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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1)
마 26:31-46
31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32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마 26:31-46 / [베드로의 장담;막14:27-31,눅22:31-34,요13:36-38]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밤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 성경에 ㄱ) `칼아, 일어나 내 목자를 찔러 죽여라! 내 곁에서 나와 똑같이 일하는 바로 그 사람을 찔러라! 양 떼가 뿔뿔이 흩어지도록 그 목자를 쳐죽여라'라고 기록된 대로 될 것이다. (ㄱ. 슥13:7) 32) 그러나 내가 다시 살아난 뒤에는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이다.' 33) 베드로가 나서서 장담하였다. `비록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버린다 해도 저는 버리지 않겠습니다.' 34) 그러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35) `저는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베드로가 거듭 말하자 다른 제자들도 모두 다 그렇게 말하였다. 36) [겟세마네에서의 기도;막14:32-42,눅22:39-46]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라는 동산으로 가셨다. 거기서 제자들에게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하고 돌아올 때까지 여기 있으라' 하고 이르신 뒤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다. 예수께서는 근심과 번민에 싸인 얼굴로 38) 세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것 갈구나. 여기 머물러 있으라. 여기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 다오.' 39) 예수께서는 홀로 조금 앞으로 나아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셨다. `아버지, 만일 하실 수만 있으시다면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40) 그리고 세 제자에게 돌아오셔서 그들이 자고 있는 것을 보고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단 한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단 말이냐? 41) 깨어 기도하라. 그렇지 않으면 시험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마음은 간절하나 육신이 약하구나!' 42) 예수께서는 다시 그들을 떠나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만일 이 잔이 내가 마시지 않고는 치워질 수 없는 것이거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43) 예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돌아오셨을 때에도 그들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그들은 눈이 피곤하여 잠을 떨쳐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44) 예수께서는 그들을 두고 세번째 되돌아가셔서 다시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45) 그리고 제자들에게 오셔서 말씀하셨다. `아직도 자고 있느냐? 그렇게도 피곤하더란 말이냐? 하지만 때가 왔다. 인자는 악한 자들의 다에 넘겨지게 될 것이다. 46)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넘겨 줄 자가 가까이 와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을 부인할 것을 예언하십니다. 그리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십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31-35) 본 단락의 버리리라는 말은 마지막 때에 일어난 성도들의 영적인 변질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와같이 제자들과 베드로가 그렇게 주님을 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팔아 배반했다면, 나머지 열한 제자들은 소극적으로 예수님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 둘의 차이는 별로 없습니다.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는 제자들의 배신이 구약에 이미 예언되어 있는 말씀의 성취입니다(슥 13:7). 그러나 이 말씀의 의도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린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관계는 목자와 양의 관계라고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 가운데에서 베드로는 자신만은 결코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마가는 이 장면을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막 14:30).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은 기어코 넘어지기 마련입니다.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36-46) 겟세마네는 기름 짜는 틀이라는 뜻입니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1.1km 정도 떨어져 있는데, 사자문에서 나와 기드론 계곡을 지나면 나옵니다. 이곳은 감람산의 기름을 짠 곳으로 조용하고 한적하여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자주 갔던 곳이었습니다. 기름 짜는 곳에서 예수님은 피와 같은 땀을 짜내시며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매우 고민하였으나, 아직 거듭나지 못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예수님과 함께 깨어 있을 수 없었고, 잠조차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고민은 인간적인 두려움이 아니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셔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슬픔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시고,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며 먼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를 통하여 예수님은 철저하게 성부 하나님과 하나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약한 육신을 의지하지 말고 깨어 있어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적용: 당신이 지어야 할 십자가는 무엇인가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며 믿음으로 따라가기 바랍니다.
자신이 불행하면 불신감이 깊어지고 오직 자기만을 생각하며 자기 자신만의 욕구에만 몰두합니다. 사람은 행복할수록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며, 다른 사람들을 더 많이 좋아하고 낯선 사람들과도 자신의 행운을 나누고 싶어 합니다. 기도를 할 때에 내 뜻을 이루는 기도가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를 할 때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짐으로 성공한 기도를 하게 되며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됩니다.
< 설 교 >
베드로의 결심과 실패의 원인
마 26:31-35 / 이상호목사(세광교회)
오늘 본문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 주님께 칭찬 듣는 사랑스런 모습과 아울러 인간의 완악함과 무가치함을 적나라하게 들어 내 주는 본문입니다. 마 26:26이하에 보면 만찬 석상에서 가롯 유다를 가리키면서 나를 팔자가 있다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때도 베드로는 예수님께 말씀드리기를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용감하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 시간 후에 그렇게 호언장담했던 베드로는 참담하게 무너지고 맙니다. 예수님이 대 제사장과 빌라도와 헤롯에게 이리 저리 심문을 받으시려고 끌려 다니 실 때에 가까이도 아닌 멀찍이 따라 가면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합니다.(마 26:69)
사실 이것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어쩌면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얼마 전에 주님께 맹세하고 약속했던 그 결심은 위선이고, 거짓이었을까? 우리는 그가 거짓말을 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 고백은 베드로의 열정적인 충성의 진 모습이요, 의협심과 의리에 죽고 살만한 믿음이요,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 선언한 결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그 약속을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거짓말이 된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까? 이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과 베드로 사이에 대화를 분석해 봐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계속해서 "나는 주를 따르겠습니다. 죽는데 까지 가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 너희가 나를 다 버리리라"라고 말씀하실 뿐입니다. 과연 주님 말씀하신 대로 주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다 떠났으며, 심지어 죽는데 까지 가겠다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저주까지 하고 말았습니다.
이 말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거짓이나 위선이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자신도 자기 자신을 바로 알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만일에 베드로가 자신을 똑바로만 알았더라도 그렇게 호언장담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작은 계집 종 앞에서 자기의 구주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하는 비참한 베드로! 이것이 바로 인간의 현주소입니다. 이것이 나의 본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주님과 한 약속을 지킬 능력이 그에게 없을 뿐입니다.
주님은 진액을 쏟으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얼굴에 흐르는 땀은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옆에는 정신없이 골아떨어진 베드로, 그리고 다른 제자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구나"라고 말입니다. 이 분이 주님이십니다. 마땅히 책망해야 할 부분에 이르러서는 책망보다 상대방의 연약함을 먼저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그 모습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베드로는 결심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1. 인생은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라고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생각 없이 장담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느 날 야고보와 세베대의 두 아들의 어미가 예수님께 와서 청탁을 합니다. 마20:21입니다. "이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해 달라는 청탁입니다. 그 때 주님은 그 간청에는 대답하시지 않으시고 말씀하시기를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 20:22)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잔은 고난의 잔이었습니다. 그 때도 야고보와 요한은 생각해 볼 겨룰 도 없이 "예 할 수 있나이다."라고 호언하며 장담하였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는 알지 못했습니다. 이 고난의 잔을 마신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인가를 알고 대답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라고 하신 것입니다.(마 20:2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 16:21에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겠다고 담대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를 다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섬김 받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기 위해서 오셨다고 성경은 말씀하셨습니다.(막 10:45) 어떻게 섬기셨습니까? 그 귀하신 몸으로 섬기셨습니다. 십자가에 주님의 몸을 찢으시고 상하셔서 죽음으로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주님 제자들에게도 같은 결심을 하자고 촉구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마 16:24, 25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시면서 나와 함께 좁은 길을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여전히 누가 높으냐 하는 문제에 신경을 곤두 세웠습니다. 인생이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인지를 모르다가 베드로는 실패하였습니다.
2.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보다 자신을 더욱 과신했기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33절에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을 분석해 보면 베드로는 자신이 다른 제자들 보다 신앙적인 면이나, 열심적인 면에서도 월등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극단적인 용어를 써 가면서까지 "다 버릴지라도, 언제든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베드로는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오늘 새벽(2l-3시경)에 세 번씩이나 거듭해서 나를 부인 할 것이라고 주님께서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이중적인 부정(결단코 무엇하지 않겠다는 뜻)을 사용하면서까지 자신의 강한 결심을 말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베드로는 사나이 중에 사나이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주님보다 자기가 자기를 더 잘 알고 있다"라는 보이지 않는 자만이요, 교만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순간 자기 과신의 늪에 푹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만만한 배드로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몇 시간이 못되어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함으로서 자기 과신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분명하게 들어내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를 과신하게 되면 절대 실패하고 맙니다. 그래서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경고하십니다. 진실로 베드로는 여러 말로 경고하셨지만(31,34절) 고집스럽게 허세를 부리다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 말씀을 귀히 듣고 오히려 겸손하게 주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로서 도와 달라고 간구했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하늘 아래 그 어떤 사람일지라도 주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다 실패하고 연약하여 넘어질 수밖에 없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 과신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신앙이 세월이 지나 갈수록 "자기는 죄인 중에 괴수라"(딤전 1:15)고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주님께 진실하게 고백하고 은혜로 살았습니다.(빌 4:13)
3. 베드로는 혈기를 앞세운 고로 실패하였습니다.(47-54절)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가 기도하실 때에 반역자 가롯 유다를 앞세운 병정들이 검과 몽치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주님은 이미 이 사실을 예견하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당황하지 않으시고 가롯 유다를 향하여 "친구여!"라고까지 하시며 끝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베드로는 성급하고 분하게 생각한 나머지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어 버리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베드로는 혈기가 충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그것까지도 참으라, 검을 가진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52절)고 권면 해 주셨습니다.
사실 베드로의 이같이 용기 있는 행동이 주님을 위한 일 인줄 알았는데 오히려 구속 역사를 방해하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베드로보고 하시는 말씀이 "사단아 물러가라!"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나 뜻은 생각지 않고 사람의 뜻이나 생각만 하는 자는 주님을 돕는 자가 아니라 주님의 일을 훼방하는 자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베드로는 인간적인 혈기, 감정, 분노심을 통제하지 못하고 혈기를 부림으로 십자가의 원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약 1:20절에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는 마음을 잘 지키고 다스릴 줄 알아야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영광 받으십니다. 이것에 실패하면 하나님의 영광은 도리어 욕이 되고, 교회의 문은 닫쳐지게 될 것입니다.
4. 끝으로 베드로는 주님을 멀찍이 쫓아 가다가 실패했습니다.
58절에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쫓아 대 제사장의 뜰에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그 안에 들어 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쫓아가기는 했지만 멀찍이 쫓아갔다고 했습니다. 마치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베드로는 주님과 상관없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를 썼을 것입니다. 실로 베드로는 주님을 염려하는 마음은 있으나 전폭적으로 주와 함께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하겠다는 신앙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얼마 전에 뭐라고 했습니까? "주와 함께 죽는데도 가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중에 말만 앞세우시는 분이 계십니까? 베드로의 실패를 거울삼으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주님을 믿기는 하지만 손해 보지 않을 정도로 주님을 섬기고, 밑지지 않을 정도로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분이 계십니까? 주님을 멀찍이 쫓아 가다가 실패한 베드로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되 온전히 사랑치 못하였기 때문에 두려워 떨게 된 것입니다.(요일 4:18)
그러면 결론적으로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눅 22:60절 이하에 베드로가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하자 닭이 울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재판 받고 나오시는 예수님과 베드로는 얼굴과 얼굴이 마주쳤습니다. 베드로의 눈과 예수님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바라보시는 눈은 어떤 눈이셨을까요, 책망하시는 눈이셨을까요? 아니면 원망의 눈이셨을까요? 아니면 증오의 눈이셨을까요? 베드로는 예수님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피곤이 상접했지만! 채찍에 시달려 피로 얼룩진 얼굴이지만! 베드로를 쳐다보시는 주님의 눈은 불쌍히 여기시는 눈이셨습니다. 베드로의 영혼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시는 눈이셨습니다. 베드로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피 흘리신 눈이셨습니다. 호언장담하면서 한치 앞도 내다 볼 줄 모르는! 그래서 교만했던 베드로가 너무나 불쌍해서 안타까워하시는 눈이셨습니다.
그 주님은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냥 바라만 보셨습니다. 잠잠히 바라만 보시며 사랑해 주실 뿐이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억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앞에서 자신이 초라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가를 알았습니다. 얼마나 나약하고 연약한 존재인가를 알았습니다. 그리곤 통곡하기 시작했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실패한! 무능한 인간이 살길이 무엇입니까?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꾸짖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측은히 여기시는 주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탕자의 비유에서 죄를 짓고 회개하면서 돌아 온 아들에게 아버지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기억이 나십니까?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그 넓은 가슴에 안아 주실 뿐이었습니다. 이 시간에 실패하고 피곤한 여러분을 우리 주님께서 잠잠히 사랑해 주시고 넓은 가슴으로 안아 주심 믿습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마 26:31-46 / 박덕기목사
교회력에 의하면 지금은 부활절을 기다리면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고난당하신,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절 기간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친히 성찬식을 제정하셨다고 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최초의 성찬식 후, 베드로가 주님을 배반할 것에 대한 예언과,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처절한 기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31절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자신을 배신하게 될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말씀이 이미 구약 성경 슥 13:7절의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는 예언의 성취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제자들은 주님이 체포당하시자, 목자 잃은 양같이 다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주님의 넓으신 이해심과 긍휼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분, 만일 누가 자기를 배신할 것을 안다면, 그의 태도는 어떨까요? 과연 주님처럼 이해심과 긍휼로 상대를 대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깡패 두목들은 밑에 거느린 부하들이, 싸움에서 도망하거나 두목을 버리고 도주하면 용서가 없습니다. 그에 따른 끔찍한 벌을 줍니다. 비단 깡패 세계뿐만 아니라, 정치 세계, 또 직장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군대에서는 총살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모두 이해하시고, 오히려 사탄에게 패하지 않도록 기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연약하여 실족했을지라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한 결과를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약하여 실패하기 쉬울지라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최선을 다하다가 약하여 실족하는 성도를 주님은 긍휼히 보십니다. 우리는 천사처럼 하나님 뜻을 완전무결하게 행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연약하여 실족한 성도들을 이해하시고, 회개하면 용서해 주시며 새롭게 일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핑계하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성미 급한 베드로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고 장담을 했습니다. 여기서 ‘결코’라는 말은 ‘절대로’라는 의미입니다 즉 베드로는 절대로 주님을 부인하거나, 도주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맹세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과연 그 말대로 행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그의 말과는 달리, 오히려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우리 중에도 이 ‘절대’라는 용어를 너무 흔하게 사용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말끝마다 ‘절대로’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 ‘절대로’라는 용어를 그렇게 함부로 쓰면 안 됩니다. 절대라는 개념은 절대자, 즉 하나님과 관련된 진리나 일에만 사용해야 합니다. 절대자 하나님 이외에는 모두 ‘상대적’ 존재입니다.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바뀌는 대로 변하는 것이 피조물이요, 우리 인간들의 마음입니다. 바로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인간들이, ‘절대로’라는 말을 쓰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가소로운 일입니까? 우리는 그저 우리 분수 안에서 약속도 하고, 우리의 한계를 감안하여 범사를 행해야 합니다. ‘절대’라는 용어는 오직 하나님만이 사용할 수 있는 신적 용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우리는 다 한계가 분명한 상대적 존재임을 명심하여, 자만하지 말고 매사를 겸손히 행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의 장담을 듣고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자신이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되리라는 예고를 듣고,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두 번째 장담을 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결심이 매우 단호함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베드로의 이 말이 거짓이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처럼 자신만만했건만, 이 말을 한 지 불과 몇 시간도 못 되어,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되,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자기 과신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스스로 중명한 것이었습니다. 이렇듯 자기를 과신하는 자는 언제든지 실패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자신을 과신하는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어떤 철인은 말하기를 “인간은 한 마리 벌레도 못 만들면서, 한 다스나 되는 신들을 만든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한계성과 허구성을 지적한 명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는, 언제든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어 수치를 당하게 하시지만, 겸손한 자는 높여 영광을 얻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러,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특별히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 곧 “야고보와 요한 세 제자만을 데리고 가시면서 ‘고민하고 슬퍼하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고민하고’라는 말은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이 괴롭게 된 상태’라는 뜻입니다. 또한 ‘슬퍼하사’란 말은 ‘매우 슬퍼하며 근심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미 예수님은 자신의 수난을 여러 차례 예고하셨으므로, 고통이 클 것을 잘 아셨지만, 십자가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한적한 곳에 이르러, 특별히 그 일을 놓고 기도하니, 고통과 괴로움이 더욱 폐부 깊숙이 파고 든 것입니다. 이것은 인성을 지니신 예수님께, 십자가 사건이 얼마나 큰 고통으로 다가왔는가를 말해줍니다.
십자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이렇게 고민하고 슬퍼하시던 예수님은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성을 지니신 주님의 엄청난 고뇌를 엿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고뇌에 대하여 혹자는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같은 철학자나 때로는 범인들도 죽음 앞에 담대한 사람들이 있는데, 왜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 그토록 고통을 당하셨을까? 이에 대하여 박윤선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1)예수님의 죽으심은 단순히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고, 그의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신 많은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스킬더는 말하기를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고통을 알려면, 지옥에 가서 지옥의 고통을 느껴 보기 전에는 모른다.”고 하였다.
2)예수님은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죄가 없으시므로, 고통과 욕을 당하신 때에 더욱 고통을 느끼신 것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죄로 인하여 둔해져서, 죄의 열매인 고통과 욕을 바로 느낄 줄 모른다. 이는 마치 우리의 눈은 빛을 잘 느끼나, 우리의 발꿈치는 빛을 못 느끼는 것과 같다.
3)보통 사람은 죽을 때에 죽음의 고통과 싸우면서 그것을 받기 때문에, 죽음의 맛을 그대로 다 보지 않고 넘어간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신 죽음에 있어서, 그 죽음의 맛을 그대로 다 당하신 것이다.
4)보통 사람들은 죽을 때에 다만 육신적 죽음의 맛을 조금 당해 볼 뿐이고, 영원한 죽음의 무서운 쓴 맛은 모르고 죽는다. 영원한 죽음이란 것은,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버림이 되고 영원히 갈라져 지옥의 고통을 받음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한 영원한 죽음의 십자가에 달리시어, 다 이루었다고 하시기까지의 쓴 맛을 그대로 당해 보신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죽음에 대하여 맛보는 정도는 초등이라고 할 수 있고, 예수님이 맛보신 죽음은 그것과 비교 할 수도 없이 높고 깊고 크신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당하신 고통은 컸다. 이 외에도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예수님께 있었다. 그러므로 겟세마네 동산은 우리의 지능의 연구 제목이 아니고, 우리의 신앙이 쳐다볼 지성소인 것이다.
39절에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간절히 기도하여 이르시되.”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는 것은,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눅 22:44절에 보면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땀방울이 피 방울처럼 크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땀에 피가 섞여 흘려 나왔기 때문에, 그 방울이 피 방울 같다는 뜻입니다. 랑게는 “극도의 고통이 심령에 일어나는 때에는 피가 땀구멍으로 스며 나올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박윤선 박사는 주님의 골고다의 십자가와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이렇게 비교하기도 합니다. 1)골고다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나타나도록 우리를 대신한 속죄 제물이 되신 곳이고, 겟세마네는 예수님께서 홀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신한 속죄 제물이 되신 곳이다. 2)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외부적 세력으로 말미암아 된 일이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의 제물이 되신 것은, 그가 친히 하나님에게 영혼을 드리신 일이었다. 3)골고다에서는 그의 몸이 피를 흐리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비유하자면 그의 영혼이 피를 흘리신 것과 같다.
주님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기까지 간절히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잔’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의 고난’을 말합니다. 주님은 할 수만 있으면, 이 십자가의 고난을 피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거듭해서 세 번씩이나. 하나님께 이 십자가의 잔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게 해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결코 자신의 뜻을 끝까지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심으로,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그 자신이 하나님이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이셨습니다. 주님은 얼마든지 자신의 뜻을 주장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굴복시키신 것입니다. 결국 주님께서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굴복시킴으로써, 마침내 인류 구원의 대업을 달성하시게 된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압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의 삶의 자세에 대해 교훈 받게 됩니다. ‘겟세마네’ 라는 지명은 ‘감람유를 짜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 겟세마네에서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자신의 의지를 굴복시키기 위해 피땀을 짜내셨습니다. 그래서 죄인을 구원하는 대속 제물로 자신을 드리겠다는 결단을 하신 것입니다. 이 주님의 결단 때문에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윌리암 바클레이란 성경학자는 말하기를 “성도라면 누구라도 겟세마네의 결단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성도라면 나의 원, 나의 뜻, 나의 소원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전적으로 따르겠다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를 마치고 오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자는 모습을 보시고 책망하셨습니다.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이는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는 부탁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한, 주님의 책망인 동시에 탄식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바로 조금 전만 해도, 비록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께서 고뇌 가운데 피땀 흘려 기도하는 잠시 동안도, 깨어 있지 못하고 잠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실로 그들은 마땅히 깨어 있어야 할 시간에, 잠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신하게 된 원인도, 이렇게 마땅히 깨어 있어야 할 시간에, 깨어 있지 못한 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데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제자들은 깨어 기도해야 할 시간에, 영. 육간의 깊은 잠에 듦으로써, 시험에 빠져 주님을 부인하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깨어 있어야 할 때 깨어 있지 못하면 이렇듯 누구나 실패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할 때, 깨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은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마지막 때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이 마지막 때를 사는 우리를 향해,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때에 깨어 있지 못하면, 실패하는 신앙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종말의 때가 다가올수록 사탄은 더욱 날뛰며, 한 영혼이라도 더 실족케 하고자 애씁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경고를 명심하여, 이 마지막 때에 영적으로 결코 잠들지 않도록 늘 깨어 근신하며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기도를 살펴보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얼굴을 땅에 대시고,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면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즉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모든 성도들에게 만고의 모범이 되는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다음은 주중 대사를 역임한바 있는 김하중 대사의 ‘하나님의 대사’란 책에 나오는, 고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내용입니다. <한 번은 내가 대통령께 여쭈었다. “대통령님, 어떻게 그런 험난한 인생을 견디셨습니까?” 대통령께서 말했다. “김 비서관,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만일 내가 직원이 천 명인 회사에 다닌다고 칩시다. 그런데 직원 이삼백 명이 내게 마음에 안 든다고 비난하고 공격하면, 회사 다니기가 아주 힘들 거예요. 그런데 절반인 오백 명이 나를 공격한다면, 내가 그들의 말을 듣든지,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을 거예요. 4천 8백만 국민 중에 절반이나 넘는 국민들이 ,수십 년 동안 내가 아닌 나를 가지고 계속 욕하고 공격하는데, 내가 어떻게 살겠어요? 살 수가 없지요. 그냥 현실과 타협하든지, 다른 나라로 가서 살든지 헤야겠지요. 그러나 살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예수를 믿는 것밖에 없었어요. 아마 예수를 믿지 않았으면, 나는 살 수가 없었을 거예요.” 나는 대통령의 말을 들으면서, 마음으로 깊이 회개했다.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도 처절한 인생을 살면서, 예수님만을 붙들고 왔는데, 나 같은 존재가 무어라고 세상을 쳐다보고, 사람들을 의지하면서 교만하게 살아왔는지, 후회가 되었다. 그래서 이후로 나도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오직 예수님만을 붙들고 나아가겠다고 다짐했다. 김 대통령의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놀라웠지만, 부인 이희호 여사님의 믿음도 놀라웠다. 1980년 김대중 대통령은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선고 공판에서 사형이 선고 되었다. 대법원 상고심이 있던 날의 상황이 자서전에 기술되어 있다. “대법원 상고심은 1월 23일이었다. 저들은 나를 재판정으로 데려가지 않았다. 아내가 오후에 면회를 왔다. 아내는 울먹이며 말했다. “상고가 기각되었어요. 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있어요.” 나는 이미 몇 천만 번 마음속으로 각오한 일이어서 담담하게 그 말을 듣고 있는데, 아내가 차디찬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뜻대로 하소서”라고 기도를 했다. 나는 정말 아내가 그렇듯 존경스러울 수 없었다. 가족의 믿음과 사랑이 없었더라면, 나는 20년을 넘게 지속된 고난을 결코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 중심에는 존경하고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다. 대통령께서 자서전에는 이렇게 쓰셨지만, 생전에는 농담으로 “우리 집사람은 정말 무서운 사람이야, 남편이 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아내라는 사람이 남편을 살려달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를 하니....”라면서 웃으시곤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희호 여사의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들으시고, 김 대통령을 살려주셨지 않습니까?
독일 전역이 30년간의 종교전쟁으로 폐허가 됐을 때, 눈물의 기도를 드리던 한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핍박받는 신자들의 가정을 찾아다니며,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독일 전역에 흑사병이 나돌아 1천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목사 부부는 어느 날 중병을 앓고 있는 한 신자의 가정을 심방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목사 부부는 처참한 광경을 목도했습니다. 교회와 집이 불에 타 잿더미로 변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두 아들은 서로 껴안은 채 죽어 있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아들의 시체를 부둥켜안고, 울면서 조용히 기도를 올렸습니다. ♪내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온몸과 영혼을 다주께 드리니/이 세상 고락간 주인도 하시고/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이 분의 이름은 벤자민 슈몰크 목사이고, 그때 올린 기도에 곡이 붙여진 것이 바로 찬송가 549장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입니다. 고통과 시련까지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기꺼이 순종하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우리 모두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본받아, 질병도, 사업도, 자식도, 교회 부흥도,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닫힌 문을 여는 분
마 26:31- / 문기태 목사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배는 재미없고 지적이며 차갑고 형식적인 겉치레가 되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를 많이 드리지만 그 예배가 그의 삶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축제입니다. 예배는 축하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축하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선물인 기쁨과 소망과 생명력을 받아 누리게 되어 죄와 세속화등의 사단의 독소를 해독하는 능력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축하는 어떤 사건에 근거하여야 합니다. 구약시대 예배는 출애굽의 사건을 기념하며 축하했습니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오심, 사역, 십자가와 죽으심, 그리고 부활을 기념해 예배함을 보여줍니다. 그중에서도 예배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축하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활절에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안식일에서 주일로 예배하는 날이 바뀌었습니다. 주님이 부활함으로써 우리가 더이상 죄에 눌려 있지 자유를 얻었습니다. 사단에게 항상 패배하고 실패자로 살던 우리가 주님이 부활하심으로 사단의 권세를 이기는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 자주 그리스도의 부활을 바라보고 축하해야 합니다.
오늘 나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다루는 본문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는 예배를 드릴 때 주님께서 우리안에서 어떤 일들을 이루시는지를 우리 모두 함께 깨닫는 축복을 누리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1.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십니다. (31)
부활하신 예수님은 먼저 무덤의 문을 여셨습니다. 당시 무덤에는 큰 돌도 입구를 막아놓았습니다. 그래서 여인들이 안식일 다음날 새벽에 향료를 준비하여 무덤에 올라가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문에서 돌을 옮겨주리요.' 걱정하며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무덤에 도착했을때 이미 무덤문을 막고 있던 큰 돌이 옮겨져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삶과 죽음을 가로막고 있던 무덤문을 여신 것입니다.
무덤의 돌문을 여신 주님은 제자들의 눈도 열어 주셨습니다. 16절에 보면 '제자들의 눈이 가리워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증거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약11킬로미터를 주님과 함께 걸어가면서도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대화를 하고 가면서도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 설명해 주는 것을 들으면서도 그분이 예수님인 것을 자기들이 지금 주님과 동행중인 것을 눈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오늘도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눈이 가리워져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성경공부를 하면서도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들의 삶속에 찾아 오셔서 걸음을 인도하시고, 위로해 주시고, 치료해주시고, 온갖 은혜를 부어주시는 예수님이 함께 계심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눈이 가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눈이 있으나 시력은 좋으나 정작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는 눈은 감기워져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축하하는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들의 눈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늘 열어 주십니다. 여러분의 눈을 가리워 보지 못하게하는 모든 것을 다 벗겨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함께 계시는 예수님을 알아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앞길에 예비하신 놀라운 축복을 바라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을 뛰어 넘어 천국의 아름다움과 소망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시간 주님께서 떼어주시는 떡을 받으시고 눈이 열려져서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뚜렷하게 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우리 마음을 열어 주십니다.(32)
예수님께서 두 제자를 놓고 부흥회를 하셨습니다. 가장 위대한 주제를 가지고 친절하게 자세히 설명해주시며 성경강해를 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들은 메시야를 정복자로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야인 예수님은 고난당하는 종의 모습으로 일하셨습니다. 게다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했습니다. 얼마나 실망하였는지 모릅니다. 구약을 읽으며 고난없는 영광만을 보았고, 십자가 없는 왕관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왕관대신 가시 면류관이었습니다. 영광대신 고난과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은 몹시 상했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했습니다. 아주 침통하였습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하는 말을 들었으나 믿어지지 않고 의심에 가득차 오히려 예루삼렘을 떠나 숨을 곳을 찾아 엠마오를 향했습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마음이 닫힌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를 믿기로 하였으나 예수님께서 자기의 기대대로 해주지 않는다고 마음이 닫힌 사람이 많습니다. 예수믿어도 고난이 찾아온다고 현실이 어렵기는 마찬가지라고 실망한 사람이 많습니다. 주어진 현실이 고달파서 마음이 침울한 사람이 많습니다. 강단에서 아무리 소망의 메세지가 주어져도 의심으로 가득차 반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의 영향으로 마음이 닫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분들은 모두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마음문이 열려야 은혜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평안과 기쁨이 충만한 삶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깨닫고 진리에 견고히 설 수 있습니다.
이시간 말씀을 듣는중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리고 성령님께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 진리가 깨달아지고 확신으로 충만케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마음이 뜨거워져 여러분들의 삶에 전환점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이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 같이 여러분들이 세상의 욕심을 향해 달려가던 방향을 바꾸어 하나님나라를 위해 살아 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결단하고 죄의 습관을 끊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위해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용기를 내어 다시 도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교회의 분위기를 새롭게 만드는 주인공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우리 입을 열어주십니다.(35)
이제 제자들의 입이 열려졌습니다. 지금까지는 조용조용히 남이 듣지 못하게 주님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것도 의심과 불신으로 가득찬 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알아보고 마음이 뜨거워진 후에 제자들의 입이 열렸습니다. 길에서 겪은 일, 식사중에 경험했던 간증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예수의 증인, 부활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아울러 주님께 참된 경배를 하고 주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도 입이 닫혀진 제자들이 많습니다. 엄청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대해 침묵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누가 물어 올까봐 겁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자들끼리 만나도 예수님을 만난 감격스런 사건에 대해 말하지 못하고 시시한 세상적이야기만 하다가 헤어집니다. 왜 아무 간증이 없습니까? 왜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왜 교회가 세상을 향해 침묵하고 있습니까? 사건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난 사건,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마음이 뜨거워진 사건, 주님이 주신 떡을 먹으며 눈이 열려지는 사건, 속에서 불이 올라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 벌떡 일어나 뛰쳐 나가는 사건이 없기 때문에 시시한 것만 가지고 옥신각신하고 잇습니다.
우리는 시시한 것만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이러한 사건을 경험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입을 열어주셔서 교회안에서나 밖에서나 할 말이 많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 만난 이야기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세상사람들처럼 시시껄렁한 얘기는 시간이 아까와 하기가 억울할 정도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입은 열려졌습니까? 입만 열면 부활하신 예수님 만난 사건이 쏟아지고 신자,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그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고 부러워서 귀가 집중되어지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은 닫혀진 사람입니까? 열려진 사람입니까? 눈이 있어도 열려 있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이 있어도 열려있지 않으면 축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입이 있어도 열려 있지 않으면 쓰임받지 못합니다. 열려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게서 여러분들의 닫힌 문을 여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지금 찾아 오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눈과 마음과 입을 주님께 내어 드리십시오. 주님께서 하시는대로 맡겨 드리십시오. 그래서 주님께 존귀하게 일평생 쓰임받는 제자들이 되기 바랍니다.
베드로의 고백
마 26:31-35 / 박지온 목사
오늘 본문에서 제목을 "베드로의 고백"이라고 이렇게 잡았습니다. 긴 시간보다도 짧은 시간에 중요한 포인트를 붙잡고 한 주간도 기도의 제목이 성취되고, 말씀이 성취되는 이런 체험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베드로의 고백이라는 말씀의 배경을 가지고 전체적으로 베드로가 어떻게 신앙생활에 승리를 했고, 또 신앙생활에 구체적인 축복을 받았느냐? 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지난주까지 가룟 유다의 실패와 그 비참한 말년을 보면서 우리 마음속에 신앙의 방향과 하나님의 뜻을 다시 한번 새겨야 되겠습니다.
지난주까지 가룟 유다의 깊은 신앙고백은, 그건 열두 사도 중에 한사람 이였던 가룟 유다의 신앙을 보면서,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던 여인을 향해서, '이것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었다면 굉장히 유익이 되었을 것이다!' 그랬던 그런 가룟 유다의 신앙의 표현들, 그리고 모든 열두 제자들도 가룟 유다의 어떤 면에서 신뢰하며 따라왔던,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도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가룟 유다! 예수님의 회계를 맡았던 그리고 열두 제자들이 전혀 가룟 유다에 대한 신뢰를 보면서, 그러나 그 신뢰 이후에 가룟 유다의 그 신앙고백이 결국은 하나님의 방향에 맞추지 못했던 그런 결과로 비참한 마지막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사도행전 1장 17절에 보면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이 배경이 뭐냐하면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고 난 후에 너무 마음에 괴로워서 전해지는 데로, '자살한 것이 아니냐?'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그 방법이 '목을 메달고 떨어져서 창자가 터졌다!' 이렇게 이야기가 나옵니다 만은, 어쨌던 그 가룟 유다의 최후가 너무 비참한 그런 최후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친히 지난주에 말씀하신 것처럼, 이 사람은 어떠했으면 좋았을 뻔했다 구요?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했다!'고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은 자리, 또 중직자, 또 성도의 자리, 좋은 교회, 말씀을 잘 듣고 말씀 속에 설 수 있는 그런 축복된 자리에 앉아 있을 수록, 누구하고 방향을 맞추어요? 하나님과 지금 현재에 하나님과의 구체적인 방향을 맞추지 아니하면 더욱 악한 결과를 볼 수가 있다는 이런 무서운 사실을 조금 말씀을 통해서 깨우치고, 또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바른 방향을 세워야 되겠다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경우도 가룟 유다 못지않는 별 다름이 없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말하자면 가룟 유다나 베드로나 어떤 면에서 신앙생활은 거의 똑같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말씀에서 보여주는 데로, 베드로도 예수님을 그냥 배반한 정도가 아니고 맹세하며 부인까지 했던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결국에는 하나님 앞에서 그 마지막 부분이 순교로서 생명을 건 복음의 증인으로 세워졌다는 사실들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베드로가 어떤 고백으로 통해서 이런 축복된 신앙의 마지막까지의 삶이 이루어 졌느냐? 하는 것이, 고백을 잘했다, 못했다! 이전에 그 베드로의 고백에서 보여지는 신앙의 진의를 좀 살펴보기를 원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보면, 마태복음 26장 31절에 보면,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십자가를 지시기전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죠. 이럴 때에 뭐라고 다른 제자들보다도 원래 이 베드로의 성격상 가만히 있을 수 없으니까! 33절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 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 앞의 배경에 31절에 예언하신 말씀도 구약에 이미 기록된 예언입니다. 예수님께서 스가랴에 나오는 말씀을 가지고 인용해서 예언했죠. 스가랴13장 7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 스가랴에 나오는 예언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이루어질 일로 예수님께서 적용을 하셨습니다. 과연 그 예언의 말씀대로 목자를 쳤다! 결국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게 되는 이때에 제자들이 다 흩어졌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너무 위급해서 홑이불을 덮어쓰고 도망을 쳤다고 해서 마가다! 이런 이야기까지 나오는데, 왜 너무 급해서 자다가 정신 없이 도망을 치다가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들도 우리가 듣고 있습니다. 문제는 뭐냐하면, 이렇게 너무 황급하게 예수께서 전혀 제자들이 상상치 못할 문제를 당하고 나니까, 이 제자들이 너무 당황해서 예수님을 그동안 따라다니며 먹고 마시면서 신앙을 깊이 고백을 했지만, 아무도 예수님과 끝까지 순교를 함께 당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역시 베드로가 33절에 말씀한 것처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그러니까 34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35절에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그랬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뭘 느끼는가하면, 베드로가 지금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정말 내가 주를 위해서 죽을지언정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 이렇게 진실한 말로 대답을 했죠. 그리고 다른 제자들도 거짓말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똑같이 주님과 함께 죽겠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느끼는 대로 뭘 느끼느냐하면, 신앙생활 속에서 지금 이 베드로의 고백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다는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뭐냐하면 말씀이 성취되고,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그 뜻이 성취되지! 내 느낌이나, 내 감정이나, 내 기분이나, 내 결단이나, 내 욕망이나, 내 욕심이 성취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지금 고백이 뭐냐하면, 좋은 뜻에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하여 깊은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어떤 걸 보게 되느냐하면, 사람들은 어떤 말씀대로의 성취보다도 내 느낌과 내 감정과 나의 어떤 생각의 고백을 하게 될 때에 훨씬 더 깊은 신앙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이런 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쭉 내려오면서 느낀 것이 뭐냐하면, 내가 하나님 앞에 참 은혜를 입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이 은혜 참 감사하다! 그래서 어떤 사건이나 어떤 문제가 이루어졌다! 이럴 때에 내 감정과 내 느낌이 겹쳐져서 신앙의 고백이 될 때는 굉장히 깊은 신앙의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백이 바로 그런 고백이거든요. 내가 죽을지언정 주를 버리지 않겠습니다! 주와 함께 죽겠나이다!
그래서 우리가 옛날에 신앙생활 할 때에 신비에 대한 문제를, 말하자면 신비주의죠. 신비주의나 왜 감정적인 신앙생활, 교회에 나와서도 왜 인간적으로 감정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 물론 좋은 감정으로 신앙생활 할 때에 좋은 고백이 나올 수 있어요. 그러나 왜 그걸 주의시키고, 또 신비주의에 대해서 자꾸 그러느냐? 신앙은 절대로 내 생각과 내 뜻과 내 기분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신앙고백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그렇게 신앙고백이 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옛날에 깊이 기도하고 할 때에 어떤 겁니까? 참 주님 앞에 내가 순교를 하겠습니다. 생명을 바치겠습니다.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이 우리 감정의 어떤 기복적인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정도가 아니고, 그것은 다 헛된 고백입니다. 왜? 감정과 느낌으로, 생각으로 신앙고백해서 성취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여기서 깊은 어떤 뿌리를 내리지 아니하면 다른 어떤 방향으로 나가게 되죠. 그래서 베드로가 이 감정의 고백이 이 느낌과 자기의 어떤 결단으로 하는 고백이 얼마나 허무하게 되는 것이냐? 바로 그 뒤에 나타나게 되는 배경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잡아가게 될 때에, 베드로도 그렇게 바로 직전에 고백하고 난 후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닭 울기 전에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그랬는데도 그 말씀이 성취되는 것이지, 자기의 감정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이게 이해가 안되니까 바로 베드로가 그렇게 고백해 놓고는 바로 이어서 닭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저주하고 부인하고 예수님을 떠났던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게 지금 우리가 신앙생활에 속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런 부분들입니다.
많은 경우 거의 많은 성도들이 교회에 깊이 다니고, 교회생활하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어떠냐 하면, 인간적인 감정 속에 고백이 거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 '교회 오니까, 좋더라, 나쁘더라! 교회 오니까, 사랑이 있더라, 없더라!' 거의 전부 이런 경우입니다. 여러분 교회라는 곳은 이상한 사람, 희한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왜? 바로 우리 자신들이 이상하고 희한하거든요. 그런데 나는 그러면서 다른 사람은 안 그렇기를 원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다른 게 아니죠. 왜? 교회라는 곳은 그런 죄인들이 모여서 하나님 앞에 구원받고, 축복 받는 곳이 교회라는 단체 아닙니까! 교회 와서 '아, 이 사람 좋더라! 교회 참 좋더라!' 교회 참 재미있더라! 이런 것은 그건 자기 생각의 고백이고, 느낌의 고백이지! 그건 성경에 말씀에 대한 고백이 아닙니다. 교회 와서 많은 사람들이 속는 것이 바로 그겁니다. 교회에는 뭐가 되는 겁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을 보는 것이 신앙의 고백입니다. 이 사실이 바로 되지 않으면, 우리가 많은 경우 축복을 받고도 축복을 놓치게 되는 이런 배경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베드로의 신앙을 보게 되면 베드로가 결국 끝까지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 이런 어떤 감정적인 신앙고백과 아울러서 그에게 있어서 어떤 면이 있었느냐하면, 말씀을 따라서 말씀대로 신앙을 고백했던 그의 신앙고백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누가복음 5장 4절에 보면,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절에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밥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이 베드로에게서 이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처음 초기에 예수님을 따르게 되는 그 배경이 뭐냐하면, 베드로가 감정에 의해서 따라간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말씀에 의지해서 행동했더니 축복이 왔다! 축복에는 엄청난 결과가 왔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잘 이런 배경을 듣고 있죠.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날 때부터 어부의 가정에서 어부로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은 밤새도록 그물을 내려도 고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그랬느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원래 바다는 그 바다도 그렇고 모든 고기가 사는 곳이 육지 가까운 곳에 있지 깊은 바다는 잘 없습니다. 제가 바다에서 조금 생활하면서 느끼는 것은, 물고기는 바다, 특별히 그 갈릴리 바다의 경우에는 아주 물이 맑은 바다입니다. 그래서, 물이 맑고 그래서 저녁에 그물을 치죠. 대개 보면 물고기를 잡을 때에 저녁에 이제 나갑니다. 그리고 또 너무 물이 맑아서 그물을 치면 낮에는 되지 않습니다. 또 얕은 데만 물가로 먹이를 찾아서 고기들이 나오지 깊은 데는, 더군다나 낮에는 잘 없죠.
그런데 베드로가 너무 잘 알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그러니까, 저는 구지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밥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물을 내렸다고 했는데, 여기에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한 말속에 뼈있는 말입니다.
그게 뭐냐하면, 깊은 바다에 지금 낮에 그물을 내려도 안될 줄 알지만, 자기의 경험이거든요. 그런 어떤 내용이 그 속에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까, '내가 말씀 따라서 해 보겠습니다!' 그런 배경입니다. 여기에 뭐 '아! 예, 고기가 있을 것 같습니다! 내리겠습니다!' 그런 뜻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말씀을 따라서 그물을 내렸더니만 고기가 얼마나 잡혔느냐하면,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잡혔더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상당히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이와 비슷한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결국은 어떤 결과가 나왔느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난 후에 십자가에 못 박히고 이제는 끝났다! 이제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것이 다 헛일이다! 그러면서 또 실수를 범하는데, 베드로가 '나는 고향에 가서 고기나 잡으련다!' 그러니까, 다른 제자들도 뭐라고 그럽니까? '우리도 같이 갈련다! 할 것도 없고 이제 고기나 잡아먹고 살아야지 어떻게 하느냐?' 그러면서 고향으로 전부 내려갔습니다. 갈릴리 바다죠.
내려갔을 때에 예수께서 또 그곳에 나타나셨습니다. 그것도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애를 썼지만, 또 한 마리도 못 잡았죠.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물을 오른편에 내려라!' 그때는 '말씀에 의지해서' 이 말은 없어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두말하지 않고 어떻게 했느냐? 말씀을 따라서 그물을 내렸습니다.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너무 고기가 많이 잡혀왔더라 그랬습니다.
그러면 오늘 제가 이 말씀을 드리면서 뭘 느끼는가하면, 베드로 속에 그가 상당히 감정적인 것이 있고, 또 그 다음에 결단을 빨리 하고, 또 낙심도 잘하고 그런 베드로였지만, 그래서 항상 베드로가 어떤 면에서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행동할 때에, 즉흥적인 행동, 감정적인 행동, 그런 느낌을 가지고 행동했던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와 함께 거하면서, 쭉 그의 인생을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거하면서 확실하게 붙잡았던 것이 뭐냐하면, '감정 가지고는 아니구나! 느낌가지고도 아니구나!' 그래서 뭘 붙잡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구나! 이것이 이루어지는구나!' 그러나 알게 모르게 베드로에게 이것이 자리 잡았습니다.
저는 오늘 길게 말씀을 못 드리고, 여러분들이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믿습니까? 확실히 믿죠?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나를 향한 하나님은 내 느낌과 내 감정에 따라서 나를 버려 두지 않으시고, 붙잡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때부터 하나님은 내 느낌과 내 감정과 상관없이 말씀대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신 축복과 은혜를 약속하셨고, 허락하셨다! 믿습니까? 이 사실이 내가 감정과 느낌에서 자꾸 흔들릴 것이 아니고, 이 사실이 확인되고 자리잡는 그때부터 우리에게는 사실적인 축복과 은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게 성경의 약속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때에 따라서 특별히 요즘 경제라든가 사회문제, 우리가 말세를 당해서 오는 여러 가지 문제, 또 특별히 우리나라의 정치, 행정문제! 이런 문제를 보면서 느끼는 것이 뭐냐하면, '큰일났다! 이래서 되겠느냐?' 이런 말을 많이 듣거든요. 그래서 저는 신문을 이렇게 읽으면서, '정치가 이대로 얼마나 가겠느냐?' 하는 이런 어떤 그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 때도 있다는 정도가 아니고 많이 있어요. 그러나 그때마다 항상 내 마음에 뭘 붙잡느냐하면, 정치가 이상해져 가지고, 뭔가 이 막말로 해 자기고 나라가 엎어지든 자빠지든지,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붙들어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국을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왜? '전도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의 배경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 가정에 깊은 여러 가지 모든 사건과 일들이 닥쳐 올 때에, 우리가 붙잡아야 될 것은, '이러다가 되겠나? 이러다가 우리가 일이 되겠느냐? 이러다가 내 생활이, 내 생애가 온전히 끝나겠느냐?' 이런 마음이 느껴질 때가 많이 옵니다. 그래서 성경은 뭐라고 말씀했느냐? '너희는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뭐라 그랬어요? '또 나를 믿으라!' 그리고, 마태복음 11장 28절 이후처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뿐 아닙니다. '이런 모든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지 너희가 구할 것이 아니다! 너희에게 있어야 될 것을 먼저 하나님이 하신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뭐라 그랬어요? '모든 것을 주신다!' 나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다! 이 염려와 이 사건 속에 지금 있어도 그건 내 느낌이지, 하나님은 나를 여러분을 그렇게 버려 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약속이에요. 그래서 지금 내가 어떤 상황에 있느냐? 내가 이래가지고 하나님 앞에 뭘 받겠느냐? 받아합시다. "의심해도 역시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의심하는 하나님의 자녀! 늘 염려하는 하나님의 자녀! 늘 걱정하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오늘 한가지 여러분 확실히 붙잡을 것은, 베드로처럼 우리가 감정 따라서 너무 좋은 일이 생겨서, 막 '하나님 내 생애를 걸고, 하나님 앞에 내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안 해도 좋습니다. 아니면 어떤 문제와 어떤 사건 때문에, '하나님, 큰일났습니다! 내가 이래가지고 뭐가 되겠습니까! 난 끝났습니다!' 그래도 좋습니다. 여러분 확실히 붙잡아야 될 것은,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약속을 붙잡는 하나님의 자녀들이지, 느낌과 내 감정에 따라서 이리저리 일이 되고 안 되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히 붙잡아야 됩니다.
이 말세에, 더군다나 어려운 이 시대에, 더더군다나 뭔가 이 건축하는 과정 속에서 뭘 느끼느냐 하면, 모든 사람들이 이런 것을 많이 느끼는 것 같아요. 우리 교인들이, '아 이 경기가 어려운데...' 경기가 어려워도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역사! 우리는 그 속에 있을 때에 뭐에 의해서?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에게 말씀을 따라서 축복하시지, 말씀밖에 여러분 기분과 느낌을 따라서 복 주시고,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오늘 이 말씀 붙잡고 한 주간 기도할 제목입니다. 여러분 먼저 마음이 왔다갔다 변하지 않토록 말씀에 딱 붙들려서 언약 속에, 확인 속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도록 우리가 흔히 자꾸만 낙심하고, 또 이렇게 어려운, 조금만 문제 있으면 이상한 마음을 갖고 흔들리게 됩니다. 받아합시다. "나는 흔들려도 하나님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다!"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이요, 약속이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에 의지해서" 주실 하나님의 축복을, 말씀을 확실히 붙잡고 베드로가 처음 시작했을 때, 그 처음에 역사 속에서 말씀에 의지해서 베드로가 따랐더니 축복 받았는데, 중간에 오늘 마지막 부분에 와서 너무 자기 감정과 느낌대로, '나는 죽을지언정 안 하겠다!'고 말씀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거기서 베드로의 실패가 왔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주님께서 살아나신 십자가 이후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하신 말씀대로 두말하지 않고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다시 한번 베드로는 신앙을 확인하고, 그의 인생을 복된 영광스러운 역사로 마지막까지 살았다는 사실을 우리가 붙잡아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도 말씀에 의지한 신앙에 고백이 이루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에서 실패했거든
마 26:31-35 / 박상훈목사
어떤 회사에서 사람이 필요해서 신문에 모집광고를 내었습니다. 그 광고를 보고서 70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시험을 쳐서 그 가운데 적당한 사람들을 뽑기로 했습니다.
시험은 간단했습니다. 그러나 방법은 색달랐습니다. 지원자들은 차례대로 줄을 서서 한 사람씩만 시험장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시험장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양 사방 벽에 큰 거울이 하나씩 걸려있을 뿐이었습니다. 지원자들은 그 거울 앞에 서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거울 위에 쓰여있는 질문에 맞으면 "예," 아니면 "아니오"라고 답안지에 적도록 되어있었습니다.
첫번째 거울은 이렇게 묻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거울에 비친 이 사람이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두번째 거울은 이렇게 묻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여하에 경우에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까?"
세번째 거울은 이렇게 묻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과연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까?"
마지막 네번째 거울은 이렇게 묻고 있었습니다.
"만일 당신이라면 이 사람을 채용하겠습니까?"
그것이 시험의 전부였습니다. 시험을 다 치르고서 시험장 밖으로 빠져 나오는 사람마다 의외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들은 끼리끼리 모여 앉아서 수군거렸습니다.
"참, 싱거운 시험도 다 있네. 사람을 뽑으려면 정정당당하게 시험을 쳐서 실력으로 뽑아야지. 어린 아이 장난도 아니고 이게 뭐야?"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 있는 듯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드디어 합격자 발표가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70명 가운데 단 한 사람만 합격하고, 나머지 69명은 모두 떨어졌습니다. 합격한 사람은 네 가지 질문에 모두 솔직하게 "아니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회사는 자기의 실력을 뽐내면서 큰 소리치는 사람을 원치 않았습니다. 정직한 사람을 원했습니다. 자기의 부족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을 원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선 줄로 생각했다가 넘어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잘난 척 하다가 낭패를 당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타난 제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기 위해서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결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큰 소리 쳤습니다. 그러나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그들이 마음먹은 대로 그렇게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그들 모두는 그 날 밤에 예수님을 버리고 말았습니다. 실패하고 만 것입니다.
비록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렸지만, 예수님은 결코 그들을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말씀대로 다시 사신 후에 먼저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거기서 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리고 넘어진 제자들을 다시금 일으켜 주셨습니다.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제야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들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그들은 잘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실패를 통해서 교훈을 얻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그들은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겸손해 졌습니다. 그리해서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손을 붙들고,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서 예수님만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도 그들에게 많은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예수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기꺼이 주를 위해서 순교하는 담대한 신앙인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실패가 바뀌어서 성공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실패가 성공으로 바뀌어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제자들이 실패했는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그 원인을 살펴보면서 함께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제자들은 무지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몰랐습니다. 성경 속에 이미 예언된 십자가의 사건도 몰랐습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셔야 했는지도 몰랐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대해서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또한 마귀의 시험이 얼마나 무섭고 강한 것인지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그들은 자기 자신들이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인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만하다가 실패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맹인이 건넛마을에 있는 자기 친척집을 찾아갔습니다. 한참 놀다보니까 밤이 깊었습니다. 그는 부랴부랴 돌아올 채비를 하고서 친척집을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친척이 맹인의 손에 초롱불을 들려주었습니다. 맹인은 그의 친척이 자기를 놀리는 줄 알고 화를 벌컥 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나를 놀리는 것입니까? 내가 앞을 못 보는 맹인인줄 알면서 이게 무엇입니까?"
그러자 친척이 그를 달래면서 말했습니다.
"여보게, 내가 왜 자네를 놀리겠는가? 이것은 자네가 보면서 가라고 주는 것이 아니고, 캄캄한 밤중에 마주보고 오는 사람이 자네와 부딪히지 않게 하기 위해서 주는 것일세. 자네가 이것을 들고 있어야 앞에서 오는 사람이 자네를 피해서 갈 것이 아닌가? 그러니 짐스럽게 생각하지 말고 들고 가게나."
그제야 맹인은 왜 친척이 자신에게 초롱불을 주는지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조심조심하면서 밤길을 걸어서 집으로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가 중간쯤 왔을 때입니다. "꽝!"하면서 앞에 마주보고 오는 사람과 부딪혀 넘어졌습니다. 맹인은 화가 단단히 났습니다. 그는 부딪힌 사람에게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아니, 도대체 당신은 앞도 안보고 다니시오? 이 초롱불이 당신 눈에는 안보인단 말이오?"
그러면서 초롱불을 마구 흔들었습니다. 그제야 부딪힌 사람은 맹인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맹인이셨군요. 그래서 초롱불이 꺼졌는데, 그것도 모르고 안심한 채 걷고 계셨군요."
오늘 본문에 나타난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그와 같았습니다. 자기들의 초롱불이 켜져 있는지 꺼져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데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저 자기들이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겠다는 생각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모든 것을 환하게 아시는 분이십니다. 31절 말씀을 보십시다.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슥13:7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라든지, 그 날 밤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는 일은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계획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다 아신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져 나가는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뿐만 아니고 예수님은 현재 가룟 유다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또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곧 제자들이 자기를 다 버릴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할 것도 다 알고 계셨습니다. 또 32절에 있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지만, 사흘 뒤에 다시 살아나실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먼저 갈릴리로 가셔서 그곳에서 제자들을 만날 것임도 알고 계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과거의 일 뿐만 아니라 현재의 일, 미래의 일까지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하려고 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성경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도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마귀의 시험이 얼마나 강하고 무서운지도 몰랐습니다. 자기 자신들이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넘어지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이길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내 실력을 믿고 큰 소리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닫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힘을 의지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의지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실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내 힘을 의지하지 마십시다. 주님의 손을 붙들고 주님을 의지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제자들은 자만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잠16:18의 말씀입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교만이 앞서갑니다. 뒤에는 반드시 패망이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넘어졌습니다. 왜 넘어졌습니까? 살펴보면 우리의 마음 속에 거만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교만했습니다. 그래서 넘어지고 만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속에서 제자들이 특별히 베드로의 교만했던 모습을 세 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조차도 부인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부인했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그러자 베드로는 또 예수님의 말씀을 부인했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틀리고 자기가 옳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관한한 베드로는 예수님보다도 더 잘 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교만이 어디 있습니까?
둘째로, 베드로는 자기가 다른 제자들보다도 더 월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 예수님을 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신앙적인 면에서 다른 제자들과 다릅니다. 나는 절대로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그런 뜻이 아니겠습니까?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 남을 깎아 내리는 발상은 너무나 잘못된 생각입니다.
셋째로, 제자들은 자신들의 힘을 너무 과신했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모든 제자들도 그와 같이 말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마음대로 죽을 수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들은 다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차라리 그들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들의 부족함을 솔직히 시인하면서, "주님,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겸손한 자를 들어 쓰십니다.
에이브라함 링컨이 미국의 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그는 대통령에 취임하기 위해서 자기가 20년 동안이나 살았던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만 해도 미국은 노예 문제로 인해서 위기적인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남쪽과 북쪽이 갈라지느냐? 그렇지 않으면 한 나라로 남아있느냐?"
이 정도로 심각할 때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링컨을 전송하기 위해서 기차역에 몰려왔습니다. 그 때 링컨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나라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조지 워싱턴의 두 어깨 위에 놓인 짐보다도 어쩌면 제 어깨 위에는 더 무거운 짐이 놓여있습니다. 저는 언제 스프링필드로 돌아올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다시는 돌아올 수도 없다는 심정으로 저는 지금 이곳을 떠나갑니다. 제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옛날 워싱턴을 도우셨던 하나님의 손길이 저와 함께 해 주시기만 하신다면, 저는 실패 없이 이 시대적인 사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모두 이 일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링컨은 겸손했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그리해서 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노예들을 모두 해방했습니다. 그 결과 링컨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손꼽히게 된 것입니다.
노예 해방과 관련해서 링컨 못지 않게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여성이 한 사람 있습니다. "Uncle Tom's Cabin(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이라는 책을 써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스토우부인입니다. 그는 글로써 노예해방 운동의 불씨를 모든 사람들에게 당기게 했습니다.
한 번은 링컨 대통령과 스토우부인이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링컨 대통령은 스토우부인을 보는 순간에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링컨 대통령은 "Uncle Tom's Cabin"이라는 책을 쓴 스토우부인이 남성처럼 우락부락하게 생기고, 여장부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보니까 너무나 가냘프게 보였습니다. 바람이라도 한 번 세차게 불면 날아갈 버릴 듯한 나약한 모습의 여성이었습니다. 몸도 왜소했습니다. 그래서 링컨 대통령은 자기의 솔직한 심경을 스토우부인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Uncle Tom's Cabin」을 쓰신 분이 이렇게 연약한 여성인 줄 몰랐습니다."
그 때 스토우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책은 제가 쓴 것이 아닙니다. 노예해방을 원하시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입니다. 저는 그저 잠시 그 분의 대필자가 되어드렸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하려고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려고 하지 마십시다. 예수님을 언제나 앞에 모시면서 예수님이 나를 통해서 역사하시도록 하십시다. 그래야 무슨 일이든지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제자들은 담대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사람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큰 무리가 몽치와 검을 들고서 예수님을 붙잡기 위해 나왔을 때, 그들은 두려워서 모두 달아났습니다. 죽음을 무서워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생사화복을 홀로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 옛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너의 독자 이삭을 내게 번제로 바쳐라."
아브라함은 기꺼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히11:19에서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 지라."
아브라함은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릴지라도 얼마든지 하나님은 이삭을 다시 살리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기꺼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사실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여러 번 죽었던 사람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죽었던 딸을 살리셨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죽었던 아들도 살리셨습니다. 죽은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도 다시 살리셨습니다. 제자들은 그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믿음이 부족해서 죽음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나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향해서 담대히 걸어가셨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32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예수님은 사망의 권세를 깨치시고 자신이 다시 사실 것임을 확신하셨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담대함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절로 담대한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주후 390년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황제 이름이 데호도시우스였습니다. 데호도시우스 황제가 잠시 데살로니가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 때 데살로니가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로마의 통치를 반대하고서 독립을 얻겠다는 것입니다.
폭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데호도시우스 황제의 장군 가운데 한 사람이 성난 폭도들에 의해서 살해를 당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데호도시우스 황제는 군인들에게 보복명령을 내렸습니다. 로마의 군인들이 데살로니가 시민 수천명을 무참히 학살했습니다. 그래서 폭동은 진압이 되었습니다.
그 뒤에 데호도시우스 황제는 밀라노로 돌아왔습니다. 주일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 위해서 성전에 왔습니다. 당시 밀라노의 주교였던 암브로시우스는 성전 문을 막고 못들어가게 했습니다.
"못들어갑니다."
황제가 물었습니다.
"왜 못들어갑니까?"
암브로시우스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황제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무참한 시민을 학살하고 나서 감히 무슨 염치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만나려고 하십니까? 못들어갑니다."
그 때 데호도시우스 황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윗 왕도 죄인이었잖소?"
그 때 암브로시우스는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감히 황제가 다윗 왕의 흉내를 내려고 하십니까? 그렇다면 황제께서도 다윗 왕처럼 회개를 하셔야지요. 황제는 다윗 왕처럼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에 올라갈 수 없습니다."
결국 데호도시우스 황제는 성전에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자기 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암브로시우스의 말을 달게 여기고, 8개월 동안이나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 성탄절을 기해서 비로소 그는 교회의 공식적인 사면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그는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황제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담대함을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주시기를 바랍니다.
왜 제자들이 실패했습니까? 그들은 무지했습니다. 교만했습니다. 담대하지 못했습니다. 결국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떠나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결코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말씀대로 다시 사신 후에 먼저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다시금 일으켜 주셨습니다.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바뀌어졌습니다. 자기 자신들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겸손해 졌습니다. 자기 힘을 의지하지 않고,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예수님만 의지하고, 예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자기들도 이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담대했습니다. 수많은 핍박이 있었지만 그들은 더 이상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 바쳐 순교하는 삶이 되었습니다. 실패가 바뀌어서 성공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믿음을 저버리고 예수님을 부인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찾아와 주십니다. 우리를 일으켜 주십니다. 우리를 다시금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너를 의지하지 말아라. 이제는 나의 손을 붙들고 나만 바라보며 나만 의지해라."
더 이상 우리의 연약한 모습과 힘을 의지하지 말고, 예수님의 손을 붙들고 예수님만 의지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손을 붙들고 걸어가는 우리들의 발걸음에 예수님이 주시는 축복과 승리가 언제나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무엇을 기억하고 있나
마 26:31-40 / 정필도목사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항상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속히 잊어버려야 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거꾸로 기억해야 하는 것들은 곧잘 잊어버리고, 속히 잊어버려야 하는 것들은 기억속에서 지우지 못하여 평생 불행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잊지 말고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은?
1.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되 정확히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단의 미혹과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창세기를 보면, 어느 날 하와가 혼자 있을 때에, 뱀이 하와에게 찾아와 “하나님께서 정말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더냐?”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만지지 말라고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눈치챈 사단인 뱀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만지작거리며 적극적으로 하와를 유혹했습니다. “봐라, 만져도 죽지 안잖아. 네가 먹어서 눈이 밝아지고 지혜가 생겨서 하나님처럼 될까봐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거야.”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하와가 사단의 말을 듣고 그 실과를 바라보니 예전과 달라보였습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보였습니다. 그후 그것을 자기도 먹고 아담에게도 주어 먹게 했습니다. 그 결과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죄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불행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알기는 알아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마귀가 찾아와서 거짓말을 하여 유혹에 넘어가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고 멸망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호 4:6 ).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잊어버리면 자연히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고 결국 사신우상을 섬기다가 망하게 됩니다.
욥기 8:13~15을 보면 『왕골이 진펄이 아니고 나겠으며 갈대가 물 없이 자라겠느냐 이런 것은 푸르러도 아직 벨 때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찌기 마르느니라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 같고 사곡한 자의 소망은 없어지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는 갈대가 말라서 죽어버리는 것처럼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결국은 망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명기 6:6~9에서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항상 말씀을 기억하고 살면 복을 받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기억하게 됩니다.
둘째로, 지혜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묵상하면서 살면 하나님께서 뛰어난 지혜를 주셔서 어려운 일도 쉽게 되고 막힌 길도 열리고 남이 못하는 것도 하게 됩니다.
셋째로, 만사형통하게 됩니다.
잠언 3:1~2을 보면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2.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해야 합니다.
신명기 7:18~19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을 두려워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와 온 애굽에 행하신 것을 잘 기억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내실 때에 네가 목도한 큰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강한 손과 편 팔을 기억하라 그와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두려워하는 모든 민족에게 행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거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와 어려움을 당했을 때 수렁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 기억할수록 믿음이 더 생기고 용기가 생깁니다. 뿐만 아니라 어려움을 당해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어 믿음으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시 103:2~5).
3. 하나님이 계심을 기억해야 됩니다.
신명기 28:20을 보면 『네가 악을 행하여 그를 잊으므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여호와께서 저주와 공구와 견책을 내리사 망하여 속히 파멸케 하실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저주를 받게 됩니다.
4. 하나님 찬송하기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욥기 36:24을 보면 『너는 하나님의 하신 일 찬송하기를 잊지 말지니라 인생이 그 일을 노래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찬송가의 가사를 보면,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와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감사하여 찬양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성도들도 늘 찬양을 생활화 하시기 바랍니다.
5.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3:2을 보면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했습니다.
항상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손님 대접을 안 하다 보면 자연히 손님접대하는 일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찾아오시는 주의 종들을 절대로 그냥 보내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그 분이 잘 데가 없으면 주무시게 하고, 먹을 것이 없으면 드시게 하고, 몸이 불편하거나 아프시면 병원에 모셔가고, 돌아가실 때에는 단 돈 얼마라도 좋으니 꼭 여비를 드리라고 당부합니다.
6.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3:16을 보면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많이 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항상 나누어주는 삶을 잊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7. 사람들로부터 받은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분들을 항상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회가 있으면 보답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은혜를 받으며 사는데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언제나 나에게 은혜 베푸신 분들에게 전화로라도 감사하고 작은 것이라도 선물을 보내고 그렇게 받은 은혜를 잊지 말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억하지 말고 잊어야 할 것은?
1. 회개한 과거의 죄들은 잊어버려야 합니다.
과거에 내가 범한 죄를 회개한 다음에는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8:12을 보면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한번 용서하시면 그 과거에 범한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다른 사람들이 과거에 범했던 죄도 다 잊어주는 것이 사랑인 줄 믿습니다. 과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현재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미래를 바라보고 현재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과거를 보지 아니하시고 현재를 보시기 때문입니다(겔 18:21~ 22).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두 아들의 비유’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밭에 가서 일을 하라고 하자 얼른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에 그 자리에서 싫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곧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가서 일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아버지를 기쁘시게 했습니까? 결과적으로 일을 한 작은 아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말씀했습니다.
과거를 속히 잊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쥱 거룩하게 사는 데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죄를 잊어버리지 않으면 거룩하게 사는데 방해가 됩니다.
과거의 죄를 잊지 않게 되면 과거의 죄에 매여서 달려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낙심하기 쉽고 자포자기하게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죄를 자꾸만 되풀이해서 회개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했다면 용서받았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회개해놓고 계속해서 회개를 되풀이 하면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불신의 태도입니다.
자기 마음 속에 거리낌이 있고 자유함이 없어도 하나님 앞에 회개했으면 용서받았으므로 속히 잊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계속해서 기억한다면 오히려 거룩하게 사는데 방해가 됩니다. 우리를 낙심하게 만들고, 자포자기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기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믿음으로 잊으시기 바랍니다.
2. 상처받은 일을 곧 잊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다 보면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합세하여 자신을 애굽의 노예로 팔았습니다.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겠습니까. 어떻게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다 잊어버렸습니다. 한번도 그것으로 인해 고민한다거나 앙심을 품고 형들에게 따진 적이 없습니다. 완전히 없었던 일로 잊어버렸습니다.
용서하고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을 건강하게 만듭니다. 무조건 용서하는 것이 자신에게 복이 됩니다. 용서하고 잊어버리면 마음의 천국이 이루어지지만 자기에게 못된 짓을 한 사람이나 상처 준 사람을 기억하고 살면 평생 화가 나고 분통이 터지고 보복하고 싶어지며 얼마나 마음이 괴로운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용서해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
3. 내가 행한 모든 선행을 잊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을 보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치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씀하시면서 구제할 때 나팔을 불면서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팔을 불면 세상에서 영광을 받고 칭찬을 받고 포상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이미 상을 다 받아버렸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가면 아무 것도 받을 상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선행을 다 기억하지 말고 잊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이 교만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도 좋지만 교만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교만해지면 공치사하게 되며 어디를 가나 대접을 받으려고 하고 어른 행세나하려 하고, 세상에서 영광을 받으려고 하다가 뜻대로 안 되면 원망불평이 많아지게 됩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양과 염소의 비유’를 드시면서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한 의인들의 대답이 정말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평소에 자신이 그렇게 살았으면서도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는 자신들이 행한 좋은 일을 하나도 기억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왼편에 있는 자들은 이와 대조적입니다. 주님께서 이런 자들을 향하여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라고 했습니다.
늘 좋은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은 자신의 선행을 다 잊어버리고 사는데, 정작 지옥에 갈 사람들은 언젠가 한두 번쯤 했을지도 모를 좋은 일을 평생 기억하고 살다보니 “우리가 언제 좋은 일을 안 했느냐?”고 반문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한 일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지만 그것을 밤낮 계산하고 기억하며 살지는 않습니까? 나의 시간과 나의 물질과 정성을 드려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고 한다면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다윗은 『이 모든 것이 다 주께로부터 왔사오니 주께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대상 29:14).
이 얼마나 위대한 신앙고백입니까!
여러분도 과거에 남에게 베푼 좋은 일도 기억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해지고 마귀가 역사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오직 내 자신이 드릴 수 있는 시간과 물질과 건강과 재능을 주신 것을 늘 감사하고, 아낌없이 드리면서도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와 같은 예수님
마 26:31-46 / 최영기목사
어떤 사람의 참된 인격을 보려면 돈 문제가 개입되었을 때에 어떻게 대처하느냐를 보아서 알 수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평소에 친절하고 상냥하던 사람이 이권이 개입되거나 돈 문제가 개입되면 태도가 돌변하는 것을 봅니다. 돈 문제뿐만이 아니라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에 참된 인격이 들어 납니다. 이러한 인간의 인격에 비하여 볼 때에 예수님은 진정으로 아름다운 성품을 가진 분이라고 느끼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배신당하여 십자가에 처형당한다는 절망 상황하에서 너무나도 아름답고 따뜻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제자들이 모두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칠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이때에 베드로는 자신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을 합니다. 사실 베드로만이 아니고 모든 제자들이 다 그렇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Ⅰ. 우리는 자신의 약함을 잘 모른다
제자들이 이렇게 장담할 때에는 그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를 알 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고하셨던 대로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1. 자신하면 안 된다
우리는 자신의 도덕성이나 의지를 과대 평가하는 수가 있습니다. 상황이 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도덕성에 너무 자신을 두지 말아야합니다.
이성 관계도 그렇습니다. 남성과 여성은 자꾸 시간을 보내면 가까워지게 되어있습니다. 나중에 정신이 들면 어떻게 저런 사람에게 빠질 수 있었을까 싶은 사람도 자꾸 만나면 자신도 모르게 빠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목자들은 목장 식구 중에서 여성들을 향한 사역은 목녀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돈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돈이 없을 때에는 사업을 해서 돈을 벌면 주를 위해서 쓰겠다고 시작합니다. 그러나 돈 버는 재미가 붙고 돈을 많이 벌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새에 돈이 노예가 됩니다. 사역도, 믿음까지도 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욕구만 갖고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돈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는 준비와 훈련이 필요합니다. 권력도 그렇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고지를 점령하자는 유명한 설교를 하셨습니다. 사회의 고지를 점령하여서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뇌물이 많이 들어오는 직책을 맡아서 뇌물을 받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염려가 됩니다. 과연 우리가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노력가운데에 순수성을 지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고지를 점령한 후에도 진정으로 가진 권력을 주와 이웃을 위해 쓸 수 있는 순수성이 남아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도 욕구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평소에 권력에 초연할 수 있는 훈련과 영성을 키워야합니다.
2. 약함을 의식할 때에 강할 수 있다
자신의 약함을 의식하는 사람은 오히려 실수의 가능성이 줄어듭니다. 자신이 약한 것을 알기 때문에 주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의지할 때에 우리는 약하지만 우리에게서 강한 힘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능력은 약한데서 완전해진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후 12:9).
자신이 자신의 도덕성에 자신감을 갖고 있는지 아닌지를 평가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실수하고 죄를 지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를 보아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를 매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도덕성에 관하여 근거없는 자신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약함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실족할 가능성이 큰지를 압니다. 그래서 남의 죄를 매도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비교적 안전하다고 느낍니다. 목회자가 성적인 죄나 돈이나 권력으로 넘어졌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에 저는 한번도 “목사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는 생각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겁만 덜컥 납니다. 저도 여건만 주어지면 똑같은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기 때문입니다.
Ⅱ. 주님은 우리를 아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자신을 버릴 것을 아셨습니다. 특별히 장담하는 베드로가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자기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예고를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1. 주님은 우리의 약점을 고쳐주신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약점을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명을 위하여 불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약점이 사명 완수에 지장이 되지 아니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약점을 없애주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러한 약점을 의식하고 조심하고 하나님에게 의지하도록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약점 대신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 훈련의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역경을 통하여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역경을 통하여 우리를 훈련시키더라도 불평하기 말고 잘 견뎌야합니다. 사실 우리가 역경을 통하여 훈련을 받을 때에 우리는 왜 그런 훈련이 필요한지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또 필요를 본다해도 훈련이 지나친다고 느끼거나 필요 이상으로 지속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신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가장 잘 아시는 주님이 우리를 아름다운 일군으로 만들어가고 계시다고 믿는 수밖에 없습니다.
2. 주님은 우리의 강점을 사용하신다
주님은 또한 우리 자신의 강점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필요한 곳에 꽂아놓아 사용하십니다. 변덕은 있었지만 베드로의 강점을 보시고 교회를 세우는 데에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정리하여 체계화시키는 데에는 교회를 핍박하는 바울을 불러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쓰임 받기를 소원하고 하나님에게 절대 순종하기를 결심한 사람은 현재 처한 곳이 우리를 자신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 꽂아놓아 주신 곳으로 알아야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자리를 지키지 못하여 고생을 합니다. 사실 목회자 중에는 평신도로 있었으면 큰 일을 할 분이 자리를 지키지 않고 목회자가 되어서 본인도 고생하고 교인들도 고생시키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약점과 강점을 아시는 주님이 지정해주신 자리를 지키지 못한 탓입니다.
우리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자신이 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을 맡기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자신이 감당 못할 것 같은 사역을 맡아도 주님의 부름이라면 순종하여야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를 아시고 또 맡긴 일을 잘 감당하도록 옆에서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리의 능력을 아시는 주님이 감당 못할 것을 맡길 리가 없다고 믿어야합니다.
Ⅲ. 주님은 우리 아픔을 이해하신다
올리브 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인간적인 체취를 무럭무럭 맡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기도하시면서 가장 가까운 측근 3명에게 자신이 기도할 때에 자신을 지켜보아 달라고 하였습니다. 또 하실 수 있으면 이 잔을 자신에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잔이라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에게 같이 기도해 달라고 청하시는 주님, 잔이 지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던 주님을 보면서 우리는 친근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도 우리와 같은 예수님이라고 잡았습니다.
1. 큰 아픔을 겪으셨다
우리 주위에는 역경 가운데에 자라서 아무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가 아무리 인생의 쓴맛을 보고 있다할지라도 예수님이 겪으신 것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처녀 몸에서 탄생하였기 때문에 주위에서 사생아일지 모른다는 눈총을 받고 자랐습니다. 자란 마을이 조그마한 촌이라 경멸을 당했습니다. 열두 사도 중의 하나인 나다나엘도 친구 빌립이 예수님을 만난 후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하니까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겠느냐?"며 회를 표명하였습니다. 사역할 때에는 계속하여서 이단 논쟁에 말려들었습니다. 그러다가 가장 가까운 측근에 의하여 배신당하여 이단으로 몰려서 처형당했습니다. 그때에 3년 동안 공들여 키웠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처형당하자마자 다 뿔뿔이 흩어졌고 보일 수 있는 사역의 열매는 하나도 남지 않게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거기에다가 최후로는 노예나 처형할 때에 사용하는 십자가의 형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통의 최 절정은 하나님에게 버림받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고난이 닥쳐와도 하나님께서 같이 하시는 동안은 견딜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최후로 하나님과 분리되는 아픔을 맛보셨습니다.
예수님이 잔이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을 때에는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셨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태연 자약하게 죽음을 맞았던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특히 핍박받던 초대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에 달리고 목이 달아나고 사자에게 찢기고 화형을 당하는 것을 기쁘게 감수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이 지나가기를 원하셨던 것은 단순히 죽음이 두려워서였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죄가 되셨다고 했습니다(고후 5:21). 이것은 우리의 사고와 이해와 경험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는 자신이 죄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지옥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단절되었습니다(마27:46).
2. 이해하고 도울 수 있으시다
우리가 아무리 고난을 겪었다해도 예수님의 고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고난도 다 이해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받은 시험을 다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잔이 지나가기를 기도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좇았던 것처럼 죄는 짓지 않으셨습니다(히 4:15).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움을 겪을 때에 혼자 고민하거나 이웃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말고 주님에게 나와서 도움을 청해야할 것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우리를 도우실 수 있고 도우실 것입니다(히4:16).
Ⅳ. 주님은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
예수님은 기도할 때에 제자들이 지켜보아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제자들은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에 이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 인간 가운데에도 이웃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사는 사람들이 많은데 말입니다. 그런데 남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보통 남에게 관심도 없고 남을 사랑할 줄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이웃을 필요로 했던 것은 약한 증거가 아니라 사랑의 증거입니다.
1. 사랑하기 때문에 필요로 하신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의 대상이 자기를 사랑해주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사랑의 속성입니다. 생명의 삶 첫 시간에 다루었습니다만 오늘 본문 사건이 있기 며칠 전에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예수님에게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을 하나 꼽으라고 도전을 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신 6:5을 뽑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계명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누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사랑을 받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 놀라운 일 아닙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에게도 우리가 필요한 것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합니까? 주님께서 답을 주셨습니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요 14:21). 하나님께서는 계명을 우리를 위하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행복할지를 아시기 때문에 해야할 것, 하지 말 것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좇을 때에 우리는 행복해집니다. 우리가 행복할 때에 하나님께서도 행복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드리기를 원하면 우리가 행복해야하고 우리가 행복하려면 하나님의 계명을 좇아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2. 육신은 제어하여야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필요로 하셨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의 필요를 채워드리기 못하였습니다. 깨어 기도하라고 했는데 피곤하여서 잠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시다가 와서 다시 깨어도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사람들이 몰려오려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한탄을 하시며 이제 자고 싶으면 실컷 자라고 말씀을 하시게 만들었습니다.
왜 예수님이 필요를 못 채워드렸습니까?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육신이 좇아가지를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믿음이 자라지 아니하고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지를 못하는 사람들은 육신을 제어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을 종종 봅니다.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마시고 싶은 것 다 마시고, 빨고 싶은 것 다 빨고, 자고 싶은 것 다 자고 우리는 주님의 필요를 채워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이 필요를 채워드리기 위하여서는 육신을 제어하여야합니다. 세상에서 주는 운동 경기 메달을 따려해도 육신을 제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의 사역자가 되어서 주님의 소원을 풀어드리고 필요를 채워드리기 위하여서는 육신을 제어하여야합니다(고전 9:25, 27).
성도님들이 주님의 필요를 채워드리고 주님의 소원을 풀어드리는 삶을 살기를 원하며 육신을 제어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졸려도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서 말씀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주일 아침에 아무리 피곤해도 주일 예배에 시간 맞추어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금요일 저녁에 아무리 침대에 누워 쉬고 싶어도 목장 모임에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육신의 요구에 'No!' 하는 습관을 들일 때에 육신이 마침내 영에 굴복하여 주님의 필요를 채워드리는 삶이 가능해질 것입니다.
아버지의 원대로
마 26:36-46 / 이동휘목사
1. B.C.620년경, 예레미야는 나라(유다) 멸망 직전, 약관 20세에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렘1:5-6) 그는 결혼도 금지 당한 채로 자기 나라(남왕국 유다)가 멸망할 것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야만 했습니다. 그나마 백성들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오직 적군 바벨론에 항복해야만 한다는 예언, 참으로 백성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만 했습니다. 나라 민족의 파멸이라는 하나님의 심판과 한 줄기 희망도 가지지 못하게 하는 ‘항복하라’는 그의 메시지는 처음부터 강하고 거센 반발에 부딪쳤고 조롱과 비난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고향 사람들까지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결국 궁중 감옥에, 시위대 뜰에 있는 구덩이에 갇히기를 거듭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왕을 비롯하여 여러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질그릇(오지병)을 깨뜨리며 “사람이 한번 깨뜨리면 다시 주워 붙일 수 없는 토기장이의 이 질그릇처럼 내가 이 백성과 이 성을 박살내겠다.
시체가 너무 많아 묻을 곳이 없으므로 이 곳 도벳 골짜기에 갖다 쌓을 것이다.” 라고 예언함으로 유다의 파멸이 돌이킬 수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렘19장) 이를 듣고 있던 성전 질서 감독관 바스훌이 예레미야를 잡아 폭행하고 쇠고랑을 채워 감금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선지자로 부름받았을 때 두려운 나머지 이렇게 사양합니다. “(렘1:6)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렘1:7-8)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명하시든지 가감없이 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박해와 핍박은 점점 가중되고 견디기 힘든 온갖 조롱과 멸시를 홀로 당해야만 했습니다. 쏟아지는 비난과 조롱, 날로 거세지는 반발과 핍박의 와중에서 다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리라고 결심도 해보았습니다. 핍박을 받는 상황에서 선지자가 가장 손쉽게 취할 수 있는 일은 그 일을 포기하고 침묵을 지키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침묵하고 있자니 하나님의 말씀이 속에 타오르는 불길 같아서 뼛속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음을 토로합니다. 이를 견디지 못한 예레미야는 자신의 억울함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렘20:14-18) 내가 태어난 날이 저주스럽구나. 내 어머니가 나를 낳던 그 날이 복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야, 아들! 자네에게 아들이 생겼어!' 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여 아버지를 즐겁게 하던 자가 저주스럽구나. 그 사람이 여호와께서 사정없이 무너뜨린 성처럼 되었더라면, 그가 아침에는 부르짖는 소리를, 낮에는 전쟁의 함성을 들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어째서 그가 나를 태에서 죽이지 않았는가? 내가 어머니 뱃속에서 죽었더라면, 그것이 나의 무덤이 되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내가 무엇 때문에 태에서 나와 이런 고생과 슬픔을 겪으며 수치 가운데서 나날을 보내는가?
한 마디로 자신의 삶을 통째로 저주하는 것입니다. 전심전력을 다해 하나님의 일을 행했는데 너무도 힘들고 괴로워서 눈물을 흘리면서 탄식하는 것입니다. 나라 민족의 구원을 위해 뜨거운 눈물로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을 전했는데 그들의 회개는커녕 돌아오는 것은 핍박과 조롱, 비난뿐이어서 통탄해 하는 것입니다. 왜 자기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이러한 치욕 속에서 고통과 슬픔의 나날을 보내게 하시느냐고 하나님께 따지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부모를 저주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저주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렘1:5)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을 부정하는 것으로 출생하기 전에 그를 부르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2. 예수님도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셨습니다. ‘겟세마네’는 예루살렘 성 동쪽 벽에서 약 1km 정도 떨어진 감람산 기슭에 있는 동산입니다.
이곳은 조용하고 한적한 곳으로서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과 함께 자주 들른 곳이었습니다.(눅 22:39; 요 18:1-2) 예수께서는 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 죽음을 몇 시간 앞두시고 최후를 준비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막14:33)과 함께 가셨습니다. 거기서 예수께서는 “지금 내 마음이 너무나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하는 동안에 너희는 여기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 고 말씀하시고 그곳에서 돌을 던져 닿을 만한 거리에 가셔서 땅에 엎드려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신다면 이 고난의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그러자 한 천사가 하늘에서 나타나 예수님께 힘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괴로워 몸부림치시며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자 땀이 핏방울같이 되어 땅에 떨어졌습니다.
(눅 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그리고 잠시 제자들에게 가보니 함께 기도하리라고 생각했던 바와는 달리, 잠에 떨어져 곤히 자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너희가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있을 수 없느냐? 시험에 들지 않도록 정신 차려 기도하라. 마음은 간절하지만 몸이 약하구나.” 라고 하시고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이 고난의 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시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면 나는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제자들을 보니 여전히 곤하게 잠들어 있었습니다. 눈이 피곤하여 도저히 눈이 떠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번에는 그들을 자도록 두시고, 세 번째로 가셔서 똑같은 말씀으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도하셨습니다.
3. 예수께서는 그 본체가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실로 고난의 쓴 잔, 십자가 죽음을 앞두시고 “심히 고민하사 슬퍼하셨습니다.”(막 14:33) 이 말은 ‘극심한 불안과 근심하시며 마음에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의 깊은 슬픔에 잠기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로 예수께서 지금과 같이 곤경에 처한 적은 없었습니다. 바야흐로 예수의 십자가 고난의 고통이 실제적으로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께 있어서 죽음의 육체적 고통은 물론이지만, 그것보다도 한층 심한 고통이 되는 것은, 인류의 죄를 지고 스스로 죄인이 되어(고후5:21), 하나님으로부터 저주(詛呪)를 받은 바 되는 것이었습니다.
(갈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 자체가, 인류 최악의 고통스러운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앞두시고 실로 ‘심히 고민’이 되셨던 것입니다.
(빌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게다가 십자가 죽음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이기 때문에, 인간이 당해야 할 저주를 스스로 자취한 것에 대한 마음에 심각한 갈등으로 더욱 더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실로 인간이 되신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노여움의 잔을 마셔야 하는 인간 예수의 고통을 철두철미 체험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고통과 슬픔이 너무 심해서 거의 죽을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의 이러한 ‘고민과 고통’에 본질적으로 참여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인간적인 연민(憐憫)과 격려로써 그 제자들이 자기곁에 있어 주기를 원하셔서,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라고 당부하셨던 것입니다. 그토록 사랑하셨던 제자들이었지만, 십자가 죽음을 앞두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앞두시고 드린 기도는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였습니다. 히브리서5:6-10을 보겠습니다.
(히5:6-10)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성전)에 들어가 제사(예배)을 드릴 때, 양이나 염소 등의 제물을 죽여서 번제단(燔祭壇)에 올려 불에 태웠습니다. 이렇게 제사를 드리는 이유는 지은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입니다. 죄를 범한 사람이 희생될 제물을 가지고 성막 번제단 앞에 가서 제물 위에 손을 얹고 지은 죄를 고백합니다. 이러한 행위로 자신이 지은 죄가 제물에게 전가(轉嫁)됩니다. 한 마디로 사람이 지은 죄를 동물이 뒤집어 쓰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뒤집어 쓴 동물은 죽어야만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동물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동물을 ‘속죄의 제물’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죄함 받기 위해 대제사장이 희생된 동물의 피를 가지고 1년에 한 차례 휘장을 열고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의 제사를 드리게 됩니다. 그래야 모든 백성의 죄가 사함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제사를 매년 해야만 했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이 증거한대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으로 오셨기 때문에, 모든 인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어린양으로 희생되신 것입니다. 이를 히브리서9:12에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히 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이스라엘의 번성을 막기 위해 온갖 압박을 가하고, 심지어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애굽 왕 바로의 압제 아래 이스라엘은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고통과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하기 위해 지도자 모세를 세워 바로에게 보냈습니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모세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바로에게 가서 “내 백성을 내보내라. 그리하여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라”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강퍅한 바로가 그냥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낼 리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10가지 재앙이 하나씩 하나씩, 바로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할 때마다 애굽 전역에 걸쳐 내리게 되었습니다. 바로가 결정적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내보내게 된 재앙이, 마지막 재앙인 장자 죽음의 재앙이었습니다. 장자 죽음의 재앙은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묻어있지 아니한 집에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처음 난 것, 즉 초태생은 모조리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재앙으로 어린양의 피를 볼 수 없었던 왕궁의 바로 왕의 장자를 비롯해 모든 애굽의 장자들이 죽임을 당하자, 강퍅한 바로는 그만 무릎을 꿇고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게 되었습니다. 장자 죽음의 재앙은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 전역에 내린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누구든지 이 재앙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이 재앙의 심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어린양을 잡아 그 피는 문설주에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묻어 있는 것을 볼 때에, 죽음의 사자가 그 집을 그냥 넘어갔습니다. 이를 죽음의 사자가 어린양의 피를 보고 넘어갔다 해서, 넘을 유(逾), 넘을 월(越)자를 써서 유월절(逾越節)이라고 하며, 이스라엘 백성은 죽음의 재앙에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여 이 절기를 반드시 지켜야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누구든지 죽음의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어린양의 희생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어린양, 유월절 어린양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요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고전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없이는 그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여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보이지 아니하면 죽음에서 구원받을 수 없듯이, 이 시대에 어린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희생되시어 피를 흘리시고 그 몸이 찢기셨다는 것을 믿지 아니하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게 된 것은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입니다.
(벧전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이처럼 죽음의 심판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피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밖에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죄를 걸머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인류의 죄 사함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같은 사실을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죄사함을 받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히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 예루살렘 성전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져 둘로 나뉘어졌습니다.
(막 15: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인류의 죄 사함을 위해 피흘려 희생하므로 휘장을 열어, 누구든지 예수 믿는 사람은 언제라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셨다는 뜻입니다. 휘장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그곳을 ‘지성소’(至聖所)라고 합니다. 그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놓여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 그 ‘지성소’에 희생된 피를 가지고 들어가 ‘언약궤’ 위에 붓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피를 보시고 속죄의 제물을 합당하게 여기시면, 그 ‘지성소’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게 됩니다. 희생의 피가 부어지는 ‘언약궤’ 위를 가리켜 ‘시은소’(施恩所)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그 피를 보시고 언약하신대로 죄 사함의 은혜를 베푸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것은, 온 인류를 위해 대제사장으로서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어린양의 피를 ‘언약궤’ 위, ‘시은소’에 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때 휘장에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로 나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어린양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보시고, 온 인류의 죄를 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하여 속죄의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예수께서 열어놓은 휘장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가 휘장으로 들어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에,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가 십자가에 찢겨 희생되심으로 그 길을 열어놓으셨기 때문에,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고 했습니다.
(히 9:3)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히 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신다면 이 고난의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라고 기도하신 것은, 온 인류의 죄사함을 위한 대제사장으로 기도하신 것입니다. 온 인류의 죄 사함을 위한 ‘하나님의 어린양’,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고난받으시고 희생되셔야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6:38-40)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예수님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고난 받으시고 속죄의 제물로 희생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를 목전에 두시고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신다면 이 고난의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기도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눅 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에는 예수께서 겪으신 수난을 각오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데는 내적으로는 자기 부인과 외적으로는 역경 가운데서의 적극적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자기의 이기적 욕망과 생각과 주장, 그리고 부패한 옛 자아, 옛 사람을 철두철미 십자가에 죽이는 생활을 말합니다. 십자가 처형은 인류 역사상 가장 고통스러운 사형방법이었습니다. ‘죽음의 짐’이요, ‘죽음의 상징’인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신앙생활에 어떠한 역경과 고통이 따른다 해도,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이 가장 가치 있는 일로 받아들여 끝까지 지고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가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라 사는 것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믿음의 근원이시며 우리 믿음을 완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위하여 부끄러움과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으며 지금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히 12:2) 하나님 아버지의 원대로 사는 삶이 가장 가치있고 복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는 생활에 십자가가 앞에 놓여 있을지라도, 그 십자가를 지고 삶으로, 마침내 ‘하나님 오른편’, 축복의 오른편에 앉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정직한 감정 위에 내리는 은총
마 26:36-46 / 류공석목사
여러 해 전에 미국의 한 경제 잡지에서 ‘돈에 대해서 당신은 얼마나 정직합니까?’라는 제목으로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설문 중에 하나를 들어볼까요?
‘공중전화가 고장이 나서 동전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밤거리여서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 이 돈을 어떻게 하겠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59%는 주머니에 넣겠다고 했고, 20%는 돈은 자기가 가지되 전화국에 알려서 어느 공중전화가 고장이라고 말해 주겠다고 답했고, 20%만이 돈을 전화국에 돌려주겠다고 응답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 기도에 응답해주셨군요!”
어떠실 것 같습니까? 만약 여러분 자신의 정직성을 테스트한다면 몇 점이나 될까요? 이번엔 여러분들에게 조금 다른 질문을 해봅시다.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정직하십니까?
이것은 단순히 정직하게 죄를 고백하는 회개에 대해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생각, 의지, 감정에 대해서 정직한가 하는 질문입니다.
저는 교회를 보면서, 또 교인들을 보면서 가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수없이 설교와 교육이 이루어지는데 반해 정작 하나님께 대해서 정직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별로 없습니다. 그저 회개에 대해서만 정직을 말합니다.
그리고 교인들도 신앙에 어떤 의문이 들거나 이상한 생각이 들거나 믿어지지 않아도 아닌 척 합니다. 다 아는 척 합니다. 믿는 척 합니다. 그냥 믿어야 좋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힘들고 괴롭고 슬프고 아파도 괜찮은 척합니다. 꾹 참고 혼자 속으로 삭히고 맙니다. 그것이 인내하는 것이고, 그렇게 인내하는 것이 신앙적으로 성숙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도 아닌 척, 괜찮은 척합니다. 아니면 적당한 선에서 말하고 맙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정과 자세가 정직하지 못한 교인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것이 믿음이 좋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까요? 창세기 4장에 보면 가인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가인은 그 감정에 있어서 하나님께 정직하지 못했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동생인 아벨이 드린 제사는 받으셨는데, 가인이 드린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1:4에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고 했습니다. 이에 따르면 가인은 믿음없는 제사를 드렸고, 따라서 성의없는 제사를 드렸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그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 때의 가인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서운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잘못했어도 일단 거절 당하면 서운한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제사를 거절하신 하나님께 서운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그 서운한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겉으론 태연한 척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 속에 있는 서운함은 점점 분함으로 바뀌고 그 분함이 결국에는 동생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그래도 그 감정을 숨기고 털어놓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그 감정이 친동생을 죽이는데까지 가게 됩니다. 참으로 아쉬운 대목입니다.
만약에 가인이 그 서운한 감정을 하나님께 그대로 말하면서 정직했다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왜죠? 왜 제가 드리는 제사를 거절하신 거죠? 서운합니다. 저도 할만큼 했어요. 그런데 왜 안받으셨죠? 서운합니다.”라고 정직하게 고백했다면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차분하고 인자한 음성으로 그 이유를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럼 가인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 다시 정성껏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동생을 죽이는 비극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서운함,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어찌 서운함이 없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서운한 것이 있고, 부부나 친구관계에서도 서운한 것이 있습니다. 목회자에게도 서운한 것이 있고요, 교인들간에도 서운한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께 대해서도 서운할 때가 있습니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고 봉사도 열심히 했는데 정작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 사람들에게 오해받고, 상처입고, 혹은 자신이나 집안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어려움에 처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서운한 마음이 듭니다. 내가 잘 했든 못했든 그런 서운함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십니까?
아닌 척 합니까? 그 서운함을 가슴에만 두고 있습니까? 그러면서 ‘어떻게 하나님이 이러실 수 있나?’하면서 그 서운함을 더 키웁니까?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것이든 사람에게 대한 것이든 서운함은 늘 우리를 따라 다닙니다. 이 서운함을 정직하게 하나님을 향하여 표현해야지, 마음에만 두고 산다면, 그는 결국 그 서운함이 분노로, 시기와 질투로, 살인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때때로 하나님께 서운한 생각이 들면, 하나님께 그대로 들고 나가 아뢰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실 것입니다.
반면에 그 감정을 솔직하게 하나님께 표현하여 큰 은총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엘리야입니다. 지난 주에 우리가 함께 나누었던 열왕기상 19:1-10에 보면, 엘리야가 하나님께 그 감정을 정직하게 쏟아놓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서 18장에 보면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대결을 벌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신 중에 누가 참 신인지를 증명하는 영적 대결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엘리야가 승리했고, 그 승리로 인해 갈멜산에 있었던 바알 선지자들을 전부 잡아 죽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아합왕과 이세벨은 분해하면서 엘리야에게 사신을 보내어서 ‘내일 이 맘 때에 너를 잡아 죽일 것이라’고 알립니다. 이제 아합과 이세벨의 군대가 엘리야를 잡아 죽이기 위해 쫒아오는 형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망을 갑니다. 그러다가 광야로 들어가 어느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하나님께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하소연을 합니다.
“하나님, 이제 다 끝났습니다. 내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를 죽여주십시오.”
왜 이랬을까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갈멜산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바알의 선지자들을 쳐 죽인 그 기개 넘치는 엘리야가 왜 이토록 나약한 모습이 되었을까요?
그도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일해 왔는데,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대가는 자기를 죽이려는 아합의 군대였습니다. 이만큼 했으면 아합과 이세벨도 손들고 항복을 해야 하는데 오히려 더 악해지고 더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습니다.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순간 ‘내가 지금까지 한 것이 무엇인가? 내가 지금까지 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자신이 한 모든 일들이 모두 헛된 것 같은 허탈감이 찾아왔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사람이 이렇게 자기 목숨 하나 건지겠다고 도망다니는 신세가 한심하기도 하고, 살아있다는 것이 구차하게 여겨졌습니다. 영적인 탈진 현상이 엘리야에게 나타났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지난 주 설교를 기억하시면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엘리야는 그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대로 하나님께 내어놓습니다.
“하나님, 다 끝났어요. 지금까지 한 것 다 소용없어요. 내가 하나님께 순종해서 뭐가 달라졌어요. 달라지기는커녕 아합과 이세벨이 나를 죽이려고 합니다. 나는 이렇게 도망다니는 신세가 되었고요. 이제 다 끝났어요. 이제 그만 두세요. 그리고 내 목숨을 거두어 주세요. 아합에게 잡혀 죽느니 하나님의 손에 죽는게 차라리 나아요.”
어찌 들으면 하나님께 대드는 것 같고 불경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엘리야의 솔직한 마음이고 감정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런 엘리야에게 어떻게 대하셨다고요? 천사를 보내 로뎀나무 아래서 잠이 든 엘리야를 어루만지며 숯불에 구운 떡과 물을 준비해서 먹게 하십니다. 그렇게 40일 동안을 보살펴주면서 엘리야를 하나님의 산 호렙산으로 이끕니다. 그리고 호렙산에서 하나님은 엘리야를 만나시고 다시금 힘을 주셔서 당신의 일을 하게 만드십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엘리야의 그 정직한 감정 위에 하나님의 어루만지시고 치유하시고 힘주시는 은총이 임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지금 가인과 엘리야, 두 사람에 대해 보았는데, 이 둘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긍휼을 받고 안받고의 차이입니까? 그 보다는 정직의 차이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생각과 감정을 다 쏟아놓는 정직함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결과 엘리야는 다시금 회복되어 일어서는 은총을 받지만, 가인은 끝끝내 하나님과 동생을 원망하다가 자신의 동생을 죽이는 끔찍한 죄를 저지르고 맙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던 게세마네 현장으로 가봅시다.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저녁식사를 드신 예수님은 체포되기 전에 게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기도를 하십니다. 기도하신 이유는 예수님의 심정이 편치 않아서입니다.
37절에 보면 당시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나를 보여줍니다. “고민하고 슬퍼하사” 그리고 이어서 38절에는 세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심정이 너무나 괴로워 제자들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심정을 말하고 계십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기도하실 때도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쏟아놓으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것도 세 번씩이나 그 괴로운 심정을 하나님께 정직하게 쏟아놓습니다.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것이 바로 이것인데, 게세마네는 처음부터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앞두고 너무나 마음이 괴로우셨던 주님께서 그 솔직한 감정을 그대로 쏟아놓으신 곳이 바로 게세마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부분을 보고 좀 실망스러워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아들인데...’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야 연약하지만 그래도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아들답게 당당하고 용감하게 대처를 해야 하는데, 너무나 연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지요.
평소의 예수님답게, 믿음의 영웅답게 십자가의 고통이 아무리 극심한 고통이라고 해도 결코 물러서지 않고 쉽게 물리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는데, 그 어디에도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혹시 여러분들도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좀 실망스러우신가요?
우리가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은 인간이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고,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 전에 그분은 완전한 인간이셨습니다. 우리처럼 완전한 살과 뼈와 피로 이루어진 인간이셨습니다. 그리고 몸만 인간이셨던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가지는 모든 감정, 욕구, 의지, 생각, 한계를 다 가지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철저하게 인간이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통 앞에 두려워하고,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갖는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것을 느끼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의 연약한 인간으로서 그 모습 그대로, 그 감정 그대로 하나님께 쏟아놓으신 것이 바로 게세마네입니다.
저는 오히려 이렇게 철저하게 인간이셨던 이 모습 속에서 은혜를 받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써 당당하게 그 길을 가셨다면 그건 인간이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고통 없이 당한 것 밖에 않됩니다. 하나님이 무슨 육체의 고통을 느끼고 죽음의 고통을 맛봅니까? 그것은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고통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 죄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으로써 우리를 대신해서 달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죄값으로 달려 죽어야만 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으로써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십자가의 모습에서 하나님으로서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나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만 있습니다. 그러기에 십자가 위에 우리의 구원이 있는 겁니다.
그리고 저는 철저하게 연약한 인간의 감성을 가지신 예수님을 보면서 오히려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습니다. 너무나 인간적이셨기에 저는 예수님이 좋습니다. 예수님이 너무나 가깝게 느껴집니다.
만약 무슨 슈퍼맨처럼 당당하게 십자가 어깨에 턱하니 짊어지고 갔다면, “야, 십자가 줘봐. 뭐, 가볍네. 가자.” 뭐 이런 식으로 하셨다면 저는 예수님이 그렇게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을 겁니다.
나와 똑같은 감성을 가지신 예수님, 나와 똑같은 연약함을 가지신 예수님, 그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왭니까? 주님이 나를 이해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나와 똑같은 인간의 한계를 경험하고, 두려움과 아픔을 경험하시고, 연약함을 경험하셨기 때문에 나를 이해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파서 쓰러져 있을 때, 내가 두려워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을 때, 내가 결단하지 못하고 미적미적하고 있을 때, 내가 외로워서 힘들어 할 때, 내가 다 탈진되어 헉헉거릴 때, 예수님은 나를 보시면서 “너 이것 밖에 안되니? 이렇게 형편없니? 이렇게 약하니? 이 정도도 못 견디니?”하시면서 꾸짖는 분이 아니십니다.
나를 보시고 조금도 꾸짖지 아니 하시고 나를 잔잔한 미소로 바라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힘들지. 나도 알아. 나도 너와 똑같이 아파봤어. 나도 외로와서 마음이 아팠어. 나도 정말 괴로워 죽을 것 같았어. 괜찮아. 힘내. 내가 있잖아. 내가 너를 이해하잖아. 내가 너를 도와줄게. 괜찮아.”
이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는 것에 감사합시다. 거듭 고백하지만 주님이 계시기에 나는 존재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하나님 앞에 정직하세요. 회개 기도하는 것 말고도, 여러분의 감정과 생각에 있어서도 정직하세요. 바로 거기에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숨김없이 그대로 쏟아놓을 때 주어지는 은총이 무엇일까요?
우선은 그 아픈 부분이 치유되는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혼자만 끙끙 앓던 문제를 누군가에게 솔직하게 고백했을 때 우리는 속이 후련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상담을 하시는 분들을 보면 상담자에게 솔직하게 다 털어놓는 그 자체로 내담자들이 상당 부분 치료된다고 합니다.
속에 숨겨놓은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건강하지 못합니다. 혼자 끙끙 앓고 있는 사람은 건강할 수 없습니다. 털어놓으세요. 누군가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으세요.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털어놓으세요. 꾸밈없이 그대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 문제를 하나님께 털어놓으세요. 그러면 우리 안에 무언가 막혀있던 것들이 후련해지고 치료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정직한 감정으로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푸세요. 그래야 우리의 상한 감정이 사탄의 시험 꺼리가 되지 않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상한 감정을 공격합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하신 겁니다. 그 상한 감정 그대로 하나님 앞에 들고 나아가서 털어놓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많이 우세요. 아프면 아프다고 하세요. 힘들면 힘들다고 하세요. 말 많이 않해도 좋아요. 그냥 울기만 해도 좋아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치유의 기능을 주셨는데, 그것은 정직과 눈물입니다. 사람은 정직할 때 건강해져요. 정직할 때 치유가 됩니다. 그리고 눈물이 우리의 상한 감정을 치유하는 기능을 합니다.
그렇게 속상하고 억울하고 아프다가도 울다 보면 치유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세요. 하나님 앞에서 점잖은 척 하지 말고, 아닌 척 하지 말고 우세요. 그 눈물 속에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은총이 있습니다.
새벽기도나 기도회 때 우는 사람들 있지요. 어떤 사람들은 그럽니다. 왜 저렇게 우느냐고 짜증난다고... 아니예요. 우세요. 울면서 솔직한 감정을 하나님께 쏟아놓으세요. 그 분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내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내 아버지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람어인데 ‘아바’라고 합니다. 우리 말의 아빠와 아바의 중간음 정도됩니다. 그런데 이 아바라는 말은 어린아이들이 아버지에게 친하게 부를 때 쓰는 말입니다. 우리 말로 아빠라고 하는 그런 느낌의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 중에 하나님을 이렇게 부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 만이 ‘아바’라고 부른 겁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바라고, 우리 말로는 아빠라고 했을 때 그 마음이 어땠을까요? 나를 아시는 아버지,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나를 꾸짖지 아니하시는 아버지, 한없는 사랑과 인자하심으로 나를 받아주시는 아버지, 내가 솔직하게 내 감정을 쏟아놔도 그대로 받아주시는 아버지... 그런 마음으로 아바라고 부르셨을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아바라고 부르셨던 그 하나님이 바로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나의 아바, 나의 아빠이십니다. 내가 솔직하게 내 감정, 내 생각, 내 의지를 말한다고 해도 결코 꾸짖지 아니하시는 아빠되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아버지 하면 왠지 어렵고, 거리가 멀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엄격한 아버지였거나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가 있는 사람은 더욱 그럴 겁니다. 그 아버지의 이미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대하지 마세요.
예수님이 부르셨던 아버지, 예수님이 가지셨던 그 아버지에 대한 이미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대하세요. 예수님의 아빠가 곧 나의 아빠입니다. 아빠에게 이해가 안된다고, 알려달라고 물어도 보고, 때로는 이렇게 해달라고 때도 쓰고, 때로는 그 넓은 가슴에 안겨서 울기도 하고, 아빠 앞에서 한없이 좋아하는 그런 어린 아이 같은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저는 그런 아빠이신 하나님을 청년 때 알았어요. 물론 지금도 하나님은 여전히 거룩하시고 내가 경외하는 하나님이셔요. 그러나 그분은 동시에 나와 친한 아빠가 되십니다. 저는 청년 때 기도하면서 참 많이 울기도 했고, 속상하고 답답해서 하소연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하나님이 정말 나의 아빠구나, 예수님이 부르셨던 그 아빠이시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 앞에서 저는 그냥 울 때가 많아요. 그냥 솔직하게 제 생각, 제 감정을 털어놓습니다.
“아버지, 저 힘들어요. 저 많이 아파요. 저 이것 때문에 요즘 힘들어요. 저 이게 이해가 안되요. 저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이러면서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저를 만져주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기도하면서 우는 분들을 보면 예뻐보여요. 기도하면서 울지는 않더라도 솔직하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분들을 보면 참 마음이 가요. 반면에 괜히 아닌 척, 건강한 척, 괜찮은 척, 점잖은 척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내가 봐도 힘들 것 같은데 아닌 척해요. 내가 봐도 아픈데 아닌 척 안 아픈 척 해요.
하나님께서 보실 때 누가 더 예뻐 보일까요? 아프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힘들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면서 그러실꺼예요.‘그래, 너는 아빠가 누군지 아는구나’
생각해 보십시오. 아빠에게 솔직한 자녀가 더 예쁘게 보이잖습니까? 만약에 우리 집 아이가 어디가 아픈데 안 아픈 척 해봐요. 예쁠까요? 안예뻐요. 아프다고 울고 도와달라고 해야 예쁜 거에요. 아빠되신 하나님 앞에 솔직하시길 바랍니다. 두렵고 거리가 먼 아버지가 아니라 나를 아시고 나를 다 받아주시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아빠되신 하나님으로 대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직한 감정을 가질 때 그 위에 하나님의 어루만지시고 치유하시는 손길이 임하게 됩니다.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정직한 감정을 쏟아놨을 때 하나님은 그를 어루만지시고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 그 괴로운 심정을 그대로 쏟아 놓으셨을 때 십자가를 질 수 있는 힘이 예수님께 임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못했고, 그 서운함을 가슴에 품다가 그것이 시기와 질투가 되고 분노가 되어서 동생을 죽이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정직한 감정으로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기도가 드려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 기도를 하셨는데, 첫 번째 기도는 솔직하게 그 감정을 쏟아놓은 것입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의 은총이 임했고, 두 번째 기도와 세 번째 기도에서는 여전히 나의 감정과 생각이 있지만, 이제는 내 의지, 내 생각, 내 감정이 아니라 아버지의 의지, 아버지의 생각, 아버지의 감정으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나의 생각과 의지, 감정을 털어놓을 때 그 상한 감정을 어루만지시고 위로하시고 회복시켜 주실 뿐만 아니라, 내 생각, 내 의지, 내 감정이 아버지의 것으로 채워지는, 그래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구하는 감정으로 바뀌게 되는 은총이 임하게 됩니다.
정직한 감정 위에 내리는 은총, 이러한 은총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기를 소원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이른비와 같이 내리기를 아빠되시고 친구되신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