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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용어 | 중국어, 일본어 |
수도 | 신징(新京) |
국가원수 (황제) |
강덕제(康德帝) |
국무총리 | 장징후이(張景惠) |
면적 - 총계 |
1,133,437km² |
인구 - 통계 |
36,933,206인 (1937년) |
건국 - 일자 |
(건국 선언) 1932년 3월 1일 |
망국 - 일자 |
(황제 퇴위) 1945년 8월 18일 |
통화 | 원 |
시간대 - 도중 변경 |
UTC +8 (1936년 12월 31일이전) UTC +9 (1937년 1월 1일 이후) |
국가 | 만주국건국가(滿洲國建國歌) |
만주국(滿洲國) 혹은 만주제국(滿洲帝國)은, 1932년부터 1945년까지 만주에 존재한 나라이다.
이 나라의 국가원수는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를 역임한 푸이였으나, 실제로는 관동군이 지배하는 일본제국의 괴뢰국 상태였다.
만주국의 존재를 인정한 나라는 일본, 독일, 이탈리아, 바티칸 시국, 스페인, 헝가리, 폴란드를 포함한 8개국이었다.
일본 관동군(關東軍)은 1931년 9월에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북동부를 점거한 뒤 1932년 3월 1일 '만주국' 성립을 선언하고, 청조(淸朝)의 폐제(廢帝:宣統帝) 푸이[溥儀]를 집정(執政)에 앉혔으며, 수도는 신경(新京:지금의 長春), 연호를 대동(大同)이라 하였다.
'만주국'은 러허작전[熱河作戰]으로 청더[承德]가 점령됨으로써 국토는 랴오닝[遼寧]·지린[吉林]·헤이룽장[黑龍江]·러허의 4성(省), 인구는 3000만 명에 이르렀고, 1934년 3월 제정(帝政)이 수립되면서 연호를 강덕(康德)으로 고쳤다.
만주국은 일본·조선·만주·몽골·중국의 오족협화(五族協和)와 왕도낙토(王道樂土)를 표방하였으나, 실권은 관동군사령관이 장악하였고, 중국인의 국무총리 및 각부대신은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다. 또 경제면에서도 일본인의 만철(滿鐵)이 전철도를 경영하고 닛산[日産] 콘체른이 진출하여 개발사업을 독점하였다. 1945년 8월 소련의 참전으로 인해 관동군이 괴멸하자 곳곳에서 민중반란(民衆叛亂)이 일어나 푸이가 잡히고 '만주국'도 무너졌다.
(만주국의 실제 영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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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의 조선인
평안남도 강서군 덕흥리에서 태어났다. 1939년 평양사범학교를 졸업 후, 교직에 종사했다. 그러나 군인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봉천군관학교에 진학하였다. 졸업 후는 간도특설대에 배속되어 일본군에 저항하는 조선인 항일유격대 소탕 작전에 종사하다가 1945년 8월 15일 만주군 중위로서 종전을 맞이했다.
1940년 4월 박정희는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교하였다. 이때의 박정희의 동기생들 가운데는 5·16에 가담한 사람이 없었으나, 간도 용정의 광명중학 출신의 선배 기수에서 5·16을 지지하게 되는 등, 이 때의 인맥은 박정희의 지지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12] 신경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5개월 정도 현장 실습을 마친 박정희는 1942년 10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3학년으로 편입했다. 1944년 4월 박정희는 300명 가운데 3등의 성적으로 일본 육사를 졸업한다. 그리고 7월에 만주군 보병 제8사단에 배속되었다. 이때 함께 근무했던 신현준, 이주일, 방원철 등은 훗날 5·16 군사 정변의 동지가 된다.
박정희는 1942년 3월 예과 졸업생 240명 중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이 시기에 박정희는 집안을 따라 다카키 마사오(일본어: 高木正雄)로 창씨 개명하였고, 만주군관학교 2기생 졸업앨범과 일본 육사 졸업앨범에서도 같은 이름을 사용하였음이 확인되었다.[13], 1945년 3월 작성되어 구미 면사무소에 제출된 《임시육군군인군속계》[14]에서도 박정희의 일본식 이름이 ‘다카키 마사오’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병적기록부의 제출자인 박정희의 셋째형 박동희 또한 ‘다카키 토히로’(高木東熙)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일보 퇴직 후 잠시 송도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있다가 1937년 만주로 가서, 만몽산업주식회사 상무이사가 되어 관동군에 군량미를 공급하였으며, 만주국 협화회(協和會)의 협의원을 지냈다.
함경북도 경원군에서 태어나 만주의 봉천군관학교를 거쳐[1], 1940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군으로 복무했다.
일제 패망 후에는 1946년 1월 15일 군사영어학교 1기생 중 1차로 임관하여 국방경비대 제4연대장 겸 경비대 총참모장을 역임하였다.[2] 한국 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6월 30일에 전사(戰死)한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을 대신하여 제5대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하였으며 1954년에는 백선엽 참모총장을 대신하여 다시 제8대 육군참모총장으로 취임된다.
1941년 일본 동경 고등사범학교 졸업하고 1943년 만주국 국립 대동학원을 정치행정 전공으로 수료하였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면서 당시 국무총리를 맡고 있던 최규하는 자동적으로 권력을 이양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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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만주국이 잠깐 존재했던 괴뢰국의 임시정권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제 중국대륙에서 일본제국주의에 식민지의 하나로 운영된 국가로 보입니다.
그리고 당시 일제에 치밀하게 진행됐던 대동아 공영권의 실체에 대표적 예가 바로 만주국이겠지요.
다만 아직까지 한국 역사에서 이것을 다룰때 상당히 적고 예외적으로 보는 부분이 강한데 이것은 과거역사에서 친일파의 청산과정과도 연관이 있다고 봅니다.
당시에 만주국의 장교, 의원출신들의 그대로 한국에 들어와 정권을 잡고 권력을 잡았기 때문이겠죠.
어쨋든 정리하면 이때 존재했던 만주국에서 실제 의원과 일본 관동군의 장교를 했던 사람들에 대한 실태 조차 파악되고 있지 않은 것은 안타까운 부분이고 역사에 있어서 어느정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과 결과에 대한 정리가 중요하겠지만 아직까지 실태 파악 조차 제대로 안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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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떤 사람은 만주국에서 있었던 내부 쿠테타와 내부 군관들의 권력암투 관계가 그대로 대한민국으로 이어졌다고 합니다. 516쿠테타나 1212사태가 만주국에서 있었던 사건과 매우 흡사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최규하를 전두환에게 강제로 끌려내린 비운의 대통령이라고 생각하는데 최규하도 쿠테타의 공범이라고 하네요. 정일권 최규하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잘 모르는 만주국 출신들이 지금의 일본 자민당 내부인물들과 커넥션으로 다 엮여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일본의 2차세계대전 패망후 일본본토를 만주국 출신의 관동군들이 일본사회를 거의 장악하다시피 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