들은 전처럼 마음대로 날뛸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한다. 황제를 보필하는 신하인 후토는 유명(幽冥)세계의 통치자이자 귀신나라의 왕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황제는 신도와 울루에게 세계를 떠도는 귀신들을 다스리게 했다고도 한다.
❮사기(史記)❯의 기록은 신이었던 황제를 위대한 인간 황제 공손헌원으로 역사화했다.❮사기❯에 따르면 성은 공손(公孫), 이름은 헌원(軒轅)이라 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하였으며, 남들이 걸음마도 떼지 못했을 때 이미 뛰어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외적이 근근히 쳐들어오면 막고, 나면 먹고 안 나면 굶는 느슨한 공동체 생활을 보고 잠시 생각하더니, 창, 방패, 수레(바퀴), 옷, 글자, 거울, 60갑자, 팔괘 등을 만들어 문명을 크게 일으켰다고 한다. 안 만든게 없다는 만능의 인물. 심지어 그의 스승들과 함께 한의학을 정리한 것이 ❮황제내경(黃帝內經)❯이라고 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전설이고, 훨씬 뒤에 황제의 이름을 빌려 만들어진 책이라는 게 정설이다. 거기다 내용도 상당 부분이 공손헌원의 신하이자 스승이었던 기백천사(岐伯天師)에게 질문하고 가르침을 받는 구조다.
❮사기❯에 따르면 황제 공손헌원에게는 아들 25명이 있었고, 그 중 14명이 부왕 공손헌원의 성을 이어받아 수천 년 후 황하 평원을 가득 채울 부족이 되었고, 중국 역대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역시 삼황오제이자 황제의 뒤를 이어 신들을 지배하게 된 전욱 고양씨, 동해의 신 우호와 북해의 신 우경, 대홍수를 다스린 곤과 우 부자 등 이름난 신들과 영웅들을 비롯하여 중원의 한족과 변방의 일부 종족들이 바로 이 황제의 후예로, 이 때문에 황제 공손헌원은 중국인의 시조가 된다고 한다.
그가 부족의 우두머리가 되었을 때, 중국의 왕이라 할 수 있는 세력은 농업의 아버지인 염제 신농(神農)이었고, 노쇠한 신농의 나라를 북동에서 내려온 치우(蚩尤)의 세력이 늘 노리고 있었다. 황제는 신농과의 주도권 싸움을 3차례 벌여 세 번 다 승리하고 거대한 연맹체를 구성, 치우와 일대 결전을 벌여 결국 탁록 땅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그 뒤 황제는 1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자신이 죽을 날을 선택하고 용을 타며 승천하였다고 한다. 그 때 신하들이 같이 올라가려고 들어 용을 붙잡고 수염이 뽑혀서 떨어지는 등의 추태를 보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아내는 총 4명이 있었다. 그 중 조강지처이자 본부인이며 첫 번째 부인은 서릉씨(西陵氏) 누조(嫘祖)인데, 비단과 양잠을 발명했고 황제와의 사이에서 많은 자손을 두었다고 한다. 네 번째 부인은 모모(嫫母)라고 하는 여자인데 외모가 추했으나 거울을 발명했다고 한다. 수시로 바람도 피고 다니며 결혼 생활을 개막장으로 해서 아내인 헤라의 속을 어지간히 썩였던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와 달리, 황제는 바람도 피지 않았고 건전한 결혼 생활을 하였다.
황제의 존재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보기 힘들다. 설령 황제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존재했다고 해도 그가 모든 것을 다 만들었다는 것은 후세 사람들의 첨삭이 있었을 것이다. 단 그의 존재가 후세에도 ‘이상적인 군주’로서 추앙받았다는 것을 볼 때 그런 인물이 실제 존재했다기보다는 그런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에 황제는 존재했다고 볼 수 있겠다.
워낙 대단한 인물로 묘사되고 동양에서 학술적 내용의 연원을 고대에서 찾는 경향이 있어 각종 학파의 시조가 되기도 한다.
황제는 여러 가지 진귀한 물건도 소유했었다. 그중에 현주(玄珠)라는 검붉은 구슬이 있었는데 세상만사를 꿰뚫어볼 수 있는 신통한 것이었으나 황제가 분실했다고 한다. ❮황제음부경(黃帝陰符經)❯은 황제가 집필한 서적이라고 전하는데, 모호한 말로 쓰여서 혹자는 병법서, 도사들은 도가의 경전, 문인들은 유가의 말을 적은 책이라 여겼다고 한다.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산시 성 옌안 시에는 황제의 무덤이 실존하고 있다. 물론 전설에서 황제는 등선했다고 전해지므로 이 무덤은 의관총(衣冠塚)이다. 이곳은 중국의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전국 중점 문물 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분류상 고묘장(古墓葬)의 1호로, 달리 천하제일릉(天下第一陵)이라고도 부른다.
허난성 링보현에도 황제릉이 존재하는데, 2020년 현재 바이두 백과에 황제릉을 검색하면 이쪽이 나온다.
황제가 처음 즉위했다고 하는 기원전 2698년을 원년으로 하는 황제기원이 청나라 말기에 사용되기도 했고, 중국에서 더러 비공식적으로 사용되곤 했다.
일제시대 즈음해서 중국의 지식인들이 (당시에 식민지였던 조선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아시아에서 가장 발달한 나라인 일본제국에 유학을 오곤 했다. 당시 일본은 천황 즉위에 따른 연호를 사용하면서도, 동시에 진무 덴노가 즉위했다고 전해지는 기원전 660년을 원년으로 하는 진무덴노즉위기원(神武天皇即位紀元), 통칭 황기(皇紀)도 쓰곤 했다. 중국 지식인들이 일본의 황기를 보고 자극을 받아 중국판 황기를 창안해냈으니 바로 ‘황제기원(皇帝起源)’이다.
처음 황제기원을 주장했을 때에는 원년을 어느 해로 정할지 수백 년씩 널뛰기를 하였으나 1905년부터 기원전 2698년을 원년으로 하는 것이 널리 퍼졌다. 그러나 현대 중국에서는 황제기원의 원년을 즉위한 해보다는 60갑자가 시작된 이듬해(기원전 2697년)로 하는 것이 더 좋다는 주장이 퍼져 이를 따르고 있다. 기원전 2697년은 최초의 상원갑자(上元甲子)라고도 전하기 때문에, 옛 중국인들이 상당히 인위적으로 정한 해임을 짐작할 수 있다.
황제 헌원씨는 천자(天子)로서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년경∼기원전 86년)의 ❮사기❯ ❮오제본기(五帝本紀)❯의 시작이었다. 또한 중국 한(漢)족의 전신인 화하족의 시조로도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이와 다른 기록들도 존재하는 데, ❮사기❯의 삼가(三家) 주석인❮사기집해(史記集解)❯에는 응소가 ‘치우는 옛 천자(蚩尤古天子)’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헌원의 직책에 대해 운사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昔者黃帝氏以雲紀 故爲雲師而雲名
옛적에 황제씨는 구름으로써 관명을 기록하였다. 고로 백관과 사장을 모두 운자로 이름하였다.
❮춘추좌전(春秋左傳)❯ ‘소공 17년’
❮사기❯ ❮오제본기(五帝本紀)❯에도 헌원의 직책이 운사라고 나온다. 또한 상고시대의 기록인 ❮금문(今文)❯을 보면 헌원이 왕위에 올랐다는 내용이 없다. 중국 고대 왕의 계보는 신농으로부터 시작하며 신농 열산씨-소호 금천씨-전욱 고양씨-제곡 고신씨-제지 청양씨-제요 도당씨-제순 유우씨-우-백익으로 나온다. 또한 진나라의 진시황제나 한나라 태조인 유방이 전쟁 전에 헌원이 아닌 치우에게 제사를 지낸 기록들이 나온다.
그래서 헌원과 치우에 대해서 다르게 보는 시각도 있다.
삼황오제(三皇五帝)
삼황오제(三皇五帝)는 중국의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제왕들로 세 명의 황(皇)과 다섯 명의 제(帝)를 말한다. 이들 여덟 명의 제왕은 중국 문명의 시조로 추앙되며 근대 이전의 중국에서 신화가 아닌 역사로서 추앙되었다. 현대의 역사학계에서는 삼황오제 신화가 후대에 창조되고 부풀려진 신화이며,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부터 중국은 중화민족주의에 입각하여 국가 차원의 개입을 통해 삼황오제를 실존 인물로 격상하려 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학계의 우려를 낳고 있다.
삼황오제 신화의 기본 틀이 되는 상고대 시조 설화의 원형은 상나라 무렵부터 이어져 왔다. 그리고 춘추 전국 시대에 제자백가가 각종 사상을 주창하고 제후들에게 유세하면서 삼황오제 신화가 창조되어 틀을 갖추어 나갔다. 오제 신화의 경우 음양오행설이 유행한 이후에 5명의 제왕이 신화로서 정립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후대에 재창조된 신화이기 때문에 삼황과 오제의 구성원은 제자백가의 주장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춘추 전국 시대에서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삼황오제 신화는 계속 재창조되었다.
삼황오제는 근대 이전의 중국에서 역사적 사실로 오랜 기간 추앙되었다. 특히 황제와 요, 순은 중국의 이상적인 성천자로 일컬어졌다. 그러나 청나라 말기 캉유웨이, 구제강 등이 주도한 의고학파(疑古學派)의 연구를 통해 삼황오제 기록의 역사성이 부정되고 종교적 영향으로 꾸며진 신화임이 판명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중국의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강화되면서 중국은 정부 차원에서 중국 역사의 기원을 상향 조정하고 신화 속 제왕들의 연대를 비정하는 등 삼황오제를 비롯한 신화 속의 인물들을 실존 인물이라 주장하는 각종 공정을 진행하고 있어 학계의 우려를 사고 있다.
삼황(三皇)
중국 역사상 삼황오제에 관한 설은 전국 시기에 이르러서야 나타나기 시작한다. 먼저 삼황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아래와 같이 7종의 설이 있다.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 : ❮사기(史記)❯ ❮보삼황본기(補三皇本紀)❯에 인용된 ❮하도(河圖)❯, ❮삼오력(三五曆)❯
천황, 지황, 태황(泰皇) : ❮사기❯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복희(伏羲), 여와(女媧), 신농(神農) : ❮풍속통의(風俗通義)❯ ❮황패편(皇覇篇)❯
복희, 신농, 공공(共工) : ❮통감외기(通鑒外紀)❯
복희, 신농, 축융(祝融) : ❮백호통(白虎通)❯
수인(燧人), 복희, 신농 : ❮풍속통의❯ ❮황패편❯에 인용된 ❮예위(禮緯)❯ ❮함문가(含文嘉)❯
복희, 신농, 황제(黃帝) : ❮십팔사략(十八史略)❯, ❮제왕세기(帝王世紀)❯와 손씨주(孫氏注) ❮세본(世本)❯
십팔사략(十八史略)에 나온 삼황
아래는 십팔사략에 나온 삼황에 대한 설명이다. 여기에서의 삼황은 태호 복희, 염제 신농, 황제 헌원을 말한다.
삼황은 맨 처음 세 명의 왕도 아니고, 연속적인 세 명의 왕이 아니다. 그들은 각각 인류 문명에 필요한 획기적인 발명을 통해 후세에 큰 모범이 되었기에 “삼황(三皇)”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삼황의 첫 째인 복희는 태호(太昊 : 큰 하늘)라 불렸으며, 뱀 몸에 사람 머리를 하고 있으며,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사냥법과 불을 활용하는 법을 가르쳤다.
복희의 뒤를 이어 몇 명의 왕이 자리를 잇다가, 두 번째 삼황인 신농의 시대가 왔다. 염제(炎帝 : 불꽃 임금)라고도 불린 신농은 사람 몸에 소의 머리를 가졌다. 그는 태양신이자 농업신으로 농경을 처음으로 가르쳤다. 또한, 태양이 높게 떠 있는 시간에는 사람들에게 상업을 가르쳤다고 한다.
염제 신농의 자리를 이은 것이 바로 황제 헌원(軒轅)이다. 헌원은 사람들에게 집짓는 법과 옷 짜는 법을 가르쳤으며, 수레를 발명했다. 글자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해 천문과 역산을 시작하고, 의료술을 시작한 것도 황제였다. 어느 정도 사람들의 삶이 안정되자 황제는 태산(泰山)에 행차하여 천지 사방의 신을 모두 불러 모았다. 황제는 큰 코끼리가 끄는 보물로 된 수레를 탔으며, 황제의 위세를 본 신들은 그의 위력에 모두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천지 사방의 신 중, 황제에 따르지 않는 무리는 치우(蚩尤)를 따라 반란을 꾀했다. 치우는 눈이 넷, 손이 여섯이었으며,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가지고 있었다. 쇠와 돌을 즐겨 먹는 신으로 자신의 72명의 형제와 함께 싸움에 매우 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황제는 치우의 모반을 알자마자 군사를 모아 판천과 탁록에서 치우를 격파하였다. 치우는 부하인 풍백, 우사와 함께 저항했으나 결국 황제에게 항복했다.
치우의 난을 평정한 황제는 이후 별 탈 없이 지내다가 백 살 되던 때, 하늘에서 용이 내려와 황제가 하늘로 돌아가기를 간청했다. 많은 사람이 황제의 치세가 계속되기를 기원했지만, 황제는 중신들과 함께 용을 타고 승천하였고, 이후 황제의 다섯 자손(“오제(五帝)”)이 세상을 다스렸다.
오제(五帝)
오제에 대해서는 일치하는 설이 없으며 주로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당요(唐堯), 우순(虞舜) : ❮황왕대기(皇王大紀)❯
황제(黃帝), 전욱(顓頊), 제곡(帝嚳), 당요(唐堯), 우순(虞舜) : ❮세본(世本)❯, ❮대대례(大戴禮)❯, ❮사기❯ ❮오제본기❯
태고(太皋: 복희), 염제(炎帝: 신농), 황제(黃帝), 소고(少皋), 전욱(顓頊) : ❮예기(禮記)❯ ❮월령(月令)❯
황제(黃帝), 소고(少皋), 제곡(帝嚳), 제지(帝摯), 제요(帝堯) : ❮도장(道藏)❯ ❮동신부(同紳部)ㆍ보록류(譜錄類)ㆍ곤원성기(混元聖記)❯에 인용된 양무제(梁武帝)의 말
소호(少昊), 전욱(顓頊), 고신(高辛), 당요(唐堯), 우순(虞舜) : ❮상서서(尙書序)❯, ❮제왕세기❯, ❮십팔사략❯
십팔사략에 나온 오제
십팔사략에서 오제는 황제의 뒤를 이은 다섯 자손을 뜻하며, 소호 금천, 전욱 고양, 제곡 고신, 제요 도당, 제순 유우의 다섯 명이다. 뒤의 두 명을 따로 떼어 ‘성군’을 칭송할 때 관용적으로 쓰이는 요순임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소호 금천(少昊 金天)은 황제의 아들로 황제가 승천한 후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후 봉황이 날아들어 소호의 정치를 도왔다.
소호의 뒤를 이은 것은 전욱 고양(顓頊 高陽)으로, 전욱은 소호의 형의 아들이었다. 아직 반고의 천지 창조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하늘과 땅의 구별이 엄격하지 않았다. 전욱은 엄격한 법을 세워 하늘과 땅의 구별을 확실히 하고, 인간 세상에서도 주종관계, 남녀관계 등을 확실히 세웠다.
전욱의 뒤를 이은 것은 소호의 아들인 제곡 고신(帝嚳 高辛)이었다. 그는 음악의 신으로, 각종 악기와 음악을 만들어 백성들을 즐겁게 하였다.
삼황오제(三皇五帝)의 동이설(東夷說)
삼황오제는 중국 신화 속의 대표적인 인물이지만, 이들을 동이(東夷)나 한민족으로 간주하는 주장이 있다. 삼황오제가 동이였다는 중국의 사료들이 일부 존재하며, 동이라는 존재를 모두 한민족으로 보는 역사관이 존재한다. 또한 20세기 이후에 쓰여진 ❮환단고기(桓檀古記)❯와 같은 일부 서적에는 삼황오제 가운데 일부 혹은 전부를 동이나 한민족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진(秦)나라 이전의 동이와 한(漢)나라 이후의 동이는 같은 존재가 아니며, 한민족이 속해 있는 동이는 한나라 이후의 동이이기 때문에 진나라 이전의 동이에 해당하는 삼황오제의 동이 여부와 한민족은 큰 관련이 없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환단고기❯와 같은 서적은 위서로 판별되어 역사적 가치가 없어 삼황오제 동이설의 근거가 될 수 없다.
한편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비롯한 일부 기록에서 신라 및 가야의 왕족이 소호 금천씨를 선조로 기록한 것이 나타나며, 고구려 왕족 역시 제곡 고신씨 또는 전욱 고양씨를 조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서술은 왕족의 혈통을 신성시하기 위해 고대의 전설적인 제왕 또는 유명한 위인들을 일부 유사성을 근거로 하여 시조로 삼는 것으로 해석되므로 사실로 보기 어렵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