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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잡은 자들이(1)
마 26:57-68
57 예수를 잡은 자들이 그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58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60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61 이르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62 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하되
63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6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5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그가 신성모독 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모독 하는 말을 들었도다
66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대답하여 이르되 그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67 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 이르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마 26:57-68 / [의회 앞에 서시다;막14:53-65,눅22:54 이하,요한18:13-24] 그들은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갔다. 거기에는 율법학자들과 모든 유대 지도자들이 모여 있었다. 58) 한편 멀찍이 뒤를 따라간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 안뜰에까지 들어가 예수께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보려고 군인들 사이에 끼여 앉아 있었다. 59) 대제사장들과 모든 의회원들은 예수를 사형에 처하려고 거짓 증거를 찾고 있었다. 60) 많은 사람이 거짓 증언을 하였지만 제각각이어서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 마침내 두 사람이 앞에 나서며 말하였다. 61) `이 사람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세울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62) 그러자 대제사장이 일어나서 예수께 물었다. `자, 당신이 그런 말을 하였는가? 아니면 하지 않았는가?' 63) 그러나 예수께서는 침묵만 지키셨다. 그때 대제사장이 예수께 다시 물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가?' 64)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장차 너희는 ㄱ) 인자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ㄱ. 시 110:1,단 7:13) 65) 이 말을 듣자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으며 큰소리로 말하였다. `이자가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 이 이상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하겠소? 여러분은 모두 이자가 말하는 것을 듣지 않았소? 66)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소?' 그러자 사람들은 `사형이오! 사형이오! 사형이오!' 하고 아우성을 쳤다. 67) 그리고 그들은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때렸다.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뺨을 때리면서 68) `알아맞혀 보시지, 그리스도 양반. 당신을 친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조롱하였다.
예수님을 잡은 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끌고 갑니다.
베드로가 멀찍이(57-58) 베드로는 용기와 비겁 사이에서 갈등하면서도 예수님을 따라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지 못하고 멀찍이 따라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붙잡힌 이후 베드로는 겁을 먹고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합니다. 이내 정신을 차리니 예수님을 돌보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 가야바의 집 뜰에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심문이 시작되자 그 결과를 보고자 베드로는 산헤드린 관원들과 대제사장들의 시중들 사이 아랫사람들의 뜰에 끼어들어 앉게 됩니다. 57) [의회 앞에 서시다;막14:53-65,눅22:54 이하,요한18:13-24] 그들은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으로 갔다. 거기에는 율법학자들과 모든 유대 지도자들이 모여 있었다. 58) 한편 멀찍이 뒤를 따라간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 안뜰에까지 들어가 예수께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보려고 군인들 사이에 끼여 앉아 있었다. 9 대제사장들과 모든 의회원들은 예수를 사형에 처하려고 거짓 증거를 찾고 있었다. 60) 많은 사람이 거짓 증언을 하였지만 제각각이어서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 마침내 두 사람이 앞에 나서며 말하였다. 61) `이 사람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세울 수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62 그러자 대제사장이 일어나서 예수께 물었다. `자, 당신이 그런 말을 하였는가? 아니면 하지 않았는가?' 63) 그러나 예수께서는 침묵만 지키셨다. 그때 대제사장이 예수께 다시 물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가?' 64)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장차 너희는 ㄱ) 인자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ㄱ. 시110:1,단7:13) 65) 이 말을 듣자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으며 큰소리로 말하였다. `이자가 하나님을 모독하는구나! 이 이상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하겠소? 여러분은 모두 이자가 말하는 것을 듣지 않았소? 66)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소?' 그러자 사람들은 `사형이오! 사형이오! 사형이오!' 하고 아우성을 쳤다. 67) 그리고 그들은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때렸다.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뺨을 때리면서 68) `알아맞혀 보시지, 그리스도 양반. 당신을 친 사람이 누구인가?' 하고 조롱하였다.
거짓 증인(59-68) 겟세마네에서 붙잡히신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끌려가십니다. “온 공회”는 산헤드린 공회를 말하는 것입니다(59). 산헤드린 공회의 정원은 70여명이었습니다. 하지만 회의를 열기 위한 정족수는 23명이었기에 공회 의원 모두가 모인 것이 아닌 정족수가 되었음을 말합니다. 이어서 성경은 예수님의 재판이 분명히 불법이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기준으로 정치, 종교, 형사범입니다. 이러한 사람에 대한 재판은 밤에 진행할 수 없습니다. 또한 사형이 선고되는 재판은 오로지 성전 안에서 공개적으로 진행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재판에 관한 모든 시간과 장소와 절차가 불법적으로 진행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하여 많은 거짓 증인이 왔으나 증거들이 서로 일치하지 않았습니다(막 14:56). 증거를 찾지 못하자 예수님이 이전에 하신 말씀을 왜곡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겠다고 한 것으로 몰아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고 하셨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가야바의 법정에서 거짓 프레임에 걸려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야바의 법정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이 거룩하게 선포됩니다. 옷을 찢는다는 것은 깊은 슬픔의 표현입니다. 또한 대제사장은 자기의 옷을 찢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습니다(레 21:10). 하지만 탈무드는 대제사장이 신성모독을 보았을 때는 예외로 하고 있습니다. 가야바는 예수님을 신성모독한 자로 보았고, 자신이 증인이자 고발자로 예수님을 고발하였습니다. 그렇게 가야바는 예수님을 사형시킬 근거를 찾았다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입니다.
적용: 악해져 가는 세상에서 더욱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을 바라보고 있는지 묵상하기 바랍니다.
有志竟成[유지경성] 뜻을 가지고 노력하는 사람은 반드시 목적을 이룬다는 의미입니다. 의지가 굳은 사람은 무엇을 하더라도 성공할 확률이 높습니다. 침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당한 대우와 억울한 일을 당한다면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을 받은 우리는 그 결실이 땅에 떨어지는 삶을 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 설 교 >
지상 최대의 법정 술수
마 26:57-68 / 전철민목사
여러분! 지상 최대의 기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신이신 하나님이 피조물로 내려오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33년을 사셨습니다. 이것은 지상 최대의 기적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 끌려 가셨습니다. 그곳에는 예수님을 맞이하기라도 하듯이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두 모여 있었습니다.
이것은 유대주의 자들의 음모였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그들은 짜여놓은 계획에 따라 일을 진행해 갑니다. 그곳에는 예수님을 모함하려는 거짓증인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주님을 모함할 뚜렷한 근거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준비는 헛된 것이었습니다. 1차 계획이 실패하자 그들은 두 번째로 주님을 코너로 몰아 책잡으려고 했습니다.
두 사람의 거짓증인들이 등장합니다. 그 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지을 수 있다고 했다 라고 증언합니다.
대제사장은 ..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고 “네가 한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습니다. 이 때, 주님은 침묵하셨습니다. 대제사장은 다시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말하라” 다그칩니다. 침묵하시던 주님은 갑자기 침묵을 깨십니다. 그리고 그렇다.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에 대제사장은 옷을 찟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것이죠. 주위 사람들도 사형에 해당하는 것이 마땅하다 라고 동의 하고 사람들은 달려들어 예수님의 얼굴에 침뱉고, 주먹으로 때리고, 갖은 모욕과 욕설을 퍼붓습니다.
1. 세상의 프로젝트 주님 죽이기 프로젝트 - 세상의 사명과 삶
오늘 말씀은 주님을 싫어했던 대제사장들, 서기관, 장로들 유대주의 자들이(공회) 자기들이 계획했던 아주 치사하고 악하기 짝이 없는 프로젝트입니다. 그것을 저는 일명 주님 죽이기 프로젝트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들 모두는 주님 한 분 죽이기 위해 온갖 계략과 음모를 꾸밉니다.
어리석은 그 프로젝트에 가룟유다가 동참함으로 그들에게 이 일은 손쉽게 진행이 됩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법정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 법정은 법정이라고 할 수 없는 법정입니다. 말그대로 주님 죽이기입니다. 온갖 거짓말과 술수. 억측, 무시. 비아냥.. 사악함.. 추악함이 드러나는 최악의 재판
그들은 예수님을 사형에 처한다는 결론을 이미 내려놓고 증거만을 만들기 위해 모였습니다. 주님은 으르렁 거리는 늑대들 속에서.. 불쌍한 한 마리의 양처럼.. 처절하게 모함당하고 고난당하시죠.
이 재판은 불법입니다.
첫째. 이 법정에는 올바른 재판관이나 올바른 변호인. 올바른 증인이 있지 않습니다. ( 합법적이지 못한 법정) - 예수님께는 정당한 변론의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둘째, 이 법정은 모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원래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면 축제 기간에 처형을 할 수 없었는데.. 이들은 그것을 무시하고 예수님의 처형을 아주 바쁘게 서둘렀습니다.
뿐만아니라 사형에 관한 죄목은 낮에 심의가 이루어졌는데. 밤중에 사전 통보없이 비밀리에 이루어졌습니다. 뿐만아니라 재판 일에서 만 하루가 지난 후 에 판결이 나야하는데 그렇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세번째. 이재판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과 : 수많은 거짓 사람들. 한분 하나님의 아들과 : 수많은 유대주의자들이 모합합니다.. 이 거짓증인들과 거짓증거들의 주님 죽이기로 작정한 프로젝트
* 그들은 왜 그랬을까요.. 자기 공동체의 견고한 교만 때문입니다. 전통에 매이고, 공동체가 무엇보다 중요하며. 자기들이 옳다고 믿는 신념 유대주의를 견고하게 세우기 위해서 여기에 진리이신 주님이 방해가 되었던 것입니다. 진리 조차도 방해가 된것이죠
2. 구원의 프로젝트
여러분 이 재판에서 뭐가 보이시나요?
우리는 그들의 주님 죽이기 프로젝트 속에서 하나님의 원대한 프로젝트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억지적이고 불법적인 재판에 우리 예수님께서 외롭게 담당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구원의 계획.. 구원의 프로젝트를 위해서. 이해할 수 없는 악한 저들의 계략을 아이러니칼 하게도 허용하셨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구원 하셔야만 했기 때문에 ( 이 불법을 내버려 두십니다.)
여러분 이런 질문을 해보셨습니까?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왜 꼭, 주님이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을까요?
1). 첫 번째, 전 인류를 위해 돌아가실 만한 위대한 분은 하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들어, 누군가의 죄를 위해 어떤 사람이 대신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사람은 한 사람의 생명정도 밖에 가치가 없습니다. 한 사람이 아닌, 전 인류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전인류보다 위대한 분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주님이 이세상을 만드셨기 때문에 주님은 온 천하보다 귀중한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신 주님 이셔야만 했습니다.
2). 과거 현재 미래
그리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든 시간속에서.. 대신 죽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한계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직 한분 주님. 그분은 시간을 초월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만이 모든 시대의 사람들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돌아가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정한약속입니다.
또한 죄를 지은 자는 피를 흘려야 법을 제정하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모두다 우리의 죄값으로 목숨을 내어 놓아야 합니다. 즉 피를 흘려야 합니다. 그런 우리의 죄값을 대신하는 방법은, 이 법을 제정하신 분이 직접 하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아브라함의 예)
4). 왜 십자가였을까요? (피를 흘리는 이유)
죄를 지은 자는 피를 흘려야만 하는 법을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만드셨습니다. 죄를 지으면, 목숨을 대신해야 하는 피흘림.. (구약의 모든 제사가 그래서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립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야만 했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실 수 밖에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구속해주는 유일한 방법이 하나님이신 주님이 직접 오시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신 목적대로 평생을 사셨습니다. 33년동안, 그리고 오신 목적대로 죽으시러 가십니다.
자신의 몸을 완전하게 내어주시기 위해 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을 주관하고. 시대를 이끌어 가시는 주님이시지만, 모든 것을 계획해 놓으셨기 때문에. 힘들지만 끔찍하지만 계획대로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로 나아가십니다.
하지만, 이 십자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아시고는 36^ 부터 할 수만 있으면 이 고난의 잔.. 죽음의 잔을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도 하십니다. 그리고 이 방법이 유일한 방법임을 아시고 결국,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고 결국 십자가 고난의 잔을 감당하십니다.
이 계획은 위대한 하나님의 프로젝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구원의 프로젝트. 즉, 주님은 구원의 프로젝트를 위해, 사명을 위해 오셨고, 사명따라 살아가셨습니다.
3. 주님의 모습 (주님을 죽이려는 그들 앞에서의 주님의 모습)
오늘 말씀에.. 주님을 모함하려는 자들이 거짓증언을 할 때 하나님이신 주님은 무엇을 하십니까? 먼저 침묵하셨습니다. 모함도 참으셨고.. 거짓 증언도 참으셨고.. 모욕도 참으셨습니다.
더 나아가 상식이하의 취급 하나님이신 주님을 때리고 침뱉고. 욕하고 주먹으로 치고 모욕하며 비아냥 거릴 때 다 참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우리를 위한 일이며, 우리를 위해 꼭 해야할 과정
여러분 주님의 사명과 주님의 마음을 정말 아시기 바랍니다. 나 때문에
1) 감사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안에 감사가 터져 나올 것입니다. 이 프로젝트의 이유가 나 때문이기에.
버림받을 수 밖에 없고, 그 피값을 치루어야 했지만, 주님의 이 인내와 참으심 때문에, 결국 우리가 버림받지 않게 되었고, 무시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영원히 내 안에 함께 거하시는 하나님이 되어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한 구원의 프로젝트 정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형편만 바라 보면서 감사할 조건을 주세요 주세요.. 라고 주장하기 전에 이 놀라운 은혜만을 다시 기억하며 겸손하고 감사하는 한 주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계획을 보라.
또한, 주님의 모습처럼 우리도 좀 참아야 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모든일이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답답해하고 한심스러워하는 중에도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인내하시고 참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원대한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이 이해안되는 상황이 벌어지며 하나님께서 욕을 먹으시고.. 기독교가 핍박을 받고.. 그리스도인의 명예가 땅에 떨어져 실추되어도 참으세요. 왜냐하면 인간들의 얄팍한 프로젝트, (계획)과 사탄의 악한 계획 그 너머에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쉽게 함부로 낙심하지 마세요.
모든 것은 여러분 계획대로. 여러분 말대로 진행되가지 않고.. 하나님의 프로젝트 가운데. 진행된다는 것을 기억하시며. 우리는 그 프로젝트 속에. 조그맣게 참여한다는 것.. 을 깨닫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당연히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을 향한, 계획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당연히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 개인의 삶까지도.. 계획중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자들을 이해하자.
저는 오늘 말씀을 보면서.. 주님을 죽이려는 이 사람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것 같앴습니다. 왜냐면, 저들에게는 진리가 가리워졌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깨닫지 못한 자들에게는.. 2가지의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해할 수 있는 현상과 이해할 수 없는 현상.
첫 번째는 이해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그들은 유대주의가 하나님이 원하는 마땅한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유대주의를 헤치는 예수님이 이단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예수님”이 도저히 이해될 수가 없었습니다. 옷을 찟고 화를 낼만하죠..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아는 지식과 상식과 믿고 있는 전통속에서는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미워할 수 밖에요. 진리이신 주님을 몰랐기 때문에.. 이단 이라고 취급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해가 됩니다. 진리를 모른 자들은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이해가 됩니다.
또한 두 번째, 진리를 깨닫지 못한 자들은 이해할 수 있는 행동 뿐만 아니라, 이해 하기 힘든 행동을 합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
눈에 뭐가 씌워 버린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그들을 보세요 예수님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이 지나치다보니. 미움이 살인을 위한 음모로 바뀝니다.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후에. 온갖 거짓증인들을 준비하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합당한 죄목을 찾는 것을 보세요. 그리고 주님을 때리고 욕하고. 비아냥 거리고. 침뱉는 비윤리적인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
오늘날, 우리 한국 청소년들을 보면 학교 폭력이 심각하죠. 특히 왕따문제 외면하므로 한사람의 삶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문제는 그러고도 “왕따를 당한 그 아이들의 문제로 모든 원인을 해석합니다. ” 그럴만 해서 그렇게 당한 거라는 거죠. -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아이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잘못을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유야 많겠지만, 지금의 이해하기 힘든 행동들의 원인은 잘못을 잘못으로 알지못한 무지입니다. 사탄이 심어주는 것이죠.
하나님의 진리를 모르는 자들이 이렇습니다.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비상식, 비도덕, 비윤리적인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7마디를 하실 때 그 중 한마디가 이렇죠. “아버지여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행동을 모릅니다. ”
주님은 무지한 그들이 안타까우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 사람들을 보시면서 그동안 열을 많이 내셨죠. 너무 열내지 마세요.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들을 이해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아는 것이 전부인줄 알고. 자기들이 하는 행동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황당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자기들이 하는 행동을 모른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받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직장안에서 사업속에서 무시당함을 경험하시죠. 가족과 친지, 이웃이 예수님안에 속했다는 것 때문에 비교하죠! 비아냥 거립니다.!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 저도 외가에서는 인정받고 사랑받는 신앙인이지만, 친가에서는 다른 종교를 가진 왕따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제가 안타깝고, 안되어 보인다는 눈초리를 받고 삽니다.
하지만, 저는 게의치 않습니다. 진짜 안되어 보이는 분들은 그분들이기 때문이죠. 기분 나쁠 것도, 괜히 힘들어서 마음쓸 필요도 없습니다
참 안되어 보이니깐요.
3). 진리앞에 일어서자
한가지 더 오늘 말씀을 보면. 주님은 침묵만 하지는 않으셨어요.
주님은 침묵하시다가.. 대답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이 주님께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게 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인지 물으실때입니다. <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말하라”>
모함속에 잠잠하신 주님 그런데, 사람들이 진리를 건드렸어요! 주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상황이 어때해도. 진리를 말해야 할 때. 진리를 선포해야 할 때.. 주님은 수많은 군중앞에서 당당하게 선포하십니다. 자신의 말이 성공하실지. 실패하실지를 생각하지 않고 선포하십니다. 그렇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고 앞으로 권능의 보좌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주님께서 생애 가운데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렇게 담대하게 말씀하신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정확하게 말씀하십니다. 거기다가. 덧붙여서 권능의 보좌 하나님 우편에 계신것과.. 재림하실 주님에 대해.. 당신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을 너무나 구체적으로 표현합니다. 그들이 옷을 찟고도 남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때가 되었고..진리가 선포되어야 할 때. 정말로 놀랍게. 담대하십니다. . 주위 의식 하나도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자신이 한 말 때문에. 어떤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것도 아셨습니다. 그들은 이제 죽이기로 결정할 것이고. 앞으로 십자가의 고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하지만, 무서워서. 죽을까봐.. 진리를 감추지 않으십니다.
확실하게.. 진리앞에서 한치의 물러섬도 없으시며. 선포하시는 주님.
여러분! 우리 주님 너무 멋있지 않으세요!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이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저에게 유일한 소망 한가지를 정하라 한다면 정말 잘 안되지만 우리 주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1.아버지의 원대한 계획을 보시며 사신주님. 그렇기 때문에.. 주위에 일어나는 염려 되는 상황. 걱정되는 상황.. 불안한 일들.. 작은 프로젝트들.. 별로 게의치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프로젝트안에 있습니다. 저도 그러고싶습니다. 짜잘한 일에 마음 뺏기고 싶지 않습니다.
.2..그리고 다 이해하고 싶습니다. 진리를 모르는 자들이 하는 행동들.. 이해할 수 있는 행동이든.. 정말. 앞뒤 가리지 않고. 상식이하의 행동이든. 정말로 다 이해 했으면 합니다. 그들은 진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3.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진리를 소유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확실한 자녀이기때문에. 때론.. 잠잠하고 조용하고. 인내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진리의 문제가 나왔을 때는 입에서 불을 토하는 선지자 처럼.. 의로운 칼을 들고.. 정말로 담대하고 용기있게. 세상가운데.. 마귀를 대적하며 싸우고 싶습니다. 물론, 저는 너무나 연약합니다. 못합니다. 이것은 제 소망입니다. 우리 주님처럼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제가 학생들에게 자주 강조했던 것이 있는데 사탄과 맞장뜨자입니다.
사탄은 온갖 방법으로 우리를 약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좀 강하게 전진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데.. 세상에 굴복하고. 사람이 두렵고 환경에 지배받고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사탄에게서 좀 하나님의 자녀답게 나가길 원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 주님 죽이기 프로젝트에 전혀 겁내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프로젝트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에게, 사람에게. 영향받지 않는 성도가 되길 원합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승리케 하시기 위한 우리를 대신한 죽음이셨습니다. 주님을 생각하시면서. 우리가 승리할 수 밖에 없다는 것. 우리가 승리자라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프로젝트속에서 아름답게. 삶을 살고 있다는것.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승리가 우리 주님의 고난 때문에 얻을 수 있다는 소중한 은혜의 감사를 가지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고난주간이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주님은 승리를 위해 낮아지셨습니다.
이번주는 고난 주간 특별새벽기도회를 하려고 합니다. 1년중에 이런 기간이라도 있어야 다시 한번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실 수 있으시면, 방법에 상관없이 금식도 해보면 좋을 듯합니다. 이번 한주 새벽도 깨우시며 은혜롭게 승리자로써 인내와 참을성을 갖는 한주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후에는 보리라
마 26:57-68 / 박조준목사
오늘 읽은 말씀은 예수를 잡은 무리들이 대제사장 가야바 앞에 왔을 때 있은 일의 한 대목 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아무 죄 없으신 예수는 검과 몽치를 든 무리들에게 붙들려 왔 습니다. 저희의 눈에는 세상이라도 얻은 것 같은 자신감에서 으글거리며 걸음걸이도 당당했 습니다. 그리고 열이 날 정도로 대제사장에게 예수를 송사합니다. 이 사람이 말이요 제가 하 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성전이 어떤 성전인데 헐기는 어떻게 헐며 그렇게 오랜 세월이 걸려 지은 성전을 자기가 어떻게 무슨 재주로 사흘만에 다 시 짓습니까? 이 놈은 정말 외람된 놈입니다. 대제사장이 일어나 조금 전에 말한 사람의 말 이 참말이냐? 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하시지 않으시고 가만히 서 계시기 만 합니다. 이때 대제사장이 다시 예수님을 향하여 묻습니다.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 하고 네게 묻는다.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이때 예수님은 조용히 입을 여시고 침착하게 그러면서 엄숙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말하였다. 그러나 내 가 너희에게 분명히 말하는 데 잘 들어라. 너희는 이제부터 인자가 전능하신 분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과 또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다. 주님은 무관심이 아니라 인내 로서 침묵을 지키셨고 비겁이 아니라 용기로서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나 필요한 진리를 선포 해야만 할 때는 주님은 침묵을 지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자신의 메시야 권을 단호하게 주장하셨습니다. 약속된 메시야요, 하늘에서 내려오신 메신저요,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기름 부음을 받은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시었습니다. 예수님은 일순간이라도 자신의 신격을 포기 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셨고 선언하셨습니다. 복음서 기자가 기록한 내용을 따르면 이어서 그리스도는 자신이 아버지가 되신 하나님의 오 른편에 앉게 되리라는 엄숙한 사실을 나타내기 시작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록 몇 마디 되지 않은 짧은 표현이지만 이 말씀에서 우리는 믿음의 큰 진리가 예수님에 의해서 분 명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도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핵심적 내용은 자기가 죽고 장사지낸 후 다시 살아나시며 아버지의 능력 아래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지금 이 시간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께서 의로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하여 영광 중에 재림하신다는 내용입니 다. 이 말씀이야말로 주님을 믿고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 얼마나 복된 말씀인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주님이 말씀하신 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그러나 이후에는 보리라 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이 말씀이 주시는 진리를 배우고자 합니다. 첫째로 그러나 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은 사실 대제사장 가야바 앞에 섰을 때는 육신적 으로 몹시 피곤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밤을 새워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피땀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이 자기 입장을 위해서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아니 하 셨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주님 의 피에 굶주린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모습은 어린양이 이리 떼에게 둘러싸여 있 는 모습과도 방불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조용히 머리를 드시며 둘러선 무리가 분명히 듣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후에는 보리라. 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말씀입니까? 이 얼마나 신 념에 찬 선언입니까?내가 지금은 수치와 고난을 당하나 반드시 내가 한 말이 그대로 이루어 질 것이다. 주님은 너무도 당당하게 그리고 신실하게 그 사실을 선언하였습니다. 주님은 자 신을 인자라는 겸손한 칭호를 사용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비하가 그의 영광에 전혀 손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수치와 죽으심이 보좌에 앉으시는 일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아니하였습니다. 원수들이 박해를 가해도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주님을 끌어내지는 못했 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흔히 진리 때문에 핍박을 당하고 수난을 겪으며 멸시를 당 할 때에 진리를 떠나기가 일쑤입니다. 그러나 겁 많은 사람이 진리를 버리고 어리석은 자가 진리를 거역한다 할찌라도 최후의 승리는 진리의 편에 있는 법입니다. 그 진리가 장사지낸바 된다 해도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그 진리가 버림을 당한다 해도 다시 영광을 얻게 됩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알 때 누가 진리에 대해서 부끄러워 하겠습니까? 진리가 궁극적으로 승리 하게 되는 것을 알 때 진리 때문에 일순간 박해를 받는다고 해서 누가 진리를 거역하겠습니 까? 우리가 아무리 연약하고 나약한 상태 속에서 진리를 지킨다고 할찌라도 그 진리가 궁극 적인 승리를 보장할 때 우리에게는 힘이 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교권을 잡은 사람들에 게 정죄되었습니다. 서기관들은 율법을 알면서도 예수님이 신성모독의 행위를 했다고 선언하 였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하나님의 규례를 잘 알면서도 예수를 없이 하라고 소리소리 질 렀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도 예수를 사형에 처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선언했습니다. 무서 운 일입니다. 세상에서 교회가 자기의 사명을 다할 때는 참으로 없어서 안될 귀한 존재이지 만 교회에서 진리가 떠나고 생명이 없어지면 오히려 세상이 없는 것보다 못한 존재가 되어버 리고 맙니다. 백합꽃이 그렇게 아름답고 향기 그윽해서 먼데 있는 봉첩을 끌어다니는 힘이 있지만 그것이 죽고 썩어 버리면 가장 더러운 냄새를 피우는 것이 되고 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진리를 떠나면, 성령의 감동을 무시하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으로 전락되고 맙니 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의 교회가 타락해 버리고 진리에서 떠나고 권력과 야합하며 교회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리는 때가 있다고 해도 절대로 실망하지 마세요. 그러나 이후에도 진리 가 빛을 발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세상의 권세를 쥔 사람들에게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그 당시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은 빌라도의 귀노릇이나 하 였습니다. 권력자의 장식품 노릇이나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로마의 막강한 군대를 통솔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권력의 소유자 앞에 누가 감히 대항할 수가 있겠습니까? 간사한 사람들 은 언제나 권력자 앞에서 아양을 떱니다. 그들은 눈치만 보며 삽니다. 그러다 보면 과잉 충 성을 합니다. 양심의 소리는 묵살해 버리고 칼 앞에 모든 것을 정당화합니다.생각해 보세요. 그 당시의 막강한 권세를 잡고 있는 빌라도 앞에 누가 감히 반대하는 의견이라도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만일에 그러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질 것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이제 권력 앞에서 죽임을 당한다고 해 도 다시 살아나시어 능력의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고 이후에는 구름 타고 오실 것이기 때문이 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담대하셨습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권력을 소유하는 것이 진 리를 소유하는 것과 가히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정의를 소유한 사람은 세상의 권세를 능히 대적할 수가 있습니다.진리의 주님은 세상을 능히 이기고 정복합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셨 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그렇습니다. 진리 를 따르는 사람들이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권세가 아무리 굉장히 보여도 진리 앞에는 맥을 쓰지 못합니다. 진리가 끝내는 이깁니다.예수님을 대적한 것은 권세만 아니고 잔인스러운 적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을 들은 대 제사장 가야바는 화가 나서 자기의 옷을 찢었습니다. 그의 분노는 불과 같이 타올랐습니다. 어찌 할 바를 몰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매우 침착하였습니다.하나님의 어린양은 조용 하게 자신의 원수들을 쳐다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 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예수님은 강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침묵을 지키고 확신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확신 이 있었기 때문에 기다릴 수가 있었고 자신의 예언이 진실하기 때문에 대제사장들의 학대에 도 불구하고 참을 수가 있었습니다. 승리의 확신이 있기에 폭력에 대해서 미소로 대하신 것 입니다.예수님의 마음의 평안을 보세요. 원수들 앞에서 담대하게 자기의 입장을 표명한 그 모습을 보세요. 너희가 바다의 파도같고 사납게 휘몰아치는 바다의 폭풍우 같을 찌라도 하나 님의 목적과 뜻은 이루어지리라. 너희가 그 뜻을 방해하거나 이루지 못하도록 행하지는 못할 것이다. 너희가 혼란 중에서도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인자를 보게 되리라. 이런 뜻의 말씀입니다.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신 후에 헤롯과 빌라도 앞에서 체포를 당하시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못박히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을 당황하 거나 주저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원수들이 기뻐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사랑한 제자들이 멀리 떠나가 버리고 부인하는 제자가 있을 것도 알 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면서도 담대하게 선언하였습니다. 여러분, 그 러나 라는 말은 매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상징적인 낱말일 수도 있습니 다.
기독교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러나의 종교 입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합니다. 그러나 싸이지 아니합니다.답답한 일을 만납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아 니합니다.핍박을 당합니다. 그러나 버린바 되지 아니합니다.꺼꾸러뜨림을 당합니다. 그러나 망하지 아니합니다.환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절망하거나 자포자기하지 아니합니다.이것이 기 독교의 복음입니다. 둘째로 이후에는 보리라 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후에는 보리라. 이 말씀 의 뜻은 주님의 영광이 미래에 있다는 것을 말씀해 줍니다. 오늘도 아니고 내일도 아닙니다. 따라서 인내가 필요하고 잠시 동안 기다려야 합니다.그러나 이후에는 보리라. 아주 멋이 있 는 말입니다.성경에도 그가 너희에게 되어질 일을 고하리라 하였습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되어지는 일이 개인이든, 교회이든, 국가이든, 세계이든 우리의 한정된 이성을 가지고는 다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합니다. 그러나 이후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보는 것같이 분명해질 때가 올 것입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나라의 영광을 볼 수 없는 이유는 저들에게 그 영광이 미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영광은 미래의 지향적입니다.중생하지 못한 사람은 세 상에서 좋은 것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것들이 없어지고 사라져 버린 이후 에는 통회와 비운의 처절한 장면이 벌어집니다. 미련하고 우둔한 사람들은 먼 나라를 바라보 지 못합니다. 왜요? 눈앞에 있는 기쁨과 재물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진리고, 사명이고, 보람이고 관심조차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이 세상의 일만 생각하고 이후 의 일은 생각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도 바울은 골로새 3장 1절 이하에 이렇게 말 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 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그리스 도인의 생활은 이후에 있을 일을 바라보며 사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이후에는 보리라. 우리 믿는 사람에게는 이후에 대한 기대와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예수님의 원수들에게 있어서는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모릅니다. 요한계시록 1장 7절에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 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 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예수를 팔아먹은 사람이 이후에 주님 오실 때 어떻게 해야 겠습니까? 가야바는 어떻게 할까요? 빌라도는 어떻게 할까요? 세상에만 마음 두고 살던 사람 이 어떻게 될까요?이후에 라는 말씀을 생각하세요. 죄인된 우리에게 이 말씀이 들려질 때 정 신을 차려야 합니다. 세상, 육신, 쾌락에 빠져 있는 사람을 향하여 말씀합니다. 이후에는 어 떻게 하시렵니까? 다른 사람을 향해 분한 마음, 악한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을 향해 말씀합 니다. 이후에는 어떻게 될 것을 기억하십니까? 죄를 범하면서도 평안과 안전을 꿈꾸는 사람 들을 향하여 말씀합니다. 이후에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오늘의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서 내일의 비극을 잉태한 사람이 있습니까? 이후의 여러분의 운명이 어떻게 되실 겁니까? 사 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이후에 보리라 라는 말처럼 희망을 주는 말씀은 없습니다. 잠언에도 의인에게는 장래가 있어도 악인에게는 내일이 없다 고 하였습니다. 내일 이 없는 사람의 운명처럼 비극적인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 다시 오심을 기다립니다. 오 랫동안 기다렸다가 드디어 주님 강림하실 때 감격스러울 것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얼마나 반 가울까요?모든 죄의 권세가 종말을 고할 것입니다. 어두움의 세력이 이 세상을 더 이상 주관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헬라어의 다른 뜻으로 하면 이후 라는 말이 이제부터는 이라는 의미가 있습 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보고 나를 욕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더 이상 오랫 동안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후에 너희는 스스로 내가 지금의 내가 아니요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는 것을 보리라. 이제부터 너희가 살아있는 동안 그러한 놀라운 진리를 알게 되리라 고 하신 말씀을 이해합니다. 세상 사람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 손을 드시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맙니다. 저는 주님의 통치를 믿습니다. 세상의 모든 제도 나 기구는 사실 헛된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위대하십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닙니 다.예수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성호에 영광을 돌립니다. 해가 거듭할수록 그것을 더욱 명백하게 보게 됩니다. 주님은 오랫동안 참으십니다. 그러나 필요한 때 주님은 능력의 오른팔을 펴사 싸움에 임하시고 세상의 권세와 악의 세력을 물리치 실 것입니다. 저희들은 이러한 주님의 능력에 의해서 질그릇같이 부서지고 말 것입니다. 이 는 주님의 손에 든 권세가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능력의 징표를 우리 앞에 밝히 들어날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쥴리안(Julian)이 죽을 때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나사렛 사람이 나를 정복하였도다. 나사렛 사람이 나를 정복하였도다. 여러분 이 임종 직전에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를 온전히 믿고 따르시면 권능 의 우편에 앉아 계신 주님과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시는 그 주님을 이제부터 보시게 되실 것 입니다. 예수를 믿을 때 권능의 주님을 알게 되고,온전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강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올바른 일을 할 때 반드시 승리한다는 신념을 가지는 것 도 주님의 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오시는 것은 확실합니다. 미련한 처녀처 럼 되어서는 안됩니다. 신랑 온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도록 깨어있어야 하고 기름을 준비하 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오십니다. 언제 오실지는 알 수 없으나 주님은 속히 오실 것입니 다. 종이 주인을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기다립시다. 그런 자세로 주님 분부하신 일 을 충성스럽게 감당합시다. 그러다 주님 언제고 오시면 기쁨으로 담대히 맞을 수 있는 축복 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네가 그리스도냐
마 26:57-68 / 박지온목사
지난 시간에 "어찌 이런 일이!" 그렇게 메시지를 드렸습니다. 어떤 면에서 한쪽 면만 좀 강조를 했습니다 만은, 사실은 '이런 일이 왜 내게 일어나느냐?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느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 한가지 단어에 굉장한 충격으로, 때에 따라서는 어떤 면에서 인생에 실패처럼 느껴지는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성경은, 또 특별히 성도들이 당하는 일들은 우연이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계획이다!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면 날수록 그 속에는 '어찌 이런 하나님의 축복이 내게 있느냐?' 바로 반대급부로 그렇게 되어지죠.
그래서 "어찌 이런 일이!" 그럴 때는, 조금만 마음을 열고 눈을 떠서 보면, '어찌 내가 아무도 받을 수 없는, 아니 그 누구도 받을 수 없는 이런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어찌 내게 이런 복이 임했느냐?' 이것이 성도의 축복이요, 성도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어찌 이런 일이!" 그러는 것은, 이건 기적의 말입니다.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 속에 터져 나오는 감탄사다! 그렇게 이해를 하시면 되겠습니다. 믿는 사람은 믿음대로 될찌어다! 안 믿으면 할 수 없어요. 하나님은 안 믿는데는 도리 없다고 그랬습니다. 믿으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역사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이 "네가 그리스도냐?" 63절에 보면,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그랬어요. 여기서 "네가" 그러는 것은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처음 제목을 "예수가 네게 그리스도냐?" 이렇게 제목을 잡았습니다. 그래서 조금 보편성을 띄기 위해서 그냥 "네가 그리스도냐?" 그랬습니다.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예수가 네게 그리스도냐?" 진짜입니까? 다 된거예요. 오늘 벌써 예배 끝나도 돼요. 여기에 다 있습니다. 왜? 예수가 내게 그리스도다! 여기에 진실한 고백이 터져 나오는 겁니다. 여기에 다 되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특별히 바리새인들을 비롯해서 지식인, 유대인들이 이걸 못 깨달아서 지금까지 고생합니다. 지금까지 고생도 보통고생이 아니고, 처절한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유대의 역사를 잘 알잖아요. 그 숫한 역사 속에 죽음과 고통과 어려움이 바로 이 한 단어가 이해가 안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깨달아지지 못해서 닥치는 고생입니다. 반면에 유대 나라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이 복음이 이방으로 넘어오면서 복 받은 나라가 영국과 미국을 비롯해서 서방 유럽 쪽으로 복 받은 모든 나라들의 축복이 바로, "어찌 이런 일이 있었겠느냐?" 그 말은 뭡니까? 이 한 단어가 이해되는 때부터 그 나라들이 복을 받았습니다.
영국이 원래 신사의 나라가 아닙니다. 거기엔 야만인들이 모여있던 나라들입니다. 그런데 이 축복을... 원래 미국이 오합지졸로 모인 곳 아닙니까! 이 단어가 이해되어야 됩니다. 영국과 미국이 세계를 석권하는 이런 축복된 역사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이런 면에서 한국에 어찌 이런 복을 받았습니까? 뭡니까? '예수가 그리스도시다!' 이것을 깨달았다! 이건 엄청난 축복이요, 은혜인 것을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데로 이 사실을 제일 먼저 깨달았고, 고백했던 사람이 사도 베드로 아닙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랬을 때에, 예수님께서 뭐라 그랬습니까? 늘 듣는 말이지만 그걸 보통으로 들어요. '바요나 시몬아 네가 참 재주가 좋쿠나!?' 아니라고 그랬거든요. '바요나 시몬아 네가' 뭐가 있다구요? '복이 있도다!'그랬습니다. 복이 있도다! 오늘 여기에 모인 여러분들이 뭐 재주가 있고, 또 지혜가 있고 이런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시다! 모든 문제 해결했구나!' 이럴 때에 우리에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뭡니까? '네가 복이 있도다!' 진짜 복이 있도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조금 한해의 삶을 돌이켜 본다는 것보다도, 뭔가 이 징글벨 소리가 나오면 같이 들떠서 그러는데 들뜨지 마시고, 신년 새해부터 들떠있으면 이상한 일을 당해요. 그러니까 차분하게, '진짜 내가 하나님을 바로 믿고 있느냐? 정말 내가 예수가 그리스도시고 모든 문제 해결 되었다라고 하는 이 사실을, 그리스도를 깨닫고 있느냐? 알고 있느냐? 내게 예수가 그리스도냐!' 이 사실을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이것이 사실이라면 반드시 뭐라 그랬습니까? 복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축복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10년, 20년 믿고 오래 예수 믿었는데 축복이 없다! 사실이 없다! 이것보다 처절한 것이 없어요. 정말 시간 갈수록 뭔가... 하나님이 죽어 있습니까? 분명히 살아 계시는데, 제일 힘없고 제일 연약한 자들이 누구냐? 어떤 면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축복된 자리에 서서 당당하게 살아야 될 성도들이, 이게 바로 안 되었을 때에 너무 너무 어렵게 처해있는 사건들을 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말세에 예수께서 말씀한 것처럼, '믿음을 보겠느냐?' 이걸 잘 아셔야 합니다. 정말 믿음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여러분들이 누구보다도 이 세상에 행복한 자입니다. 참 축복된 자입니다.
이 한 단어가 이해가 안되고,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직분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정말로 예수가 그리스도 인 것을 믿느냐?' 이 사실이 이해되고 깨닫는 만큼 모든 것이 여기서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그 안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지혜와 총명과 지식 모든 보화가 그 이름 속에, 그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문제 해결 자다! 말이 아니라 사실과 진정으로 이 사실들이, 이 일들이 우리에게 누려지고 보여지는 축복이 있어야 될 것을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왜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느냐? 한 두 세 가지로 살펴보면서 우리 속에 혹시라도 아직까지 '예수가 참 그리스도시구나! 진짜 내게 모든 문제 해결 자로 오셨구나!' 이 사실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오늘 유대인들이 범했던 잘못 속에 들어가게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뻔한 것 아닙니까! 유대인들이 큰 축복을 받았지만 망했던 원인이 뭐냐?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똑같이 우리가 이 축복을 지금 듣고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서 주셨습니다.
모른다 그러면 똑같이 유대인처럼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건 뭐 도리가 없어요. 그렇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그냥 간단히 넘길 문제가 아니고 정말 내 인생을 걸고 이 사실이 이해가 되어야 됩니다. 오늘 본문말씀에 어찌해서 유대인들이 이 사실이 이해되지 못했느냐? 받아합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이 하나님이구나!"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시라는 증거로 죽음에서부터 부활했습니다. 그리고 하늘 영광의 역사에 함께 모으기 위해서 재림 주로 오십니다. 이 사실이 유대인들에게 전혀 이해가 안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해가 안 된다!' 저는 이걸 준비하면서 진짜 이건 어려운 일이구나! 왜? 여러분과 저는 부활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나라라는 사실을 가보지 못했어요. 그래서 이미 우리가 갖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라든지, 이미 갖고 있는 부활의 문제는 전부 뭔가 도저히 겪어보지 못했고, 또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형성된 내가 갖고 있는 지식수준에서, 그 다음에 사상수준에서 밖에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건 도저히 불가능한 문제죠.
여러분 그 사상이 한번 형성되면, 그 사상이 부서지고 다른 것이 들어간다는 것은 거의 어렵습니다. 그래서 옛말에 우스운 이야기 아닙니까! 세 살 버릇이 언제까지 가요? 평생 간다! 그 이야기입니다. 한번 머리에 들어가면 이게 안 깨어져요. 초라한 이런 지식들도 그런데, 이미 여러분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지식이 없고 부활에 대한 지식이 없는데, 이것을 가지고, 다른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한다! 부활을 의미한다! 이것은 바로 될 수가 없어요. 우리가 바꾸어지고 있다는 것은, 이것은 되어질 수가 없습니다.
어제 핵심에 이상배 목사님 이야기 속에서 전달하는 과정이지만 그랬어요. 우리가 전도하러 들어갈 때에 '참 복음, 복음!' 말은 하지만, 복음을 깨닫고, 복음을 말하기 전에 그 지역에 있는 사상, 그 지역에 있는 어떤 흐르고 있는 생각들! 이걸 바로 봐야 됩니다. 이게 바로 안되면, 이걸 파악하지 못하면, 바로 복음을 전할 수 없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일본에는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복음은 이미 가지고 있는 일본인들의 생각에는 우상 중에, 종교 중에 하나로 밖에, 사상으로 밖에 안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복음을 잘 못 받아요.
그리고 우리 마음과 생각에 전혀 알지 못하는 그런 것들을, 내 스스로 그걸 이해하고 극복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뭐라고 그랬느냐 하면, 완전히 이걸 다 비우고 오직 딱 하나의 일 뿐입니다. 뭐가 임해요?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뒤집는 방법은 이것밖에 길이 없어요. 여러분들이 뭐 여러 가지 생각과 여러 가지 어떤 자기 지식을 동원해서 예수 믿으려고 하지 마시고, 오늘 여기 오셨을 때에 딱 단순해지시기 바랍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셔서 깨닫게 해 주옵소서! 보게 해 주옵소서!' 뭘?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이 영광을, 그 하나님의 영원한 축복과 역사를...' 내 지식과 내 것으로는 안 되는 겁니다.
이미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의 나라!' 그러면, 이상한 것밖에 없거든요. 옛날에 귀신이 씨 나락 까먹던 이야기들, 그 뭐 내세관에 대해서 그 이상 다른 것이 없어요. 그러니까 지금 내세관이 만들어 낸 것이, 뭐 '쥐가 되었다가, 소가 되었다가...' 이런 것들 아닙니까! 오직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이게 뒤바꾸어지고 변화가 될 수 없어요. 그래서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여러분이 지금 아마 다양한 지식과 다양한 사상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뭐대로? '말씀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대로! '하나님의 나라!' 그러니까 말씀대로 하나님의 나라인데, 이 일이 잘 이해가 안되어요.
그래서 성경은 아주 기초적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시자 말자 가르쳐 주신, 기본을 말씀을 해 주신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3장 13절부터 나와있죠. 13절에는 부르심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들을 부르셨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일단 교회에 부르심을 받아 나왔다! 이건 껌뻑 넘어가야 됩니다. 어쩌다가 이 불림을 받았습니까? 그래서 '내게 어쩌다가 이런 일이 생겼느냐?' 이렇게 돌아가야 됩니다. 교회 앉아 가지고 감사가 안나오고 멍청하게 앉아 있다! 이건 뭐 설명이 안돼요. 그런 사람들에게는 메시지가 설명이 되어도 이해가 안 되는 거죠.
진짜 여러분들이 오늘 말씀을 붙잡고 조용히 생각해 보세요. '어쩌다가 내가 여기에 나왔느냐?' 물론 나오는 과정동안에 쉬운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몽땅 망하고 나왔고, 어떤 사람은 다 죽어가다 나왔다! 왜? 나오기까지가 그렇게 어렵더라 구요. 그러니 쉽게 앉아있는 것 같지만, 제가 이렇게 보니까 보통으로 나와있는 사람 거의 없어요. 한마디로 말하면 죽음 직전에서 거의 나왔어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근본적으로 끌려나온 것이지, 내 스스로 나온 게 아닙니다. 성령의 인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부르심에 대해서, 참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도 모르게 똑같이 그들과 같이 가야되는데...
그래서 여러분들이 뭐 교회 나와서 이런 일, 저런 일,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볼 때에 절대로 비난하지 마세요. 점점 우리가 복음에 눈을 뜰수록 그렇지 않습니까! 그 모습이 내 모습입니다. 다른 모습이 아닙니다. 혹시 뭐 요즘 그 크리스마스나 이런 연말을 보면서 별 희한한 인간들이 다 안 있습니까! 비난하지 마세요. 그게 내 모습입니다. 여러분들이 여기에 나오지 않았고, 아니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았다면 똑같습니다. 백 번, 천 번 더할 사람들입니다. 천지삐까리 입니다. 하나님이 불렀습니다. 이 축복된 자리에 나를 불렀다! 어찌 이런 일이 있습니까! 너무 귀하고 감사한 일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불렀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졸다가 잘못 부르신 것이 아니고, 창세 전에 미리 다 계획하셔서 철저한 검증 끝에 불렀습니다. 뭘 보고 불렀는지는 모르지만, 어쩔 때는 '저 인간 뭘 보고 불렀는지 희한하다!' 불렀습니다! 그런데 언뜻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니는...' 더해요. 어쨌든 하나님께서 부르심이라는 사실 자체가 벌써 은혜 중에 은혜 아닙니까!
그러면 왜 불렀느냐? '하나님의 나라!' 그럴 때에 다른 게 아닙니다. 불러놓고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에게 뭘 약속했느냐? 함께 있기 위해서 불렀습니다. '하늘나라!' 그러면 여기에 간단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일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면 이 사실이 이해가 안되면, 이 땅에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함께 있는 사실이 이해가 안되면, 천국에 가는 일이 이해가 안되어요. 천국에 축복이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함께 있기 위함이라! 이걸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다! 그 이야기 아닙니까! 그리고 똑같은 맥락에서 함께 있는 방법이 뭐로 또 이루어집니까? '전도도 하며...' 여러분들이 전도한다는 것은, 내게 함께 있게 하신 하나님이 다른 사람에게 함께 있게 하시는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함께 있는 여러분들을 통해서 만이 사람들에게 전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초기 메시지에 이런 내용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만은, 요즘은 전략 메시지 때문에 거의 안나오죠. 왜, 전도가 보이냐? 왜, 전도가 그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냐? 그리고 왜 전도 속에 모든 것을 숨겨놨느냐? 그 이야기는 다른 게 아닙니다. 만약에 군대가 이 일을 할 수 있고, 대통령이 이 일을 할 수 있고, 교수들이 이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면 뭐 그 사람들이 하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일은 군대가지고 되는 것도 아니고, 대통령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교수가 하는 게 아닙니다. 오직 누구만 할 수 있어요? 받아합시다. "나만 할 수 있다!" 나라도 그냥 내가 아닙니다. 어떤 나입니까? 함께 있는, 누구와 함께 있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나만이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깨달은 바울이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영원한 멸망과 죽음에서 건져낼 수 없기 때문에, 이 일을 안 하면 뭐 어떻다고 그랬습니까? '내게 화로라!' 그랬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있다! 그러면 내가 안 해도 돼요.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 이 일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이 일을 맡기시고 이 일을 생각만 해도, 방향만 잡아도, 하나님이 뭘 주신다고 그랬어요? 축복해 주신다! 그것은 전도하기 때문에 복을 받는다! 그 말이 아니고, '방향만 잡아도, 생각만 해도, 복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그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조금만 하나님의 방향에 맞추어서 나갈 때에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뭐 '돈 번다! 뭐 한다!' 하기 전에, '정말, 내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자가 되었느냐?' 이 사실이 바로 이해가 되어야 되죠. 그렇게 될 때에 뭡니까? 이 사실을 가장 가로막고 있는, 이걸 방해하고 있는 누가? 원수의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셨습니다. 여기서부터 나오는 겁니다. 이 일이 지금 바로 이해가 안되면, 여러분과 제가 바른 일을 할 수 없어요. 믿는 자의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 회복되는 만큼 뭐가 생기느냐? 믿음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 회복되는 만큼 이 속에 모든 것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과 제게 함께 있는 방법이, 그것도 간단하게 하지 않는 겁니다. 엄청난 투자가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그게 뭡니까? 성육신 아닙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인간으로 오시고 이 땅에서 여러분과 저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시고, 승천하시고, 그리고는 뭐로 함께 하십니까? 성령으로 함께 하십니다.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는 그 말속에는 엄청난 하나님의 투자가 여기에 있는 겁니다. 하나님이 한 인간을, 아니 여러분과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냥 '말로 있어라!' 그 말이 아닙니다. 엄청난 투자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한 개인, 개인이 엄청난 투자입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로 귀히 여기시느냐? '온 천하를 얻고도 이 생명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그랬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게 생각이 안 나고, 이게 이해가 안되니까 그게 전혀 실감이 안나요. 그냥!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 그래놓고는 자기밖에 몰라요. 다른 사람은 천하보다 귀한 것이 아니고 천하보다 천해요. 우리가 뭔가 하나님 앞에 조금만 참된 생각만 바로 해도 하나님이 엄청난 역사로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금현재 뭘 이해를 하셔야 되느냐 하면요. 마르지 않고, 지속할 수 있고, 낙심되지 않고 끊임없이 내게 생명의 힘이 샘솟듯이 나올 수 있는 배경이 이 배경입니다. 뭐 쉽게 말해서 예수의 생명을 통해서, 나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생명을 통해서 하늘나라를 누려야 됩니다. 이걸 실제로 가지고 있지 아니하면 여러분 지속해서 이 힘이 나오지 못해요.
예를 든다 그러면 요즘 철모르는 20대나 30대들이 카드를 만들어 놓고 막 끓어 대다가 집안망신 다 당하고, 자기 다 망하고, 이런 일이 비일비재입니다. 몇 일 전에도 두 아이까지 한강 물에 던져 가지고... 오늘 아침에도 그게 방영이 되던데, 자기 아이들을 한강 물에 던졌어요. 남매를! 그리고 자기가 살려고 했는데, 그 심보가 이상하죠. 완전히 씌였는 거죠. 그 이제 잡혀 가지고 조사를 받는 것을 잠깐 봤는데, 무슨 이야기입니까? 내게 없는데 사용하면 잠시는 재미있는 것 같아요. 잠시는 되는 것 같아요.
여러분 이걸 심각하게 들어야 합니다. 나는 다락방을 보면서 어떤 면에서 이와 비슷한걸 좀 느껴봅니다.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향해서, '우리를 보라 나를 보라' 그러면서 한 말이 있어요. 참 중요한 말입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그랬습니다. 여러분 예수가 그리스도십니다. 맞습니까? 누리고 있습니까? 내게 있습니까? 비로소 줄 수 있습니다. 이걸 못 주면 빚쟁이가 돼요. 여기에 흑암이 들어오더라 구요. 잠시는 재미를 볼 수 있어요. 잠시는 감동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개인이 이 사실을 누리지 못하면 오히려 흑암이 덥힐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바로 봐야 합니다. 이 사실을 누리면 누릴수록 넘쳐나는 힘으로 지속이 될 수가 있는 겁니다. 이게 안되니까 중간에 자꾸 미혹이 되는 겁니다. 흔들리게 되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항상 고백할 때에 전도할 때에 알아야 합니다. 마음속에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사실이거든요. 여러분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십니까! 내게 이 사실이 있습니까! '모든 문제 해결되었다!' 사실이 있습니까! 누리고 있습니까! 기도의 응답을 받고 있습니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이 사실이 이루어지는 만큼 뭐가 나옵니까? 파워가 나옵니다. 힘이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안될 때에 오히려 싫컷 말해놓고, 자기는 망하게 되는 이런 어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이걸 가지고 우리가 종교생활! 종교생활이라 그럽니다. 다른 문제가 아닙니다. 이 사실이 분명히 이루어져야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또 한가지는 뭡니까? 제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좀더 말씀을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만은, 이것 하나는 짚고 넘어가야 되겠습니다. 여러분 정말 영원히 진짜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그 나라의 영광! 진짜 사모됩니까? 그러면 왜 안 죽으려고 그럽니까! 나는 내가 뭔가 이 이번에도 그렇고, 병으로 극한 상황에 들어갔을 때에, '과연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고 죽기를 원하느냐?' 아니거든요. 어떤 면에서 보면, 거의 뭐 '하늘나라나 갔으면 좋겠다!' 왜? 너무 괴로워 가지고, 이렇게 괴로울 꺼면 하나님의 나라에 갔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지, 정말 사모되어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에 갔으면 좋겠다!' 이게 잘 없는 것 같아요.
여러분 정말 하나님의 나라에 가고 싶습니까? 세상 살기 싫어서? 세상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더 고통스러우면 어쩌렵니까! 눈이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행복과 기쁨이 이 땅에서도 못 누려지는데, 언제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 죽어서... 조금 의문이 돼요. 정말 하나님은 약속했습니다. 성령으로! 그래서 여러분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면 자기도 모르게 오는 것이 뭡니까?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 요즘 제가 많이 기도하는 것이 뭐냐하면, '기도해라! 모든 기도를 감사와 간구로 해라! 그리하면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뭐라 그랬습니까?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가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정말 방향 맞추어 나가게 되면, 응답하는 것은 하나님이 더 바쁩니다. 그래서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 이루실 것입니다. 홍해 앞에 선 이스라엘을 향해서 모세의 말이 나는 너무 감동스럽거든요. '너희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이 너희들을 향해서 행하시는 일을 보라!' 여러분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을 하나님이 부르시고 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되는 일 뿐입니다. '내가 한다!' 아닙니다. 그래서 적극적인 사고는 적극적으로 망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자신도 그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옵소서!' 오늘날 우리 모든 성도들이 '나의 삶을, 어려운 시대로, 그리고 어려운 세대에 세계 복음화의 역사 속에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보는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보게 하옵소서!' 이게 안되니까 뭐가 옵니까? 염려, 걱정, 근심! '염려, 걱정, 근심이 온다!' 그것은 마귀의 통로 아닙니까!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는 지금 오직 뭐라 구요? 성령으로 임하셔야 합니다. 왜? 우리 사상과 생각이 미치지 못해요.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또 한가지는 뭐냐하면요. 우리가 '복음, 복음!' 그러는데 흔히 복음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 복음인데 나를 위한 복음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 복음은 나를 위한 복음! 그래서 내 것과 전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무서운 이기주의가 교회 안에 있는 배경은 바로 이 배경입니다. 그래서 다툼이 있고, 시기가 있고, 질투가 있고, 여러 가지 모든 문제가 나오는 거죠. 복음을 어떻게 했느냐? 나를 위한 복음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 뭐라 그랬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 세상에 복음이 바로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내 복음이 아닙니다. 누가 복음이 아니고, 내 복음도 아닙니다. 세상에 복음입니다.
그래서 교회 성도들이 이 점이 이해가 안될 때에, 열심히 하면 할수록 뭐냐? 다툼은 더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 간에 한번 꼬인 일은 해결이 안돼요. 왜? 나를 위한 복음으로 이해하니까! 이게 해결이 안 되는 겁니다. 세상을 위한 복음입니다. 너를 위한 복음이요. 나를 위한 복음입니다. 이 복음이 이해가 될 때에 용서가 나오고, 여기에 사랑이 나오고, 여기에 수용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일단 여러분이 아실 것은, 수용이 안 된다! 내 복음입니다. 내 욕심을 위한 복음이요. 내 계획을 위한 복음이요. 내 만족을 위한 복음으로 떨어졌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사단의 음흉한 통로 중에 숨은 통로입니다. 열심히 하고 있지만 그 밑에 깔린 것은 전부 나, 내, 내 새끼, 내 개인, 내 욕심, 내 인간의 것! 전부 이것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뭐든지 할 때에, '나'라는 것과 계산을 가지고 시작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여러분 개개인만이 아니고, 목회 하는 나 자신에게도 가장 무서운 적이 바로 이것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이것에 눈이 열리지 않으면 해결이 안돼요. 그래서 이 문제 해결도 똑같이 뭐라야 됩니까? 성령이 하셔야 됩니다. 우리 지식 가지고는 이해가 안돼요. 굳어져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주여, 정말 내 능력으로 내 힘으로 안됩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그래서 바울이 말한 것은 늘 그랬잖아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나이다!' 뭐 내 힘으로, 내 생각으로, 내 것으로 아닙니다. 이것이 조금만 지나치면 조금만 뭘 하면 이상하게 우쭐대고... 인간의 본성입니다. 암만 벗어나려고 이를 바득바득 갈아도 안됩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그래서 '성령 충만, 성령 충만!' 그 이야기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성령에 사실적인 역사가 여기서 이루어 져야 되죠.
마지막으로 한가지 더 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의 그 능력이 왜 어려우냐? 보이는 것으로 이해를 하려고 합니다. 육신 적으로 이해를 하려고 합니다. 많은 경우 이런 일, 저런 일,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이런 문제, 저런 문제! 그래서 여기 유대인들이 뭐라고 그럽니까? 뺨을 쳐놓고, '누가 때렸는지 맞춰봐라!' 예수 잘 믿으면 이렇게 돌아가요. 예수 잘 믿으면, '우리 딸 결혼을 언제 했으면 좋겠습니까?' 여러분 점쟁이가 나오고, 점쟁이한테 찾아가는 게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육신 적으로 예수를 이해하고, 그리스도를 이해하려고 그러면 똑같이 이리로 돌아갑니다. 예수 점쟁이들 전부 수두룩하잖아요. 우리가 뭐 조금 열심히 했을 때에, 나도 예수 점 많이 안 쳐봤습니까! 찾아오면, '보자...' 점치는 것은 육신 적으로 이해를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습니다. 지금 내게 유익이 있다, 없다! 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때에 여러분 꼭 아셔야 될 것이, 근본으로 돌아가세요. 그리고 성령으로 '하나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믿는 대로 될찌어다!' 아닙니까! 여러분 믿음을 가진 만큼 영육 간에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이 그릇이 안되면 복을 줄 수가 없어요. 왜? 이제 말한 것처럼 이 잘못된 그리스도 관, 잘못된 예수 관! 유대인들에게 복을 줄 수가 없어요. 주면 줄수록 어떻게 됩니까? 더 잘못 되어지니까! 더 이상해지니까!
이런 사람들이 열심히 기도할 수도 있습니다. 열심히 일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어째서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안됩니까!' 안되어야 돼요. 그러니까 갈등이 오고, 문제가 오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아는 것은, 정말 요즘 '예수님이 내게 그리스도시다! 예수가 그리스도시구나!'정말로 그리스도는 방향 아닙니까! 조금만 이것이 이해가 되어도 축복이라는 사실 자체가 당연하게 우리 모든 생애가 바꾸어지게 됩니다. 뭐 돈 번다, 못 번다! 상관이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근본 문제에, 영적으로 돌아가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서야 합니다. '예수가 내게 그리스도시구나! 모든 문제 해결자시구나!' 보이는 문제가 지금 사정없이 떨어져도, 사정없이 무너져도 이 일에 눈이 열리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모든 보화와 모든 축복과 은혜가 그 이름 속에 숨어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보는 만큼 믿음이 생길 뿐 아니고, 미래가 보일 뿐 아니고, 영원한 축복과 역사가, 하나님의 그 영광의 역사가 보이게 됩니다. 그때는 살기 싫어서 하나님 나라 가고싶다는 것이 아니고, '정말 가고 싶습니다! 그 하나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아니 그 주님을 지금 그냥 성령으로 만난다 그 정도가 아니고 이제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고 싶습니다!' 정말 함께 하시는 감격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신앙 생활의 끝이 좋으려면
마 26:69-27:10 / 최영기목사
미국에 이민 오신 분들 가운데에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여건을 안고 오셨는데 10년 정도 지난 후에 보면 어떤 분은 살림이 안정되고 자녀들도 잘 자라고 있는 반면에 어떤 분은 아직도 이민 초기와 다름없이 삶에 쪼들리며 궁핍을 면하기 못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보통 보면 불법으로 미국에 체류한 분들은 철저한 회개가 없으면 미국 생활일 꼬이는 것을 봅니다. 나라의 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이를 어겨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교회 생활도 그렇습니다. 비슷한 때에 신앙 생활을 시작했는데 어떤 사람은 몇 년이 지난 후에 교회의 중진이 되어있고 어떤 사람은 여전히 변두리에서 서성대는 초신자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베드로 와 가롯 유다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시작은 둘 다 비슷합니다. 둘 다 열 두 사도 중의 하나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둘 다 능력을 받아서 행사를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실수도 비슷합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먹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천양지차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새로이 시작되는 교회의 초석이 되었지만 가롯 유다는 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살을 한 후에 밧줄이 끊어졌는지 나무 가지가 부러졌는지 떨어지면서 창자가 터졌습니다(행 1:17-18). 가롯 유다는 신앙 생활을 잘 시작했지만 신앙 생활을 잘 끝내지 못한 사람의 전형입니다. 우리가 가롯 유다처럼 예수님을 팔아먹지는 않겠지만 가롯 유다처럼 부끄러운 모습으로 신앙 생활을 마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롯 유다는 본받지 말아야 할 귀감이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가롯 유다처럼 되지 않고 신앙 생활을 잘 끝낼 수가 있을까요?
Ⅰ. 돈 욕심을 경계하라
가롯 유다의 문제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앞서도 상고했지만 마리아가 비싼 향유를 뿌려 예수님을 발을 씻겨드렸을 때에 가장 불평을 했던 것이 가롯 유다입니다. 불평의 원인은 재정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헌금으로 바쳐졌을 때에 자신이 관리하게 될 것이고 관리하면서 빼돌릴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인 것을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요 12:6). 또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은 동기에 관하여서도 그것을 미화하는 여러 가지 이론이 제시되고 있지만 돈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좀 더 고상한 목적으로 그랬다면 돈을 받지 않고 예수님을 넘겨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 생활에 끝까지 성공하려면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돈 욕심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말씀했습니다(딤전 6:10). 이러한 사도 바울의 말씀에 우리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문이나 주간지를 보면 어린이를 유괴하고 원조 교제를 하고 사기를 치고 폭행을 하고 사람을 죽이는 끔찍한 사건으로 도배가 되어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동기를 가만히 살펴보면 한 마디로 돈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또 믿음을 저버리든지 믿음 생활을 제대로 못하는 이유도 가만히 살펴보면 돈을 사랑하기 때문인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1. 돈은 하나님이 되려 한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돈을 사랑하다가 죄를 짓든지 믿음을 저버리게 되는 실수를 방지할 수 있을까요? 돈의 위력을 과소 평가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돈을 벌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시종 정도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돈은 우리의 종이 되려고 하지 아니하고 우리를 종으로 삼으려 합니다. 돈은 자신이 우리 삶의 하나님이 되려고 합니다. 돈을 의지하게 만듭니다. 돈을 사랑하게 만듭니다. 돈이 우리 인생 사는 목적이 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돈을 경계하라고 하시며 돈을 하나님과 비슷한 위치에 놓으셨습니다(마6:24). 돈을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돈은 행복을 약속하고 우리의 하나님이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우리를 행복하게는 못합니다. 우리는 돈만 있으면 행복하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돈 많은 부자가 행복을 고백하는 경우는 보기가 힘이 듭니다. 의 효용성을 과대 평가합니다. 돈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다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이 많아서 보석을 사주고 좋은 차를 사주면 아내가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난할 때에는 오히려 사이가 좋던 부부가 돈이 생기면서 점점 남남이 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또 돈이 있어서 자녀들도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을 다하도록 해줄 수 있으면 자녀들이 잘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돈이 있으면 자녀들이 잘될 줄 알았는데 부족함이 없이 자라서 나약한 사람 못된 사람이 되는 경우도 자주 봅니다. 또 돈만 있으면 노년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모아놓았건만 노년에는 오히려 가난하게 외롭게 일생을 맞는 사람을 종종 발견합니다. 돈은 행복을 약속하지만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참된 하나님께서만이 참된 행복을 주십니다.
2. 가진 것으로 만족한다
이러한 돈의 위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있습니다.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히 13:5). 가진 것으로 만족한다고 해서 열심히 일을 하지 말고 게을러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살후 3:10?). 가족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안 믿는 사람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딤전 5:8?). 그러므로 경제적으로 너무 빡빡해서 가족의 필요를 채울 수가 없으면 하면 좀더 많은 봉급을 주는 직장으로 옮길 수도 있고 또 사업을 키울 수도 있습니다. 가진 것으로 만족하라고 해서 게으르거나 나태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돈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3:5 끝에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뜻도 하나님의 도움이 항상 있으니까 돈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의미입니다.
가진 것으로 만족하면서 동시에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기 위하여서는 직장 생활을 하던 사업을 하든지 일의 목적을 돈 버는 데에 두지 말고 이웃을 섬기는 것에 두시기 바랍니다. 가게를 하는 사람은 고객이 필요로 하는 물건을 가장 양질로 가장 값싸게 가장 신속하게 공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노력과 수고한 대가로 합당한 이윤을 추구하십시오. 사업을 섬김의 도구로 생각한다면 이웃을 망하게 하기 위하여 가격 경쟁을 벌이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또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은 자신이 상관과 회사를 섬기는 마음으로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상관과 회사에 최대의 유익을 주기 위하여 열심히 성실하게 일하시기 바랍니다. 직장에 더 도움이 된다면 승진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직장 생활을 섬김의 도구로 생각한다면 직장 동료와 부당한 경쟁을 벌인다던가 모함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생업을 섬김의 도구로 사용할 때에 보람도 있고 올바르게 생업을 영위할 것이며 돈의 종이 되는 일도 없게 될 것입니다.
3. 은사이면 재물로 섬긴다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일반적인 태도이겠지만 여러분들 중에 금전으로 주님의 사역을 돕는 은사를 받으신 분들은 사업을 크게 키우시기 바랍니다. 돈을 벌어서 주를 섬기는 것이 자신의 은사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첫째는 그런 사람은 돈 버는 방법이 보입니다. 남은 보이지 않는 것이 보입니다. 소위 돈이 따릅니다. 그래서 작은 사업이라고 시작하면 성공하는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이것이 은사가 아닌가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둘째는 돈을 벌면 어떻게 써야 하겠다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막연하게 가 아니고 어떻게 주를 위해서 물질을 써야할지 가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물질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 주님 주신 은사가 아닌가 생각해보고 사업체를 기우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도 돈의 위력에 굴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하여서는 사업이 크게 되고 돈을 많이 벌기 전에 항상 남보다 비례적으로 헌금을 더 많이 하는 습관을 들이시기 바랍니다. 십일조도 십분의 일보다 더하고 교회에 재정적인 필요가 있을 때에 남보다 더 많이 헌금하는 습관을 들이시기 바랍니다. 이러할 때에 하나님께서 크게 쓰셔서 금전을 통해 섬기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Ⅱ.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라
믿음 생활을 끝까지 잘 하려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확실히 모셔야 합니다. 성경 기록을 보면 가롯 유다는 한 번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른 적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선생님이라고 부릅니다. 이 기록만을 보면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생각하기보다 좋은 교훈을 얻을 수 있었던 선생님으로 보았던 것 같습니다.
교회에 다니시다가 소위 시험을 받았다고 하면서 다른 교회에 나가는 것도 아니고 아예 교회와 발을 끊는 분들을 보면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분이 아니고 선생님으로 모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다면 아무리 교회로 인한 상처를 받았다 할지라도 교회를 전연 무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는지 안 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자신을 주님이라고 부른다고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고 못박아 말씀하셨습니다(마 7:21).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사람은 예수님의 뜻을 좇아 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모신 사람은 예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욕구가 없습니다.
제게 오래 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저와 잘 아는 친구가 한국에서는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도 갓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처지라 너무 반가워서 기회를 만들어 방문을 하였습니다. 만나서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전에는 안 그랬는데 밥 먹을 때에 같이 기도하고 먹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좋은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면서 보니까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의지가 전연 없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한 경험도 있다고 자랑을 하는데 말입니다. 상식적인 예수 믿는 사람들의 예전은 쫓고 있지만 성경대로 살아야 된다는 생각이 전연 없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아주 실망스럽고 슬픈 마음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진정으로 주님으로 모셨는지 안 모셨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주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안 한 적이 있습니까? 거꾸로 하고 싶지 않은데 주님의 뜻이기 때문에 해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한 큰 사건이 삶 가운데에 가끔 나타나면 두어 개 있으면 여러분들은 완전하지는 않더라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신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 믿을 때에 맛보는 평안은 예수님은 진정한 주님으로 모실 때에 맛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생각하거나 도덕적으로 예수를 믿으면 신앙 생활이 부담만 되지 기쁨이나 평안을 맛보지를 못합니다. 기도 응답의 즐거움도 맛보기가 힘이 듭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자신의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서 주님만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을 맛보시기를 바랍니다.
Ⅲ. 회개하라
가롯 유다처럼 신앙 생활을 패배로 끝내지 않으려면 회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와 가롯 유다가 같이 예수님을 배반하는 죄를 지었고 둘 다 뉘우쳤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회복되고 한 사람은 멸망했습니다. 차이가 어디에서 왔을까요? 베드로는 뉘우침이 회개로 연결되었고 가롯 유다는 뉘우쳤지만 후회로 끝났습니다. 가롯 유다가 후회만 했지 회개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목을 매었다는 사실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회개했다면 예수님을 찾아가서 용서를 구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후회와 회개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참된 회개는 자기의 죄가 무엇인지를 똑바르게 인식합니다. 후회는 막연하게 잘못했다는 생각뿐이지 구체적인 죄의 인정이 없습니다. 또 죄를 인정한다 할지라도 애매하게 인정을 합니다.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확실히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은 것 같습니다."라고 애매하게 넘어갑니다. 참된 회개에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의가 있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이러한 결의가 있었기 때문에 다시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는 자리에 이르도록 충성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후회에는 이러한 것이 없습니다. 마음이 시원함이나 벌이 두려워서 죄를 인정은 하지만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결의가 없습니다. 셋째로 참된 회개는 고백한 후에 용서 받았음을 믿습니다. 그래서 시원함이 있습니다. 후회는 죄를 고백하기는 하지만 용서를 믿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마음 속 깊숙이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셨고 내 죄를 위하여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백한 죄를 반복해서 회개하기도 하고 하나님이 벌을 내릴 것처럼 두려워하면서 삽니다.
우리가 끝까지 믿음을 잘 지키려면 물질이 나의 하나님이 되는 것을 경계하고 예수님을 진정한 주님으로 받들며 평소에 확실한 회개를 연습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할 때에 아름답게 신앙 생활을 끝맺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눈물
마 26:69-75 / 이성우목사(왜관교회)
신약성경 가운데 네 권의 복음서의 말씀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예수님은 3년 동안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세 가지 사역에 집중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첫 번째는 회당에 들어가셔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생각이 성경 가운데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성경을 제대로 읽고 묵상하는 사람들은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영적인 눈이 멀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무지했던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집중하셨던 사역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1장 15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얻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서 크신 두 팔을 벌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을 영접하는 사람들은 놀라운 구원의 선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천국 복음을 전파하심으로써 죄 가운데 있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집중하셨던 세 번째 사역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연약한 이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다가가셔서 그들을 소생시키심으로 그들이 모든 무거운 억눌림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안타까워하시는 사랑의 마음과 놀라운 능력이 어우러져서 그들과의 만남의 자리에서 놀라운 기적 사건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사람들의 영, 혼, 육을 골고루 어루만지심으로 진정한 구원자로서의 삶을 부지런히 사셨습니다. 그런데 4권의 복음서가 우리에게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증거 해 주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이러한 구원자로서의 사역 못지않게 뜨거운 열정과 남다른 관심을 기울인 일이 한 가지 더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로 12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훈련시키신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그 목적을 차질 없이 성취시켜 나가시기 위해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훈련시키시는 일에 열정을 쏟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볼 때, 예수님께서 3년 동안 구원자로서의 직접적인 사역들은 사역 그 자체에도 의미가 있지만, 제자들에게 구원 사역의 모델과 방법론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관심과 관련하여 마태복음 4장 19절~20절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이렇게 예수님에 의해서 제자, 곧 예수님처럼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에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고 훈련을 받았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12제자들입니다.
자,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이렇게 제자들을 부르시고, 훈련시키시는 일에 열정을 쏟으셨을까 하는 것이 궁금해집니다. 이 궁금증에 대한 대답은 바로 이렇습니다.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은 어느 한 시대, 제한된 특정 장소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셔서 그들을 훈련시키심으로 그들이 나아가서 또 다른 사람들을 제자 삼는 일이 가능해 지게 하심으로써 결국에는 오고 오는 모든 세대, 모든 장소에서 구원의 역사가 중단 없이 계속해서 이루어져 나가도록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렇듯 예수님에 의해서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던 사람들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부르심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에 의해서 제자로 부름을 받았던 12명의 제자들 가운데 사도 베드로가 있습니다. 이 베드로는 자기 형제 안드레와 함께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는 배와 그물, 그리고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사람으로서 마태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가장 먼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제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항상 중요한 자리에 예수님을 수행했던 소위 예수님의 수제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베드로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중요한 고비 고비마다 그 중심에 서 있었던 사람으로 복음서들은 증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에 의해서도 남다른 인정을 받았고, 자기 스스로도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충성스럽게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처럼 바다 위를 걷기도 했었으며, 변화 산에서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 선지자와 더불어 말씀하시는 신비스러운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과 함께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을 지날 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을 받고는 다른 제자들을 제치고 가장 먼저, 가장 분명하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함으로써 예수님께 칭찬과 함께 천국열쇠를 받게 될 것을 약속받기도 했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행 여정이 가까워졌을 때, 하루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당하실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배반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자, 다른 사람들은 다 예수님을 떠날지라도 자기는 죽는 일이 있어도 예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하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행을 막아섬으로써 예수님께 호된 책망을 듣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처럼 예수님이 체포당하시고 대제사장 가야바의 법정에 끌려가셔서 심문을 당하실 때,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가서 그 심문 과정을 지켜보다가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게 되자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이 대목에서 베드로의 일련의 인간적인 행동들의 이유와 인간적인 실망감이 얼마나 컸을까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다른 제자들도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의 부르심의 목적과는 다르게, 예수님이 세상적인 권력을 잡아서 왕이 될 것을 기대했기 때문에 아버지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충성스럽게 따랐던 사람입니다. 그런 이유에서 베드로의 행동들은 얼마든지 이해될 수 있으며, 그의 실망감의 크기를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에 그가 갈릴리 바다로 다시 고기를 잡기 위해서 돌아갔을 때 그의 심정이 얼마나 착잡했을까를 한번쯤 헤아려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인 마태복음 26장 69절~75절까지의 말씀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베드로의 인간적인 행동의 한 단면을 소개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처지가 인간적으로 불리해 지는 상황이 되자 이제까지 3년 동안이나 충성 맹세까지 하면서 따랐던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 도망쳐 버렸는데, 베드로가 예수님이 심문을 받는 자리에 멀찍이 따라온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58절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아마도 베드로는 혹시나 예수님이 그 자리에서 기적이라도 행하시고 나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왕이 되실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어떻든 베드로가 여전히 인간적인 욕심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런 마음가짐과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까지 갔던 것이고, 예수님이 미리 말씀하신 것처럼 결국은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했던 것인데, 그 때 마침 닭이 울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75절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나서 밖에 나가서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 뉘우치면서 심히 통곡하고 있는 대목이 오늘 말씀의 제목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이 시간에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려고 하는 내용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이 포함되어 있는 마태복음 26장의 내용은 이어지는 27장의 내용과 연결해서 생각해 볼 때, 예수님께서 세 번에 걸쳐서 십자가 수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을 예고하셨던 것처럼 체포당하시고 종교적인 재판과 정치적인 재판을 받으신 후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부활하시기까지의 내용을 가운데 두고 앞부분에는 가장 먼저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한 여자가 귀한 향유를 옥합을 깨서 예수님의 머리에 부어드림으로써 예수님께로부터 놀라운 칭찬을 받게 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요한복음의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께 남다른 은혜를 입었던 마리아라는 여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여인은 받은 은혜에 대해서 귀한 헌신으로 갚을 줄 아는 여인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 여인은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일에 실패하고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는 베드로와는 다르게 온전히 따른 여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용이 바로 가롯 유다가 돈에 대한 욕심에 이끌려서 결국은 예수님을 배반하게 되는 내용이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과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내용과 얽혀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어지는 내용이 바로 체포당하신 예수님께서 대제사장 가야바의 법정에 끌려가셔서 종교 재판을 받게 된 것과 그 자리에 어정쩡한 태도로 따라갔던 베드로가 결국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내용은 어쩌면 예수님을 배반함으로써 부름 받았던 제자들로서 예수님을 온전히 따르는 일에 실패했다는 점에서는 가롯 유다나 베드로가 마리아라는 여인보다도 못한 사람처럼 드러난 것은 똑같아 보이지만 그 후의 내용이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본문 75절 말씀처럼 자신이 예수님을 배반함으로서 제자로서 온전히 따르지 못하게 된 사실에 대해서 통곡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있지만, 가롯 유다는 27장 3절~5절 말씀을 보면, 그저 ‘스스로 뉘우쳐 목매어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저 ‘스스로 뉘우쳐 목매어 죽게 되었던’ 가롯 유다와 달리 자신의 실패에 대해서 철저하게 회개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통회했던 베드로의 그 후의 삶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태복음은 그 후의 베드로의 삶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사도행전과 곧 바로 이어지게 되는 요한복음 21장의 말씀을 보면, 베드로를 비롯한 일곱 명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다음에 다시금 디베랴 호수로 가서 원래대로 고기 잡는 어부로 돌아간 상태에서 여전히 실패와 좌절 가운데 있던 그들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신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주님을 따르는 일에 실패하고 눈물로 통회했던 베드로를 주님이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찾아주신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고기 잡는 일에 또 다시 실패한 베드로와 그 일행에게 찾아오셔서 친히 조반을 준비해 주시고 친히 그들을 위로하시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시몬 베드로를 향해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에 걸쳐 물으심으로 그를 다시 사람 낚는 어부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소명에 뜨거운 가슴으로 사랑을 고백하며 소명에 응답하고 사명을 따라 살 것을 결단하는 그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세 번에 걸쳐서 목양을 위임하고 계시는 따뜻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신 주님의 모습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과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게 된 사도 베드로는 사도행전의 말씀을 읽어보면, 더 이상 사명에 실패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제자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복음을 증거 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순교의 자리까지 가게 되는 놀라운 일을 감당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지난 6월 4일 저녁부터 어제 저녁까지 40일간 하루 한 끼 금식을 하면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베드로의 심정으로 기도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저는 나 자신의 욕심과 욕망, 그리고 인간적인 내 의지와 방법을 내려놓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기도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도 저는 성도들이 흩어져 가는 아픔을 겪으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을 온전히 따르고 계십니까? 아니면 베드로와 못난 저처럼 따르는 일에 실패하고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까? 오늘 아침, 주님은 우리 모두를 다시금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거룩한 물음에 여러분들은 뭐라고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만약 베드로처럼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을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진심이라면, 그 사랑하는 마음은 이제 여러분들이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통해서 증명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제자로서 온전히 헌신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세워나가는 일을 위해서 구체적인 섬김과 돌봄, 배려와 나눔의 삶을 통해서 표현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마지막 순교의 길을 감으로 끝까지 충성을 다했던 베드로처럼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변함없이 지켜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베드로의 눈물을 보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주님께서 베드로처럼 울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심으로 베드로처럼 하나님 앞에서 귀하게 쓰임을 받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심히 통곡하십시다
마 26:69~75 / 김정호목사
예수님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껏 자기를 과신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경고를 듣지 않았으나 회개에의 부름이라 할 수 있는 닭 울음소리에 마침내 연약하고 무기력한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에 의하면 닭이 우는 바로 그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과 눈이 마주치자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장담은 철저히 부정되었고 예수님의 예언은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더 이상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희롱하는 무리들이 있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찢어지는 가슴을 감싸 안고 황급히 그곳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통곡하는 회개로 참 신앙인과 제자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와 같이 약하여 배반했지만 통곡하고 회개함으로 죄 사함과 사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그 후로 닭 우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통곡의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집니다. 베드로의 통곡의 눈물은 그의 사는 날 동안 전보다 더 심령을 가난하게 하였을 것이고 통곡의 눈물이 베드로를 베드로 되게 하는 영적 근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종려주일, 고난주간, 성찬예식을 통하여 심히 통곡한 베드로의 심정과 자세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고난에 동참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내 죄 때문에 통곡합시다
본문 75절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은 교만(驕慢)입니다. 교만한 천사 루시퍼는 천국에서 쫓겨나 사탄이 되었고 그 사탄(뱀)에게 속아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했던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나는 교만과 거만을 미워하느니라(잠8:13, 6:16-17).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잠16:18). 여호와의 날이 교만한 자에게 임하리니(사2:11-12). 너의 마음이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욥1:3). 교만한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말4:1).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마23:12).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벧전5:5).
라인홀드 니어버(Reinhold Niebuhr)라는 윤리 신학자는 ‘인간이 자기 본래의 상태를 하나님과 같은 상태가 되는 데까지 높이려는 인간의 노력’이 교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교만을 네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❶ 권력적 교만(Authority pride) - 우리나라에는 예수님도 못해 본 ‘총회장’이라는 직분을 가진 목사님이 400명도 넘는다고 합니다. 와~! 권력으로 교만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❷ 지적 교만(Intelligent pride) - 우리나라에는 예수님도 못 딴 ‘박사’ 학위가 목회자에게 ‘기본’이 된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잘 알고 많이 알고 있다는 ‘지식’은 그냥 지식일 뿐 ‘믿음’이 아닙니다.
❸ 도덕적 교만(Moral pride) - 우리나라에는 예수님도 돌을 던지지 않고 용서해준 사람들에 대해 폭탄을 투여할 만큼 무자비합니다.
❹ 영적 교만(Spiritual pride) - 자신의 신앙적 행위라든지 기도, 성격읽기, 봉사 등이 다름 사람과 비교해서 조금이라도 나은 점이 있으면 그걸 자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만큼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형편없이 여기는 것이 영적 교만입니다.
남들은 나를 겸손하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 교만한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남들이 보는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내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러울 뿐입니다.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에스라의 기도입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에스라 9:6) 하늘을 두루마리로 삼고 바다를 먹물로 써도 다 쓸 수 없는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예수님이 남의 죄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는 나의 죄의 심각성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야 할 만큼 내가 큰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는 종려 주일, 고난 주간, 성찬식을 맞이하면서 내 죄 때문에 통곡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십자가의 고통 때문에 통곡합시다
본문 75절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스토미라는 한 크리스천 여류작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폭풍이라는 그 이름이 말해주듯이 스토미는 정신적으로 불완전했던 어머니 밑에서 자라는 동안 낮 시간에는 자기 집 계단 밑에 있는 광속에 갇혀 지내다가 저녁이 되면 직장에서 퇴근한 어머니의 온갖 욕설과 구타로 정말 폭풍 같은 나날을 보내곤 했습니다. 이 같은 상처가 심한 열등감과 두려움을 안겨주면서 이 아이는 학교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친구들로부터 소외당한 채 외로움만이 유일한 친구였던 스토미는 이후 직장생활과 결혼생활에서도 실패를 거듭하게 되자 죽음만을 생각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인근에 있는 어느 교회의 목사님 통해 복음에 눈을 뜨게 된 그녀는 말씀과 기도와 순종을 통해 그 성품이 변화되면서 그렇게도 미워하던 엄마를 드디어 용서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불쌍한 어머니의 영적인 삭막함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변화 받고 순종하는 스토미의 삶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셨고 그들의 상처가 치료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그녀의 책들은 수백만 권이 전 세계로 보급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사람들에게 전하는데 쓰이고 있습니다. 이처럼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삶의 변화는 폭풍과 같은 인생을 살아왔던 수많은 영혼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변함없는 복된 소식입니다.
지금까지의 여러분의 최고의 고통은 무엇입니까? 질병, 경제, 자녀, 배신, 실패 좌절, 도저히 참을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많았을 것입니다. 지난 우리의 삶은 참으로 고통의 삶이었습니다. 하루도 편한 날 없는 고통스러운 인생이었습니다. 나의 죄, 우리 인류의 죄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최고의 육신적이고 정신적이고 영적인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십니다. 100% 인류의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나의 죄 때문에 죄 없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생각하면서 통곡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통곡합시다
본문 75절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어느 돌잔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30분 정도 식사를 하고 났더니 직원 한 명이 나와서 “여러분! 맛있게 드셨습니까? 이제 잠깐 축하 순서를 갖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돌잡이 행사를 진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직원이 진행하는 것을 보니 얼마나 매끄럽게 잘하는지 모릅니다. 꼭 청산유수 같습니다. 그런데 한참 보다 보니 뭔가 아쉬웠습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그 사람은 자신에게 맡겨진 진행은 정말 매끄럽게 실수 하나 없이 잘해내고 있었지만 정작 축하받아야 할 주인공인 아이한테는 눈길 한번 안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에 대한 사랑이나 관심 없이 그저 기계적으로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는 신자의 삶을 철저하게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더 많이 알고 이해할수록 자기중심의 삶에서 더욱더 멀어질 수 있습니다. 헨리 블랙커비의 ‘십자가를 경험하는 삶’ 중에서 변화는 새로운 깨달음에서 시작됩니다. 독생자를 내어주시고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죄 가운데서 구해내신 하나님의 사랑이 문자가 아닌 우리 삶 가운데 체휼될 때 우리는 죄 가운데서 벗어나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를 위한 사랑이 아닌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보십시오. 진정 주님을 만나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기를 소망하십시오. 십자가의 사랑이 신앙의 타성에 젖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하나님의 비전 가운데로 인도하길 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얻어진 소산물입니다. 부산물에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때문에 얻은 부, 건강, 명예, 세상적인 것……. 십자가의 은혜에 초점을 맞추고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통곡하고 십자가의 은혜를 잊고 살았던 것을 생각하면서 통곡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없이는 우리의 생명과 구원과 사역이 불가능합니다. 통곡함으로 십자가의 은혜를 회복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베드로가 통곡함으로 죄 사함과 위대한 사도가 되어 큰 역사를 이룬 것 같이 우리의 죄와 십자가의 고통과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통곡함으로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큰 은혜가 고난주간과 성찬예식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축원 드립니다.
몇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는가?
마 26:69-75 / 박덕기목사(송정중앙교회)
수난 주간 목요일 밤에 주님은 최후 만찬 석상에서 친히 성찬식을 제정하시고,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기까지 간절히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할 수만 있으면, ‘이 잔’ 곧 십자가의 고난을 피하게 해 주시라고, 세 번씩이나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의 뜻을 끝까지 주장하지 않으시고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심으로,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셨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굴복시킴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인류 구원의 대업을 완성하시게 되었고, 우리 또한 그 주님으로 기도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 모두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주님의 기도를 본받아, 질병도, 사업도, 자식도, 교회 부흥도,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를 마치신 주님은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열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칼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큰 무리’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게 고용된 종졸들과, 로마 군병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아마도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주려고 제사장들과 모의할 때, 예수님의 권능을 압도할 수 있는 큰 군대를 요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뜻대로 큰 무리들을 모아, 기세등등하게 앞장서서 온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무리들과 암호로 약속하기를 “내가 입 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하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가장 큰 위선을 보게 되는데, 가룟 유다의 입맞춤은 존경과 사랑의 표시가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예수님을 죽음으로 내모는 가증하고 추악한 배신의 키스였던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이제 더 이상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처단하고 해롭게 만들려는 무리들의 앞잡이가 된 것입니다. 겉으로는 예수님을 스승이라 부르고 반가운 듯 입맞춤까지 했으나, 그것은 사탄의 앞잡이로서 가증한 위선이었습니다. 그는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사탄의 앞잡이의 전형 같은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사탄의 일꾼인 가룟 유다 같은 자들을 잘 분별하고 가려내어 멀리해야 합니다.
가룟 유다처럼 사탄의 앞잡이와 같은 인간들은 어떤 특성이 있습니까? 먼저 교회의 참된 지도자를 인정치 않고, 가룟 유다처럼 무리를 모으는 속성이 있습니다. 즉 당을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세력을 규합하여 목회자나 참된 성도들을 공격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교회에 해를 끼칩니다. 참된 성도라면 자신이 손해를 볼지언정, 교회 부흥과 유익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처신합니다. 그러나 사탄의 앞잡이와 같은 사람들은 그 반대입니다. 자신의 욕심과 야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교회까지 큰 피해를 입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속성들을 지닌 자들은 사탄의 앞잡이라는 사실을 아시고, 잘 분별하여 그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경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를 순수하게 보전하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가증한 입맞춤을 하며, 거짓 문안하는 가룟 유다를 향해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으로 주님은 가룟 유다의 음모와, 자신의 수난 당하실 것을 다 알고 계셨건만, 조금도 요동하지 않으시고 침착하게 대응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뇌의 기도를 올리신 후, 주님은 평정을 되찾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평안한 마음으로 체포되실 일을 준비하시고, 가룟 유다를 맞은 것입니다. 주님은 사악한 배신자에게, 한마디 질책이나 원망이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순순히 대적들에게 잡히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셨으며, 초자연적 이적을 수없이 행하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하늘의 천사들을 동원하여 단 번에 대적들을 멸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대적들의 불의한 손에 자신을 맡기신 것은, 온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드려,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우리로 구원을 얻도록 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대적들의 손에 잡히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잡히신 것을 보고 “예수와 함께 있던 자 중의 하나가, 손을 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귀를 떨어뜨리니”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혈기에 차서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서 떨어드린 인물이 베드로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누가는 주님이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만져 낫게 해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려는 의도에서, 그리고 유다의 입맞춤을 신호로 해서 주님이 포박당하시자, 분노를 참지 못하여 칼을 휘두른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이러한 행동은, 주님의 대속 사역을 방해하는 것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그리스도께서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순순하게 포박당할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어버린 베드로의 행동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혈기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사도는 교훈하기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고 하였고, 또 잠언서 기자는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아무리 화가 날지라도 조금 기다리십시오. 조금만 참으십시오. 우리가 화가 나는 대로 행동한다면, 하나님 영광을 가리는 결과를 만들고, 그 성급한 분노는 불처럼 번져서, 예상치 못한 큰 불행을 자초할 수도 있습니다. 성도가 화를 내면 결국 후회할 일만 생깁니다. 이것을 명심하고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에서, 쉽게 화를 내고 혈기를 부리는 일을 극히 삼가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칼을 빼어든 베드로에게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너무도 유명한 말씀입니다. 폭력으로 정권을 잡은 독재자들의 최후를 보십시오. 온전히 제 명대로 산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의 영결식 때, 고 강신명 목사님은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는 이 성경 말씀을 읽어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적이 있습니다.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점령한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도 새로운 세력에게 정복되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력으로 무엇을 이루고자, 폭력의 검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대신 우리는 성령의 검을 지녀야 합니다. 성경은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싸울 대상은 결코 혈과 육이 아닙니다. 그 혈육들 배후에 있는 악한 영 곧 사탄이 그리스도인들의 싸움의 대상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폭력의 검 대신,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의 검, 성령의 검을 늘 품고 다니며, 사탄의 세력들과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칼을 빼든 베드로를 책망하시면서 “너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당시 한 군단의 수는 보병이 육천 명, 기병이 일백 이십 명이었다고 합니다. 주님은 수만 수십만의 천군천사들을 동원하여, 자기를 체포하려고 온 자들은 물론, 유대에 주둔하고 있던 모든 로마 군사들을 싹쓸이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순순히 포박당하셨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바로 인류 구속을 위한 대속 사명 때문이었습니다. 온 인류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해 주시기 위해서, 주님은 스스로 결박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 주님은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고, 또 모든 자들로 자신 아래 굴복하게 하셨습니다. 만일 주님이 천사들을 동원해서, 폭력적인 방법으로 대제사장들과 그 하수인들 및 로마 병정과 총독을 없앴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도, 부활도, 승천도 없었을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체포당하신 예수님께서는, 대적들에 의해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의 집으로 끌려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곳에 끌려가신 때는 매우 야심한 시간이었지만, 이미 유대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 공회가 소집되어 있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거짓 증인을 내세워, 예수님께 사형을 선고하려 했으나, 정작 예수님께서는 침묵으로 일관하시면서, 결코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사실을 밝힘에 있어서만큼은, 결코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그 사실에 대해서조차 침묵하신다면, 그것은 곧 자신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대답을 들은 대제사장은, 자기의 옷을 찢으며 “그가 신성 모독하는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신성 모독하는 말을 들었도다.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고 하면서,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을 선동했습니다. 대제사장의 선동에 휘말린 산헤드린 공회원들은, 순식간에 예수가 사형에 해당되는 죄인이라고 의결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고 하면서 모독을 했습니다. 이는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주님께 린치를 가하며 조롱하는 장면입니다.
바깥뜰에서 예수님의 심야 재판을 지켜보는 베드로에게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의 부인은 아주 신속했습니다. 마치 자동차가 오면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보호 본능이 작용하여 급히 피하는 것처럼, 베드로는 자기 보호 본능에 의해 주님을 즉시 부인한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마음이 그 얼마나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까? 베드로는 불과 서너 시간 전만 해도, 두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노라고 맹세하며 호언장담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생존 본능에 휩싸여, 정신없이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함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잠시 후에 다른 여종이 베드로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고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했습니다.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고 하니까, 베드로는 저주하며 맹세하기를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자신이 주님을 부인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그렇게도 자신만만했던 베드로는, 이렇게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을 부인한 것은 베드로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산헤드린에서 파송한 무리들에 의해 체포되자, 모두 자기만 살겠다고 자기들의 스승을 버려두고, 도망하기에 바빴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한 사람의 예외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제자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주님과 3년 동안이나 숙식을 같이하며, 주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또 주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아가 되시는 사실을 보여 주는, 수많은 이적을 체험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이 예수님께 능력을 받아 귀신을 쫓아내는 등, 많은 이적을 행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고 장담하였던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채 몇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다 주님을 버리고 도망하며, 심지어는 저주의 맹세까지 하며, 주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과연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의 제자들과, 다르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아무도 그럴 수 없음을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 중에 누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지극히 교만한 자이거나, 거짓말하는 자가 분명합니다. 우리는 누구도 제자들보다 못하면 못했지 더 낮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너무도 자주, 주님의 잡히시던 날 밤의 제자들과 같은, 비겁하고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생활 가운데서 주님을 배반하며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는 자들을 가리켜 무신론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무신론 자 중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론적인 무신론자가 있습니다. 이론적인 무신론자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없다든지, 세상에서 불의한 자가 득세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없다든지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둘째로 실제적인 무신론자가 있습니다. 실제적인 무신론자란 입술로는 하나님을 시인하나, 실제 그 행위로는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행동하는 자를 말합니다. 딛 1:16절에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라고 했습니다.
1960년대 한국인 최초의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른 재미 작가 김은국 씨의 ‘순교자’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순교자’의 줄거리는 6.25 전쟁 당시의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전쟁발발 이후 인민군이 진주한 지역에서, 14명의 목사들을 체포하여, 지독한 고문을 동반한 개종강요가 있었는데, 결국 12명은 죽임을 당하고, 2명만이 살아남게 됩니다. 국군이 다시 진주하여 사로잡은 인민군 장교를 신문하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이 학살 사건의 전말을 듣게 됩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당연히 살아남은 두 명의 목사는 예수를 부인했기 때문이고, 12명의 목사는 끝까지 배교하지 않고 신앙을 지켰기 때문에, 결국 순교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공산당은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교한 이들은 오히려 단호히 처형하고, 죽음이 두려워 정신이상자가 된 한 목사와, 끝까지 배신하지 않고 지조를 지킨 신 목사는 살려둔 채 후퇴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일하게 지조를 지킨 신 목사는, 자신이 배교했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순교당한 12명의 목사를 위해 눈물로 기도를 하는데, 그들의 희망을 저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신 목사는 스스로 배교자라는 악역을 담당합니다. 자신은 주님을 배반했지만, 그 12명의 목사들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승리의 확신 속에서 순교했다고 간증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과감히 가지 못한 자신은 정말 약한 사람이라며, 탕자의 비유를 들어 용서해 줄 것을 눈물로 호소하였습니다. 신 목사는 평소 그렇게 강직하고 신실했던 성직자들이, 살아남기 위하여 결국 신을 부인하고 죽어갔다는 그 사실을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이 어떤 비난을 받더라도, 그 열두 목사의 죽음을 통하여 신자들이 위로를 받고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선의의 거짓말을 했던 것입니다. 작가의 의도는 이야말로 진정한 순교자가 아니냐는 그런 메시지를 담고 있는 소설입니다.
찬송가 ‘거룩 거룩 거룩’의 작가인 영국의 ‘레지날드 히버’ 씨는, 우리들이 보다 교묘한 방법으로 구주를 부인할 수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히버 씨는 “우리가 데마처럼 세상을 사랑하여, 그리스도께서 명백하게 주신 사명을 포기할 때마다, 우리는 주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죄라고 믿고 있는 것들에 대해 찬사를 보내거나, 또는 침묵을 지킬 때마다, 주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의인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모르는 척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신실하게 그들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박해받고 모욕 받는 사람들을 지지하고 격려하고 도와주지 않을 때마다, 우리는 주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공공연하게 고의적으로 그의 입을 열어 주님을 부인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행위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죄를 얼마든지 범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 부인했지만, 그러나 곧 심히 통곡을 하며 회개를 하였고, 성령 충만을 받은 후에는 결코 다시 주님을 부인하지 않았으며, 후일에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를 한 충성된 증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물질 때문에, 정욕과 쾌락 때문에, 명예와 이익을 위해서, 주님을 부인한 적이 몇 번이나 됩니까?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고 하셨고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 말과 입술로만 아니라, 우리의 행위를 통하여서도 주님을 시인하는 사람들이 되시고, 그리하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 주님께로부터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내가 너를 너무도 잘 안다.”고 시인 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베드로의 사순절
마 26:69- / 이필재목사
오늘은 베드로가 사순절 기간을 어떻게 보냈는가를 우리가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지금 온 세계 모든 기독교인들은 베드로를 열 두 사도 중에 가장 훌륭했던 수제자라고 인정을 합니다. 이것은 동방정교회도 로마 가톨릭도 개신교도 차이가 없습니다. 다만 가톨릭교회가 가장 큰 존경으로 베드로를 대우합니다. 바티칸에 가면 세계에서 제일 큰 성당이 있는데 그 성당의 이름을 ‘베드로 성당’이라고 했으며 그 성당의 입구에는 거대한 베드로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베드로의 손에는 천국 열쇠가 쥐어져 있습니다. 이 베드로 동상은 약간 고개를 숙인 듯 한 모습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베드로의 시선이 아래쪽을 향하도록 만들어져 있는데 성당을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있다는 뜻으로 약간 고개를 숙인 자세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또한 이 가톨릭교회가 가지고 있는 교회 조직은 1인 감독 제도입니다. 그러니까 온 세계 교회 최고의 감독 기관이 있어서 그 감독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는 교회 제도입니다. 그 절대 명령자가 교황인데 제1대 교황을 베드로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 신자들은 금요일에는 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그런 말이 없습니다. 교황청에서 먹지 말라고 명령해서 전 세계가 그렇게 지키는 것입니다. 외국의 가톨릭 마을에 우리 한국인들이 햄버거 장사를 하는데 금요일에는 장사가 잘 안 됩니다. 왜냐하면 고기를 안 먹으니까 사러 오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가톨릭교회는 금요일에 고기 안 먹는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교황이 한국은 먹어도 된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왜 교황이 한국은 고기를 먹어도 된다고 했느냐? 1950년에 교황이 명령을 했는데 그때 한국이 빈민국이었습니다. 1년 내내 고기를 못 먹어보다가 금요일에 이웃집에 잔치가 있어서 고기 한 점 먹으러 갔는데 금요일인 겁니다. 그래서 “그것도 못 먹어서 되겠느냐? 못 사는 한국인들은 금요일에 고기 먹게 해준다.” 교황이 특명을 내려주었기 때문에 한국은 금요일에 고기 먹지 말라는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외국에는 금요일에 고기를 먹지 않는 문화가 아주 심합니다. 지금은 변했는지 모르지만 각 성당의 본당 신부님들 설교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에서 이렇게 설교하라고 시키는 대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교황의 명령은 전 세계 누구도 거역하지 못하도록 1인 감독 제도의 체제로 전 세계 가톨릭교회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는 개신교처럼 신부님과 교인간의 마찰이 생겨서 교회가 분열하는 것이 없습니다. 제도 때문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가톨릭교회가 아닙니다. 절대 명령 기관이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됩니다.
과거에 어떤 모르는 분이 저에게 찾아오셔서 자기 딸의 결혼 주례를 부탁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누구신데 저는 알지도 못하는데 결혼 주례를 부탁하시는 겁니까?” “목사님! 저는 장로입니다.” “장로이시면 담임목사님께 부탁하시지 왜 저한테 부탁하십니까?” “저는 지금 다니는 교회가 없습니다.” “장로가 다니는 교회가 없다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쫓겨난 장로입니다. 자세한 말씀은 나중에 드릴 테니 제발 제 딸 시집가는데 주례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딸 시집보낸다니까 부탁을 들어드린 적이 있습니다. 결혼식 끝나고 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교회에서 열심히 장로 일을 하다가 교회 재정을 맡아서 재정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과 항상 문제가 생겨서 제가 그 교회를 나와 버렸습니다.” “목사님과 무슨 문제가 생겼습니까?” 제가 경험하는 거지만 우리 목회자들은 교회 헌금을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인 선교와 교육에 헌금 들어오는 대로 빨리 빨리 투자하고 싶습니다. 쌓아두지 말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돈이 많다면 시험 거리나 생기니 빨리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에 선교비를 보냅니다. 저 같은 사람은 마이너스 통장 꺼내서 선교비를 보내는데 그것이 목사들의 마음입니다. 그것이 성서적이라고, 하나님 기뻐하실 일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제가 40년 이상 경험했지만 장로들은 될 수 있는 한 지출을 안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지출할 때마다 마찰이 생깁니다. 교회 싸움은 항상 거기서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분이 장로교 목사들 보기 싫어서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셨답니다. 거기 가서도 열심히 일했더니 거기서도 재정 일을 맡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가톨릭교회에서 보니까 신부는 장로교 목사보다 훨씬 더 하더랍니다. 그 신부는 구제 활동에 헌금을 모두 보내는 겁니다. 그러니 돈이 항상 없잖아요? 재정 맡은 장로는 그것이 속상했던 겁니다. 돈이 모일만 하면 다 쓰고 또 모일만 하면 다 쓰고…. 그런데 신부는 빨리 하나님 사업에 쓰면 되지 돈을 모아둬서 뭐하느냐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안 되겠다. 문제 좀 삼아야겠다.’ 생각하고 교구청에 투서를 한 겁니다. “우리 교회 신부가 이렇게 재정을 날마다 구제금 명목으로 다 씁니다.” 곧바로 답장이 왔습니다. “본 당 신부의 권한이요. 당신은 누구인데 건방지게 교구청에 투서를 보냈소?” 막 책망하는 답장이 왔는데, 그 소문이 퍼져서 성당에 나가니까 신자들이 “당신 어디서 하던 버릇을 여기서 하느냐?” 마귀같이 취급을 해서 쫓겨났다는 겁니다. 그 분은 성당 체제, 제도를 모르셨던 겁니다. 1인 감독제도 성당은 상부의 명령대로 움직입니다. 그분들이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알고 있으니까 우리는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이것저것 참견할 필요가 없다는 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분이 저한테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관심을 보여서 제가 농담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오지 마세요.”
베드로의 장점과 단점이 성경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성격은 충동적이고 변덕스럽고 실패하기 쉬운 성격입니다. 게다가 흥분도 아주 잘합니다. 예수님이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을 보고 “나도 걷게 하소서.” 하고 바다 위를 풍덩 들어갔잖아요? 감격도 빠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런 양면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름이 세 가지로 나옵니다. 베드로, 시몬, 게바입니다. 그런데 유대 나라는 셈족어, 아람어, 희랍어 세 가지 공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름이 여러 가지로 나오는 사람이 많습니다. 지금 복음서를 보면 사복음서가 다 열두 제자 이름을 기록할 때 언제나 베드로가 첫 번째로 나옵니다. 가룟 유다가 언제나 꼴찌로 나옵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봐서 베드로가 수제자 분위기를 주고 있는 것이 정확합니다. 살로메가 자기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예수님 앞에 나타났잖아요? 살로메는 예수님의 이모요 예수님을 위해서 돈도 제일 많이 쓰고 친척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당신의 나라 임하실 때 나의 두 아들을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소서.” 이 부탁을 예수님께 왜 했는지 아세요? 베드로를 견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아무리 보아도 예수님의 마음속에 베드로가 제일 많이 들어가 있는 게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신앙 고백도 예수님이 제일 좋아하셨잖아요? “천국 열쇠를 네게 주겠다.” 천국 열쇠를 주셨잖아요?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열두 제자 가운데 베드로에게 영적 권위를 주셨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을 앓고 있다고 소식을 들으니까 금방 좇아 심방 가셔서 그 자리에서 고쳐주셨습니다. 아무래도 예수님이 베드로를 제일 훌륭한 리더로 인정하신 것 같습니다. 상식적 판단을 해봐도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를 디베랴 바닷가에서 1대1로 만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십니다. 마치 이 말은 “나는 너 없이 못산다.”와 같은 이런 심각한 질문을 두 사람이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 중에 베드로와 안드레가 형제이고 야고보와 요한이 형제라서 지금 이 열두 사도 공동체는 벌써 은연중에 계파 정치가 생긴 겁니다. 이 두 계파가 신경 썼던 것은 매우 중요한 주님의 특별한 일에 예수님께서 이 사람들만 부르셨습니다. 변화산 신비의 사건 때 보십시오. 높은 산에 올라가서 수백 년 전에 하늘나라에 간 엘리야와 모세가 예수님과 이야기하는 장면을 육안의 눈으로 보는 신비 사건에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 초대 되었잖아요? 세 사람 밖에 못 보았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회생시키셨을 때 회당장은 유대 사회의 큰 권세 가문입니다. 그 권세 가문의 집에 가서 죽어있는 딸을 살리는 것은 그 사회에서 큰 영광 받을 일로 취급이 되는데 그 자리에도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들어가셨습니다. 마지막 겟세마네 마지막 기도 모임 때는 주님이 최고 고통스러운 시간인데 그 고통의 시간에 위로의 대상으로 세 사람인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아마 다른 제자들이 질투할 만큼 편애가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은 보이지 않는 라이벌이 형성되어 있어서 어머니가 나서서 예수님께 그런 부탁까지 한 것입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신경전을 벌이고 급기야 그것이 표면화 되어서 계파 양성인 내분을 일으킬 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들은 지금 이방인의 집권자들처럼 권세를 부리고 사람을 임의로 주관하고 싶어서 그러느냐?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으니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라.” 이런 말씀을 하신 겁니다.
베드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지금까지 훌륭한 위치를 지켜오다가 사순절 기간에 추악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수차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나는 고난을 받게 되고 죽임을 당할 것이다.” 베드로는 의미조차 모릅니다. 예수님의 진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베드로가 정말 그 십자가 사건이 닥쳐오니까 준비가 안 된 모습으로 혼비백산하여 흩어지고 만 겁니다. “너희가 다 나를 버리고 도망가고 말 것이다.” 그때에 제자들은 말했습니다. “죽을지언정 그런 일은 하지 않겠나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까지 자신이 차지했던 열 두 사도 중에서의 훌륭한 위치를 사순절 기간에 가장 멋지게 영적 권위를 나타낼 수 있는 기회가 왔으나 그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사순절 기간을 가장 비겁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모든 일에 전면에 나타났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얼굴 감추기에 몰입하게 됩니다. 참 이상한 일이 벌어졌는데 3년 동안 예수님의 평소 사역에 전면에 나타났던 예수님의 열 두 사도들은 정말 도와야 할 때가 되니까 없어져 버리고 지금까지 잘 나타나지 아니하던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니고데모,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 앞에 나타났는데 그때 제자들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몰약을 100근이나 가지고 와서 세마포로 싸서 아주 신중하게 예수님의 장례식을 다 치렀는데 그와 같은 일은 당연히 열 두 사도가 나타나서 해야 되는데 한명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보이지 않던 제자들이 어려운 일을 다 치렀습니다. 열두 사도는 지금까지 예수의 영광스러운 사역만 좋아했다는 겁니다. 그때마다 전면에 나섰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보십시오. 현대 21세기 과학으로도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질병들을 예수님이 현장 치료해 주니까 사람이 수천 명씩 몰려왔습니다. 그때 그 앞에서 교통정리를 하고 “다음은 네 차례! 다음은 네 차례!” 예수님을 만나는 순번을 정하던 사람들이 제자들입니다. 사람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청을 합니다. “제발 예수님 좀 오늘 만나게 해주세요.” 너무 바쁘시니까 함부로 만나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것이 너무나 자랑스러웠습니다. 오병이어 떡을 나눠줄 때는 얼마나 권위가 있었습니까? 그야말로 어깨에 힘을 주고 당당했습니다. 예루살렘 올라갈 때는 예루살렘 시민이 다 몰려나와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호산나”를 부를 때 예수님 곁에서 어깨를 펴고 예수님을 호위하며 가는 제자들은 얼마나 영광스러웠겠습니까? 세상이 뒤집히는 듯 했습니다.
그렇게 전면에 영광스럽고 자랑스럽게 나타나던 열 두 사도는 예수님의 수난이 오니까 없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꼬리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을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여기서 “비로소”라는 말은 “처음”이라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일종의 폭탄선언을 듣고 충격을 받기 시작하는데 이 사건에도 충동적 베드로가 제일 먼저 반응을 했습니다. 22절에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여기서 “항변”이라는 말은 “항의”라는 말입니다. “그러시면 안 됩니다. 절대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이 항변 속에는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고난이 걱정이 된 것입니다. “만약 지금 말씀하신 그대로 주님이 죽으신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나 같은 사람은 이제 온 나라 사람들에게 얼굴이 팔렸습니다. 예수의 수제자 명함이 얼굴에 붙었습니다.” 영광에 정 반대 선언을 하시는 예수님이 미워졌습니다. 그래서 항변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어떤 답변을 했습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개인적으로 예수님에게 마귀, 사탄이라고 책망 들은 사람은 가룟 유다와 베드로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주님의 제자로 열심히 사는데 만약 예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1대1 시선을 마주치면서 “사탄아! 물러가라!” 하신다면 여러분은 기분이 어떠시겠어요? 아마 그 말은 예수 믿는 사람이 가장 듣기 싫은 치욕적 책망이 될 것입니다.
이때부터 베드로는 마음에 부담이 왔습니다.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나는 사탄인가?’ 그리고 심상치 않게 다가오는 어떤 분위기가 느낌을 주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그때부터 차츰차츰 예수와 거리를 두는 마음을 가지다가 오늘 말씀에 와서는 급기야 최고의 소극적 자세가 되어 버리고 예수님과 마침내 절교를 선언했습니다.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여기 여종은 남의 집 심부름 정도 하는 노예 신분의 보잘 것 없는 소녀를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베드로가 당시 얼마나 얼굴이 많이 알려져 있었는가 증명이 됩니다. 누구나 알아보는 얼굴이 되어 버렸습니다. 여기서도 확실히 나타나는 지방색이 있습니다.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유다 사람이 아니잖아? 갈릴리에서 혁명 같은 것을 조직한 것이다.” 베드로가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영어 성경 쓰는 사람은 “I don't know. What are you talking about?” 이 말은 관용어가 되어서 영어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은 아주 자주 씁니다. “영문을 모르는 말을 내게 하도다.”라는 뜻입니다. 이때 베드로는 예수와의 관계를 “나는 그 사람과 영문도 모르는 관계다.” 절교해 버렸습니다. 그 다음 구절을 보면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또 말을 합니다. “이 사람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틀림없다.” ‘나사렛’을 강조하잖아요? “너는 유대 사람이 아니잖아? 나사렛 일당이지?” 참 유명해 지기는 했습니다. 존재도 없는 여종들에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알려진 얼굴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사역의 표면에 나섰기 때문에 알려진 겁니다. 베드로는 이제 당황해서 갈 길을 잃어버립니다.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그런데 세 번째 사건이 또 터집니다.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여기서 “도당”이라는 표현은 개역개정 성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개역한글 성경에는 그냥 “당”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정치적 색깔 표현입니다. “너는 예수를 앞세우는 갈릴리 정당의 대변인이잖아? 왜 유대에 와서 딴소리를 하는 거냐?” 베드로는 이제 어쩔 줄 모르게 됐습니다. ‘아! 죽어야 되는구나.’ “네 말소리는 너희들이 쓰는 갈릴리 지방의 전형적 악센트가 있는 지방 사투리를 계속 쓰고 있으면서 왜 유대 사람인척 하는 거야?” 큰일 났습니다. 그래서 저주까지 했다고 합니다.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이것이 베드로의 사순절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통곡의 사순절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단 한 가지 여기서 가룟 유다와 베드로의 차이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성격적으로 충동적이라서 회개도 빨랐습니다. 베드로는 닭소리를 듣자마자 금방 통곡할 수 있었기 때문에 회복의 가능성이 생겼고 가룟 유다는 자존심을 버리고 자리를 뛰쳐나감으로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새벽기도 때 이 설교를 한번 했는데 제가 노회장을 볼 때가 있었습니다. 어떤 교회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목사님은 “나 이 교회를 탈퇴하겠다.” 막 말렸습니다. “뭘 그것 가지고 기분 나쁘게 생각하느냐?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이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지.” “아니다. 잘 먹고 잘 사시오.” 우리는 가서 말리고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결국 나가버렸습니다. 그리고 한 1년이나 되었을까요? 다시 들어오겠다는 겁니다. 받아주겠습니까? 저도 화가 나 있는데다가 위원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얼마나 말리고 얼마나 권유했습니까? 이제 와서 또 들어오겠다니! 그 사람 절대 받아주어서는 안됩니다.” 막 여기에 대해서 토론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누구도 안받아줄 분위기였는데 흑인 할머니 위원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 분이 일어나셔서 딱 한마디 하는 것을 누구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주었습니다. “하나님은 탕자도 받아주셨습니다. 목사가 다시 들어와서 목회 잘 하겠다는데 목사가 목사를 안받아주면 누구를 받아줍니까?” 아무 소리도 못하고 받아주었습니다. 가룟 유다도 십자가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일지라도 주님을 찾아와서 회개했다면 주님은 넉넉히 받아주셨을 것이 확실한 증거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도 말 한마디 듣고 예수님이 용서하고 낙원으로 데리고 가셨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까지 가룟 유다는 안 나타났습니다.
베드로 사순절에 가장 큰 교훈은 무엇인가? 이것입니다. 주님을 향해 약속하는 베드로의 모습과 자신이 약속한 것을 지켜내지 못한 베드로! 예수님이 수난을 예고할 때마다 베드로가 제일 먼저 나서서 약속 선언을 했습니다. 그 말씀 기록을 보면 “베드로가 먼저 말하고 다른 제자들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말이 무엇입니까? “나는 주와 같이 죽을지언정 주를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아마 베드로의 약속은 정말 주님의 마음에 최고의 보람과 기쁨을 주는 제자의 결단 선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백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 성경에 서원이라는 단어를 많이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하는 모든 약속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8장에 “야곱이 돌기둥을 세우고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과 약속하는 겁니다. 민수기 21장에 민족 서원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서원하여 가로되 우리 민족은 이렇게 하겠나이다.” 그래서 나실인의 서원을 하는 사람, 제물 서원하는 사람, 온갖 종류의 서원 신앙 문화가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서원은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 야곱의 서원을 보세요. 하나님은 지키시는데 야곱은 안 지킵니다. “내가 가는 이 길에서 하나님이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십시오.” “그래라. 너는 뭐하겠니?” 서원은 상대적으로 하는 겁니다. “나도 하나님을 위해서 십일조를 하고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겠나이다.” 그런데 야곱은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 보면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야곱에게 풍부하게 지켜졌는지 야곱이 먹을 것, 입을 것을 위해서 기도하더니 엄청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해서 서원을 안 지키더니 다 간 곳이 없어지고 먹을 것조차 없어져서 야곱의 대식구가 애굽에 식량 구하러 가게 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모두 기억하는 삼손은 나실인의 서원을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천하무적의 힘을 그에게 주셨잖아요? 그가 그 약속을 지켜내지 못했을 때 그 힘은 순식간에 없어집니다. 저도 하나님과 서원한 사람입니다. “내 생명과 건강을 지켜주시는 시간까지 내 인생의 마지막 부분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 땅에 전하겠습니다. 틀림없이 서원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지켜왔고 지켜가는 날을 하나님이 지금까지 도와주시고 만약 내가 그 서원을 스스로 파약하고 이 길을 떠날 때는 하나님도 나를 떠나실 겁니다. 그래서 저는 대통령 같은 것은 시켜주지도 않겠지만 하라고 그래도 안합니다. 하나님과 서원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통곡이 뭡니까? 자신이 약속한 것을 자신이 파기한 인격 파멸의 심리적 고통을 이기지 못해서 우는 겁니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어? 이게 뭐야? 왜 내가 주님을 저주해야 돼? 어떡하지?’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서원은 절대 함부로 하지 마시고 서원한 것이 잘못 되었다고 생각될 때는 상담을 하시고 절대 충분한 서원을 했다면 지키셔야 합니다. 사순절은 주님과 나의 관계성을 새롭게 하는 기간입니다. ‘내가 서원을 파약하고 사는 것은 없는가?’ 사실 우리가 인정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앙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환경의 변화를 따라 퇴색하여 간다는 것을 인정을 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시면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주님이 하신 말씀 “네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느니라.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본래 나와의 모습이 그게 아니지 않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유명한 유머 작가 루크호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약 열두 사도가 지금 21세기까지 살아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어느 날 마가의 다락방에 기도회를 하니까 모이라고 했는데 그때는 120명이 모였는데 열두 명 밖에 안모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 어디 갔느냐? 왜 안 왔느냐?” “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닷가 제일 경치 좋은 곳에 별장을 사서 가족과 함께 주말여행 중입니다.” “그랬구나. 안드레는 어디 갔느냐?” “안드레는 어제 늦게까지 파티에 참석하고 와서 지금까지 자고 있습니다.” “그렇게 됐구나. 마태는 어떻게 됐느냐?” “네, 출세했습니다. 국세청장이 되어서 세금 감사가 너무 바빠서 기도회에 못 왔습니다.” “그랬구나. 그러면 요한은 뭐하느냐?” “네, 수능시험 공부하느라고 도서관에 갔습니다.” “야고보는?” “오늘 골프 토너먼트 때문에 못 왔습니다.” “가룟 유다는 어떻게 됐느냐?” “공금 횡령죄로 검찰에 불려갔습니다.” 변질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오셨다가 다음에 오겠다고 메시지만 남기고 가셨답니다. 사순절이 뭡니까? 내 신앙의 점검 기간입니다. “나는 지금 주님과의 관계성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내 생활 우선순위를 어디다 두고 내가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는가?” 그것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모습을 보고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사순절에 영적 승리가 이루어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신중치 못함에서 오는 영적침체
시 51:11-3 마 26:69-75 / 이정익목사
오늘 사람들은 너무 야무집니다. 손해 보려고 하질 않습니다. 아주 이기적입니다. 오늘 아이들도 좋은 것 싫은 것을 분명하게 표현합니다. 반대로 너무 느슨한 분도 있습니다. 너무 허술하고 실수를 연발하기도 합니다. 베드로는 복음전파 사역에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 사람입니다.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우리 모습과 흡사한 점이 있습니다. 너무 허술하고 무지하고 실수를 연발합니다. 이 베드로가 어느 날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이 천지개벽을 하게 됩니다. 사람의 운명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어부입니다. 평생 고기 잡아 먹고 살아갈 사람입니다. 무명인이었고 어촌의 가난뱅이였고 무지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예수를 따라나섭니다. 대단한 결단입니다. 무지했지만 자질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따라 나섬으로 그의 운명과 인생과 삶이 바뀝니다. 성경은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책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상당부분을 베드로의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열정의 사람
베드로는 열정의 사람이었습니다. 마태복음16장16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보느냐?”는 물음에 베드로가 주저함 없이 “주는 그리스도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대답합니다. 아주 정확한 정곡을 찌르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이 흡족해 하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이는 네가 한 대답이 아니고 성령이 주신 대답이다“이라고 하십니다. 그 말은 정곡을 찌르는 표현이고 고백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마태복음26장33절을 보면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습니다!”하고 다짐합니다. 거침없는 고백입니다. 고기 잡는데도 열정적이었습니다. 밤새워 그물을 던집니다. 고기가 한 마리도 잡히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물을 던져 보다가 잡히지 않으면 자리를 옮겨 봅니다. 잡히지 않으면 쉽게 포기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계속 던졌습니다. 그 모습을 예수님이 보셨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내심으로 “저런 사람이라면 되겠다.”하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저함 없이 베드로를 부르신 것입니다. 베드로 뿐 아니고 그의 곁에 함께 있던 동료들까지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저런 사람 곁에 있는 동료들이라면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내 주변에 누가 있는가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좋은 사람이 내 곁에 있으면 나도 그 사람의 정신을 닮고 생각이 좋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나도 모르게 그 생각을 닮아가게 됩니다.
베드로의 모습은 범상치 않은 모습입니다. 비록 오늘 배우지 못하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고기 잡는 모습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숨겨진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범상치 않은 의지력을 보셨습니다. 고기가 잡히지 않는데도 밤새워 그물을 던지는 것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이 열정이 필요합니다. 특히 예수의 제자의 삶에는 이 열정이 절대적입니다. 목회자들 중에 성공한 목회자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이 열정입니다. 그래서 승리한 것이고 성공한 것입니다. 그런 목회자들은 대부분 한 우물을 팝니다. 소명이 확실합니다. 내가 왜 이 길에 들어섰는지 태도가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성공한 것입니다. 목회에 실패한 분들에게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목회지를 자주 옮겨 다닙니다. 그리고 이 방법 저 방법 손을 대 봅니다. 소명이 불확실하고 열정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실패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좀 무지하고 경솔하고 다혈질적이었지만 결단력과 열정이 있었습니다. 사역자에게는 이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 겸손까지 있으면 금상첨화 입니다. 그 결과 베드로는 사역하다가 수제자 반열에 오르고 천국 열쇠까지 받고 마지막에는 십자가를 지고 순교까지 하는 성공한 제자가 됩니다.
실패 거듭
그랬던 베드로가 실패를 합니다. 한두 번이 아니고 여러 번 어이없게 실수를 합니다. 예수께서 “이제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리라”고 하셨을 때 베드로는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책망하십니다. 여기 베드로의 말은 맞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이제 죽어야 하겠다고 하셨을 때 누군들 “죽으셔야지요.” 하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여기 이 베드로 대답은 지금 상황이 그렇게 대답할 상황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상황분석이 안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가장 큰 사명은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수제자로서 그 뜻과 사명을 인식했어야 합니다. 조용히 십자가를 지는 일에 보이지 않게 준비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생각 없이 “결코 그럴 수 없다” 하고 대답하니까 사탄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께서 가는 길을 막는 존재입니다. 베드로는 순식간에 방해자가 된 것입니다. 생각이 짧아서 그렇습니다. 또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십니다. 예수님은 내일 아침이면 잡히고 재판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합니다. 그 밤이 얼마나 심각한 밤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피땀 흘리며 기도하시며 “나를 위해 기도하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제자들을 깨워 함께 기도하도록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지금 이 시각 상황에 대해서 인식을 하지 못합니다. 지금이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선생님이 어떤 상황에 빠져 있는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과 잠을 자고 있습니다. 수제자는 다른 제자들과 위치가 다르고 생각이 달라야 합니다. 예수께서 깨어있으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지만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뜻을 모르니까 잠을 자게 된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 예수님이 체포됩니다. 그때 다혈질인 베드로의 눈에서 불이 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차고 있던 장검을 빼들고 내리쳤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위협 상황이 아닙니다. 실제 상황입니다. 대제사장의 종이 재빨리 피하는 바람에 귀 조각만 잘렸습니다. 그가 피하지 않았으면 정수리부터 아래로 몸이 두 쪽 났을 것입니다. 그 상황은 칼을 쓰면 안 되는 상황입니다. 지금 로마 군인들이 떼로 몰려와 있습니다. 그 행동을 보시고 예수님은 베드로를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칼을 도로 집에 쫒으라, 칼을 쓰면 칼로 망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야바 집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사형언도를 받습니다. 사람들이 침 뱉고 때리고 조롱(마 26:57-68) 합니다. 그 모습을 베드로가 멀찍이 서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때 한 여종이 와서 “너도 한패가 아니냐?”고 묻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네가 무슨 말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26:70)고 대답합니다. 두 번째 사람이 “이 사람은 예수와 함께 있었던 자”라고 말합니다. 그때 베드로는 “나는 맹세코 모른다.”(26:72)고 대답합니다. 세 번째 사람들이 “너도 한패다, 네 말이 이를 증명한다.”고 말하자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기를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26:74)고 대답합니다. 얼마 전에 “다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습니다.”하고 맹세했던 말이 무색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신앙과 중심이 사정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아주 허망하게 허물어졌습니다. 순교를 다짐했던 베드로는 그의 신앙 중심이 무너지는데 총이 필요 없었습니다. 어린 소녀 말 한마디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베드로의 어제의 용맹이나 다짐 그리고 맹세와 호언장담은 간곳없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졌습니다. 그러고 나서 베드로는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통곡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되돌리기에는 너무 나가버린 자신을 발견하고 통탄했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 때 베드로의 모습을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다”(26:75) 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가룟 유다보다는 낫습니다. 가룟 유다는 통곡도 못해 보았습니다. 모른다고 맹세도 못했습니다. 잘못됨을 발견하고 곧 바로 나가 통곡이라도 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유다는 잘못된 것을 깨닫자마자 나가서 목매서 자살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이 자살이 큰 문제입니다. 근래 보면 건듯하면 자살합니다. 매일 42.6명 즉 인구 10만 명당 33.5명이 자살한다고 합니다. 자살자 중에는 비율로 보면 충청도 사람이 가장 많다고 합니다. 누가 충청도 사람들이 행동이 느리다고 말했습니까. 자살은 불행한 일입니다. 유다는 잘못을 뉘우친 것은 잘한 일이고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자살한 것은 무책임이고 책임 회피입니다. 잘못 했으면 죽지 말고 책임을 지고 감수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베드로는 유다 보다는 낫습니다. 베드로는 그 후 늘 책임지듯 살아갑니다. 사역의
충성으로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깊은 영적 침체에 빠짐
그런 베드로가 자신을 살펴보니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여인들 볼 낫도 없습니다. 할 말이 없습니다. 여기서부터 베드로는 긴 어둠의 밤을 헤매게 됩니다. 영적 침체로 빠집니다. 자괴감에 빠졌을 것입니다. 자신의 용렬함을 무한히도 채찍질 했을 것입니다. 여인들은 말없이 눈물로 예수의 고난의 길 따랐습니다. 십자가에서 고난 받는 모습을 지켜보며 눈물만 흘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무덤에 묻힐 때 절망하였습니다. 주일 부활의 아침에 여인들은 제일 먼저 무덤으로 달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기쁘게 뛰어다니며 예수의 부활을 알렸습니다. 그 여인들이 그렇게 감격의 발걸음으로 뛰어다닐 때 베드로는 한 일이 없습니다. 함께 기뻐할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뒷자리에서 침묵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모습으로 베드로는 갈릴리로 내려갑니다. 다시 고기를 잡습니다. 한마디 말이 없습니다. 속은 까맣게 타 들어가고 있습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깊은 영적 침체에 빠져버렸습니다. 죄송하고 부끄럽고 허망하고 무능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동안 큰소리 친 것이 부끄럽습니다. 수제자가 아니었으면 덜 할 것인데 말은 수제자였고 평소 큰소리를 쳤던 베드로인데 다른 제자들 다 온전한데 혼자 대표적으로 실패하고 넘어졌습니다. 어쩌자고 예수님 면전에서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그러자 말씀하신 대로 닭이 울었습니다. 베드로의 머릿속에는 온통 그 닭 울음소리만 들렸습니다. 신나지가 않습니다. 창피스러움뿐입니다. 이것이 지금 베드로가 처한 영적 침체의 상황입니다.
이 영적 침체가 어디에서 왔습니까. 그것은 베드로의 신중치 못함에서 왔습니다. 야곱의 영적 침체는 이기심과 욕심 때문에 왔다면 베드로는 신중치 못함과 사려 깊지 못함에서 왔습니다. 늘 덤벙댔습니다. 너무 말이 앞서 나갔습니다. 생각 없이 행동하고 혈기를 막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체포될 때 칼부터 빼 들었습니다. 여자 아이의 말 한마디에 생각도 없이 맹세하며 저주하며 나는 모른다고 말하였습니다. 피땀 흘려 기도하시던 주님의 입장을 모르고 수제자이면서도 함께 잠을 잤습니다.
오늘도 사람들이 시험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 대부분 신중치 못해서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에 신중치 못하여 시험이 들고 관계가 악화되고 불화가 일어납니다. 사업도 신중하게 판단하지 못해서 실패를 거듭합니다. 진로결정도 배우자 선택도 너무 감정이나 조건에 집착하다가 실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주 넘어지는 사람도 신중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들의 무릎을 보면 성한 아이가 없습니다. 아이들은 신중하지 못해서 자주 넘어지고 다치는 것입니다. 고수익을 준다고 하면 정신을 잃고 돈을 꿔다가 투자를 합니다. 그러니까 실수하고 실패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실수는 신중치 못해서 만들어진 경우들입니다.
회복
그러나 베드로는 결국 회복합니다. 베드로의 회복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리로 찾아오심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코가 쑥 바진 베드로에게 주님은 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 말은 “내가 아직도 너를 버리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 말은 “내가 다시 네 고백을 듣고 싶다”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 “네가 정말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그 말은 “내가 다시 너를 신뢰하고 사명을 부여하고 싶다”는 말씀입니다. 그 물음에 베드로가 억지로 대답할 수 있습니까. 진지하게 대답하였을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베드로의 새로운 각오를 들으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는 따르라”(요 21:19)고 명하십니다. 다시 따라나선 베드로는 다시는 시행착오 없이 사역을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무너졌다가 다시 회복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최고 경영자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성공한 경영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12명으로 시작하여 오늘 세계인구 절반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보아도 예수님은 분명 성공한 지도자이십니다. 그중에는 목숨을 걸고 예수 따르는 제자들이 있고 죽음을 불사하는 헌신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렇게 성공하신 내용에는 한 가지 더 중요한 덕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실패한 사람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실패자들을 다시 불러 사용하시고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면 다시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불러 다시 일을 맡기셨습니다. 도마를 다시 불러 일을 맡기셨습니다. 가룟 유다도 죽지 않았더라면 다시 불러 일을 맡기셨을 것입니다. 그랬으면 유다도 회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책임하게 자살해서 죽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자살이 교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때 “내가 어떻게 하다 보니 눈이 어두워서 배반을 했습니다.”하고 뉘우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랬으면 주님은 가룟 유다에게도 다시 신임하시고 세우셔서 일을 맡기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베드로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그러면 여기 베드로는 누구입니까. 여기 베드로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여러분들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넘어질 수 있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여러 번 더 무너질 수 있습니다. 다만 그때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무너졌으나 넘어졌으나 실패하였으나 또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이 무너진 것을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무너지고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 그것이 잘못이고 그것이 교만입니다. 우리는 자칫 무너지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넘어지지 않으면 좋겠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너지지 않는 것이겠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너졌으나 또 일어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무너진 나를 받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앞에서 더 뻔뻔스러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뻔뻔스런 나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좋아하시는 모습입니다. 좀처럼 실수를 하지 않으나 대신 교만한 것 보다 때로 역부족으로 실수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또 일어나서 “주님 또 넘어졌습니다.”하고 눈물로 다가오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베드로는 신중하지 못해서 실패를 거듭하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때마다 눈물로 참회하고 자신을 수정해 나갔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다시 기회를 주셨고 그 베드로는 마침내 모든 사도들 보다 훌륭하게 사역을 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