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생각> [백성호의 예수뎐]
일간지 종교 담당 기자로 일하면서
많은 수도자를 만났습니다.
개신교의 영성가도 있었고,
가톨릭의 수도원에서 예수를 찾아가는 수사도 있었고,
전문 성직자는 아니지만 아주 깊은 눈을 가진
재야의 고수도 여럿 만났습니다.
저는 그들과의 인터뷰 말미에
종종 이런 물음을 던졌습니다.
“성경에서 가슴에 꽂고 사는
딱 한 구절은 무엇입니까?”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을 합하면
그야말로 방대한 분량입니다.
사람들이 저마다의 구절을 꼽으면
각자 다른 대목이 나오지 않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적지 않은 사람이
하나의 구절을 꼽았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공통 분모’였습니다.
그 구절이 뭐냐고요?
다름 아닌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다.”
저는 이 구절을 안고서 묵상에 잠겼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는 문이 있었습니다.
그건 그리스도와 내가 하나가 되는 문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그 문의 문고리를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아주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서술돼 있습니다.
그게 뭐냐고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의 대속(代贖)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세상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그로 인해 예수 믿는 이들의 죄도 함께 사해졌다.
예수께서 그 죄를 대신 갚았기 때문이다.”
그걸로 모든 일이 마무리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저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참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예수의 십자가’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만 있고 ‘우리의 십자가’는
보이질 않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멀찍이 떨어져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바라만 볼 따름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야말로
그리스도의 영성,
그 심장을 여는 문고리가 아닐까요.
그 문을 열려면
일단 문고리부터 잡아야하지 않을까요.
다들 하나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과 하나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기를 열망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는
나와 그리스도가 하나가 되는
구체적인 방법론이 서술돼 있습니다.
그 첫 구절이,
그 첫걸음이 이렇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예수 그리스도만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아니라,
나도 함께 못 박히는 일입니다.
예수만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도 역시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일입니다.
예수만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도 역시 ‘나의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영성,
그 심장을 여는 문고리가 아닐까요.
일단 그 문고리를 잡고,
그 문을 통과한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말할 수 있겠지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다.”
그러니 예수님만 문고리를 잡아서는
곤란하지 않을까요.
우리도 각자의 십자가,
저마다의 문고리를 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거기에 문이 있고,
거기에 길이 있으니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길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져라.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서
나를 따라오라.
그러지 않는 사람은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요.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문고리도 잡을 수 없고,
그 문을 열 수도 없게 됩니다.
그 문을 열지 못하면
그 길을 걸을 수도 없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다시 한 번 묵상해보면 어떨까요.
그 속에 담겨 있는
문고리와 문,
그 문을 열고난 뒤에 나타나는 길.
그 속으로 발을 떼보면 어떨까요.
[백성호의 예수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