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원로회 서신 191호 - 이재명 따위의 혈관에 흐르는 피-
■6,70년대 북한보다 열악했던 경제적 상황에서도 우리는 '흙속에 저 바람 속에'서 배부른 돼지의 삶을 거부했던 소크라테스를 찬양할 줄 알았던 이어령의 지성을 우리의 수준으로 자부했었고 배고픔을 기꺼이 참아낼 수 있었다. 이념의 늪이 깊숙히 드리워진 마당에서도 우리는 서로 그러한 지성에 공감했고 상식적인 판단의 자양분으로 삼았다.
80년대 '축소지향의 일본' 에서도 우리는 독도에 앙갚음하여 올림픽을 보이콧 하자는 작금의 야비하고 유치한 언어의 유희 대신에 일본인의 실체를 그들과 가장 근접했던 우리의 눈으로 바라봄으로 극일의 단초를 제공한 작가의 지성을 우리 것으로 소화시킴에 별반 힘이 안들 정도의 양식을 갖추려고 서점을 들락거리는 분발을 서슴치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신파적 감성으로 포장한 이념의 파장이 우리의 뇌피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행동하는 양심' 을 외치는 단말마는 배고픔을 모면하기에 바빴던 개발도상기의 우리들에게 계약서 자체도 없는 거지만 무언가 속죄해야할 아담과 이브의 원죄를 소환해내는 불쏘시개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불이 붙기 시작하니 논리적 이성마저 불태움에 분간의 기능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민주화' 로 포장한 이념의 기수들이 박정희가 일궈놓은 산업화에 방화를 하기 시작한 이후다. 6.25의 참화로 인한 동족상잔이라는 앙숙의 불씨가 완전히 소진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다섯 세대를 빨래하는 망각의 세월이 필요했을 터이다. 그들이 너무 빨리 곤궁에서 벗어나 여유를 갖게되니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원수의 땅이 돼버린 것이었다.
■육사나 해사 공사는 성적은 좋으나 경제적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시절에 개천에서 용으로 승천 할 수 있는 기회를 국가가 제공해주는 교육적 시스템을 갖춘 곳이었다. 대신에 이념의 농도는 피보다도 훨씬 진하다는걸 6.25를 통하여 습득하였기에 학과시험에 수석을 하더라도 연좌제에 걸리면 가차없이 잘라버렸다.
그것은 사법고시나 행정고시 등 각종 공무원사회의 등용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통독 이전의 서독에서도 동독에 연고가 있는 서독 사람은 공무원이 되는 길을 법적으로 제한해버렸다. 공산주의 이념이란게 그만치 무섭다는걸 경험했던 국가에서는 국가적 파괴를 사전에 막기위한 자구책으로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를 잘한다고만 해서 출세하는 게 아니었고 사돈네 팔촌까지 이념의 DNA가 한 방울이라도 섞이지 않아야 용은 개천에서 승천할 수 있었다. 이무기에 머문 사람들은 100년 까지 기다릴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출세하지 못할 바에야 돈이나 벌자. 그래서 결국 빨찌산 유격대장의 아들 박지원도 미국에 갔다.
이처럼 60년대 후반부터 그러한 틈바구니에 끼인 우수한 학생들에게 신림동 고시촌을 시작으로 김일성 장학금이 파고들었다. 북한은 그들 장학생들을 각계각층에 포진시켰다. 독재타도라는 명분을 내세운 그들은 연좌제 폐지를 위하여 집요하게 민주화를 외쳤다. 결국 성공했다. 제도권으로 운동권의 진입이 시작된 것이다.
■바람 風, 흙 土의 '흙 속에 저 바람 속'이라는 누런 '풍토'의 태양에서 자랐다하여 우리의 인성마저 빈축의 풍토에 휩쓸려진 것은 아니었다. 동지섣달 기나긴 밤을 한 방에서 가난한 이불을 덮고 자던 지난한 시간이 있었지만 그때도 우리는 서로의 살을 부대끼며 온도를 맞추는 방법을 터득했다. 각 방을 씀으로 개인화로 길들여진 부유한 서구의 無情을 이해하기엔 우리가 부유해지기 전에는 몰랐던, 그런 시대의 삶에서 잉태된 방법이었다.
그렇지만 가난한 데다가 양육을 책임지는 부모의 환경까지 열악하면 성장 후에도 문제가 있다. 여지없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해 성공한 뒤에도 그 생존 본능은 지워지지 않는다. 형제 사이도 도덕과 윤리는 끝까지 공자의 푸념일 뿐 나와는 거리가 멀다. 아메리칸 드림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매한가지다. '위대한 겟츠비'도 사회라는 공간을 과거의 원망과 회한이라는 물감으로 풀어내는 화폭쯤으로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수단과 방법의 구분이 모호하며 따라서 백미터 결승점의 테이프만 텃치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결승점에 도달해서부터이다. 욕망은 새로워진다. 죽여도 보고 살려도 본다. 마음대로 할 수 있나 없나 스스로를 체험해 보는 것이다. 성장기를 외롭게 보냈던 정에 굶주린 네로는 로마를 불태우면서 눈물을 흘리고 시를 썼다.
■180센티의 훤칠한 이승만은 조선 왕조 가문에 동서양 최고의 학식을 갖추었고 핏줄대로 배운대로 행했다. 장면과 윤보선, 가정도 명문에 농도짙은 먹물을 먹은 지식인이었다. 가세는 기울었지만 박정희 또한 품성있는 모친의 사랑을 받은데다 당시로서는 사범학교에 일본 육사라는 최고 코스를 섭렵했다. 전두환도 가난은 했지만 육사라는 커리큘럼을 통해 정신적 정상에 진입했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은 모두 상고출신이다. 그나마 이명박은 학력의 콤플랙스를 고대에서 벗었다.
부유한 부친을 둔 김영삼도 나누어 쓸 줄을 알았고 탐심없는 박정희는 국가에 충성하면 무조건 집 한채였다. 가난의 DNA가 끝까지 혈관에 남아있던 대통령이 김대중과 노무현 이명박이었다. 게다가 김대중과 노무현은 머리까지 염색해 그 염색약도 김일성 장학생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문재인은 논외다.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는 세상과 멱살잡이를 하며 자라온 이재명의 성장기다. 왼 손 중지가 기계에 말렸을 때, 프레스에 손목이 눌려 팔이 안쪽으로 굽을 때의 통증이 피부로 전해오는 안타까움. 폐지를 주으며 버려진 과일을 도려내 먹던 노름꾼 아비와 변소 청소로 생계를 꾸리던 어미가 기본소득 이론의 발로라고 하지만 성인이 된 이후의 행실이 동정심을 상쇄시키고 되레 섬찟함을 가져온다. 변호사로서 재판에 이기려고 검사를 사칭했다. 벌금형 죄목까지 음주운전 포함하여 전과 5범이다. 형을 강제입원시키고 형수에게 쌍욕, 몸주고 마음준 연인의 증언을 뒤집으려고 은밀한 부분의 흔적 지우기. 세상과의 멱살잡이가 그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이었다.
'경제적 공동체' 는 유럽 EU 공동체 쯤으로 이해할 정도였지 탄핵의 올가미가 될 줄은 차마 몰랐었다. X파일이란 게 허구라 하더라도 장모의 구속을 지켜보자면 그때 이미 조언하는 과정에서 파생한 경제적 공동체란 용어가 박근혜를 묶을 수 있는 지혜로 비축해두었음직도 하다.
아비는 어딘가가 모자라 '바담 風' 이라 하더라도 자식은 '바람 風' 이라 말해주기를 바라듯 모자라는 대중은 누군가가 나서서 잘해주기를 바라지만 자기 눈 높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아무리 실전이 아닌 여론조사라지만 박빙의 승부를 결하는 두 사람의 혈관 속에 흐르는 피를 정녕 우리는 모름인가. 탈원전의 가공할 권력에 쐐기를 박은 담대한 용기에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 그렇게도 우리에게는 시기상조인가. 수준에 맞는대로 산다는 명언은 허언이 아니다. 그 따위들의 DNA가 우리 혈관에도 면면히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기까지다.
2021년 7월 4일은 미국날이다.
우리 혈관에는 그런 피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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