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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마 26:47-56
47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 예수를 파는 자가 그들에게 군호를 짜 이르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한지라
49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50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51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55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마 26:47-56 / [예수께서 잡히시다;막14:43-50,눅22:47-53,요18:3-12] 예수의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이 보낸 많은 무리와 함께 왔다. 그들은 칼과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48) 유다는 그들에게 자기가 입맞추는 사람이 바로 예수이니 그를 잡으라고 미리 말해 두었다. 그래서 유다는 49) 곧 바로 예수께 다가가서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하고 다정하게 껴안으며 입맞추었다. 50) 예수께서 `친구여, 어서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라' 하고 말씀하시자 사람들이 달려들어 예수를 붙잡았다. 51) 그때 예수와 함께 있던 사람 하나가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칼로 내려쳤다. 52)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네 칼을 칼집에 도로 꽂으라.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한다. 53)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도 더 넘는 천사들을 보내어 우리를 지켜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54) 그러나 만일 내가 그렇게 한다면 이미 이 일이 일어나리라고 한 성경의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55) 그리고 예수께서는 무리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마치 위험한 강도라도 되듯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를 잡으러 왔느냐? 내가 전에 날마다 성전에서 너희를 가르칠 때는 가만 있지 않았느냐? 56)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이렇게 된 것은 성경에 기록된 예언자들의 말씀을 이루려는 것이다.' 그동안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모두 달아났다.
가룟 유다에 의하여 붙잡히신 예수님을 모든 제자들이 버리고 도망합니다.
말씀하실 때에(47) “말씀하실 때에”라는 것은 46절에서 이어지는 상황을 말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급박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자고 있던 제자들을 깨우며 자신을 잡으러 온 자들을 향하여 나아가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신에게 닥칠 고통과 아픔을 피하지 않으시고 담대하게 맞이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잡기 위해 대제사장 측은 큰 무리를 보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잡기 위하여 칼과 몽치로 무장하였습니다. 아마도 여기서의 칼은 로마 군인들을, 몽치는 유대인 성전 수비대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를 파는 자(48-56) 한밤중이 되었습니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던 예수님을 잡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어두운 밤 조명도 없던 시절이기에 칠흑 같은 어두움은 마치 출애굽 전 아홉 번째 재앙이 내리던 밤을 연상시킵니다. 그때도 온 세상이 깜깜했습니다. 어두운 밤에 큰 무리가 겟세마네로 몰려듭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로 가서 입을 맞춥니다. 이는 예수님을 넘기는 신호입니다. 지금도 겟세마네 언덕 위로 올라가는 길 오른쪽에는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 입을 맞추어 판 장소를 가리키는 표식이 있습니다. 이전까지의 입맞춤은 존경과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이때는 배신과 위선의 상징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에 제자와 스승 사이에 있어서 제자가 먼저 스승에게 입 맞추는 경우는 드물다고 합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먼저 입 맞출 수 없는 이유는 제자와 스승이 평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가룟 유다의 입맞춤은 스승이 되신 예수님에게 심한 모욕을 주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잡힙니다. 예수님이 잡히실 때 유일한 방어는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자른 것이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자기를 잡으러 온 말고의 귀를 고쳐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칼은 세상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세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이 잡히자 모든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합니다. 슬프게도 31절의 말씀이 성취되는 순간입니다.
적용: 당신의 마음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칼이 꽂혀있는 칼집인가요? 그리스도의 사랑인가요?
흐르는 물 위에서는 글씨를 쓸 수 없습니다. 손바닥 위로 흐르는 물을 애써 쥐어도 결코 머무르지 않습니다. 잡히지 않는 것을 애써 잡으려고 하면 고통이 쌓입니다. 승리하고자 무력으로 맞서 얻은 승리는 일시적입니다. 무력의 힘보다 강한 것은 사랑과 용서의 힘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누군가 무력으로 다가온다면 사랑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사랑으로 무력을 이기신 예수님의 방법은 우리에게 애써 이기려 하지 않아도 승리할 수 있음을 알게 합니다.
< 설 교 >
증오하고 대결하고 포기하는 것
마 26:47-54 / 김명혁목사
지난 한 주간 동안 설교 제목을 두 번 바꾸었습니다. 지난 화요일에 정한 설교 제목은 “잘난 척하고 자만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제 토요일에 새로 정한 설교 제목은 “증오하고 대결하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먼저 지난 화요일에 정한 설교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 드리고 그리고 어제 정한 설교를 간단히 하려고 합니다. 오늘 아침 두 가지 설교를 합니다.
저는 건강 진단을 별로 하지 않는데 지난 화요일 건강 진단을 하려고 강원도 홍천에 갔습니다. 병원에 간 것은 아니고 스키장에 갔습니다. 체력을 진단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3년 만에 스키장에 갔으니까 여러분들이 양해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5년 전에 그곳에서 스키를 타면서 너무너무 재미가 있어서 그 다음 주일 설교 제목을 바꾼 일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 주일 “즐겁게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5년 전에는 오전 오후에 스키를 40번이나 열심히 탔습니다. 지난 화요일에도 너무너무 재미있게 스키를 탔습니다. 가슴이 확 트이는 것 같았고 마음과 몸이 상쾌해졌습니다. 허기정 목사님과 이승일 강도사님과 함께 갔는데 이승일 강도사님이 이번에도 스키를 타면서 설교 제목을 정하지 않느냐는 말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오전에만 스키를 탔습니다. 오전에 3시간 35분 동안 스키를 탔는데 38번이나 대단히 열심히 탔습니다. 체력 진단에 별 이상이 없음을 발견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후에는 기술력 진단을 하기 위해 세 사람이 볼링을 쳤는데 제가 점수를 제일 많이 땄습니다. 몇 년 만에 함께 볼링을 친 사위가 옆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버님, 아직 녹 쓸지 않으셨네요.” 역시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마음에 떠 오르는 설교 제목이 하나 있었습니다. “잘난 척하며 자만하는 것”이었습니다. 스키를 잘 타고 볼링을 잘한다고 “잘난 척하고 자만하는 것”이 잘못이고 문제이고 죄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저는 요사이 잘난 척하며 자만해질 수 밖에 없는 형편에 처해 있습니다. 요사이 설교를 하면 은혜를 받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저를 사랑하고 좋아하고 존경한다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송명희 시인은 저를 애인이라고 부릅니다. 송명희 나명희 강명희 임명희 목사 등 명희 라는 사람들을 비롯해서 강성철 선교사와 이중표 목사님까지 저를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심지어는 저 때문에 살맛이 난다고 말하니 제가 잘날 척하고 자만해질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중표 목사님은 “김목사님을 좋아하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즐거움입니다”라고 편지를 써서 보내니 제가 잘날 척하고 자만해질 수 밖에 없게 되었지요.
그래서 오늘 아침 설교 제목을 “잘난 척하며 자만하는 것”이라고 정했었습니다. 저도 그런 죄를 지금 범하고 있지만 오래 전에 우리 믿음의 선배이신 사도 베드로도 그런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첫째 베드로는 잘난 척했고 자기가 제일 인줄 알고 있었습니다. 제일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마음을 품었습니다. 둘째 베드로는 자신만만했습니다. 예수님의 충고를 듣고 나서도 계속해서 자신만만했습니다. 주님의 충고를 무시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셋째 베드로는 주님에게서 점점 멀어졌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붙잡혀 가시는 주님을 ‘멀찍이’ 좇아갔다고 했습니다. ‘멀찍이’ 라는 말이 세 복음서에 다 나옵니다. 결국 베드로는 잘난 척하고 자만하고 주님을 멀찍이 좇아가다가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하는 무서운 죄를 범했습니다. 하마터면 마귀의 밥이 될 뻔했고 지옥에 떨어질 뻔했습니다.
어제 토요일 새로 정한 설교 제목은 “증오하고 대결하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대통령 탄핵 사건으로 크게 술렁이고 있습니다.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인들을 몰아내야 한다는 아우성이 가득합니다. 대통령을 몰아내야 한다는 아우성과 국회의원들을 몰아내야 한다는 아우성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국론이 양극으로 분열되는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탄핵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직후 뉴스앤조이라는 인터넷 신문사에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탄핵안이 통과된 데 대한 소감을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과 같은 소감을 전했습니다. 그 전화 인터뷰가 뉴스앤조이 인터넷에 그대로 실려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불행한 일이다. 최근에 우리나라 정치·사회 기류가 극단적인 양극화로 치닫더니 그러한 결과로 헌정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을 탄핵하는 불행한 일까지 벌어졌다. 앞으로 정치 발전에 어두운 면이 펼쳐질 듯하다. 민주주의가 뿌리 내리기는 요원할 것 같다. 최근 민주주의가 이뤄지는 듯하더니, 이번 일로 크게 후퇴했다. 수준 높은 대화와 타협의 방식으로 정국을 풀어나가지 못하고 물리적인 힘으로 밀어붙였다. 민주주의는 다양성을 수용하고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면서 통합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인데, 우리는 민주주의 정신을 실현하지 못했다. 벌써 사람이 자살하고 죽는 극단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 앞으로도 극단적인 일이 많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4.15 총선도 희망을 투표하는 축제가 되기보다는 감정적인 대결이 벌이지는 불행한 날이 될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의 리더십과 행정력에도 문제가 있지만, 야당도 자성을 하지 않고 대응하는 방법이 한쪽으로만 몰고 가는 극단적인 공격 방법을 썼다. 이런 상태로는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 국민에게 존경 받는 사심 없는 지도자 10명만 있어도 이런 일쯤을 쉽게 넘어갈 텐데 안타깝다. 이러한 불행한 사태에 대한 한국교회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정치인뿐 아니라 한국교회 지도자들도 사회의 인정과 존경을 받을 만한 삶을 살지 못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정치와 마찬가지로 극단적인 대결만 난무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모습이 정치에도 영향을 미쳐 이런 불행한 일을 초래했다고 본다.”
탄핵 사건에 대한 소감을 피력한 것이고 그 대처 방안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탄핵 정국의 원인과 그 해결 방안을 두 마디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 원인을 집단 이기주의와 양극화 그리고 증오와 대결로 봅니다. 그 해결방안은 포용과 협력을 추구하고 용서와 화해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성경의 가르침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어두움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죄악의 세력과 사망의 세력과 마귀의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가 혈육에 속하심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기” 위해서 였다고 히2:14이 지적했습니다. 부활은 어두움의 세력과 죄와 사망과 마귀의 세력을 무너뜨린 승리를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두움의 세력을 몰아내고 무너뜨리는 데 있어서 쓰신 예수님의 방법과 베드로의 방법은 달랐습니다. 어두움의 세력을 대처한 예수님의 방법은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과 화해와 희생의 방법이었는데 비해 베드로의 방법은 혈기로 나타난 증오와 대결과 포기의 방법이었습니다.
1 “우리가 불을 명하여” 베드로는 어두움의 세력이 다가올 때마다 증오와 대결의 방식을 취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항상 사랑과 화해의 방식을 취했습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실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시려고 했습니다. 그 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배척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제자들은 분을 품으면서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9:54). 이 말을 한 제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이었지만 삼총사 중의 하나인 베드로도 함께 동조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제자들의 제안에 대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다른 길로 가셨다고 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 사건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대적하고 배척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하여 가장 큰 긍휼과 온후로써 처신하셨다. 예수님은 그들에 대하여 의분인 듯하면서도 잔인한 생각을 가진 사도들을 꾸짖으셨다. 공의는 좋은 것이나 그것을 빙자하여 잔인한 태도가 나오기 쉬운 것이다. 사람에게 의분은 필요하지만 악독과 혈기와 잔인성은 진정한 공의를 배반하여 파는 악행이다. 예수님은 사도들을 꾸짖으시고 고요히 다른 촌으로 가시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온후하신 처신법이다.”
예수님은 적대 세력에 대한 제자들의 적개심을 가라 앉게 하시려고 “용서하라 용서하라”는 말씀을 수 없이 하셨습니다.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6:37).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마6:14).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막11:25). 미움은 둘 다 죽게 하지만 용서는 둘 다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하도 답답하고 속이 상해서 예수님에게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예수님, 저 못된 놈들의 죄를 일곱번까지 용서하면 충분하겠지요?” 그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래 시몬아, 장하구나, 그러나 내가 진실을 말하면 이렇다. 일곱번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으면 용서하거라”(마18:22).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의 마음은 너무 무거웠을 것입니다. 자기의 방법과 예수님의 방법에 이렇게도 큰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깊은 고뇌와 좌절에 빠졌을지 모릅니다.
2 “검을 빼어 종을 쳐” 이제 베드로는 어두움의 세력이 점점 더 강력하게 다가오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어두움의 세력이 사방에서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이 경호권을 발동해서 검과 몽치를 가지고 배신자 유다를 앞 세우고 예수님을 잡으려고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 배후에는 로마의 막강한 군대의 세력이 호위하고 있었고 궁극적으로는 마귀의 세력이 그 배후에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당황했을 것입니다. 분노와 증오심으로 불탔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적대 세력과 대항해서 싸우기 위해서 결국 분노의 칼을 빼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 편 귀를 베어버렸습니다. 요18:10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 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베드로는 어두움의 세력과 싸워 무너뜨리되 그것을 증오와 대결의 방법으로 싸워서 무너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때에도 증오와 대결의 방법이 아닌 사랑과 온유의 방법으로 어두움의 세력에 맞섰습니다. 베드로를 책망하시며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고 말씀했습니다.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고 충고했습니다. 그리고는 말고의 떨어진 귀를 만지시며 다시 부쳐주셨습니다.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눅22:51).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어두움의 세력을 몰아내고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예수님은 증오의 방법대신 동정과 사랑의 방법을 쓰셨고 대결의 방법대신 온유와 화해의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증오와 대결의 방법이 아닌 사랑과 온유의 방법으로 말고의 마음과 몸을 사로잡았습니다.
3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베드로의 마지막 모습은 도망이었습니다.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어두움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혈기를 부리고 증오하며 대결하던 베드로는 마지막에 가서 싸움을 포기하고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짊어지고 모든 죄 값을 스스로 감수하며 희생과 죽음의 장소를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죄와 로마인들의 죄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반역의 죄 값을 홀로 짊어지고 저주의 동산을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베드로는 도망쳤지만 예수님은 어두움과 죄악의 심장부를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과 화해와 희생과 죽음의 방법으로 어두움의 세력을 몰아내고 이 세상에 빛을 가져오셨고 죽음의 세력을 몰아내고 생명을 가져오셨고 죄악의 세력을 몰아내고 의를 가져오셨고 마귀의 세력을 몰아내고 천국을 가져오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구속 사역의 방법과 우리들의 정치 사회적 삶의 방식을 동일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삶의 방식과 비슷한 삶의 방식으로 사신 분들을 우리 가까이에 모시고 있습니다. 조만식 장로님과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같은 분들은 우리 나라의 암울하고 어두운 시대를 증오와 대결이 아닌 사랑과 온유와 화해와 희생과 죽음의 방식으로 사신 분들입니다. 조만식 장로는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였지만 그는 한 번도 ‘왜놈’이니 ‘일본 놈’이니 하는 상스러운 말을 쓰지 않았고 해방 후 일본 사람들에게 어떠한 보복을 가하는 것을 반대하며 ‘물러가는 일본인들을 절대로 해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해방 후 일제보다도 악랄한 공산치하에서 반탁투쟁에 앞장 서면서도 그는 공산주의자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지막에 그의 생명을 민족을 살리는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의 나라 사랑은 하나님 신앙에서 기인했고 그의 신앙의 중심은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과 희생과 평화였기 때문입니다. 손양원 목사님도 사랑과 화해와 희생과 죽음의 길을 걸으셨고 한경직 목사님도 사랑과 화해와 희생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자 이제 극도로 불안한 오늘의 정국을 어떻게 헤쳐 나아가야 하겠습니까? 어두움과 부패와 무질서의 정국을 어떻게 헤쳐 나아가야 하겠습니까? 베드로가 택한 증오와 대결과 포기의 방법을 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기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서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 우리당을 미워하고 대결하여 싸우는 극단적인 방법이나 한나라 당이나 민주당을 미워하고 대결하여 싸우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나라를 떠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처럼 좌절과 참담함을 느끼며 자살하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 저는 세 가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미워하는 마음을 모두 버리도록 하십시다. 미움과 분노는 국론을 분열시키고 나라를 망치기 때문입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독재자들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이나 전두환 대통령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보실 때 동정의 마음을 품었습니다. 물론 그들의 잘못을 그대로 눈 감아준 것은 아닙니다. 그저 불쌍히 여기면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조만식 장로님은 일본 사람이나 공산주의자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손양원 목사님도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공산주의 자를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미워하지 않도록 애를 쓰십시다. 사실 한나라 당원들도 민주 당원들도 열린 우리 당원들도 노무현 대통령도 돈과 권력에 대한 욕심들은 모두 가지고 있을지라도 당리 당략에 눈이 어두웠을지라도 우리들과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이 뽑은 사람들이고 우리들이 편을 든 사람들입니다. 너무 미워하지 않도록 애를 쓰십시다. 우리들에게도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무력으로 대결하지 않도록 하십시다. 칼을 빼어 남의 귀를 자르는 무력적인 대결을 자제하도록 하십시다. 돌을 집어 던지지도 말고 불을 지르지도 말고 질서를 파괴하지도 마십시다. 국회에서 보인 무력 충돌을 우리 국민들은 하지 않도록 자제하면서 애를 쓰십시다. 합리적이고 정당하고 공정한 방법으로 (예를 들어 선거를 통한 방법으로) 오늘의 부정부패와 무능을 제거하도록 힘을 쓰면 될 것입니다. 기독교의 정신과 민주의의 정신은 대결이 아닌 화해입니다. 폭력이 아닌 대화입니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조화와 통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민주사회의 시민의 모습이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셋째는 포기하거나 도망치지 말도록 하십시다. 나라를 떠나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도록 하십시다. 나라의 죄 값을 모두 함께 짊어지도록 하십시다. 희생이 요구되면 희생을 감수하고 생명이 요구되면 생명까지 바치도록 하십시다. 우리의 선배들은 나라를 위해서 생명을 바쳤습니다. 도망치는 대신 고통과 아픔과 죽음의 중심부를 향해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의 좌절이 내일의 희망이 될 수도 있고 오늘의 후퇴가 내일의 발전이 될 수도 있고 오늘의 부끄러움이 내일의 자랑이 될 수도 있고 오늘의 실패가 내일의 성공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베드로의 방식을 택하느냐 예수님의 방식을 택하느냐에 달립니다. 증오와 대결과 포기가 아닌 사랑과 화해와 희생의 방식을 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와 우리 나라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나라를 사랑하는 민족의 지도자들을 일으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것이 우리들의 이기적인 탐욕과 분열의 죄 때문인 것을 고백하고 회개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기를 위해서 함께 기도하십시다.
증오와 탐욕과 배신
마 26:47-54, 행 1:15-20 / 김명혁 목사
오늘 아침 불행 중의 불행이요 비극 중의 비극인 가룟 유다의 배신에 대해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지금은 고난주간을 두 주 앞둔 사순절 기간입니다. 새벽 기도를 하지 않던 한국교회의 성도들도 새벽마다 본 교회로 달려와서 기도하며 고난주일과 부활주일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새벽기도를 하지 않던 우리 강변교회 성도들도 내일부터라도 본교회로 달려와서 고난주일과 부활 주일을 준비하며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담임 목사의 말에 순종하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앞으로 세 주간 동안 새벽기도에 힘쓰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모두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57:7,8). 새벽을 깨우던 다윗이 하나님이 주시는 큰 은혜를 받았던 것처럼 새벽을 깨우는 여러분들이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큰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아침 비극의 주인공 가룟 유다의 삶과 죽음에 대해서 설교를 합니다. 가룟 유다는 열 두 제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주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습니다. 삼 년 동안 주님의 가르침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유다는 주님을 배신하고 스스로 몸이 곤두박질하여 죽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유다의 불행과 비극은 우리들에게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습니다. 부르심과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모두 다 구원의 축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가룟 유다가 어떻게 해서 주님을 배신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가룟 유다는 증오의 사람이었습니다.
주전 수 세기 동안의 유대인들은 희랍과 애굽과 시리아와 로마의 지배를 차례로 받아 오면서 외세의 지배자들에 대한 증오심을 품고 저항 운동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주전 2세기에는 수리아 왕 안티오커스 4세가 유대교를 박해하고 유대인들을 학살하자 유대인들은 유다 마카비의 지휘아래 저항운동과 독립운동을 벌였습니다. 마카비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 후 로마가 유대를 점령하고 통치하자 유대인들은 곳곳에서 로마에 대한 저항운동과 독립운동을 벌였습니다. 이와 같은 정치적 배경을 소재로 삼고 김동리씨는 「사반의 십자가」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 흥미진진하게 읽은 소설입니다. 즉 사반이라는 사람이 로마에 대한 저항 운동을 일으키다가, 애굽과 시리아와 로마를 누르고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려다가 결국 빌라도에게 잡혀 십자가 형에 처한다는 내용입니다. 물론 역사성은 희박하지만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소재이기는 합니다.
가룟 유다도 이와 같은 정치적 상황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 모두가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을 기다리고 있었고 때로는 무력을 사용하여 원수의 세력을 무너뜨리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열 두 제자들 중에서 가장 세속적이고 가장 물질적이고 가장 육체적이었던 유다야말로 외세에 대한 증오심을 품고 정치적인 저항운동과 독립운동을 강력하게 추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 드린 대로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적대 세력에 대한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면 유다는 더욱 더 그랬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칼을 품고 다녔다면 유다는 더욱 더 그랬을 것입니다. 사반이 독립운동을 성취하기 위해서 예수를 찾아갔다고 김동리씨가 서술했는데 아마 가룟 유다도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정치적인 야심을 품고 예수님을 좇았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불순한 동기를 가지고 주님을 따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나의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과 방편으로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유다는 주님을 따르면서도 진정한 회개와 헌신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중생의 체험이 없었을 것입니다. 단지 정치적인 야심을 품고 주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증오의 사람이었습니다. 가룟이라는 말은 그의 출신지인 유대 남방의 한 지역을 가리키지만 가룟이라는 아람 말의 뜻은 ‘암살자’입니다. 유다는 칼을 품고 다니면서 로마인들을 암살하려고 했던 증오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로마 백부장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풀었을 때 유다는 예수님을 못 마땅하게 여기며 원망과 불평을 품었을 것이고 예수님에 대한 미움의 마음까지 품었을 것입니다. 미움을 품고 다니는 증오의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증오심은 원망과 불평을 가져오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반역하는 배신의 죄까지 범하게 됩니다. 유다는 자기가 품은 정치적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고 예수님의 계획에 반항하고 도전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불평과 미움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을 원수들의 손에 넘겨주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혀 가는 위기에 처하면 할 수 없이 원수들을 물리치게 될 것이고 그러면 이스라엘의 독립을 일으키게 되지 않을까 하는 간교한 생각까지 품었을지 모릅니다. 가룟 유다는 검과 몽치를 든 원수들의 무리와 함께 증오심과 칼을 품고 예수님에게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둘째 가룟 유다는 탐욕의 사람이었습니다.
복음서는 유다를 돈을 사랑하는 탐욕의 사람으로 묘사했습니다. 미움의 사람이 사랑하는 것은 돈입니다. 정치적 야심이 있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은 돈입니다. 유다는 돈 궤를 맡은 사람이었고 돈 궤에서 돈을 훔쳐가는 도적이었습니다.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요12:6). 베다니 마리아가 지극히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 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을 때 가룟 유다는 매우 못 마땅하게 여기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12:5). 그런데 그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라 돈을 탐하는 도적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사도 요한이 지적했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요12:6).
가룟 유다는 마지막에는 은 삼십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먹기까지 했습니다.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 유다라 하는 자가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말하되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마26:14,15). 돈을 사랑하면 눈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굳어지고 사람과 하나님을 배신하게 되고 마지막에는 지옥에 떨어지게 됩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유다는 탐심이 많은 사람이었으니 만큼 돈에 유혹되어서 무서운 죄를 범하게 되었다. 사람은 평소에 있던 악한 버릇에 사단의 힘이 가하면 무서운 죄를 범하게 된다.”
눅12장에 나오는 탐심의 사람 부자도 돈을 사랑하다가 지옥에 떨어졌고 눅16장에 나오는 쾌락의 사람 부자도 돈을 사랑하다가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눅16장에 나오는 바리새인들도 돈을 좋아하고 사랑하다가 주님에게서 멀어졌고 눅18장에 나오는 부자 관원도 돈을 사랑하다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불행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 부자 관원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예수께서 저를 보시고 가라사대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쉬우니라 하시니라”(눅18:24,25). 탐욕의 사람 유다는 돈을 사랑하다가 그만 자기의 영혼을 팔아먹고 말았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돈을 사랑하는 탐욕에 사로잡히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부자 세리장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다음 소유의 절반을 기꺼이 바치므로 돈을 사랑하는 탐욕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들도 소유의 일부를 기꺼이 바치므로 돈을 사랑하는 탐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 가룟 유다는 배신의 사람이었습니다.
죄 중에 가장 비열하고 부끄러운 죄는 배신의 죄입니다. 배신은 살인과 간음보다도 더 무서운 죄입니다. 부모를 배신한 불효자와 나라를 배신한 반역자를 사람들은 용서하지 않습니다. 모두 돌을 던지며 배신자들을 저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완용을 저주하고 리어왕의 세 딸들을 저주합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그의 스승이요 주인인 예수님을 배신하는 가장 비열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이천년 동안 자녀들의 이름을 유다라고 짓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습니다. 물론 베드로도 배신자였지만 나중에 회개하고 충성스러운 제자가 되었기 때문에 자녀들의 이름을 베드로라고 짓는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도마도 잠시 예수님을 불신했지만 나중에 회개하고 충성스러운 제자가 되었기 때문에 자녀들의 이름을 도마라고 짓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배신자로 살다가 배신자로 죽은 유다의 이름을 자기 자녀의 이름으로 삼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에게 가까이 와서 예수님에게 입을 맞추므로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마지막까지 간교하고 간사스러운 거짓된 행동을 취하면서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증오와 탐욕의 사람이 배신자가 되었습니다. 유다는 마지막까지 배신자로 머물었습니다. 그는 후회는 했지만 회개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후회하며 대제사장들에게로 가서 은 삼십을 던져버렸습니다.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가로되 내가 무죄한 자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 매어 죽은지라”(마27:3-5). 사도행전1:18은 유다의 비극적인 최후를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 유다는 뉘우치고 후회했지만 회개는 하지 않았습니다. 회개란 예수님 앞으로 달려 나아와서 무릎을 꿇는 것인데 유다는 예수님에게로 달려가지 않고 대제사장들에게로 달려갔습니다. 베드로와 도마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서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므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지만 유다는 그만 사람들에게 달려가므로 영원한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아침 유다의 불행과 비극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유다는 다른 사도들과 마찬가지로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고 가르침도 받고 사랑도 받고 경고도 받았지만 불행하게도 주님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유다의 이야기는 유다 한 사람으로 그친 것은 아닙니다. 초대교회에 신앙의 절개를 지킨 순교자들도 많았지만 신앙의 절개를 져버린 배신자들도 많았습니다. 키프리안은 251년에 쓴 「배교자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그 당시의 상황을 묘사했습니다. “그들은 체포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먼저 나아갔고, 심문을 받기 전에 먼저 신앙을 부인했다. 많은 사람들이 싸우기도 전에 미리 쓰러졌고, 적을 만나기도 전에 먼저 주저 앉았다. 그들은 스스로 장터로 달려갔고 자발적으로 죽음의 길을 택했다.” 사도행전1:25은 유다의 마지막을 이렇게 간단하게 묘사했습니다. “유다는 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유다가 왜 배신자가 되었는지 그 이유를 다시 한번 정리합니다. 근원적인 이유는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진정한 회개와 헌신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다음 정치적인 야심과 증오의 마음을 품은 것입니다. 그리고 돈에 대한 탐심이 그를 사로 잡은 것입니다. 결국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는 가장 불행하고 가장 비극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아침 유다의 비극적인 삶을 돌이켜보면서 마음에 다짐할 것이 있습니다. 겉으로 형식적으로 주님을 따르면 위험합니다. 진정한 회개와 헌신이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그 다음 증오심이 우리를 사로 잡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벤허가 마살라에 대한 증오심과 칼을 품고 다니다가 십자가 아래서 증오심과 칼을 버린 것처럼 우리도 사람들에 대해서 품고 있는 증오심을 뽑아버려야 합니다. 그 다음 탐심이 우리를 사로 잡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삭개오가 자기의 소유의 절반을 바치므로 탐심을 버린 것처럼 우리도 소유의 일부를 바치므로 탐심을 버리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배신자는 절대로 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여러 가지 죄를 지을지라도 주님을 떠나지 말고 주님에게로 달려가서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본래 배신의 기질이 있지만 베드로처럼 도마처럼 주님 앞으로 달려가 주님 발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날마다 주님 앞에서 회개하며 헌신과 충성을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유다처럼 되지 말고 베드로처럼 도마처럼 되시기를 바랍니다.
신자의 종류
마 26:47-56 / 엄기호목사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 신자의 삶은 이전에 가졌던 세상적인 중심에서 영원한 하나님의 중심으로, 교회 중심으로 말씀 중심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될 때, 우리의 삶에는 질서와 승리의 축복이 있습니다. 교회중심의 삶이 될 때 안식과 평안의 쉼을 얻고, 독수리와 같은 새 힘을 얻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천지는 변해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말씀 중심으로 살 때 흔들리지 않는 축복과 상급이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다는 것을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어떤 종류의 신자인가? 지금 무엇을 중심하여 사는가? 세상적인가? 하나님인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바른 신앙인으로 돌아오는 계기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귀 중심의 신자가 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은 인류의 죄악을 담당키 위해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잠들었고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길 작전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내려오실 때 예수님께 입 맞추며 인사하는 유다의 신호에 따라 칼과 몽치를 든 무리가 예수님을 붙잡아 갔습니다. 가룟 유다는 마귀중심의 모형입니다.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다니며 말씀을 들으면서도 돈에 마음을 두고 생각은 항상 마귀 중심이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따르면서도, 순간적인 잘못으로 마귀 노릇할 때는 없었는가 생각해봅시다. 마귀는 우리에게 불행을 주고,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며, 죄악에 빠지도록 우리를 늘 유혹합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게 만듭니다. 모든 만사를 원망불평하게 만듭니다. 불순종하게 하고 세상 죄에 빠지게 합니다. 또 정서적으로 불안하게 하고 염려와 걱정을 하게 하며 우리에게 근심과 불안을 주고 실패와 좌절감에 빠지게 만듭니다. 이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우리 자신이 마귀의 도구가 될 때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신자는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심령이 성령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나의 삶이 성령에 사로잡혀 있어야 합니다. 나의 생각이 성령에 사로잡혀 있어야 합니다. 내 심령에 성령이 충만해야만 합니다.
앉은뱅이 신자
예루살렘 성전 미문에 구걸하는 앉은뱅이는 제 발로 걸어 다니지도 못하고 남에게 폐만 끼치며 사람으로 하여금 불쾌감이나 주는 쓸모없는 존재입니다. 성전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밖에 앉아 구걸이나 하며 하루하루 죽지못해 살아가는 고달픈 인생입니다. 이 사람은 대단히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자립성이 없습니다. 이 사람은 남의 등에 업혀 와서 구걸하여 먹고사는 거지 인생입니다. 이 얼마나 가련한 인생인가요?
오늘날에도 이 앉은뱅이와 같이 고장 난 인생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자들은 성전 문턱의 신자입니다. 교회를 남에게 이끌리어 다니는 사람입니다. 굳건한 믿음에 바로 서 있지 않아 늘 흔들립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시험받아 흔들리고, 문제나 환난이 왔다고 흔들리고, 예수 믿어도 잘되는 것이 없다고 흔들립니다. 세상에 한발, 교회에 한발, 세상 것을 버리지 못하고 늘 흔들립니다. 또 교회 다니는 연수(年數)는 자랑해도 믿음의 성장은 앉은뱅이가 되어 믿는다고 하면서도 심령 상태는 항상 은혜 밖에 있으면서 돈벌이에나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물질 때문에 울고불고 잘하면서도 영혼의 문제를 가지고는 울 줄 모릅니다. 오늘 우리는 성전 미문에 앉아있는 병적인 신앙, 행함이 없는 죽은 신앙은 버리고 힘차게 걸어가는 실천적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환경중심 신자
오늘 본문 56절에 보면, 잡히신 예수를 버리고 제자들이 모두 ‘도망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가 요한은 발가벗고 도망갔을 정도로(막 14:51), 그때 제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신속하고 황급히 도망가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교육과 훈련을 받은 자들이었지만 로마군병의 창칼이 무서워 모두 도망갔습니다. 바로 환경 중심의 신자인 것입니다.
아이가 감기만 들어도 주일날 손님만 찾아와도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비가 오면 길이 질다고, 눈이 오면 길이 미끄럽다고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날씨가 좋으면 일이 바빠서, 사업이 잘되면 시간이 없어서, 사업이 안 되면 안 되기 때문에, 주일은 휴일이니 가족과 함께 지내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처녀 총각은 데이트를 해야 하기 때문에 교회에 빠집니다. 이래저래 환경에 얽매여 못나오게 됩니다.
성전 뜰만 밟는 신자
인간은 모두가 구원을 받기 전에는 형벌을 기다려야 하는 가련한 죄인들이었습니다. 사망을 기다려야 하는 공포에 질린 죄인들이요, 행선지가 지옥으로 확정된 불쌍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렇게도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고 동산 수풀 속에 숨어야 할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 줄 알기 때문에 교회에 나오기는 나오는데 마지못해 습관이나 형식주의에 매여 교회에 나옵니다. 십자가의 보혈에 대한 구속의 말씀을 귀가 닳도록 듣기는 들어도 그 은총에 대한 감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도 없고 기도도 없습니다. 삶의 변화도 없고, 신앙의 성장도 없으며, 깊은 은혜의 체험이 없고 영적 경험이 없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성전 뜰만 밟는 왔다 갔다 하는 신자들입니다.
자기중심의 신자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사나운 맹수나 총칼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입니다. 성경은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을 성벽이 뚫린 도시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바로 원수이며 자기 자신이 제일 무서운 것이고 가장 힘든 싸움은 바로 나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것 때문에 고민을 했습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 낼 수 있나요” 하며 탄식하였습니다. 이렇듯 자신을 이기고 자기중심적인 삶이 아닌 이타적인 삶을 살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오늘날도 병이나 고치고 물질 축복이나 받으려고 교회에 나오다가 기대와는 좀 다르다며 믿음을 헌신짝처럼 팽개쳐 버리고, 자기의 재능과 학식, 문벌 등을 내세워 교만의 냄새나 풍기며 돈 좀 있다고 콧대 높아지는 자기중심의 신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이러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바로 성령의 힘으로써만 자신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에 속한 자가 승리를 하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승리를 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샘에 들어가 본 자만이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으로 가득찬 사람이 되고, 자신의 마음속에 성령의 열매로 풍성한 삶을 살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은혜와 성령으로 충만한 신자
칠흑처럼 어두운 밤하늘에 별은 더욱 빛나고, 세상은 어두워도 신나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더워도 모래판에 천하장사가 된 씨름선수는 신납니다. 아무리 코에서 피가 흐르고, 얼굴은 일그러졌어도 링 안의 챔피언 권투 선수는 신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 안에서 승리할 때 우리는 신나게 살 수 있습니다. 은혜로 충만하고, 성령으로 충만한 신자만이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마귀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나를 이기며 승리할 때 우리는 신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하여 열심히 기도하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큰 능력을 남에게 줄 수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은혜 충만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고 능력으로 충만할 때 승리가 넘치고 신나는 일이 임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신자
자녀가 부모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듯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은 너무나 마땅한 것입니다. 따라서 사업을 할 때나 취직할 때, 봉사할 때나 선한 일을 할 때도, 기도할 때나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며,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께서 하나님 중심의 신자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을 위해 살다가 주님 위해 죽음으로써 하나님 중심의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된 사도 베드로,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으로 변화된 사도 바울,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에녹, 당대의 의인 노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온유함이 승하였던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 모세, 이들은 모두 하나님을 중심으로 산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본을 받아 우리 삶의 중심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고 보호하시고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억지로라도 교회 꾸준히 나오면 기적적으로 변화된다
하나님이신 예수께서 하늘 영광 다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죄 없는 물과 피를 다 쏟으시므로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자의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피가 없었다면 우리는 모두 잃어버린 자요 하나님도 없고 소망도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변화된 모습 속에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억지로라도 꾸준히 교회를 다닐 때 나타나는 기적이요, 축복입니다. 성전 미문 앉은뱅이가 구걸하기 위해 사람들에 끌려 성전 입구까지 나왔더니 기적적인 변화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간음한 여인이 사람들에게 붙들려 강제로 예수님 앞에 나오자 죄사함을 받고 참다운 구원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좋든 싫든 꾸준히 교회에 나아올 때 능력 충만을 받아 신령한 기쁨을 맛볼 수 있고, 거기에 승리의 삶과 축복의 삶이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 예수님 중심, 성령 충만, 은혜 충만, 능력 충만 믿음으로 무장하여 이 험한 세상을 이기고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도 잘되고 강건하는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마 26:44-46 / 조상호 목사
말씀을 나누기 전에 먼저 여러분들에게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어떻게 가는 것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일까요?“ 아마 어떤 분들은 비행기만큼 빠른 교통수단이 없기 때문에 ‘비행기를 타는 것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방법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또 좀 더 생각이 깊은 분들은 공항이 서울 도심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태풍이 불고 폭설이 내리면 비행기가 뜰 수 없기 때문에, 요즘 새로 개통된 ‘고속전철(KTX)을 타는 것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방법은 다름 아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멀고 험한 여행길이라 할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지루하지 않고 즐겁게 여행할 수 있어 오히려 시간이 짧게 느껴집니다.
이처럼 사랑에는 힘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랑에는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아무리 힘든 길이라 할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배고픈 줄 모르고, 피곤한 줄 모르고,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기의 고민과 고통을 알아주는 사람이 자기 곁에 없을 때, 사람들은 쉽게 좌절합니다. 자기의 마음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을 때, 자기와 함께 하는 사람이 없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고독을 느낍니다. 그런데요,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의 생애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도 깊은 고독 가운데 빠지신 적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올라가신 적이 있습니다. 다같이 36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러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셨는데, 혼자 가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가셨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쌔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37~38절) 여기 ‘세베대의 아들들’은 야고보와 요한 두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실 때는 12명의 제자들을 다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셨을 때는 9명의 제자들은 그 자리에 있게 하시고,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세 사람을 따로 데리고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신 후,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누가복음 22장 40절 말씀과 비교해 볼 때, 그냥 아무 의미 없이 앉아 있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 전날 밤, 기도하러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셨는데, 혼자 기도하지 않으시고 제자들과 함께 가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러 가시면서 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세 사람을 데리고 가셨을까요?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물씬 나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던 소경 바디매오의 눈을 고쳐 주셨습니다. 거세게 휘몰아치는 광풍을 잠잠케 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에서는 다섯 번이나 남편을 바꾼 후, 여섯 번째 남자와 살고 있지만, 인생의 갈급함 때문에 사람들을 피한 채 고민하며 살아가고 있는 여인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돈은 많이 벌어 부자가 되었지만 사람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있던 세리장 삭개오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셨습니다. 이처럼 능력이 무한하신 예수님께서 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셨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중에 가장 큰 이유는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똑같이 기뻐하시고 슬퍼하시고 외로움을 느끼시는 인성을 가지신 주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앞에 두고 당신과 함께 있어 줄 기도의 동역자들이 필요했습니다. 십자가의 엄청난 고난 앞에서 함께 기도할 믿음의 친구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이 세 사람은 주님의 기대와는 달리, 고통스러운 밤을 지새우는 주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옛날 어른들이 자주 말씀하시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가정의 한 아들이 돈으로 친구를 사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날마다 “아들아, 돈으로 사귀는 친구는 참 친구가 되기 어려우니, 믿음으로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고 타일렀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아들을 불러서 “네가 참된 친구를 몇 명이나 사귀었느냐?” 라고 묻자, 아들은 “많은 친구를 사귀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네 친구와 내 친구 중 과연 누가 진짜 친구인지 시험해 보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드디어 아들과 아버지는 돼지를 잡아서 가마니에 싼 후, 먼저 아들이 그것을 지고 친구를 찾아가서 ’실수하여 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가져왔으니 좀 숨겨 달라’고 했지만, 모든 친구들이 거절하더랍니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돼지 시체를 둘러메고 친구를 찾아가서 “여보게, 내가 실수로 그만 사람을 죽였는데, 이 시체를 좀 숨겨 주게”라고 했더니, 그 친구는 “당장 들어오게나”라고 하면서 아버지가 메고 간 그것을 창고에 묻으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동안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나중에는 자신이 메고 간 돼지로 큰 잔치를 벌였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는 이야기입니까? 잠언 17장 17절에서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결정적인 위기 때에 진짜 친구인지, 아니면 가짜 친구인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평상시에는 알 수 없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진짜 친구와 가짜 친구가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서 친구역할을 기대하셨습니다. 내일이면 십자가를 져야하는 고독한 이 순간에, 제자들을 친구삼아 함께 기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친구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40절을 보겠습니다.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지셔야 하는 십자가를 생각하며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신 후,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흔들어 깨우면서 “베드로야, 한 시간 동안도 깨어서 기도할 수 없니? 우리가 함께 한 시간만 기도하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두 번째로 제자들을 떠나 다시 기도하셨습니다. 한 참 동안 기도하신 후, 두 번째로 제자들에게 오셨을 때, 제자들은 여전히 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또 제자들을 깨우시며 제자들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세 번째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44~45절) 바로 전에는 ‘어찌하여 자느냐’고 책망하셨는데, 이제는 ‘자고 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뜻을 순순히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어렵지만, 일단 받아들이고 나면 마음이 평안합니다. 예수님도 세 번씩이나 기도하실 때는 십자가를 피하고 싶으셨지만, 세 번의 기도를 마치고 나서는 마음이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기도하지 않은 채,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제 되었다. 나는 이미 준비가 다 끝났다. 너희들은 자거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완전히 깨달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46절을 보겠습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그러면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는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1) 믿음으로 결단하라
첫째로, 믿음으로 결단하라는 말입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는 말씀은 강한 결단을 촉구하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기도의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때가 가까웠기 때문에, 이제 모든 상황을 정리해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그 동안 기도했으면 이제는 실천하기 위해서 믿음으로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시는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것은 사람으로 차마 감당할 수 없는 힘들고 어려운 길입니다. 죄가 없으신 주님께서는 이미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고, 고난 후에 주어질 영광을 보셨기 때문에 의연하게 결단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나와 함께 가자’고 말씀하시며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결단을 촉구하신 주님께서는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의 결단이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믿음의 결단이 기적을 일으키는 열쇠가 된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왕비 에스더가 하만의 계략을 알고 “죽으면 죽으리라” 결단하고, 왕에게 나아갔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만의 음모를 만 천하에 드러냈을 뿐 아니라, 몰살 할 수밖에 없었던 유다 민족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결단할 때 역사가 나타납니다.
옛날 중국에 어리석어 보이는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노인의 집 앞에 산이 있었는데, 그 산 때문에 노인은 늘 불편을 느꼈습니다. 어느 날 이 노인은 그 산을 옮길 작정으로 산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산에 살고 있던 산신령이 나타나서 그 노인을 비웃으며 말했습니다. “아니, 이 어리석은 노인아! 산을 판다고 그 산이 없어지겠느냐?” 그러자 한자로 우공(寓公), 즉 그 어리석은 노인은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파다가 안 되면 내 아들이 파고, 내 아들이 파다가 안 되면 내 아들의 아들이 파고, 내 아들의 아들이 파다가 안 되면 내 아들의 아들의 아들이 파면 되지요. 그리고....” 이 대답을 들은 산신령은 기겁을 하고 놀라서 산을 한꺼번에 옮겨버렸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유래되어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의미의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우공이산’이라는 말은, 중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고사성어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이 말은 어쩌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가장 필요한 말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결단하지 않고서는 결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단을 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승리하려면 믿음의 결단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면 믿음의 결단이 우리에게도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만약 우리가 결단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흐지부지 하다가 목표도 이루지 못한 채 끝나 버리고 말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 중도에 포기해 버릴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게서는 제자들에게 결단을 요구하신 것임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믿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2) 믿음으로 행동하라
둘째로 믿음으로 행동하라는 말입니다.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는 이 말씀은 이제 행동할 시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결단했으면 행동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기도하신 후, 믿음으로 결단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믿음으로 행동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 보면 건강하지 못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결단은 수도 없이 많이 하는데, 정작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대학생이 되면’이라는 제목의 글을 보았습니다. 그 내용을 전부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1) 대학생이 되면 선생님들이 말하던 캠퍼스의 낭만이 있는 줄 알았다. 2) 대학생이 되면 언제든지 미팅 약속이 있는 줄 알았다. 3) 대학생이 되면 누구나 다 CC(Campus Couple)가 되는 줄 알았다. 4) 대학생이 되면 시간이 남는 줄 알았다. 5) 대학생이 되면 학교에 늦게 가도 되는 줄 알았다. 6) 대학생이 되면 시험에 대한 압박이 더 이상 없는 줄 알았다. 7) 대학생이 되면 두툼한 원서를 마음대로 읽을 수 있을 줄 알았다. 8) 대학생이 되면 잔디에 앉아서 고상한 주제로 토론할 수 있을 줄 알았다. 9) 대학생이 되면 MT(Membership Training) 가서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다.
일반적으로 고등학생들은 나중에 대학생만 되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며,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을 기대합니다. 그들은 그 날만을 기다리면서 어려운 고등학교 시절을 보냅니다. 그러나 막상 대학생이 되면 대학 생활이 그리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얼마 있지 않아 깨닫게 됩니다. 리포트에 시달려야 하고, Fail하지 않으려다가 스트레스 받아야 하고, 졸업 후 취직을 하기 위해서 인터뷰나 어학, 등 여러 가지 준비를 해야 합니다. 결국 고등학생 때 “내가 대학생이 되면 저절로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되겠지”라고 생각한 것은 순전히 착각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비슷한 착각을 믿는 사람들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기도는 열심히 하는데, 결단은 잘 하는데,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세월만 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가만히 자리를 틀고 앉아 명상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는 가만히 앉아 사과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종교가 아닙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결단했으면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어느 글에서 길리아 총독이었던 줄리어스 카이사르 장군의 이야기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카이사르는 로마의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군대를 거느리고 로마로 진격해 갔습니다. 마침내 로마시를 바라보며 루비콘 강가에 멈추었습니다. “성공하면 나는 영웅이 되지만 실패하면 죽는다. 과연 이것은 현명한 판단인가? 내가 승리할 수 있을까?”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어디선가 나팔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 순간 카이사르는 마음에 결단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라고 외치며 로마에 진군하여, 결국에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입니다.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는 이러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예수를 믿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순종의 학교에 입학한다.” 우리가 한평생 배워야 할 것은 순종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순종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면 홍해가 갈라지는 것 같은 기적을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가면 요단강에 길이 생기는 것 같은 기적을 체험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2,000년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주님께서는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이제는 기도의 자리에서 일어날 때가 되었다. 결단을 했으면 이제는 일어나라! 주저앉아 있지 만 말고 믿음으로 행동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의 이 음성을 들으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세운 비전을 향해 믿음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3) 믿음으로 함께 하라
셋째로 “일어나라 함께 가자”는 말씀은 믿음으로 함께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 오실 때, 혼자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 세 사람과 함께 올라 오셨습니다. 이제 겟세마네 동산을 내려 갈 때도 같이 가자는 것입니다. 기도하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에 함께 올라온 제자들에게 골고다 언덕길도 함께 올라가자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뿐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들이 믿음 안에서 함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 뿐 아니라, 성도들 간에도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44절과 45절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초대교회에는 바로 이 공동체 의식이 있었습니다. 또 에베소서 2장 19절에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더 이상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 ‘하나님의 권속’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믿음으로 함께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현대교회의 성도들은 함께 하지 않는 특징이 있습니다. 구속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조용히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바람과 같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혼자서는 신앙을 지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영국 출신의 허드슨 테일러선교사는 현대 선교역사에 매우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입니다. 그가 중국 선교사로 파송된지 얼마 있지 않아 커다란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의욕적으로 여러 가지 일을 추진하다가 선교본부와의 의견차이로 마찰을 빚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선교본부로부터 경고장이 날아왔습니다. “선교본부를 탈퇴하든지 지금까지 진행해온 모든 프로젝트를 중단하든지 선택하라!” 이 경고문을 받고 그는 아주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게다가 거의 같은 시기에 또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편지는 애인에게서 온 편지였습니다. 허드슨 테일러의 모험적인 삶의 태도 때문에 그와 일생을 같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애인이 절교의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더욱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 두 통의 편지로 선교는 물론 인생까지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위기에 빠졌던 그가 중국 선교를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보다 20 살이나 나이가 많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윌리엄 번즈 선교사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두 통의 편지를 받고 절망하고 있는 허드슨 테일러에게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잊고 나와 같이 여행을 떠나세.” 그래서 두 선교사는 7개월간의 중국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중국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휴식도 취하고 같이 사역을 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여행을 통해 허드슨 테일러가 회복되었습니다. 그가 회복 될 수 있었던 것은 윌리엄 번즈의 두 마디 말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자네를 믿네.“ ”나는 자네를 따를 걸세.“ 윌리엄 번즈는 7개월간의 여행 동안 허드슨 테일러에게 계속 이 두 마디 말을 했다고 합니다. 후에 허드슨 테일러는 그 때 일을 회고하며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나는 인생의 위기를 극복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초대교회의 특징입니다. 초대교회를 자세히 살펴보면, 예루살렘의 마가 다락방이나, 데살로니가의 야손의 집이나, 빌립보의 루디아의 집이나, 라오디게아의 눔바의 집과 같은 조그마한 가정교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가정교회에 모여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나누었을 뿐 아니라,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주님의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로마의 무서운 핍박 속에서도 견딜 수 있었던 비결은 그들이 믿음으로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기대만큼 성장하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 중의 하는 나홀로 신앙 때문입니다. 아무리 자기 혼자 결심을 하여도 그 결심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왜 우리가 자꾸 죄에 대해 무력한 줄 아십니까? 나홀로 신앙생활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3장 13절에서 죄를 이길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팍케 됨을 면하라.” 매일 피차 권면하는 자가 있으면 죄를 이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홀로 신앙생활 하지 않고 더불어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그 동안 샘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할지라도 이번 주부터 새롭게 개편된 샘모임에 나가서 믿음으로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을 맺겠습니다. 주님께서 마음이 심히 괴롭고 슬픈 가운데 기도하셨지만, 제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주님의 그 마음을 알고 함께 깨어 기도하는 사람 없습니다. 제자들은 마치 남의 일같이 생각하고 잠을 잤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깨우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이 음성을 들으십니까? 주님께서는 나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통해서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의 그 부름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에 반응하여 순종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깊은 잠이 빠져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에 응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결단하고, 믿음으로 나아가고, 믿음으로 함께 하여 세상을 이기며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 친구야!
마 26:47-56 / 안효관 목사
예수님에게 배신과 죽음의 그림자가 점점 드리워지고 있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간절한 기도를 마치실 즈음에 한 무리의 군병들이 겟세마네 동산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흘리며 기도하시던 예수님께서 “일어나라. 함께 가자.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다.”고 말씀하시며 겟세마네 동산을 빠져나가려는 순간에, 가롯 유다를 앞세우고 수백 명의 군사들이 손에 칼과 몽치를 들고 예수님을 체포하시 위해서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은 사전에 서로 암호를 짰습니다. 그들이 오늘 저녁 체포할 대상은 예수님이었습니다. 혹시 캄캄한 밤인지라 얼굴을 확실하게 분별하지 못해 다른 사람을 예수님인줄 착각하고 잡으려는 순간 예수님을 놓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 생활했던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정확하게 짚어주기 위해서 암호를 짠 것입니다. 그 암호는 가롯 유다가 예수님께 다가가서 입맞춤을 하면 그 순간 군병들이 예수님을 둘러싸고서 예수님을 체포하자는 것입니다.
군사들을 이끌고 앞장서서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선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보자마자 곧장 예수님을 향해 다가갔습니다. 얼굴에는 음흉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캄캄한 밤인지라 제자들은 그의 얼굴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가식적이고 음흉한 웃음을 띤 가롯 유다가 예수님께로 다가서서 입을 맞추며 인사를 합니다.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가롯 유다의 이런 행동은 정말 가식적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버린 배신자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가와 입을 맞추는 것도 그렇거니와, 이런 상황에서 “안녕하시느냐?”고 묻는 것도 그렇습니다. 정말 양심이 있다면 그렇게 행동해서도 안 되고, 그렇게 말해서도 안 됩니다.
불과 몇 시간 전으로 돌아가 보아도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불과 몇 시간 전에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만찬을 나누었습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 가까이에서 예수님과 함께 떡을 떼며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저녁 식사를 하시던 도중에 조용히 일어서시더니 겉옷을 벗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친히 대야에다가 물을 담아 오시더니 제자들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너무 놀라운 광경에 제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예수님의 행동을 조용히 지켜볼 뿐입니다. 선생님이요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종들이나 하는 일을 친히 하시다니, 어느 누군가가 선뜻 나서 예수님의 행동을 말리든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도 아무 말을 하지 않습니다.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는 사이 예수님께서는 가롯 유다 앞에도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천천히 가롯 유다의 발을 대야로 끌어오시더니 정성껏 씻겨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이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할 것을 말입니다. 이미 가롯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짜고서 노예 한 사람의 몸 값인 은 30에 예수님을 팔기로 약속한 것을 알고 게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가롯 유다의 발도 친히 씻어주십니다. 예수님을 팔기 위해서 대제사장을 찾아갔던 발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몰래 음모를 꾸미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느라 먼지투성이가 된 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가롯 유다의 발을 사랑스럽게 씻겨 주십니다. 그것은 끝까지 사랑하시는(요한복음 13:1) 예수님의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롯 유다가 지금 군대를 이끌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가식적인 얼굴을 하고서 예수님을 향하여 ‘랍비여’라고 부릅니다. ‘안녕하시냐?’고도 묻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그런 인사가 가당치나 한 말입니까?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씀하십니다.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지금까지 가롯 유다가 어떤 일을 꾸미고 있었고, 왜 지금 그곳에 왔는지 모른다면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마지막 만찬을 잡수실 때에도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26:21,23)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그 결과 예수님께서는 온갖 고초를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배신자 가롯 유다를 향해서 “친구여!”라고 사랑스럽게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고난의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것인지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는 것이 너무 힘듦을 아셨기에 지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심히 고민하시고 슬퍼하셨습니다.(마태복음 26:37)
예수님은 비단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만 가롯 유다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롯 유다를 믿어주셨습니다. 그를 다른 제자들보다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돈주머니를 맡기셨습니다. 그의 능력을 인정해 주셨고, 그를 신뢰하셨습니다. 가롯 유다가 그 돈주머니에서 돈을 훔쳐갈지라도 예수님은 그것 때문에 가롯 유다를 파면하지도 않으셨고, 심지어 책망조차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가롯 유다는 자신을 그렇게 믿어주었던 선생님을 배신했습니다. 3년 동안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보여주고 그 나라를 이루자고 함께 동고동락했던 선생님을 은 30에 팔아먹었습니다. 마치 노예를 팔듯이 말입니다. 그 배신은 단순한 배신이 아닙니다. 가롯 유다의 배신으로 예수님을 엄청난 고난를 겪으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치욕스런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습니다.
믿어주고 사랑해 주셨던 스승을 고난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배신자가 바로 가롯 유다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를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여러분,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함께 웃고 울었던 아주 절친한 친구가 여러분을 배신했다면 말입니다. 가장 믿어주었던 그 친구 때문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큰 시련에 빠지게 되었다면 말입니다. 그럼에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나를 향하여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그 동안 잘 지냈느냐?’고 인사해 온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사소한 문제로 친구가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믿을만한 친구가 나에 대해서 험담을 하고 돌아다닌다면 그 친구를 만났을 때 만나자마다 따져 물을 것입니다. 때론 친구 때문에 내가 작은 손해를 입었다면 우리는 그를 두 번 다시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롯 유다를 향하여 ‘너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냥 조용한 목소리로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잡기 위해서 칼과 몽치를 들고 뒤따라온 수많은 군인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롯 유다를 향하여 “친구”라고 불러주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배신자를 ‘친구’라고 부르실 수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은 하나님의 모습이기보다는 철저하게 인간적인 모습이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다’고 기도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심히 슬퍼하며 고민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너무 힘드니까 너희들도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제자들에게 부탁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땀이 핏방울처럼 흘러내리도록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시던 예수님이셨습니다.(누가복음 22:44) 하나님의 모습보다는 우리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철저한 인간의 모습이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어떻게 자기를 배신하고 자기를 잡으려고 군대를 이끌고 와서는 거짓된 미소로 ‘안녕하시냐?’고 인사하는 가롯 유다를 향하여,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친구여’ 라고 부르실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가롯 유다를 보시면서 그의 배신보다는 그의 생명을 먼저 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외모를 보고 판단합니다. 마음을 잘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중심을 볼 수 없는 우리는 그가 한 말 한마디로 그를 판단하고, 그가 나에게 한 행동 하나로 그를 판단합니다. 친절한 말 한 마디에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에게 조금만 잘 대해주면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반대로 내 마음에 조금만 안 들면 ‘못된 사람’이라고 치부해버립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난 말이나 행동보다 더 중요한 한 생명으로 가롯 유다를 보셨습니다.
세상에 그 어떤 무엇보다 소중한 생명으로 보셨기에, 비록 자신을 배신할지라도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세상에 그 무엇보다 소중한 생명으로 보셨기에 배신할 줄 알면서도 그의 발을 씻겨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롯 유다의 배신의 행위를 보지 않으시고 그의 생명을 보셨기에 ‘친구’라고 불러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 생명 자체로 소중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갖고 있는 한 그가 어떤 행동을 할지라도, 그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는 소중합니다. 사랑받기에 합당한 존재입니다.
그가 비록 나를 배신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소중한 사람으로 보십니다. 그가 나에게 손해를 입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십니다. 그가 내 마음에 커다란 상처를 주었다 하더라도, 그런 그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만큼 그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도 예전엔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지금도 때론 우리가 그런 모습으로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망각하고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을 외면한 채 살기도 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죄를 지으며 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주셨는데, 우리는 우리의 욕심을 챙기기 위해서 하나님 없는 자처럼 살기도 합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사랑해 주십니다. 우리가 배신해도 사랑해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여전히 사랑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른 체 하고 하나님 손길을 뿌리치며 거부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배신의 칼과 몽치를 들고 겟세마네 동산에 찾아온 가롯 유다를 향하여 ‘친구여’라고 불러주신 것처럼, 오늘도 죄와 허물의 누더기를 쓴 채 가슴에는 분노의 칼을 갈고 살아가는 우리를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친구여!’라고 불러 주십니다. ‘내 사랑하는 자여!’라고 사랑스럽게 불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배신자 가롯 유다를 바라보시며 ‘친구여’라고 부르실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배신한 그 친구보다 하나님을 더 먼저 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곁에 서 있던 베드로는 배신한 가롯 유다와 가롯 유다의 뒤를 따라온 군인들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러자 분노가 그 가슴에 끓어올랐습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가슴에 품고 있던 칼을 꺼내들고서 냅다 휘둘렀습니다. 베드로가 휘두른 칼은 대제사장의 종의 얼굴을 향했습니다. 깜짝 놀란 대제사장의 종이 칼을 피하기 위해 얼굴을 틀었지만, 그 칼이 그만 대제사장 종의 귀를 잘라버리고 말았습니다. 시원한 복수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책망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체포하기 위해서 군병들을 이끌고 겟세마네 동산까지 찾아온 배신자 가롯 유다를 향해서는 단 한 번도 꾸짖거나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지켜드리겠다고 칼을 빼든 베드로를 향해서는 ‘빨리 칼을 칼집에 꽂으라.’고 말씀하시면서 책망하셨습니다. 책망 받을 사람은 베드로가 아니라 가롯 유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베드로를 책망하셨습니까? 예수님을 지켜드리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칼을 휘둘렀는데, 왜 책망을 받아야 합니까? 베드로는 그 순간에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배신자 가롯 유다와 예수님을 잡으러 온 군병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주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열 두 군단도 더 되는 천사들을 동원해서라도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구해주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셨기에 예수님께서는 그 긴박한 상황 가운데서도 오히려 여유롭게 행동하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다급한 일이 닥치면 왜 우리는 불안해합니까? 억울한 일을 당하면 왜 흥분합니까? 손해를 입었을 때 왜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들끓어 오릅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보고 환경을 보기 때문에 불안해하고,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아주 극심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집사 가운데 하나였던 스데반입니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자신의 신앙을 변호했습니다. ‘왜 내가 예수를 믿을 수밖에 없는지, 왜 예수님만이 구원이 되는지.’ 그리고 ‘당신들이 죽인 그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메시야라고’ 그는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산헤드린 공회 공회원들이 죄책감에 흥분하며 이를 갈았습니다. 자신들의 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적개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 때 스데반은 적개심을 품고 이를 갈면서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그들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았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순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났습니다. 자신을 향해서 돌맹이를 던지는 그들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리고는 순교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수 있었던 믿음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자신을 향하여 돌맹이를 던지며 자신을 죽인 그들을 용서할 수 있는 믿음이 어디서 나왔습니까? 아무리 신앙이 좋은 스데반이라 하더라도 분노에 가득차서 이를 갈며 달려드는 그들을 바라보았다면 스데반은 용맹스럽게 순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뭘 잘못했느냐?’고 따지고 싶어졌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그는 영광스러운 순교자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때로 불안이 우리 가슴 가득히 밀려올 때 있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미워지고, 누군가로 인해서 마음이 격한 감정에 휩싸이게 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 때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그러면 스데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얼굴도 천사의 얼굴처럼 될 수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 하나님을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편 42:11) 이 시인의 아름다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배신자를 향하여 ‘친구여’라고 부르실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자신의 고통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생각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십자가를 선택할 수밖에 없으셨던 이유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라고 가식적인 입맞춤을 하는 가롯 유다를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칼을 뽑아 대제사장 종의 귀를 잘라버린 베드로를 향하여도 ‘열 두 군단도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자기를 잡으러 온 군사들을 향해서도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이 모든 일이 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이기에 순응하며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가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대로 열 두 군단도 더 되는 천사를 요청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냥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까? 그 고난의 길, 그 십자가의 길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유다의 배신도 유다만을 탓할 일이 아닙니다. 비록 스승을 배신한 유다의 잘못도 분명 있습니다만, 예수님은 그 배신보다도 그것을 통해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뜻을 보셨고 그 길을 가길 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유다를 원망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나 여러 가지 힘든 문제들이 나름대로 그 원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때로는 누군가 때문에 내가 고난을 당하고, 누군가 때문에 내가 손해를 보고, 누군가 때문에 내 마음이 아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주님처럼 생각하고 주님처럼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원수가 원수로 보이지 않고, 친구처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나에게 어떤 고난을 안긴 사람이나 손해를 입힌 사람이라 하더라도 예수님처럼 ‘친구여!’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누군가를 향해 분노하고 화를 내고 싶을 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렇게 함으로서 순간적인 우리의 감정은 조금 풀어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영원한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당한 만큼 갚아 주어야 속이 시원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결국에는 나에게 더 큰 고통을 안길 뿐입니다.
책망이나 비판보다는 용서와 사랑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야 하는 우리는 우리의 감정이 쏟아놓으라고 속삭이는 마귀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예수님의 삶과 인격 닮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신앙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길입니다.
이런 이야기 들어보셨습니까? 결혼 한 지 얼마 안 된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이웃집에 갔다가 안방 화장대에 놓인 진주 반지를 보고선 순간적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훔치고 말았습니다. 다음날 오후가 돼서야 이웃집 아주머니는 자신의 반지가 사라진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젊은 새댁이 범인이라고 생각한 아주머니는 새댁을 찾아와 반지를 내놓으라고 소리쳤습니다. 새댁은 ‘자신은 가져가지 않았다’고 발뺌을 하지만, ‘우리 집 안방에 들어온 사람이 새댁밖에 없었는데 거짓말을 할거냐?’며 새댁을 몰아붙였습니다. 결국 아주머니는 경찰까지 불렀고, 온 동네 사람들은 큰 구경거리라도 난 것처럼 모여들었습니다.
마침 퇴근하고 돌아 온 새댁의 남편이 그 상황을 보게 됐습니다. 남편은 구경꾼들에게 큰 소리로 호통을 쳤습니다. “제 아내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왜 내 아내에게 그런 누명을 씌우는 겁니까? 저는 제 아내를 믿습니다. 그러니 모두 돌아가 주십시오.” 강한 어조로 말하는 남편의 말에 기가 죽은 사람들이 하나 둘 자리를 떠났고, 경찰은 물론 이웃집 아주머니도 할 말을 잃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 후 남편은 아내가 안정을 취하도록 침대에 뉘었습니다. 그리고 아내가 잠이 들자 전날 밤 화장대 서랍에서 보았던 그 반지를 꺼내 들고 조용히 이웃집을 찾았습니다. 남편은 아주머니에게 반지를 건네며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제 아내가 한 순간의 욕심을 이기지 못하고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습니다. 아내와 저는 한 마음이고 한 몸입니다. 그러니 아내의 잘못은 제 잘못이기도 합니다. 차라리 저를 벌해 주십시오.”
남편의 진실한 사랑에 깊이 감동한 아주머니는 말없이 남편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멀리서 남편의 행동을 모두 지켜본 새댁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남편의 강한 믿음과 깊은 사랑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새댁은 다음날 동이 트자마자 아주머니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깊이 사죄했습니다. 그러자 아주머니가 새댁의 손을 꼭 잡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새댁이 부럽네요.”
화풀이로는 절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원수를 원수로 대할 때에는 그리스도의 평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원수’를 ‘친구’로 부를 수 있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만 우리가 사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마 26:47-58 / 박지온 목사
오늘 본문 말씀에서 "어찌 이런 일이!"라고 이렇게 제목을 삼았습니다. 54절에 보면,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54절 전체를 쉽게 그냥 이렇게 의역을 해서, "어찌 이런 일이" 그렇게 제목을 잡았습니다. 한번 받아합시다. "어찌 이런 일이!" 좀 더 개인에게 가깝게 말하자면, "어찌 내게 이런 일이!" 오늘 이렇게 좀 방향을 잡았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말씀은 제자들로서는 도저히 수용보다도 너무 놀랄 일이요, 그들의 인생이 허물어지는 것 같은 사건이 바로 본문에서 한마디로 표현이 됩니다.
그러면서 오늘 이 내용과 이 사건이 개개인에게 어떻게 말씀으로 적용되고, 우리가 이런 일이나 사건이 생겼을 때에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이 또 방향으로 제시됨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리라! 그리고 대제사장들에게 잡혀 가지고 끝을 맺으리라!'는 생각은 제자들은 전혀 상상도 못했습니다. 또 얼마든지 그렇게 안될 수 있는, 말하자면 그런 어떤 상황 속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늘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기도하면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동원해서 일시에 저들을 멸할 수 없겠느냐? 그런 일이 없는 줄 아느냐?'
그러면서 그렇게 하게 된다 그러면 중요한 것은, '성경이 내게 대해서, 또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약속한 것이 어찌 이루어질 수 있느냐?'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제자들은 이 사실이 사실적으로 저희들에게 부닥치게 되고, 예수님이 잡히시게 되고, 또 예수님이 잡히시는 이런 상황 속에서 전부 다 도망을 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런 너무 급박하고, 너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
지난번에 계속해서 베드로의 신앙고백 속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지 내 감정이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그걸 계속해서 강조를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 가정이나 우리 교회에서나 일어나는 모든 상황이 말씀이 성취되지! '아이고, 이거 큰일났구나! 이렇게 될 것 같다! 저렇게 될 것 같다!' 내 느낌이나 내 감정이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교회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복음을 이 땅에 가져오시고, 또 본인이 복음으로 확실하게 하나님의 축복된 역사를 세우시면서, 이 복음을 계속해서 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살길인 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을 불러서 그냥 사명을 맡긴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을 불러서 사명 맡긴 것이 아니고 오히려 어떤 경우냐 하면, 소수를 불렀다! 우리가 잘 알죠. 그래서 열두 제자를 불렀고, 70인 요원들을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고, 그들에게 어떤 기술을 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딱 한가지 뭘 했느냐? 어떤 문제나 어떤 사건이나 어떤 일이 닥쳐와도 절대 무너지지 않는 믿음을 전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소수를 붙들고 소수에 집중하게 된 배경은, 그 소수들이 어떤 문제나 어떤 환경에도 무너지지 않도록, 무너지지 않는 이런 믿음을 전달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많이 초기에 강조를 했죠. 헬라사상에도, 로마의 정치에도, 어떤 것에도 굴복치 않는 사람들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세계를 정복했다! 그렇게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간도 말씀을 통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을 교회에 불러서 하나님이 먼저 뭘 원하시느냐? '뭘 받았다! 이걸 받았다! 저걸 받았다!' 감정이 아닙니다. 먼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확인하시면서, 또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함께 하시면서,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 약속하신 그 배경 속에는 어떤 문제나 사건이 생겨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사람을 만드는 것이 첫 번째 문제입니다. 또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사실적인 역사와 축복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보세요, 우리는 조금만 문제 있으면 얼마나 잘 흔들리는지 모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뭘 느끼느냐 하면, 이 건강이 좋지 못하니까 뭔가 이 의사의 말 한마디에도, 그 다음에 사람들이 봤을 때에 뭐 한마디 말하는 것에도 왔다갔다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내가 왜 이럴까!' 싶은 때가 있어요. 아마 여러분들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약한지 모릅니다. 뭐 조금만 이러면 이리 넘어갔다가 조금만 저러면 저리 넘어갔다가... 그런데 그게 얼마나 무서운 그리고 어리석은 신앙의 생활이다! 삶이다!
그래서 믿음 생활은 어떤 면에서 갈릴리 어부들을 선택하고, 또 지금까지 신앙생활에서 보면 많은 어떤 깊이 있는 지식인들을 선택하고, 재주 있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고 이런 사람을 선택한 배경이 뭐냐하면, 요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죠. 믿음 이외에 먼저 다른 것이 들어가게 되면, 내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외에 다른 게 들어가게 되면, 자꾸 이게 흔들리는 겁니다. 그래서 사단도 흔들리는 사람을 건드리지, 안 흔들리는 사람은 건드릴 재미가 없어서 못 건드립니다. 뭔가 이 건드리면 흔들흔들 그래야 신이 나고 기분도 좋은데, 건드려봐야 아무 반응이 없다! 그건 건드려 봐야 아무런 반응이 안 생기죠. 그래서 사단도 확신이 없이 왔다갔다하고, 희미한 사람들을 자꾸 건드리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금 신앙생활에서, 특별히 말세에 앞으로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에 하나님의 축복된 역사 속에 확실하게 서서, 여러분과 저를 한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러면 흔들릴 필요가 없어요. 왜? 절대적으로 놓치지 않고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지키실 것을, 언약으로 뭡니까? 약속해 주었습니다. 이 사실을 붙잡고 흔들리지 않으면, 사단이 한번 두 번 건드리다가도 재미없어서 떠나 버립니다. 한번 두 번 건드려 가지고 흔들흔들 거리면 재미가 있어서 자꾸 건들입니다. 자꾸 흔들흔들 거리면 옆에서 킥킥 웃으면서 또 건들입니다. 우리가 그걸 모르고 자꾸 속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주님께서 한번 붙잡았다! 놓치지 않습니다. 끝까지 여러분을 지키시고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언약, 언약하는 것은 보통문제가 아니거든요.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생명 주셨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감기한번 걸려 가지고 나았다! 기분 좋다! 그 문제하고 다른 문제입니다. 근본문제가 여기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뭘 느끼느냐 하면, '정말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우리 자신들이 너무 귀하다!' 이걸 느낄 필요가 있고,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흔히 보면, '나는 교회에서 아무것도 안하고 무슨 가치가 있느냐?' 그래서 더러 저를 만나러 오셔서 하는 이야기가, '나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이런 소리를 더러 하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사실은 여러분 그 소리하는 그것이 뭐 겸손해서 하고, 뭐 자기들이 뭔가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모르지만 그것만큼 하나님이 기분 나쁜 게 없어요. 왜? 얼마나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뭡니까? 생명을 주시고, 독생자 주시고, 큰 가치를 부여했는데! '나는 가치 없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분 나쁜 겁니다. 우리 스스로 뭘 깨달아야 하느냐? 받아합시다. "나는 이 세상에서 둘도 없는 가치 있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흔들리게 되면 사단이 유혹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찌 이런 일이! 여기에서 흔들리지 않는 신앙에서 비로소 이 눈이 열리게 됩니다.
개인적인 간증을 좀 하려고 합니다. 이번 일 이주 동안에 일어났던 것이 제 개인적으로 드리고 말씀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그것이 뭐냐하면,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지난 주일에도 건들건들 거리면서 억지로 성찬예식을 드렸죠. 성찬예식을 그렇게 짜깁기하듯 드린 적은 처음 아닙니까! 그런 동안에 상당히 제 개인적으로 어느 때보다도 절망이 오더라 구요. 그래서 사실은 이 어찌 이런 일이라는 것은, 사실은 제 이야기입니다. '어떤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느냐? 어찌 이런 일이 우리 교회에 목사에게 일어나느냐?' 이런 배경이에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그런데 사실상 중요한 것은, 어찌 이런 일이라는 이 일이 나는 어찌 이런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것이 어찌 순간적으로 또 어찌 짧았던 시간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오래 전에 벌써, 누구의 계획입니까? 하나님의 계획이더라 구요. 여러분들이 개인적으로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예수 믿고 신앙 생활하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느냐?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 말할 수 있어요. 받아합시다. "그러나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살펴보면 이미 오래 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의 시간표다!" 하나님의 시간표예요. 그게 이해가 되면 여러분 지금 닥치는 데로 모든 문제나 사건이 어찌 이런 일이, 그러다가 새로운 시각이 열리게 됩니다.
그래서 너무 좀 힘들고, 어찌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느냐? 왜, '모두 잘도 걸어다니고 잘도 숨쉬는데, 나에게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 그래가지고 매일 하여튼 막 죽으면 죽고, 뭐 지금까지 죽는다 그러다가도 살았는데, 그래서 이제 계속해서 매일 옥상에 올라가면서 도대체 어찌 이런 일이, 무슨 일이 내게 일어나느냐? 다급한 기도를 하고 있는 중에 어떤 생각이 드느냐 하면, 한 15년 되었습니다. 우리가 선교사를 처음 일본에 파송 할 때에 그때에 선교사를 파송 한다고 결정해 가지고 보냈지만, 길이 안 열리네요. 이정호 일본선교사님인데, 길이 안 열려서 애를 쓰다가 그만 거의 포기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그만 관둬야 되겠다! 안그러면 아프리카나 저쪽으로 보내야 되겠다!'고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있다가 그때 마침 우리 이재철 집사님 댁에 관계되는 일이 있어서 안동에 갔다가 들어오니까, 서주일 집사님이 계실 때인데 부인 집사인 박 집사님이 뭐라 그러느냐 하면, '목사님, 세광이가 죽었어요!'그래요. 그래서 깜짝 놀라 가지고 어떻게 되었는가보니까, 학교 갔다가 와 가지고 연탄난로를 화덕채로 목욕탕에 넣어 놓았는데, 거기에 들어가 가지고 화덕을 그대로 놔두고 목욕을 했는데요. 목욕을 하고 있는 중에 문을 닫고 목욕을 하니까 연탄 가스에 취할 거 아닙니까, 그대로 가버렸어요. 축 늘어진 아이를 업고 산소 통에 넣어놨다 그래요. 그러니까 그때에 마음에,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 그래서 뛰어가 가지고 보니까 산소 통에서 막나왔어요. 살아 가지고, 막 나와 가지고 나를 딱 보더니만 눈 한쪽을 찡긋 하더라 구요. 염려하지 말라는 표지죠.
그때 돌아와서 마음에, '어찌 나에게 이런 일이' 그러다가 탁 마음에 돌아가는 것이, '빨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교다! 선교해야 되겠다! 선교사를 보내자! 이미 보내려는 선교사 왜 자꾸 뒤로 미루느냐! 보내라!' 이런 생각이 들어요. 이런 생각이 들어서 정말 그때는 처음 초기에 선교사 파송 할 때에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도 뜨겁게 하고 파송 했습니다. 그 이튿날 당장 제가 그랬습니다. '이 선교사님 빨리 들어가 봐라! 하나님이 열어주실 것이다!' 그래가지고 그 이튿날 다시 들어갔습니다. 들어갔는데, 내가 어찌 이런 일이 그러고 조금 전까지도 안되었던 선교사비자가 그 일을 당하고 난 후에, 진짜 마음에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빨리 들어가 봐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보냈는데, 3일 후에 연락이 왔어요. 목사님 되었습니다. 그래요. 지금까지 안되던 비자가 3일 후에 일본에 들어가서 선교사비자가 나왔다고... 그래서 처음 선교사 파송을 했습니다.
그때에 선교사를 파송 해놓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말 마음을 담아서 하나님 앞에 선교사역을 위해서 뜨거운 기도를 하고 했죠. 그런데 선교를 했기 때문에 복을 받았다고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아요. 왜? 당연히 할 수밖에 없고, 해야 되는 것이 이 일이거든요. 정말 복음을 깨닫고 진짜 복음을 안다면, 이건 뭐 당연히 해야 될 문제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제게 오늘 일본에 바른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때 급하게 문을 열어주셨던 것이다! 문을 여는 과정에서 내게 어찌 이런 일이, 이런 사건이 연결되더라 구요.
그러면서 지금에 내 마음이 어떻고, 지금의 우리 교회 마음이 어떠냐? 이런 마음이 들면서, '맞다!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선교사역, 세계 복음화!' 물론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할 수 있지만, 복음 조금 깨달았다고 급하게 지금 요구하고 계시는데, 우리는 마음을 못 담았어요. 모르겠습니다. 내 개인적으로 느끼는 것이 나도 그렇고, 우리 전체 교회가 정말 선교 정말 전도에 마음을 못 담았다! 정말 뜨겁게 내 인생에 남은 시간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교했기 때문에 복을 받았다! 전도했기 때문에 복을 받았다!' 이 문제가 아니고, 정말 마음을 담아야 되겠다! 이 마음을 담는다는 것은 여기에 뜨겁게 뭐가 나옵니까? 기도가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에 지금 뭐가 없느냐? 안팎에 기도가 없어져 버렸어요. 정말 하나님 앞에 세계 선교해야 되겠다. 그래서 지금 어떤 마음이 드느냐 하면, 교회를 건축한다! 나는 어떤 감격이 오느냐 하면, 대구시내에 여러 교회가 있지만, 많은 교회가 있지만 복음 조금 안다고 그 복음 들고 세계를 나가서 선교하라는 그런 사인으로 우리에게 뭘 주십니까? 새 성전을 허락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새 성전 허락할 때에, 새 성전 지어서 부흥하겠다! 그 문제가 아닙니다. 새 성전 짓고 부흥한다는 것보다도 세계 복음화라는 사인입니다.
이래서 우리 인생을 정말 전도와 선교에 마음을 담아야 되겠다! 생각을 담아야 되겠다! 그래서 내가 마음을 담고, 우리 모든 성도들이 마음을 담고, 진짜 선교와 전도에 그냥 말로 하는 게 아니고, 중심으로 훈련받고,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시간 있다, 없다! 이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로 중심이 되면 핑계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정말 기도하고, 세계선교를 위해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 성전건축! 물론 우리가 진심으로 기도하고 주님 앞에 서야겠다! 어찌 내게 이런 일이! 다른 게 아닙니다. 어찌 이 축복된 역사를 위해서 일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다른 게 아니잖아요. 워낙 못 깨달으니까, 못 느끼니까! 하나님께서 내게 이런 일이 나온 게 아니냐!
그래서 나는 뭔 생각이 드느냐 하면,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알아주신다고 생각을 하니까 어찌 눈물이 나요. '주여, 감사합니다! 부족하지만 그래도 비록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병들어 다 죽어 가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너무 사랑하십니다!' 어찌 내게 이런 일이 생기느냐? 이런 일이 있느냐?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래서 마음에 너무 낙심이 되고 뭔가 마음에 우울한 생각이 들다가도 그게 그만 사라지더라 구요. 여러분 지금 현실적으로 여러분 개인과 가정에, '어찌 내게 이런 일이 있느냐?' 염려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오래 전부터 여러분에게 행하실 계획과 뜻이 있습니다. 눈을 뜨십시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의 시간표를 기다리며 조금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깨닫고 하시고, 가르쳐 주실 때에 여러분들에게 새 힘이 될 겁니다. 새로운 역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중풍병자를 매고 네 사람이 왔는데 가보니 너무 사람이 많습니다. 집이 다 차고 용신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때에 중풍병자를 매고 온 그 사람들이, 이웃사람인지 친구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쉽게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야, 사람이 너무 많으니 들어갈 수가 없다! 밖에 섰다가 예수님이 나오도록 기다리자!' 최소한 이런 핑계가 나올 수 있습니다. 안 그러면 '너무 많으니까, 오늘은 그만두고 다음에 오자!' 메고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너무 간절하게 중풍병자를 메고 왔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거기다가 뭐냐? 진짜 마음과 생각, 전심을 담고 왔습니다. 그러니까 기다린다는 핑계가 없었어요.
똑바로 들어갔느냐? 방법을 찾아내는데 똑바로 어디로 올라갔습니까? 지붕위로 올라갔어요. 여러분 뭐 상을 메고, 중풍병자를 메고 지붕위로 올라가는 게 쉬울 줄 압니까? 거기다가 주인 허락도 없이 지붕을 집어 뜯었어요. 이건 말도 안 되는 짓을 한 거죠. 지붕을 집어 뜯어 가지고 지붕 위에서 달아 내렸어요. 예수님이 메시지를 한참 하다보니까 뭐가 위에서 시커먼게 하나 내려옵니다. 예수님은 아셨겠죠. 예수님께서는 그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일어나 네 상을 들고 가라!' 일어나 걸어갔습니다! 여러분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그 사람들은 그냥 데리고 온 것만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함께 싫고 왔습니다. 정말 마음과 생각을 담고 하나님 앞에 나왔습니다. 이걸 우리는 기도라 그럽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정말 이 일은 우리가 해야되겠다!' 그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서서 내 마음과 중심을 담아 낼 때에 여기서 모든 문이 열려 버렸습니다. 결국에는 교회 뭐 이런 일 저런 일 개인적으로 오늘 여기에 말씀한 것처럼 예수님이 검과 몽치 때문에 잡히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또 예수께서 하신 말씀도 바로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에게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있었습니다. 뭡니까?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거룩한 계획이 오늘도 그냥 실천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그 뜻이 시간표를 따라서 지금 실현되고 있습니다. 빨리 이런 일이 있을 때에 눈을 떠야됩니다. 정말 하나님의 계획이 하나님의 시간표가 지금 이루어지고 있구나! 눈을 떠야 됩니다. 하나님이 그때에 여러분과 저를 향해서 이루실 귀중한 축복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방향과 하나님의 계획을 붙잡는 자들에게 축복하신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놀라운 은혜를 자손만대에 허락하실 것입니다. 약속잡고 이 한해 마무리하면서 또 새로운 한해에 하나님의 인도 받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무력한 것이 아니다
마 26:47-68 / 최영기 목사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하는 마카로니 웨스턴이라는 서부 영화 중에 "The good, and ugly"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는 것을 아는 분은 아실 것입니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더러운 사람"이라고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the good, bad, and ugly가 등장을 합니다. 예수님이 좋은 사람이고 가롯 유다가 나쁜 사람이고 유대 지도자가 더러운 사람입니다. 베드로도 등장을 하고 사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데 어느 쪽으로 분류를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에서 기도를 마쳤을 때에 예수님을 잡으려는 무리들이 몰려왔습니다. 당시에는 사진 기술이 없기 때문에 잘 알려진 사람도 얼굴을 아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예수님을 놓치지 않도록 자기가 입맞출 테니까 그가 예수인줄 알고 잡으라는 군호를 약속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와서 입맞추었는데 사실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먼저 입맞추는 법이 없습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의 적 입장에 자신을 묻었기 때문에 이제 공공연하게 예수님을 깔보는 것입니다. 이때에 베드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절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맹세한 부담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칼을 들어서 휘두르다가 대제사장의 종을 귀를 베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때에 베드로는 예수님으로부터 호되게 꾸중을 들었습니다.
Ⅰ. 하나님의 침묵을 오해해선 안 된다
베드로가 칼을 휘두른 것은 예수님이 무력해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몰려드는 적들 앞에서 예수님이 무력해 보였고 자신이 예수님을 보호하기 위하여서는 무엇인가 해야한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력해서 가만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가만있었던 것입니다.
1. 하나님은 항상 일하고 계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을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도 즉시 벌이 내리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두려워하다가 벌이 내리지 않으니까 죄를 지어도 괜찮은가 보다 생각합니다. 이것이 반복되어도 벌이 내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안 계신데 괜히 겁을 낸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침묵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하여 심판을 보류하고 계신 것인데 이것을 오해한 것입니다.
우리는 특히 기도해도 얼른 응답이 없으면 하나님이 기도를 못 들으셨던지 들었어도 대책이 없어서 침묵하신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기도해도 응답이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내가 기도를 듣지 못해서가 아니고 돕지 못해서도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사 59:1).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침묵을 무관심이나 무능력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해였습니다. 그들의 죄가 문제였던 것은 하나님은 지적해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털을 셀 정도로 우리의 삶에 관심이 많으시고(마 10:30) 참새 한 마리도 그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세심하고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마10:29).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으로 방향이 잡혀졌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고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응답을 위하여 일하고 계심을 믿어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였으면 기도에 응답해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요14:14). .
2. 예수님을 보호하려할 필요 없다
베드로가 무리수를 두게 되고 우스꽝스러운 짓을 하게 된 이유는 주님이 무력해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이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면 천사 12군단을 불러올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군단은 군인 12,000명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원하시면 예수님과 제자 한 사람에게 천사 1군단을 붙여줄 수 있으시다 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 1군단이 아니라 천사 1명이라도 몰려드는 사람들을 박살을 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방어하지 않는 것은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서였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보호하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스스로를 방어하고도 남을 분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보호하려하지 말고 주님의 증인이 되려고 하여야합니다.
교회가 외부의 공격을 받으면 주님의 교회의 명예를 지킨다고 마주 싸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명예를 훼손시켰다고 생각되는 신문사에 가서 데모를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과연 잘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사실이 아닌 말을 퍼뜨릴 때에 무조건 침묵하라는 말은 아입니다. 사실을 얘기하고 진실을 밝히는 일을 한번은 해야합니다. 그러나 한번으로 그쳐야지 힘으로 상대방을 이기려고 하는 것은 좋은 일 같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초대 크리스천들은 별별 해괴 망측한 비난을 다 들었습니다. 아이를 잡아먹는다는 비난을 들었습니다. 성찬식 때에 주님께서 "내 살이니 먹어라"하신 말씀을 오해해서 그랬습니다. 또 근친 상간을 한다는 비난을 들었습니다. 부부나 친척끼리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것을 오해해서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비난을 잠재우기 위하여 일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기회가 있으면 사실을 말했지만 이들은 주님의 증인이 되는 데에 집중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을 때에 오해와 비난 가운데에서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고 마침내는 로마를 정복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개인적으로도 적용이 됩니다. 크리스천으로써 비난을 받으면 무조건 침묵하지 말고 한번은 자신을 변호하십시오. 여러분들을 신뢰하는 분들에게 진실을 말해줄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으로 끝내고 말도 안 되는 말을 펼치는 사람들을 설득시키려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이기 때문에 주님이 책임져주십니다. 자신을 변호하고 상대방을 설득시키려하지 말고 주님의 증인이 되는 데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하고 섬기기 바랍니다. 주님은 무력한 분이 아닙니다. 주님의 명예는 주님이 반드시 지키십니다.
3. 하나님은 패배를 통하여서도 승리하신다.
베드로가 칼을 써서 예수님을 보호하려고 하였을 때에 베드로는 예수님이 무력하고 그가 좌절을 겪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패배한 것 같지만 사실은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되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에 그의 적들은 승리의 함성을 올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정복하시고 사단을 패배시키시고 죄에서 인류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패배를 통하여 승리를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 패배라고 생각되는 일을 통하여 승리를 이루십니다. 제가 한국 삼일 교회에 가서 저녁 설교를 하기 몇 주 전 이지선이라는 학생이 간증을 하여 많은 은혜를 끼친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학생은 4학년 때에 술 취한 사람이 운전한 차에 받혀서 차에 불이 나는 바람에 얼굴과 상체와 팔에 심한 화상을 입었고 손가락도 짤라내어야 했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하나님의 패배입니다. 그의 백성을 차 사고에서 건져내지 못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이 지선 자매는 이러한 역경 가운데에 밝고 기쁜 삶을 삽니다. 사고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가 난 것을 감사하면 삽니다. 이러한 삶이 많은 청년들에게 엄청난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패배하신 것 같았지만 승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패배로 보이는 것을 사용하여서 승리를 이루실 때가 있습니다. 몹쓸 질병을 치유하셔서 영광을 받으시기도 하지만 질병 가운데에 기쁘게 살게 해주심으로 영광을 받으시기도 합니다. 물질의 복을 주셔서 영광을 받으시기도 하지만 없는 가운데 감사하며 살게 해주심으로 영광을 받으시기도 합니다. 역경을 물리치고 벗어나게 해주심으로 영광을 받으시기도 하지만 역경 가운데 극복하며 살게 해주심으로 영광을 받으시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의 용사들이 열거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전반부에는 세상 사람이 보아도 승리도 보이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린 사람들이 열거되어있습니다. 그러나 후반부에는 세상 눈으로는 보기에는 패배한 것 같은 것을 통하여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린 사람들이 열거되어있습니다(히 11:34-37). 하나님은 승리를 통하여서도 패배를 통하여서도 영광받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질병이나 역경이나 고난을 무조건 수용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일단은 치유와 극복과 해결을 위하여 기도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고난이나 역경 자체가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난이나 역경, 질병 자체를 미화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놓고 가능하면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발견되었을 때에는 "나의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이를 수용하였습니다. 우리도 문제가 생겼을 때에는 해결을 위하여 기도하고 역경을 당했을 때에는 극복하거나 피할 길을 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그러나 문제 해결보다는 문제 한 가운데에서 영광 돌리는 데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을 발견하면 그 안에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한다는 것입니다.
Ⅱ.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다
주님께서는 체포되어서 대제사장의 집으로 잡혀가셔서 재판을 받으십니다. 그런데 이 재판 과정이 모두 다 불법입니다. 살인죄를 지은 사람은 반드시 낮에 재판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밤에 재판을 합니다. 사형 선고를 내릴 때에는 반드시 하루 밤 더 자며 생
각해보고 내리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배심원이 모일 수 없는 명절이나 안식일 전날에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는 심리를 하지 않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유대 지도자들은 유월절 전 날에 재판을 하고 있습니다. 사형에 해당하는 죄는 2명 이상의 확실한 증인이 있어야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거짓 증인 세우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사형은 객관적인 증거에 의하여 내려야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님에게 맹세를 시켜 예수님의 말에 의하여 판결을 내렸습니다. 사형에 처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불경한 말이나 행동을 했을 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불경죄에 해당하지 아니하는 성전에 관한 발언을 갖고 사형 판결을 내렸습니다.
마태가 재판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죄가 없으시다 는 것을 독자들에게 알리기 위함일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너무 들어서 십자가에 대한 부담이 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것은 큰 스캔들입니다. 바울도 십자가가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음이요 유대인들에게는 거침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마태가 살던 당시에 살았다고 합시다. 여러분은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찾아와서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유를 합니다. 여러분이 묻습니다. "어디에서 태어난 사람이요?" "나사렛입니다." 나사렛을 예루살렘과 비교도 되지 않는 작은 촌입니다. "누구 밑에서 사사를 받았소?" "특별히 누구에게서 배운 것이 없습니다." "뭐 하는 사람이요?" "목수입니다." "지금 뭐하고 있소?" "죽었습니다." 아마 이쯤 되면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거의 다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최후로 묻습니다. "어떻게 죽었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아마 여기까지 듣고 나면 여러분들은 예수님에 관한 관심이 싹 사라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중범죄자들을 처형하는 처형 수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이런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아니, 중범죄자를 교주로 모시고 있지 않아?" 그래서 마태는 예수님이 죄가 없이 무고하게 처형당한 것을 알리기 위하여 재판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지금으로 치면 교수형을 당했거나 전기 의자에서 처형당한 것과 같은 죽음을 죽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악한 사람들의 올가미에 묶여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이분은 십자가에서 처형당할만한 죄를 짓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일반 생활에서도 한번도 죄를 짓지 않은 사람입니다(벧전 2:22). 3년을 숙식을 같이 한 베드로의 증언이니까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으시다 는 사실은 부활 자체가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실 부활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죄 때문에 생겼기 때문입니다(롬 6:23). 공자님이나 석가모니 같은 분들이 일생을 살고 결국에 가서는 죽었다는 사실은 이들도 위대한 분들이기는 하지만 우리처럼 죄인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분들도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죽음이 잡아둘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죄 없는 분이 흉악범이 받는 처형을 받은 이유는 우리를 대신하여서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서는 흉악범입니다. 생각으로, 말로, 행동으로 밥먹듯이 죄를 지으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가 받을 벌을 대신 받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이 이러한 일을 당하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바울은 죄가 없는 분이 죄가 되었다고 말합니다(고후 5:21).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요 16:9). 어떤 분은 예수님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말에 굉장한 거부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을 세상에 보내어서 우리를 위하여 엄청난 고통을 당하도록 허락하셨고 부활이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돌아가셨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그를 믿고 의지하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에게 의롭다고 인정받는 길을 열어 놓으셨는데도 이를 거부하는 것은 죄가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예수님의 희생을 헛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으신 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기 말고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하시고 다음 주일에 있는 예수 영접 모임에 꼭 참석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