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고통 속에서 힘들어하는 분이 많습니다.
병으로, 경제적으로, 가정 문제로, 직장의 일로, 사람과의 관계 등등의 이유로…. 힘든 이유는
우리 주변에 참 많습니다.
이 이유를 하나하나 살피다 보면 한두 가지로 힘든 것은 오히려 다행이 아니겠냐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변을 보면 아무 문제도 없이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많아 보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고통과 시련이 다가오면 갖게 되는 감정이 억울함이라고 합니다.
“왜 내게만 이런 일이 닥칠까요?”라는 말을 하면서 눈물짓습니다.
이 억울함과 함께 다가오는 감정이 바로 후회입니다.
“내가 이러려고 열심히 살았나?”, “저 사람을 내가 왜 만났을까?”,
“돈이 뭐길래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나?” 등의 후회를 반복하게 됩니다.
자기 삶의 불행을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자기 상황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자기 삶을 온전히 자기 것을 바라보면서 문제를 뒤섞지 말아야 합니다.
“너 때문이야.”라면서 괜한 분노만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 온전히 바라봐야
문제의 해결점도 찾을 수 있게 됩니다.
남들은 행복해 보인다는데 정말로 그 ‘남’이 행복한 것일까요?
행복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열심히 사는 것입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방에서 뒹굴며 사는 사람이 행복해 보입니까?
그 방에서는 특별히 하는 것도 없으니 걱정도 없고 어려움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사람을 그 누구도 행복해 보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열심히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열심한 삶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무 문제 없음보다 더 주님께 간절하게 원해야 할 것은 열심할 수 있는 마음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불행 선언을 하십니다.
위선자들이고, 눈먼 인도자이며, 어리석고 눈먼 자라면서 혹독하다 싶을 정도로 말씀하십니다.
사실 그들은 열심히 살았습니다.
율법의 세부 조항도 열심히 지켰고, 단식과 자선과 기도도 전혀 소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심’은 그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 ‘열심’으로 인해 사람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심’은 단순히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열심’, 예수님께서 하시는 구원의 길에 동참하면서
그 길에 많은 이가 함께할 수 있도록 하는 ‘열심’이었습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의 모습이 우리에게는 없을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의 일에 열심하지 않는 그 모든 것이 위선자이고, 어리석고 눈먼 자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나의 ‘열심’을 다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순간의 만족이 아닌 영원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그런 ‘열심’을 말입니다.
보람된 일은 그것 자체가 기쁨이며, 사람이 거기에서 얻는 이익에 대한 기쁨이 아니다(알랭).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