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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순시대(堯舜時代)의 태평성대(太平聖代)
우리나라의 건국신화에 환웅의 아들인 고조선의 시조 단군이 있듯이 중국의 건국신화에도 삼황오제(三皇五帝)가 있다.
중국 상고시대 전설상의 세 황제인 ‘삼황(三皇)’은 일반적으로 불을 발명한 ‘수인씨’, 물고기 잡는 법과 사냥기술을 가르친 ‘복희씨’, 농사법을 가르친 ‘신농씨’를 말한다. 하늘과 땅과 인간을 의미하는 천황(天皇)ㆍ지황(地皇)ㆍ인황(人皇)으로 기록하기도 한다. 먼 훗날 진나라를 세워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의 황제(皇帝)라는 호칭은 여기서 따온 것이며, 삼황오제의 기운에다 그들 이후 최초의 황제를 의미하는 시(始)를 첨가하여 진시황제(秦始皇帝)라고 정한 것이다.
삼황과 더불어 오제(五帝)는 황제의 뒤를 이은 다섯 자손을 뜻하며, 소호(小昊) 금천씨(金天氏) 전욱(顓頊) 고양씨(高陽氏) 제곡(帝嚳) 고신씨(高辛氏) 제요(帝堯) 도당씨(陶唐氏) 제순(帝舜) 유우이다. 뒤의 요(堯)와 순(舜) 이 두 명을 따로 떼어 ‘성군(聖君)’을 칭송할 때 관용적으로 쓰는 ‘요순임금(堯舜王)’이라고 한다.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은 중국의 신화 속 군주로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신화 가운데 오제의 하나이다.
부족국가로 구성된 시기에 중국은 태평성세(太平聖歲)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 시기가 바로 ‘요순시대(堯舜時代)’이다. 요순시대는 중국에서 이상적인 정치가 베풀어져 백성들이 평화롭게 살았던 시대로, 오늘날 중국인들은 덕으로 치세(治世)하던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을 가장 이상적인 군주로 숭배하고 있다.
사마천이 편찬한 중국 최고의 역사서 《사기(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요(堯)임금은 20살에 왕위에 올라 덕으로써 나라를 다스렸다. 요의 치세에는 가족들이 화합하고 백관(百官)의 직분이 공명정대하여 모든 제후국들이 화목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요(堯)임금이 민정을 살피러 나갔는데 왕의 행렬에는 아랑곳없이 뽕잎 따기에만 열중하는 한 처녀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여 친히 다가가니 그 처녀의 얼굴에 커다란 혹이 하나 달려있었다. 요임금은 순간 실망하였으나,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그녀의 현명함에 끌려 그녀를 왕비로 삼았다. 왕비의 가마가 궐에 당도하자마자 왕비는 옷소매를 걷어 올리고 수라간으로 들어갔다.
“나는 요(堯)임금의 아내다. 내 손으로 진지를 차려드리는 것이 도리라 생각하니 모두들 비켜라.” 그녀는 정성껏 수라상을 준비한 다음에 궁녀들의 사치스러운 복장과 경박스러운 행동들을 지적하며,
“오늘부터 백성들보다 사치하는 자, 농어촌의 선량한 아낙네들보다 호의호식하거나 더 게으른 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백성들의 어버이이신 임금을 섬기는 자들이 백성들보다 예와 도리가 모자란다면 어떻게 임금께서 올바른 정치를 할 수 있단 말이냐?”
그날부터 나라의 질서와 도덕이 하루가 다르게 바로서고 꽃피기 시작했다고 한다.❯
흔히 남의 충고를 잘 받아들이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 중에 ‘요고순목(堯鼓舜木)’이란 말이 있는데, 글자그대로 ‘요(堯)임금의 북과 순(舜)임금의 나무’라는 뜻이다. 요(堯)임금은 자신이 독단적인 정치를 할 것을 염려하여 조정에다 ‘감간고(敢諫鼓)’란 북을 걸어두고 어느 누구든지 간언할 수 있게 하여 늘 스스로를 경계하였고, 순(舜)임금은 마루를 세워서 여기에 경계하는 말을 쓰게 하였다. 요고순목은 성천자(聖天子)가 착한 말을 잘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요순시대란 말이 오늘날에도 태평성대를 비유하는 말로 사용될 정도로, 요임금과 순임금은 백성들의 고충에 귀를 기울였고 선정을 베풀었다. 후진(後晋) 고조 때 유구 등이 칙명(勅命)을 받들어 편찬한 《구당서(舊唐書)》에도 “요(堯)임금은 북을 두드려 간언하도록 하였고, 순(舜)임금은 나무를 세워 경계할 말을 구하였다.(요고납간 / 堯鼓納諫, 순목구잠 / 舜木求箴)”라는 말이 있다.
이 모두의 공통된 목적은 국민여론을 잘 수렴하여 올바른 정치를 폄으로써 백성들의 삶을 편안하게 하려는 데 있었다.
요(堯)임금은 왕위에 오른 지 70년 가까이 지난 후 신하들에게 후계자를 찾아 추천할 것을 명하였다. 신하들은 오제 중의 하나인 전욱 고양의 후손이자, 효성이 지극한 순(舜)을 추천하였다.
요(堯)임금 시절에 백성들은 먹을 것이 가득하여 배를 두드리며 잘살고 있었지만 해마다 넘쳐흐르는 황하의 홍수만은 해결할 수 없었다. 해서 요(堯)임금은 온 산천을 뒤져서라도 평소 덕망 많기로 유명한 전설속의 은사(隱士) 허유를 찾아 그를 천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허유는 그 말을 듣고는 기산으로 몸을 감추었다. 그래도 계속 요(堯)임금의 또 다른 요구가 계속되자, 그 말을 들은 허유는 영수(潁水)에 가서 귀를 씻었다. 그때 허유의 친구 소부가 소를 몰고 오다가 허유가 귀를 씻는 것을 보고 그 연유를 묻자 허유는 “더러운 말을 들었다”며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그 말을 들은 소부는 소를 상류로 몰고 올라가 물을 먹이며, “더러워진 귀를 씻은 물을 소에게 먹일 수 없다”고 한다.
순(舜)에게는 어리석고 사리에 어두운 아버지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노인을 고수(瞽叟). 즉, 눈 먼 장님이라고 불렀다. 순(舜)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랐는데, 계모는 아주 악한 여자였다. 계모에게는 상(象)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상을 총애했다. 이런 집에서 자라난 순(舜)이지만 항상 부모께 효도하고 동생을 사랑했다. 이에 사람들은 덕이 높은 사람이라고 칭송이 자자했다. 요(堯)임금은 그 말을 듣고 무척 기뻐하면서 두 딸을 순(舜)에게 시집보내어 사람됨을 지켜보게 했다. 또한 식량창고를 지어주고 많은 소와 양을 주었다. 그것을 본 순(舜)의 계모와 동생은 질투심에 사로잡혀 고수와 함께 순(舜)을 죽이려고 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순(舜)에게 식량창고 지붕을 고치라고 했다. 순(舜)이 사다리를 타고 지붕으로 올라가자마자 고수는 창고에 불을 질렀다. 자기 아들 순(舜)을 불태워 죽이려 한 것이다. 불이 난 것을 본 순(舜)은 사다리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이미 치워버렸던 것이다. 다행히도 순(舜)은 햇빛을 가리는 데 쓰는 삿갓 두 개를 갖고 있었다. 그는 양 손에 삿갓 하나씩을 들고 새가 날개를 편 것처럼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순(舜)에게 우물을 파게 했다. 순(舜)이 우물 안으로 들어가자 그들은 돌로 우물을 메워버렸다. 순(舜)을 우물 안에 파묻으려 한 것이다. 그러나 순(舜)은 우물 밑으로 내려가자 굴을 팠고, 그 굴을 통해 무사히 집으로 돌아 왔다. 그 다음부터 고수와 상은 더 이상 순(舜)을 해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 일이 있었지만 순(舜)은 여전히 부모에게 효도하고 동생과 사이좋게 지냈다.
결국 요(堯)임금은 평소 효성이 지극하기로 유명했던 순(舜)에게 자신의 두 딸을 시집보내고 여러 가지 일을 맡겨 그의 사람됨과 능력을 시험하였으며, 이윽고 3년 후 순(舜)을 등용하여 천자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렇게 임금의 자리를 세습(世襲)이 아니라 덕 있는 사람에게 물려주는 것을 ‘선양(禪讓)’이라고 한다.
임금이 된 순(舜)은 백성들과 함께 더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하게 생활해서 칭송을 받았다. 수십 년 뒤 요(堯)임금이 세상을 떠나자, 순(舜)은 임금 자리를 요의 아들인 단주에게 넘겨주려고 하였으나 주변사람들이 모두 반대했다. 그제야 순(舜)은 정식으로 임금이 되었다.
공자(孔子)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경전인《서경(書經)》을 편찬할 때, 많은 전설의 임금들을 다 빼버리고 제일 첫머리에 제요를 두었다. 천황(天皇)ㆍ지황(地皇)ㆍ인황(人皇) 등의 황제에 관한 전설적인 이야기는 전혀 비추지 않았다. 요(堯)임금이 순(舜)임금에게 천하를 전하고 순(舜)임금이 우(禹)에게 천하를 전해 준 것만을 크게 취급했다.
요순시대에는 한마디로 백성들의 생활은 풍요롭고 여유로워 심지어는 군주의 존재까지도 잊고 ‘격양가(擊壤歌)’를 부르는 세상이었고, 정치는 가장 이상적인 ‘선양(禪讓)’이라는 정권 이양방식으로 절대 다툼이 없었다. 선양은 당시 가장 도덕을 갖춘 사람을 임금으로 추대하는 방식으로, 후대의 혈연에 따라 왕위를 세습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02. 요(堯)임금의 태평성대(太平聖代)
신들이 활약하던 시대로부터 인류의 시대로 들어서면 성군들이 통치하는 태평성대가 출현한다. 중국에서 이 시대는 요(堯)ㆍ순(舜)ㆍ우(禹)ㆍ탕(湯)ㆍ문왕(文王)ㆍ무왕(武王)ㆍ주공(周公)으로 이어지는 여섯 명의 임금이 다스렸다고 한다. 이중에서도 특히 요순시대는 후세에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용어가 될 정도로 대표적이다. 이들 성군은 완전한 신은 아니지만 영웅과 마찬가지로 반신반인적인 성격을 띠는 비범한 존재이다.
요의 출생이나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다. 여러 고서에 의하면 그는 당(唐)이라는 지역에 나라를 정했고 성이 도당씨(陶唐氏)라고 했다 한다.
우리는 요(堯)라는 그의 이름과 성이 흙이라던가 도기(陶器)와 관련된 것으로 보아 그가 신석기 시대 토기 제작상의 저명한 인물로 신격화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신석기 시대에는 토기 제작이 무척 중요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요는 훌륭한 자질을 지닌 임금이었다. 그는 임금이 되었어도 아주 검소하게 살았다. 전국(戰國)시대에 법가(法家) 사상가인 한비(韓非)가 쓴 ‘한비자(韓非子)’에 따르면 그는 겨울에는 사슴가죽옷을, 여름에는 삼베옷을 입었고 집은 띠풀과 통나무로 지었으며, 식사는 거친 야채국으로 만족했다 한다.
그래서 문지기라도 이보다는 더 잘 살았을 것이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 한다. 요는 마음에서도 진정 백성들을 위하고 염려했다.
한(漢) 나라 때 유향(劉向)이 지은 ‘설원(說苑)’에 의하면 그는 어떤 사람이 배가 고프다 하면 “내가 그의 배를 곯게 하였구나”하고 또 어떤 사람이 춥다 하면 “내가 그를 춥게 하였구나”하며 어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내가 그를 죄에 빠뜨렸구나”하였다 한다.
요가 얼마나 자기를 돌보지 않았는가를 말해주는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그 당시 악전이라는 유명한 신선이 있었다. 그는 요가 국사에 전념하느라 몸이 쇠약해진 것을 염려하여 산에서 딴 좋은 잣을 요에게 먹으라고 선물하였다.
그러나 요는 너무 바빠서 그것을 먹을 시간조차 없었다. 그런데 그 잣을 먹었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삼백세까지 살았다 한다.
요를 보좌했던 신하들도 모두 뛰어나서 태평성대를 이룩하는 데에 기여했다. ‘설원’에 의하면 후일 그를 계승하여 마찬가지로 성군이 된 순은 사도(司徒)로서 교육 일을 맡았고, 설(契)은 사마(司馬)로서 군사 일을 맡았고, 나중에 주(周) 나라의 시조가 된 후직(后稷)은 전주(田疇)로서 농사 일을 맡았고, 기(夔)는 악정(樂正)으로서 음악 일을 맡았고, 수는 공사(工師)로서 기술 일을 맡았고. 고요(皐陶)는 대리(大理)로서 재판 일을 맡았다고 한다.
요 임금의 시대는 모든 일들이 순조롭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열 개의 해가 동시에 떠올라서 혹독한 가뭄에 시달린 적도 있었고(이 때는 명궁 예가 아홉 개의 해를 격추시켜 위기를 모면했다) 20여 년간 홍수가 계속되어 생존이 위협을 받은 적도 있었다(이 때엔 곤과 우의 치수에 의해 진정되었다) 그러나 앞서 말한 요의 훌륭한 덕성과 명신들의 노력에 의해 이 모든 난관들을 극복하고 마침내 태평성대를 이룩할 수 있었다.
양(梁) 나라 때 임방(任昉)이 지은 ‘술이기(述異記)’에 의하면 나라가 잘 다스려지자 여러 가지 상서로운 징조들이 요의 궁전에서 나타났다고 한다.
가령 말에게 먹이려던 꼴이 싱그러운 벼로 변했는가 하면, 봉황새가 뜨락에 내려오고, 삽포(鈒浦)라는 이상한 풀이 주방에 나서 한 여름에도 서늘하여 음식이 상하지 않기도 하였다.
‘습유기(拾遺記)’라는 책에는 또 지지국(秖支國)이라는 나라에서 바쳤다는 중명조(重明鳥)라는 새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 새는 한쪽 눈에 눈동자가 둘이었으며 닭처럼 생겼고 봉황새의 울음소리를 냈다.
이 새는 맹수도 물리치고 사악한 모든 것으로부터 보호해주는 힘이 있었다. 그런데 이 새는 중국에 머무르지 않고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가 가끔 오곤 했다.
사람들은 이 신통한 새가 자기 집에 오길 고대하였는데 새가 안 오면 이 새의 모습을 나무나 쇠로 새겨 문앞에 걸어두어도 도깨비나 귀신 따위를 물리칠 수 있었다 한다.
고대 중국에는 인간의 일과 하늘의 도리 곧 자연이 합치된다는 관념이 있었다. 이를 천인합일관(天人合一觀)이라고 부르는데 여기에서 임금이 정치를 하면 그 잘잘못에 따라 반드시 자연의 징조가 나타난다는 생각이 일어났다.
예컨대 정치가 잘 이루어지면 하늘이 봉황새와 같은 신성한 동물을 보내 그 표징을 드러내고 정치가 어지러우면 산이 무너진다든가 하는 천재지변으로 하늘이 경고를 한다는 식이다.
이것을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이라고 한다. 이 천인감응설은 한 나라 때에 크게 유행하였다. 요가 정치를 잘 하니 여러 신비한 자연현상이 나타났다고 하는 이야기들은 정작 ‘산해경(山海經)’과 같은 신화서에서 보이지 않고 모두 한 나라 이후에 지어진 책들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후세에 천인감응설적 관념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요는 백성들이 자신의 다스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어느날 궁궐을 나와 길을 거닐었다. 그런데 팔십살 쯤 된 노인이 길가에 앉아 막대기로 땅을 두드리며(일설에는 고대의 비석치기 비슷한 놀이라고도 한다)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아침에 나가 일하고 저녁에 들어와 쉬네. 우물 파서 물 마시고 밭 갈아 밥 먹으니 임금님 덕이라고는 하나도 없네.” 요는 이 노래를 듣고 화를 낸 것이 아니라 만족했다.
왜냐하면 임금의 존재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백성들에게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 다스림이야 말로 최상의 다스림이기 때문이다. 노인이 불렀던 노래를 ‘격양가(擊壤歌)’라고 하는데 이후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어휘가 되었다.
즉위한 지 수십년이 흐르자 요는 왕위를 적합한 사람에게 물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아들 단주(丹朱)는 성품이 거칠고 못되었다. 요는 인재를 물색하다가 허유(許由)라는 사람이 어질다는 추천을 받고 그를 찾았다.
한편 허유는 요가 자기를 불러 왕위를 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몸을 피하여 기산(箕山)이라는 곳으로 가서 살았다. 요는 다시 기산으로 사람을 보내 허유에게 우선 재상이라도 맡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요청을 완강히 거절하고 허유는 집 근처를 흐르는 영수(潁水)라는 강물에 나아가 귀를 씻었다. 그 때 마침 친구 소부(巢父)가 물을 먹이려고 소떼를 끌고 왔다가 이 광경을 보고 왜 귀를 씻는지 물었다.
허유는 이렇게 말했다. “요가 나더러 재상이 되라 하네. 이런 더러운 소리를 들었기에 귀를 씻는 것이라네.” 이 말에 소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조용히 살았으면 어찌 이런 꼴을 당했겠나. 내 소가 먹을 물이 더러워졌겠네.” 그리고는 소를 끌고 상류로 가서 물을 먹였다. 결국 요는 허유에게 왕위를 전할 것을 포기하고 후일 순에게 물려주게 된다.
요의 이야기는 중국의 초기 역사시대의 정치상황을 시사한다. 그것은 아직 가부장적인 왕권국가가 성립되기 이전의 모습으로 집단에서 지도자를 합의에 의해 선출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던 현실을 반영한다.
이것은 후세에 유학자들에 의해 선양(禪讓)이라는 왕위 계승방식으로 찬양된다. 아울러 요의 다스림과 관련한 신비한 징조라던가, 격양가, 허유 이야기 등은 후세에 지어진 혐의가 강하다.
요순우탕(堯舜禹湯) 등의 초기 제왕들은 후세에 특히 한 나라 때에 유교가 국교로 제정되면서 유교에서 표방하는 이상국가의 개념에 맞춰져 윤색되는데 이 과정에서 앞서의 이야기들이 창작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요와 관련된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유교주의자들의 이상적인 군주,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꿈이 빚어낸 산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요 임금때 일어난 신비로운 일로는 명협(蓂莢)이라는 풀이 섬돌에 난 것도 들 수 있다. 이 풀은 매달 초하루부터 깍지가 하나씩 생기기 시작하여 보름날까지 열다섯 개에 이르렀다가 다시 열 엿새부터는 하나씩 떨어져 월말이 되면 모두 떨어져 버렸다. 요는 이 풀의 깍지 수를 보고 날짜를 알 수 있어 이 풀은 달력 구실을 하였다. 그래서 이 풀을 역초(曆草)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 전진(前秦)의 왕가(王嘉)가 지은 ‘습유기(拾遺記)’에 의하면 요 임금 때 서해 바다에 밤이면 빛을 발하는 큰 뗏목이 나타났는데 사해를 떠돌다가 12년 만에 한바퀴를 다 돌고 오곤 했다 한다. 사람들은 이 뗏목을 관월사(貫月査)라고 이름을 지었으니 이 배를 통해 세월의 한 주기(고대에는 12년이었다)가 흘러간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일화를 통해 고대 중국인들이 요부터는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것으로 생각한 것을 알 수 있다. 시간을 헤아릴 필요가 있는 시대, 그것은 더 이상 불사의 신들이 활약하던 신화의 시대가 아니고 유한한 생명을 지닌 인간의 시대인 것이다. / 글 정재서 이화여대 중문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