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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 세상의 연필과 손 글씨
조 환 규
(지은이 조환규는 지금 부산대학교 전산과 부교수로 재직중이다. 과학사, 과학 철학에 관심이 많으며, 과학 대중화에 힘쓰는 출판모임 “과학 세대”에 몸담고 있다.)
끊임없이 끔뻑이는 “커서”는 쉬지 않고 그 앞에서 뭔가를 반드시 하라고 지시한다. 또한 워드 프로세서에서 글은 언제나 쉽게 고칠 수 있으므로 그 글이 주체적이지 못하다. 여기 문단을 잘라서 저리 붙이고 말을 글 중간에 새로 집어넣거나 쉽게 고칠 수 있는 것은 지난 기구의 능력에 비해서 장점이긴 하지만 그 덕택에 글은 힘이 없다.
이제도 그 연필을 구할 수 있을까? 낙타표 문화 연필, 그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연필, 진노랑색 칠 위로 낙타 한 마리가 우두커니 서 있는 그 연필은 나에게 세상을 열어 준 맨 처음 창문이다 초등학교 이학년 때이던가, 삼학년 때이던가는 정확하게 기억되지 않지만 어머님이 손수 깎아서 필통에 채워 넣어 주시던 낙타표 문화 연필은 그대의 최고 문방용품이었다.
그 향나무 연필이 나오기 전에 투박스런 나무로 만든 백두산 연필이라는 것을 쓴 기억이 난다. 하여간 그 시절에 없는 살림에 향나무 연필을 한 다스씩 사기란 보통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낙타표 연필이 한 다스 새로 생기는 날의 기분은 다른 일에 비할 수도 없이 좋았지만 그 한 다스에는 또한 “공부”라는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부모님의 엄중한 기대도 함께 묻어 있었다. 연필을 고이 안아 들고서 동네 골목길을 걸어올 때에는 즐거움과 엄숙함이 겹쳤다. 연필 깎는 칼이 흔치 않은 시절이어서 아버지께서 사용하시고 남겨 둔,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면도날이 사용되었다. 어머님은 그 중앙에 구멍이 세 개 뚫린 날을 반으로 접어서 꺾은 뒤에 조심스럽게 그 반 쪽 날로서 연필을 조심스럽게 다듬으셨다. 사각사각 소리를 내면서 조금씩 잘려나가 향나무는 방바닥에 떨어지고 어느덧 검은 연필심이 나타났다.
나는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연신 침을 삼켰다. 한 번 깎아 보고도 싶었지만 부러진 면도날은 늘 범접하기 어려운 권위이기도 했으며 또한 그것으로 어머님만큼이나 고르고 예쁘게 다듬을 자신이 없었다.
낙타표 문화 연필의 매력
마지막 작업으로 연필심을 뾰족하게 고르는 일은 어땠나? 먼저 허드레 종이를 펴고 연필을 세운 다음에 조심스러이 흑연심을 쓸어냈다. 조심할 것은 나무의 기울기와 심이 깎여진 기울기가 고르게 되도록 한다는 것과 깎는 도중에 연필심이 부러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 뾰족함이 너무 지나쳐서 살갗을 찌르게 해서도 안 되며, 이와는 반대로 너무 무디게 다듬어서 처음에 쓸 때부터 너무 무덤덤한 기분이 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잘 갈려진 연필로 첫 글자를 쓸 때의 그 맑은 소리와, 연필심을 종이를 부드럽게 긁는 기분은 조심스런 연필 작업의 고생을 충분히 보충해 주었다. 그리고 입으로 불어가면서 마지막 다듬기를 할 때에는 그 깎여진 흑연 가루가 방바닥에 퍼지지 않도록 세심한 조심을 해야 했다. 더구나 앞뒤가 막힌 구석에서 불면 흑연이 콧등에 내려앉기 십상이었다.
가지런히 다듬어져서 도열한 연필은 다시금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그들이 마지막으로 투박스런 나무필갑 속으로 들어가서 그 위 뚜껑이 “딱!”하고 닫히면 모든 의식은 끝이 난다.
이 전체 작업이 매우 순조롭다면 다음 날은 필시 좋은 일이 있을 듯했으나, 작업 도중에 조금이라도 헛된 망상이나 경망스러움이 스며든다면 연필에는 대개 그 경망스러움의 정도가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만일 도중에 길다란 심을 두 번, 세 번 부러뜨릴 때에는 필시 밖에서 무르팍 깨어질 일일 도사리고 있으므로 언행을 조심스레 해야 할 것이었다. 초등학교 육학년이 될 무렵에는 연필 깎는 일에도 기계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아마 일제 자동 연필깎이라고 기억이 되는데, 한 번씩 있는 집 아이들이 그 어른 주먹만한 기계를 학교에 가지고 와서 묘기를 보일 때면 아이들은 부러움으로 마른 입술을 다셨다. 그러나 나에게만은 그 기계가 연필을 참혹하게 도살하는 잔인한 도구로 보였다. 사람들은 먼저 연필을 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깎는 도중에 연필이 버둥대며 움직이지 못하도록 보조 조임새로 단단히 조였다. 연필은 완전히 기계에 꽁꽁 묶여 있으므로 손잡이만 돌리면 삑삑거리는 기계 소리와 함께 조금씩 안쪽으로 밀려들어가면서 껍질이 벗겨졌다.
칼로 다듬는 일은 연필을 위한다는 느낌을 주지만 기계를 사용할 때에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나는 여태까지 자동 연필깎이를 사본 적이 없다. 단정하게 손으로 다듬어진 연필이 기계로 깎여져 미끈둥한 모습보다 언제나 아름답고 인간적이다. 이렇듯이 잘 다듬어진 연필은 나에게 단순한 필기구가 주는 것보다 더한 심리적 안정감을 전해 준다.
휴식을 빼앗긴 글 쓰기
평생의 삼분의 일을 잠으로 보냄은 우리의 삶에서 휴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 주고 있다. 일하는 것과 쉬는 것은 한 가지 사실의 서로 다른 표현이다. 잘 쉬어야만 일을 잘 할 수 있으며, 그 반대로 잘 쉬려면 열심히 일해야 한다. 아름다운 모차르트 교향곡도 몇 악장으로 잘 나누어져 우리의 귀를 쉬게 한다. 학교 수업에는 반드시 십분 동안의 휴식이 있다.
연필의 미덕은 글 쓰기에서 우리를 적당한 간격으로 쉬게 하는 데에 있다. 굳이 연필이 아니더라도 전통 필기 도구를 사용하는 글 쓰기가 워드 프로세서와 다른 것은 그 쉼의 단계가 기구 내부에 있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연필을 사용하면 반드시 그 중간, 중간에 한 악장의 글이 끝날 때마다 연필심을 고르려고 글에서 한발 물러날 수 있어 좋다. 또는 생각이 잘 나지 않을 때면 고르는 일을 핑계로 삼아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 종이를 앞에 두고 손가락으로 연필을 돌리는 일도 마땅히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때의 휴식이 된다. 그리고 연필로는 그림과 글을 마음대로 어느 곳에라도 그려 넣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연필로 속절없이 종이에 낙서하는 일은 글 쓰기의 최고 휴식이다.
이에 비해서 워드는 낙서가 불가능하며 그림과 글이 확연히 구별되어 있으며 우리를 심리적으로 압박한다. 워드에서는 종이를 넘길 필요가 없으며 팔꿈치나 어깨를 움직일 필요도 거의 없다. 쉼없이 오로지 손가락만을 이용하여 자판을 두드린다. 생각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해서 이런, 저런 글쇠를 툭툭 칠 수도 없으며 심심하다고 해서 마우스를 휘돌릴 수도 없다. 오로지 화면만을 응시하며 생각이 날 때까지 “동작 그만”이다. 그리고 언제나 맞춤법에 올바른 글을 쳐 넣어야 하는데 이런 것은 나에게도 늘 강박적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컴퓨터에서 물러 나와 밖으로 간다고 해도 이것은 연필을 종이 위에 내려 두고 복도로 나가는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내 방에선 살아 있는 워드 프로세서가 입맛을 쩍쩍 다시면서 나의 글을 계속해서 기다린다. 가령 잊어버리고 컴퓨터를 끄지 않고 집에 갔을 때에, 집안에서 느끼는 그 원인 모를 불안감은 글 쓰기의 주체가 누구인지 헷갈리게 한다. 컴퓨터를 켜두고 그 앞에서 상념에 잠겨 있기는 쉽지 않다. 끊임없이 끔뻑이는 “커서”는 쉬지 않고 그 앞에서 뭔가를 반드시 하라고 지시한다. 또한 워드 프로세서에서 글은 언제나 쉽게 고칠 수 있으므로 그 글이 주체적이지 못하다. 여기 문단을 잘라서 저리 붙이고 말을 글 중간에 새로 집어넣거나 쉽게 고칠 수 있는 것은 지난 기구의 능력에 비해서 장점이긴 하지만 그 덕택에 글은 힘이 없다.
뾰족할 때와 뭉툭할 때
창호지에 일필휘지를 하던 시절에는, 글이란 한 번 종이 위에 그려지면 그만이었다. 그것을 지우기란 거의 불가능하고, 그러한 일에 글은 반항을 한다. 또는 지난 행동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 시절의 사람들에게 글 쓰기란 단순히 기호를 프린팅 하는 작업이 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글 쓰기 한 번만 에도 사려 깊은 준비가 필요하다. 붓으로라면 먹을 천천히 갈면서 호흡을 고르며 마음을 안정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 글의 내용뿐만이 아니라 그 글씨 자체가 다른 것을 보여 주므로 늘 조심해야 한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결코 글을 다스릴 수가 없는 시대에 글 쓰기는 좋은 훈련장이 되었다. 이미 원시 동굴 벽화에도 나타나 있듯이 사람이 손으로 무언가를 그리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다.
그러나 아이들이 컴퓨터에서 마우스를 이용하여 굵은 선과 가는 선을 그려내는 것은 우리의 원시 조상에게서 대대로 내려온 그리기의 즐거움을 빼앗기는 것이다. 굵은 크레파스로 그릴 때의 손가락에 와 닿는 느낌과 뾰족한 것으로 그릴 때의 느낌은 확연히 다른 것이고, 거친 표면에서 전해지는 손맛과 매끈한 표면으로부터 느껴지는 연필과 손의 진동은 다른 것인데, 오늘의 워드 프로세서는 이러한 차이를 모두 마우스의 수평적인 움직임 하나로 규격화시켜 버렸다. 따라서 아이들에게 편리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워드로 그림을 그리게 하고 그것을 칼라 프린터로 찍게 하는 것은 손동작으로부터 두뇌의 반사 과정이 형성되는 시기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훈련받은 아이들은 결코 세밀한 손동작이 요구되는 외과 의사나 디자이너는 결코 되지 못할 것이며 무딘 손의 외과 의사가 만들어져도 안 될 것이다.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고 이미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서 실시한 연구의 결과에서 속속 발표되고 있는 사항들이다. 아이들에게는 뭐라고 해도 커다란 벽에 마음대로 떠들면서 크레용으로 “칠갑”을 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오락이 된다.
이제는 워도 프로세서 덕택에 모두 같은, 그야말로 똑 같은 글씨체를 가지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덕택에 필자와 같은 악필이 구원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나의 악필을 간혹 그리워하여 그 이전의 철없는 편지를 꺼내 읽고, 나 또한 그 사람들이 갈겨 쓴 글에서 위로를 얻으니 이 또한 사람이 기계와 다른 점이다.
연필로 쓴 글은 모두 서로 다르며 이 세상에서 늘 유일한 진본이 된다. 비록 종이 복사를 한다 해도 그 진본과 카피의 차이를 분별치 못할 바보는 없다. 그러나 컴퓨터 파일에는 진본이 존재할 수 없다. 공공일일공일일과 공공일일공일일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이야기는 글씨에도 통하는 좋은 법칙이기 때문에 자필 이력서의 효용이 계속된다. 좋은 손 글씨체를 가진 사람은 좋은 목소리나 맑은 얼굴을 가진 것만큼이나 매력 있는 일이다. “사랑하는 순옥 씨”라는 편지 글씨에는 그 의미와 더불어 그 글씨가 보여 주는 힘참, 삐침과 그리고 단호하게 내려찍은 마침표가 있어 “순옥”씨는 자기를 향한 “동수”씨에게서 진실에 대한 감동을 받는다. 이 때문에 그 많은 선비들이 올곧은 자신만의 글씨체를 만들려고 평생을 연마하기도 하였다. 우리에게도 글 쓰기는 부단한 인내와 자기 단련이 필요한 중요한 문화의 형태로 남겨져야 할 것이다.
컴퓨터가 영구적이라는 착각
연필을 이용한 글 쓰기 문화가 잘 남겨져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훨씬 더 현실적인 데에 있다. 우리가 영구적이라고 믿는 컴퓨터 기록 매체는 사실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오늘의 물리적 수명(물리적 성질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지속되는 기간)이 자기 테이프는 삼년쯤, 비디오 테이프는 이년쯤, 디스켓은 이보다 길어 오년쯤, 시디는 삼십 년쯤이다. 그러니까 아주 중요한 내용은 그 수명이 다하기 전에 미리미리 다른 매체로 한 번씩 옮겨 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문제는 이러한 물리적 수명이 아니라 논리적인 수명에 있다.
미국의 한 국가 부서에서는 구십 년에 아주 골치 아픈 일에 봉착했다. 그것은 육십 년대에 준비해 둔 방대한 인구 조사 컴퓨터 자료를 제대로 읽을 프로그램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전의 자료를 새롭게 사용하는 소프트웨어용으로 바꾸는 데에 드는 비용은 상당히 크다. 실감나게 이야기한다면 오십 년이 지난 뒤에 다락 한 구석에서 발견된 글 파일이나 마이크로 소프트웨어 워드용 파일을 어떻게 읽겠는가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런 문제는 다큐멘터리 자료를 대량 보관해야 할 방송국이나 공공도서관에서는 반드시 고려해야 할 사항이다.
이천 삼십 년쯤이 되면 아마 지난 자료를 읽을 수 있는 구식의 펜티엄 컴퓨터와 윈도 95 프로그램이 매우 고가로 거래될지도 모른다. 전자 매체는 기호가 다시 기호로 바뀐 것이다. 우리가 종이에 쓴 손 글씨의 “어머니”는 눈만 제대로 뜨고 있다면 읽을 수 있지만, 영과 일의 비트로 “어머니”를 표시한 영일영일 어쩌고 하는 것은 해석하기에 따라서 글자도 되고 그림도 되고 의미 없는 단순한 비트의 나열도 될 수 있다. 따라서 컴퓨터 파일은 거의 모두 기호와 그 해석법을 함께 보관하고 있는데 기호의 몇 비트가 깨어지면 약간의 손상이 가겠지만 해석을 기록해 둔 부분은 조금이라고 깨어지면 전체가 못쓰게 되므로 취급을 매우 신중히 해야 하고, 늘 파일은 그것을 읽게 할 수 있는 소프트, 하드웨어와 같이 보관해야 하므로 간단한 일이 아니다. 만일 이 순신 장군께서 난중일기를 워드로 작성하셨다면 장담컨대 그것을 우리가 해독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나폴레옹이 발견한 로제타스톤에 새긴 글씨는 이천 년이 지난 오늘도 생생히 읽을 수 있음을 볼 때에 그 단단한 돌에 힘들게 글을 새긴 공은 여태까지도 보상을 받는다.
손 글씨의 문화가 장려되어야 하는 것은 오늘의 워드로 글을 치는 문화는 대단히 독점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볼 때에도 가장 보편적인 수단이 장려되어야 한다. 기존 필기구로 쓴 글씨는 제대로 쓰기만 하면 누구나 읽을 수 있지만 워드를 사용하면 글로 작성한 글을 마이크로 소프트워드나, 훈민정음 같은 다른 시스템으로는 읽을 수 없다. 이 덕택에 우리들은 글 쓰기와 함께 그것이 어떤 프로그램으로 처리되는가 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것은 기존 필기구의 전통에는 매우 배반된 행동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상당한 돈을 들여 소프트웨어를 구입해야 하며, 한 업체가 필기구를 독점하는 사태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이를테면 기역 대학의 모든 대학생에게 니은이라는 워드를 사용하게 한다면 그것은 표준과 형식의 통일이라는 경제적 관점으로만 볼 수 없는 복잡한 정치적인 문제를 동반한다. 독점은 늘 가격 상승을 가져오며 또한 모조품을 탄생시키는데 이러한 현상은 파피루스의 생산을 독점한 삼천 년 전의 이집트에서도 이미 나타난 바 있다.
아이들에게 특히 위험천만한 선물
사람의 방식과 기계의 방식은 분명히 다르다. 최근에 인지 과학에서는 기계 기술을 사람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려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다. 옛날 방패연을 뚝딱 만들고, 고장난 자전거를 거뜬히 고치시던 아버지의 신통한 손재주와 그 권위는 사라졌다. 이제는 고장난 VTR 고치려고 대리점에 전화하는 것쯤이 아버지가 발휘할 수 있는 최고 기술이다. 오늘날은 어떤 오퍼레이터도 자기가 사용하는 기계의 전반 상황을 알지 못한다. 오로지 고장이 나면 그것을 기록할 뿐이다. 곧, 전체 작업에서 사람들은 극히 한정된 부분을 담당할 뿐이며 완성된 한 가지 노동의 즐거움은 사라졌다. 이 덕택에 대형의 사고가 오퍼레이터의 미숙함으로 발생하지만 사람들은 오퍼레이터를 “비난”하고 “재교육”시키는 것쯤밖에 생각하지 못한다.
이제 모든 기술은 더 인간의 관점에서 새로 설계되어야 한다는 것이 인지 과학자들의 생각이다. 보통 사람이 생각하고 살아가는 방식대로 기계를 그에 합치되도록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소프트웨어도 우리가 사전 지식 없이 보통 잡지책을 쉽게 펼쳐가며 읽을 수 있듯이 우리들의 습성에 맞게 쉽게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최근에는 우리나라에도 인터넷과 사이버 스페이스의 열풍이 불고 있다. 인터넷의 장점은 충분하며 그것이 우리의 생활을 크게 바꿀 것임은 분명하지만 우리는 늘 인간의 기본 구조를 인식하여 균형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너무 찬양에만 치우친 선전은 그 작은 편리함마저 잃게 한다. 외국에서는 이미 이러한 지나친 기술 문화를 반성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나쁜”해커를 잡아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착한 해커”리차드 스톨만은 사람들에게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가상 공간에서 만나지 말고 이웃들과 직접 얼굴을 마주하여 만나고 직접 토마토를 뜰에서 키어 보라고 권하고 있다.
그리고 전자 우편을 통한 편리한 정신과적 치료를 비판하는 일이 이것이 보편화되기 전에 이미 나타나고 있다. 그 요지는 전자 우편으로 주고받는 기호에는 매우 중요한 정보가 빠져 있다는 것이다. 곧 몸짓들과 같이 비언어적인 통신이 없는 상태에서 오로지 화면에 나타난 기호만 가지고 치료에 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네트워크를 통한 심리 치료는 빠르고 편하고 경제적으로도 이득을 주지만 이는 결국 좋은 치료, 곧 의사를 일대 일로 대면하고 받는 치료의 보조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전문인들은 권고하고 있다.
또한 가상 현실을 경험하려고 사용하는 기구를 두고도 아직 많은 비판들을 하고 있다. 구십 삼 년의 한 영국 육군 연구소의 연구 보고에 의하면 십 분이 넘게 가상 현실기를 이용한 사람들은 팔십 퍼센트가 넘게 오심과 어지럼증을 호소했다고 한다. 그것은 두뇌의 시각 정보와 실제적인 육체 평형 기관과의 정보 차이에서 오는 것인데, 예를 들면 화면에서는 자기 위치가 기울어졌는데 의자는 평형을 유지할 때에 두뇌는 이 다른 두 정보를 일치시키려 하고 이 때에 오심이 발생한다. 요즈음은 이를 방지하려고 의자와 기구도 같이 움직이게 하지만 그 시간 차이가 인간이 느끼는 차이와 달라서 역시 오심이 발생한다.
그 사람들의 결론은 이렇다. “보이는 것은 가짜지만 아픈 것은 진짜다.” 특히 신체의 평형 기관이 제대로 자라기 전의 어린 아이들에게 이러한 오락기를 선물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인터넷보다 더 급한 일들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문명을 만들고 새로운 계층을 만들고, 새로운 그림자를 만든다. 특히 자본주의가 가속화되면 그에 따라 그 그림자는 더욱 커지고 깊어지게 될 것이다. 그 그림자는 우리가 미래를 조금만 사려 깊게 생각한다면 충분히 피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역사는 되풀이한다. 이제 컴퓨터 때문에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재난을 준비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오늘 전철 안에서 살펴보니 인터넷이나 사이버포르노를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는데 우리에게는 인터넷보다 급한 일이 너무 많다. 아이들이 뛰놀 수 있는 운동장을 만들어야 한다. 도심 한가운데에 이십 오층씩이나 올라가는 아파트와, 도로를 주차장으로 쓰는 백화점은 시외로 당장 옮겨야 한다. 그리고 제발 교통 신호를 지키자. 사기꾼 같은 사람을 국회의원으로 뽑지 말고, 수돗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하고, 대학에서는 인문 교육을 강화시켜 진짜 대학생을 만들어야 하고, 그리고 아이들에게 평생 지니고 다닐 좋은 손 글씨 가지도록 잘 훈련시켜야 할 것이다. 균형과 조화 - 우리가 사람일 바에는 이보다 더 좋은 덕목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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