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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갠 하늘은 언제나 푸르다
< 4 > 해를 사랑한 남자 ♡ 설렘
정오가 한참 지난 오후. 사무실 안으로 여름 햇살이 한가득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한쪽 벽이 온통 유리로 되어있어 탁 트인 곳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서류 몇 개만 달랑 놓여 있는 책상 위는 깔끔했다. 머리는 파일을 향해 있었지만 남자는 연신 흘깃거리며 컴퓨터의 시계로 눈을 돌렸다. 답답하게 조여 맨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더니 급기야 파일을 덮었다. 문자 왔음을 알리는 진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괜히 시간을 때우려고 자리에 앉아 있는 건 낭비라고 생각됐다. 차라리 나중에 야근하자. 결정을 내리고 남자는 바로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핸드폰을 열어 잠시 무언가를 확인한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반대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부장님 저 오늘 일찍 들어가 보겠습니다.”
딱 부러진 단호한 말이 들려오자, 사무실 가장 안쪽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던 이부장이 얼굴을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표정에는 의아함이 서려있었다. 회의 시간이나 점심시간이 아니면 하루 종일 책상 앞에만 붙어 있었고 또한 근무시간은 철저하게 지켜온 남자였기에 그의 말이 갑작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요즘 새로 기획하고 있는 일 때문에 한창 바쁠 때였다.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죄송합니다. 오늘 일찍 간만큼 내일 야근하겠습니다.”
평소 느긋한 성격과는 반대로 초조한 듯 시계를 바라보고 있자 혹시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것이 아닌가 걱정이 들어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니, 그걸 묻는 게 아니지 않아. 집에 일이라도 생겼나?”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자세한 연유는 나중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개인적인 일이지만 저한테는 아주 중요한 일이라….”
안심하는 한편, 또 다른 한편으로는 딱 잘라 말하는 남자가 못마땅했다. 다른 사원들 같았으면 벌써 어디가 아프다, 누가 돌아가셨다 없는 핑계 만들어 대느라 바빴을 텐데 고지식하게 개인적인 일이라 대답하는 남자였다. 때론 젊은 친구가 답답하다 생각 될 때도 있었지만 그보단 지난 6개월간 행동으로 그를 신뢰할 만한 인재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선뜻 허락이 나온 건 그래서였다. 급한 일은 대충 마무리 된 터였다.
“알겠네. 급한 일은 넘겼으니까 일찍 들어가 봐. 어차피 요즘 계속 야근 했으니까.”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들어 가 보겠습니다.”
꾸벅 인사하며 돌아서는 남자는 요즘 보기 흔치않은 예의바른 젊은이였다. 이부장은 다시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 꽤 큰 기업체에 부장이란 직함을 달고 있다는 건 그만큼 노력과 실력이 뒷받침 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 정도 인정 할 만큼 남자는 자기관리에 있어선 철저한 남자였다. 그런 남자의 흔들리는 모습이 어쩐지 흥미롭다고, 지나가듯 생각한 이부장의 얼굴에 미소가 잠시 떠올랐다.
잔뜩 굳어있던 남자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자리로 돌아오자 마음이 급해졌다. 넉넉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져서 지금은 마치 터지기 직전의 폭탄 같았다. 빨리… 만나야 했다. 가까이 있었지만 바빠서 만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가방을 챙기는 손길이 급해졌다. 그런 마음속과는 반대로 남자는 한 치의 흔들림이 없이 느긋해 보였다.
“개인적인 중요한 일이 뭘까? 근무시간에는 혼자 살아남겠다고 커피 마실 시간도 없이 일만 하는 놈이 지금 일이 손에 안 잡힌다, 라. 혹시 여자문제냐?”
정대리가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걸어왔다. 한 손에는 커피를 들고 씨익 웃고 있는 대학동기가 지금은 전혀 반갑지 않았다. 부장님에게 하는 소리를 듣고 호기심에 온 모양이었다. 집요하게 추궁하듯 남자를 바라보던 정대리의 입이 떡 벌어졌다. 곧 피식 웃으며 설마, 라는 듯 남자를 흘겨보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침묵을 긍정으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헉! 진짜냐?”
“…그래. 그러니까 방해하지 마.”
어차피 알게 될 일이기에 말했다. 놀란 듯 입을 떡 벌리고 있는 정대리를 지나쳐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지혁… 아니, 김대리!”
궁금한 건 못 참는 친구가 불러댔지만 지혁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나중에 술 한 번 사면 되겠지, 라고 잠시 생각했다. 곧 머릿속에 약속이 떠오르자 발걸음이 빨라졌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에서 내렸다. 실내를 벗어나자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와이셔츠에 메어있는 넥타이를 벗어버리자 답답함이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초조해 하는 자신을 보며 지혁은 웃음을 터트렸다. 더위를 가시게 만드는 청량한 웃음이었다. 지금까지 어떻게 기다려 왔을까, 싶었다. 몇 시간 뒤면 드디어 만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자 평소 느긋한 성격이 조금 돌아오는 듯 했다. 하지만 차로 향하는 걸음은 조금도 느려지지 못했다.
이십 여분쯤 와서 차가 멈추어 섰다. 지혁은 재빨리 시동을 끄고 밖으로 나왔다. 태양빛이 얼굴로 향하자 잠시 눈을 감았다. 덥긴 했지만 차가운 에어컨 바람보다 때론 뜨겁더라도 따스한 태양빛이 좋았다. 진지하고 눈이 부셔서 누군가를 생각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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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끝자락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린 바람에 학생들의 웃옷을 여미게 만들던 날씨가 느닷없이 뜨거운 여름 날씨로 바뀌었다. 날이 더워서인지 새 학교에 적응기간을 마쳐서 인지 봄날의 설렘은 사라지고 알 수 없는 활기만 가득했다. 수업에 집중하는 아이들은 별로 없었다. 아이들 다수가 책상에 엎드려 늘어져 있거나 몰래 친구들과 속닥이기 바빴다. 쉬는 시간이 되자 기다렸다는 듯 교실에는 왁자지껄 분주함이 넘쳤다. 복도를 뛰어다니는 아이를 피하며 교실로 들어가던 정연에게 한 아이가 말을 건넸다.
“저기.”
“네?”
남자애는 정연을 불러놓고 말이 없었다. 가만히 정연의 얼굴을 바라보다 느닷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다지 잘생긴 편은 아니었지만 딱히 흠 잡을 데 없는 얼굴이었다. 게다가 웃는 모습이 너무 밝아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나쁜 사람은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그런 인상이었다. 교복 단추 한 개를 푼, 약간 고지식해 보이는 남자애는 웃음을 멈추고 영문을 몰라 하는 정연에게 미안, 이라고 말했다. 잠시 교실 안쪽을 살피다가 말을 꺼냈다.
“지애 좀 불러주라.”
“아, 네.”
지애 친구인가? 아님 선배? 자신을 보며 웃던 남자애의 모습이 의아해, 고개를 갸웃 거리며 자리로 갔다. 수업시작하자마자 잠들어서 소란스러울 텐데도 아직까지 자고 있는 지애를 깨웠다. 어깨를 몇 번 흔들고 이름을 여러 차례 부르고 나서야 눈을 비비며 고개를 들었다. 아쉬운 한숨이 나오더니, 게슴츠레한 눈을 정연에게 향한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무리 너라도 날 깨운 이유가 싱거운 이유라면 한 대 맞아야 할 거야.”
정연은 다시 책상에 엎드리려고 하는 지애를 보고 가볍게 웃었다.
“누가 너 좀 불러 달래.”
“대체 누가.”
정연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그건 정연이 대답해 줄 수 없는 거였다. 말없이 정연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뒷문에 서 있는 남자애를 발견한 지애는 인상을 찌푸렸다. 벌떡 일어나 씩씩 거리며 뒷문으로 향했다.
“뭐야! 왜?”
지애를 보자 지혁이 생글거렸다. 하루걸러 하루는 꼭 보는 얼굴이기에 지애는 별로 반갑지 않았다. 한참 달게 자고 있던 터였다. 꿈을 자주 꾸지 않는 자신이 모처럼 만에 꿈을 꾸는 중이었다. 갑작스레 깨어버린 탓에 내용은 다 잊어버렸지만 오랜만에 느껴보는 좋은 기분이었다. 그런 느낌이 사라져 버린 게 아쉬워 지애의 목소리는 좋지 못했다. 아니, 사실은 지혁을 대하는 지애의 말투는 대부분 이랬다. 사소한 일로도 늘 지혁에게 툴툴대는 지애였다.
“자고 있었냐?”
“아! 왜 왔냐고!”
“침이나 닦지?”
“…재미없거든?”
입으로 손을 향했던 지애는 입가에 침이 없자 지혁을 노려보았다. 어렸을 적부터 같은 동네에 살고 부모들이 친하다는 이유로 벌써 십년을 붙어 다닌 사이였다. 지혁은 지애에 관해서 모르는 것이 없었다. 가끔 친절하게 챙겨주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골려먹기 일쑤였다. 지애는 분한 마음에 노려보았다. 지혁의 주먹이 머리에 와 닿자 아프지는 않았지만 억울한 마음에 성질을 냈다.
“뭐야!”
“잊어 버렸지?”
“뭘?”
“교과서를 빌려갔으면 갖다 줘야 할 거 아냐.”
“아, 책!”
지애는 자리로 쿵쿵 거리며 달려가 책을 가져왔다. 대체로 책을 사물함에 놓고 다녔기에, 시험기간에 윤리 책을 집에 가져간 걸 잊어버리고 그냥 왔던 것이다. 때마침 지혁이네 반에도 윤리가 들어서 교과서를 빌렸었다. 자느라 미처 갖다 주지 못한 것보다 갑자기 맞은 게 억울해진 지애는 지혁의 손바닥에 세게 책을 놓았다.
“됐지?”
평소라면 짜증 섞인 말이 나왔어야 정상인데 지혁은 그저 피식 웃고 말았다. 쌍꺼풀은 없었지만 작지 않은 두 눈이 교실을 향해 있었다. 지혁의 시선을 따라 지애도 교실 안쪽을 바라보았다. 선풍기가 돌아갈 때마다 정연의 긴 생머리가 살짝살짝 흩날렸다. 지애는 자신도 모르게 재호를 보고 있었다. 재호가 정연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기 때문에 재호의 얼굴이 보였다. 재호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나와 있지 않았다. 대화를 나누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는 듯 했다. 못 박힌 듯 꼼짝 않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지애의 귓가에 지혁의 말이 들려왔다.
“쟤냐?”
“뭐가?”
“네 이상형.”
지애의 심장이 느닷없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마른 침을 소리 나게 삼켰다. 당황한 지애는 크게 웃었다.
“파하하. 무슨 소리야.”
지애가 폭소를 터트리자 지혁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책으로 지애의 머리를 가볍게 내리치더니 말했다.
“바보야, 그만 웃어라. 난 간다.”
지혁은 뒤돌아 머리위로 책을 든 손을 흔들었다. 지애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항상 동그랗게 떠 있던 지애의 눈동자가 가라앉아 있었다. 좀처럼 보기 힘든 어두운 얼굴이었다.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상형이라….”
지혁의 말에 지애는 꽤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았다. 지애의 까만 눈동자가 재호를 향했다. 그때,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이 아프셔서 수학 수업이 자습으로 바뀌었다. 소곤거리며 이야기하거나, 자습을 하거나, 엎드려 잠을 자는 아이들. 다들 모처럼 찾아 온 휴식을 느긋하게 즐기고 있었다. 지애는 수업시작 종이 울리자마자 자리에 눕더니 자습시간이 끝나가도록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정연은 고개를 돌려 반대편 책상을 보았다.
‘우연일까?’
정연은 잠든 재호의 날카로운 콧날을 보며 버스정류장에서 만나 함께 학교로 왔던 일을 떠올렸다. 처음 만났을 땐 그저 놀랍고 반갑기만 했었지만 우연한 만남이 일주일이나 계속되자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한 동네에서 살아 마주치기 쉽다지만 왜 그 이전엔 마주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기다려 준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정연은 곧 그런 생각을 지웠다. 그렇다고 보기에 재호는 정연을 보아도 별다른 기색이 없었다. 그저 인사를 하고 아무 말 없이 버스를 타고 학교로 올 뿐이었다.
일주일 전 지애와 버스에서 재호를 만났던 날, 재호는 정연이 어디 사는지 알고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랬다. 그땐 너무 당황스러웠기에 미처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었다. 지애가 알려 주었을까, 아님…, 머릿속은 이런저런 생각들로 복잡해서 정연은 재호의 얼굴을 넋을 놓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정지 화면처럼 엎드려 자고 있는 모습은 흔들림이 없었다. 화면이 흔들린 건 순간이었다. 재호의 짧은 속눈썹이 움찔거렸다. 놀란 정연은 시선을 재빨리 창 밖 하늘로 옮기며 한숨을 들이켰다. 재호가 바라보는 것이 느껴지자 온 몸이 긴장으로 잔뜩 굳어 눈을 깜빡이지도 못했다. 때마침 종소리가 울리지 않았다면 쳐다보고 있었다는 걸 들켰을지도 몰랐다. 재호는 정연을 잠시 쳐다보는가 싶더니 교실을 빠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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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주인공 네명 다 등장이네요. ㅎㅎ
다들 추석명절 잘 지내셨죠? 긴 연휴 후의 지치는 월요일이지만 힘내서 한 주 시작하자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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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nks to
민초은님 추석 잘 보내셨죠? ^^ 저는 시골 내려갔다 왔답니다! 부족한 글인데 댓글로 격려해주셔서 항상 감격해 한답니다. 읽고 또 읽고^^ 늘 힘이 되요. 감사합니다!! ♡
밤비아가천사님 재호 덕분에 님을 만나게 됐는데, 제가 그 분 이미지를 깨는 게 아닌가하고 살짝 걱정되네요. 재밌다고 해주셔서 늘 감사해요! ㅠㅠ ♡
첫댓글 흐억!!!! 시험때문에 한동안못들어왔더니 글이 많이나왔네요 와! 새로운인물이 등장했네요 지혁이?? 뭔가 멋있을것같은 느낌이.,.,
저도 개인적인 핑계로 한동안 못들어 왔더니 달나무님의 예쁜 소설이 많이 나와서 오늘도 재밌게 읽고 갑니다 늦어서 죄송~내용도 알차고 너무 정성스러워요 제가 아는 재호는 엄마와 핏줄은 안섞였지만 친한 이모 가족과 가까운 오빠에요 그래서 색다르고 재밌는데요 원래 제 주변 사람 이름들 비슷하면 못읽는편인데 지혁이 재호 정연 세사람의 관계도 흥미롭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