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투병기를 마쳤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한번에 써내려갔기 때문에 앞으로 부정확한 것은 수정하고 빠진 것은 보충도 하며 조금씩 다듬어 나가겠습니다.
앞으로는 저의 젊은 날을 소설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질병의 가장 큰 원인은 스트레스라고 하는데 제 젊은 날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판단 때문입니다.
<첫사랑, 젊은 날의 초상, 철학이여 안녕> 등의 내용으로 전개될 것입니다. 계속 보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에피소드 중심으로 엮어본 나의 연표 ***
부끄러운 일이 더 많습니다. 용기 있게 고백하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요. 주님의 은혜로만이 거듭날 수 있기에 십자가 앞에서 통곡을 하며 많이 회개하였습니다.
1956. 1. 강원도 춘천 출생
1972. 3. 경기고등학교 합격 입학
* 장차 민족을 위해 큰 일을 하자고 다짐
* 옥상에서 노래할 때마다 애국가로 끝맺음
* 뜸으로 살을 태우며 정신력 기름(고문 대비)
1972. 3. 첫사랑 - 이웃집 소녀 집에 무작정 찾아가 소녀의 아버님을 뵙고 1시간 정도 환담 * 무슨 일을 하든지 '뒤에서 호박씨 까는' '뒷통수를 치는' 비겁한 행위를 가장 싫어함
1972. 4. 독서클럽 'Stainless' 가입 * 철학에 빠짐으로 내 인생의 방향 설정에 큰 전환점이 됨 * 35세에 불후의 사상서를 한 권 남기고 미련 없이 사라지는 것이 꿈
1973. 3. 학교교육으로부터의 독립 선언 "이런 입시 위주의 교육은 받기 싫습니다." 고2 되자마자 담임선생님께 선언 * 이 때부터 잘못된 교육과 인성교육의 필요성 절감
1973. 8. 세브란스에서 '진행성 근육마비증'(고어스씨 싸인)이라는 원인 불명의 불치병 선고 받고 춘천까지 86km를 걸음으로써 절망감 극복 - 결혼 전에 솔직하게 말함
1974. 5. 글짓기대회 전교 2등 *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이 감동을 준 듯. 하지만 이제껏 제대로 효도를 못함.
1975. 2. 연세대 영문과 실패. 이 정도 못들어가랴 담배 피우며 시험을 보는 등 자만하다가 불합격.
1976. 3. 감리교신학대학 입학. 아버지와의 심각한 불화와 어머니의 중재. (법대는 싫다. 철학과를 가겠다. 이제 내 자식 아니다. 신학대학을 가도 철학을 할 수 있다더라. 아버지도 그 곳은 허락하셨다)
1976. 4. 너무나 멋진 변선환 박사님과의 만남(학문에 투철하신 분으로 학장까지 하셨지만 종교재판으로 교단에서 축출됨. 제자들은 축출 반대 운동. 사모님은 이대 철학과 교수) I.Kant의 <순수이성비판> 등을 읽으며 철학 공부에 매진
1976. 7. 감신대 휴학(자퇴) 변선환 박사님께서 유학까지 말씀하시며 수제자로 기르고 싶다고 직접 자퇴를 휴학으로 처리하심. * 지금 생각하면 너무 아쉬움-따를 것을
1977. 2. 서울대 인문계열 불합격
1977. 3. 명예 회복을 위하여 사법고시에 도전
1977. 9. 신체검사 * 이크! 대학도 못가고 죽도 밥도 아니네.
1978. 3. 서울교육대학(2년제) 입학. 예비역하사관 과정으로 현역 복무 면제.
1978. 5. <싸르트르 철학의 현상학적 접근> 학보 1면 가득 실음. 학보, 교지에 다수의 글 실음.
1978. 7. 도끼 만행(?) 사건 - 도끼를 휘둘러 친구를 괴롭히는 깡패들을 쫓음
1979. 2. 학도호국단 연대장(학생회장)과 학군단 명예위원장을 학생과와 학군단으로부터 제의 받았으나 거절함. * 명예와 권위는 자리에 있지 않다. 지금도 같은 생각.
1979. 3. <부정행위 근절 캠페인> 학생회에서 주장. * 기성세대 비판에 앞서 우리 스스로의 양심 회복
1980. 3. 서울신우초등학교 초임 발령. 최정옥 선생님 만남(독실한 기독교인, 나이는 같으나 4년 선배)
1980. 5. 공개적이고 적극적인 연애 공세(1) 교문 앞에서 매일 기다림. "학구 내에서는......" 주임선생님의 주의에 "저는 지식 전수보다 정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1980. 8. 적극적인 연애 공세(2) 오산리 금식기도원에서 2박3일 금식기도.
1980. 10. 결정타(3) 일부러 장인어른 생신날 방문. 집안 어른들께 인사. 100점 받음.
1981. 4. 19. 드디어 결혼! 변선환 박사님 주례. 박효원 목사님(미국) 사회.
1982. 3. 숭실대 야간 법학과 편입. 숭실대 학생회에서도 <부정행위 근절 캠페인> 주장. 가정, 직장, 대학을 오가며 자존심 회복을 위해서 사법고시에 재도전했으나 3년 후 건강 문제로 포기.
=== 결혼 후 예쁜 딸 낳고 작은 행복 속에 퐁당 ===
=== 교직 생활 ===
* <강한 자에게 강하고, 약한 자에게는 약하라>는 정신을 심어주려고 노력. 나도 어린아이 같기 때문에 아이들과 잘 어울려 지냄.
* 소신껏 가르치려고 노력함(내 소신이 반드시 옳았다고는 할 수 없고, 미흡한 점도 많지만) 교장, 교감과의 관계는 교장의 뜻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경우도 있고(때로는 후배들을 설득하면서까지), "제발 나서지 말아달라."(교장) "한선생님이 다른 학교로 가면 우리는 어떻게 해."(교사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비협조적인 경우도 있었다.
* 학교는 학생, 교사, 학부모들에게 행복한 곳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에 가장 중점을 두고 학교생활을 함 - 레크레이션 진행을 많이 함 - MBC <즐거운 세상>에도 고정 출연함.
* 승진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지냄.
=== 허무주의자 === 이것이 암의 가장 큰 원인!
"한 선생님은 항상 즐거운 비결이 뭐예요?"라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지금까지도 내 가족을 포함하여 주위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으며 또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오고 있다.
하지만 나의 깊은 내면은 허무주의와 청소년기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좌절감으로 병들어 있었다. 이세상에서는 결코 과거의 꿈을 이룰 수가 없고, 인간과 사회는 깊이 병들었으며, 그렇다고 내세에 대한 믿음도 없었다. 자식을 딸 하나만 가진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허무감과 우울증에 시달리며 잠을 못자는 때도 많았다. 나의 많은 낙서장과 시들은 그렇게 밤을 새워 쓴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다가 즐겁게 막 살자주의로 빠지게 되고, 술로 세월을 보내게까지 되더니 마침내 암에 걸리게 된 것이다.
=== 믿음으로 허무주의와 암 극복 ===
왜 세상 사람들은 이 기쁨과 평안함을 모를까? 하기는 믿음을 갖기 전에는 나도 몰랐다. 믿음을 가진 후에 나는 암에 걸렸어도 이 기쁨과 평안함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다가 기적 체험을 하면서 고침도 받았다. 이제 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은 '믿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 되었다. 이 고귀한 앎을 전하고 싶다. 나 혼자 누리고 싶지 않다. 주님! 제가 젊은 나이에 주님을 전파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도록 건강을 지켜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