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일을 맞이하여 그는 네 번째 여행을 계획하였다.
그는 아직 자신의 체력이 탄탄하다고 주장하지만
나는 나이도 나이려니와 체력이 한 해 한 해 무참히 떨어지고 있는 것은 기정 사실.
종자골이 아닌 다른 곳을 구경해보자는 아내의 희망 사항을 더 늦기 전에
착실하게 실천해나가는 그가 있으니 나는 살 맛 나는 세상으로 발 디딘 셈.
이번에는 효자였던 정조의 행로를 따라가보기로 하였다
화성 행궁을 거쳐 용주사와 융릉 건릉을 구경하고 천안에서 1박
화수목 아름다운 정원을 구경하기로 하였다.
산과 들이 온통 연두빛에서 초록빛에 이르는 다양한 빛깔을 띠는 것은 물론이고
거기에 빛이 비춰드는 각도와 방향에 따라 또 다른 빛깔들을 황홀하게 연출하고 있으니
아! 아! 아!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내 입에서 감탄사가 비누방울처럼 날아올랐다.
아무리 훌륭한 화가라 해도 내가 바라보는 지금 봄의 붓질을 감히 어찌 따라잡으랴.
화성 행궁.
효자였던 정조가 부왕 사도세자의 능침인 화산능을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 행궁에서 쉬어갔다.
일제강점기때 거의 다 훼손 되었는데 1996년 복원공사를 하였다.
임금이 행차하시니 그 식솔이 얼마나 많았을까. 겹겹이 방이다. 방을 구경하는데 끝이 없다.
봉수당은 모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베푼 곳이다. 70종의 음식과 42개의 상화를 올렸단다.
정조대왕의 처소는 정조가 신하를 접견하고 쉬던 장소인데 ‘주부자시의도’ 병풍은 유명하다.
단원 김홍도가 정조를 위해 주자의 시를 그림으로 그려 진상한 것으로 정조는 이를
극찬하여 항상 곁에 두고 보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환관, 나인, 상궁등 식솔들이 기거하던
방들이 겹겹으로 둘러싸여있다.
용주사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움.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어 용주사라 이름 붙임.
융릉 건릉
융릉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무덤 건릉은 정조와 효의왕후의 무덤
수원에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봄이나 가을이면 용주사나 융릉으로 소풍을 가고는 했다.
자취를 했으니 제대로 된 김밥을 들고 가기는 어려웠다. 어느 해에는 주인집 아주머니, 내 친구 혜옥의 어머니가 김밥을 싸 주신 적도 있다.
눈물이 날만큼 감사했다. 맛있는 소풍이었다. 정조의 발자취를 따라가보자는 의도로 시작된 여행이지만 내 내면의 밑바닥으로 내려가보면
중고등학교때의 흐린 기억을 하나쯤 꺼내보겠다는 심리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한심하게도 별다른 기억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때로부터 48년이 흘러갔다. 건릉과 융릉 앞에서야 아! 바로 저거는 생각나네 정도.
건릉과 융릉을 감싸고 있는 나즈막한 산, 숲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데, 봄날이라서인가.
참으로 아름다운 숲이다. 나무들은 역사의 시간만큼 자라있고 잡목들을 베어내어 적당한
공간을 만들어놓아 햇살이 눈부시게 비춰들고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고 나를 스쳐갔다.
그 숲길을 걷고 있는 동안 나는 숲속 푸르른 나무가 되어 너울거렸다.
그를 바라보았다. 그도 나무였다. 그의 손을 잡았다. 뭉클해졌다.
다시 오지 않을 이 찬란한 시간!
융릉 건릉 앞에 음식점이 있는데 사람들이 줄을 서서 들어간다. 맛있다는 증거다.
이름인즉슨 ‘한국인의 밥상’ 우리도 줄을 섰다.
나물 짱아찌 등 밑반찬만 12개. 채반에 얌전하게 담겨져 나왔다.
잡곡밥이 일품. 찰밥처럼 촉촉하고 차지고 부드러웠다.
생선조림 잡채 된장찌개 두부조림 전은 뜨끈뜨끈하게 나오고 물김치까지 등장
음식마다 청량고추맛이 들어있다. 나는 좀 맵다. 그가 참 맛있게 먹는다. 나도 냠냠!
숙소에 들러 푹 쉰 다음 저녁을 먹으러 천안에서 유명하다는 병천순대국집을 찾아갔다.
기사님들이 이용하신다는데, 그렇다면 맛은 보장된 셈인데, 기대와는 달리 맛이 별로다.
양평에서 우리가 즐겨먹는 순댓국과 달리 느끼하고 텁텁하고 밍밍하다.
웬만하면 맜있다 라고 말하는 그가 아무 말이 없다. 잘 먹었습니다. 라는 인사말도
예의상 해야지 마음 먹었으나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집으로 오는 길에
천안호두과자 전문점에서 산 호두과자는 고소하고 달달하고 부드러웠다.
이른 아침, 화수목 아름다운 정원에 들렀다. 너무 일러서인가. 우리가 첫 손님이다.
각종 빛깔의 튜울립 행렬이 우리를 맞이한다. 야트막하지도 않은 경사가 심한 산을
개간해서 정원을 꾸몄다. 다양한 꽃들은 물론이고 나무들도 참으로 다양하다.
전문가의 손길이 머문 흔적이 역력한 나무들은 하나하나 개성이 있고 아름답다.
특히 단풍나무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말았는데, 그랬다. 어렸을 때 도화지에
피라미드처럼 아래로 퍼진 둥근 모양 나무를 그리고 아래쪽에 나무 기둥을
굵고 짧게 그려 넣고는 하던 바로 그 나무다. 주인의 솜씨가 남다르다.
화수목, 처음에는 웬 요일이름을? 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바보! 였던 내가
아름다운 정원을 구경하다보니 花 水 木을 알아채게 된다. 멋진 폭포도 있다.
딸아이가 결혼을 하게 되면 이곳으로 데려오고 싶어진다. 웨딩 촬영을 이곳에서 하면
얼마나 아름답고 우아한 시간들이 남겨질 것인가.
봄날의 여행은 사실 어쩌구저쩌구 미사여구가 필요 없다. 봄날 그 자체이니까
어른거리는 봄빛들 때문에 여행을 다녀온 후에도 나는 봄날로 어른거리며 살고 있다.
그가 고맙고 참 좋다. 꽃처럼 활활 타오를 때만 사랑인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