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모종을 심고
어미순이 5~6개 정도 나왔을 때 마지막 끝순을 잘라낸다
아들순이 나오면 3개 정도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잘라낸다
아들 순에 잎이 자라나고 잎이 12개 전에 열매가 열리면 따내고
그 이후에 열린 수박을 잘 기른다. 한 줄기에 2개 정도가 적당.
수박이 맺히기까지 그의 수고는 수박을 기르는 위 방법을
읽어보는 것 만으로도 알 수 있다.
얼마만한 세심한 관심을 가지고 수박밭 고랑이 맨질맨질해지도록
들락거렸을까. 얼마나 많은 눈맞춤을 했을까.
수박이 맺히기 무섭게 내게 사진을 찍어 보낸 것으로도 증명이 된다.
수박은 하루가 다르게 커져갔다. 그의 수박에 대한 신명나고
과장된 자랑질을 통해서 쑥쑥 수박 크는 소리가 종자골에서
이곳 위례까지 들려왔다.
아이를 기르는 어미와 같은 그의 거짓말도 수박이 자라는 속도에 비례했다.
수박이 내 주먹만해 세수대야만해 의자만해 어제보다 열배는 큰거 같아
못 들고 갈 것 같아 트럭 한 대 빌려야겠어
말로는 부족했던지 어느날 앉을뱅이 의자와 바구니와 비교한
수박 사진이 날아왔다. 의자를 오른쪽으로 놓고 한 장,
의자를 왼쪽에 세워놓고 한 장, 비스듬하게 눕혀서 한 장,
수박의 크기를 증명해보이려는 노력이 얼마나 가상한가.
나는 일주일에 한번씩 종자골에 들르고는 하는데,
이번에는 다짜고짜 수박밭으로 나를 이끌더니 수박에 대한
브리핑?을 하겠단다.브리핑이라! 참으로 거창하다.
후후 나는 비웃음인지 헛웃음인지 흘리는데 그는 자못 의미심장하다.
긴 장대를 들고는 여기 이 수박은 맺힌지 얼마 안되었고
저 수박은 처음 맺힌거라 저렇게 크고 앞으로 얼마나 클지 알 수 없단다
수박덩굴속을 헤집더니 숨어있던 동그란 수박을 보여주며 이건 모양이
재래수박을 닮아 옛날 수박맛이 날거란다. 기대해도 좋단다.
크기가 다른 열댓개의 수박을 장대로 척척 찾아내며 장황하게 그러나
소상하게 설명하였겠다. 초등학교 시절 예리했던 담임선생님 같다.
장동덕은 어떻고 박찬미는 어떻고 이진주는 어떻고 이상숙은 어떻고.
수박을 따는 시기는 수박이 열린 뒤 30~45일. 또는 수박꽃이 개화한지
50여일. 수박꼭지가 안쪽으로 들어가있고 배꼽이 작으며 두드렸을 때
맑은 소리가 나야한다.
이 정도의 상식으로 봤을 때 7월 20일경이 적격이라고 분명 며칠전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7월 12일 새벽, 일어나자마자 수박밭부터 돌던 그가 흥분한 얼굴로
방으로 들어왔다.
수박이 제법 크고 맑은 소리가 나서 수박 한 개 땄지
너무 푹 익으면 오히려 무르고 맛이 없잖아 제 때 먹어야지
수박이 많이 달렸는에 얼른 먹어야지
식탁 위에 올려진 수박은 제법 컸다. 마트에서 얼마전에 사다먹은
수박만큼 내 손으로 두 뼘이 넘는다. 빛깔이나 무늬도 그만하면 손색이 없다.
분명 익은 수박의 모습인데 그의 말처럼 요즘 젊은것들처럼 갸름하고
미끈하게 잘생긴 것도 맞는데. 달콤한 붉은 속살을 지녔을까?
날짜로 봐서는 제대로 익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버릴 수 없었던,
그러면서도 얼마나 잘 익었을까 라는 기대감을 부풀릴만큼 부풀렸던
다음날 더는 참을 수 없어, 위대한 의식을 치르듯 꽤나 진지한 태도로
식탁위에 쟁반과 도마와 칼을 준비해놓고 김치 냉장고에서 조심스럽게
수박을 꺼내 경건하게 올려놓았다. 기도를 해도 어울릴 분위기였다.
잘 익은 수박을 저희에게 주소서!
의구심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수박을 자르는 동안 그와 나를 둘러싼
공기에 긴장감이 감돌았다.우리는 둘 다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더구나 잘 익은 수박을 자를때처럼 쉬이 잘라지지
않아 손에 힘을 더하는 동안 우리에게 안개처럼 밀려오던 불안감을
어찌 지우랴. 불길한 결과에 대한 예고를 어찌 막으랴.
수박이 두 쪽으로 갈리고
2초정도.그와 나와 거실 전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럴수는 없다는 실망의 물결에 잠겨가는 그와
이러면 안된다는 비통한 슬픔에 일그러져가는 내가 서 있었다.
가만히 잘린 수박을 들여다본다. 고운 분홍빛 속살이 촉촉하게 젖어있고
햐얀 씨는 밤하늘에 별들이 박힌 것처럼 반짝인다.
아침 이슬에 피어난 분홍꽃 같기도 하다. 가까이 코를 대보면 맑은 단맛이
도는 순수한 향기가 난다. 잘 익은 수박에서는 절대로 맡아지지
않는 분홍빛 볼을 가진 아가의 향기다. '향기' 라는 책의 주인공 그루누이가
이 향기를 맡았다면 당장에 향수로 만들어 세상에 내놓아 귀족들의 환심을
샀을 것이다.
한 입 먹어보니 가벼운 단맛이지만 물기가 많고 부드러운 속살이다.
아이들도 먹을만하다고 위로의 말을 아끼지 않는데
그래도 그렇지 아깝고 아깝다. 며칠만 기다렸으면 최고의 수박을 딸 수
있었을터인데.
아이구 첫물인데 얼마나 애지중지 했는데 아이구 며칠만 기다릴걸
아이구 아까워라 아이구 속상해라 아이구 이건 아닌데
수박 자랑을 지나치게 일삼던 그에게 소나기로 핀잔을 퍼붓던
심술쟁이 내게서 오히려 탄식의 소리 드높은데,
자나깨나 수박 자랑을 늘어놓던 그는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