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고급주택들이 즐비한 이태원·한남동, 서강대가 들어선 마포 노고산 주변이 불과 90년전 만 해도 집단 매장지였다는 사실이 놀랍다.
묘지는 죽음에 대한 부정적 인식, 공중위생, 미관상 이유 등으로 대표적 기피시설로 받아들여진다. 무덤은 되도록 주택에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고 여겨지지만, 인구가 많고 땅은 좁은 서울의 경우 그럴 여건이 안됐다. 인구의 팽창일로 속에 가난한 도시 빈민들은 묘지를 터전으로 삼았고, 빈민촌과 뒤섞인 묘터는 다시 주택과 아파트 단지로 바뀌어갔다.
조선말기 서울은 ‘무덤의 도시’
매장이 유일한 장례방식이던 조선시대 한양은 무덤의 도시나 다름 없었다. 한양도성과 성저십리(城底十里·도성 밖 10리 내)는 묘지를 둘 수 없었지만, 국가통제가 느슨해지는 조선말기로 접어들며 금지법도 자연스럽게 풀렸다. 사람이 거주하지 않거나, 농사를 짓지 않는 마을 뒷산의 땅은 묘지가 빽빽하게 들어섰다. 묘지를 두고 벌어지는 산송(山訟)도 비일비재했다.일제, 19개 공동묘지 고시···식민지 도시개발 위해 묘지통제
조선총독부는 이에 따라 1912년 6월 20일 묘지사용을 통제하는 <묘지규칙>을 발표한다. 총독부가 인정한 공동묘지 외에는 사유지라 하더라도 묘지를 설치할 수 없고, 한국사회에서 금지됐던 화장을 합법화하는 내용이 골자였다. 이어, 1913년 9월 1일 ‘경성공동묘지 19개소’를 고시한다.
미아리(강북 미아), 신당리(중구 신당동), 이태원·한강(용산 이태원동, 한남동), 두모면 수철리(성동 금호동·옥수동), 연희(마포 연희동), 동교(마포 동교동), 만리현 봉학산(마포 아현동), 염동 쌍룡산(마포 염리동), 은평면 신사리(은평 신사동)는 이미 조선말 이후부터 광범위한 집단매장지가 있던 지역이다. 동대문 이문, 서대문 남가좌, 종로 평창, 여의도, 광진 능동도 19개 묘지에 포함됐다신당리묘지는 1920년대 전원주택지 건설이 추진되며 1929년 폐지되고 분묘는 홍제동(서대문), 수철리(금호·옥수동) 묘지로 이장됐다. 신당동 주택단지는 14만평 규모로 개발돼 일본인과 상류층 조선인에 공급됐다. 자동차도로, 상하수도, 학교, 놀이터 등의 편의시설과 도시기반 시설을 갖췄고, 도심에서 가까우면서도 경치와 공기가 좋은 점이 부각돼 성공리에 분양됐다.
이태원·한남동 묘터, 서울 부자동네 부상
이태원 공동묘지도 신당동처럼 일본인을 위한 전원도시를 지향했지만, 곧 일본이 패망하면서 광복이후 서울의 부촌으로 자리잡는다. 보광동의 이태원모범묘지는 1936년 조성됐고 1950년 폐쇄됐다.
수철리묘지(금호동)는 일제강점기 사회저명인사들이 묻혔으며 무덤이 3만2000기가 넘는 대형 공동묘지였다. 광복후에도 존치됐지만 폐지 등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1950년대 혼란기 속에 생긴 판자촌에 의해 잠식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1980년대까지 금호동 일대에 자리잡았던 달동네가 공동묘지 자리로 이해된다.
서소문(소의문)은 광희문과 함께 시구문으로 호칭됐다. 서소문 밖 마포에도 공동묘지가 조선후기부터 넓게 분포했다. 서소문 옆 아현묘지(마포 아현동)는 공동묘지와 함께 일제강점기 화장장, 경성형무소(공덕동), 분뇨처리시설 등 혐오시설이 집중됐다. 아현(阿峴)은 애오개(애고개)의 한자어로 동쪽 만리현과 서쪽 대현 사이의 작은 고개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지명이다. 아이들을 많이 묻어 애오개라고 했다는 말도 유전된다. 실제, 애오개에는 아이시체를 많이 묻어 작은 무덤이 많았다고 한다이태원묘지는 이태원동, 한강동(한남)에 산재했다. 이태원은 남산을 등에 지고 남쪽으로 한강을 대하고 있으며 관악산을 바라보는 명당 중 명당으로 선호됐다. 1920년대 초반 분묘가 2만기를 넘어 포화상태에 이르고 1930년대 접어들면 4만기를 초과했다고 당시 신문이 경쟁적으로 보도했다.
1906년 군사시설인 용산기지가 조성되면서 배후 주거단지로 이태원 묘지 활용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신당동 주택조성사업 성공 이후 삼각지에서 신당리까지 이어지는 남산주회도로(이태원로)가 개통되며 1939년 이태원 묘지는 한남토지구획정리지구로 지정되고 12만4000평의 토지가 고급 주택단지로 변모했다. 이태원 묘지의 무덤은 망우리와 미아리, 신사리로 이전했다.마포 전역에 묘지 분포···도시 빈민촌 형성
도심부에서 마포를 지나 영등로까지 연결되는 신작로가 나며 아현묘지는 1932년 폐기되고 홍제리 묘지로 옮겨졌다. 아현묘지는 경성부가 1930년대 경성에 산재해 있던 토막민을 집단수용하면서 도시빈민 주거촌이 형성됐다. 염리묘지(마포 염리동) 역시 조선후기 도성 좌측의 성저십리 묘터였다. 경성시가지계획에 의해 서부개발지에 포함됐지만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한국전쟁 과정에서 빈민층의 거주지가 됐다. “개바위 마을(쌍룡산 남쪽)에서 집을 짓다가 인골을 흔하게 발견했다”는 기록도 있다.
마포 동교리묘지도 일제 이전부터 분포했고 상여꾼, 장의사 마을도 존재했다. 1942년 1만1150기의 분묘 개장이 이뤄져 은평 신사리 묘지로 옮겨졌다. 한국전쟁 후 피난민이 이주하면서 무허가 주택들이 들어섰다. 주변지역 개발이 가속화하고 1970년대 도로가 확충되면서 세련된 단독주택지로 발전했다.
무허가 주택 난립했던 연희묘지, 연대생 자취·하숙촌으로···
연희묘지는 연희로 동편의 공동묘지이다. 1942년 도시발전 저해, 위생상의 문제로 매장이 금지됐지만, 일제의 재정부족과 광복으로 분묘처리가 안됐다. 한국전쟁때 연희묘지 일원에서 격전이 벌어져 분묘의 상당수가 파괴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연희로 서편은 1967년 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로 지정돼 교외 주택지로 변모했지만, 공동묘지는 그러지 못해 무허가 주택이 난립하다가 개별 필지별로 주택이 증·개축돼 연세대 학생들이 거주하는 자취, 하숙촌으로 전환됐다.서울의 북망산 미아리···결국 아파트 밀집 지역 변신
미아리 1, 2묘지는 7만3000여 평 규모였으며 1913년 공동묘지로 지정돼 분묘수가 3만5000기에 이르렀다. 1963년 개장돼 고양 벽제리 묘지로 이동됐다. 미아는 미아사(彌阿寺)라는 절에서 유래했다.
공동묘지 입구의 성북구 동선동과 돈암동 사이 고갯길이 유명한 미아리 고개이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가 이 고개를 넘어왔다고 해서 ‘되너미 고개’로 지칭됐다. 한국전쟁 시에는 퇴각하던 북한군이 이 길을 통해 유명인사나 애국지사를 납치해 간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미아리 길음 묘지는 미아동, 길음동 일대 14만평에 분포했으며 난민정착지로 지정돼 택지건설이 진행됐다.
은평 신사리는 조선시대 공동묘지와 처형장으로 활용됐고, 경성부에서 제일 멀리 떨어져 있어 묘지가 오랫동안 유지됐다. 신사리 묘지는 1968년~1970년 사이 4만5000여 기의 분묘 중 2만여 기가 파주 용미리 묘지와 벽제리 묘지로 옮겨지면서 사라졌다.오늘날 서울시민의 상당수는 과거 묘지였던 곳에서 살고 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구분짓는게 무슨 의미인가. 따뜻한 봄날이 오면 망우리를 찾아 묘지를 베개 삼아 낮잠이나 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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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 이의성. ‘근대도시계획과정에서 나타난 공동묘지의 탄생과 소멸: 서울 사례를 중심으로’. 서울대. 2020
2. ‘서울사람들의 생로병사’. 서울역사편찬원. 2020
3. 정일영. ‘식민지 조선에서 죽음을 기억하는 두 가지 방식: 용산 사자공간의 의미 변화를 중심으로’. 서울과 역사. 2019
4. ‘경성부내 공동묘지 사용지역’. 매일신보. 1913. 9. 7
5. ‘국역 경성부사’. 서울특별시시사편찬위원회. 2015
배한철 기자(hcbae@mk.co.kr)https://naver.me/IMndd0u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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