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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나본 사람들
- 28회 -
제 1 편 음악가
제 2 편 철학자
제 3 편 미술가
제 4 편 문학가
제 5 편 과학자
제 6 편 정치가
제 7 편 한국인
만든이 이 종 영
제 3 편
- 세계적인 미술가 -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 3. 30. ~ 1890. 7. 29.
출생지 : 네덜란드 프로트 즌델트
가족관계 : 동생 테오
네덜란드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약한 화가로,
프로트 즌델트에서 출생하여
프랑스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사망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869~1876년 화상 구필의 조수로
헤이그, 런던, 파리에서 일하고
이어서 영국에서 학교교사, 벨기에의 보리나주 탄광에서
전도사의 일을 보고,
1880년 화가에 뜻을 두었다. 그때까지
짝사랑에 그친 몇번의 연애를 경험했다.
1885년까지 주로 부친의 재임지인 누넨에서
제작활동을 했다.
당시의 대표작
『감자를 먹는 사람들』
(1885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이 있다.
네덜란드 시절에는 어두운 색채로 비참한 주제가 특징적이었다.
1886~1888년 파리에서 인상파, 신인상파의 영향을 받는다.
1888년 봄 아를르에 가서, 이상할 정도로 꼼꼼한 필촉(筆觸)과
타는 듯한 색채에 의해 반 고흐 특유의 화풍을 전개시킨다.
1888년 가을, 아를르에서 고갱과의
공동생활중 병의 발작에 의해서
자기의 왼쪽 귀를 자르는 사건을
일으켜 정신병원에 입원,
계속되는 생 레미 시대에도 입퇴원의 생활을 되풀이한다.
1890년 봄 파리 근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정착했으나
같은 해 7월 권총으로 자살했다.
병때문인 자기응시가 자화상의 다작과 관련되며,
그것도 불가능한 때에는
자주 밀레나 들라크루아의 모사를 했다.
생전에는 의사 가셰나 시냐크 등,
극히 소수의 사람에게만 평가되었다.
동생 테오 및 기타사람에게 보낸
방대한 양의 편지는 서간문학으로서 중요하다.
오테를로의 크뢸러 뮐러 미술관,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 등에
주요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열정과 고뇌로 짧지만 굵었던 인생을 불태운 불세출의 화가
미술계에서 가장 독보적인 비운의 천재
네덜란드의 인상파 화가.
원어 발음에 가까운 풀네임은 핀센트 빌럼 판 호흐.
반 고흐란 고흐 출신이라는 의미인데,
고흐(Gogh)는 현 독일 뒤셀도르프의
고흐(Goch)라는 도시다.
80년대만 해도 한국 중학교 교과서를 비롯하여
여러 책자에서 고호라는 이름으로 나온 바 있다.
혀뿌리와 뒤쪽 입천장을 닿을락 말락 하게 만든 후
성대를 떨지 않으며 공기를 내쉬는,
무성 연구개 마찰음(흡사 가래 끓는 소리) [x]를
지금은 '흐'로 통일해서 쓰나
과거엔 앞의 모음이 'a, o, u'일 때
각각 '하, 호, 후'로 달리 썼기 때문
참고로 영식 영어로는 '고흐~고프[ɡɔ́x~ɡɔ́f]',
미식 영어로는 '고흐~고[ɡɔ́x~ɡóu]'로 읽는다.
동생인 테오를 너무나 아껴 테오가 결혼할 때
가족들이
그 사실을 고흐에게 알리지 않았으며
고흐는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는
세 번이나 졸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로 테오의 아내와 그 아이도 많이 사랑했으며
고흐는 대체로 테오의 가족과는 사이가 좋았다고.
그러나 정작 자신의 가족들 중에선 자신을 이해해
정신적, 물질적으로 도움을 줬던
바로 아래 동생 테오와 자신과 같이
예술가의 길을 가려는 작가 지망생 여동생 윌에게만
한정된 것으로 다른 형제 자매들과의 사이는
매우 좋지 않았다.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의 준데르트에서
개혁교회(reformed church)
목사 테오도뤼스 반 고흐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흥미롭게도 고흐에게는 태어나기 전에
죽은 형이 있었는데
그 형의 이름도 빈센트였다.
그의 형이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흐는 살면서
죽은 형을 대신해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항상 했다고 한다.
그게 고흐의 불행을 자초했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고흐는 죽은 사람을 대신하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항상 죽음을 생각하고 살았다고.
아버지 테오도뤼스 반 고흐는 멋쟁이이고
미남자이긴 했지만
개신교 목사의 능력으로는 범상한 수준이었다.
고흐가 태어난 쥔데르트는
벨기에 국경 근처의 별볼일 없던 마을인
데다가 여타 노르트브라반트주의 마을들이 그렇듯
가톨릭의 세가 더 강한 곳이었고,
그나마도 테오도뤼스가 이 지역에
부임하게 된 건 역시 개신교 목사였던
고흐의 할아버지가 여기저기 찔러서
겨우 얻어낸 자리였다.
어릴 때의 고흐는 그냥 평범한 아이였다.
고흐가 태어난 지 2년 후에 여동생 안나가 태어났고
그로부터 다시 2년 후에
고흐의 평생 친구이자 동반자가 된
남동생 테오가 바로 이때 태어났다.
흔히 고흐가 어릴 때부터 미술에 두각을
드러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고흐는 미술가보다는 파브르 같은
곤충학자가 될 자질이 보이기도 했다.
여동생 중 한 명인 엘리자베트의 회고로는
고흐는 모든 곤충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고
곤충들을 과학자처럼 자세히 관찰했을 뿐만 아니라
과학자처럼 꼼꼼하게 수집하고 분류했다고 한다.
이런 면모는 나중에 고흐의 그림에서
자연이 큰 비중을 차지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고흐는 상당한 독서광이었다.
신학서적과 문학작품을 많이 탐독했는데
이 또한 고흐의 나중 인생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고흐의 미술적 재능은 직접적으로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
어머니 안나는 직접 야생화를 스케치하거나
직접 만든 꽃다발을 수채화로 그리는 등
미술을 취미생활로 즐겼으며 어린 고흐가
9살 때 개를 보고 그린 스케치는
어머니의 영향이 직접적으로 보이는 희귀한 자료다.
이때 작품들만 봐도 웬만한 미대생들보다 좋은
기본기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흐가 11살이 되자 부모는
그를 준데르트에서 25km 떨어진
제벤베르헨의 개신교 교사가 운영하는 기숙학교로 보냈다.
이곳에서 고흐는 프랑스어와 영어를
기초부터 갈고 닦아서 나중에는
모국어인 네덜란드어 만큼이나
유창하게 말할 정도가 되었고
독일어도 상당히 능통한 수준이 되었다.
13살이 된 1866년에 제벤베르헨에서
기초교육을 마친 후
쥔데르트에서 더 멀리 떨어진
튈뷔르흐의 빌렘 2세 국립중학교로 진학했다.
이 학교는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미술이 교과 커리큘럼에 하나로 도입되어 있었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파리에서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가
눈이 먼 아버지를 돌보려고 고향으로
돌아온 화가 C.C 호이스만스가 이 학교의 미술교사였는데
고흐는 호이스만스 밑에서 미술 수업을 받았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기 때문에 즐거운 수업이긴 했지만
원근법 만큼은 익히지를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868년 3월,
고흐는 갑자기 학교를 자퇴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왜 자퇴했는지는 수수께끼지만 학자들은
이때 고흐가 정신장애나
발작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추측을 한다.
고흐의 집안에는 정신병력이 있었는데
이게 고흐에게도 유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발작이 지나가자 집에서의 생활이 따분해지던 차였고,
아버지도 아들녀석이 다 컸는데 학교에 보내자니
돈은 많이 드니 일이라도 시켜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것들이 맞아떨어져서
16세 때 큰아버지 센트의 주선으로
헤이그의 구필 화랑에서 일을 시작하게 된다.
고흐의 큰아버지인 센트의 본명은
빈센트 빌렘 반 고흐로 고흐와 똑같은 이름이다.
고흐의 아버지 테오도뤼스와 우애가
남달랐던 센트는 헤이그에서
화상으로 성공한 사람이었다.
특히 센트는 프랑스의 바르비종파를
접하고나서 바르비종파의 화풍이
득세할 것을 예측하고는 바르비종파의
그림들을 수집해 헤이그에서 판매했다.
센트는 단순히 바르비종파의
그림을 파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네덜란드에 바르비종파의 화풍을 들여와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을 육성했는데
이러한 센트의 생각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바르비종파의 특징 중 하나는 자연을 그리는 것이었고,
일반적으로 아틀리에 안에서 상상으로
그림을 그리던 방식에서 벗어나,
밖으로 나가 스케치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
점차 대세가 되어갔는데 센트는
이런 추세를 놓치지 않아서
큰 성공을 거두었던 셈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센트는 후에 고흐의 그림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고흐의 미술에서 자연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점과 바르비종파의
대부인 밀레의 영향을 받게 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구필 화랑은 센트가 파리의 화상인
아돌프 구필과 동업하여 만든 화랑으로,
네덜란드 화가들의 그림을 프랑스에 소개하고
판매할 목적으로 세워졌는데,
네덜란드의 전설의 화가인 렘브란트와 베르메르에 대한
동경과 향수가 프랑스에 아직 남아있었다는 점을 간파한
센트의 도전은 성공을 거둔 셈이었다.
센트에게는 안타깝게도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동생의 아들들인
빈센트와 테오를 자식처럼 생각하며 아꼈고
빈센트를 자신의 후계자로 만들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주려는 생각까지도 했다.
만약 고흐가 이런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면
화가로서의 고흐는 없었겠지만
고흐 자신의 인생은 매우 편안하고 안락했을지도 모르겠다.
흔히 하는 오해와는 달리, 이 시기 고흐는
안정적으로 구필 화랑에서 일하면서
전도 유망한 화상의 길을 걷고 있었다.
나중에는 동생 테오의 도움을 받지만
이 시기에는 빈센트가 테오를 도와줬으니
말 안해도 알만하다.
아돌프 구필은 당시 샬롱 수상작들을
판화로 만들어 찍어서 파는 판화 인쇄업도 겸했는데
이때 고흐를 유난히 감동시킨 것이 바로 밀레였다.
바르비종파를 네덜란드에 소개한
큰 아버지 센트의 영향도 있었지만
고흐는 구필 화랑에서 판화로 복제된 밀레의
"이삭 줍는 사람들"을 보고 상당한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고흐는 밀레를 밀레 사부라고 부를 정도로 존경했고,
밀레의 그림은 고흐의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76년 유난히 미술의 관점에 대해
손님과 논쟁을 자주 벌였던 탓에
그는 화랑에서 해고된다... 라고 알려진 게 일반적이지만,
사실 이때의 일을 이렇게 단순하게 설명하기 힘들며
그 바탕에는 상당히 복잡한 뒷배경이 숨어있다.
전도 유망한 화상의 길을 가고 있던 고흐는
구필 화랑의 런던지점을 내기 위해서 런던에 파견되었으나
고도로 산업이 발전한 런던에서 본 가난한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충격과
하숙집 주인의 딸인 외제니 로예를 사랑했지만
실연을 당하게 된 아픔이 겹치면서
일이 어긋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거기에 고흐의 일평생을 괴롭히게 되는
정신적인 증세도 영향을 끼쳤다.
앞서 말한 노동자의 현실에 충격을 받아,
훌륭한 그림을 보호하고
작가를 후원하는 이상적인 방식이 아닌
크게 가치 없는 그림이라도 돈을 위해
감언이설로 팔아야 하는 화상의 생활방식에
염증을 느끼게 됐다는 견해도 있다.
사실 미술의 관점이란 것도 고흐가
어떤 새로운 미술적 사조를 접했던게 아니라
가난한 이들이 있는데
이런 미술이 무슨 의미가 있나라고 하는 식의
생각에 좀 더 가까웠다.
구필 화랑이 취급하던 살롱 수상작 같은
엘리트 중심적인 그림에 동감하지
못하게 된 것이 원인이었던 것이다.
거기에 정신적 충격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종교에 매달린 것도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그래도 큰아버지 센트의 연줄 덕으로
구필 화랑에서 계속 일 할 수 있게 되었지만
결국 그만두게 된 것이었다.
구필 화랑을 그만둔 후 고흐는 종교적 열정에 사로잡혀서
종교인으로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일을 하고 싶어했다.
고흐는 영국에서 교사 일자리를 구하다가
램스게이트라는 곳의 학교에서
무급 교사로서 일하게 된다.
하지만 램스게이트의 학교는 고흐에게
실망감만을 안겨주었고 고흐는 보조목사나
런던의 빈민가에서 활동하는
선교단체에서 일자리를 구하려고 했다.
그런데서도 퇴짜를 맞다가 고흐의 일생에서
그를 이해해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인
토머스 슬레이드 존스 목사를 만나서
그의 보조목사 겸 존스 목사의 학교에서
조수 교사로 채용되어 일하게 된다.
존스 목사는 자신이 순회하던 감리교회에서
고흐가 설교하도록 하게 해주기도 했다.
이때 고흐는 안정적으로 설교를 하면서
잘하면 목사가 되어서 자신의 생각대로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다시 고흐에게 조울증이 찾아왔다.
결국 이 때문에 잘해나가던 보조 목사직도 그만두고
다시 네덜란드의 가족에게로 돌아와야 했다.
아들이 광신적인 목사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 아버지는 다시금 형 센트에게
도움을 구해서 센트는 빈센트를 위해
로테르담 근처의 도르트레흐트 근처에서
서점을 운영하던 브라트에게 부탁해
서점에 일자리를 얻어주었다. 하지만
그 일마저도 흥미가 사라지면서 일자리에서 쫓겨난다.
서점 일에서 쫓겨난 것으로 빈센트와
큰아버지 센트와의 인연은 완전히 끝나게 된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고흐는 이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고흐의 나이로는 목사수업을 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인 데다가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음에도
고흐가 고집을 꺾지 않자 결국 아버지는 두 손을 들고
고흐의 이모부인 암스테르담에 있던
요한네스 스트리케르 목사에게 도움을 구했다.
스트리케르는 조카의 정신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자신의 인맥에서 가장 우수한 교사를 붙여서
고흐가 목사가 되는 국가고시를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하지만 이마저도 목사의 딸인
코르넬리아 보스(보통 케라고 불렸다.)에게
빈센트가 사랑에 빠지면서 다시 정신적 혼란이 일어났고
국가고시 시험준비도 끝장나고 말았다.
그가 전에 근무하던 화상의 일하는
방식에 대해 회의를 느꼈던 것처럼,
가난하고 불쌍한 이에게 전도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사명인데도
그런 전도보다는 실질적으로 전도에는
불필요한 지식을 쌓는 것을 더 중요시하고,
그래야만 성직자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에 진저리를 내서 일부러
시험 문제가 너무 어려워서
합격할 수 없겠다는 식으로
빠져나왔다는 얘기도 있다.
아버지가 성직자이기도 하고 이모부까지
나서서 자신의 시험을 도와줬는데
차마 성직자사회가 개독들만 가득해서
들어가기 싫다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었다는 것.
일례로 고흐는 그의 가정교사는
별 문제가 없다고 봤음에도
굳이 스스로의 라틴어가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후에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
차마 신학대가 바리새파 양성소라 싫다고 할 순 없었지,
내가 그깟 라틴어 갖고 애먹을 리가 있니?'라는
구절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결국 다시 아버지가 나서서
벨기에의 공업지대나 탄광지대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선교단체에
전도사로 들어갈 수 있는지를 알아봐야 했다.
고흐를 조수 목사로 쓴 적이 있던 존스 목사가
아버지와 함께 나서서 브뤼셀에 있는
선교단체에서 전도사 양성학교에
빈센트를 입학시켰다.
그곳에서는 전도사를 양성해
벨기에의 악명 높은 탄광지대인
보리나주로 파견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시험에는 합격하지 못했지만 고흐가 목사의 아들인 탓에
매정하게 내칠 수도 없었던
선교단체에서는 결국 고흐를 탄광에서
무급 조수로 쓰기로 결정했다. 보리나주에서
고흐는 탄광의 열악하고 비참한 환경 속에서
자신을 광부들처럼 극단적인 세계로 밀어넣었다.
이런 극단적인 고행은 한편으로는 고흐의 내부에서
신앙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광부들에게 헌신하려는
그의 노력은 계속 되었다.
그렇지만 극단적 고행 등으로
고흐의 정신 상태는 온전하지 않던 와중에
선교단체에서 보리나주로 시찰관을 파견했고
고흐의 상태를 본 시찰관은 선교단체에
고흐는 전도사로 부적절하다고 보고를 올렸다.
선교단체에서 해고당한 고흐는 중재를 부탁하려고
브뤼셀까지
걸어서 아는 목사를 찾아갔고
그 목사는 고흐가 성직보다는
미술에 더 재능이 있는 것 같다는 것을 눈치채긴 했지만
그럼에도 본인이 스스로 깨닫게 하려는 목적에서
성직의 길을 계속 가고 싶다면
보리나주로 돌아가서 무급으로
조수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렇게 하다보면 선교단체에서
다시 일을 맡겨줄 수도 있고 아니면
스스로 성직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갈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보리나주로 돌아간 고흐는
이제 성직보다는 미술에 더 기울게 되었다.
보리나주 사람들의 비참한 현실을 그림으로
그리고 싶어했던 것이다.
그러나 미술적인 훈련이
부족한 탓에 그것이 쉽게 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미술을 하겠다는 열의가 강해져
결국 고흐는 만 27세이던 1880년 10월,
보리나주를 떠나 브뤼셀로 가게 된다.
브뤼셀로 온 고흐는 화가가 되기 위해 조언을 구했다.
브뤼셀의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게 상식적이고
일반적 코스이긴 했지만
고흐는 독학으로 실력을 쌓는 것을 더 좋아했다
고흐가 브뤼셀에 왔을 때
동생 테오는 화상의 길을 가면서 회사에서 승진 중이었다.
한편으로 테오는 파리 미술계에 불던 인상주의나
종합주의 같은 새로운 미술 사조들을 편지를 통해
형 고흐에게 알려주기도 했지만
원래 미술이란 게 글로 쓴다고
이해할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고흐의 인상주의나 새로운 미술사조에 대한
이해는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오히려
고흐의 독특한 화풍이 생겨날 수
있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의 외사촌이자 화가였던 안톤 모베에게
몇 년간 그림을 지도받았다.
하지만 고흐의 괴상한 성격 탓에 자주 마찰을 빚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모베는 어려운 고흐를 돕기도 했고
나름대로는 그림을 가르쳐주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흐는 크리스티네 클라시나 마리아 호르니크이라는
여인과 동거를 하게 되면서 상황이 심각해졌다.
고흐는 그녀를 시엔이라고 불렀는데
그녀는 매춘부인 데다가 딸이 하나 있었고
고흐와 만났을 때는 임신 중이었다.
그녀는 딱히 용모가 뛰어나다거나 한 건 아니었으나
고흐에겐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데다가
고흐 자신이 비극적인 풍모의 여성들에게
끌렸던 점이 그녀를 사랑하게된 요인이 되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목사인 아버지는 물론이고
그동안 그를 정신적, 물질적으로 지원해주던
동생 테오마저도 시엔과의 동거를 반대하면서
그녀와 헤어질 것을 종용했다.
모베는 고흐가 매춘부와 동거한다는
사실에 그와 절교를 선언했다.
설상가상으로 고흐의 구필 화랑 시절 상사이자
좋은 친분관계를 가졌던 테르스테흐가 고흐가
시엔과 동거한다는 사실을 알고
과도한 분노를 표출해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고흐의 아버지가 시엔과의 동거를 알게된 것도
테르스테흐가 편지를 보내서였다는 의혹이 있을 정도다.
상황이 이리되자 고흐의 아버지는
우리 아들이 마침내 완전히 미쳐버렸어라면서
고흐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고 시도했다.
이 소식이 테오의 편지를 통해서 고흐 귀에 들어가자 고흐는
아버지에게 격한 분노를 품었고
이때껏 아버지를 존경해오던 고흐는
이를 계기로 아버지는 물론 조직화된 기독교회 자체에
심한 분노와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매춘부 생활로 돌아가려는
시엔과 시엔의 가족들 때문에
시엔과의 관계는 결국 파탄나고 큰 양심의 가책을 안고서
고흐는 그녀와 결별하게 된다.
1883년 9월, 헤이그에서 시엔과 결별한 고흐는
드렌테 남부의 호헤벤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고흐는 알베르튀스 하르트소이케르라는
사람의 집에서 하숙하며 화가의 길을 모색했다.
그곳에서 보름후에 화가들이 있다는 곳을 전해들은 고흐는
다시 호헤벤에서 니암스테르담까지 가게 된다.
니암스테르담에서
고흐는 운하의 도개교를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이 시점에서 고흐는 유화를
그리고는 있었지만 작품의 기법상으론
물감으로 소묘를 하는 것이라서 유화라고는 해도
결국 소묘와 다를 것이 없었다.
아직 고흐는 색채의 활용이라는
측면에는 미숙했던 것이다.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
고흐는 혼자서 그림의 기법을 익혀나갔다.
외딴 시골의 황야와 습지에서 고흐는 순수한 자연을
동경하면서 고독하게 살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그림 실력에 다른 화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동생 테오가 구필 화랑을
때려치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독자적으로 화랑을 세울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자
고흐는 놀라서 어찌할까를 고민하다가
결국 뇌넨으로 옮겨간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해
12월에 뇌넨으로 가게 된다.
뇌넨에서 고흐는 그리 편치 않은 시간을 보냈다.
시엔의 일로 아버지를 존경하던 마음이 싹 가셔서
아버지의 신앙에 노골적으로 반감을 표하던
고흐와 작은 동네 뇌넨에서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고흐를 데리고 살아야 하는
가족들간의 감정이 편치는 않았겠지만.
안 그래도 힘들던 아버지는 고흐의
가혹한 반감에 더 힘들어지기만 했다.
결국 아버지와 대화 끝에 잠정적으로 타협해
아버지를 격하게 비난하지 않는 대신
고흐의 기행을 놔두기로 해서 평화가 찾아왔다.
당초엔 드렌테로 돌아갈 생각이었던
고흐는 뇌넨에 눌러 살기로 마음을 바꾸고
목사관 뒤뜰의 헛간을 아틀리에로 삼아
그곳에서 그림을 그렸다.
드렌테에서 상당히 어두운 분위기였던
그림은 뇌넨에서
다양한 색채가 더해져 좀 더 발전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가족들과 불편하던 사이는 어머니가 부상을 입는
불상사로 인해
화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노처녀 마르호트 베흐만이
고흐에게 반한 것은 문제가 되었다.
이런 가운데 동생 테오는 결국 형 때문에 굴복하여
구필 화랑에 남아서 계속 형을 후원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고흐가 소묘와 유화를 파리로 보내면
테오가 그것을 구입하는 식으로
일종의 봉급을 주라는 과도한 요구에도
테오는 승락했을 정도다.
게다가 아버지가 건강이 안좋아졌고
고흐는 마르호트 베흐만과의 관계 때문에
아버지의 걱정을 더하는 실정이었다.
결국 고흐는 목사관을 나와서 뇌넨의 성당 관리인이던
요한네스 스하프라트에게 방을 빌려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고흐는 이곳에서 야외에 나가 그림을 그리거나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기 어려우면 산책하면서
가져온 갖가지 잡동사니를 가지고 정물화를 그리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마르호트 베흐만은 고흐에게
푹 빠졌고 이는 말썽을 야기했다.
마르호트의 집에선 고흐의 꼬락서니 때문에
고흐에게 마르호트를 줄 생각이 없었고
이는 고흐의 가족들도 매한가지였다.
고흐 자신도 마르호트의 정신상태가 불안정한 것 때문에
그녀를 별로 가까이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고흐와의 연애가 제대로 되지 않자
불안정하던 마르호트의 정신이 그만 폭발해
독을 마시고 신경발작을 일으키는 사태가 발생했다.
작은 마을에서 이는 심각한 스캔들이었고
고흐는 뇌넨을 잠시 떠나
아인트호벤에서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이런저런 우여곡절들이 있던 가운데 고흐는 이때까지의
작업들을 총결산하는 의미의 대작을 구상하게 된다.
대작의 실마리는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는데
1885년 3월의 어느날에
고흐는 호르트라는 농부의 집을 지나치다가 그 집에 들어갔다.
그때 호르트의 가족들은 석유램프 불빛 아래서
감자를 먹고 있었다.
고흐는 이 광경을 그림으로 그리기로 결심한다.
이런 와중에 3월 26일,
고흐의 아버지는 갑작스럽게 뇌졸증으로 사망했다.
장례식에 나타난 삼촌들이 고흐를 마구 쪼는 가운데
고흐는 그나마 테오의 위로로 한숨을 돌릴수 있었다.
이런 우울한 시점에 고흐는
하나의 정물화를 그렸는데 꽃병에 꽃을 꽂고
아버지의 파이프 담배와 담배쌈지를 놓은
정물화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감정은 아버지가 죽고 나서도
누그러지지는 않은듯 하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고흐는 창작열이 쇠퇴했다.
이를 만회하려고
고흐는 들라크루아의 색채론을 탐독했다.
이런 가운데 미완성이던 감자먹는
사람들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감자먹는 사람들은 고흐의 전기를 정리하는 대작이자,
고흐가 보리나주에서부터 그토록 원했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그리고 싶다는 열망의 성취였다.
물론 헤이그 시절에 사귄 화가 친구 반 라파르트는
이 그림을 밀레식으로 해석해 엄청난 혹평을 퍼부었다.
고흐는 나름대로 감자먹는 사람들로 성과를 냈다고 생각했지만
테오에게 보낸 그림은 팔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감자먹는 사람들의 모델이
되어준 호르트 가족중에
결혼하지 않은 딸인 시엔이 임신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고흐가 헤이그 시절에 동거했던
매춘부 시엔과 이름이 같기는 했지만
고흐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러나 뇌넨 사람들은 고흐가 괴상한 차림에
해괴한 기행을 하고 다녔기 때문에
이 일을 고흐의 소행이라 믿었다.
이리 되자 뇌넨의 신부가 가톨릭 신자들에게
고흐의 그림 모델을 하지 말라고 경고하기에 이르렀고
고흐는 뇌넨에서 더이상 인물화를 그리기가 어려워졌다.
결국 고흐는 안트웨르펜으로 옮기기로 하고
1885년 연말에 뇌넨을 떠났다. 뇌넨을 떠나기 전 고흐는
아인트호벤의 케세르마케르스라는 사람에게 찾아가
직접 그린 가을 풍경화 한점을 선물로 주었다.
케세르마케르스가
왜 그림에 사인을 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고흐는 이런 말을 남겼다.
"...그것은 사실 필요없다.
나중에 사람들은 반드시
나의 그림을 알아보게될 것이고,
내가 죽으면 틀림없이 나에 대한 글을 쓸 것이다.
만일 오래 살 수 있도록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그것을 확실히 입증해 보일 것이다."
일본의 우키요에에 영향을 받아 그 동안 렘브란트와
밀레의 어두운 화풍이 주류였던
인상주의를 밝은 화풍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곧 대도시의 생활에 싫증을 느꼈고
그는 프랑스의 시골 아를로 이주해
그곳에서 계속 그림을 그린다.
사실 그것보다는
그가 네덜란드나 파리의 광선이
너무 어둡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의 화풍이 변화함에 따라
밝은 광선의 남프랑스를 동경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동생이 결혼하면서
사회적으로는 거의 백수취급받는
시아주버니가 신혼집에 있는건 민폐이기 때문에
떠났다는 얘기도 있다.
또 고흐와 테오는 불화라곤 없이 사이가
좋았을 것 같지만
의외로 이때 테오집에 얹혀 살면서 밤마다 녹초가 되어
돌아오는 테오를 붙잡고
미술얘기를 떠들어대는 통에 테오에게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건 평생 가치관이 맞는 진정한 화가 친구를 갈망하던 고흐가,
테오에게 그런 존재가 될수 있는
예술적 가능성을 보고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해석 또한 있다.
테오를 보고 '너의 길은 화상이 아닌 예술가이다'라고
권유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아를에서 화가들의 공동체를 꿈꾸었던 그는
아는 화가들에게
모두 편지를 써보내서 화가 공동체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런 제안에 응했던 사람은 유일하게 폴 고갱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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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고갱 입장에서는 이 제안이 나쁠게 없었는데
고흐의 동생인 테오가
생활비를 대주는 식이었기 때문에
늘 돈때문에 시달리던 고갱에게도
공동생활은 나쁘지 않을 듯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성격 차이와
그림에 대한 관점 차이로
처음부터 이 공동생활은 실패할 운명이었다.
고흐는 밀레의 영향을 받아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을 좋아한 반면에
고갱은 기억에 의존해서 창의적으로
그려내는 방식을 선호했다.
이런 두 사람의 관점 차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아를에서
고흐가 친하게 지낸 카페 여주인 지누의 초상화였다.
고흐가 그린 지누의 초상화는
인간 내면의 순간을 포착하려는 의도였던 반면,
고갱은 지누를 마치 남자를 유혹하는
창녀같은 인상으로 그려냈다.
리얼리즘적이었던 고흐는
이런 고갱의 그림 창작 스타일을
왜곡이라고 생각했으나
처음인지라 그냥 넘겨버리려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갈등이 결정적으로 폭발한 그림은
바로 고갱이 그린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였다.
고흐의 그림에서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뚜렷한 눈동자를 보여주지만,
고갱이 그린 고흐는 흐리멍텅한 모습으로 보여졌다.
고흐는 고갱이 자신이 제정신이
아닌거라고 조롱하기 위해서
그림을 그린것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고흐는 술집에서 고갱과 술을 마시다가
술잔을 집어던지는걸로 자신의 분노를 표출했다.
결국 고갱이 온지 두달이 약간 지난 1888년 12월 23일,
고흐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켰고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다.
고갱의 회고에 의하면 고흐가
면도칼을 들고 자신을 노려보며
나타나서 자신을 찌를듯 해보였지만
노려보기만 하고서는 나가버렸다고 한다.
그 뒤에 귀를 잘라버린 걸로 보이며
잘라낸 걸 가끔 만나던 사이인 라셸이라는
창녀에게 건네주었고
그걸 보고 기겁한 라셸이 경찰에 신고했다고 한다.
하지만 세간에 통설처럼 왼쪽 귀를 완전히
자른건 아니고 귓불만 잘랐다.
고흐가 귀를 완전히 잘라버린걸로 오해를 받은 것은
그의 자화상에서 왼쪽 귀(거울을 보고 그렸으니 오른쪽편)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지만
여러 기록으로 보면 귓불만 자른 게 분명하다.
테오가 후에 고흐를 방문했을 때 귓불만 잘려서 얼핏 보면
귀를 잘랐던 일이 있었는지 모를정도로
상처가 안보인다고 했을 정도다.
그러나 2016년 7월 암스테르담 소재 반 고흐 미술관에서
새로 공개한 당시 의료기록을 보면 왼쪽 귀를 귓불만 남기고
다 잘랐다고 하여 논란이 되고 있다.
왜 하필이면 귀를 잘랐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고갱의 회고가 맞다면 고갱을 찔러버릴 의도였던 것 같지만
그런 사람이 생각을 돌이켜서 자신의 귓불을 잘라버렸는데
정신과적인 분석에 의하면 자신의 신체를 자르라는
명령적인 환청때문에 그랬을 것이라는 지적이 있긴 하다.
또한 고흐가 이 사건을 일으키기 불과 얼마전에
그린 그림인 "아를 투우장의 관중"에서
고흐의 의도를 알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투우에서는 소의 귀를 자르는게 승리의
표상으로 여겨진다고 하는데
고흐가 어쩌면 고갱의 압박이라는 것을 벗어나려는 차원에서
고갱을 찌르려다 생각을 돌이켜서 자신의 귀를 잘랐고
그것으로 고갱의 압박에서 벗어나
승리했다는 상징이 아니었을것이라는 추측이다.
테오의 결혼에 충격을 받아 귀를 잘랐다는 설이 나왔다.
아를 시절, 뜨거운 햇볕 아래서
모자도 안 쓰고 그림을 그리던 게
정신병 원인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고,
압생트를 많이 들이켜마시며 스스로
망가진 것도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참고로 90년대에 나온 국내 위인전에서는
주로 고갱이 그린 고흐의 그림과 연결시켜서
'내 귀는 이렇게 안 생겼어!' 라고 주장하려는
목적으로 귀를 잘라서 그림과 나란히 대조해서
보여주려고 했다는 설이 자주 보였다.
2009년 고흐의 귀는 사실 폴 고갱이 펜싱검으로 잘라냈다는
주장이 프랑스 일간지 <르피가로>에 보도되었고,
2011년 TV 프로그램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이 내용이 방영되었다.
독일 역사가 Hans Kaufmann과 Rita Wildegans는
2009년 책 "Pakt des Schweigens"(침묵의 협정) 출간 및
ABC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사건의 증언들과
당사자들의 친구, 가족에게
쓰인 편지들을 분석하여 판단한 결과,
당일 밤 어두운 조명 아래서 논쟁이 격렬해지며
고갱이 본의 아니게 무기로 고흐를 다치게 하였고,
고흐는 고갱이 처벌받지 않기를 원하는 우정에서
진실을 말하지 않았다고 본다고 말했다.
1차적으로 아를 시립병원에 입원한 고흐는
이듬해인 1889년 1월 7일에 퇴원했다.
아를 시립병원의 의사 레이는
고흐의 예술성을 긍정적으로 보았는지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퇴원하고 싶다는
고흐의 열망을 받아들여주었다.
그러나 고흐는 물감이나 석유를 먹으려 드는
발작 증세를 보였고
결국 아를 시민들이 고흐를 강제로 입원시키라고
민원을 넣을 정도였다.
결국 2월에 고흐는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레이는 낮에는 집에가서 그림을 그리고
밤에 병원에 돌아오게 하는 식으로 안정을 취하게 해주었다.
나름 친하게 지냈다고 생각한 아를 사람들이
강제 입원 시키라고 청원한것에
고흐는 불만을 터트렸고
아를 시립병원에도 불만을 가진 고흐는
테오에게 다른 정신병원에 가고 싶다고 부탁했다.
결국 테오는 형이 지내면서
그림을 그릴만한 정신병원을 알아보았고
생레미의 생폴 요양원을 추천받아
1889년 5월 8일, 고흐는 아를을 떠나 생레미로 가게 되었다.
아를에서 고흐와 그나마 친하게 지낸 건
룰랭 집배원 가족 정도였다.
룰랭 가족이 이후 마르세유로 옮겨가면서
연락이 뜸해졌지만
고흐는 이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생레미에 대해서 고흐는 처음에는 괜찮게 생각했지만
불과 두달도 지나지 않아서
요양원에 대한 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생레미 시절에 고흐의
후기 걸작으로 일컬어지는 작품들이 여러개 나왔다.
저 유명한 "별이 빛나는 밤"이라든지
사이프러스 나무를 소재로한 작품등이 그것들이다.
별이 빛나는 밤의 경우는
미국의 시인 휘트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 시기 그림들에서 일부 연구자들은
고흐의 죽음에 대한 움직임을
읽을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별과 사이프러스 나무인데,
사이프러스 나무는 서양에서는
한번 자르면 다시는 뿌리가 나지 않는 탓에
죽음을 상징하는 나무로 여겨졌다.
아를 시절에 강렬한 색채의 해바라기를 그린 것과는
상반된 태도라는 지적이다.
또한 별은 영원을 상징하는 것으로
죽음을 은유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살아생전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고독하게 죽은듯한 느낌이 강한
고흐의 이미지와 다르게 그는 이시기에
슬슬 몇몇 전시회에 그의 그림이 초청받고
호평받으며 서서히 이름이 알려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생애에서 유일하게 그림이 팔린 시기도 이때.
오히려 그는 거기에 신경쓰기보다는
화가로서 훌륭한 작품을 남기는데
더 집중했다고 하는데, 건강악화로 인해 우울증이 온건지
이때까지의 그의 그림에 스스로
혹평하는 일이 잦아졌고
그림이 생각대로 안그려지는 것에 대한 비관도 심했다고 한다.
또한 화가가 된지 10년 가까이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그가 테오에게 짐이 되고 있다는 생각도.
또한 그의 주기적인 발작에 대한
불안감을 엿볼수 있는데
'만일 내게 정말 심각한 발작이 일어나서
그림을 아예 못그리게 되면 어쩌지?'
하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동생 테오에게 가뜩이나 경제적인 부담을 주고 있는데
잘못하면 아예 거동이 안되는
반신불수 상태까지 갈수도 있다는 것은
그자체로 큰 정신적 부담이었을 것이다.
생레미의 요양원에서 퇴원할 날이 가까워지자
동생 테오는 형이 지낼만한 좋은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인상파의 선구 주자인 화가 카미유 피사로에게
이 문제를 상의하자
피사로는 파리에서 가까운 작고 조용한 시골 마을인
오베르쉬르우아즈를 추천했다.
오베르는 파리에서 가까운 편이면서도
밀밭과 자연 풍광이 좋은 시골 마을이라
이미 여러 유명한 화가들이 오베르에 가서 그림을 그리곤 했다.
고흐가 존경하는 화가 중 한명이었던
도비니도 오베르에 화실을 두고 작업을 한 적이 있었다.
또한 화가들과 교분을 나누던 의사
폴 가셰가 있었기 때문에
가셰라면 고흐를 이해해주고 병의 치료에도
도움이 될것이라는게
피사로의 판단이었다.
결국 피사로의 충고를 받아들인 테오는
1890년 5월에 생레미의 요양원을
퇴원한 고흐를 오베르로 보내게 된다.
1890년 7월 27일,
고흐는 결국 쇠약해진 몸과 정신을 이겨내지 못하고
권총으로 자살한다.
즉사하지 않고 피투성이로
머물던 여관으로 와서 쓰러졌는데
여관 사람들이 의사를 데려왔으나 쓸모없는 짓이었다.
당시 의식은 있었지만 별다른 차도 없이
"고통은 영원하다." 라는 유언을 남기고
그렇게 그는 이틀 후인 1890년 7월 29일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아우
테오 반 고흐도 형이 죽은지
6개월 후인 1891년 2월 25일
서른 넷 나이로 형을 따라갔다.
직접적인 자살은 아니었지만 사실 자살같은 죽음이었고
형제는 나란히 곁에 묻혔다.
빈센트와 테오 두 형제의 죽음에
매독이 연루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사실 매독은 그 당시에는 워낙에 흔한 질병이었으며,
무수한 예술가들이 이 병으로 시달렸기에 예술가라면
당연히 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사람에 따라 매독에 걸리고도 장수한 경우도 있는데,
스페인 화가 고야는 매독에 걸리고도
82살 장수를 누리고 갔다.
그러나 매독설은 신빙성이 없다는게 일반적 견해다.
고흐의 발작 증세는 매독과 무관하고
테오의 죽음은 형의 죽음에 의한 충격과
죄책감때문이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는것.
또 다른 주장으로는 그가 권총 자살이 아닌
살해당했다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 부분은 2015년 2월 8일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2014년에 총상 분석 전문가인 범죄과학자
빈센트 디 마이우 박사는 고흐가
동네 청소년들에게 우발적으로 총을 맞았는데
그는 그 소년들에게 죄를 짊어지게 하고 싶지 않아
자살한 것으로 가장했다고 주장했다.
사람을 좋아하던 고흐의 성미로 본다면
그럴듯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이것 역시 근거가 빈약하다는 반론이 있지만,
박사가 주장했던 증거 1 - 권총이 사라짐,
증거 2 - 총알이 몸을 관통하지 않았다,
증거 3 - 화약 반응이 없었다 등, 이 3개만 본다면
근거가 빈약하다고 할 수 없다.
왜냐면 그 당시는 총기 기술이 발달한 시대도 아니거니와
특히 증거 2,3을 정확하게 해명한 사람도 없다.
이것을 조금 변형해서 사냥꾼들의 오발로 인한
죽음이라는 설도 있다.
심지어 일본의 한 고흐 연구가는
고갱이 고흐를 죽였다라는
비약이 아주 심한 주장을 펼치기까지 했다.
그에 의하면 고갱은 고흐가 여전히
자신에게 인정받고 칭찬을 듣고 싶어하며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귀 자른 사건등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파탄난 상황에서
고갱이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기는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갱은 고흐가 자신을
찾도록 명분을 만들려고
고갱과 고흐를 모두 잘 알고 친하게 지내던 사이이자
자신의 측근인 라발에게 엽총을 주고
오베르의 고흐 숙소에 몰래 가서
갖다두고 오게 했다는 것이다.
고갱의 계산은 엽총을 보면 고흐는 자살 충동이 일어서
엽총을 쏘아 자살 시도를 할것이지만
엽총의 성능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에
중상을 입는정도에서 그칠것이며
그렇게 되면 고흐는 고갱을 찾게 될것이고
고갱은 고심하는척 하다가
중상을 입은 고흐를 위해서
가는 형식을 취할 것이라는...
이야기지만 대부분의 고흐 연구가들은
말도 안되는 소리로 치부하고 있다.
무엇보다 고갱은 작가로서의
생의 대부분을 타히티 섬에서 보냈고
자기 앞가림 하기도 바빴다.
고흐의 삶에서 고갱이 미친 영향에 비해
고갱의 삶에서 고흐의 비중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그냥 같이 그림 그리던 괴짜친구 정도? 게다가
고흐가 자살에 사용한 총은 엽총이 아니라 권총이었다.
기사 또 다른 고흐 연구가 고바야시 히데키는
저서 "고흐의 증명"에서
그의 대표 자화상 중 하나인 왼손잡이 자화상이
정교한 위작이라 주장하면서,
이 배후에 테오의 아내이자
빈센트와 테오의 서간집을 출간해
그를 알린 요한나 반 고흐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더 나아가,
이 위작의 제작 동기가 요한나가 반 고흐의 자살에
동기를 제공한 일부 책임이 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초상화에 대한 그의 위작 주장은 나름의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하면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의 독자적 가설은
서양권에서는 별달리 언급되지 않았다.
실제 고흐의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주장이 엇갈린다.
어떤 학자들은 고흐가 북방(즉 네덜란드)을 회상하면서
다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던 차에
총기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고흐가 자살을 했을리가 없다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다른 학자들은 생레미 시절의 사이프러스 나무와
별의 그림,
그리고 오베르에서 그린 최후의 걸작
"까마귀가 나는 밀밭"등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느껴지기 때문에
결국 고흐는 자살을 선택한 것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와는 별개로 오베르의 가셰 박사에 대한 비판도 많다.
고흐가 중상을 입고 왔을때 가셰가 총알을 적출하는
외과 수술을 받게 했다면
살수도 있었지만 외과 수술 반대론자였던
가셰가 외과 수술을 받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
고흐 자신도 가셰에게 그다지
신뢰가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이야기는 최근 개봉한
영화 <러빙 빈센트>에서도 다뤘다.
그 영화에서는 고흐가 "내가 죽으면
모두가 행복해질수 있겠지" 라며 치료를 거부했다 나온다.
최근 또 다른 연구에는 사망 전 18개월 동안
조울증이나 경계성 장애를 앓고 있었으며
이런 증상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자살에 이르게 됐을 것이라고
미술사가와 의학계 전문가들이 주장해오고 있다.
고흐가 화가가 된 방법은 순전히 자신이
존경하던 화가들의 그림을 보고 그것을 모사하면서
기교를 익혀나가는 방식이었다.
당연히 이런 방식은 다른 화가들에 비해서
그 발전속도가 느려보일수도 있지만
오히려 이 덕분에 고흐는
독특한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수 있었다.
만약 고흐가 처음부터 파리로 가서
인상파 조류를 접했다면
자신의 개성이 사라졌을수도 있다.
그러나 고흐가 일관적으로 자기 작품에 대해
'자신의 정념을 표현하는 것'을 하나의 화두로
아카데미즘을 계속해서 부정해왔고,
인상파를 접할 때도 훌륭하다고는 생각하나
자신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고
얘기했던 것을 생각하면
어찌 됐든 그는 개성있는 화풍을 획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사실 그는 안트웨르펜 아카데미에 소속되어
많은 것을 배우고자 주/야간 강의를
모두 수강하기도 하는등의
시도를 한 적이 있으나,
그의 성격과 개성(아카데미즘을 거부하는)은
이번에도 역시 강사들의 분노를 사
얼마 안가 퇴출당했다고 한다.
어지간히 대인배인 화가가 제자로
삼아주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그는 결국 독학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초기 고흐에게 영감을 준 화가들은 렘브란트나
프란스 할스 같은 네덜란드의 옛 거장들로 이들에게서
기본적인 고흐의 스타일인 거친 붓 스타일 이라든지
음영이 뚜렷한 기법같은 것을 배웠다.
다른 한편으로 영향을 크게 미친 화가는 바로 밀레였다.
고흐의 밀레에 대한 존경은 대단해서 "밀레 사부"라고
부를 정도였고 밀레의 그림을 모사하기도 했다.
물론 밀레의 스타일을 고흐가
그대로 수용한것은 아니며
오히려 밀레는 고흐에게 고흐 그림의 중요한 소재인 자연,
그리고 자연 속의 평범한 사람들을
그리는 것에 더 큰 영향을 주었다.
고흐는 파리에 와서야 인상주의를 제대로 알게 되었고
비록 인상주의 스타일에 유보적이긴 했으나
그 영향을 받아들였다.
파리 이후로 고흐는 인상주의의 주요한 특징중 하나인
색채의 활용에 능해졌고 쇠라와
들라크루아의 영향을 받았다.
쇠라에게는 점묘법의 영향을 받아
붓터치가 점 모양을 띄는 양상으로 나아갔고
들라크루아에게서는 대담한
색채의 활용이라는 영향을 받았다.
또한 일본의 우키요에에게서도
영향을 받아 그림자의 생략,
가는 선으로 둘러싸여진 얕은 채색, 풍경과
대비되는 거의 보이지 않는 크기의 인물등의
일본적 스타일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아를병원 시기에 이르러 고흐의 화풍은
완성단계에 이르게 된다.
화려한 색채와 독특한 선 터치등을 사용했는데
특히 아를 이후의 그림에서 눈에 띄는 것이
다양한 형태의 선이다.
생레미 시절에 특히 두드러지는 이런 선들은
나선, 원, 물결등의 모양으로
형상을 구성하는 방식을 취했다.
"별이 빛나는 밤"이 이런 독특한 선으로
구성된 대표적 작품이다.
작 품
감자를 먹는 사람들(1885년)
해바라기
아를르의 침실
의사 가셰의 초상
별이빛나는밤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종영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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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謹賀新年♨
새해 福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9年 己亥年 새해 아침
崔相淳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