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을 담아두는 큰 가마나 독을 두멍이라 한다. 또한 깊고 먼 바다를 비유해서 두멍이라 부르기도 한다. 지금은 거의 사라져 가는 옛말이다.사라져 가는 것이 어디 두멍뿐이랴. 우리 조상들이 쓰던 옛말이나 물건들이 문명의 발전과 함께 소용없어진 것이 한둘이 아니거늘.
사라지는 것은 아쉬움을 동반한다. 그 아쉬움은 세월과 함께 잊혀지게 마련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기만이 추억하고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있는 부분이 있다. 이곳저곳을 다니다 보면 타임캡슐을 묻어놓은 곳을 발견한다. 보통 백 년 후에 볼 수 있다. 우리의 후손들이 백 년 전 우리들의 생활양식을 알 수 있으니 역사적 의미에서 타임캡슐은 충분히 그 가치가 있다.
내가 자라던 고향집 부엌에도 커다란 물두멍이 있었다. 부엌문 옆으로 두 칸으로 된 찬장이 있고, 그 옆으로 설거지하는 자배기가 놓여 있고,그리고 그 옆으로 마치 터줏대감 같은 물두멍이 놓여 있었다. 물두멍은 마르지 않는 샘처럼 항상 물이 가득했다.
어머니는 이른 새벽이면 어김없이 물동이를 이고 개울가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 두멍에 가득 채운다. 어머니의 고된 하루는 이렇게 시작된다. 고된 하루는 내가 생각하는 거고 어머니는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물을 길었을 거다. 추운 겨울에는 얼음을 깨뜨리고 물을 길었다. 어머니가 얼음을 깨뜨리고 물을 길은 자리는 금방 살얼음이 언다. 얼음을 깨뜨리고 물속을 드려다 보면 흐르는 물 위로 얼음에 매달린 고드름이 수정처럼 맑다. 고드름을 한 뚝 떼어 입속에 넣는다. 그 시원한 감촉은 추운데서 맛보는 즐거움이다. 지금은 그런 고드름 맛보기가 쉽지 않다. 아쉽다. 그 당시에는 물이 맑고 양도 많아 흐르는 물소리도 힘찼다. 지금은 물이 많지가 않아 걱정이다. 물론 개울물을 마시지도 못한다. 어렸을 적, 외국에서는 물을 사 먹는다는 말을 들었을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 당신 개울물을 마실 때였다.
물이 부족하여 흙탕물을 마시는 먼 나라의 안타까운 모습을 화면으로 접할 때면 마음이 아프다. 우리나라도 물이 예전처럼 풍부하지 않으니 앞으로 걱정이다. 고향에 가보아도 어렸을 적 힘차게 흐르던 계곡에 물이 조금 밖에 흐르지 않는다.
물은 생명이다. 그리고 물은 사랑이다. 물두멍에 물이 가득했던 것은 가족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었다. 어머니가 자랐던 외가의 부엌에도 물두멍이 있었다. 외할머니도 물두멍에 물이 마르는 일 없이 항상 가득 채웠다고 한다. 물두멍은 가족 공동체를 이어가는 생명의 젓줄이고 사랑의 끈이었다.
시골집 부엌에는 아궁이가 세 개 있었다. 제일 큰 솥은 맹물을 데워 세수도 하고 큰 대야에 물을 담아 어린 자식들 목욕을 시켰다. 그런가 하면 군불을 지펴 추위도 막을 수 있게 하였다. 명절이나 큰일이 돌아오면 이 솥에는 두부를 만들고 엿을 고았다. 엿을 고는 날이면 방바닥이 뜨거워 깨금발로 다니면서도 신이 났었다. 예나 지금이나 먹을 것을 좋아하는 나는 어머니가 만들어 주는 콩엿, 강정, 약과, 다식 등 모두 좋아하였다. 두부를 하는 날이면 두부를 판에 누르기 전 양념장을 만들고 꼭 순두부를 미리 먹는다. 이 순두부 맛도 별미 중에 별미였다.
민간신앙을 철저하게 믿었던 어머니는 부엌에는 조왕신이 산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믿음은 부엌 물두멍에 물이 떨어지는 법이 없었고, 정화수를 떠놓고 두 손을 모으고 비는 어머니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어머니의 소원은 이 땅의 어머니들이 다 그렇듯이 지극히 소박한 가족의 무병장수였다. 어머니가 열심히 믿고 따랐던 만신 중에서 별상할머니가 계셨다. 별상할머니는 머리도 하얗고 얼굴도 하얀 고운 모습의 노인이었는데, 원래는 대가댁 며느리였다. 언제부터 신을 모셨는지는 모르지만 이 댁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를 지나 안채가 있고 그 위에 별채가 있었다. 별상할머니는 거기에서 정성을 드리러 온 사람들을 맞이하였다. 어렸을 때라 나는 아무 것도 모르지만, 그 댁에서 만들었던 떡은 가끔씩 그립기도 하다. 할머니 댁 떡은 창호지를 깔고 찐다. 백설기 군데군데 붉은 팥을 넣고 만드는데 그냥 백설기보다 더 맛있다. 지금은 어머니가 교회에 나가 명예권사까지 되었으니 사람의 마음은 움직이는 모양이다. 그 때문인지 ‘사랑하다’, ‘좋아하다’의 품사도 동사(動詞)다.
어머니가 교회에 나가게 된 건 순전히 이모의 끊임없는 전도 덕분이었다.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이모는 40년이나 되는 모진 세월 속에서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고난과 시련은 믿음을 낳는다는 말이 있다. 신앙은 과학으로 설명 안 되는 부분으로 개인의 역사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체험의 문제이기에 무어라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정신이 온전할 때만 신앙도 가능하다.
가시밭 속에서도 우뚝 설 수 있다고, 당신은 불 성령을 받았다고 호언장담했던 이모는 점점 심해지는 치매를 않으면서 그토록 사모했던 하느님도 예수님도 잊어버렸다. 영어로 줄줄 외우던 사도신경도 전혀 못 외웠다. 남편도 형제도 조카들도 못 알아보았다.
모든 기억을 다 잊어버린 이모였지만, 돌아갈 때까지 잊지 않았던 것은 오직 하나 ‘엄마’ 우리 엄마였다. 말년에 이모는 다른 음식보다 고추장 비빔밥을 좋아하였다. 고추장을 사 가지고 요양병원을 찾아가면 고추장을 가슴에 꼭 껴안고 우리 엄마가 담근 고추장이라고 좋아하며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모는 유년으로 돌아가 있었다. 어린 이모는 외할머니와 함께 부엌 물두멍 앞에서 그리고 장독대에서 놀고 있었다.
어머니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던 공간은 부엌과 장독대였다. 그 옛날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랬듯이 물두멍에 물을 가득 채우고, 장독대에는 간장, 된장, 고추장을 정성스레 담그고, 여러 종류의 장아찌를 담가 가족의 건강을 보살폈다. 윤이 나게 반짝였던 장독대는 그 윤기를 잃고 퇴색된 지 오래다. 봉숭아꽃, 채송화, 분꽃이 앞 다투어 피던 장독대 주변은 잡초가 무성하다. 오래 전에 펌프가 있었던 곳은 지금은 수도 파이프가 연결되어 있다. 두멍이 놓여있던 부엌은 아궁이가 없어진지 오래다. 그래도 내 눈에는 두멍이 보인다. 외할머니의 두멍, 어머니의 두멍, 그리고 우리들의 소중한 곳간이.
(이인환 님의 수필중에서...,)