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기도 좁은 문이고 내내 이어지는 좁은 문들의 연속입니다. 굳이 좁은 문을 찾아나서지 않아도 됩니다. 양상만 다를뿐 누구나 각자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결코 비교할 수 없는 각자 고유의 좁은 문입니다. 그러나 좁은 문도 잘 들여다보면 넓은 문일수 있습니다.
“이 선생, 왜 그렇게 어렵게 살아? 쉽게 살아!”
예전 초등학교 교사시절, 선배교사의 충고에,
“제겐 이렇게 사는 것이 쉽습니다.”
사실이 그러했습니다. 남보기에 힘든 좁은 문같았지만 이렇게 살지 않으면 못살 것 같았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부부생활도 결코 좁은 문이지 넓은 문일수는 없을 것입니다. 고진감래란 말도 있듯이 어제 고향집 카페에 함께 했던 두 좋은 분도 똑같이 좁은 문들을 통과해온 분들입니다.
요즘 젊은이들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온통 좁은 문들뿐같습니다. 공동생활 역시 외관상 좁은 문같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수도생활도 밖에서 볼 때는 좁은 문이지만 이제 저에겐 역설적으로 날로 넓은 문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베네딕도 규칙도 이런 진리를 분명히 밝힙니다.
“결점을 고치거나 애덕을 보존하기 위하여 공정한 이치에 맞게 다소 엄격한 점이 있더라도, 즉시 놀래어 좁게 시작하기 마련인 구원의 길에서 도피하지 마라. 그러면 수도생활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감미로써 하느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다.”(성규 머리47-49)
규칙서 <7장 겸손에 대하여> 긴글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끝맺습니다. 머리말의 결론과 일치합니다. 겸손의 좁은 문들 열둘을 통과한 후에 펼쳐져 있는 넓은 문에 대한 묘사입니다.
“겸손의 모든 단계들을 다 오른 다음에 수도자는 하느님 사랑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며, 이전에는 공포심 때문에 지키던 모든 것을 별로 어려움 없이 자연스럽게 습관적으로 지키기 시작할 것이니, 이제는 지옥에 대한 무서움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좋은 습관과, 덕행에 대한 즐거움에서 하게 될 것이다.”(성규7.67-69)
새삼 좁은 문의 통과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자세가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좁은 문들 통과의 삶에 결코 값싼 은총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삶은 평생 영적전쟁이라 하는 것이며 백전노장(百戰老將), 불퇴전(不退轉)의 ‘주님의 전사’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10월 중순 넘어 단풍 물들어가는 불암산의 풍경이 장관입니다. 요즘은 한국 어디서나 가을산 풍경은 이러합니다. 집무실 문을 열 때 마다 되뇌는 두편의 시가 좁은 문을 넓은 문으로 바꿔주며 저를 행복하게 합니다.
1.“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2.“늘
눈앞에 있는 산
늘
눈앞에 있는 당신
이
행복에 삽니다”
옛 어른의 말씀도 나름대로 좁은 문 통과의 비법을 알려줍니다.
“인생에 조급함이 닥쳐올 때마다 현자들의 이 한마디를 기억하라. ‘천천히 서둘러라.’”<다산>
“나는 관직을 맡은 후에 항상 네 글자를 지켜왔다. 바로 부지런함, 삼감, 조화로움, 느림이었다.”<송명신 언행록>
제가 자주 제기했단 “삶은 선물인가? 짐인가?”물음도 바꿔 “삶은 넓은 문인가? 좁은 문인가?” 물을 수 있겠습니다. 답은 단 하나입니다.
“기도와 사랑이 있으면 삶은 선물이지만 기도와 사랑이 사라지면 삶은 짐이 되기 시작한다. 마찬가지 기도와 사랑이 있으면 좁은 문도 넓은 문이 되겠지만 기도와 사랑이 사라지면 날로 삶은 무거워지고 문은 날로 좁아질 것이다.”
분명한 것은 값싼 은총은 없다는 것입니다. 저역시 날마다 매일강론쓰기 좁은 문을 통과해야 하루 넓은 문의 하루가 펼쳐집니다. 하루하루 첩첩산중 산을 넘듯이 좁은 문을 통과하듯 써온 강론입니다. 온갖 최선의 노력을 다하라는 오늘 복음의 주님의 충고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어지는 복음의 집주인의 비유가 참 적절합니다. 집주인이 문을 닫아버리자 값싼 은총의 넓은 문 인생을 살아온 이들은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다” 하며 주님과의 친분을 과시하지만 완전 착각이었습니다. 주님을 상징하는 집주인의 반응이 참 냉정 단호합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일방적으로 내 좋을 대로 하며 주님과 짝사랑 삶을 살아온 업보입니다. 한마디로 회개가 전무했던 삶입니다. 주님 앞에 일체의 기득권은 소용없습니다. 참으로 모두를 회개의 계기로 삼아 주님께 가까워지도록, 주님의 뜻에 살도록 노력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세 사실에 놀란다 합니다. “내가 천국에 있다는 사실, 전혀 뜻밖의 사람이 천국에 있다는 사실, 꼭 천국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없다는 사실” 셋입니다.
오늘 복음은 누가 하느님의 나라에 있는 지 실상을 보여줍니다. 바로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을 비롯한 모든 예언자들과 더불어 동서남북 곳곳에서 나름대로 주님의 뜻에 최선을 다했던 이들이 하느님 나라 잔치에 참여함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결론 말씀이 우리의 각오를 새롭게 합니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 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죽는 그날까지 방심은 금물입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회개의 여정에 충실하여 한결같은 용기, 그리고 겸손과 진실, 정의와 선행의 삶에 항구히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 에페소서는 어제 부부관계에 이어 오늘은 자녀와 부모관계, 종과 주인의 관계를 다룹니다. 바오로 사도를 통해 주님은 좁은 문 통과의 지혜를 가르쳐 주십니다.
“자녀 여러분, 주님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아버지 여러분, 자녀들을 성나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
즉흥적 일방적 가르침이 아니라 상호존중과 사랑의 정신으로 대할 때 좁은 문은 넓은 문으로 바뀔 것입니다. 꼰대가 아닌 존경과 사랑의 어른들이 될 것입니다. 종과 주인 관계는 요즘 없지만 이 관계의 진리를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종 여러분,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주인에게 순종하십시오. 주인 여러분, 종들의 주님이시며 여러분의 주님이신 분께서 하늘에 계시고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종과 주인의 관계라지만 주종관계의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차별하지 않는 주님 안에서 상호존중의 관계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회개를 통한 관점의 변화가, 진실하고 겸손하고 지혜로운 삶이 좁은 문 통과에 제일임을 봅니다. 좁은 문은 넓은 문이 되는 기적을 체험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만한 세상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끊임없이, 한결같이 회개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넘어지는 누구라도 주님은 붙드시고,
꺽인 이는 누구라도 일으켜 주시나이다.”(시편145,15).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